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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편지 - 성동마을 구판장 외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 농업유전자원센터 송병권 실무관과 여사님들 4235 24 MBC 라디오 매일 아침 09:0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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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편지- 성동마을 구판장 외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농업유전자원센터

송병권 실무관과 여사님들

MBC 라디오 매일 아침 09:05~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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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일 발행인 대표이사 등록번호진행 프로듀서 방송 인터넷 주소방송중 열린전화 문의 주소편집·제작 월간지

.

2013년 2월호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이달의 편지

행복을 찾는 사람들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코너 속 편지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양희은의 스튜디오에서

강석우의 스튜디오에서

행복한 책 읽기

전국 주파수 안내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마산 •춘천•청주 •제주 •울산 •강릉 •진주 •목포 •여수 •안동•원주 •충주 •삼척 •포항 •울진 •울릉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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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한복판, 영하의 날씨를 딛고 경기도 시흥시에 위치한

군서중학교를 찾았다. 긴 복도를 따라 음악 소리가 쿵작쿵작

울렸다. 음악실 문을 여는 순간, 후끈 달아오른 열기가 전해온다. 마치

순식간에 계절을 이동해 여름으로 쏙 미끄러져 들어온 느낌이다.

밴드연습에 한창인 아이들은 악기를 연주하느라 땀에 흠뻑 젖은

줄도 모른다. 드럼이 신나게 울려 퍼지며 지지대를 만들어주었다.

베이스가 기둥을 세우고 기타와 키보드가 외관을 만들어냈다. 이

렇듯 음악이 안성맞춤으로 소용돌이친다.

〈여성시대〉에 편지를 보내 군서중학교 밴드부를 소개한 천정선

양은 베이스를 맡고 있었다. ‘악기를 다루는 사람과 악기는 닮는다.’

정말 딱 들어맞는 말이다. 베이스를 맡은 천정선 양은 어느새 악기

와 닮아 있었다.

정선 양은 튀지 않지만, 밴드에서 기둥 역할을 하는 베이스처럼

나서는 거 싫어하고 사뭇 조용하고 수줍은 성격이다.

2학년 때 담임이었던 음악 담당 김수경 선생님께서 정선 양에게

“밴드부를 만들려고 하는데, 네가 밴드부에 들어왔으면 좋겠다”라

고 러브콜을 했다.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글 | 성기애 (여성시대 작가)•사진 | 송인혁

군서중학교 밴드부 천정선 양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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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자랑할 만한 밴드부원이 될 정도라면 성실성과 음악에 대

한 열정이 없으면 안 된다. 정선 양은 이 조건에 딱 들어맞은 성실

파였다.

군서중학교 밴드부가 생긴 지 벌써 2년째다. 매년 축제 때마다

다른 학교의 밴드부들이 공연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을 보고 결심

한 밴드부 만들기 운동. 음악 담당 김수경 선생님은 학교에 정식으

로 건의했다.

밴드는 김수경 선생님이 담임을 맡은 반 아이들을 위주로 구성

됐다. 아이들도 선생님도 신이 났다. 일주일에 두 번 있는 방과 후

수업시간과 토요일 오전 연습에 매진했다. 학교에서 배우고 나면

집에 가서 각자 악기를 가지고 연습을 했다.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은 친구들은 음악학원에 가서 배우기도 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고 ‘시흥시 청소년 종합예술제’에 나가 우수

상을 거머쥐었다. 이제 종종걸음을 시작한 밴드부가

예상 밖의 성과를 이루자 많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이제는 학교행사 때는 물론이고 학교 밖 행사에

도 불려 나가는 실력 있는

밴드로 쑥쑥 크는 중이다.

얼마 전에는 주변 대학교 선배들이

합주를 제의해왔다. 실력이 소문을 타고

자자하다. 요즘은 재능기부 차원으로 각 주민

센터와 지역시설에 연주하러 가기도 한다.

아이들은 밴드를 하며 음악만 배운 게 아

니다. 드럼이 치고 나오면 베이스가 깔아 주고,

그리고 키보드와 기타가 앞에 나설 때면 뒤로

빠져주는 협동과 배려를 함께 배운다.

“한 곡을 연습하려면 꼬박 석 달이 걸려요. 곡을 선정하고 연습하

는 과정에서 친구들과 많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서로 조율을 해요.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됐어요. 음악은 그저 악기를 두드려서

소리가 나는 게 아니라 서로가 마음을 합쳐 소리를 낸다는 걸요.”

천정선 양에게 밴드부는 그냥 음악만 하는 곳이 아니다. 고스란히

삶을,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을 배운 곳이란다.

중학교 3학년인 정선 양은 고

등학교에 가서도 연합동아리 형

식으로 밴드를 계속할 작정이다.

드럼과 기타를 연결해주며 마음

깊은 곳을 울리는 베이스 소리처

럼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당찬

포부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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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마을 구판장

고귀한 선물

새로운 보금자리

딸이 마련해준 개인택시

글리세린의 추억

맑은 영혼

대통령과 사위

소방관의 아내입니다

신세대 예비 시엄마

엽전반점 아저씨

자기야 울지마

선생님 나는 왕따지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시어머니의 곶감

고장 난 요구르트

노부부 겨울나기

어째,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이달의 Letter 1

“어르신 안녕하세요? 통장님도 계시네요!”

“어~ 돼지사장 왔네. 여 와서 막걸리 한잔하소.”

제가 구판장에 들어서면서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여쭙자 반기

시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성동마을 구판장은 이렇게 마을 어른들

이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막걸릿잔을 기울이는 마을 사랑방입

니다. 이름은 구판장인데 국수, 라면, 과자, 막걸리 등을 파는 작은

동네 구멍가게쯤 되는 곳이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작은 식당을 시작했습니다. 새벽 한두 시까

지 장사를 하다 보니 피곤을 못 이기고 늦잠을 자야 했고, 그 피로

가 계속 누적이 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다 건강을 챙겨야겠단 생각

으로 아침에 잠을 줄이고 운동을 하기로 결심했죠.

제가 사는 울산 중구에는 파릇파릇한 새싹들과 수줍은 진달래,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나는 이름만 들어도 예쁜 길촌마을, 풍암

이청 | 울산광역시 중구 남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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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성동마을, 주현마을을 연결한 둘레길이 있습니다.

봄부터 저의 걷기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성동마을은 제가 두 시

간 코스를 한 바퀴 도는데 중간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그 마을에

지난 4~5월에 구판장이 생겼습니다. 뭘 파는지 한번 들러 봤죠.

“수고하십니다. 와~ 제가 여길 매일 걷는데 가게가 생기니까 너

무 좋네요.”

“그래요? 자주 찾아주세요.”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이는 적당한 나이의 주인 이모는 미소를 지

으며 절 맞이해주셨습니다. 라면이 된다고 해서, 라면 하나를 시켰

습니다. 가게 앞 원탁 테이블에 파라솔이 설치되어 있어 그곳에 앉

았습니다.

파릇파릇 봄이 자라고 있는 넓은 밭, 한 뼘 정도의 키 높이로 줄

지어 심어져 있는 갓 모내기를 마친 어린 벼, 저 멀리 산 중턱에 하

얗게 만발해 있는 배꽃. 화사한 봄날 눈앞에 펼쳐진 이러한 풍경

들은 도시의 복잡함에 찌든 몸과 마음을 충분히 치유할만한 아름

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로 매일매일 지나가면서 음료수

한 잔, 국수 한 그릇, 삶은 달걀도 몇 개씩 맛보며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게 되었습니다. 주인 이모는 동네 분들이 갖다 주셨다며 오

이랑 호박 등을 종종 한 아름씩 저희 가게에서 쓰라고 챙겨주십니

다. 참 인정 많은 분이지요.

가끔 구판장에 도착할 시간에 맞춰 친구들에게 국수 먹으러 올

라오라고 전화를 합니다.

“우와 울산에 이런 동네가 있었나? 야~ 경치도 좋고, 공기도 좋

고, 정말 좋다.”

“좋은데 소개했으니까 자주 올라 온나. 더 소문내지는 말고. 사

람 많아지면 자리도 몇 개 없는데 내 앉을 자리 없어진다. 하하.”

저보다는 훨씬 못 미치긴 합니다만 요즘 친구들도 성동마을 사

랑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구판장이 문을 열고 동네 분들이 삼삼

오오 자리를 잡고 앉아 시간을 보내시고 이리저리 인사를 하게 되

면서 아는 얼굴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운동 왔는가베?”

“예. 오늘 날씨가 정말 좋네요? 모내기는 다 하셨습니까?”

“비가 안 와서 큰일이네. 논에 물 대기가 힘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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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시골에 계신 장모님께서 전화를 하셨어요.

“바쁜 줄 알지만, 잠깐 시간 내서 다녀가게나” 하시기에

무슨 일 있으시냐고 여쭤보니 “아무 일 없고, 우리 사위들 너무 보

고 싶어서 사위들 허고 아들만 오라고 했은게 좀 왔다 가게나” 하

셔서 처가로 갔습니다.

도착했을 때 처가 근처에 사는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사위까

지 다 와있고, 하나뿐인 처남까지 모여서 큰사위인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동서들과 처남과 밥 먹고 이야기 나누며 장모님이

만들어주신 맛있는 닭볶음탕과 소주 한 잔씩을 마시고 있는데, 장

모님께서 “우리 다섯 사위가 다 와줘서 참말로 고맙구먼. 다른 사

위들은 가까이 살아서 얼굴을 자주 보는데, 우리 큰사위는 멀리

살아 자주 못 보는데 이렇게 본 게 정말 좋구먼. 내가 아들, 사위

Letter 2

이석우 |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곧 비가 오겠죠. 너무 걱정 마이소.”

그렇게 구판장에 모이며 자연스럽게 안부를 묻게 되더군요. 길을

걸으면서도 ‘이 논은 모내기를 했네. 근데 저 논은 언제 모내기를

할런가?’, ‘큰일이네! 이 논엔 물이 마르고 있네. 양수기로 물을 대

면 안 되려나?’ 혼자 걱정을 하게 되고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배꽃도 떨어지고 배 열매마다 봉투로 배를 감싸고, 벼는

무릎높이만큼이나 자라고, 한여름의 태양이 작렬하는 중에 두 번

의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배가 바닥에 떨어지고 벼가 물에 잠겨 쓰

러져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내 과수원도 아니고

내 논도 아닌데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딛고 점점 벼

가 영글어 가는 걸 보면서 흐뭇하기도 해가며 어느덧 제가 농부가

된 듯 성동마을 사랑은 깊어만 갔습니다.

이제 그 붉던 감나무엔 까치밥으로 몇 개의 감만 남아 있고, 추수

를 이미 끝내고 베어낸 볏단만이 덩그러니 논둑에 쌓여 있어 겨울이

되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동네 분들은 요즘 들어 더욱 성동마을

구판장에 모여들 계십니다. 막걸리 서너 병에 어묵 몇 개, 그리고 주

인 이모가 직접 담근 김장 김치가 안주가 되어 시간을 보내시죠.

저는 주말엔 늘 반겨주시는 주인 이모와 마을 분들이 고마워 수

육 해 드시라고 돼지고기를 준비하겠다고 했습니다. 내일이면 성동

마을 구판장에서 돼지고기 파티가 열리겠죠? 각박한 세상에서 새

롭게 사귄 이웃들과 한데 모여 마음을 터놓고 나누는 웃음이 소박

한 행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비가 오네요. 걷는 것을 포기하더라도 성동마을 구판장으로 달

려가려 합니다. 겨울이지만 가을날만큼 좋은 그곳엔 정겨운 사람

들이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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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만 부른 건 딴 게 아니고, 남들처럼 남겨 줄 재산이 있는 것도 아

니고 돈도 없고 내가 줄 게 없어서 미안혀. 우리 딸들 데리고 잘 살

아줘서 참말로 고맙고, 그려서 내가 가진 거라곤 조금 있는 금덩어

리 뿐인디, 그것도 우리 딸들이 돈 모아서 해준 건디, 이젠 내가 가

지고 있으면 뭐하나 싶어서 내가 그나마 이렇게 정신이 멀쩡할 때

우리 다섯 사위허고 하나뿐인 아들한티 나눠주고 싶어서 있는 거

다 녹여서 똑같은 금반지 6개를 만들었는디, 아주 작은 것이지만 이

게 장모가 주는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허고 받아주게나” 하시면서

다섯 사위들과 처남한테 일일이 금반지를 끼워주셨습니다.

순간 다섯 사위와 처남은 모두 놀라 할 말을 잊었습니다. 가슴이

뭉클하고 울컥해서 그냥 장모님께서 하시는 대로 가만히 앉아서 지

켜봤습니다. 그리고 나서 장모님께서는 “나 죽거든 묘도 쓰지 말고

화장해서 우리집 가까운 강에 뿌려주고, 내 장례비는 내가 따로 마

련해 놨은게 걱정 말고 우리 아들허고 상의혀서 자네들이 수고 좀

해줘” 하시더군요.

장인어른 돌아가시고 장모님 혼자서 농사일 다하시고 처남 처제

들 결혼도 시키시고 누구보다 강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봅니

다. 맘도 많이 약해지고 건강도 좀 안 좋아지시니까 혹시라도 건강

이 더 나빠지실까 봐 마음의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거였습니다.

끝내 사위들 앞에선 눈물을 보이진 않으셨지만, 장모님 마음속

으론 울고 계신 걸 느낄 수 있었어요. 그 모습을 보고 저도 울컥해

서 눈물이 나올 뻔 했지만 꾹 참고 “장모님! 장모님이 주시는 아주

귀한 선물이니, 저희들 염치없지만 받을게요. 그리고 우리 사위들

장모님한테 더 잘 해드릴 테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지내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장모님도 “우리 사위들, 내 작은 성의

를 받아줘서 고맙네. 근디 다른 땐 몰라도 명절 때 우리집에 날 보

러 올 땐 그 반지 좀 꼭 끼고 왔으면 허는디?” 하시더군요. 우리 다

섯 사위들 하고 처남은 그렇게 하겠다고 장모님과 약속을 했습니

다. 다가오는 명절엔 우리 장모님이 주신 귀한 반지 제 손가락에 꼭

끼고 찾아뵙겠습니다.

“장모님! 저희들 곁에 오래오래 계셔주세요.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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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 3

노상호 | 서울특별시 강동구 성내동

‘비비비비빅, 비비비비빅’ 휴대폰 무음벨 소리에 화면을 보

면 ‘○○캐피탈’, ‘XX대부’ 안내전화 아니면 ‘기일이 되었

으니 입금 바랍니다’ 하는 내용들입니다. 일하는 도중 계속되는 시

달림에 일도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수입은 있는데 계속되는 채무

가 저의 발목을 붙잡고 수렁 속으로 끌어내립니다.

저는 한번 뒤돌아 점검해보았습니다. 상가를 분양받고 2억 3천

만 원을 대출 받았으며, 집 장만으로 1억 2천만 원, 사업자금으로

캐피탈이나 저축은행에 7천만 원 정도의 빚이 있었습니다. 원금과

이자를 동시에 상환하는 관계로 매달 적자여서 또 빚을 내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상가와 집, 사업장이

있어서 세금과 의료보험도 만만치 않은 상황입니다. 상가나 집의

매도도 어려운 실정입니다. 저를 믿고 결혼한 예쁜 아내와 토끼처

럼 귀여운 제 딸을 생각하니 앞날이 점점 암울해져 갑니다. 방도를

찾아야만 합니다.

“매도가 어려우면 세를 놓자. 그래 전세는 빨리 된다고 하니까,

그런데 세를 놓으면 우리 식구는 어디서 살지. 월세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가 궁여지책이 떠올랐습니다. 사무실의 공간을 활용하

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저 혼자 생각이지 집사람과 딸에

게 어떻게 말하고 이해시키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상복합

상가에 있는 사무실은 베란다와 창이 잘 배치되어 있고, 남향이라

생각보다 생활하기에 좋을 것 같아 집사람을 설득하기 시작했습니

다. 제가 사는 곳은 빌라 20평형대였습니다.

“저기… 우리 집이 좁아서 그러는데 조금 넓은 곳으로 가면 어

떻겠어? 거긴 주차공간도 넓고 남향집이야. 그리고 베란다가 아

주 커.”

“정말? 나도 지하 주차장이랑 베란다가 좁아서 불편했는데 한번

가 봅시다.”

아내가 겨우 승낙했는데 문제는 어떻게 공사를 하느냐였습니다.

벽체 공사, 주방 공사, 배관 공사, 전선 배치, 에어컨 처리, 그리고

칠 공사와 인테리어 공사까지 그 비용을 줄여야 하는 과제가 남았

습니다. 집사람은 예민한 성격과 단점을 후벼 파는 날카로움이 있

기에, 물건 하나를 사더라도 온 동네 백화점, 할인매장, 인터넷, 홈

쇼핑까지 섭렵하고 나서도 모자라 다시 복습까지 하고 결정을 내리

는 터라 저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일 오전에는 한가한 저의 직업 특성 때문에 모든 공사를 제가

하기로 마음먹고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주말엔 아르바이트 학생의

도움으로 벽체를 부수지 않고 그대로 밀어서 40평인 사무실을 집

과 사무실로 나누고 사무실 공사를 했습니다. 벽체를 부수고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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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 철거비만 100만 원인데다가, 다시 벽체 공사를 하면 석고보드

와 목재 등 자재 구입비도 큰 비용이 들어 환경오염도 줄이고 비용

절감과 공사기간도 줄이는 빠른 방법을 택했습니다. 전에 사무실

인테리어 할 때 잘 봐두었던 게 유용했습니다.

사무실 공사를 마친 후 직원들과 가족의 감탄에 힘입어 저는 더

욱 열심히 집 인테리어에 몰두했고, 주말에도 12시간씩 일하느라

그렇게 좋아하던 새벽 동호인 운동도 당분간 쉬었습니다. 벽체이동

방법도 익혔고, 또 집사람과 중학생 딸도 도와준다고 해서 더 큰

벽체도 물리학을 응용해 옮겼습니다. 결과는 우리 가족들도 믿기

어려워했습니다.

에어컨 위치가 맞지 않아 3대를 분리했고, 전등 위치도 변경하고

스위치와 콘센트를 사서 예쁜 벽걸이 등도 달고 무늬목 몰딩을 해

서 전원 분위기도 연출했습니다. 핸디 코터로 벽을 고르게 한 뒤

아이 방엔 핑크색 칠을 하니 어느 정도 모양이 나왔습니다. 보일러

는 비용부담이 커 포기하고, 추위를 견딜 수 있도록 창문을 스티로

폼으로 막고 중앙에 스티로폼 창문을 만들었습니다.

수도공사는 본적이 없어 마침 상가 공사 때문에 와 있던 업체에

외주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보온재가 부족하다며 관을 다 싸지도

않았고, 견적 낼 때 미리 열선을 넣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않더니

공사 후 동파를 조심하라는 말을 해 황당했습니다. 할 수 없이 제

가 다시 수도관을 분해해서 열선을 넣고 보온재로 완벽히 감쌌고,

베란다에 필요한 수도꼭지도 2개 더 냈습니다.

드디어 집 전세 계약이 되고 나니 집사람은 영 싱숭생숭 한 듯했

습니다. 정든 집을 떠나 보일러도 없는 곳에서 겨울나기를 해야 하는

현실도 걱정이지만 주방도 새로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걱정입니다.

지금 사는 집의 주방도 몇 년 전에 공들여 고급으로 맞춤 제작했

는데…, 새로 갈 집의 주방 견적을 내보던 집사람은 그때부터 앓아

누웠습니다. 그동안 잘 도와주었는데 평소에 안 하던 일하느라 힘

이 들어 몸살이 왔을 것이고, 자존심도 상해 자포자기해 누웠을

것 같다는 생각에 코끝이 찡했습니다. “구석에 몰릴수록 강해지는

남자”, “의지의 한국인” 이런 별명을 갖고 있는 저에게 포기는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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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베란다나 사무실에서 천덕꾸러기로 돈 들여 버려야 하는 서

랍장과 책장 및 책상들을 모았습니다. 필요 없이 자리를 차지하던

회의용 큰 테이블은 주방 상판을 만드는 데 사용하고, 3단 서랍은

주방 서랍장으로, 컴퓨터 책상의 키보드 판은 하부 장의 위쪽 공간

의 여닫이로, 책상은 분해해서 하부 장의 수납장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주방 만들 때 남았던 인조대리석 일부를 상판 조리대에 맞추

고 필름에도 칠이 가능한 페인트로 각양각색의 하부 장을 흰색으

로 통일하고 활엽수 무늬목으로 보기 싫은 곳을 가리면서 포인트

를 주는 등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내 누워있던 아내가 이사 기일이

있어 바쁘게 움직이던 나를 이불 속에서 바라보며, “잘 되어 가?

어디까지 했어?” 물어 봅니다.

“잘 안 돼. 진전이 별로 없어.” 그 말에 아내의 걱정스런 눈빛이

제 가슴을 파고듭니다. 이사하는 날, 저는 아내의 실망스런 눈빛을

어떻게 피할까,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흉보면 어쩌나 걱정되었습니

다. 이삿짐센터 사람들에게 좋다고 말해달라고 부탁을 할까 생각

도 했습니다. 손이 없는 길일이 아니면 할인된다고 해서 손은 있지

만 우리가 가는 방향과 다른 날을 택해 이사했습니다.

도착 후 조마조마해하는 저를 의심하게 하는 탄성이 들렸습니다.

“어머, 정말 멋져, 고마워 여보.”

“진짜 잘했어, 아빠.”

그날 하루 내내 제 아내는 목소리에 상당히 많은 비음이 섞였습

니다. 보일러가 없어 전기요 한 장에 세 식구가 같이 잠을 잡니다.

우리 가족은 이제 새 보금자리에서 서로 위하고 부둥켜안으면서 유

난히도 춥다는 겨울나기에 들어갔고, 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우리 가족에게도 따뜻한 봄날이 반드시 오리라 확신합니다.

“아빠, 이것 받아주세요.”

쑥스럽다는 듯이 딸아이가 내민 것은 그동안 모아온 돈

7천5백만 원이었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이것이 얼마야. 근데 왜 이 돈을…. 왜 이 많

은 돈을….”

우리는 많은 액수에 놀라고, 갑자기 집에 와서 불쑥 돈이 든 통

장을 건네는 딸아이 행동에 놀라고, 아무튼 어안이 벙벙하여 딸의

행동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는데 딸이 말했습니다.

“아빠, 돈이 좀 부족할 거에요. 아빠도 이제는 개인택시 살 수

있는 자격이 된 것 같은데, 부족한 돈은 아빠가 마련하시는 걸로

하세요” 하면서 제법 어른스런 행동을 하며, 우리에게 감동을 줬

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과 안쓰럽고 찡한 마음을 뭐라고,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Letter 4

송영순 | 대전광역시 유성구 반석동

Page 12: ò+Í ¡, v ~ æ ) E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302.pdf · 2017-03-14 · 동네 구멍가게쯤 되는 곳이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작은 식당을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니까 지금으로부터 한 30여

년 전의 일인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서울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아주 작고 고즈넉

한 시골동네에서 살았습니다. 지금은 많이 발전해서 개발된 지역이

지만 당시에는 마을 사람들 대부분 논이나 밭에서 농사를 짓거나

과수원 일을 주업으로 삼았던 동네입니다.

제 친구 중에 용운이라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용운이라는 녀석

을 잠시 설명하자면 개구쟁이 중에 진짜 개구쟁이인 친구입니다.

뭐 동네마다 그런 아이 하나쯤 있었겠지만 용운이 또한 동네에서

모든 것이 일등인 친구였습니다.

공부가 일등이었냐고요? 물론 공부는 꼴등이지요. 용운이는 공

부 외에 모든 것을 다 갖춘 지금으로 말하면 만능 엔터테이너인 친

구였습니다. 용운이는 또래 친구 중에 딱지가 가장 많았습니다. 물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반도체 회사에 입사하여 명절도 없이

삼교대 근무에 힘들어하면서 꼬박꼬박 모아온 거금을 이렇게 내놓

은 딸아이한테 우린 그저 놀라고만 있었습니다.

집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엄마 밥이 매우 그리웠고, 현장에

투입되면서 선임 언니들한테 꾸지람을 많이 받았다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딸 모습이 스쳐 갑니다.

입사한 지 6년을 지나 이제 7년 차인 우리 딸, 얼마나 알뜰하게

모았으면 이렇게나 많이 모았을까요. 사고 싶은 것도 많고, 먹고 싶

은 것도 많았을 텐데…. 회사 택시 운전하면서 항상 사납금 때문에

힘들어하는 아빠를 보고 자란 딸아이가 “꼭 돈 많이 벌어서 개인

택시 사준다”고 하더니, 그냥 해본 말이 아니었나 봅니다.

회사 택시를 운전하는 기사님들은 개인택시 하나 가지고 운행하

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데, 그 꿈을 스물여섯 살 우리 딸이 이루게

해준 겁니다.

딸은 대학을 안 갔고, 우리는 딸을 대학에 보내지 못했습니다.

우리 딸이 고등학교만 나왔다고 하면, “왜~?” 하면서 놀라는 주

위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딸은 고등학교만 나와도 아무 상관 없

다고 하는데 저는 가끔 자존심도 상하고 그랬습니다. 착하고 똑

똑한 우리 딸이 모자라거나 외계인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속상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딸은 언제나 의젓하고 자랑스러운 아이

였습니다.

딸아이의 땀과 눈물이 만들어준 아빠의 개인택시는 이제 5개월

갓 지난 신입생이 되어 오늘도 신 나게 운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딸, 고맙다. 꼭 갚을게. 몇 배로 갚을게.

Letter 5

김성철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

Page 13: ò+Í ¡, v ~ æ ) E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302.pdf · 2017-03-14 · 동네 구멍가게쯤 되는 곳이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작은 식당을

론 구슬도 가장 많았습니다. 달리기도 가장 빠르고, 공놀이를 하거

나 ‘오징어’, ‘왔다리 갔다리’, ‘비석치기’, ‘땅따먹기’, ‘전쟁놀이’, ‘칼싸

움’ 등의 게임에는 최고의 도사인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겨울이었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우리들은 동

네 공터에 쭈그리고 앉아서 ‘딱지먹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의

딱지는 종이로 접은 네모난 딱지가 아니라 문방구에서 파는 동그란

딱지입니다. 우리의 용운이는 친구들 앞에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떡하니 내 놓았습니다.

“야! 다 덤벼! 자신 있으면 덤벼보란 말이야!”

용운이가 자랑스럽게 상자를 열자 그 안에 엄청나게 많은 딱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우와! 대따 많다. 이거 따려면 한 달은 걸리겠다.”

“풋! 이걸 딸 수 있다고? 어디 한번 도전해 보시지? 다 따가도 좋

으니까 덤벼보란 말이야!”

그 말에 저는 “좋아? 내가 한번 덤벼보지!” 했습니다. 사실 용운

이에게서 딱지를 딴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었습

니다. 그 사실을 친구들이나 저 또한 모를 리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성격상 용운이의 잘난 척하는 모습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별

로 많은 딱지는 아니지만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자! 내가 먼저 접는다? 글높?”

여기서 ‘글높’이라는 것은 딱지를 두 파트로 나누면 상대가 자기

가 가지고 있는 딱지를 거는 겁니다. 딱지 면에 글자 수가 많은 곳

이 걸리면 이기는 겁니다. ‘글높’ 외에도 ‘별높’은 별이 가장 많은 것,

‘전쟁높’은 가장 전투력이 높은 것을 말합니다.

“글높이라? 여기! 아싸! 건거 내놔! 역시 넌 나한테 안 돼!”

“그럼 이번에 니가 접어!”

“그래? 별높! 아싸 낮은 데로 걸었겠다. 다 내놔! 아싸!”

우리 할머니가 잘 쓰는 욕 중에 염병할 놈이라는 욕이 있는데,

욕이 안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속으로 했지요. ‘이 염병할

놈아!’

“이번에는 내가 접는다? 전쟁높?”

“그래? 내가 한 번에 끝내주지!”

그러더니 용운이 녀석이 제가 가지고 있는 딱지의 수만큼 모두

걸어버리는 겁니다.

“야! 그런 게 어딨어? 만약 내가 지면 난 거지꼴 되는 거잖아?”

“남이사? 무서우면 째지던가? 쫄았냐? 이 겁쟁이야?”

“뭐? 겁쟁이? 내가 겁쟁이라고? 좋아! 다 걸어봐?”

결국 저는 모든 딱지를 잃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딱지를 잃

은 아픔도 있었겠지만, 더 아팠던 것은 용운이라는 녀석을 도대체

이길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게다가 얼마나 잘난 체를 하는지,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복수하고 싶었지만 어떤 게임에서도 이

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용운이는 또래 사이에서 대장이 되어 갔고,

친구들도 모두 그 녀석에게 붙어버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가

집으로 돌아오니 엄마가 그러는 겁니다.

“야! 이 녀석아! 어디서 뭘 했기에 이렇게 거지꼴이 된 거야? 아

이고 맙소사 손 봐 손, 이게 손이냐? 거북이 등껍데기지? 빨리 손

씻고 방으로 들어와! 엄마가 손 튼 거 깨끗하게 해줄게!”

손을 씻고 들어가자 어머니는 플라스틱 병에 담긴 무언가를 가져

오시더니 제 손에 발라주셨습니다.

“이게 ‘글리세린’이라고 하는 건데, 손 튼데 아주 좋데. 그러니까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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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따가워도 참아. 절대로 손을 물에 씻으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엄마는 글리세린을 제 손등에 듬뿍 발라주셨습니다. 바를 때는

따갑지도 않고 시원하더라고요. 그런데 잠시 후 갑자기 손등이 쓰

라려 오더니 점점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어? 어? 어? 이거 뭐지? 아아아! 아아아아! 엄마? 엄마? 아아

아아아아아아아! 우와아아아아! 으아아아아악! 엄마? 쓰라려! 엄

마? 이거 뭐야? 쓰라려! 아아아아아아!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손

씻을래 엄마!”

“안 돼! 물로 씻으면 효과가 없단 말이야. 참아!”

“엄마~ 못 참겠어! 아아아아아아! 엄마!”

제가 씻으려 나가려 하자 엄마는 저를 움직이지 못하게 붙들었

습니다.

“살려주세요~ 엄마~ 살려주세요! 사람 살려요! 하나님~ 부처님~

공자님~ 살려주세요~ 아아아아아악! 못 견디겠어! 으아아아아악!”

저는 한참을 방에서 온몸을 뒤틀면서 굴러다녔고, 너무 쓰라려서

손등을 꼬집기도 하고 머리를 쥐어짜기도 하면서 별 방법을 다 시도

했지만 그 고통을 없앨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울고불고 했는지, 결

국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리세린

이라는 녀석이 용하더라고요. 손 튼데 확실히 효과가 있더라고요. 그

것도 엄청나게 효과를 봤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아팠는데, 며칠 더

바르니 고통도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평생 그런 고통을 처

음 겪어 봤을 정도로 심한 고통이었습니다. 현재까지 40평생 살았지

만, 그때의 그 고통만큼 아픈 기억이 없을 정도니 말입니다.

글리세린을 바른 후 저는 갑자기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래! 그거야!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용운이 녀석을 생

각한 겁니다. 사실 제 손은 용운이 손에 비하면 임금님이었습니다.

용운이 손등은 갈라진 틈 사이로 피가 흐를 정도로 심하게 손이

텄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회다 싶어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용운이 있잖아? 손이 너무 터서 막 피가 나고 그래! 그러

니까 엄마가 용운이도 글리세린 발라 줘서 치료해 줘! 응?”

“그래? 그러면 되겠다. 우리 성철이는 참 마음씨도 좋아!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참 곱네? 그럼 엄마가 용운이 엄마한테 얘기해서

글리세린 발라줄게!”

사실 친구를 걱정하는 마음이 곱다는 말에 무척 찔렸지만, 저는

오직 복수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녁때가 되어서 농사일을 마

친 용운이 엄마와 영문도 모른 체 따라온 용운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엄마는 용운이 손을 보더니 기겁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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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나? 이거 그냥 놔두면 큰일 나겠는데요? 어쩌다가….”

“죄송해요! 제가 농사일에 바빠서 신경을 못 썼더니 그만…!”

“어머? 아니에요. 죄송할 것까지야. 어쨌든 이거 며칠 바르면 성

철이처럼 괜찮아지니까 발라드릴게요. 용운아? 이거 바르면 괜찮아

지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금 따가울 거야. 우리 용운이는 힘도 세고

운동도 잘하니까 잘 참을 수 있지?”

“그럼요! 제가 성철이 보다는 잘 참아요!”

용운이의 잘난 척이 이때도 계속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잘

난 척에 기분이 나쁘다기 보다는 오히려 통쾌한 마음뿐이었습니다.

“네, 용운이는 운동도 잘 하고요. 남자다워서 잘 참아요. 그렇지

용운아?”

용운이는 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얼떨떨해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것도 잠시 뿐 다시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내가 누군데!”

그리고는 엄마가 용운이 손등에 글리세린을 발라주었습니다. 바

르는 순간 용운이가 그러는 겁니다.

“하나도 안 따갑네~. 너는 이것 가지고 따갑다고 그런 거야? 사

내 녀석이? 그러니까 니가 모든지 나한테 안 되는 거야 알았…으?

어? 으으으으으! 이거 뭐야? 으아아아아아악! 엄마? 아아아아악!”

“얘가 갑자기 왜 이래?”

“엄마? 아아아아아아악!”

그러더니 용운이가 방바닥을 뒹구르면서 온몸을 뒤트는 겁니다.

입에서는 연신 소리를 지르면서 말입니다.

“엄마? 엄마? 죽을 거 같아. 엄마? 이게 뭐야? 죽을 거 같아! 살

려줘! 살려주세요. 성철아~ 도와줘~ 아아아아아악!

“어머, 어쩌나. 이를 어째? 성철 엄마? 어떻게 좀 해 봐요? 애가

경기를 일으키잖아요?”

“이게 조금 따갑기는 한데, 용운이는 손이 너무 많이 터서 더 아

픈가 보네요. 너무 심하면 물로라도….”

“안돼요! 물로 씻으면 소용없대요. 저도 그래서 아파도 참았거든

요? 물로 씻으면 절대로 안돼요! 효과가 없어진단 말이에요!”

“엄마? 나 물로 씻어줘! 물로 씻어줘! 아아아아아악! 사람 살려!”

“안 돼요. 절대로 안돼요. 물로 씻어주면 안돼요. 용운아? 너는

남자야! 조금만 참아! 너는 우리 중에 대장이잖아? 참아!”

“물로 씻게 해주세요. 네? 아줌마 제발요~ 아아아아악!”

결국 용운이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따뜻한 물로 손을 씻을 수밖

에 없었습니다. 얼마나 손등을 꼬집었던지 손등에 피가 흐르고 난

리도 아니었습니다. 얼굴은 눈물 콧물이 뒤범벅 되어 있고 얼마나

울었던지 눈은 퉁퉁 부어 있었습니다. 울면서 가는 용운이의 뒤에

대고 제가 소리쳤습니다.

“용운아? 한 번만으로 안 돼! 내일 또 와야 해! 내일 꼭 와! 알았지?”

다음날 용운이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날도 말입니다. 용운

이는 저를 슬슬 피했습니다. 아마도 또 부를까봐 두려웠거나 친구

들에게 얘기할까봐 두려웠었나 봅니다. 어쨌든, 저는 그날 저녁에

밥을 무척 맛있게 먹었답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당시 용운이에게 붙었던 배신

자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처단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방법

으로 엄마를 통해서 그들에게 글리세린의 추억을 선사했지요.

지금은 중년이 되어서 한 가정의 가장들이 되어 있을 친구들….

그때는 왜 그리도 손이 튼 아이들이 많았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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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아랫목에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드러누워 버렸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난데없이 머리맡에서 훌쩍거리며 우는 소리

가 들렸다.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밖에서 놀던 아이가 무릎을 꿇

고 앉아 울고 있다.

“왜! 왜 그래, 유정아? 너 왜 우는데?”

아무리 물어도 도무지 말을 않는다. 재차 또 물었다. 그래도 말

을 않기에 별것 아닌 것 같아 그 자리에 도로 누워버렸다. 그런데 이

번에는 아이가 한숨을 쉰다. 내가 아파 누워 있으니 걱정되어서 그

러나 보다 했다. 아이가 이번엔 “엄마!” 하고 부른다. “응, 그래 말해

봐” 하니까 아이가 하는 말이 “엄마는 언제 돌아가시는데요?” 한다.

아이가 말을 잘못했나 보다 하고는 “엄마 안 죽어. 괜찮아, 나가

서 언니야랑 놀아라” 했다. 그런데 또 한숨을 푸욱 쉬면서 재차 묻

는다. “엄마, 언제 빨리 아파서 돌아가시는데요?” 왜 그러느냐고 이

유를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엄마 돌아가시면 엄마 지갑 내꺼

할라꼬….” 아이는 겨우 더듬거리며 말을 한다.

기가 막힌 내가 “뭐? 엄마 진짜 죽어버릴까?” 하니까, 아이는 눈

동자를 반짝거리면서 “엄마, 진짜? 진짜?” 하면서 좋아라 한다. 나

는 아이가 어떻게 하나 보려고 나가는 시늉을 하면서 “그럼, 엄마

집 나갈 거니까, 너희들끼리 살아 볼래?” 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손

바닥을 부딪치면서 “응! 엄마 빨리 가 빨리 가.” 재촉을 한다.

그래서 가방에 옷가지 한 벌과 지갑을 챙겨 넣고는 재빨리 가는

척하며 방문을 열고 나오는데, 방안에서 아이가 나를 부르는 게 아

닌가. “엄마! 엄마!” 하고 다급히 부르며 따라나오는 소리가 난다.

‘그럼 그렇지’ 하고 돌아보니 아이가 하는 말. “엄마, 지갑은 주고

가야지.” 아이의 말에 나는 “오냐, 그래!” 하면서 방안에 지갑을 휙

어쩌다 문득 생각을 떠올리면 피식하고 웃게 되는 일이 있

다. 우리 식구는 아이 때문에 손바닥을 쳐가며 많이도

웃었다.

엄마에게 특히 많은 웃음을 선사한 천진난만한 우리 둘째 딸은

그야말로 ‘맑은 영혼’을 가진 아이다. 자식이 성인이 되서 부모 품을

떠나면서 겪게 되는 ‘빈 둥지 증후군’으로 혹여나 엄마가 허전해 할

까봐, 자기를 생각하며 마음껏 웃으라고 흐뭇한 추억을 선사한 효

녀가 아닌가 싶다.

내게 웃음을 선사한 수많은 이야기 중에 한 가지를 해보려고 한

다. 허약 체질인 나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아팠다. 나는 어느 이른 봄

날 아침상을 물리고 아이들에게 외투를 입히고 목도리까지 챙겨 둘

러준 뒤, “안집 마당에 가서 친구들 하고 좀 놀다 와” 하며 아이들을

내보냈다. 그리고 나서 목도 아프고 머리가 하도 지끈거려 감기약을

Letter 6

박지수 |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서부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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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지고는 발자국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가며 나가는 시늉을 했다.

엄마가 저희들을 두고 간다는데, 그래도 따라 나오겠지 싶어 뒤

를 돌아보았다. 가만히 기다려도 잠잠하기에 문밖에서 한참을 기다

렸다가 방문을 열어보았다. 아이는 지갑을 홀랑 뒤집어 거꾸로 털

어놓고 지폐와 영수증은 등 뒤로 내던진 채, 백 원짜리 동전만 앞

섶에 소복이 골라서 주워 담고 있었다. 나를 휙 돌아본 아이가 깜

짝 놀란 얼굴로 그런다.

“엄마, 왜 안 갔어?”

나는 얼른 지갑을 뺏었다. 지폐와 영수증을 도로 지갑에 집어넣

고, 아이가 웃옷 앞섶에 소복하게 골라 담은 동전을 빼앗으려는데,

아이는 그걸 안 뺏기려고 옷을 움켜 안은 채 이 구석 저 구석을 도

망다녔다.

결국 엄마한테 동전을 다 뺏기고는 억울하다고 소리소리 지르면

서 대성통곡을 한다. 목놓아 통곡을 하면서 “왜 안 가노… 왜 안

가노… 간다 해노코, 왜 안 가노…” 하면서 서럽게 운다.

나는 킥킥거리며 한참을 웃었다. 그리고 두 팔로 품안에 아이를

끌어안으며 볼에다 뽀뽀를 했다. 백 원짜리 동전 몇 개를 쥐어주니

좋다고 또 금방 해맑게 웃는다. “유정아! 엄마 싫어?” 하고 물었다.

아이는 “아니야” 한다. “그러면 왜 엄마 죽으라고 했노?” 하니까,

“엄마 지갑, 내꺼 할라꼬” 한다.

이유는 지갑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갑에 있는 동전 다 쓰면 지갑이 필요 없잖아?” 하고

물었더니, 아이는 또 이렇게 말한다.

“지갑에 맨날 돈 있어. 돈 없으면 아빠가 벌어서 갖다 넣는데 뭐.”

“아이고, 요 예쁜 것. 거짓이나 꾸밈없이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우

리 둘째 딸!”

나는 그날 맑은 영혼을 보았다. 위선도, 포장도, 가식도 없는 영

혼. 해맑고 투명한 하얀 영혼을 말이다. 나는 그 순수한 영혼을 지

금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한 번씩 그때를 떠올리면 웃

음보부터 터진다. 지금 생각해봐도 티 없이 맑은 영혼!

유정아! 엄마는 정말로 너를 많이많이 사랑한단다. 그나저나 지

갑에 돈 채워줄 사람은 구했니?

던지고는 발자국 소리를 일부러 크게 내가며 나가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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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인생이 달려 있는 문제다.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저 청년은 낭

만적인 프랑스 영화의 남자 주인공이 아니다. 준수한 외모, 큰 키,

기타 솜씨로 단순하게 평가하고 감상할 대상이 결코 아니다.’

여기서부터 저는 지상에서 가장 엄격하고 까다로운 심사위원이

됩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데, 어떻

게? 그래서 쉴 새 없이 질문공세를 퍼붓습니다.

점점 목이 탑니다. ‘아, 초등학교 성적표를 볼 수 있으면 참 좋겠

다.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가장 정확한 눈으로 볼 수 있는 담임선

생님은 이 청년에 대해 뭐라고 썼을까? 아, 청년의 가장 친한 친구

를 만나고 싶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하지 않던가?’하는 생각을 하며

시간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모릅니다.

청년은 돌아갔고 들고 온 선물은 남아 있습니다. 딸의 코치를 받

아서 장인 장모가 될 우리의 취향은 이미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

데 뭐가 바닥에 툭 떨어집니다. 편지입니다. 자필로 쓴 편지가 선물

꾸러미 안에 들어 있었던 겁니다.

우선 반듯한 글씨가 마음에 듭니다. 그 편지에는 여러 가지 약속

이 담겨 있지만 결론은 평생 딸을 행복하게 해주는 게 우리한테 가

장 큰 효도라는걸 절대 잊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표현도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지만 무엇보다 글에서 진정성이 느

껴집니다. 저는 그 청년을 믿어 보기로 했습니다. 딸과 결혼해서 사

위라는 이름으로 우리 집 식구가 된 그 청년은 약속을 잘 지키고

삽니다.

이제 제 위치가 갑에서 을로 바뀌었다고 초조해 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 믿음과 확신을 준 사위가 너

딸이 결혼하고 싶다는 청년을 데리고 왔습니다. 청년은 잔

뜩 긴장해 있고 비장하기까지 합니다. 이 집안에 있는 짧

은 시간 안에 자신의 좋은 모습을 살뜰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

래야 사랑하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완벽한 갑입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황홀한 입장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몇 번이나 있을까요?

우선 저는 청년의 준수한 외모에 기분이 좋습니다. 거기다 기타

까지 잘 치며 ‘예스터데이’ 등의 올드 팝을 기막히게 잘 부릅니다.

물론 이건 이미 달콤한 사랑의 포로가 된 딸의 말이라 백프로 믿

을 수는 없지만, 어쨌든 참 맘에 드는 청년입니다.

괜히 들떠서 점점 수다스러워지는 제 자신을 느낍니다. 그러다

문득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내 자식의 행복

Letter 7

조연경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율전동

Page 19: ò+Í ¡, v ~ æ ) E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302.pdf · 2017-03-14 · 동네 구멍가게쯤 되는 곳이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작은 식당을

무도 고맙고 예쁩니다.

대통령 후보들이 가장 겸손한 자세와 환한 미소로 자신이 얼마

나 좋은 사람인가를 이야기합니다. 제한된 기간 안에 자신의 장점

을 아낌없이 쏟아내야 하기에 쉬지 않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또 완벽한 갑이 되는 순간입니다. 사위가 처음으로 우리 집

을 방문한 날처럼. 대통령 후보들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하

며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갖게 합니다. 너무 많이 속아서 이제는

속지 않으려고 닫혀 있는 우리 마음을 열기 위한 아주 성능 좋은

열쇠를 갖고 있는 듯합니다.

장밋빛 공약에 결국 우리의 마음이 열립니다. 후보들의 말에 귀

를 기울입니다. 그 말이 그 말 같습니다. 언젠가 들어 본 말 같기도

합니다. 새로울 것도 없지만 가슴이 설렙니다. 현재 우리의 삶이 너

무 힘들고 고달프니까요. 그래서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 매달려 보

고 싶습니다. 그 누군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자

포자기도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그 누군

가에게 우리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아니 우리 자식들의 미래까

지 달려 있습니다. 건성건성 대충대충은 절대 안 된다는 자각이 톱

니처럼 날카롭게 온몸을 자극합니다.

열심히 귀 기울입니다. 선거유세장에도 서 있어 보고 TV토론도

놓치지 않습니다. 메모까지 해가면서 신문도 읽습니다. 그러다 문

득 후보 진영에 있는 사람이 아닌 대통령 후보의 평범한 친구를 한

명쯤 만나고 싶어집니다. 학창시절 담임선생님과도 이야기 나누고

싶어집니다.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요.

그래서 보이는 것만 봐야 하는 현실이 두렵습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심사숙고해서 투표를 했고, 드디어 18대 대

통령이 당선되었습니다. 임기가 5년이지만 5년 동안만 우리 국민의

행복을 책임지는 건 결코 아닙니다. 바통을 이어받아 달리는 릴레

이에서는 어느 한 주자가 실수하면 전부를 망칩니다. 우리 국민의

인생 전부가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가끔 사위에게 처음으로 우리 집을 방문하던 날 사위가 남

긴 편지를 흔들며 “이렇게 물증이 있으니까 우리 딸한테 잘못하면

안 된다” 애교 있게 압력을 넣습니다.

대통령 당선자가 국민에게 한 약속은 단지 편지 한 장에 쓰여 있

는 정도가 아닙니다. 온 나라에 도금처럼 칠해져 있습니다.

제발… 삼각김밥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며 이력서 쓰다가 빛나는

청춘을 다 보내고 있는 청년들에게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일

자리를 주십시오. 물가를 잡아서 쥐꼬리 같은 남편의 월급을 소꼬

리로 늘려 사느라 한숨이 일상이 된 주부들에게 신나는 탱고 같은

웃음을 선사해 주십시오.

즐거운 쉼터인 집이 무거운 짐으로 변한 하우스 푸어에게 두 다

리 쭉 뻗고 편히 살 수 있는 내 집을 주십시오. 맞벌이 하는 아내

들이 맘 놓고 일할 수 있게 국가적 차원에서 육아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말은 ‘희망을 갖고 살고 싶다’와 동의어입니다.

등록금에 대한 약속도 지켜주십시오. 무엇보다 경제를 살려서 등 따

숩고 배부르고 그래서 내 이웃도 돌아볼 여유를 갖게 해주십시오.

모두 당신이 우리 국민에게 약속한 것들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갑

의 자리에서 당신을 지켜보게 해주십시오. 행동으로 믿음과 확신을

줘서 너무도 고맙고 가장 예쁜 대통령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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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관들 할 일이 없다고 편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더러 계시지만, 소

방관 의무에는 예방, 진압, 구조, 구급이 있습니다. 그리고 상상도

못할 어려움과 두려움,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불이 나는 현장에서

는 불구경하는 시민이 소방관들 불 못 끈다고 소리소리 지르고, 모

든 시민이 현장 지휘관이 되는 일도 있어서 소방관의 사기를 떨어

뜨리기도 한답니다. 여름엔 화마와 싸우느라 뜨거움이 갑절이고,

겨울엔 물을 쓰다 보니 추위로 인한 고통은 말도 못하지요. 생명을

구하는 데 있어 소방관들도 사람인데 자기 목숨 아깝지 않은 사람

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도 들어가야 하고 사명감으로 임무를 완수

해야만 하는 직업입니다. 화재 현장에 위기에 처한 생명이 있으면

뛰어 들어가야 하는 게 소방관입니다. 머뭇거릴 시간도 생각할 시

간도 없이 불 속으로 들어가야만 하는 직업이다 보니 늘 출근길이

가족들과 마지막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소방관이 결국은 순직을 했고, 그의 부인

이 절규하며 무릎을 꿇고 울부짖는 장면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내가 어느 순간 저럴 수가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 눈물이 났

고, 쉽게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

내 남편 손을 꼭 잡고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만 흘렸습니다. 아들

들도 영화를 보고 나서 아빠를 더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하며 둘이서

아빠에게 큰절을 하더군요.

영화에서 폭발물을 설치하면서 휴대폰에 아내에게 남기는 마지

막 음성녹음을 하는 소방관의 뜨거운 눈물 속에 내 심장이 녹아

내리는 핏물 같았어요. 지금도 눈물이 나네요. 일선 현장에서는 그

런 녹음조차도 못하고 생명을 잃는 소방관이 대부분입니다. 죽은

지도 몰랐다가 몇 시간 후에 찾아내는 소방관도 있었잖아요. 명절

지난주 남편의 만 53세 생일이었습니다. 아들들이 각자 객

지에서 학교생활을 하기 때문에 방학 때나 겨우 얼굴을

보는 형편입니다. 생일에 모처럼 가족과 함께 조조할인 영화를 보

고, 점심을 먹기로 했습니다. 저희가 본 영화는 소방관에 관한 영

화였지요. 웃음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감도 있었고, 애틋한

사랑과 눈물도 있었습니다.

저는 무엇보다도 손에 땀을 쥐는 숨 막힐 것 같은 긴박감에 목이

메이고 눈물이 흘러서, 슬픈 영화도 아닌데 눈물을 흘리며 영화를

봤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도 자리에서 쉽게 못 일어서고 눈물

만 닦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토록 이 영화를 가슴 아프게 본 것은

제 남편이 소방관이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웃을 수 있는 장면도 나오지만, 결코 소방관의 아내

는 웃지 못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불만 안 나면 소

Letter 8

이숙자 | 충청남도 아산시 온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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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휴일에, 아이들 자랄 때, 거의 같이 있어보진 못했고 지금은 3

교대로 돌아가니까 그나마 쉬는 날이 있어서 가족과 함께할 수 있

는 시간이 있는데, 자식들이 다 커버린 지금은 아빠의 손길 없이도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답니다.

이제는 고생하시는 아빠를 위해 아들들이 도움을 줄 때이겠지

요. 그래서 방학 때 집에 오면 꼭 삼부자가 같이 목욕을 가게 한답

니다. 늙어 가는 아빠의 몸을 살펴보고 어떤 변화가 있는지 어디

튀어나온 곳은 없는지 상처 난 곳은 없는지 잘 살피라고 당부하곤

하지요. 물론 젊은 나이지만 아들들에게 나이 들어가는 아버지이

니까 살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소방관은 생명수당이라는 게 있지요. 돈으로 생명수당을 준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값어치인지 모르겠어요. 미국에서는 소방관이 최

고의 직업이라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못한 게 안타깝네요. 물론

가족이 소방관으로 근무하는 가정도 많이 생기고 있지만, 저희 아

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오늘도 남편은 근무하러 나갔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남편의 생명

과 직장을 위해 다시 생각하면서 기도하게 되었고, 이 땅에 소방관으

로 일하시는 분들이 항상 안전하게 임무 완수하시길 바랍니다.

소방방재청 사이트에 가면 ‘순직 소방관 추모’란이 있는데, 사진

속에 있는 분들은 너무나도 젊고 용감해 보이고 잘생겼음에도 더

는 우리 곁에서 나라의 재산과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줄 수 없는 하

늘나라로 가신 분들입니다. 저는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먼저 가

신 분들과 남겨진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올겨울 들어 화재 소식이 빠지지 않고 뉴스를 장식합니다. 작은

관심과 습관이 화재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위험한 곳을 한두 번만

보면 안전하게 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불은 안전하고 좋은 것입

니다. 보고 또 보고 해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오늘도 고생하고 있는 남편과 전국의 소방관 여러분과 그 가족

들에게 행운이 있길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가 행복한 날이기를 빌

어봅니다.

여보, 그리고 아산소방서 소방관 여러분, 오늘 하루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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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모양입니다.

큰놈은 그렇다 치고, 둘째도 형이 안가니 따라서 연애도 안 하고

선도 안 보고 여자한텐 도통 관심이 없습니다.

“야 너 혹시, 여자 말고 요즘 그… 아이고 모르겠다! 남자한테 관

심 있는거 아이가?”

“엄마는… 저 여자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저를 안 좋아

저는 사십을 바라보는 시커먼 아들들을 둔 예비 시엄마입니

다. 저는 나름 신세대라고 자부하며, 모든 것을 갖추고 며

느리를 맞이할 만반의 준비가 끝나도 벌써 끝난 예비 시엄마입니다.

그러나 우리 아들들은 아직도 장가갈 생각을 안 합니다! 그래

서 이렇게 속이 터지기 일보직전이라 만천하에 알리고자 글을 남깁

니다. 우리 큰아들 대학 다니던 시절 공부 마칠 생각도 안 하고 군

대도 다녀오지 못한 상황에 여자한테 꽂혀서 장가 보내 달라고 할

때, 그때 차마 결혼 승낙 못 해준 게 이날 이때까지 후회될지 꿈에

도 몰랐습니다.

처음 사랑한 그 애가 너무나 완벽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눈에 안

들어온다는 큰아들! 나이가 들면 다 포기하고 눈이 땅바닥을 헤매

고 있어야 할 판인데, 갈수록 어째 눈이 더 높아지는 것 같아 미칠

지경입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진짜 그런 건지 총각으로 늙어 죽

Letter 9

애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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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에는 짬뽕을 참 유난히 맛있게 만들어서 손님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중화요릿집이 있습니다.

바로 노량진초등학교 맞은편에 있는 ‘엽전반점’이라는 곳이죠.

그곳 사장님 부부와는 인연이 깊어 지금 제가 사는 집으로 이사

오기 전 같은 빌라에서 아래 위층으로 이웃해 살기도 했습니다. 아

이가 커가면서 자연스럽게 중화요리가 먹고 싶으면 그곳으로 데려

가 식사를 시키곤 했는데, 아들은 신기할 정도로 그 매운 짬뽕을

참 잘 먹었습니다.

주인 부부는 노량진 수산시장이 인접해 있다 보니 그곳에서 늘

싱싱한 해산물을 사다가 짬뽕을 만들어주셨는데, 오징어며 홍합이

늘 듬뿍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주부물가 모니터 요원으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곳

하는 것 같아서리~.”

매번 이상한 대답만 요리조리 하고 있답니다. 제 주위의 친구들

은 며느리에 손자들에 아주 깨가 쏟아지게 사는데…, 저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닙니다. 장가 안 간 아들들이 떡하고 버티고 있으니 살

림에 손을 떼고 싶어도 뗄 수가 없고, 혼자 사는 남자 냄새 날까

봐서 더 뒤치다꺼리를 해주어야 하니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답니다.

저는 딸이 없어서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며느리를 진짜 딸처

럼 예쁘고 소중하게 대해줄 수 있는데, 이놈들이 색싯감을 데려올

생각이 없으니 환장하겠습니다. 집안, 혼수, 성격, 외모, 직업, 나

이…. 저는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겁니다. 그냥 건강하고

여자의 피만 흐르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입니다. 저는 아들 내외 둘

이 알콩달콩 사는 집에 절대로 며느리가 오라고 할 때가 아니면 찾

아가지도 않을 겁니다. 간섭도, 바라는 것도, 아예 없이 자유분방

하게 사랑하며 살도록 다 해줄 건데 진짜 준비가 철저히 다 된 예

비 시엄마인데, 시커먼 아들들만 보면 답답합니다.

아니 뭐 얼굴도 안 볼 거지만 아들들이 혹여나 예쁜 색싯감을 찾

으면 저쪽 우즈베키스탄인가 뭐시긴가에는 밭매는 아가씨들이 김

태희보다 더 예쁜 아가씨들로 꽉 찼다고 하더만, 거기 아가씨들하

고 선이라도 보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구먼…. 올해도 제가 시엄마

가 되는 건 포기해야 할까봅니다.

아들들 제발! 장가 좀 가다오. 이 엄마 진짜 머리띠 두르고 금식

투쟁 들어 간다이!

휴~ 전국에 계신 미혼 여성분들! 저요 아무것도 안 바랍니다.

그저 몸에 여자의 피만 흐르면 됩니다. 우리 아들 좀 데리고 살아

주이소. 이상 신세대 예비 시엄마였습니다.

Letter 10

서형숙 |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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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맛있는 짬뽕과 착한 가격이 생각나 착한가게로 추천하려고 그

곳을 찜하고 있던 차에 어느 날 남편이 점심을 그곳에서 먹자고 말

했습니다. 그날 가서 착한가게에 대해 설명해주고 착한가게로 등록

되면 영업에도 나름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리려던 차였

습니다.

집에서 제 할 일을 다 정리하고 외출을 하려던 찰나, 남편으로부

터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목소리가 다소 어둡게 느껴지

는 순간, 남편은 믿기 어려운 소식을 전해줬습니다.

“중국집 사장님이 돌아가셨다는군….”

제 눈앞이 그만 깜깜해지고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습니다. 평소

말수는 없었지만, 가게로 음식을 배달시키면 양도 푸짐하게 더 챙

겨주시고 따뜻할 때 먹으라고 건네주시던 엽전반점 아저씨의 그 두

터운 정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첫 아이를 낳았을 때, 어디선가 사은품으로 받은 여성잡지

를 챙겨와 주문한 음식과 함께 건네주시면서 “아기 키울 때 필요한

정보도 많이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챙겨와 봤네요. 도움이 됐

으면 좋겠어요” 하며 쑥스러운 표정을 애써 감추시던 아저씨.

매주 한 번은 짬뽕이 맛있어서 먹고 싶다는 아들을 데리고 아저

씨의 엽전반점을 찾곤 했습니다. 그러면, 늘 제 아들을 위해 작은

꼬마 숟가락도 챙겨주고, 앞치마도 챙겨주고 혹시나 단무지가 부족

하진 않은지 양파가 부족하진 않은지 세심하게 신경 써주시던 아저

씨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저씨가 배달을 마치고 가게로 돌아오는 길에 계단

위에서 쓰러져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주방에서 조리하시던 아주머니는 그 사실도 모르고 “이 양반이

배달 가서 술을 드시나. 왜 이리 늦어…” 하시며 뒤늦게 밖으로 동

정을 살피러 나왔다가 쓰러진 아저씨를 발견하신 거죠.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겼으나 감은 눈을 다시는 뜨지 못했다는

아저씨.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15년간 아저씨네 짬뽕을 즐겨 먹은

우리 부부에게 그 가게에서 먹어왔던 것은 짬뽕만이 아니었기 때문

입니다.

아저씨로부터 특별한 정을 듬뿍 받았던 제 아들 준호에게 뭐라

고 말해줘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늘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따릉따

릉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던 아저씨의 모습을 언제나 횡단보도나 골

목길에서 만나곤 했는데 다시는 그 모습도 뵐 수 없다고 생각하니

참 마음이 먹먹하고 슬퍼집니다.

제 마음이 이러한데 남편을 잃은 아주머니의 마음은 오죽하실까

요. 늘 금실 좋은 모습으로 두 분께서 함께 꾸려온 엽전반점은 앞

으로 어떻게 될까요?

이제 갓 60을 넘어선 아저씨의 나이가 더욱 안타깝습니다. 너무

나 열심히 짬뽕 한 그릇, 우동 한 그릇, 짜장 한 그릇에도 정성을

기울이며 요리를 하고 배달을 하던 아저씨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

먹합니다.

엽전반전 아저씨의 죽음이 믿기지 않습니다. 시간에 쫓겨 서둘러

끝내 버린 드라마의 결말을 보는 것처럼, 너무도 어이가 없다는 생

각이 듭니다. 홀로 남은 아주머니를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 모

르겠습니다.

Page 25: ò+Í ¡, v ~ æ ) E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302.pdf · 2017-03-14 · 동네 구멍가게쯤 되는 곳이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작은 식당을

저는 작은 세탁편의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 가게 건너편

아파트에 작년에 칠순을 넘긴 혼자 사는 고객이 있습니다.

2년 전 제가 처음 가게를 운영할 때부터 삶은 감자나 고구마, 음

료뿐만 아니라 잔칫집을 들렀다가 오시는 날은 받아오신 떡을 겸연

쩍게 내미시며 “싸장, 보고 싶어서 왔어, 싸장 출출할 텐데, 이 떡

좀 드셔 보고 나 커피 한 잔 먹고 가도 되지?”

그분이 가게 들르실 때마다 저는 말동무처럼 우스갯소리로 재롱

을 부리며 “심심하시면 여기 오셔서 커피 한 잔씩 하시다 가세요”

하며 인사드렸던 만남이 벌써 햇수로 2년을 넘기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도 사람 낯을 가리네….”

사교적이지 못한 성격이 잘 고쳐지지 않아 서울에서 이곳으로 이

사 온 지 3년이 다 돼가는데 동네에 친구도 없고, 적적하고 말동무

가 필요했는데 잘되었다며 “싸~장! 딱 내~스타일이야”를 외치며 저

를 아들 대하듯 부담 없이 대해주셔서 많이 친해진 말동무입니다.

처음엔 세탁물을 하나씩 가져오시면서 “빈손으로 오기 뭐해

서…” 하시며 이것저것 들고 배시시 웃으며 들어오시더니 어느 날

“이젠… 집에 빨래할 세탁물이 없네. 그래도 나 커피 줄 거지?” 하

시길래 그 순간 저는 막내아들로, 재롱둥이로 변신합니다.

가끔 자신의 외아들이 집에 들를 때면 아들이 입고 온 옷을 속

옷만 남기고 다 벗겨 작은 가슴에 한가득 말아 들고 웃음 가득한

얼굴로 “싸장, 아들이 왔는데 옷이 엉망이라 바로 가져왔어. 내일

저녁까지 깨끗하게 해줄 수 있지? 그리고 아들이 김장김치 가져 왔

는데, 나 늙어 죽을 때까지 먹어도 다 못 먹을 정도로 많이 가져

왔거든. 힘들 게 가져왔는데 달랑 들고 나오면 아들이 서운해할까

봐. 아들 가면 갖다 줄게. 이 옷들은 내일까지 부탁해~ 호호호~.

아들이 와서 저녁 준비 때문에 바빠서 이만” 하시며 오십니다.

일 년 중 며칠 제 말동무는 ‘엄마’가 됩니다.

아들이 다녀간 다음 날 전 평소보다 열심히 웃겨드리고 몸 개그

까지 섞어야 하는 괴로움도 있지만 “사장이랑 있으면 내가 젊어지

는 것 같아” 하시며 웃으시는 미소에 기운이 나다가도 “이만… 들

어가 봐야겠네” 하시며 평소보다 처진 어깨를 보이며 돌아서시는

뒷모습을 보면 제 마음이 무겁기만 합니다.

나이 숫자만큼의 속도로 세월이 흘러간다고들 하는데…, 2년이란

짧은 시간의 만남 동안 홀로 계시는 시간이 주름살을 두 배로 만들

어 얼굴을 가리는 것 같아 옆에서 보는 제 마음도 두 배로 아픕니다.

작년에 거의 4달 정도인가? 가게도 들르지 않으시고, 보이지도

않아 걱정했는데 얼마 전 저녁에 제 가게 문을 밀고 들어오시며

Letter 11

애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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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장, 잘 있었어? 나… 싸장 보고 싶었는데, 좀 바빠서… 그간 못

왔네. 나 보고 싶었어? 커피 한 잔 먹어도 되지?”

타 드린 커피를 받아 드시고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싸장… 나… 싸장이 창피해할까봐 그동안 여기 못 왔어. 음…

얘기해야 할 것 같아서. 사실 그간 집안에 문제가 좀 있었는데 사

장한테 말하면 내가 부담될까 봐. 나… 그간 교회 목사님에게 부

탁해서 다른 동네 아파트 청소하러 다녔어. 생활비 때문에… 몇 푼

안 되지만 먹고 살려고…. 아들 사업이…. 흑흑흑.”

말동무는 눈물을 흘리시며 말씀을 이어가지 못하십니다.

“아들이 불쌍해. 걘 외아들이라 도와줄 형제도 없고 잘 돼야 하

는데. 어제 전화가 왔는데, 미안하다고 하네. 내가 사는 아파트라도

팔아서 보태야 하는지. 싸장… 나… 아파트 청소하러 다녀도 되지?

싸장 나 여기와도 안 창피하지?”

들고 있던 커피잔이 어깨와 같이 흔들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자신보다 저에게 더 미안해하셨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고 난 후 저는 뭔가 기운이 나도록 한마디 말씀

을 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먹먹한 마음으로 앉아

있다 보니 가슴이 아프고 해서 휴대폰을 들어 문자를 드렸습니다.

<자기야 울지마. 사랑하는 내가 있잖아요. 우리 웃으면서 살아

요. 힘내요.>

평소 농담으로 저를 ‘젊은 애인’처럼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렸던 것

처럼 제 문자 보면서 웃으시라고 그렇게 보냈습니다.

다음날 밝은 미소로 음료수를 들고 들어오시는 말동무. 발그레해

진 홍조 띈 얼굴로 “싸장, 전에 내가 얘기하던 나만 보면 ‘자기야 자

기야’ 하며 나 어릴 적에 귀여워했다고 말하던 멋쟁이 사촌 오빠 있

잖아? 그 오빠인 것 같아. 전에 집안일로 만났을 때 요즘 힘들다고

말했었는데. 어제 집에 가서 보니 문자가 왔었네. 보여 줄까?”

활짝 웃으시며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 주시는데, 차마 제가 보낸

문자라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 사촌 오빠와의 추억

에 잠긴 소녀 같은 그 표정과 환한 웃음이 아까워서 말씀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혹시나 사촌 오빠에게 실수하실 수도 있겠단 생

각이 들어 제가 보내 문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말동무는 그동안 그 문자 때문에 행복하셨다고 하더군요. 문자

를 보고 또 보면서 정말 행복하셨대요. 제가 보낸 문자라는 걸 아

시고는 조금 섭섭하지만 고맙다고 말씀하시네요. 웃으시라고 보내

드린 한 줄의 문자가 행복으로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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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뒤쪽이 소란합니다.

“아니야!”

“맞아!”

웅성거리더니 4살 민건이가 울먹이며 저를 부릅니다.

“선생님, 선생님.”

“왜 민건아? 왜 울어?”

“선생님 나는 왕따지요?”

이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제 겨우 4살인데 ‘왕따’ 소리가 나오다

니요. 화들짝 놀란 저는 “민건아 네가 왜 왕따야? 친구들이 민건

이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민건이도 친구들하고 블록도 잘 가지고

놀고 간식도 나누어 먹는데 무슨 왕따야. 아니야 민건아.”

“아니에요, 나는 왕따예요.”

민건이는 거의 우는 목소리로 그다음 말을 이어갑니다.

“진영이가 자꾸 나더러 공주래요. 나는 남자니까 왕따 맞지요?”

아하~ 같은 반 여자친구가 자기는 공주라고 말하면서, 긴 머리

의 민건이가 머리를 여자처럼 묶고 다녀서 조금 놀리고 싶은 생각

이었는지 옆자리에서 배시시 웃으며 말합니다.

“아니야. 너 공주야.”

이제는 울음을 터트린 민건이가 소리칩니다.

“아니야! 나 왕따야!”

“그래그래. 너는 남자니까 왕자 맞다. 그런데 민건아 제발 발음에

신경 써주면 안 되겠니?”

혹시 이 말을 엄마가 들었다면 얼마나 놀랐을까요? 민건이가 왕

따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제 가슴도 철렁 내려앉았거든요. 아직

어리기만 한 4살, 요 작은 친구들이 제 가슴을 내려앉게 했다가 웃

게 했다가 합니다.

어린이집에 근무하면서 이 아이들이 얼마나 저를 웃게 하는지 집

에 와서도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 우리 집 식탁에서도 미소가 지어집

니다. 우리 집에 있는 재미없는 아들 둘은 이제 고3, 고1. 제 아버지

를 닮았는지 “다녀왔습니다”, “밥 줘”, “돈 줘” 등등 저 필요한 말만

골라 하고 일방통행인 대화가 이루어져 집에서는 웃을 일이 없는데,

3살, 4살 이 꼬마들은 온종일 “선생님~” 소리를 달고 삽니다. 다친

것도 경쟁하듯이 하며, 한 달 전에 다친 손가락에도 “호~” 하고 밴

드를 붙여야 씨익 웃어 보입니다. 제가 다른 일을 하다가 “아야!”

하면 득달같이 달려와 제게 “호~ 괜찮아?” 하며 물어봅니다. 집에

있는 아들 녀석은 제가 “아야!” 하면 보지도 않고 “괜찮아?” 한마

디 날려주는데, 아기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합니다.

어느 날은 아기들과 밥그릇을 놓고 싸우기도 한답니다. 마흔하고

Letter 12

박정은 |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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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셋인 제가 세 살 꼬마와 그것도 치사하게 먹는 것으로 싸운답니

다. 우리 반 소영이는 두부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날 식단에 두붓

국이 나오면 얼른 제 국의 두부를 건져 먹고 제가 다른 아이를 먹

이거나 닦아줄 때 자기 국에 손을 넣어 천연덕스럽게 제 것인 양

두부를 건져 먹고 있습니다. 아이들 덕분에 조금 싱거워진 국에 소

영이가 손을 넣어 간을 해주네요. 참 야무지게 골라 먹습니다. 두

부가 싹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저를 향해 뭐가 문제냐는 웃음을 보

여줍니다. 두부가 아까운 것이 아닙니다. 이제 숟가락을 사용해야

하는 아이들이니, 손을 씻었다 하더라도 손을 사용해 먹는 것은 안

되는 일이고, 혹시라도 제 국이 아이들 것보다 더 데워진 경우가

있어 다칠까 봐 안된다고 얘기했더니 어느 날부터 제 식판이 아이

들의 상위에 같이 올라오면 제게 묻습니다.

“선생님, 이거 선생님?”

“응. 이거는 선생님 꺼.”

“이거는 소영이 꺼?”

“응. 그거는 소영이 꺼.”

“선생님 많이 먹어. 싹싹 먹어.”

제가 아이들에게 했던 말을 제게 합니다. 소영이가 제게 하는 많

이 먹어 싹싹 먹어 이 소리가 가끔은 저도 못 먹게 하니 많이 먹고

남기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으로 들립니다.

온종일 싸움은 왜 그리도 많이 하는지요. 참 별거 없는 다툼입니

다. 파란 블록 10개가 있어도 꼭 다른 하나의 블록 때문에 싸우고,

제 컵을 만졌다고 싸우고, 자기 기저귀 건드렸다고 싸우고, 크레파

스가 내 것이라고 싸우고, 밥을 먼저 먹고 늦게 먹었다고 싸우고,

선생님이 무릎에 못 앉게 한다고 울고…. 에구에구 그저 웃음만 나

옵니다.

참 잘 울고 다투고 화해도 잘합니다. 아직 말이 서툰 아기들이라

아기들 언어로 이야기하고 끝에 “알았찌?” 하면 한 아이가 “응” 하

고 끝나는 다툼이 대부분입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4~6시까지 어

린이집에 있는 이 아이들은 선생님을 ‘엄마’라고 생각합니다.

반 이름을 따서 새싹반 엄마, 튼튼반 엄마, 지혜반 엄마라고 자

기들끼리 이야기도 합니다. 12개월 이전의 아기부터 4살까지 보듬

고 몸으로 놀아주고 가끔 잘못한 일은 아니라고 알려주며 어린이

집의 하루하루는 똑같은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이 재밌기도

하고 사건 사고가 있는 날은 쉽게 지치기도 하지만 저는 아이들의

엄마이자 선생님입니다. 박봉에 몸이 힘들 때도 있지만, 저를 웃게

해주는 아기들이 있어 올해도 행복합니다. “우리 왕따님, 공주님 내

년에도 잘해보자~. 내년에도 우리 많이 웃고 행복하자.”년에도 잘해보자~. 내년에도 우리 많이 웃고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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쟈가, 아가 어른이가. 우에 맏며느리 노릇을 할라꼬” 하시며 혀를

차셨다.

결혼 후에도 시동생들에게 “그자 사람은 키도 크고, 등치가 있

어야 한다카이. 기왕지사 장모도 젊꼬, 나도 다른 사람 맹키로 부

자 사돈 봤음, 원이 읍겄다. 느무 고리다가(고르다가) 느그 성 맹

키로 삼베 고리지 말아라” 하시면서 삼베 며느리 가슴에 대못을

박으셨다.

“내는 입에 발린 소리는 몬한데이” 하시면서 잔정도 없으시고 칭

찬에 인색하시고 무뚝뚝한 우리 시어머니는 전화를 하시면 “내다!

오만 천지 안 아픈데 엄꼬, 병원 가도 소용도 엄꼬, 자식이 적기나

하나, 와그리 많이 낳아서 아프기만 하고. 고마 몸살이 난다! 고마

드가라!”

‘뚜- 뚜- 뚜-’ 하며 전화기 건너편에서 감나무 부러지는 소리

가 난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어머니는 자식 일곱 절대 안

낳으려 했는데, 제가 어머니께 제발 일곱 명 낳으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죽일 며느리입니다’ 하면서 어머님의 하소연을 들어

드린다.

그러던 우리 시어머니가 꼭 한번 이맘때가 되면 달콤하고 나긋나

긋한 음성으로 전화를 하신다.

“에미야, 곶감 좀 팔아도.”

두둥! 드디어 올 것이 온 것이다.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그놈의 곶감!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곶감이 무슨 필수품도 아니고, 가격도 만만

치 않으니 팔아달라고 말하기도 난감하고, 친한 사람들에게 거의

12월만 되면 나는 무섭다.

일도 못하는 날탱이 며느리, 이름만 7남매 맏며느리인

나의 시댁은 곶감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상주다. 시장에 곶감이 나

오기가 무섭게 12월이 되면 전화벨만 울려도 가슴이 철렁한다.

키도 작고, 덩치도 없고, 인물도 시원찮고, 친정도 별 볼 일 없는

시어머니의 표현대로 ‘명주 고르다 삼베를 고른다’는, 나는 그야말

로 삼베 며느리다.

아들의 수 없는 맞선에 질려서 혼자 내보냈다가 하필이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 결혼한다고 데리고온 신붓감이 어머니 마음에 단

한 가지도 들지 않는 바로 무늬만 맏며느리인 키 작고 볼품 없는

며느리가 나인 것이다.

결혼 후 어머니는 나를 보면 항상 “내가 나갔으믄 안 했을 낀데.

Letter 13

박은영 |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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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맡기다시피 하니 내 주변 사람들도 12월만 되면 나를 슬슬 피하

는 것만 같다.

그래서 “어머니 제가 이번에 이사를 하고, 직장에 다니다 보니 팔

데가 없어서…” 하며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이번에는 곶감 장사

를 안 하리라’ 다짐을 하지만, 늙으신 어머니께서 밤잠도 못 주무시

고 손수 깎아서 자식 돌보 듯하여 때깔 좋게 만드신 곶감이니 정말

난감하다.

게다가 시어머니 시집살이는 매워도 그놈의 곶감은 왜 그리 달달

한 지. 또 일 년 내내 장작 패는 소리로 전화하시다가 딱 한번의 따

뜻한 음성은 왜 그리 정겨운지.

모든 것 다 잊어버리고 ‘크다가 만 삼베 맏며느리’는 오늘도 온갖

인맥 총동원하여, 호랑이보다 무서운 그놈의 곶감 장사에 열을 올

리고 있다.

“어머니, 제가 곶감 판 돈 입금시켰습니다.”

“에미야, 욕 봤데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입에서 살살 녹는 나긋나긋한 어머님

의 음성…. 그때는 아프다는 말씀도 안 하신다.

이 순간 나는 1년에 한번 ‘삼베 며느리’에서 ‘명주 며느리’가 된다.

그러나 30여 년의 경험으로 나는 잘 알고 있다. 곶감 장사만 끝나면,

입에 발린 소리 못하시는 나의 시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원래대

로 투가리(뚝배기) 깨지는 톤으로 “내다. 내가 우짜다가 아들은 많이

나아서 몸 성한 곳 하나 엄꼬…” 하시며 다시 전화를 하실 것이다.

조금 있으면 사위도 볼 나이인 삼베 며느리건만 아직도 시어머니

는 무섭다. 곶감은 더 더 무섭다!

오늘은 일주일에 한 번 봉사활동 가는 날! 하루쯤 빠진다고

누가 혼을 내는 것도 아니고, 눈치 주는 것도 아닌데, 오

늘도 나는 이불 속에서 오만 번쯤 사탄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인다.

“가지마 가지마. 그냥 오늘 하루는 푹 자는 거야.” 추위 탓이라고

나름 핑계의 돌탑을 하나하나 쌓아보지만, 역시 나의 게으름과 부

실한 봉사정신 때문인 것을.

내복에 모자, 목도리, 장갑, 귀마개에 마스크까지, 얼어 죽지 않

을 정도로 막을 수 있는 곳은 전부 꽁꽁 동여매고 결국 무거운 내

마음에 등 떠밀려서 집을 나선다. 한여름 무더위도 선풍기 한 번을

안 돌리고 견딜 만큼, 나는 추위에는 쥐약인지라 요즘 같은 겨울

외출은 정말… 좋지 않다….

영구 임대 아파트에 거주하시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분들과 거

동이 불편한 홀몸노인 분들을 대상으로 지역복지관에서 밑반찬을

Letter 14

한선화 |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고잔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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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서 배달하는 일이, 내가 하는 작은 자원봉사활동이다. 처음

에는 사회복지 공부를 하면서 학점 이수를 위해서 시작했는데, 이

제는 매주 뵙는 어르신들의 안부도 궁금하고, 갈 때마다 반가워해

주시고 고마워하시는 그분들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반찬 준비하

시는 주방 아줌마들과도 손발이 맞춰져서 그만두자니 내가 섭섭해

서, 일주일에 한 번은 시간을 내게 된다. 어디서 나오는 착각인지,

내가 안가면 반찬 만드는 일에 차질이 생길 것 같은 불안한 맘도

있으니 턱도 없는 오지랖이다.

대부분이 혼자 사는 노인인 이분들에게는 반찬 배달을 가는 우

리는 늘 반가운 손님이다. “추운데 고생해서 어쩔꼬”, “감사해. 너

무 감사해” 하시면서 이 작은 일에 크게 고마워하신다.

한 분 한 분 모두 손잡아 드리고 말동무도 되어 드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늘 미안하다. 807호 할머니의 무릎 수술한 이

야기도 들어드려야 하고, 602호 할아버지의 젊은 날 연애담도 들

어드려야 하고, 517호 매일 팬티만 입고 문 열어주시는 할아버지께

도, ‘다음부터는 바지 입고 뵙자’고 말씀드려야 하는데 긴 시간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쉽다. 712호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현관

문을 열자마자 커피를 타느라 분주하시다. 반찬 배달을 올 때마다

마실 거리를 준비하신다. 그러지 마시라고 몇 번씩 만류해도 당신

이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니 말리지 말라고 하신다. 거절하면 끝끝내

배달 바구니에 던져주셔야 성이 풀리신다. 할아버지께서 당신은 귀

가 고장 나서 아무것도 듣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면 눈꼬리가 코밑까지 내려오신다. 오늘도 할아버지는 내 코트

주머니에 요구르트 한 병을 푹 찔러 넣어주시곤 만족스러운 웃음

을 지어 보이신다. 나눌 것이 있다는 게, 이 외로운 홀몸노인에게는

제일 흥이 나는 일이라고 하시면서.

집에 돌아와서 코트를 벗다가 생각나서 꺼낸 요구르트는 유통기

한이 11월 16일이다. 오늘은 12월 13일. 요구르트는 이미 바닥에 뭉

글뭉글 덩어리가 져 있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귀가 고장 나고, 눈

도 고장 나고, 기억력도 고장이 난다. 그런데 나는 먹을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이 고장 난 요구르트를 들여다보면서 왜 가슴이 따뜻해

지는 걸까? 사랑은 이렇게 흐르고 흐르는 건가 보다. 시냇물은 내

가 쳐다봐도 흐르고 쳐다보지 않아도 흐르듯이 사랑도 이렇게 그

저 흐르는 것인가 보다. 마음을 주러 간 그곳에서 내가 늘 넘치는

마음을 받아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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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너무 춥다. 길거리 온도가 영하 10도다. 아파트 창밖

으로 도로를 바라봐도 춥다. 아이들이 자주 오가지 않는

집안 온도는 섭씨 17도로 발이 시리다.

보일러를 켜지 않는 30여 평 집 안에 단둘이 사니까 집이 텅 비

어서 시베리아 바람마저 분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집 밖으로 나갈

때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둘이 손을 맞잡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지낸다.

다정한 것도 잠시 답답한 나머지 아내가 일어섰다.

“여보, 나 봐!”

아내가 방안을 빙 돌며 눈길을 끈다.

“움직이는 것이 둔한 곰 같다. 하하.”

“내가 가벼운 조끼 입고, 그 위에 두꺼운 조끼 껴입고, 거기다 파

카 옷을 덧입었으니 둔하지 않겠어요?”

아내는 곰처럼 둔하게 웃는다. 이런 순간에 남편인 내가 왜이렇

게 미안할까! 돈을 많이 벌었으면 난방비도 펑펑 쓰며 사랑하는

아내를 따뜻하게 해줄 것인데 그렇지 못한 나를 어쩌랴! 하긴 나

도 너무 추워서 기모 바지에다 털 점퍼를 입고 겨울용 슬리퍼를

신어도 떨린다.

너무 추워서 작은 전기난로를 거실에 켜 놓아도 언 발에 오줌 누

기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아예 이불까지 뒤집어쓰고 있다.

은퇴하고 일손을 놓으니 마음도 몸도 다 춥다. 춥다고 따뜻한 차

를 여러 잔 마시니 화장실에서도 자주 보잔다. 부부가 꼭 붙어 앉

아 있으니 행복하지만, 보일러나 전기난로는 켜지 않는다. 난방비

를 줄이기 위해서다.

작년에는 멋모르고 덥게 살다가 난방비가 꽤 나왔었다. 올해는

난방비 줄여 살자고 다짐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다. 60평 큰

집에 사는 이웃들도 난방비가 한 달에 2만 원도 안 나왔다고, 40

평 집에 사는 이웃도 만 원이 나왔단다. 그런 판이니 위층이나 아

래층에 사는 사람들도 보일러를 켜지 않아서 층간에 온기도 없다.

정말 난방비가 월 2만 원도 안 나온다면 밥만 해먹는다는 말이다.

지독한 겨울이다. 돈 있는 사람들이 더 절약하며 사는 올 겨울이다.

“여보, 우리 집 앞에 있는 도서관 가요.”

아내가 느닷없이 도서관에 가잖다.

“왜?”

“책 읽으면 마음이 편하잖아요.”

“글쎄!”

Letter 15

김진영 | 경기도 김포시 사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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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내가 조용히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30분이 지나도 자기

를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지레 삐치는 귀여운 통통이다.

아무리 귀여운 통통이가 말해도 부부가 항상 같이 붙어 있으면

다정해서 좋기도 하지만 답답하기도 하다. 그런데 집 앞에 있는 도

서관까지 같이 가자니 맘이 별로 내키지 않는다.

“여보, 도서관 가면 열람실도 따뜻하고 책도 볼 수 있고….”

아내가 따뜻하다고 나를 꾄다.

“그래 가보자.”

찬바람 부는 길을 아내와 나란히 팔짱을 끼고 집 앞에 있는 도

서관으로 향했다.

히터를 틀어둔 도서관은 여기저기가 모두 따뜻했다. 도서관을

방문하는 민원인들에게 도움을 주려는 따스한 인정이다. 아내와

나는 서가에서 보고 싶은 책을 골라서 열람실에 다정하게 앉아서

책을 읽는다.

몸이 따뜻하니 아내가 까딱까딱 존다. 집안이 얼마나 추웠으면

따뜻한 도서관에 오자마자 졸릴까! 나는 미안해서 정수기로 가서

따뜻한 음료수를 받아서 아내에게 주었다.

“아, 물이 참 따뜻하다.”

노부부가 도서관에서 온종일을 보내니 집에 보일러를 틀지 않아

난방비가 절약되었다. 또 따뜻한 물 한잔으로 따뜻한 부부의 사랑

이 이어가고 있다.

동네 도서관은 부부 사랑의 온천수가 되었다. 올 겨울에는 사랑

하는 노부부들이 도서관에 한두 쌍씩 늘어나고 있다.

일 년 전 이맘때 시어머님은 계단에서 넘어지셔서 그 충격으

로 뇌를 다쳐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처음 병원

으로 이송했을 땐 우리를 다 알아보시고 응급실 담당 의사가 이름을

물으니 또박또박 대답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검사 끝에 병

원에서는 뇌에 피가 고였으니 바로 수술을 하라고 했습니다.

우리 시댁은 5남매로 2남 3녀 중 저는 작은 며느리입니다. 큰댁

은 수원으로 이사한 지 30년째로 30년 동안 제가 어머니를 돌봐드

렸습니다. 그날도 게이트볼을 치러 갈 시간이 돼서 어머님댁에 가

보니 계단에 쓰러져 계셨습니다. 너무 놀라 바로 병원으로 이송했

습니다.

큰아주버님께 연락하니 다음날 수원에서 달려오셨습니다. 어머

님은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수술 후 중환자실에서 안정을 취하고

Letter 16

애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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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병실로 옮겨졌습니다. 어머님은 뇌에 고여 있는 피를 제거하는

수술을 하셨습니다. 의식을 되찾으시는가 싶더니 바로 치매로 이어

졌습니다.

어머님 상태가 그러니 5남매가 모였습니다. 당시 어머니 집에서

발견한 통장에는 4천만 원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시어머님은 당신이 쓰실 돈을 가지고 계셨거든요. 우리가

생각했던 금액보다 아주 적은 금액이었습니다. 이상하다 생각했지

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주버님은 저희가 사는 제주도에

있는 요양원을 샅샅이 뒤져 어머니 모실 곳을 찾았다고 하더군요.

저희는 우리 5남매가 번갈아 가면서 조금씩 모시자고 했습니다. 그

런데 아주버님이 처음부터 그냥 요양원으로 모시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그러기로 했습니다.

그로부터 15일쯤 후에 은행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큰돈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아주버님은 동생들 의견은

묻지도 않고 큰아들이 알아서 한다고 하더군요. 은행에 있는 돈도

자신이 관리하고 어머님도 모셔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시누이들은 난리가 났고 둘째인 우리도 기가 막혀서 할 말을 잃

었습니다. 사람이 어찌 저럴 수가 있을까 하고요.

돈이 조금 발견됐을 땐 낳아준 어머님을 요양시설에 모신다 하

고선 큰돈이 발견되니 형제들 의견도 무시한 채 무작정 모셔간다

니…, 드라마에 나오는 돈 때문에 부모를 모시고 돈이 없으면 나 몰

라라 하는 일이 우리 집안에 생긴 겁니다.

어머니 일생이 너무 가엾고 치매인 어머니의 여생이 너무 걱정스

러웠습니다. 아주버님은 우리 몰래 은행직원을 어머니께 데려가 자

기가 돈을 관리하는 걸로 했다는 겁니다. 저희는 그 사실도 간병인

에게 듣고 은행에 전화해서 사실을 확인했어요. 치매인 어머니께

억지로 도장을 찍게 하고 본인이 관리인을 자처했으니 형제들이 법

적으로 소송을 하면 돈이 인출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하지만 돈 때문에 치매로 누워 계신 어머님을 놓고 법적 절차를 밟

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아주버님은 돈만 챙겨가고 어머님은 모셔가지 않았습니다.

저희들은 어쩔 수 없이 어머님을 모시고 수원으로 갔지요.

가면서 혹시 어머님을 몰라라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었습니

다. 그러나 양심은 있는지 어머님을 집안으로 모시더군요. 그 일로

인해서 시누이들하고 아주버님 사이는 원수같은 사이가 되어버렸

고 시누이들도 다시는 연락 안 한다고 연락을 끊었지요.

우리 또한 어머님 근황을 알 수가 없습니다. 어머님 휴대전화도

없애버렸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합니다만, 전국에 이 방송을 들으시는 어머님

들 혹은 어르신들께서는 건강하실 때 자식들을 모아놓고 돈이 얼

마 있는지를 밝히시고 본인이 혹시라도 불상사가 생길 시에는 어떻

게 해달라고 의사를 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리하면 자식들도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드릴 테니까요. 그래야

만 자식들끼리 갈등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 어머님은 그걸 못 하신

거지요. 그래서 일이 크게 벌어졌고, 결국은 형제들 사이가 원수로

변해버렸답니다.

슬프고 슬픈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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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창우섬유의 박창숙 대표가 처

음 섬유업계에 발을 디딘 것은 고등학

교를 졸업하고 갓 스무 살이 되던 해

다. 그녀는 섬유회사에 입사해 일을

배우며, 섬유 분야 일은 여자가 하기

어렵다는 편견을 뛰어넘기 위해 남들

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이렇

게 열정적으로 일하던 그녀에게도 일

에 대한 권태기가 찾아왔고,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섬유 관련

일은 모두 접어두고 서점을 오픈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던 그녀

는 결국 서점을 오픈한지 1년 만에 ‘내

가 하고 싶은 것, 가야할 길은 섬유 분

야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1990년, 과

감히 (주)창우섬유를 설립했다.

설립 초기, (주)창우섬유의 사업형

태는 섬유편직 임가공업체로 원사를

뜨개질한 것처럼 짠 편직물을 거래

처로부터 주문받아 납품하는 방식이

었다. 하지만 해가 거듭될수록 늘어

나는 타 업체와의 끝없는 경쟁에 낙

담하게 되었다. “힘들게 일하는 직원

들에게 더 많은 복지 혜택을 주려면

회사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

각했어요. 그래서 떠오른 것이 원단

을 개발하는 것이죠.”

하지만 빠르게 변화하는 섬유시장

에서 경쟁력 있는 원단을 개발한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제품을 찾기 위해 고심하던 박 대표

는 문득 ‘면직물이나 모직물에서 활

섬유시장 여성 CEO, 신뢰로 한 획을 긋다

IBK기업은행 양주지점 거래고객

(주)창우섬유 박창숙 대표이사

글 | 유진아 (자유기고가) • 사진 | 윤상영

| 행 복 을 찾 는 사 람 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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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다. 이렇게

신뢰를 쌓은 업체들과의 관계는 처

음 원단을 개발할 때나 회사가 어려

울 때 그녀에게 가장 큰 힘이 됐다.

협력업체와 함께 박 대표에게 힘이

되는 또 한 가지는 바로 직원이다. 회

사를 설립하고 항상 ‘직원들을 위하는

것’에 대하여 고민한다는 그녀는 자신

과 직원들의 관계를 가족이라고 표현

하며, 직원들이 자신을 사장이라고 어

려워하기보다는 함께 어울렸으면 좋

겠단다. 그래서 그녀는 사무실에 대표

실을 따로 두지 않았다. 여느 직원들

과 똑같은 책상에 앉아 함께 일을 하

고 있다. 이러니 직원들과의 소통도 더

욱 자연스럽다. 직원들도 가족 같은

분위기 속에서 애사심이 커져 장기

근무하는 직원이 대부분이다.

이렇듯 지금의 (주)창우섬유가 있

기까지는 박 대표의 노력과 협력업체

의 도움, 가족 같은 직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금은 여기에 IBK기업은

행과의 인연이 더해져 시너지 효과

를 내고 있다.

IBK기업은행과 박 대표의 인연은

회사를 설립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

라간다. 당시 개인 거래를 하던 박 대

표는 IBK기업은행 미아동지점의 직

원과 친해져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직원이

IBK기업은행 양주지점장에게 그녀와

거래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며 살

짝 귀띔을 했고, 섬유시장에서 탄탄

하게 입지를 다져온 (주)창우섬유를

눈여겨보던 양주지점 김형근 지점장

은 박 대표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박 대표가 IBK기업은행에서 재무

구조를 살피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준

용하는 실을 변형해 편직물에 접목

시켜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폴리에스테르를 활용해 기

존과는 다른 제품인 ‘미르’를 개발했

고, 섬유시장에 일대 혁신을 일으켰

다. 미르는 사람들이 겨울에 많이 찾

는 니트 원단처럼 따뜻하지만 좀 더

부드러우면서 가격이 저렴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도 큰 인기를 누렸다.

박 대표는 미르 원단의 히트 이후

에도 새로운 제품을 찾기 위해 매일

개발에 매진했고, 이런 그녀의 신제

품에 대한 열정으로 지금도

한 달에 샘플비만

4~5천만 원을 사용하고 있다.

“중소기업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워요. 끊임없는 개

발, 노력 그리고 차별화로 경쟁력을

갖춰야하죠. (주)창우섬유만의 제품,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이 회사

의 이름을 알리고 그런 것들을 통해

더 높은 목표로 도약해야 합니다.”

개발과 더불어 박 대표가 중요하

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신뢰다. 여러

협력업체들과 함께 일을 하는 그녀

는 그들과의 관계에서 신뢰가 꼭 필

요하다고 말한다. 또한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사소한 약속이라도 쉽게 여

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약속을 지

원단을 편직하는 기계인 환편기. 원단 샘플의 모습. 행거 형태로 만든 원단 샘플.실을 가공하기 전 준비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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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며 감사의

인사를 전하자 김형근 지점장은 “길

지 않은 기간이지만 왕성한 거래를 하

고, 기업가 모임도 주선하는 등 오히

려 저희가 대표님에게 도움을 받았다”

며, “현재도 섬유업계에서 상위에 랭

크되어 있는 (주)창우섬유가 한 단계

더 도약해 최고의 위치에 오르길 바랍

니다”라고 응원의 메시지를 남긴다.

새로운 제품에 대한 관심과 개발

을 향한 노력, 주변과의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거듭해

온 (주)창우섬유. 박창숙 대표는 쑥

스럽지만 지금까지 함께해온 직원

들을 위해 회사를 더욱 튼실한 기업

으로 성장시키고 싶다는 포부를 밝

힌다. 직원을 위하는 마음과 직원들

의 애사심, 일에 대한 열정이 모여

앞으로 더욱 빛날 (주)창우섬유를

기대해본다.

TIP 박창숙 대표의 성공 노하우

1. 신뢰 : 신뢰가 모든 것의 바탕이며, 중심이다.

2. 약속 : 신뢰가 쌓이기 위해서는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3. 투명경영 : 숨기기보다는 나를 드러내고 솔직하게 경영하면 신뢰가 생긴다.

(주)창우섬유

대 표 박창숙

소 재 지 경기도 양주시 덕정동 68번지 4호

대표번호 031)858-8501~4

IBK기업은행 김형근 지점장(왼쪽)과 (주)창우섬유 박창숙 대표(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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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명품전IBK기업은행 제주지점 거래고객

회사명 : 한백(주) l 대표 : 김병호

제주공장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배낭골길 80 (064-772-5891~3)

제주영업본부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064-744-2238)

안양영업본부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천서로 55 (031-465-4142~5)

홈페이지 : www.jejuhb.com

MBC 라디오 매일 아침 9시 5분~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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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농업유전자원센터

송병권 실무관과 여사님들

글 | 박금선 (여성시대 작가)•사진 | 윤상영

아이들은 엉뚱한 것을 끝도 없이 묻습니다.

“쌀이 없어지면 어떻게 해?”, “다른 데서 가져오지”,

“그것도 없어지면? 전부 다 없어지면 어떻게 해?”

끝없는 아이의 질문에 곤란해지시거든, 이제는

“응, 농업유전자원센터라는 곳에 모든 씨앗이 안

전하게 저장되어 있단다. 걱정하지 마.” 이렇게 대

답해 주세요.

농업유전자원센터에서 일하는 송병권 실무관이 그곳에서 일하던

여사님들을 위해 <여성시대> 3부에 있는 ‘회식 한번 합시다’에 편지

를 주셨습니다. 삼겹살은 도착했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회식을 못

하게 되자, 의견을 모아 근처에 있는 ‘수봉재활원’에 선물했습니다.

월간 <여성시대>가 수원에 있는 ‘농업유전자원센터’에 들어서자

로비에 세계보건기구(WHO)가 인정하는 유일한 조류 인플루엔자

치료제인 타미플루의 원료인 스타아니스(팔각회향)가 놓여있고, 그

옆에는 700년 만에 꽃을 피운 고려 시대의 연씨앗이 전시되어 있

습니다. 토종 씨앗과 이것을 기증한 농민들의 웃는 얼굴도 보이고,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태국의 벼도 서 있습니다. 씩씩한 표어도 보

입니다. ‘한 알의 씨앗이 세계를 움직인다!’

전시물에서 알 수 있듯, 이곳은 세계 곳곳에서 유전자원을 확보

해 오고, 수집한 유전자원을 저장 보존하여 새로운 품종을 개발할

수 있도록 자원을 제공합니다. 이곳에 있는 우리의 ‘식물유전자원’

은 31만 여점으로 세계 6위고, 100년 동안 저장할 수 있는 첨단시

설도 갖추고 있어서 다른 나라에서 부러워한다고 합니다.

왜 씨앗이 중요한가를 김연규 센터장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똑같은 호박을 보고도, 누구는 정서적으로 아름답다고 보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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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들어가면 뜨거운 열기에 숨이 막히

고, 호박 담당자라면 호박꽃이

새벽에 피기 때문에, 새벽부

터 대기하고 있다가 꽃가루를

지켜주어야 합니다. 파종에서 수

확까지 다 손으로 해내고, 수확한

다음에는, 사진에서 보듯이, 일일이

쭉정이와 알곡을 고르고 분류해서

실험실이나 저장실로 보냅니다.

송병권 실무관은 역곡에 있는 농업기술원 옆에서 태어나 자랐습

니다. 그곳에서 해마다 ‘4H 경연대회’도 열렸는데, 전국의 농업지도

자들이 모여 축제를 하면, 영화도 볼 수 있었고, 그 축제가 곧 동네

축제였답니다. 부모님도 그곳에서 일하셔서 농림부에서 일하는 게

자연스러웠대요. 누에를 키우며 동충하초를 개발하는 데도 참여한

송병권 실무관은 직원들의 문화봉사단인 ‘황금물결’도 만들었습니

다. ‘황금물결’은 농촌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공연으로 농민을 위로

하고, 농촌 어르신들의 하소연도 귀담아듣습니다.

서양의 크리스마스트리가 사실은 우리의 구상나무를 가져가서

품종을 개량한 거고, 매운맛의 상징인 청양고추도 종자권은 우리

것이 아니라는 얘기, 속상해하며 들으셨지요? 이제는 그런 일이 없

도록 우리 종자를 잘 지키고 새로운 종자도 구해 올 겁니다. 우리

가 가진 것으로 우리 자손을 먹여 살리고, 거기서 천연의약품과 문

화산업, 관광자원도 만들고, 기능성 신소재나 바이오 에너지도 얻

어낼 겁니다. 씨앗 안에 봄이 들어있듯, 농업유전자원센터에는 그

래서 우리 미래의 봄이 들어 있습니다.

광자원), 누구는 식용으로 보고(식량자원), 누구는 호박에서 특수

한 성분을 빼내어 붓기를 제거하는 새로운 약품을 만들어낼 수 있

습니다. 60년대만 해도, 소출이 많고 비바람에 강하고 병충해에 강

한 작물을 만들고 키워내는 데 집중하면서 생산성을 중요하게 여겼

다면, 이제는 자원의 의미가 바뀌었어요. 의약품의 원료로, 관광자

원으로, 기능성 산업으로 활용범위가 커지면서 농업은 고부가 가치

를 가진 생명산업이 되었습니다. 유전자원의 부가가치가 얼마나 높

은지는 ‘금 1그램은 6만 원, 종자 1그램은 12만 원’이라는 비교에서

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송병권 실무관은 5년, 10년, 20년 동안 보관한 씨앗으로 농사

를 지어 다시 씨앗을 얻어 보관하는 일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산업화와 환경변화 때문에 생물 다양성이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그래서 세계 모든 나라가, 식량도 되면서 의약품이나 생명공학 산

업의 기본 재료가 되는 농업유전자원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자를 놓고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고 표현합니다. 품종개량을 하려고 해도, 토종 씨앗이 있어야 하

니, 여기 보관된 종자들은 이래저래 엄청난 블루오션입니다. 세계

를 얼굴이라고 보면, 우리 땅은 귀에 해당해서 에너지가 많이 몰

려 있는 곳이라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땅에서 나는 것은 다 맛

있고 알찹니다.”

이곳의 여러 분은 봄에 씨앗 심

고, 여름에 김매고 가꾸면서

전통적인 방법으로 농사

를 짓기 때문에 힘이 많

이 듭니다. 비닐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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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집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언

니, 오빠, 동생과 달리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였습니다. 껌 좀 씹던

비행청소년도 아니었고, 학교 가기 싫다고 한 적도 없는데, 큰애는

큰애라고 보내주고 아들은 아들이라고 막내는 막내라고 보내주시

더니, 중간에 낀 저한테는 바쁜 부모님 대신 언니, 오빠 뒷바라지

와 집안 살림을 맡기셨습니다.

언니, 오빠, 동생과 친구들이 학교에 다닐 때 저는 엄마를 따라

남의 집 밭을 매러 다녀야 했고, 엄마가 굴을 따오시면 종일 허리

를 구부리고 앉아 굴을 까놓아야 했습니다.

한번은 아침 일찍부터 남의 집 밭에서 모종을 하고 있는데, 친구

들이 지나가며 저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수군거렸습니다. 저는 가방

을 둘러메고 학교에 가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고, 수군거림이 꼭 저

를 비웃는 것만 같아서 자존심이 상해 호미를 집어던지고 집으로

김미자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파란만장 나의 성공기인생역전

장용의 단결, 필승, 충성2번의 면회 외

연애에서 결혼까지나이팅게일 천사와 복서의 만남

노래하나 추억하나단짝친구와 떠난 그녀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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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펑펑 울었습니다. 제가 걱정돼서 일하다

말고 집으로 오신 엄마를 향해 “학교도 안 보내 줄 거면서 날 뭐하

러 낳았어!” 모진 말로 소리를 지르고 집을 뛰쳐나왔습니다.

설움에 복받쳐 집을 나오긴 했지만, 1년 12달 새벽부터 밤늦게까

지 피곤하지 않은 날 없이 일하시고, 한겨울에는 세찬 눈바람이 휘

몰아치는 시장통 구석에 앉아 “굴 사세요”를 외치다 저녁 늦게 얼굴

과 손에 검붉은 얼음이 박힌 채 대야를 머리에 이고 들어오시던 엄

마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가난이 싫어 울고, 늘 미안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시던 엄마에게 미

안해 눈이 퉁퉁 붓도록 울다 보니 어느새 해가 지고 남의 집 굴뚝에

서 저녁밥 타는 냄새가 올라왔습니다. 일하고 늦게 오실 게 뻔한 엄마

를 대신해 무쇠솥에 쌀을 씻어 안치고, 계란에 파를 송송 썰어 넣어

소금 간 한 대접을 한쪽에 얹고 밥 불을 지폈습니다. 엄마가 들어오시

길 기다렸다 밥을 퍼 놓고, 따끈하게 끓인 숭늉 한 그릇을 내밀며 미

안함을 대신한 저에게 엄마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미안하다.”

엄마의 그 한마디에 학교 가는 친구들이 부러울 때도, 다림질해

놓은 교복이 구겨졌다고 언니, 오빠가 타박할 때도, 저는 몰래 눈

물을 삼키고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며 살았습니다.

언니, 오빠가 직장을 잡아 도시로 떠나고 막냇동생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주위에서 늦었지만 공부를 다시 하면 어떻겠냐고 하

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와 공부는 해서 뭐하나 싶은 생각에 포

기하고 뚜렷한 직장생활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일찍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살림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13년 전, 아이 둘 가르치는 게 버거워 동사무소에 구직

신청을 했습니다. 얼마후 장애인시설의 식당에서 공공근로로 일해

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고, 늘 해오던 일이 부엌일이라 흔쾌히

일터에 나가 집에서 하던 대로 정성껏 밥을 짓고 밥솥을 닦았습니

다. 그리고 근로기간이 만료되어 집에서 쉬고 있는데, 장애인시설

에서 공공근로기간 동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고 초등학교 졸

업자임에도 채용하고 싶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제 나이 서른일곱, 태어나 처음으로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습니

다. 가족이 먹을 음식을 한다는 생각으로 5년 동안 정성껏 식사 준

비를 했고, 경력에 따라 승급발령을 받아 생활지도원이 되었습니

다. 하지만 장애인을 돌보고 생활지도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습

니다. 배우지 못함에서 오는 무지함과 대학을 졸업한 직원들에 비

해 업무 처리 능력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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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하자. 지금 하지 못하면 평생 가도 못한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남몰래 중학교 과정을 독학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개월 후 검정고시에서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을 제외한 나머

지 과목에 합격했고, 남은 과목은 혼자 공부하기 어려워 학원에 다

니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학원마다 다른 학생들 때문에 검정고시

일정에 맞춰 수업해주기 어렵다며 거절을 했고, 나이 많은 검정고

시 준비생인 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고민 끝에 직장동료

의 소개로 과외 선생님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사정을 했더니, 검정

고시생을 가르쳐 본 적은 없지만 열심히 해보겠다고 흔쾌히 받아

주신 덕분에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독학으로 혼자서 공부한다고 할 때 ‘학교 졸업하면 떡이 생

기냐, 밥이 생기냐’며 반대하던 남편도, ‘지금 학교 졸업해서 뭐할

건데’ 하며 은근히 반대를 했던 아들 딸도, 이왕 시작한 거 꼭 합격

하라며 격려해주었고, 집안일도 시간 나는 대로 서로서로 도와주

었습니다. 그렇게 1년을 꼬박 공부해 결국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

했습니다. 저는 졸업장이 나오자마자 친정엄마에게 달려갔습니다.

“엄마~ 나 중학교 검정고시 합격했어!”

엄마는 졸업장을 끌어안고 제 이름을 쓰다듬으며 펑펑 우셨습니다.

“잘했다, 내 딸… 참 잘했다. 학교도 못 보내고 일만 시켜서 두고

두고 가슴이 아렸는데…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리고는 다락에서 언제 사셨는지도 모를 책가방을 들고 나오셨

습니다. 저는 엄마가 사주신 책가방에 남편이 사준 필통, 직원들이

정성껏 깎아서 넣어준 연필과 지우개를 넣고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고등학교 과정도 검정고시를 보려고 했지만 과외 선

생님께서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꼭 지식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학

교생활도 공부랍니다”라고 말씀을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20대부터

60대까지 다양한 인맥을 갖게 해준 방송통신고등학교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개근으로 졸업한 저는 졸업장이 나오자마자 친정으로

달려가 엄마에게 보여 드렸고,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저를 받아

준 직장에도 졸업증명서를 제출했습니다.

내친김에 저는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년에 전문대 사

회복지과(야간)에 지원, 벌써 다가오는 2월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

다. 그동안 학력 때문에 어딜 가도 주눅이 들고 위축됐었는데, 저

에겐 꿈이었던 대학생도 되었고, 학교 다니면서 만난 친구들과 인

맥도 쌓다 보니 이젠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들도 많아 사는 게 정

말 즐겁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사랑하는 딸의 상견례가 있었

습니다. 젊은 사람도 하기 어려운 공부를 한다며 ‘그 엄마를 보니

그 딸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해주신 사돈어른 덕분에 그동안의 제

노력에 대해 큰 보상을 받는 것만 같아 흐뭇했습니다.

2월에 나오는 전문대 졸업장을 넣어둘 자리를 쓸고 닦는 엄마에

게 졸업장은 졸업장일 뿐이라고 누누이 설명했지만 그래도 “네가

한 공부가 그냥 주워온 게 아니잖니. 웬만한 마음가짐으로는 하기

어려운 걸 네가 했으니까…, 나는 네 졸업장에 있는 글씨 하나하나

까지 다 소중하다”고 하셨습니다. 제 졸업장을 진열해놓고 보니 초

등학교 정규과정과 중학교 검정고시, 방송통신고등학교까지…. 저

처럼 화려하게 교육과정을 두루 거쳐본 사람도 드물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되돌아보면 검정고시를 시작으로 지금까지가 제 인생

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 행복했던 순간이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사람들이 복권에 당첨되면 인생역전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저는 제

인생이 바로 인생역전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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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 저는 해병 544기로 86년부터 88년까지 포항에서 상륙지원

단으로 군 생활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떨어져서

빈둥거린다고 아버지께서 “뭐하노? 놀고 처먹지 말고 군대나 가지!

문디 자슥, 고등학교 댕길 때 당구장이나 댕기고 친구들이랑 놀러

댕길 때부터 싹이 노랗트라. 문디 자슥!”

여기서 잠깐, 저희 아버님을 말씀드릴 것 같으면 한마디로 임꺽정

같은 분이십니다.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전화를 받으시면 뒷집에 사

시는 90세 되신 할머니가 통화 내용을 다 알고 계실 정도입니다.

입대하는 날 아침, “아버지, 저 군대 갑니다” 하니까, 다른 부모

님은 그래도 마음 아픈 척, 악수라도 해주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잠

옷 바람에 대청마루에 서서는 “그래그래. 빨리 가라! 빨리 가!” 그

말만 하시고는 “아이~ 춥다~!” 하시면서 방으로 들어가시데요. 나

참! 저도 명색이 외동아들인데 이게 뭡니까?

포항에 위치한 군에 입대한 저는 전반기 훈련을 마치고 운전병으

로 지원했기 때문에 저를 포함한 10명의 동기가 대구 2군사령부 2

수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2수교에서 점심을 먹고

추라이를 닦는데 동네 형이 행정병 병장으로 있데요.

“형! 여기서 뭐하노?”

“자슥아! 니는 여기서 뭐하노?”

“해병은 일등하면 특박 2박 3일 준다미?”

“그래 우야. 우리는 휴가 준다. 하니 신경 쓰지 마라. 1등 시켜

줄게.”

저는 농담인 줄 알았죠. 2수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8분 정도 거

리입니다. 아침에 교육을 나가면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데, 어머니

라도 자주 나와 보실 줄 알았는데, 한 번도 나와 보시지도 않데요.

무슨 주워온 자식도 아니고…,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해도 그렇다

고 애먹인 적도 없는데 참 그때는 무척 섭섭했습니다.

그렇게 교육을 12주동안 받는데 8주째 되니까 면회를 시켜주데

요. 면회 날 아침 다른 집은 김밥과 통닭을 사 들고 오시는데, 우리

아버지는 1톤 화물차에 옛날 목욕할 때 쓰는 큰 빨간색 함지박에

밥과 국, 그리고 프라이팬에 야외용 버너에 동네친구 6명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게다가 집에서 키우던 개까지 화물차에 싣고 들어오니

헌병이 장사꾼인 줄 알고 “절대 못 들어갑니다. 아저씨, 장사는 안

됩니다” 하며 막았습니다. “아이다~ 우리 아들 면회 온기라!” 하니

헌병이 지금까지 화물차에 개까지 싣고 면회 오신 분은 없다며 싸

우고 계시데요. 제가 가서 우리 아버지가 맞다고 확실하다고 헌병

에게 얘기하니, 헌병이 진짜냐고 다시 묻데요. 면회 온 동네친구 6

명과 면회 오지 않은 군대 동기들과 어머니 아버지, 삼촌까지 모두

이성우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3동

필승! 저는 해병 544기로 86년부터 88년까지 포항에서 상륙지원

이성우 |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3동 우

Page 45: ò+Í ¡, v ~ æ ) E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302.pdf · 2017-03-14 · 동네 구멍가게쯤 되는 곳이죠. 저는 작년 여름부터 작은 식당을

열댓 명이 둘러앉아 먹고 있으니 헌병이 한참 쳐다보고 지나가데

요. 그날 저는 친구들과 우리 집 개 워리와 면회를 했습니다.

그렇게 후반기 교육을 마치고 포항으로 배치받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병장이 돼도 부모님께서 면회 한번 오지 않으니 졸병들이, “이

성우 해병님 면회 한번 오는 거 보고 제대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

까?” 이런 말을 들을 정도였습니다. 대구에서 포항까지 1시간이면

되는데, 참 해도 너무 하데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제대 1달 남겨 놓고 있을 때, 아버지가 면

회를 오신 게 아닙니까? 어머니, 할머니, 고모님까지 오셨는데요,

부대 앞 식당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아버지에게 물었죠.

“아버지, 제대 1달 남겨놓고 뭐하러 면회 오셨습니까?”라고 물으

니, 우리 아버지 “자슥아! 오고 싶어 왔나?” 하십니다. “그러면 머

할라꼬 오셨습니까?” 하니, “자식 군대 보내 놓고 면회 한번 안 간

다고 동네 사람들이 욕을 해서 할 수 없이 왔다” 이렇게 말씀하시

데요. 그때 고모가 용돈 하라며 10만 원을 주시데요. 때마침 용돈

을 주려고 하시는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곤 다시 주머니에 넣으시

면서 “그 돈이면 되겠제?” 하시며 숟가락을 바로 놓으시고, 밥 먹은

지 1시간도 안 돼서 “그러면 바빠서 대구 올라 갈란다” 하시곤 차

를 몰고 올라 가시데요. 그게 군 생활 30개월 동안 딱 2번의 면회

였습니다.

그래도 제대할 때 자식 무사히 제대한다고 웃으며 맞아주시던

아버지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저도 어디 가서도 자랑합니다. 포항

공대 옆에 해병대학 나왔다고 말입니다. 추운데 수고하는 해병대

후배에게 힘내라고 말해주고 싶네요. 그럼 수고하십시오. 필승!

1970년인지 그다음 해인지 강원도 춘천과 화천 사이 전방에서

군 생활하던 초가을 무렵,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기승을 부렸습니

다. 마침 저는 고향에 휴가를 나왔다가 버스를 타고 귀대하는 중이

었는데, 매일 친구들과 밤새도록 술 마시고 곯은 상태에서 부족한

잠을 보충하느라 체면 불고하고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런

구호 소리가 저를 깨웠습니다. 춘천에 못 미쳐 의암댐 쯤인 것 같은

데, 헌병 한 명이 버스에 올라와서는 “콜레라 비상 때문에 검역이

있겠습니다. 군 장병은 모두 하차해 주기 바랍니다” 하는 겁니다.

대부분 휴가 갔다가 귀대하는 장병들이 ‘이건 또 뭐야?’ 하는 표

정으로 버스에서 내렸는데, ‘어랍쇼?’ 뭐 예방주사나 한 방 맞고 다

시 가는 줄 알았으나 곧바로 트럭에 실려 가게 되었습니다.

“어? 저는 8시까지 귀대해야 하는데요?”

저는 휴가 갔다가 귀대시간을 안 지키면 영창 간다는 고참들의

홍창선 | 경기도 수원시 효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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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를 들은 지라 걱정이 되어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 휴가 갔

다 귀대하는 장병께서 콜레라 보균자일 수 있으므로 이대로 귀대

하면 여러분의 병영에 전염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에 당분간 격리수

용됩니다. 자대에는 통보되니 염려 마십시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어리벙벙하다가 도착한 곳은 ‘○○군 병원’이

었습니다. 마치 무슨 수용소같이 여기저기 야전용 천막이 처져 있

고, 이백 명도 넘음직한 군인들이 가검물을 채취하고, 결과를 기다

리며 빈둥빈둥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때만 해도 군 생활은 기

합도 많고 고달파서 한편으로는 여기서 좀 쉬는 것도 좋다는 생각

을 했습니다. ‘야! 자대 가서 보초 안 서고, 뺑뺑이 안 돌고 국방부

시계는 돌아가고 만고강산 유람이네!’

한 1주일 정도 되던 날 검사결과 ‘별 이상이 없다’고 해서 예방주

사 한 대 맞고 귀대조치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대로 돌아간 지 한

사나흘 지났을까 “전 장병 전화 당번만 제외하고 연병장에 집합하

라!”는 전달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당시 서무계 조수를 맡은

졸병이었기 때문에, 고참들은 먼저 나가고 전화를 지키며 행정실에

서 급한 공문처리를 했습니다. “야! 홍 일병도 예방접종하고 와라”

는 장 병장님의 말에 펜을 놓고 뛰어 나가보니 “야! 빨리 뛰어라. 네

가 꼴찌다.” 의무대에서 온 의무병이 소리칩니다. 저는 팔뚝을 걷고

바로 정신이 들어

“이거 무슨 주사입니까?”

“콜레라 예방주사다.”

“네? 아, 저 이거 맞았는데요!”

그러나 이미 따끔하며 순식간에 주사를 맞은 뒤였습니다.

“언제, 어디서 맞았는데?”

의무병은 의료 기구를 챙기며 건성으로 물었습니다.

“휴가 갔다 오다가 끌려가서 맞았습니다.”

저는 사뭇 억울해하며 대답했습니다.

“무슨 소리고? 어디로 끌려가? 네가 포로냐?”

의무병은 웃어대며 저를 끝으로 접종을 마치고 철수했습니다. 무

슨 접종인지도 모르고 그냥 뛰어나와서 주사를 맞았으니, 저 자신이

멍청하고 어이가 없었지만, 콜레라가 점점 극성을 부린다니 한 번 더

맞아두는 것도 든든하겠다 싶어 더 억울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며칠 후 상급부대에 업무를 보러 노선버스를 타고 사단 본부(27

사단 강원도 사창리)에 가게 되었습니다. 버스 안내양에게 요금을

내고 버스표를 받고 자리에 앉아 졸며 흔들리며 가다가, 화천과 사

창리로 갈라지는 헌병 초소에서 버스가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는

면 보건소 소속의 흰 가운을 입은 예쁘장한 간호사가 올라와서는

“안녕하십니까? 현재 전국적으로 콜레라가 발생하여 방역상 예방

주사 접종을 실시하게 되었사오니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앞 승객부터 ‘기 접종자’를 확인하면서 주사를 놓기 시작하는 것입

니다. ‘어? 또 예방주사야?’하고 생각하며 제 차례가 오자 “저는 부

대에서 맞았는데요?” 말했습니다. 그러자 동승했던 헌병이 “뭐? 접

종증 있나?”

“그런 거 안 줬는데요? 부대 전체가 맞았습니다.”

“어디 부대인데?”

“네, ○○사 전차중대입니다. 확인해 보십시오.”

그러니까 그 헌병은 “야! 차 출발해야 하는데 언제 확인해! 접종

증을 지참하고 외출하라는 공문 보냈는데 너희 부댄 못 받았나?”

하며 윽박지르듯이 다그치는 것입니다. 접종증은 신경을 안 써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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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고 제가 공문 취급하는 서무병인데 공문하달을 받지 못했다

고 하면, 부대에 추궁되어 누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어 어물거리고 있으니까 “주사 안 맞으려고 너처럼 뺀질거리고 핑계

대는 병사가 하루에도 수십 명이다. 잔말 말고 맞아라” 하는 겁니

다. 저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입니다. 전화로 확

인해 보십시오” 하고 우겼습니다. 초소의 헌병도 제가 강력히 우기

니까 “그래? 그러면 하차해” 하고는 나머지 장병들이 주사 맞는 걸

간호사와 다시 진행하는 것입니다. 한참 후에 접종이 끝났는지 헌

병과 간호사가 내리고 차는 떠나려고 시동을 걸며 부릉댔습니다.

“어이, 자네 따라와. 확인해보자.”

“네, 그런데 저 차를 타야 하는데요?”

차가 그냥 출발하려는 것 같아서 물으니

“야, 전화 확인하려면 시간이 걸리겠지. 다음 버스 타라!” 하는

겁니다.

“다음 차가 언제 있는데요?”

“세 시간 후에 있다.”

하루에 서너대밖에 없는 노선버스이니, 이거 놓치면 세 시간을

헌병초소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아, 아닙니다. 저 그냥 맞을래요. 저 차 타야 합니다.”

이래서 저는 황급히 주사를 맞고 차에 올랐습니다. 몇 달 전, 사

단에서 막차를 놓쳐서 부대까지 50여 리를 밤새 걸어온 경험이 있

는 저로선, 그냥 맞고 가는 쪽으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 대신 이번엔 버스표만 한 ‘접종확인서’를 확실히 받아 챙겨 넣

었습니다. ‘벌써 세 대째, 이렇게 자꾸 맞다간 콜레라 예방이 아니

라 콜레라에 직방으로 걸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불안

해하며 사단 본부까지 가는 동안 몽롱해 졸았습니다.

얼마가 지났을까? “사창리 내리세요! 사창리!” 안내양의 큰소리

에 잠이 깨 황급히 버스표를 주고 내렸습니다. 중심가를 거쳐 사단

본부가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저쪽에서 확성기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 아, 주민 여러분, 현재 콜레라가 강원도 지역에도 번져서 군

의무반과 면사무소에서는 합동으로 예방주사 접종을 실시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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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라오며, 이미 근무지나 거주지에서

예방접종을 마친 장병과 주민은 ‘접종필증’을 제시하시면 접종을 안

하셔도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슨 전쟁이라도 난 것 같은 분위기가 거리에 깔리고 저놈의 예

방주사 소리만 들어도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콜

레라가 수그러들지 않고 점점 확산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저

는 ‘증이 있으니 이젠 안 맞아도 되겠지’ 생각하며 여유롭게 지나치

려니까, “어이, 일병! 예방접종 했드나?”

의무대에서 나왔는지 흰 가운에 병장 계급 모자를 쓴 위생병이

검문하듯 세웠습니다.

“네, 많이 맞았습니다.” 저는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많이 맞다니 뭔 소리고? 접종확인증 보자.”

“네, 여기 있습니다” 하며 주머니를 뒤져 접종확인증을 건네주었

습니다. 그러자 그 위생병은 인상을 찌푸리며, “야, 야, 이거 버스표

아이가? 접종증 보자 말이다.”

“예? 버스표라니?”

다시 되돌려주는 종이를 받아보니, 정말 버스 안내양이 끊어 준

승차표였습니다. 주머니를 다 뒤져봐도 아무것도 없고…, 그렇다

면? ‘오, 마이 갓!’ 아까 졸다가 버스에서 급히 내리며 버스표와 접

종증을 바꿔 낸 모양입니다. 안내양은 왜 표를 자세히 확인도 안

하고 받았단 말인가!

“분명히 맞았다고요! 세 번씩이나!”

소리 지르며 벅벅 우겨댔지만 안 통했습니다.

“뻥치지 말그라. 너 같이 안 맞을라 카는 놈들 한둘이 아이다. 증

이 없으면 싸게싸게 맞고 가그라. 야, 홍 일병! 이놈 아야, 대한민국

군인이 주사 한 대 맞는 일이 뭐 그리 무서브나? 퍼뜩 팔 걷으라.”

아아! 세상에 아무리 무서운 전염병이라 해도 며칠 간격으로, 한

가지 질병과 관련한 예방주사를 네 대씩이나 맞은 사람은 대한민

국, 아니, 전 세계에서 저밖에 없을 겁니다. 모든 예방주사는 적은

양의 그 균을 주사하여 가볍게 앓도록 하면, 진짜 병균이 침입했

을 때 싸워 이길 수 있는 면역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배운 것 같은

데, 저는 정량의 ‘따따블’인 네 번을 맞았으니, 이건 오히려 콜레라

에 걸리고도 남을 양이 아닐까? 이젠 ‘예방주사’ 말고 콜레라 ‘치료

제’를 맞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예방주사 많이 맞고 죽은 사람

도 있을까? 이렇게 죽으면, 군인으로선 불명예가 아닐까? 그래도

복무하다 죽는 거니까 순직처리 되어 국립묘지에 묻히게 될까? 정

신이 혼미해져서 그런지 온갖 잡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아이고, 그

놈의 ‘증’ 관리 제대로 못 해서 엄청나게 당하네.’ 계속 머리를 쥐어

박고 자책하면서 이번엔 접종증을 ‘신줏단지’처럼 아예 손에 꼭 쥔

채로, 그래도 대한민국 국군이니까 ‘씩씩해야 한다’고 스스로 격려

하며, 사단 본부를 향해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땐 콜레라 전염이 심각했던 모양입니다. 전염 확산을 막기 위

한 방역이 너무 철저했던 것인지, 제가 허술하고 어벙했던 것인지,

아무튼 그 후 이 황당한 이야기를 부대에서 하면 소위 ‘고문관’ 소

리나 듣고 지내게 될 것 같아 누구에게도 말도 못하고 있다가 제대

하고 40년의 세월이 흘렀답니다.

지금도 ‘증’ 관리만큼은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아파트 내에서 운

전할 때도 면허증을 챙겨서 나가고, 동네 공원에 운동하러 나갈 때

도 주민등록증을 운동복 주머니에 넣고, 외국에 나가면 여권도 배

에다 차고 다니기 등등…. 여러분, ‘증’ 관리 잘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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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고 믿을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면, 망설임 없이 “제 주먹입니다”를 외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가죽

바지에 말장화를 신고 청재킷에 헬멧을 쓰고 오토바이 시동을 걸

때면 세상 모든 행복이 품 안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습니다. 30년

전 그때 한창 젊은 패기로 읍내를 주름 잡던 무렵, 권투도장과 당

구장이 집보다 편하고 좋았습니다.

이씨 가문 5대 독자라고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할머니의 넘치는

과보호 속에 버릇없이 자라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큰 인물이 될

거라며 절에 불공을 드리러 간 할머니의 경대 서랍에서 쌍가락지를

꺼내 전당포에 팔아 품위유지비로 써버리곤 했습니다. 공부에도 관

심 없고 결혼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저 오토바이를 타고

바람을 가르며 달리는 것만이 최대의 행복이며, 주먹을 휘둘러 상대

를 굴복시키는 것이 사나이의 가장 멋진 모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재원 | 서울특별시 중구 무교동

그러던 어느 날, 완행버스 주차장 뒤편에서 우리 후배들이 싸움

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저는 오토바이를 애마 삼아 쏜

살같이 달려갔습니다. 상대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참패의 쓴맛을 보았습니다.

입안에 찝찝하게 고이는 피비린내를 맡으며 의식을 잃었습니다.

깨어보니 병원이었고, 낯선 병실에는 천사가 내려와 있었습니다. 온

몸에 통증을 느끼며 어렴풋이 바라본 그녀의 모습은 제 마음을 흔

들고 곧이어 멈출 것 같은 심장 박동을 되살려 주는 듯했습니다.

“심하게 움직이지 마세요,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그녀는 아픈 제 몸 상태에 대해 설명을 하고 있었지만 제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무슨 말인가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어, 혹시 오토바이 태워 드릴까요?”

한참을 망설인 끝에 엉뚱하게 내뱉은 오토바이 얘기였습니다.

“호호호. 오토바이요? 저는 무서워서 싫어요. 그리고 환자분은

오토바이 타려면 몇 달 지나야 해요.”

그녀의 웃음이 진주 알처럼 병실 유리창에 햇빛과 함께 부서져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는요, 주먹 쓰는 사람 별로예요.”

세상에 믿을 건 주먹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제 철학에 금가

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를 위해 권투 글러브를 벗기로 했습니

다. 6주 동안 입원해 있으면서 처음으로 책을 가까이했습니다. 독

서를 하는 제 모습을 보며 친구들은 “와, 어디가 아프긴 겁나 아픈

가 보다. 니가 책을 다 본다냐?” 친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

으로 걱정했고, 오로지 그녀에게 멋진 연애편지를 쓰고 싶어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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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책을 읽고 시집을 뒤적이며 쓸만한 구절을 메모하는 저에게 할머

니는 쌈짓돈을 꺼내주며 “우리 손주 여그 와서도 공부 하누만 할미

기도가 공염불은 아닌겨” 하셨습니다. 아마도 할머니 눈에는 모든

게 기특하고 대견하게만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전까지 공부라면 울렁증이 생기고 책만 보면 졸음이 쏟아져

10분을 참지 못했는데, 그녀를 떠올리면 무엇이든 할 것 같았습니

다. 엉덩이가 벌집 쑤셔 놓은 것처럼 주삿바늘에 혹사당해도 그녀

의 손길이 닿으면 행복했습니다. 갑자기 변한 제 모습에 다들 어리

둥절했지만, 제 인생의 봄바람을 만끽하며 대장부 설레는 가슴을

막을 자는 없었습니다.

어설피 주먹을 휘두르며 밤거리를 배회하던 지난날이 왜 갑자기

창피함으로 다가왔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가슴 한쪽에서 싹

트는 사랑의 감정은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병원에 청소부로 취직했습니다. 일은

힘들고 짜증은 났지만 흰 가운을 입고 복도를 오가며 그녀의 모습

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피곤은 봄바람에 눈 녹듯 사라졌

습니다.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고, 어설프게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주저 없이 말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성적 증명서 갖고 오라고 하면 자신 있어요?”

그녀의 대답은 칼바람보다 무섭게 심장에 꽂혔습니다. 병원 근무

를 하면서 검정고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 중퇴인 최종

학력이 어찌나 부끄럽던지 주먹보다 무서운 것이 또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엄마의 눈물 어린 호소도 공부에 대

해 접힌 마음을 펼치지 못했는데 그녀의 한마디는 십계명처럼 저를

움직였습니다.

주먹 세계와 작별하며 운동복과 권투 글러브를 불살라 버리는데

아무 미련도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병원 청소부 일과 검정고시를

차분하게 감당해내고 있는 자신이 대단하다는 뿌듯함으로 하늘을

보며 웃는 날도 있었습니다.

병원 근무가 끝나는 시간이 비슷했기에 가끔 그녀를 뒤에 태우

고 집까지 데려다 주는 날은 무슨 횡재를 한 것처럼 신이 났습니다.

오토바이 속도를 내면 그녀가 소리쳤습니다.

“무서워요. 천천히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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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잘 안 들려요!”

일부러 안 들린다고 대답하며 종전보다 속력을 높였습니다. 그러

면 그녀는 제 허리를 꽉 잡으며 등 뒤에 얼굴을 파묻었습니다. 그대

로 달리면 하늘에라도 닿을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서 이따금 그녀에 대한 소문이 들리기도 했지만 캐묻지 않

았습니다. 병리과 누구가 좋아한다거나 새로 온 인턴이 선물을 주

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묵묵히 그녀를 위해 기사 노릇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어떠한 경우라도 주먹을 휘두르면 다시는 만

날 생각하지 마요’ 그녀의 한마디가 늘 꼬리표처럼 귓가에 따라다

녔습니다.

야간대학을 졸업하던 날 누구보다 기뻐한 사람은 나의 천사였습

니다. 어쩌면 밤거리의 세계에서 형님 소리를 들으며 살았을 제 인

생에 행운의 여신처럼 나타나 진로를 바꿔준 그녀가 얼마나 감사한

지…. 지금도 그녀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던 날, 아버님의 첫마디

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네 성적 증명서는 이젠 안 봐도 되겠어. 그 눈빛이면 됐어. 마

음 편하게 갖게나.”

그해 저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그녀와 꿈같은 결혼식을 올렸습

니다. 지금도 그녀는 병원에서 백의의 천사로 근무 중이며, 저녁이면

그녀의 든든한 기사 노릇을 하러 병원 문 앞에서 서성거립니다.

딱 한 가지 문제는 제 장남이 운동하겠다며 공부를 져버리고 체

육관을 드나든다는 사실입니다. 저를 똑 닮은 모습을 보면 야단도

못 치고 아직도 아내 눈치를 보며 머슴처럼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아

들한테 아빠는 예전에 우등생이었고, 손꼽히는 모범생이었다고 못

박히도록 교육을 해서 철석같이 믿고 있답니다.

이은식 | 서울특별시 송파구 마천동

저는 198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같은 교회에 다니던 ‘수경’이라

는 예쁜 여학생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수경이는 거의 모든 남학생

의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요즘의 말로 ‘학교 얼짱’이었습니다. 그런

데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에게 수경이와 사귀는 기회가

왔습니다. 저는 수경이와 사귀게 되면서 친구들 사이에서 상당히

대단한 녀석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학생들의 만남의 장

소는 주로 빵집이었는데, 수경이는 팥빙수가 아닌 우유만 넣은 우

유 빙수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만날 때는 또 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같은 교

회 친구인 ‘강우종’이라는 녀석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늘 저랑 붙어

다녔기 때문에 수경이와 만날 때도 늘 같이 있었습니다. 그런 우종

이의 입버릇은 “수경이 같은 여학생이 또 있다면 나도 사귀고 싶

다”는 말이었습니다. 수경이에게도 “네 친구 중에 너랑 비슷한 분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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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나는 친구 없어?” 하고 종종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고

등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제가 수경이에게 “1년만 공부 열심히 하

고, 대학 가서 제대로 놀자”는 아주 순진하기 그지없는 바보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수경이는 대답 없이 빙긋이 웃기만 했습니다. 시

간이 흘러 고3 여름방학 때, 무료로 독서실을 이용할 수 있는 시민

회관에 공부하러 갔는데, 제가 잘못 보았는지 우종이와 수경이가

손을 잡고 제 앞쪽에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

으며 다리에 힘이 풀렸습니다. 이후 매주 교회에서 만나는 수경이

는 말을 걸어도 늘 “공부 잘돼?”라는 말 외에는 저에게 다른 얘기

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저는 자존심 때문에 우종이와의 관계

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더니, 친구 중에는 의외로 그 사

실을 아는 애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날 학교가 끝나자마자 수경이

네 학교로 달려가 수경이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수경이는 “네가 뭔

데 누굴 사귀라 마라 하는 거야?”라고 하는겁니다. 저는 땅에 주저

앉고 싶었지만, 가까스로 다리에 힘을 주고 집까지 어떻게 온 지도

모르게 먼 길을 걸어왔습니다. 밤이 되어도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생겼는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그런 생

각만 맴돌았습니다.

고3 2학기가 되자, 수경이와 우종이는 교회에서 자취를 감추었

습니다. 시간은 또 흘러갔지요. 이후 대입학력고사가 끝나고 교회

친구들 30여 명 정도가 설악산으로 1박 2일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

데 고속버스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들 이야기의 화두가 저였습니다.

주로 저에 대해 불쌍하다는 동정이 많았지요. 그게 오히려 저를 더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그날 밤 산장에서 친구들이 통기타를 들고

와서 저 보고 노래를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솔개 트리오

의 ‘여인’이란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던 중 그만 쓸데없는 감정에

젖어 눈물이 핑하고 도는 바람에 노래가 중단되었습니다. 그때 옆

에 있던 선영이라는 친구가 “왜 그래… 그냥 잊어버려~” 하는 겁니

다. 꼭 수경이 때문만은 아니지만, 다들 다음날 제 눈치를 보면서

다녔습니다. 저는 괜히 노래했다고 자책만 하고 있었고요. 선영이

의 한마디 때문에 저는 아주 불쌍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수경이와는 맺어지지 않았지만, 간혹 솔개트리오의 ‘여인’

이란 노래를 들으면 그때의 추억이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수경이보

다 더 착한 아내를 만나 아들 둘 낳고 잘살고 있는데 수경이랑 우

종이도 잘살고 있는지 가끔 궁금합니다. 솔개트리오의 ‘여인’ 신청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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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실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제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일하시는 모습과 작은 밥상

위에 놓인 책을 읽고 계시는 모습입니다. 형제들이 싸울 때도 큰소

리 한번 내시는 일 없고, 운동회 하는 날도 학교에 오셔서 물끄러

미 운동장 한번 바라보시곤 가시는 게 전부였습니다. 넉넉지 못한

살림 때문에 아침마다 ‘학용품 사야 한다’, ‘체육복 사야 한다’는 엄

마와 말씨름이 한창일 때면, 아버지는 ‘헛헛’ 하는 헛기침 소리만

내실뿐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한탄 소리는 담장을 넘었

죠. 아버지를 향한 한탄에도 아버지는 그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우리와 같이 사

는 분인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늘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고 책

을 보시던 아버지가 방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으시더니

제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둘째야~ 금순이네 가서 막걸리 좀 받아 온나~.”

저는 노란 주전자에 막걸리를 사와서 아버지 앞에 내밀었습니다.

아버지는 말없이 막걸리 석 잔을 연거푸 드셨습니다. 그리곤 저에

게 손짓하셨습니다.

“이리 온나… 이리~.”

아마도 제 기억으론 아버지 무릎 위에 앉은 적이 처음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말

씀하셨습니다.

“이분이 누군 줄 아나? 할머니다. 아버지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

8살의 나는 그때야, 우리 아버지도 엄마가 있고 아버지가 계셨다

는 걸 처음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이 할머니 생신인데… 살아는 계실는지~.”

아버지는 그렇게 말끝을 흐리시곤, 제 머리를 오래 쓰다듬으셨어

요. 그날 저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었

습니다. “구름도 울고 넘는 울고 넘는 저 산 아래~.”

그건 노래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한숨이었죠. 아버지가 청년

이었던 시절, 북에 가족을 둔 채, 바로 위 형님과 남으로 넘어오셨

다는 아버지…. 형님과도 헤어져, 평생 가족을 그리며 사셨다는 걸

그때는 몰랐습니다. 제가 결혼을 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보듬

고 산 후에야 아버지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통일이 되겠지~” 하셨던 아버지는 그리운 가족을 가슴

에 품은 채,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내일이면 두 번째로 맞는 아

버지의 기일입니다. 우리에게 많은 말씀은 안 하셨지만, 평생 외로

움을 안고 사셨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아버지가 가끔 탄식하듯 부

르시던 그 노래 ‘고향무정’을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 들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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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잘못했을 땐 바로 사과를

글 |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트위터 아이디 @suhcs)

일러스트 | 조신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것은 누구에게나 처음인지라 실수도 잘못도

있을 수 있다. 어린아이에게는 부모가 절대적인 존재이지만 부모가

스스로 생각해보면 자신 역시 빈 구석이 많은 한 인간일 뿐이다. 감

정적으로 아이를 대하기도 하고, 잘못 판단해서 엉뚱한 방향을 제안

하기도 한다. 때로는 오해를 해서 아이를 심하게 다그칠 때도 있다.

이처럼 부모가 아이에게 무언가를 잘못했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잘못을 깨달았다면 아이에게 바로 사과해

야 한다. 사과하고 이런 잘못을 다시 하지 않으려고 엄마도 노력하

겠다고 약속해야 한다.

어떤 부모들은 아이에게 잘못을 인정하면 부모로서의 권위가 떨

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기도 한다. 자식을 키울 때 어느 정도

의 권위는 반드시 필요하다. 아이가 부모의 말에 대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하고 생각한다면 자식 키우기가 어려워진다. 육아가 어

려워지면 부모는 결국 아이에게 더 공격적으로 행동하기 쉽다. 그래

서 부모와 자식은 가까우면서도 위아래가 분명하게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에게 잘못을 저지르고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권위를 지키는 길은 아니다. 오히려 부모로서의 권위만 더욱 떨어뜨

린다. 한번 생각해보자. 직장을 다니던 시절 내게 분명 잘못을 하고

도 사과 없이 그냥 어물쩍 넘어가던 상사와 깔끔하게 자기 잘못을

사과하는 상사, 그 둘 중 어느 상사에게 내 마음은 더 끌리겠는가?

더 존경하고 내가 인정할 상사는 어느 쪽일까? 분명 제대로 사과하

는 상사이다. 윗사람이 잘못을 인정하면 권위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

라, 오히려 존경과 호감을 느낄 수 있다.

사실 권위 손상을 이유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속

에는 아이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위와 아래가 분명히 나뉘어 있을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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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우리는 두렵지 않다. 상대와 같은 수준에 있을 때 상대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들 수 있다. 아이를 두려워하는 부모는 아이와 같은

수준에서 노는 부모다. 그런 부모라면 아이에게 적절한 권위를 갖기

가 어렵다. 권위는 힘이 더 세고 나이가 많다고 생기지 않는다. 내가

베풀고 상대가 느낄 때 권위는 만들어진다. 나 자신이 아이의 인생

에 모범이 되고 아이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할 때 권위

는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우리는 아이에게 잘못은 절대 저지르지 말라고 가르칠 순 없다.

세상을 살면서 실수와 잘못은 불가피하다. 다만 잘못을 하면 그에

대해 깨닫고 뉘우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자신의 잘못으로

피해를 당한 사람이 있다면 사과를 하고 도와야 한다고 가르쳐야

한다. 이후에는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가

르쳐야 한다. 이런 가르침은 책에 나오는 이야기로 배워지지 않는다.

아이와 늘 접하는 부모가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 본보기가 되어서

가르쳐야만 한다. 그리고 아이에게 내가 대하는 태도가 부모로서의

가르침의 거의 전부다.

만약 아이에게 잘못한 일이 있다면 진심으로 미안함을 표현해야

한다. 대충 무마하려고 장난감을 사준다거나 엉뚱한 보상을 해서는

안 된다. 말로 부모가 잘못했음을 인정하고 그런 잘못을 하지 않겠

다고 약속해야 한다. 아이에게 약속하면 우리 스스로 잘못을 반복

할 가능성을 상당 부분 줄일 수 있다. 물론 그럼에도 다시 같은 잘

못을 할 수도 있다. 그럴 때면 겸연쩍지만 용기를 내어 재차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부모는 이런 식

으로 노력하겠다고 구체적인 계획을 알려줘야 한다. 부모 자신이 한

말이 걸려서라도 자신도 더 쉽게 변할 수 있다. 꼭 아이를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변화를 위해서도 사과는 큰 도움이 된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꾸준히 부모가 자기 잘못에 대해 사과를 하

고 키우면 아이도 자기 잘못을 쉽게 인정하고 사과한다. 반대로 부

모가 사과를 안 하고 적당히 넘어가거나, 사과하면서도 아이의 잘

못이나 상황을 탓하면 아이도 마찬가지 모습을 보인다. “엄마 때문

에 그렇게 된 거야”, “엄마도 전에 대충 넘어가 놓고 왜 나만 갖고 그

래.” 초등학교 3학년만 되어도 아이가 이런 말을 한다. 아이가 그 말

을 할 때 부모로선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더 화를 내며

“어디서 이게!” 하고 말하지만 이미 권위는 바닥에 떨어진 상황이다.

잘못했다면 사과하자. 사과할 때는 토를 달지 말고 잘못을 인정하

자. 사과하고 또 잘못해서 겸연쩍더라도 다시 사과하는 용기를 내자.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부모가 잘못을 사과하며 아이를 키운다면 아

이는 잘못을 인정하는 용기도, 잘못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방법도

쉽게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가끔 뉴스를 보면 어른들이나 사회 지도

층 인사들도 사과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그것이 우리 사회

의 발전을 늦추는 큰 원인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부터 좀 더 아이들

에게 사과하는 교육을 하자. 책임을 미루기보다는 스스로 잘못을 인

정하고 바꾸는 용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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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민이 할머님, 지민 엄마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지민 엄마는 제

친정엄마예요.” 이 말은 지민 엄마의 하나뿐인 시누이가 지민이 할머

님께 드린 말이다. 지민이 엄마와 지호 엄마는 시누이 올케 사이인데,

친자매보다 더 사이가 좋고 남편과 다투면 지민 엄마는 시누이 집으

로 간다. 참 부럽고도 좋아 보이는 사이다. 지민 엄마는 내 조카며느

리, 지호 엄마는 시조카 딸이다.

석 달 넘게 말기 암으로 통증에 시달리던 시아주버니께서 떠나셨

다. 45년생. 노총각. 12년 동안 파킨슨병을 앓던 어머님을 홀로 모시

고 사셨다. 그렇게나 어머님 가시면 나도 따라간다고 하시더니만…. 시

어머니 가시고는 많이 가라앉아 계셨는데, 중풍이 왔다. 가볍게 지나

가나 했는데, 혈색이 영 안 좋아서 검사해보니 담도암이었다. 그래서

수술을 받았고 그 후 일체 항암치료 등은 안 하셨다. 결국, 재발했고

통증 때문에 힘겨워하시다가 가셨다. 장례식장엔 중학교 때 친구들부

터 친지들이 오셨다. 남편의 어릴 적 친구들도 왔다. 지금까지도 늘 가

까이 만나는 친구들이다. 마침 내가 지켜본 네 분은 이렇다.

<친구 1> 기러기 아빠. 방학이면 꼬박꼬박 아내와 아이들이 오간다.

고1짜리 딸이 아빠 불쌍하다고 돌아가자고 해서 알아보는데, 결국 아

이들 학교 문제가 간단하지 않아서 기다리며 고민 중이다.

<친구 2> 한 부모 가장. 진작 혼자되어 아들 둘을 잘 길러 다 결혼

시켰고, 담배를 끊은 후 체중이 불어 걱정이다. 어머님께서 반찬 등을

챙겨주시는데(아이들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쭉) 요사인 간을 못 맞추

셔서 얻어먹기 힘들다고….

<친구 3> 노모를 모시는 문제로 의견 차이를 보이는 아내와 잠시 떨

어져 노모 곁을 지키는 분. 노모의 치매 때문에 늘 걱정이다. 집에서 무

언가를 하다 태우시는 일도 있어 밖에 나와 있어도 좌불안석이다.

<친구 4> 아내는 암 수술 후 항암치료 중. 어머니는 치매가 있으셔

서 걱정. 남편 친구 중에서 제일 건강한 혈색으로 보인다. 역시 운동

을 꾸준히 한다는데, 거의 중독처럼 열심히 한단다.

이상 60대 중반의 네 남자에 대한 정보 수박 겉핥기,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설명해봤다. 건강하고 즐거운 노년 준비하기는 그야

말로 발등의 불이다. 마침 문상객 중 동창이 있어 그 친구와 긴 이

야기를 나누었다. 그 친구 남편도 암 투병 중이란다. 둘째 딸이 배필

을 찾을 생각도 안 하고 사니 그게 남편의 큰 걱정이란다. 시어머니

로부터 개성식 보쌈김치, 장 담그기 등을 배우면서 그저 ‘일, 일, 일’

이 많게 살아온 것 같았다. 여고 시절 곱디고운 조신한 미모의 그

친구 얼굴과 지금 내 앞의 얼굴이 번갈아 교차하는 듯하다. 그 사이

에 43년의 세월이 있다. 내조 잘하고 살림 잘하는 전형적인 맏며느

리 관상이다.

늘 옆에 계셨던 둘째 시누이는 숨 거둔 오빠 귀에 대고 “오빠, 외롭

게 해서 정말 미안해” 했다며 우셨다. 세상에 그 통증을 홀로 견뎠을

많은 밤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프단다. 난 떠난 이보다 남은 우리

신랑과 시누들의 우울함이 더 걱정된다.

양희은 | 여성시대 진행자

즐거운 노년 준비하기

양희은의 스튜디오에서

마낳아주셔서고맙습니다 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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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은 경우에 따라 약간씩 다를 수는 있겠으나

대개는 감독할 사람이 먼저 시나리오를 갖게 되면서 시작된다. 원작

이 있는 경우 판권을 소유하거나 감독 본인이 쓴 시나리오를 가지고

영화사를 찾아가서 설명하고 설득해서 계약되면 그때부터는 캐스팅

작업에 들어가는 것이다.

오리지널 시나리오보다 유명한 소설의 영화 판권을 확보하는 것은

작품 완성으로 가는 첩경이자 가장 안전한 길이다. 그런 만큼 유명한

소설을 차지하기 위해 쏟는 감독들의 정성과 노력은 가히 목숨을 거

는 것과 같다고 나 할까.

‘겨울 나그네’는 좀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원작소설의 작가 최인호

형은 그 소설을 영화화하기로 마음먹고 곽지균 감독을 낙점했다. 곽

지균 감독은 신인 데뷔작이었으니 하늘이 점지했다 할 정도로 감읍할

만한 축복을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요즘 말로 ‘대박’이었다. 아마 조감독 시절 최인호 형에게 성실함과

재능이 잘 보인 모양이다. 그리고 영화사가 정해지기 전에 캐스팅이

먼저 시작되었다. ‘민우’ 역에 내가 제일 먼저 정해졌고 ‘다혜’ 역에는

난산 끝에 당시로는 의외의 인물인 이미숙이 정해졌다. 그다음에는

‘제니’ 역에 이혜영. 그리고는 영화 촬영이 시작되었고 ‘현태’ 역의 안성

기 형은 촬영이 몇 번 진행되고서야 결정되었다.

최근 JTBC의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라는 미니시리즈를 찍으면

서 동두천을 지나 연천까지 매주 가게 되면서 ‘겨울 나그네’ 후반부에

내가 머물던 동두천 시절이 아련하게 떠올랐다. 클럽 씬 찍던 ‘무박 3

일’의 고생도 떠오르고, 다혜와 다시 만났던 저수지 씬도 떠올랐다. 그

때 너무 추워서 카메라가 얼어서 멈추는 바람에 재촬영까지 했던 기

억이 생생하다. 그 씬을 위해서 머리를 한 일주일간 감지 않고 까치집

을 지었던 일도 떠오른다.

1986년 1월, ‘겨울 나그네’ 촬영이 동두천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젊은 날의 추억이 동두천 곳곳에 남겨져 있었다. 작가인 최인호 형은

‘민우는 평생 강석우를 쫓아다닐 거다’라고 웃으며 호언장담했었다. 나

는 빙긋이 웃어버렸다. 그러나 역시 그 형의 예견대로 ‘겨울 나그네’ 민

우는 아직도 나를 따라다닌다.

26년 만에 그 ‘다혜’와 ‘민우’가 다시 만났다. 수많은 세월 동안 영화

와 드라마를 하면서도 그 둘은 만나질 못했다. ‘우리가 결혼할 수 있

을까’에서 처음 대면하는 씬을 찍던 날 ‘민우’가 ‘다혜’를 만나는 것 같

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얼굴에는 서로 다 많은 주름이

생겼지만, 그 시절 그 모습이, 그 느낌이 너무 생생했다. 나도 문득 다

혜를 찾아다니던 민우가 돼버린 느낌이었다. 흘려보내기엔 너무 아쉬

운 우리의 만남이었다.

SNS에 보니 몇몇 팬들도 “앗, 그 시절 우리의 민우와 다혜가 만나네

요”라면서 ‘다혜’와 ‘민우’의 드라마에서의 첫 만남을 놓치지 않고 아련

한 마음으로 글을 올렸다. 그렇다. 그때 우리는 가슴 저린 청춘의 시절

이었다. 그때의 우리도 그립고 혼자 훌쩍 떠나버린 곽 감독도 그립다.

강석우 | 여성시대 진행자

겨울 나그네

강석우의 스튜디오에서

되는 과정은 경우에 따라 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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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점을 도맡아 운영하면서도 늘 책을 좋

아하고, 시간 나는 대로 글을 쓰며 꿈을

꾼다. 현재는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

학과 학생으로 부산지부에서 발간하는

창작문예지 <낟가리>의 편집부원으로 활

동 중이다. 삶에 대한 아름다움이 다시

금 느껴지는 부분이다. 글을 쓰는 딸은

엄마의 블로그에서 보물을 찾는다. 엄마

의 보물을 찾으며 엄마를 읽는다. 그리

고 그렇게 발견하는 엄마에게 댓글을 달

고, 열혈독자가 된다.

엄마의 블로그에는 엄마가 발견한 숲

속 오솔길, 시장 상인들의 애환, 아버지

와의 추억, 재미난 학교생활에 관한 이야

기로 넘쳐난다. 자신의 속내를 가감 없

이 담아낸 엄마의 글은 담담하면서도 마

치 엄마 속에 잠들어 있던 소녀가 살아

숨 쉬는 듯 그 나이 때, 그때의 감성으로

생기발랄하다.

흰 눈이 내린 날에는 꽁꽁 언 손을 녹

여가며 눈사람을 만들고, 컴퓨터 고스

톱을 하느라 밤잠이 부족하다고 말하고,

누군가 가게 앞에 놓고 간 달걀 한 판을

주웠다는 사실에 재미있어 하고, 샤워하

지도 않고 잠을 자버린 어느 여름날 아

침, 스스로에게 핀잔을 주기도 하는 엄

마다. 남들에게도 모두 똑같은 일상이지

만, 엄마의 글을 통해 보면 그 평범한 일

상이 웃음이 되고, 눈물이 되고, 사랑이

된다. 그래서 딸은 매일 밤 엄마의 블로

그를 찾아, 엄마를 알아간다. 그리고 그

동안 엄마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우리가 엄마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엄마는 나에게 어떤

존재일까 보다 엄마의 존재를 이해하려

는 노력을 나는 또 얼마나 했을까, 그런

후회와 자성을 느끼게 해는 책이 <엄마

의 비밀정원>이다.

으로

을 녹

고스

하고,

판을

워하

글 |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MBC ‘라디오북클럽’ 출연)

엄마의 진짜 모습을 찾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장소

《엄마의 비밀정원》

행복한 책 읽기

며칠 전 한 선배에게 들은 말이 날 먹

먹하게 했다. “엄마가 제일 편해. 무슨 얘

기를 해도 다 들어주는 세상에서 유일한

내 편 아니냐?” 나이 50을 넘어선 선배

가 엄마라고 하는 것도 쑥스러웠지만, 그

의 혼잣말처럼 하는 그 대사에 내가 멈

칫해진 것은 그 선배 생각이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는 공감대가 느껴졌기 때

문이다. 엄마는 그렇다. 무뚝뚝한 젊은

군인들을 울게 하는 것도 훈련소에서 흙

투성이로 부르는 ‘어머님 은혜’이며, ‘이

세상 맛있는 음식의 수는 이 세상 어머

니의 수와 같다’라는 만화 <식객>의 유명

한 대사에서도 엄마는 살아있다.

그러나 우리가 늘 익숙하게 알고 있는

엄마는 내 추억과 마음속의 엄마일 뿐,

엄마가 문득 여자라는 것과 엄마도 과거

와 추억이 있다는 것과 아직도 따뜻한 마

음과 희망, 그리고 꿈이 있다는 것을 잊

고 지내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문득

그런 낯선 엄마의 이야기와 행동을 보면

왠지 모르게 신기하면서도, 서운하고, 아

프고, 미운 맘을 갖게 되는 것이 이기적

인 자식들의 본성이다. 그런데 그런 이기

적인 본성에 놀라움과 웃음, 그리고 이해

를 선물해주는 엄마의 기록이 있다.

<엄마의 비밀정원>은 58세에 블로그

를 개설한 엄마의 기록이며, 그런 기억

에 자꾸 끼어드는 딸의 댓글이다. 그래

서 여전히 60대 소녀인 엄마의 감성에

놀라고, 그런 엄마의 꿈에 박수를 보내

게 된다. 블로그를 만들어 소소한 일상

을 따뜻하고 솔직하게 글로 풀어낸 엄마

는 1947년생 신순화 씨다. 전쟁과 가난

속에 공부는 꿈도 못 꾼 엄마가, 60세에

중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64세에 고등

학교를 졸업한다. 시부모와 남편을 먼저

보내고, 운명처럼 남겨진 부전시장통 철

신순화, 김미조 지음 | 2013년 | 나비장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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