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l Categories
Home > Documents > 경기문화재단 출판 시리즈 talktalk communit art˜‘똑talktlak-결과집-WEB.pdf · 344...

경기문화재단 출판 시리즈 talktalk communit art˜‘똑talktlak-결과집-WEB.pdf · 344...

Date post: 30-Aug-2019
Category:
Upload: others
View: 8 times
Download: 0 times
Share this document with a friend
378
http://communityart.co.kr 04 경기문화재단 커뮤니티와 아트 출판 시리즈 talktalk communit & art
Transcript

http://communityart.co.kr

04경기문화재단커뮤니티와 아트 출판 시리즈

talktalk communit

& art

talktalk communit

& art

http://communityart.co.kr

04경기문화재단커뮤니티와 아트 출판 시리즈

경기문화재단 커뮤니티와 아트 출판 시리즈 4

2014 똑똑 Talk Talk 커뮤니티와 아트

업무총괄|양원모

수석학예사|백기영

학예 | 박초희

업무지원 | 박정호 윤소영 임은옥 오혜미 도종준

행정지원|권신 유상호 김지혜

홍보 | 이학성 김태용 김경민

디자인, 인쇄|아침미디어

원고저작권|각 필자

사진저작권|각 필자와 사진 저작권자

책임편집 | 유능사(안대웅/최정윤)

기고자 | 김미정, 김시습, 김수영, 김영주, 김정현, 김진주, 김하나, 김혜경, 남선우, 무적 큐레이터, 류혜민, 리즈박, 박가희, 박초희,

박희정, 백기영, 송윤지, 신양희, 신현진, 오사라, 윤민화, 윤율리, 윤형민,이나연, 이병희, 이보나, 이성희, 이슬비, 이영욱, 이지민,

이지연, 이정헌, 이헌, 임국화, 장승연, 장혜진, 전효경, 조숙현, 최정윤, 황규관, 흑표범

번역 | 김광순 윤형민

블로그주소 | http://communityart.co.kr

블로그디자인 | 일상의 실천

주최·주관|

후원|

발행인|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엄기영

발행처|경기문화재단

ⓒ 경기문화재단

본 자료집은 커뮤니티 아트의 담론을 활성화하기 위해 운영한 2014년 “똑똑 Talk Talk 커뮤니티와 아트” 웹진의 기고문을 모아

경기문화재단이 발행하였습니다. 본권에 수록된 글과 도판은 경기문화재단의 동의 없이 무단으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경기문화재단

442-835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로 178

T. 031-231-7231-9 / F. 031-236-0283

www.ggcf.kr

트위터 twitter.com/ggcf_kr

페이스북 facebook.com/ggcforkr

003

2014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서문

talktalk talktalk ccooccocc mmunit mmunit oommunit oo

& & artart

http://communityart.co.krhttp://communityart.co.kr

0404경기문화재단경기문화재단커뮤니티와 아트 커뮤니티와 아트 출판 시리즈 출판 시리즈

004

지식공유를 위한 플랫폼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백기영 (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팀 수석학예사)

예술은 더 이상 세상을 향한 창문이 아니다.

그것은 관객을 상호작용과 변형의 세계로 초대하는 통로이다. (로이 애스코트)

‘좋아요!’ ‘공유할게요!’

지난해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블로그에 아르코 미술관 큐레이터 전효경 씨가 국내 대안공

간들의 문제를 분석해서 쓴 글 “대안은 없다. 자기조직화가 미래다.”가 실렸다. 이 글을 페이스북

에 공유한 후 며칠 만에 무려 73개의 공유가 달리면서 SNS로 퍼져 나갔다. 순수하게 미술계의 문

제를 다룬 글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되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동안 잡지 매체에서 글을

써왔던 필자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거기에 반응해 왔다.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는 국내 공동체 기반의 예술에 대해서 비평적으로 제고하고 경기도 내에서 벌

어지고 있는 활동들을 바깥에 소개하기 위해서 2011년에 만들어진 블로그다. 이런 블로그에 실

린 글이 SNS를 타고 국내 미술계 관계자들 뿐 아니라,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부류의 전

문가들이 읽고 의견을 보내오는 장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처럼 동시대 예

술이 접하고 있는 환경은 지역적인 이슈들을 국제적으로 접속하고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것이 일

상화되었다. 그러다보니 예술의 지식정보 생산과 소비가 지난 10년 전에 비해서 비약적으로 빨

라지고 그 양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MIT가 최근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과거에

비해서 연구자들의 연구기간이 늘어나고 발표 논문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그 만큼 여러

면에서 전문지식을 다루는 일들이 방대한 정보들을 정교하게 다루고 가공하기가 어려워 졌다는

005

2014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서문

것을 의미하면서도 우리는 이 많은 정보들을 손쉽게 만날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직면해 있

다. 그렇다면 이렇게 엄청난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동시대 예술의 정보를 생산하고 교류한다는 것

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세계 최초의 공동문장

백남준은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한국에 제안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동지인 신시아 굿맨

(Cynthia Goodman)과 김홍희(현 서울시립미술관장) 큐레이터와 함께 ‘정보예술(Info art)’전을

열었다. 이 전시의 서문에서 신시아 굿맨은 이 전시가 백남준의 오랜 열망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이 전시 이전에 1974년 록펠러 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 “후기 산업사회를 위한 미디

어 계획”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는데, “새로운 전자 수퍼 하이웨이의 건립”이 미래의 문명을 어떻

게 변화시킬 것인가 그 영향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국내에 인터넷 통신망의

사용자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었는데, 이 전시에서는 ‘정보예술’을 다루고 있었다. 더글라스 데이

비스는 이 전시에서 인터넷 통신망을 이용한 <세계최초의 공동문장> 이라는 프로젝트를 선보였

는데. 전 세계 5만 명이 넘는 참가자들이 문장을 만들어 함께 만든 문장이 100페이지는 넘을 것

이며 이 문장들을 연결시킨다면 1 마일도 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는 인터넷이 아니라

팩스를 활용한 예술작업에 가깝게 들렸다. 요즈음 같으면 하루 만에도 손쉽게 그 정도의 문장은

만들어 낼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불과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프로젝트는 최첨단 미디어 아

트 전시의 ‘야심찬 프로젝트(?)’ 중의 하나였다. 더글라스는 1 마일이 넘는 <세계 최초의 공동문

장>을 인터넷 네트워크를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다. 필자도 한 문장 정도 동참하긴 했지만, 그 프

로젝트가 언제 어떻게 종결되었는지는 관심을 갖고 찾아보지는 못했다.

다중 커뮤니케이션

이처럼 백남준이 제안한 ‘정보예술’전시에서 중시되는 것은 공동의 미래에 대한 예술가와 과

학자, 기술자들의 협업이었다. 무엇보다도 삶과 예술을 통합하려 했던 ‘플럭서스(Fluxs)’ 예술가

들의 전통을 따라 관객들이 참여하는 상호작용과 변형의 세계로 초대했다. 그는 일찍부터 일방적

인 메시지를 쏟아 내는 상업방송에 저항하여 여러 개의 비디오가 상호작용을 하고 획일적인 이미

지를 교란시키는 “장치된 TV” 시리즈들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미디어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상

업방송의 ‘일 방향 메시지’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한 명의 예술가가 비싼 값을 치르고 구

006

입한 자신의 텔레비전 부라운관을 막대자석을 이용해서 일그러뜨리는 행위가 상업방송의 권력

에 저항하는 일이라고 확대해석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초창기 텔레비전 수상기의 보급을 통해

매스 미디어가 오늘날과 같은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적었을 것이

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꿈꾸었던 ‘쌍 방향 커뮤니케이션’은 인터넷 통신과 소셜네트워크

시스템의 확장으로 인해서 이제는 일반화되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스마트 폰을 통해서 간단한

정보를 SNS에 전송하고 나에게 전송되어온 정보들을 공유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생산한 정

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지 못한다. 최근 3년간 생산된 정보가 지금까지 인류가 생산한 정보의

양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하니 이는 가히 놀랄 만한 정보의 범람 시대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경기문화재단이 2011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블로그는 ‘커뮤니티’ 와

‘아트’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웹진이다. 이 웹진이 시작될 당시에는 ‘커뮤니티’의 개념

도 약간은 지역적이고 한정적인 상태에서 출발했고 ‘아트’도 사회적인 예술의 범주에 머물러 있

었던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 웹진은 이른바 ‘공동체 기반의 예술’로 대표되는 국내 ‘커뮤니

티 아트’ 비평의 일환으로 제안된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나라 뿐 아니라, 전 세계 대부분의 국

가들은 급속한 경제성장과 매트로폴리스들의 생성으로 가속화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그늘

속에서 전통적인 개념의 ‘공동체’들이 해체되고 예술도 공동체들과의 접속이 끊어진 채로 상업

적인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전통적 개념의 ‘공동체’를 복원하거나 이 ‘공

동체’들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예술의 사회적 실천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러한 활동이

가지는 예술적 비평이나 또 사회정치적 차원에서의 의미를 찾는 일 또한 기존의 예술비평에서는

다루기 힘든 것이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활동들은 전 지구적 차원에서 확대되고 있다는 것이다.

2013년 개편을 걸쳐서 지난해를 지나고 보니 ‘커뮤니티’와 ‘아트’는 서로 용해되어 그 형체를 찾

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호해졌다. 앞서서 더글라스 데이비스가 생산했던 <세계최초의 공동문장>

에서처럼 동시대 예술은 이제 ‘커뮤니티’와 함께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제는 ‘커뮤니티’도 ‘아

트’도 분리된 개념을 상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술의 생산과 동시에 소비는 다중네트워크 시스템

위에서 이루어진다. 이 블로그에서 생산된 글들이 SNS의 유저들을 통해서 끝없이 확산해 나가고

있는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동안의 블로그와 웹진이 자기중심의 플랫폼을 지향했다면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블로그

는 가급적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기고자들의 아이디어와 정보를 다양한 차원에서 다루려고 노력

했다. 특히,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획자나 예술가들이 여기에 다양한 동시대 예술 정보를 제

007

2014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서문

공해 주어서 그 다양성이 확대되었다. 3년 차가 되는 2014년도 한 해 동안의 글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아 언제 이런 글이 똑똑에 실렸었나?’ 할 정도로 생소한 글들도 보인다. 하지만,

SNS를 통해서 우연히 마주치는 인상적인 글들이 상당수 똑똑에서 부터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때면 정보의 진원지가 된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지식정보가 범람하는

시대의 예술은 자꾸 지식정보의 생산형식을 따른다. 그 유통경로도 다원적이어서 기존의 예술비

평의 체계들을 훌쩍 넘어서 확대 된지 오래됐다. 인류가 지금까지 네트워크와 접속 연대를 위해

노력해 온 것은 지식을 공유하는 것이 공동의 문제에 대처하는 가장 우선적인 일이었기 때문이

다. 오늘날 급변하는 동시대 예술의 현장에서 예술은 지금 이순간도 시공간을 초월해서 서로 접

속하기를 확장하고 있다. 이러한 일들을 실현하는 것이 어찌 한 지역문화재단이 얼마 안 되는 예

산을 투여해서 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는가? 여기에는 여기저기에서 우리와 같은 고민을 안고 있

었던 필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 필자들을 묶고 매 회 마다 좀 더 명료한 주제

의식을 만들어 보려고 노력한 유능사(안대웅, 최정윤)의 노력이 큰 힘을 발휘했다. 이 자리를 빌

어서 이 웹진을 1년 동안 편집하고 운영해준 유능사와 필자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서문

004 지식공유를 위한 플랫폼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 백기영 (경기문화재단 문예지원팀 수석 학예사)

가족과 커뮤니티

014 예술적 유전자와 가업 ···································································· 이나연

020 가족과의 소통: 큐레이터 이성휘 인터뷰 ····················································· 최정윤

026 가족, 이웃 그리고 공동체: 작가 임흥순 인터뷰 ··············································· 김미정

031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 박희정

034 Ressentiment-Hyo: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예술가가 사는 법 ···························· 윤율리

040 새로운 가족?: 아직은 샴페인의 뚜껑을 닫아두어야 할 때 ······································ 김시습

협업과 커뮤니티

046 경험의 확장, 경계없는 장르: 장민승+정재일 인터뷰 ·········································· 장승연

052 영원한 일시적 합의를 향하여: ETC(이샘, 전보경, 진나래) 인터뷰 ······························ 박희정

057 협업을 대하는 미술관의 자세 ······························································ 송윤지

062 그림과 돈에 대한 다소 이상적인 제안 ······················································· 이나연

068 선택과 집중의 공백: 삼성미술관 플라토 <스펙트럼 스펙트럼>전 ······························ 김미정

072 민간거버넌스와 마을 공동체 ······························································ 이 헌

076 급진적 지속을 모색하는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 디렉터 이승효 인터뷰 ······················ 윤율리

082 대안은 없다. 자기조직화가 미래다. ························································ 전효경

085 협업!? 부유(浮游)하는 언어에 대한 고찰: 독립문화기획자 류성효 인터뷰 ·········· 無籍큐레이터 Qrator

091 지속 가능한 생태를 위한 원동력, 협업 : THE SHOWROOM 디렉터 Emily Pethick 인터뷰 ······ 박가희

099 우리의 연대에 공명하라: “AAA_Asia Anarchy Alliance” ···································· 흑표범

흑표범 + AAA_Asia Anarchy Alliance 기획자 Wu Dar-Kuen 인터뷰

107 객관적 시선으로 관계를 사유하다: 작가 김소철 인터뷰 ········································ 이지민

CONTENTS

경제와 커뮤니티

114 어떻게 건물주는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을까? ················································ 이나연

120 [서평] 무형경제 Intangible Economies ··················································· 윤형민

123 두리반으로, 총파업으로, 미생으로 모인 예술가들 ············································ 김수영

128 예술가들이 실천하는 같이의 가치 ························································· 이슬비

132 개인들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 ························································· 김하나

136 홍콩 지역 미술현장의 자생적 움직임 ······················································· 이성희

142 기본소득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 황규관

교육과 커뮤니티

148 이치로, 고구마, 예술 그리고 교육 ························································· 이정헌

152 전시 그리고 ‘커뮤니티’ ··································································· 전효경

155 총체적 전망을 향한 교육이라는 희망 ······················································· 신양희

160 미술대학 교육? 과정, 대화, 다양성을 존중할 때 ············································· 장승연

165 큐레이터: 양성하거나 육성하거나 교육하거나 ··············································· 장혜진

173 가르침 없이 배우는 것은 가능한가 ························································· 류혜민

177 문화생산자로 성장하기: 홈 워크스페이스 프로그램 ·········································· 김진주

예술과 노동 ······································································· 신현진

184 사례비만 받을까 인건비도 받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193 계약서를 쓰고 일하시나요?

205 예술가라는 직업: 샤먼, 천재, 전문가, 노동자

216 대중미술계 - 제1회, <아티스트 스타> 제작발표회

부정성과 예술 ··································································· 이병희

230 싱가포르,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부적절한 몇몇 만남

239 ‘먹기’와 예술행위의 부적절한 만남 part. 1,2

262 휴먼_비휴먼 거래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 김영주

274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279 경계에 선 게임들과 새로운 커뮤니티

283 게임과 사회 시스템

리뷰

290 워킹메모리, 도시를 산책하며 연남/연희동을 듣다 ··········································· 김미정

296 제2회 예술로 가로지르기 섬머 아카데미 ··················································· 박초희

300 아시아를 맵핑하다 ······································································ 이지민

303 파리 국제 아트 페어 피악 ································································· 오사라

313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4 ······························································· 남선우

321 황학동,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윤민화

327 괴산의 아주 매운 페스티벌: 괴산페스티벌 기획자 사이 인터뷰 ·························· 無籍큐레이터

332 영토와 신체로부터 재생산되는 우생학적 정치 일지 ·········································· 임국화

338 최소 형태의 삶 ·········································································· 윤형민

CONTENTS

서평 ····················································································· 오경미

344 하드코어 로맨스로 살펴본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불안한가』

348 우리는 또 다른 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번역

354 대안공간의 대안적인 선택 ······························································윤형민 역

361 <내가 지난 여름에 한 것>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이지민 역

필자목록

370 필자목록

가족과 커뮤니티

예술적 유전자와 가업 / 이나연

가족과의 소통: 큐레이터 이성휘 인터뷰 / 최정윤

가족, 이웃 그리고 공동체: 작가 임흥순 인터뷰 / 김미정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 박희정

Ressentiment-Hyo: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예술가가 사는 법 / 윤율리

새로운 가족?: 아직은 샴페인의 뚜껑을 닫아두어야 할 때 / 김시습

014

이나연

예술적 유전자와 가업

가업이란 “대대로 물려받는 집안의 생업”이다. 보통 사업체나 토지를 기반으로 선대에서 경

험으로 체득한 기술과 함께 자연스럽게 후대로 전승하는 게 가업의 형태였다. 하지만, 근대의 산

업화와 자본주의의 후유증으로 대부분의 인구가 공적, 사적 기업의 월급쟁이로 전락(혹은 희망)

하게 됐다. 자영업을 하더라도 그 사업의 유행흐름이 빨라진 바람에 가업을 잇는다는 건 희귀한

일이 됐다. 전문직이 대물림되는 경우도 있으나, 이에는 자녀의 재능이나 흥미, 수학능력 등이 동

반돼야 한다. 이런 마당에 예술계에서 가업을 잇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미술은 말할 것

도 없다. 가문의 유산이 될 만한 특별한 비법이나 기술이 현대미술에서 유효하지 않기도 하거니

와, 드문 확률로 대를 이어 작가로 데뷔한다 해도 긴 인생 동안 경제인으로서 자립할만한 돈을 미

술행위만으로 충당하긴 어렵다. 그렇게 고단하고 대우도 못 받는 직업을 부모가 자식에게 권유하

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한국의 부모들은 대부분 자식들이 고시오패스가 되거나 대기업의 종이 됐

을 때, 자식교육에 성공했다고 믿는다. 각종 한계로 부모 나름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성공엔 이르

지 못한다면, 최소한 아무기관에라도 속해 월급이라도 받았으면 한다. 주변사람들이 어린 자식

에게 “예술에 재능이 있다”는 칭찬을 하는 걸 싫어하고, 적극적으로 만류하기까지 한다는 게 풍

조라니 말 다 했다. 이 무수한 외압에도 불구하고, 어느 시대에나 예술가는 탄생한다. 심지어 많

은 수의 사람들이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며 굳이 미대를 가고, 사회에 나와서는 고된 현실과 미래

에 피폐해지는 뻔한 과정을 거친다. 왜일까? 사회적인 실패의 길로 공인된 루트를 좇는 이들의 정

체는 뭘까?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싶은 반항의 유전자 탓일까. 그렇다면 부모가 예술가일 때 자

식도 예술가로 성장할 가능성이 좀 더 높을까? 실제로 예술가 유전자는 확실히 우성이 아닐까 싶

은 증거들이 있다. 일단 성공을 해야 필자의 레이더에 잡힐 테니, 성공한 예술가 집안 위주로 예

가족과 커뮤니티

015

술 유전자는 어떻게 유전되는지 살펴볼까 한다. 한국에도 청출어람의 대명사인 서세옥 서도호 부

자 등 여러 예가 있겠으나, “가족만을 건드리지 말라!”는 한국의 정서를 고려해 해외를 중심으로

사례를 찾는다.

과장스럽게 확대된 조형물을 공공미술로 소개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현대작가, 1969년생 윌

라이만(Will Ryman)은 원래 극작가로 오랜 간 활동하다가 2001년에 본인의 극에 등장하는 캐

릭터를 만들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그 작품들을 2002년에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였으니 10여

년에 걸친 작품 활동으로 안정적인 커리어를 그리고 있다. 공공미술을 취급하는 첼시의 대형갤

러리 폴 카즈민 전속. 바로 그의 아버지가 미니멀한 올-오버 화이트 페인팅으로 유명한 아버지인

로버트 라이만(Robert)이다. 미술계의 커다란 산인 아버지를 넘기 위해 윌은 작품의 크기로 말을

하고 있던 건 아닐까하고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어머니 역시 유명한 추상화가 메릴 와그너

(Merrill Wagner)고, 동생인 코디 라이만(Cordy)도 조각가다. 구상작품을 하는 윌보다는 추상작

업을 하는 코디가 부모의 작업성향을 좀 더 닮아있다. 로버트는 그 전에 페미니스트 미술사학자

루시 리파드(Lucy Lippard)와 결혼했다가 사이에 아들 에단 라이만(Ethan)을 두고 이혼한 바 있

다. 에단은 얼마 전까지 사운드 엔지니어로 일하다가 시각 예술가로 전향했단다. 그렇다면, 로버

트의 유전자는 확실한 우성인자다. 게다가 아버지, 어머니의 친구와 동료가 다시 뉴욕화단의 유

명 화가이거나 화상, 컬렉터인지라, 2세들의 성공에 확실한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강철로 만든 기하학적 추상 조각으로 유명한 데이빗 스미스(David Smith)가 배우이자 오페

라 가수인 제인 로렌스 스미스(Jane Lawrence Smith)사이에서 낳은 두 딸은 안무가 캔디다 스

미스(Candida)와 작가 레베카 스미스(Rebecca)다. 데이빗은 현대무용에도 조예가 깊었다 하니,

두 딸의 직업은 이미 아버지에 의해 결정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레베카는 아버지에 대해 회고하

는 글에서, 유명 작가인 아버지의 뒤를 따르는 후배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는 일의 어려움과 그 고

난을 이겨낸 본인만의 해결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작품을 무시

하면서 나는 나 자신만이 가진 더 나은 감각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부모가 예술가인 많은 사람

들을 아는데, 모두들 정말 힘들어했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되돌아보면, 이건 단순의 가업을 이어

받는 것과 같다. 별 일 아닌 거다.”

또 하나의 아트스미스 집안을 소개해 볼까. 토니 스미스(Tony Smith)의 두 딸, 키키 스미스

(Kiki)와 세톤 스미스(Seton) 얘기다. 이 집안의 위대함은 그 모두가 나름의 시각언어로 유명세

를 얻었다는 것 외에도, 그 가족 간의 연대의식에 있다. 이 셋은 똘똘 뭉쳐 그룹전도 연다. 토니가

1980년도에 이미 유명을 달리 했지만, 2002년 길버트 브라운스톤(Gilbert Brownstone)의 기획

으로 팜 비치 ICA에서 세 사람이 공동전시를 열었다. 십년 뒤인 2012년부터 2013년까지 독일,

리히텐슈테인, 프랑스를 돌며 또 다른 그룹전을 갖고 있다. 한 집안에서 나고 자란 자매의 작업이

어떻게 다른지 살피는 것도 흥미롭지만, 한집에서 오랜간 생활하며 영향을 주고받은 아버지와 딸

016

가족과 커뮤니티

017

의 작업이 성별과 세대, 개인의 차이를 드러내며 어

떻게 발전했는지를 대조해 보는 일도 재미있겠다.

하지만 미술가 가족이 인맥을 공유하거나 동변

상련으로 위로받는 등의 장점만 갖는 것은 아니다.

<우드만가 사람들(The Woodmans)>라는 영화를

보셨는지. 프란체스카 우드만(Francesca Wood-

man)이라는 22살에 자살한 매력적인 사진작가를

조명하는 영화다. 영화는 화가이자 도예가인 아버

지 조지(George)와 도예가인 어머니 베티(Betty),

전기로 작업하는 오빠 찰스(Charles)를 인터뷰하

며, 이미 고인이 된 프란체스카에 접근해 나간다.

연인과의 이별이 부른 우울증으로 자살했다고 알

려진 프란체스카의 죽음에 어쩌면 다른 요인이 있

는 것은 아닐까 조심히 질문해보는 영화 같기도 하

다. 실제로 엄마인 베티의 강한 예술가적 자아가 프

란체스카에게 유년기부터 어떤 영향을 미쳤음을 영

화를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영화상에서 베티는 남

편인 조지를 어떻게 만났느냐는 인터뷰에, “그가 나

를 좋아했고,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니

까”라고 답한다. 이미 요절한 딸에게도 작가로서는

지고 싶어 하지 않는 일종의 고집 같은 것도 엿보인

다. 작업실에 틀어박힌 엄마에게서 아늑함이나 편

안함을 느끼지 못했음도 드러난다. 가족이라기 보

단 쟁쟁한 자아상들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해야했던

성장배경이 세상과의 끈을 놓을 때 별 미련이 없던

이유가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란체

스카가 사후에 재발견 되는 데는 예술가 가족의 역

할이 지대했다.

1981년 사망한 우드만은 사후 5년 뒤에야 주

목받게 된다. 가족과 친구들, 선생님들 외에는 그의

작업을 아는 이가 없을 적에, 당시 웰슬리(Welles-

ley) 미술관의 디렉터였던 앤 갭하트(Ann Gab-

018

hart)가 콜로라도에 있던 우드만가에서 처음 사진을 본다. 이 인연은 헌터 컬리지의 교수로 있

던 로잘린 크라우스(Rosalind Krauss)를 만나면서 탄력을 받는다. 그가 헌터 컬리지 학생들에게

우드만의 작품을 선보이길 원했고, 그렇게 우드만은 아비가일 솔로몬-고듀(Abigail Solomon-

Godeau)와 크라우스와 갭하트의 영향력 있는 평론과 함께 1986년 뉴욕 화단에 화려하게 소개

된다. 그리고 25년이 지난 2012년엔 구겐하임의 회고전까지 갖게 된다. 각종 아트페어와 미술관

의 사진 그룹전에서도 활발히 작품을 내비치는 중이기도 하고 말이다.

한편, 독특한 방식으로 가업을 인계한 경우는 작업 역시 기상천외했던 디터 로스(Dieter

Roth)다. “내가 만약 다음 역에서 먼저 내리더라도, 넌 기차를 계속 타줄래?”라고 68세의 나이

로 몸이 식기 전에 디터는 아들인 비요른에게 물었고, “물론”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 때

의 아들은 이제 아비가 되어 두 명의 아들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그 답은 바로 삼대를 이은 공동

작업이 말해준다. 하우저&워스의 첼시 갤러리는 꽤 공들인 2013년의 개관전으로 디터 로스의

회고전을 마련했었다. 당시 51세가 된 비요른과, 29세의 오더(Oddur), 24세의 에이나(Elinar)

는 한 달 간의 작업으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작업이자 본인들의 작업을 뉴욕에 소개할 수 있었

다. 각자의 이름을 전면에 내건 창작적인 작업 활동을 아니지만, 엄연히 공동작품을 제작한 것이

다. 개인적이기 마련인 작업을 협업 형태로 하길 즐기던 디터와 그 요구를 잘 따라준 후손들에 대

한 이야기가 녹아있는 사람 냄새나는 프로젝트다. 잘 나가는 현대작가들이 본인의 브랜드를 내세

우면서 착취하는 재능 많은 어시스턴트들에 대한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대목이다. 디터

생전 수백 점의 회화와 조각을 같이해왔던 비요른은 말한다. “나는 디터인 척하지 않아요. 아버진

천재고 그렇게 되는 건 정말 드물거든요. 그렇다고 내가 그가 있던 높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굴

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나 이건 우리들의 삶이고, 나는 거기에 뭔가 계속될 수 있는 게 있다고 생

각해요.” 그런 것 같다. 부모에게 크게 기대지도 않고, 본인의 재능을 자만하지도 않으면서, “뭔가

계속될 수 있는 게 있”는 것을 찾아나가는 일. 유전자의 비밀이나 천재적 재능보다는 이 말에서

나는 단서를 찾는다. 괴테가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하는 법”이라고 설파한 적

도 있거니와, 오늘도 우리는 후대에 남겨질만한 가치가 있는 뭔가 계속될만한 것을 찾고 있는 중

은 아닐까. 그것이 부모로부터 이어지는 것이라면 가치가 더할 테고 말이다. 레베카 스미스나 비

요른 로스의 성찰을 통해서 생각해보게 되는 건, 신자유주의 시대에 ‘다시 가업을 잇는 것’에 대

한 의미다. .

*덧붙이는 말: 글의 시작에 예술적 유전자를 운운하긴 했으나, 예술가 가족에 대한 사례를 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

만 재미삼아 구글에 예술적 유전자(artistic gene)를 검색해 봤더니 다양한 기사들과 연구결과가 잡힌다. 정신병과 연관이 돼 있

다거나, 실제로 유전이 된다던가 하는 식이다. 관심 있는 분들은 찾아보길 권한다. 재미있는 기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가족과 커뮤니티

019

020

최정윤

가족과의 소통큐레이터 이성휘 인터뷰

<쭈뼛쭈뼛한 대화>(아트선재센터, 2013. 7. 11~8. 18)전

가족과의 소통을 주제로 한 전시를 기획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30대 후반, 꽤 늦은 나이에 학교를 졸업했다. 대학에 입학한 것은 1993년인데, 미술이론과는

2000년도에 입학해 2012년에 졸업했다. 거의 20년 동안 학교 다니면서 애매모호한 백수로 지낸

기간이 꽤 길었던 것. 졸업 소식을 알리기 위해 지방에 살고계신 부모님 댁에 전화했는데, 아버지

가 “어디 산업체라도 알아봐라”고 하셨다. 공부한 시간과 그 공부의 전문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

는 발언이었다.

졸업은 했지만 막연했고. 일자리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세상으로 나오는 것이 두려웠다. <

쭈뼛쭈뼛한 대화> 참여 작가인 구민자, 박형지, 이소영과는 2012연 6월, 서대문구 재활용센터에

서 <세탁기 장식장>전을 함께 개최한 바 있다. 세 작가가 모여서 기획안 초안을 잡고, 기획자를

모색을 하다가 연락이 온 것이다. 이 전시를 통해 나는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됐다. 당시 작가들

은 홍은예술창작센터에 입주해 있던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아트선재센터에서 개최하는 오픈 콜

에 지원해보게 됐다. 세 작가들에게 전시 컨셉트를 말하자 모두 취지에 공감하며 참여 의사를 내

비쳤다. 하룻밤을 꼴딱 새워 기획안을 작성했다.

나의 아버지는 가족들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데 매일 서예를 한다. 이 전시 기획의 발단은

아버지의 말 한마디였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이 전시에 대해서 말을 꺼낸 것은 오픈콜

선정 발표가 나고 상당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아버지에게 전시 참여를 부탁드리고 그의 반응은 어땠는가?

공모에 당선됐다는 얘기는 미리 했지만, 그게 아버지와 함께 하는 프로젝트라는 사실은 전

가족과 커뮤니티

021

시 시작 3달 전인 2013년 4월께야 밝혔다. 아

버지 기존 작품을 출품하면 된다 여겼기 때문이

다. 아버지는 “절반은 못하겠다, 또 절반은 신작

을 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신 듯했다. 아버지를

작가로 모시고, 나는 큐레이터로서 함께 대화하

면서 전시를 만드는 거라고 말했지만, 아버지는

자기 머릿속에서 다 정리가 될 때까지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다. 몇 점을 낼 것인지,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 아무런 말씀이 없으셨다. 매

주 주말마다 집에 내려가 과정을 기록하기 위해

서 캠코더로 촬영을 하곤 했는데, 특히나 그것

을 매우 불편하게 생각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나를 동물원 원숭이로 만들지 말라”고 말했다.

결국 전시 참여를 취소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후 거의 한 달을 집에 내려가지 않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전화해서 중재를 해주셨

고, 다시 전시하기로 결정했다.

참여 작가들에게 이 상황을 말했더니, 오히

려 아버지가 더 작가적인 태도로서 준비를 하고

있는 것 같고, 훨씬 프로페셔널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나야말로 큐레이터가 아닌 딸로서 감정

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 말을

듣고 굉장히 뜨끔했다.

나는 누군가를 참여시키는 예술이 그 대상

이 관객이든 협업자든 자기 입맛에 맞거나 자기

가 원하는 방향으로 조종하는 건 아닌가 하는

삐딱한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근사

한 말로도 포장해서 설득할 수 없는 대상인 가

족과 함께 전시를 해보고 싶었다. 아무리 매력

적인 미학 용어를 가져다 붙여본들 가족은 이미

집에서 실체를 모두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먹히

지 않는다. 고상한 언어로 미술을 포장할 수 없

022

는 대상이 가족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족과

작업을 해보고 싶다는 오기가 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반대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자식의

전시에 참여한 “충성스러운 부모”로 보는 경향

이 강했다.

<월간미술> 2013년 9월호에 실린 비평글

에서 강수미 평론가는 이 전시에 참여한 부모를

“충성스런 협업자”로 기술한 바 있다. http://

desumi.egloos.com/11053060

우리는 협업이 아니라 ‘소통’에 중점을 뒀

다. 일정 시간동안 미술에 대해 부모와 함께 이

야기하는 것. 우리의 포커스는 협업이 아니다.

부모와 어느 정도 소통을 이뤄낼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전시였다. 나는 부모님이

소통에 있어서 내 맘대로 조종이 안 되는 사람,

예의를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런데 “충성스런 협업자”로 평가받은 데에는 아

쉬움이 남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에는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미술계에서 계속 일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누군가와는 협업을 할 것이고 공동으로 무

언가를 진행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평생에 한

번쯤은 가장 어려운 상대인 가족과 뭔가를 해보

고 싶었다. 우리가 얼마나 소통을 이룰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한번쯤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

했다. 부모와 함께 이러한 시간을 보냈다는 것

자체에 만족한다.

“착한 전시였다”는 평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앞으로 내가 전시를 얼마나 만들게 될지는

모르지만, 나의 첫 전시는 태도에 관한 전시여

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겉멋을 부리는, 어떤

가족과 커뮤니티

023

이론을 가져다 붙인, 이지적이고 현학적인 전시

가 아니길 바랐다. 전시가 객관적인 잣대로 평

가받는 것은 당연하지만, 태도 역시 굉장히 중

요하다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서 보

여줘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남을 속이고, 임

기응변으로 넘어가고, 눈속임으로 만들어진 것

은 구별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는

의미가 깊은 전시다.

참여한 세 명의 작가들은 작가로서 보다는

친구로서 먼저 알았던 사이다. 이 셋은 다른 작

가들에 비해 비교적 가족과 자기 작업에 대해

공유하는 편이다. 개인전이든 그룹전이든 딸의

전시를 한 번쯤은 와서 보고 가는 부모들이다.

그런 정도에서는 원만한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었다. “갈등 요소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없는 데 그것을 극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마찰을 억지로 극화시키고 싶지는 않

았다.

심사 받을 때 오인환, 정현 선생님이 너무

밋밋하니까 색깔이 다른 작가를 추가해서 넣으

라고 했다. 오인환 선생님은 작가로는 빠지라고

말했다. 하나도 바꾸지 못하고 그대로 했다. 실

제로 전시 준비 중에 다른 작가 한명을 섭외했

었다. 갈등이 심한 모녀지간으로, 파국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결국은 모험을 택

하지 않았다. 다른 작가와는 1년 넘게 얘기했던

사이라서 새로운 작가 투입으로 생겨날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 팀에게도 많은 시간

을 할애해야만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와 화해, 화합의 분위기가 나에게는 현

실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나의 현

상으로 읽을 수는 있을 것 같다.

024

구민자 작가의 부모님 역시 그를 무조건적

으로 지원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갚아야 한

다는 냉정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부모님들 역

시 예술에 대해서 동경하는 마음이 있는 분들

이고, 자식들이 예술계에서 근사한 사람이 되기

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www.guminja.com/

index.php?/1-1/gu-yang-art-foundation

나의 아버지 역시 대한민국서예대전에 계속

출품했는데, 딱 한번 입선하고 계속 떨어졌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서예 입상자들 작품을 전

시를 했었다. 걸려있는 것을 보고 온 적도 있다.

서예계 역시 선생님, 파벌, 라인이 있다. 나의

아버지는 오직 골방에서 글씨 쓰는 사람이다.

떨어지고 나면 사람들을 원망하고, 비리에 분노

하면서도 매년 5월이면 가서 대학로 예총회관

에 가서 지원했다. 전시장 중간에 롤을 따로 걸

어놨었는데, 아버지의 낙선작들을 모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예대전에 출품하는 사람들은 글

씨쓰기 좋은 유명한 구절을 주로 쓴다. 모양새

를 예쁘게 하기 위함이다. 아버지는 퇴계 이황

의 마니아다. 오직 당신이 원하는 시구만 쓴다.

천 몇백 수를 따로 번역해 번역본도 만들고 있

다. 본인이 쓰고 싶은 구절을, 직접 해석해서 써

서 제출한다. 부모들이 알게 모르게 비주류의

예술 세계를 드나드는 사람들이다. 유심히 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다. 사실 그런 것도 전시에

담겨 있다.

부모, 자식 사이의 소통뿐만 아니라 주류 미

술계와 비주류, 프로와 아마추어와의 관계에 관

한 이야기가 녹아있는 듯 보인다.

내가 어느 정도나 주류미술계에 있는지 가

끔 헷갈릴 때가 있다. ‘중심부’를 돌아다니면 좋

가족과 커뮤니티

025

을 것 같고, 트렌드를 놓치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것만이 전부인가 생각한다. 나 스스로를 주류의

숲을 돌아다니는 곤충이라고 생각하다가도 넓고 다양한 미술계에서 나는 참으로 무지몽매하고,

내가 하는 게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지는 순간도 있다. “주류를 떠나면 안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

을 할까봐 계속 경계하고 반성한다.

이 전시에서 다루는 것은 우리가 가치가 있는 예술로 인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생각하는 미술계 말고도 다른 세계가 많은데,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았던 걸 들

여다보게 됐다.

“가족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주제의식이 가지고 있었는가?

소영씨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매일 아침 메모로 써서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해서 답변

을 했다. 그 내용으로 시나리오를 쓰고 전문배우들을 구해 영상으로 만들었다. 전시장 한 구석에

도 비슷한 형식으로 질문을 써놓고 그 질문지에 관객이 참여해서 답변할 수 있도록 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를 했다.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에 관한 원망이 많았다. 우리는 이 전시

가 이토록 감정적으로 읽힐 줄 몰랐다. 많은 관객이 자기 현실에 비춰서 전시를 보고 있다는 생각

을 했다. 그렇지만 소통을 강요하기 위해, 어떤 교훈적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만든 전시는 아니

다. 그저 참여자 각각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억지로 화해시키기 위

해 자리를 마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만약 기획안이 뽑히지 않았다면 나 역시도 이런 시간

을 영원히 가지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교훈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잘 됐는

지는 모르겠다.

<이성휘>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미술이론과 학부 및 예술전문사과정을 졸업했다. <세탁기 장식

장>(서대문구재활용센터, 2012), 공동기획 및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2> 전시 코디네이터로 일했고, 현재 하이트문화재단에

서 근무한다.

026

김미정

가족, 이웃 그리고 공동체 작가 임흥순 인터뷰

가족은 인간이 태어나서 가장 처음 만나는 공동체이다. 그래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속한 가족이 처한 환경과 상황에 영향을 받으며 자라고, 이 경험들이 곧 세상을 보는 기준이 되기

도 한다. 작가 임흥순은 가난한 노동자였던 가족의 삶에 대한 사적인 기록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작가의 시선은 가족과 비슷한 환경의 타자들로 확장되어 현재는 지역 공동체, 사회 구조 안

에서 보이지 않고 소리 내지 못하는 이들과 소통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상암동에 있는 작업실에서는 곧 선보일 <위로공단>의 편집 작업이 한창이었다. 작가는 이제

또 다른 ‘가족’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김미정: 가족에 대한 작업을 하는 작가를 찾다가 선생님이 떠올랐다. 학부 때 선생님의 논문

을 인상 깊게 보았고 그 때 처음으로 선생님의 초기 작업이 가족을 그린 회화라는 것을 알았기 때

문이다. 가족으로 작업을 시작하셨지만 현재는 그 관심이 공동체로 확장되어 지역 공동체, 영화

까지 활동범위를 넓히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 회화작업은 학생 때 이후로 안 하시지 않았

나?

임흥순: 맞다. 대학원 초까지 하고 그 이후 하지 않았다. 학부를 늦게 들어가서 그런지 새로운

매체보다는 전통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회화가 나랑 맞았다. 그러나 가족 때문에 바뀐 것 같다. 가

족을 그리다가, 가족이야기가 회화보다는 다른 매체로 이야기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느 날 학교 조교실에서 비디오 카메라를 빌렸는데, 처음엔 일종의 홈비디오 형태로 부모

님이 내 집과 형 집을 찾아가는 과정을 카메라에 담았다. 작품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닌데 뷰파인

더를 통해 그 동안 같은 길임에도 내가 못 보았던 장면들이 있었고, 그것을 다시 정지를 시키든,

가족과 커뮤니티

027

앞뒤를 돌리든 다시 살펴볼 수가 있어 좋았던 것 같다. 가족의 어려운 삶과 현실을 알린다기보다

는 가족의 삶을 다시 보고 확인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렇게 영상작업을 시작하게 되었

다.

김미정: <성남 프로젝트>도 그렇다면 이때 시작된 것인가?

임흥순: 그렇다. 대학원 때 박찬경 작가와 김태현 선배가 주축이 되어 <성남 프로젝트>를 했

었다. 경원대 출신 작가, 강사,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서 박용석, 조지은, 김홍빈 등의 작가들과 함

께 했었다. 이렇게 해서 팀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팀 작업은 가족, 사적인 것에 함몰되지 않고

가족 공동체와 지역 공동체, 이 두 가지를 함께 비교하면서 작업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었다.

부모님이 노동자였기 때문에 이후 외국인이주노동자, 아버지 세대들에 대한 작업들, 주거공간에

대한 작업들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영구임대아파트의 경우 거주민들이 유령처럼 갇혀 산

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과거에는 눈에 보이는 존재였다면 지금은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어 살아간

다. 또한 어려울 때 나누고 함께 했던 공동체라는 의식도 사라졌다. 이런 아파트에서 공동체란 가

능할까, 만들 수 있을까 등 찾고자 했던 것이 <보통미술 잇다> 프로젝트였으며 성산과 등촌에서

각 2년씩 4년 동안 진행했다.

김미정: 가족을 그린 회화 작업을 가족들이 직접 본 적이 있는가?

임흥순: 졸업 전시 때 보신 적이 있다. 3학년 때부터 가족에 대한 작업을 했던 것 같다. 당시

개인적인 관심사는 거대한 역사가 아닌 역사였다. 그래서 흔히들 전통을 현대화하는 작업, 일종

의 민화나 벽화 등을 현대미술로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었다. 고분, 무덤, 왕릉을 답사하

고 그것을 그렸는데 너무 뜬구름 잡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에게 가장 가까운 역사

가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가족을 찾게 되었다. 가족애보다는 가족의 삶, 가족이 위치한 계급, 가족

이 살고 있는 공간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던 것 같다.

김미정: 가족을 그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 가족의 삶이라고 했지만 결국 내 삶을 그

리는 것과 마찬가지 아닌가.

임흥순: 의외로 나에게 가족이 편했다. 대상으로서 가족이 편하다는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서

로의 관계가 이미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빈민, 노동자였지만 상황에 분노하기보다

수긍을 하면서 열심히 사셨던 것 같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하지 않았지만 정신적으로는 부족하지

않게 살았다. 물신주의와 경쟁사회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가족

의 환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가족 안에서 교육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부모님

은 이런 부분의 지식들은 잘 모르셨겠지만 어쨌든 가족 안에서 개인들의 삶에 충실하려고 하시지

않았을까. 말로 표현으로 전달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왔을 거라 생각한다.

김미정: 당시 선생님이 처한 상황이나 환경 때문에 부모님이 원망스럽지 않았나?

임흥순: 그렇지 않았다. 부모에 대한 분노보다 ‘이렇게 열심히 사시는데 왜 똑같을까, 왜 점

028

점 더 집이 작아질까, 열심히 안 산 것도 아닌데

….’ 이런 슬픔은 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회

화 작업에서 어두운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정서

상으로도, 당시 상황으로도 어쩔 수 없긴 했다.

2-30대에는 자격지심과 피해의식, 3류 인생에

대한 분노가 있었으니까.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지를 매일 매일 고민했다. 이

분노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할 때 오

는 것이고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이 사회

자체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없게 만들고,

몇 가지의 모델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맞추기를

바라지 개인의 장점을 살려주는 교육을 실행하

지는 않는다. 어쨌든 내가 있는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했

다. 내가 가장 바라는 것은, 그리고 작업을 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그런 것에 힘이 될 수 있는 사례를 만드는

것이다.

김미정: 그러한 사례를 만든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임흥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작품이다. <보

통미술 잇다>나 <금천미세스>처럼 사람들과 함

께 만들어 참여자들이 성취감을 느끼고 그 성취

감을 또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눌 수 있는, 그런

것이 하나의 사례가 아닌가 싶다. 이 프로젝트

들 안에서 직접 만나고 느끼는 것과 단순히 내

가족의 이야기만 하는 것은 상당히 차이가 있

다. 이 사람들도 가족인거고, 좀 더 넓게 보면

소모임이 되는 것이고 그 모임이 공동체가 되고

곧 도시가 된다. 거시역사를 보는 것보다 개인

개인의 삶, 가족의 관계 등이 더 중요하다고 생

각한다. 그래서 <금천미세스> 도 참가자 한 분

가족과 커뮤니티

029

한 분이 그것을 몸으로 느꼈을 때의 순간이 굉

장히 중요했고 곧 그것이 하나의 예술 활동이라

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예술 활동이라는 것은 꼭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비념>도 사실 공동체와 관련이 있다. 첫 개

인전, 첫 작업을 내 가족에서 시작했다면 <비념

>은 동반자인 김민경 PD의 집안의 가족사이기

때문에 또 다른 연결이기도 하다. 그것을 찾아

가면서 돌아가신 김민경의 할아버지, 제주도 공

동체, 왜 그것(4·3)이 발생했을까 등을 고민 했

던 것 같다.

김미정: 한국 사회가 가진 독특하면서도 때

로는 끔찍한 가족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는

데, 한국의 가족애는 곧 사회에서 ‘내 것’을 지

키려는 움직임으로 확장되는 것처럼 보인다.

임흥순: 가족은 사실 피곤한 것이긴 하다.

‘가족애’가 문제가 되는 부분은 우리 가족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꼭

한국 사회를 주도해 온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

는다. ‘나만’ 이라는 부분은 사실 몇 십 년 안 된

것 같다. 나는 가족애의 그렇지 않은 부분을 경

험했던 세대이다. 경쟁사회, 물질만능주의가 가

족애를 변질되게 한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부분이 가족들과 맞물려서 부정적인 방향

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가 중

요한 건 맞다. 하지만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

르기 때문에 남을 중요시하지 않게 되는 것 같

다. 예를 들어 <보통미술 잇다>의 경우 임대아

파트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임대아파트

라는 곳은 굉장히 폐쇄적이고 부정적인 곳이다.

그 분들을 위해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기보

다 어떻게 하면 이 문제를 드러낼 수 있을지에

030

주목했다. 사회는 불행한 것보다 행복한 것을 보여주려고 하기에 이런 문제를 그대로 봉합한다.

하지만 봉합이 아닌, 문제를 직면하고 치료해야 한다. 예술은 이런 문제들을 풀어내서 주민들이

쉬쉬하지 않고 어떻게 해결해 나갈 수 있을지를 의논하게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민들

이 직접 만나고, 접촉하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나 임대아파트는 상황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

해 만든 공간임에도 사는 사람들조차도 서로를 무시하며 싫어한다. 여기서 어떻게 공동체가 만들

어질 수 있을 것인가. 정말 개인이 고립되게 된다.

김미정: 말씀하신 것처럼 사회적으로 고립된 이들 그리고 그들의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이어

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 작업 중인 <위로공단>에 대한 설명을 부탁

한다.

임흥순: 그 동안 개인, 지역, 공동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해 왔다. 그 연장선상에서 노동

에 관해 조금씩 작업을 했지만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서 2010년 금천구에 위치한 금

천예술공장에 작가입주 공모를 준비하면서 기획을 했다. 금천예술공장은 예전 구로공단이 있던

곳이기도 했다. 이후 구로공단에서 일하셨던 여공들을 시작으로 대형마트, 삼성반도체, 항공승무

원 등 여러 직업군 안의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 했다. 전반적으로 한국사회에서 노동과 노동자의

의미는 무언지, 그런 의미를 찾아보고 질문하는 영화다.

가족과 커뮤니티

031

박희정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지난 5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바바라 근처 소도시 이슬라비스타에서 한 20대 남성

이 차를 몰고 다니며 무차별 총기를 난사해 본인을 포함한 7명이 숨지고 7명이 다치는 끔찍한 사

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산타바바라 시립대 대학생인 엘리엇 로저(Elliot Rodger). 그는 범행 전

유튜브에 살인을 예고하는 동영상을 올렸다.[1] 동영상에서 그는 카메라를 향해 “여자들이 다른

남자들에게는 애정과 섹스, 사랑을 줬지만 내게

는 단 한 번도 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지난 8

년 동안 자신을 무시하고 거부한 여성들에게 벌

을 내리겠다”며 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이 사건은 2008년 6월 8일 일요일 일본 아

키하바라에서 한 남성이 트럭을 몰고 행인을 덮

친 뒤, 흉기를 휘둘러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한 일명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당시 현장에서 범인으로 붙잡

힌 가토 도모히로(당시 25세) 역시 아키하바라

로 향하기 전 인터넷에 자신의 살인을 예고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얼굴만 좀 더 나았으면 여자

친구가 있었을 것이고, 여자 친구가 있었으면

성격도 비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2]라고 말했

032

다.

이들은 왜 자신들이 ‘비인기남’이라는 사실에 좌절, 여성에 대한 혐오를 표출하고 불특정 다

수를 향한 무차별 살상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 것일까. 일본의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코

는 자신의 책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이브 세지윅(Eve Sedgwick)의 호모소셜리티(homo-

sociality, 동성사회성) 개념을 빌어 이를 분석한다. 동성애를 뜻하는 호모섹슈얼(homosexual)

과 구분되는 호모소셜(homosocial)은 성적이지 않은 남성 간 유대를 뜻하는데,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함으로써 성립한다.

남자는 남성 집단의 정식 멤버로 인정됨으로써 최초로 남성이 되는 것이며 여자는 그 가입 자

격을 위한 조건, 또는 그 멤버십에 사후적으로 딸려 오는 선물 같은 것이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것은 ‘여자를 한 명 소유’, 즉 문자 그대로 ‘자기 것을 하나 가지는’ 상태를 가리킨다. 다른 모든

요인에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최후의 요인, 자기 소유의 여자가 한 명이라도 있는 경우 남자는 남

성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만족시키게 된다. 반대로 학력, 직업, 수입 등 다른 모든 사회적

요일에 있어 우월한 남자라 할지라도 ‘여자 하나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하는’ 남자는 가치가 떨어

지게 된다. 남성 집단은 이러한 남자를 결코 진정한 남성, 즉 집단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3]

호모소셜한 집단이란 이처럼 ‘성적 주체’임을 서로 승인한 남자들의 집단을 가리키며, 이때

여성은 오로지 남자들에게 욕망되고 종속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자들에게 부여된 명칭이다. 따

라서 호모소셜한 집단의 멤버가 여성을 열등시하는 것은 당연하며, 이러한 여성 혐오는 남성에게

는 여성멸시, 여성에게는 자기혐오와 같이 비대칭적으로 작용한다고 우에노 치즈코는 말한다. 그

녀에 따르면 이성애 질서에서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중력처럼 시스템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아키하바라 묻지마 살인 사건을 비롯하여 도쿄 전력 OL 살인 사건,[4] 가계도에 남성만을 표기하

는 일본 황실 문화는 물론 춘화, 일본의 대중 소설, TV 드라마 등을 예로 들어 일본 사회에 만연

한 여성 혐오의 불편한 진실을 고발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상황은 어떠할까? 과연 한국은 여성 혐오로부터 자유로운가? 필자의 개

인적인 경험은 둘째 치고 최근 특정 지역/진보정치/여성에 대한 혐오감을 노골적으로 표출해 논

란이 되고 있는 한 인터넷 사이트를 예로 들어 보자. 일간베스트저장소, 일명 일베라고 불리는 국

내 최대 규모의 인터넷 유머 커뮤니티에는 유독 젊은 한국 여성에 대한 비하가 두드러지게 나타

난다. 최근 3년간 일베에 올라온 게시물을 분석한 결과, 욕설이 주요 주제어인 게시물 다음으로

여자를 주제어로 부정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게시물이 두 번째로 가장 많았다.[5]

‘김치녀’, ‘보슬아치’, ‘삼일한’[6] 등 입에 담기 힘든 여성에 대한 폄하적 유행어들이 만들어지

고 소비되고 있는 곳 역시 일베다. 문제는 ‘나는 너를 혐오할 권리가 있다’는 일베의 사상이 일상

가족과 커뮤니티

033

화되고 보편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 초 1월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에는 붙은 대자보가 주장하

듯이 “과거부터 있었던 여성혐오는 나날이 악화돼 ‘김치녀’, ‘된장녀’라는 노골적이고 일상적인

형태로 자리 잡았”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자신이 ‘김치녀’나 ‘된장녀’가 아님을 계속

해서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우에노 치즈코는 자기 이외의 여성을 타자화하고 자신을 예외화 시키는 전략 역시 결국엔 여

성에 대한 멸시를 재생산하고 차별 구조를 지속시킨다고 비판한다. 여성 역시 스스로에 대한 혐

오를 안고 있으며, 여성 혐오가 단순히 남자의 문제가 아니라 가부장제 사회 구성원 모두가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남성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남성이라는 사실, 또는 스스로 충분히 남성적

이지 않다는 이유로 자기 혐오에 빠질 수 있다. 이처럼 여성 혐오는 그녀의 표현처럼 너무나 깊숙

이 신체화되어 있고 욕망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어서 단시간에 극복되기는 힘들지 모른다. 하지

만 스스로 여성 혐오를 자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자 노력하는 것. 거기서부터 작은 변화

는 시작될 것이다.

[1] http://youtu.be/65zTdotBTTg

[2]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은행나무, 2013, p.72

[3] 같은 책, p.75

[4] 1997년 3월 19일, 시부야 마루야마쵸에서 길거리 매춘부가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 피해자가 게이오 대학을 졸업

하고 도쿄 전력 사무직 직원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5] 박가분, 『일베의 사상』, 오월의 봄, 2013, p.115

[6] ‘김치녀’는 허영심 많은 한국 여성을 총칭하는 말이며, ‘보슬아치’는 자신의 성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

이다. ‘삼일한’은 ‘여자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한다’의 줄임말이다(『일베의 사상』 내 수록된 용어 정리 참조).

[7] http://news1.kr/articles/1499163

034

윤율리(문화아카이브 봄 디렉터)

Ressentiment-Hyo 딸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예술가가 사는 법

애비메탈에 대한 단상

들어는 보았는가, 애비메탈을. 평소라면 디제이 페스티벌이나 대형 록 페스티벌들의 라인업

발표로 후끈 달아올랐어야 하는 5월, 국가적인 애도의 물결 속에 치뤄진 6.4 지방선거는 그 감추

어진 배면의 욕망을 투사하기라도 하듯 뜻밖의 메탈 수퍼스타를 탄생시켰다. 히어로의 탄생 서사

를 거슬러 오르다보면 그 출발점에서는 세월호라는 다소 의외의 진앙이 발견된다. 뒤늦은 진상조

사를 통해 치부를 드러낸 참사의 면면에 안타깝지 않은 죽음은 단 하나도 없었지만, 특히 어린 단

원고등학교 학생들의 사연은 한국사회를 그야말로 회생 불가능한 패닉으로 몰아 넣었다. 파괴된

가정과 아이를 바다에 묻은 채 무기력하게 밤을 지새워야 했던 부모들의 비통함, 그리고 그 옆에

가족과 커뮤니티

035

서 라면을 먹는 어딘가 이질적인 고위공직자의

모습 같은 것이 도화선이 되어 이번 지방선거는

가족이라는 프레임의 보이지 않는 중력장 위에

서 수행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여도 야도 누

구도 감히 승리를 주장할 수는 없는 성적표를

받아든 이번 선거에서, 어떤 정책적 이슈나 네

거티브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이 각 후보

자들의 가족력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으로 치부

되기 힘든 개연성을 보여준다. 하이라이트는 서

울시교육감 후보들의 전선이었다. 고승덕과 조

희연은 가족 구성원 개개인이 아닌 가족 내적인

관계에서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정

몽준 대 박원순의 경우나 앞선 정치적 선례─예

컨대 이회창이 대권의 9부 능선에서 두 아들들

의 태클에 좌초한─들과 차별화 되었다. 이것이

바로 주지의 애비메탈이 등장한 배경이다.

고승덕과 박태준, 박유아의 남자들

고승덕의 실패한 결혼 생활에 대해 구구절절 긴 얘기를 늘어놓고 싶은 생각은 없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우리 사회가 가진 도덕적 잣대가 이혼 두 달 만에 늘씬한 연예인과 염문을 뿌리

거나, 삼각 스캔들로 남성성을 과시하는 대통령들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마는 프랑스처럼 변할 수

는 없겠지만, 그의 결혼과 이혼, 자녀의 양육은 어쨌든 합리적인 의사 결정권을 가진 두 인격 주

체의 사회적 약속이자 그에 대한 이행이었다. 또한 그렇기에 나는 기본적으로 그의 통속적인 부

르주아식 가정사 속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일방적인 가해자나 피해자처럼 묘사될 필요는 없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승덕은 고별무대에 오른 세바스찬 바하마냥 엉뚱하게 카메라와 언론을 향

해 강렬한 샤우팅을 내지름으로써, 또한 이것을 배후의 정치적인 사주로 쟁점화함으로써 그만 돌

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애비메탈이 정치인-아빠의 부조화를 조롱하는 짖궂은 블랙코미디였다면, 훨씬 진지한 예술

의 차원에서 이를 다루었던 사람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한때 고승덕과 일가를 이루었던 아티

스트 박유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런 방식의 소개는 이미 중견 아티스트에 접어든 그녀에게 상

당한 실례가 되겠지만 박유아는 포스코 전 명예회장인 고 박태준의 딸이자 고승덕의 전처로 더

널리 알려져있고, 이번 스캔들에서도 그것은 예외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박유아는 뉴욕에서

036

의 개인전 이후 오랜만에 한국 활동을 병행하며 가장 먼저 가족에 대한 고민을 그녀의 작업 속에

녹여내었다. 2011년 기획되어 이듬해까지도 꾸준히 몇몇 갤러리와 미술제에 초대되었던 <Res-

sentiment-Hyo>는 이 시기의 박유아를 관통하는 대표작이다. 설치와 디지털 프린팅, 퍼포먼스

가 복합적으로 구성된 이 작업에서 그녀는 커다란 알루미늄판 사이사이에 식기가 가지런히 놓인

식탁을 배치한다. 알루미늄판은 유리로 만든 거울 같은 느낌을 주지만 빛이 왜곡되는 표면에 맺

힌 상은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다. 테이블 위로 사람들이 그려진 둥근 모빌이 매달리고 그중 하나

는 우리가 도저히 모를 리 없는 친숙한 남자의 얼굴로 채워졌다. 단란하지만 어딘가 작위적인 느

낌을 주는 풍경, 이 풍경의 가장 전면에는 원래 이들을 한꺼번에 비추는 큰 거울이 자리하고 있었

다. 그러나 박유아는 그녀의 첫 번째 퍼포먼스에서 얼굴에 붉은 인주를 칠하고 식탁에 음식을 덜

어주는 시늉을 하다 돌연 날고기와 집기를 집어던져 거울을 부수어버리고 말았다.

2013년에 열린 개인전 <오르골이 있는 풍경>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이혼한 남편의 존재가 그

녀의 작업 속에 호출된다. <Mr. and Mrs.>는 스스로의 결혼 사진을 포함해 다정한 가족들의 모

습이 담긴 사진을 본떠 그림으로 제작한 후 하얗게 인물의 얼굴만을 가려 전시한 연작이다. 색이

빠르게 흡수되는 한지의 물성을 억누르고 오랜 시간 화장을 하듯 색을 먹인 동양화라는 점이 특

이하다. 얼굴이 지워진 인물화는 역설적으로 구도와 구조를 전면에 드러낸다. 소녀가 꿈꾸는 아

름다운, 그러나 영원히 반복되어야 할 운명에 처한 오르골의 선율처럼 완전히 지워지지 못해 다

가서면 희미한 표정을 드러내는 얼굴-구도가 지리하게 나열되고, 그녀의 기억과 맞닿아있을 것

이 분명한 답답함과 피로함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사랑의 명령에 대한 중지를 명령할 것을 중지하라

<Ressentiment-Hyo>에서 박유아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내 현실의

아버지는 다분히 상징적이고 상상적인 아버지였다. 나의 아버지이기보다는 한국 산업의 아버지

였고 국가 경제의 아버지였으며 조국 근대화의 아버지였다. (...) 조국과 경제에 헌신한 아버지가

정치와 사회에서 곤란과 흠집이 생겨날 때마다 나도 고통을 겪고 상처를 입었다. (...) 나에게 효

도란 오로지 아버지와 가족들에게 누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아버지의 고난을 가족으로서 받아들

이는 것이었다.” 그녀의 노트에서는 국민교육헌장의 낯익은 향수가 발견된다. 효孝와 충忠은 같

은 뿌리를 가진 완전히 동일한 하나의 사유 알고리즘이다. 그래서 박유아가 독립된 주어로, 다시

독립된 예술가로 호명되기 위해 전략적인 전복을 기도해야 했던 가족이라는 상상은 국가에 의해

명령되는 복종 시스템의 자기복제이기도 하다. 아마 박유아의 미시사에서 발견되는 고통은 민족

부흥의 역사적 사명을 가지고 태어난 (혹은 여전히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서 조국과 민족에 충

성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동시대의 이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원죄와 같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살

부殺父의 모의는 가족들이 모여앉은 밥상머리에서 때로는 매캐한 최루탄 냄새가 진동하는 대학

가족과 커뮤니티

037

가와 광장에서 따로 또 함께 진행되었다. 어떤

모의는 성공했고 어떤 것은 경우에 따라 그렇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박유아가 깨부순 거울-

허상을 가격한 핏덩이들의 침묵처럼 가장 성공

한 것들조차 완전한 성공이라 부를 수는 없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게 되었다.

니체에 의해 사용된 르상티망은 일반적으

로 원한과 복수심을 의미하는 개념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체에게 르상티망은 본디 도덕

의 기원이자 궁극의 이타성을 추구하는 기독교

적 사랑의 원리였다. 쉽게 말해 그는 “오른쪽 뺨

을 맞으면 왼쪽 뺨도 내어주라”는 아가페를 약

자의 복수심이 숨겨진 정신승리라 보았다. 이런

원한의 감정이 선악의 도덕으로 치환된 것이 바

로 이웃에 대한 사랑, 원수에 대한 사랑이고, 이

때 사랑은 상대, 즉, 이웃과 원수가 가진 다른

도덕체계를 추방하고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한

다. 최후의 인간이 약간의 독과 쾌락, 건강에 도

취하듯 그는 위선적인 노예도덕이 인간의 위대

한 가능성을 병들게 한다고 본 것이다─같은 맥

락에서 니체는 양적 공리를 추구하는 사회주의

와 민주주의를 맹렬히 비판한다─. 그렇다면 박

유아가 자신의 작업을 명명하며 르상티망과 효

孝를 아무런 조사助詞 없이 하이픈 양쪽에 병렬

적으로 배치한 것은 작품의 메시지를 독해하기

위한 좋은 단서가 되어준다. 2012년 <Ressen-

timent-Hyo>를 전시한 옵시스 아트 갤러리는

이 작업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르상티망과 효가

원래는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는

서로를 해체하고 재인식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르상티망과 효孝는 마

주보고 서로에게 작용하는 개념/도구인 것이 아

038

니라 그 바깥에 선 박유아 자신과 대치되어 판단중지를 기다리는 키메라의 두 머리 같은 것이다.

개인의 미시사적 고통이 당혹스럽게 쏟아져내리는 <Ressentiment-Hyo>는 이런 적극적인 개입

과 거리두기의 완급 조절을 통해 비로소 미술관 속의 예술, 사건이자 퍼포먼스로 완결될 수 있다.

비록 언젠가 우리가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를 가진 OS와 낭만적인 사랑에 빠지게 될 지언정

가족에 관한 하나의 의미심장한 징후가 발견되고 있다. 며칠전 상영을 기다리며 광고를 시청

하던 영화관의 대형 스크린 속에서 나는 귀여운 딸들이 아빠들을 연달아 곤경에 빠트리는 장면을

목격했다. 사회적 성공을 성취한 남자 어른들은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거나 사진을 찍으며 아빠로

서의 역할수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결국 우수한 기술력을 가진 기업의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인정과 행복을 손쉽게 담보받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관객들은 잘 짜여진 CF의 각본을 넘어 그들

의 사생활과 일거수일투족에 감응하고 있었다. 나는 하루와 사랑이의 이야기를 지나 리원이가 월

드컵 중계 준비로 바쁜 아빠와 어떤 하루를 보냈으며 아빠는 딸에게 어떤 요리를 해주었는지를

흐뭇하게 진술하는 옆좌석 여자의 박식함에 놀랐고, 혹시 그녀가 정말로 안정환의 처제쯤 되는

것은 아닐까 순진한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었다. <트루먼 쇼>의 기이한 역전! 나는 <아찔한

소개팅>을 단지 가슴에 채울 수 없는 공란을 지닌 세대의 하잘 것 없는 관음증이라 여겼고, <우리

가족과 커뮤니티

039

결혼했어요>를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인 복잡한 서사를 수행하는 새로운 팬덤문화의 발진 정도로

치부했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빠르게 진화한 미디어는 어느새 진정성을 장착한 진짜

가족의 모습을 필름에 담아, 홀로 외로운 저녁을 보내야만 하는 혹은 그렇게 예쁘고 귀엽게 태어

난 아이들을 마음 편히 기를 재간이 없는 현대인의 식탁 앞으로 친절히 딜리버리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박유아는 오늘날 가족 공동체의 무엇을 폐기하고 무엇을 되살릴 것인지의 선택 앞에 선 우리

의 딜레마를 예술 안에서 전유하는 작가다. 어떠한 화해의 여지도 없이 산산조각 나버린 거울, 이

잘못된 과녁의 깨어진 파편들이야말로 그녀가 과거에 붙잡혀있던 르상티망-효孝의 잔여물이지

는 않았을까. 가정의 달을 휩쓸고 간 애비메탈은 여전히 어떤 못난 아비에 대한 세간의 조롱 정도

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발산했던 격렬한 비난의 감정이 그 처량한 상징이 작동하는 실

재에 대한 관심으로 이행해야 할 때다. 노예도덕에 반하는 귀족의 도덕, 위버멘쉬의 도덕이 오랫

동안 몸담아온 편안한 사랑의 위무감에서 달아나야 하는 일인 것처럼, 작은 국가, 작은 자본주의

의 모나드가 아닌 생활 공동체로서의 가족─그것이 다부다처든 동성혼이든 동거의 형태이든─을

새롭게 상상하는 일 역시 우리에게 무언가에 대한 적극적인 중단을 요구하고 있다.

040

김시습

새로운 가족?아직은 샴페인의 뚜껑을 닫아두어야 할 때

두 종류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공간

얼마 전 개봉했던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에는 여섯 살 어린아이

를 키우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의 가족이 등장한다. 그 중 하나는 승승장구하는 건축가 료타(후쿠야

마 마사하루 분)의 엘리트 중산층 가족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상대적으로 가난하지만 자식과

놀아줄 줄 아는 전파상 유다이(릴리 프랭키 분)

의 가족이다. 료타의 가족에서 아버지의 공간인

서재는 어머니나 자식 등 다른 가족 구성원의

공간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가사는 전

적으로 어머니인 미도리(오노 마치코 분)의 몫

이며, 아버지의 서재는 아들 케이타(니노미야

케이타 분)가 함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공간

이다. 반면 유다이의 공간인 전파사 가게는 집

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으며 따라

서 어머니와 자식들이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다. 유다이는 이 공간에서 아들의 고장난

장난감 자동차를 멋지게 고쳐주기도 한다. <그

렇게 아버지가 된다>가 묘사하고 있는 두 가지

형태의 가족은 근대 이후 우리가 상상하게 된

가족에 대한 두 종류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가족과 커뮤니티

041

것 같다. 20세기 이후 우리나라의 미술에서도

이와 같은 가족의 두 형태를 손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임군홍의 <가족>(1950)에는 료타의 것과 유

사한 형태의 가족이 등장한다. 본인의 화실에

앉아 있는 가족을 묘사한 이 그림에는 화병, 꽃

신 등 당시 중산층의 살림살이를 상징하는 정물

들과 함께 화가의 큰딸과 모자가 앉아 있다. 그

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가족’이라는

제목에도 불구하고, 화면 내에 아버지가 없다

는 사실이다. 아버지만 없는 것이 아니다. 화면

에는 아버지를 떠올리게 할 만한 어떠한 사물도

없다. 이 그림에서 아버지는 가족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이지, 그 시선에 의해 묘사되는 대

상이 아니다. 이종무의 <자화상>(1958)에는 임

군홍의 그림에서 생략된 아버지의 공간이 묘사

되고 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모

습 뒤쪽으로 화실의 문지방을 밟고서 그림 그리

고 있는 아버지를 조심스레 엿보고 있는 아들의

모습이 보인다. 이종무의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지만 아버지 공간의 문

턱을 함부로 넘을 수는 없다. 임군홍과 이종무

의 그림에서 아버지의 화실은 료타의 서재와 같

이 그 자체로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간이

다. 화면 내에서 그 권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표

현된다. 재현하지 않음으로써 그 권위가 도처에

존재하도록 하거나, 재현하되 다른 공간과의 경

계를 분명하게 표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이 두 작품과는 다르게 이중섭이 묘사하는

가족 내 아버지의 공간은 경계가 상대적으로 불

분명하다. 이중섭이 은박지 위에 그렸던 그림

중 하나에는 그가 가족과 뒤엉켜 그림을 그리고

042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길 떠나는 가족>(1954)에서 아버지는 부인과 두 아들을

달구지에 태우고 흥에 겨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이중섭의 그림에서 아버지는 류다이의 가족처

럼 자식들에게 보다 친밀한 모습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아버지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느슨한 이

중섭의 가족과 영화 속 유다이의 가족을 임군홍이나 이종무 혹은 료타의 가족에 대한 해방구로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임군홍이나 이종무보다는 이중섭의 이름을 훨씬 더 잘 기

억하는 이유는 이중섭이 재현한 가족이 기존의 가족이 가졌던 권위주의를 해체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서사는 이와 같은 통념을 따라 전개된다. 영화 속에서 료타는 병

원에서 아이가 뒤바뀐 사건으로 인해 유다이의 가족과 어쩔 수 없이 교류를 하게 된 이후에 아버

지와 자식 사이의 관계에 대해 다시 깨닫게 된다. 그 후 료타의 서재는 자식과 어머니에게 개방된

다. 케이타와 료타, 그리고 미도리는 처음으로 그 공간 속에 함께 뒤섞여서 아이들의 장난을 하며

논다. 영화는 혈연 중심의 권위적인 가족을 관계 중심적인 가족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족 사이의 차이보다는 동일성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두 가족

모델이 부부관계 및 모자관계를 상상하는 방식이다. 두 모델에서 어머니에게 부여되는 역할은 동

일하게 ‘포용’, ‘자비’, ‘관용’ 등으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족 내 어머니/부인에게 요구해왔던 것

으로부터 멀리 나아가지 않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가족 내 아버지의 모습이 서서히 변해가는 와

중에도 우리가 상상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언제나 비슷했다.

새로운 아빠들의 승리?

요즘 우리는 현실에서도 그야말로 료타식 아버지에 대한 유다이식 아버지의 승리를 마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승리자들의 한편에는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의 아빠로 대

표되는 ‘친근한 아빠’가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을 통해 성장하고 얼

마 전 6.4. 지방선거를 통해 부상했던 ‘민주적인 아빠’가 있다.

두 아빠는 모두 과거 혈연중심의 권위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대별된다. 가계를 책임지고 집안

에서 권위 있는 자리를 지키는 것만이 과거 아버지에게 부여된 거의 모든 역할이었다면, 친근한

아빠는 자식들과 함께 캠핑을 떠난다. 한편 민주적인 아빠는 자식의 “의견을 끝까지 [듣고] 차분

하고 논리적으로 문제에 대해 토론”한다. “혹시라도 자신이 틀리거나 잘못한 부분이 있을 때”에

는 “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1]

이러한 새로운 아빠들의 부상은 오늘날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가족과 그 구성원에게 부여되는

사회적 규범 또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베이비 붐 세대의 옛날 아버

지들이 필자만한 자식을 낳았고 그 자식들이 다시 자식을 낳아 기르기 시작하는 사이에 세상은

변했다. 가족들은 1997년 IMF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아버지의 권위가 생계를 유지하

가족과 커뮤니티

043

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집안에서 아버지는 더 이상 그 자체로 권위의 상

징이 아니다. 그가 권위 있는 자리만을 지키려고 할 때 그는 오히려 골칫덩어리로 전락해버린다.

그런 점에서 친근한 아빠와 민주적인 아빠는 새로운 시대의 가족이 요구한 새로운 아버지의 모습

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맹점이 있다. 가족의 새로운 모습이 대부분 부자(부녀) 관계를 통해 상상될

때, 가족 안에서 엄마/아내의 역할은 고정된 채 변화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들이 좋은 아빠인건

알아도 좋은 남편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그리고 자상하거나 올바른 아빠를 보고 아들이 많은

것을 배우게 될 수 있지만, 딸이 닮아가는 것은 여전히 오래된 엄마의 모델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친밀한 아빠, 민주적 아빠가 되었다고 곧바로 ‘그렇게 아버지가 되었다’고 선언해선

안 된다. 그것은 엄마/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더 나아가 가족 밖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우리는 저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엄마에게 피와 살을 부여하지 않는 이

상, 가족이 근본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1] 서울시 교육감 당선자 조희연의 둘째 아들 조성훈이 아고라에 남긴 글 참조;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

do/debate/read?bbsId=D101&articleId=4764894 (2014년 6월 26일자 확인)

협업과 커뮤니티

경험의 확장, 경계없는 장르 / 장승연

영원한 일시적 합의를 향하여 / 박희정

협업을 대하는 미술관의 자세 / 송윤지

그림과 돈에 대한 다소 이상적인 제안 / 이나연

선택과 집중의 공백 / 김미정

민간거버넌스와 마을 공동체 / 이 헌

급진적 지속을 모색하는 다원예술축제 / 윤율리

대안은 없다. 자기조직화가 미래다. / 전효경

협업!? 부유(浮游)하는 언어에 대한 고찰 / 無籍큐레이터 Qrator

지속 가능한 생태를 위한 원동력, 협업 / 박가희

우리의 연대에 공명하라 / 흑표범

객관적 시선으로 관계를 사유하다 / 이지민

046

장승연

경험의 확장, 경계없는 장르장민승+정재일 인터뷰

‘장민승+정재일’은 조형예술가 장민승, 그리고 작곡가이자 음악 프로듀서 정재일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이다. 두 작가는 미술, 음악, 연극, 영화의 요소를 포함하는 일시적인 프로젝트 작

업을 선보여 왔다. 장민승+정재일이 진행해 온 <상림>(2013), <더 모먼츠>(2012), <스피어즈

>(2011), <A. Intermission>(2009) 등의 협업 작업들은 시각과 청각을 비롯한 공감각적 장소 경

험을 선사하며 관람객으로 하여금 특별하고 개별적인 순간의 경험으로 이끈다. 내용적인 부분은

물론 이를 실현시키는 기술적인 형식에 있어서도 탄탄한 완성도를 보여 주는 이들의 작업은 특정

한 매체나 장르로 정의할 수 없는 특징을 보여 준다. 그들 스스로 ‘특급인연’이라고 칭할 만큼, 어

린시절부터 지속되어 온 유대감을 기반으로 새로운 장르적 실험을 꿈꾸는 두 협업작가의 이야기

를 전한다. (본 인터뷰는 장민승과 진행된 내용이다.)

장민승+정재일이 처음 협업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두 사람이 어린 시절 록밴

드를 결성하기도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었을 때 음악잡지에 낸 밴드 구인공고를 보고 찾아 온 초등학생 정재

일을 처음 만났다. 당시 함께 밴드를 결성해 활동했다. 둘이 다시 작업을 하게 된 계기는 1997년

도 <나쁜 영화>라는 영화였다. 당시 ‘장민승과 신속배달’이라는 이름으로(웃음) 3인조 밴드를 결

성하여 영화음악 2곡을 삽입했다. 이후 나는 대학 조소과에 다니면서 선배 뮤지션들과 영화음악

프로덕션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면서 영화와 상업음악을 경험하게 되었고 간간히 정재일과도

함께 작업했었다.

두 사람이 미술계에서 처음 선보인 작업은 <A. Intermission>(2009)이다. 당시 소격동 옛 기

무사령부 터에서 열린 <플랫폼 인 기무사>전에 참여하여 한 건물에 사운드와 조명으로 설치한 작

협업과 커뮤니티

047

업을 선보였다.

음악에서의 ‘현대’와 미술에서의 ‘현대’란

이미 큰 시간차가 있을 만큼, 다양한 예술 장르

중에서도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실험할 수 있고

그것을 수용하고 관람이 이루어지는 장르는 역

시 미술이다. 미술계에 본격 발을 들인 것은 물

론, ‘장민승+정재일’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뭉

친 것도 그 작업이었다. 그때 나는 이 전시를 준

비하던 주최 측의 요청으로 기술적인 부분에 대

한 자문을 맡았었다. 함께 기무사를 답사하던

중 그 건물을 보고 새로운 작업을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겨 내가 먼저 작업 제안하여 진행하게

되었다. 당시 정재일 역시 엄청난 양의 대중음

악 작업으로 새로운 창작에 대한 갈증을 느끼던

차였고, 협업에 대한 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

다. 작업 과정이 참 힘들었지만, 정말 즐거운 고

생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일종의 건물을 위

한 위령곡과 같은 작품이었다. 그곳에 베어 있

는 역사를 기억하되, 그 건물에 어떠한 물리적

변화를 주지 않고 빛과 음향만을 건물 안에서

증폭시키는 요소로 덧씌웠다. 즉 하나의 풍경으

로만 제시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사운드와 조

명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라서 밤에만 관람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으로부터 무엇을 보고 느끼는

가는 철저히 관람자 각자의 몫으로 남기고자 했

다.

2011년 필자와 진행한 <스피어즈>에 대한

인터뷰에서 “사적인 경험을 가능하게 하고 싶었

다”고 했던 말을 기억한다. 감상을 철저히 관람

객의 몫으로 남긴다는 말 또한 이와 관련이 있

는 것 같다. 장민승+정재일의 프로젝트는 시각

예술과 음악이라는 두 장르가 보여 줄 수 있는

048

‘경험’의 가능성과 그 경계를 넘어서기 위한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적인 경험들도 모이면 커진다. 예를 들어 사람 사이의 만남은 더욱 친밀하고 프라이빗할 때

경험과 느낌의 깊이가 달라지지 않는가. 감상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축구, 록 페스티

발처럼 집단적인 감상이 주는 희열도 분명 있다. 우리는 작품을 관람자에게 어떻게 프리젠테이션

하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늘 고민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의 작업에서는 혼자, 혹은 최소의 인원이

작품을 한층 사적으로 독대하고 깊이 있게 감상하도록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는 전시 공간 구성의 문제만이 아니다. 특정 장소의 프로젝트 역시 관람객들은 스마트폰

에 이어폰을 연결하여 앱을 따라서 장소를 경험하게 된다. 열린 공간임에도 그 경험은 매우 개별

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술을 통해 겪거나 혹은 얻을 수 있는 경험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가?

시각 예술은 물론 음악과 같은 청각 영역 역시 큰 범주에서 ‘이미지’로 본다면, 우리는 이미지

의 ‘텍스트’보다는 ‘텍스추어’에 신경을 쓴다고 말할 수 있겠다. 요즘의 사람들이 겪는 경험의 패

턴들이 너무 한정적이고 일방적이라는 점에서 이를 벗어나는 경험을 제공하는 것 역시 예술의 역

할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동안 많은 예술 작품들을 통해서 작품과 그것을 보는 관람객의 일차적인

경험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이제 그 다음 세대의 작가로서 적어도 다른 층의 형식의 작업을

협업과 커뮤니티

049

만들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같은 젊은 세대의 작가들이 기존 예술을 계속 동어반복 할 수

는 없기 때문이다.

이미지의 텍스추어란 다양한 감각이 동원되는 경험의 확장과 관련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

까? 시각적인 경험은 부분은 물론, 음악을 듣고 실제 그 공간을 걸어 다니며 청각을 비롯한 오감

으로 경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최근 작업인 공공미술프로젝트 <상림>의 경우도 “보고 듣는 숲”

이라는 표현에 굉장히 공감이 간다. ‘경험’에 초점이 맞춰질수록 그간 프로젝트의 비물질적인 특

성들이 부각되는 것 같다.

덧붙이자면, <상림>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는 공공미술프로젝트가 되고자 했다. 한 2년쯤 지

나면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그런 작업이었으면 했다. 공공미술프로젝트의 기본적인 기준은 안전

한가, 영구적인가 아닌가, 그런 질문을 가장 먼저 한다. 때론 영구적이라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

가. 적절히 있다가 사라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무언가 소장하고, 대대손손 물려주고 싶은 그

런 마음이 때로는 얼마나 한계가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의 프로젝트에 대한 인상적인 평 혹은 기억나는 관람객의 반응이 있다면?

원앤제이갤러리에서 열린 <더 모먼츠> 전시는 한 사람씩 공간에 들어가 감상하도록 작품을

보도록 설치했다. 그러다보니 전시장에서 1시간 이상 관람을 기다리는 경우도 생겨버렸다. 관람

객들에게 너무 큰 민폐인 것 같아 조정하려 했지만, 오히려 관람객들이 혼자 감상하기를 원했다.

050

그 중 어느 관람객이 방명록에 남긴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결혼 후 9년 만에 갖는 나만의 20

분이었다”라고 쓴 글이다.

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장민승의 사진 작업, 정재일의 음악 작곡처럼 정확히 각자에게 분리된

역할 외에, 별도의 두 사람의 역할이 구분되기도 하는가?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지 않는다.(웃음)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부분만 내

가 큰 윤곽을 짜서 제시하고 정재일이 오케이하면 진행한다. 이런 게 바로 우리의 팀워크이다. 소

위 팀워크가 좋다고 일컫는 팀들의 일반적인 분위기와는 분명 다르다. 어릴 적부터 워낙 유대가

깊은 데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크기 때문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각자의 전문 분야에 대해서 최

대한 존중한다.

두 사람은 미술계에서 진행한 협업 프로젝트로 많이 알려졌지만, 각기 둘 다 영화, 음악 등 타

분야에서 활동하는 전문가이기도 하다.

오늘날 사회 자체가 여러 가지 일을 하지 않는 이상 생존할 수 없는 체계가 되지 않았나? 그

런 지점들에 대한 생각이나 경험이 자연스럽게 작업에 배어나게 되는 것 같다. 지금까지 해온 프

로젝트들의 규모 상 공적기금을 받지 않는 이상 그 큰 비용을 감당하기가 힘들다. 결국은 다른 일

을 많이 해야만 한다. 물론 즐거워서 하는 일들이다. 그런데 나는 오히려 커머셜한 작업을 진행하

면서 반대로 창의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다. 즐거워서 했던 일이 생계가 되고, 그 일이 생계가 되

면서 오는 갈등들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작업에 대한 소재가 떠올랐다. 오히려 상업적인 일을

병행하지 않으면 내가 소재가 금방 고갈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두 가지 사이의 균

형을 잘 맞춰야한다고 생각한다. 정재일 또한 대중가요부터 극음악, 예술적인 프로젝트 등을 다

병행한다. 더욱이 커머셜 작업 분야야말로 첨단의 격전장이기 때문에, 그걸 경험하면 그만큼 기

준점이 높아진다. 또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아니까, 이렇게 경험한 것들을 순

수예술 프로젝트의 형식적인 부분에서 비슷하게 맞추려고 노력한다. 여전히 텍스트 위주의 예술

들이 우세한 상황에서 나는 그런 것을 할 역량도 안 되고 또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관객들

과 소통할 수 있는 것, 굳이 ‘미술’이라고 불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형식들을 꿈꾼다.

협업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꼽는다면?

장민승+정재일의 프로젝트들은 우리 두 사람 말고도 다양한 분야의 전문 스태프들과 협업이

반복된다. 내가 전체를 책임지며 이끌어가더라도 영화 작업처럼 촬영 등 각기 전문가가 총대를

매줘야 하는 지점이 있다. <상림> 프로젝트의 경우는 참여 스태프 인원을 합치면 총 100여 명 가

까운 규모였다. 이러한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아무래도 끊임없는 조율과 중재이다.

협업과 커뮤니티

051

앞으로 진행될 두 사람의 협업 프로젝트 계획을 알려 달라.

10월 23, 24일 아르코대극장에서 새 프로젝트를 준비 중이다. 지난 시리즈 작업에서 선보였

던 두 가지의 풍경을 보여줄 예정이다. 23일에는 <더 모먼츠> 중 태풍이 부는 바다를 촬영한 작

품을 대형 스크린에 투사할 예정이며, 사람들은 무대 위에 올라가서 대형 화면으로 이 풍경을 접

할 수 있다. 다음날은 또다른 분위기의 바다 풍경 장면을 투사한다. 정재일의 음악이 함께 하며

중간 중간 공연도 준비할 예정이다.

지난 4월 일어난 큰 사고를 겪으면서, 이제 우리에게 바다란 풍경을 넘어 하나의 의미가 된

것 같다. 개인적이고 사적인 생각으로 촬영한 예전의 바다를 다시 보여줌으로써 과연 지금도 그

풍경을 그때와 같이 그저 한 편의 숭고한 장면으로만 바라볼 수가 있는지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한편으로는 10월에 계절적으로 건조한 바람이 슬슬 불어올 때 굉장히 큰 미학적인 쾌감을 경험

하도록 하고 싶기도 하다. 같은 현실의 이야기를 하더라도, 우리로서는 투쟁하듯이 선방에 나가

서 직접적인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맞지 않고, 또 그럴 자질도 되지 못한다. 그런 방식을 보여 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리에겐 또 우리의 방식이 있는 듯하다. 그냥 다른 방식으로 기도하는 심정

으로 함께 보자라는 제안을 담고 있는 작업이다. 또한 현재 12월에 열릴 에르메스재단미술상에

서 선보일 작품에서도 정재일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052

박희정

영원한 일시적 합의를 향하여ETC(이샘, 전보경, 진나래) 인터뷰

이샘, 전보경, 진나래로 이루어진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는 2012년 인

천에서 만난 이래로 도시의 현상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며 리서치/프로젝트 기반의 작업을 함께

해오고 있다. 지난 8월 7일 세운상가에 위치한 개방회로에서 있었던 <도시신사 A씨의 일일 #2

멋진 신세계> 스크리닝 현장에서 ETC를 만나 올해의 계획과 협업에 대한 생각을 들어 보았다.

Q. ETC로 활동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ETC: 우리 셋은 2012년 스페이스 빔 국제

레지던시에서 만났다. 도시 문제와 관련된 작업

을 하는 네덜란드에서 온 익스포디움(Expodi-

um)이라는 그룹과 열흘정도 워크숍을 하고, 나

머지 기간 동안 6명의 작가(이샘, 전보경, 진나

래, 요리스 린드하우트, 유광식, 정상섭)가 하나

의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굉장히 강도가 높은 레

지던시 프로그램이었다. 2달 동안 ‘Nightwalk-

ers in Incheon’이란 이름으로 인천의 배다리

지역, 송도, 청라, 괭이부리마을, 가정동, 율목

동을 직접 걸으며 탐험했다. 이를 바탕으로 당

시를 2097년으로 상정해 마치 도시 유적을 발

굴하고 체험하는 것 같은 쇼케이스와 가이드 투

협업과 커뮤니티

053

어 프로그램 <Back to the future>을 진행하였고, 출판물 『○□★△×』을 만들면서 함께 작업하

기 시작했다.

Q. ETC라는 팀명은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

ETC: 인천에서 했던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서울에서 발전시켜 진행하던 차에 2012년 11

월 오프엔프리 국제확장예술제에 참여 권유를 받게 되어 갑자기 팀명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당

시 우리가 예술가로서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서로 얘기를 많이 나눴다. 예술

가들이 경제적 활동 능력이 큰 것도 아니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잉여’라는 말을 많이 듣지

만,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사회적 틀 안에 예술가 역시 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풍자해서 보

여주기 위해 예술 서비스를 제공하는 가상의 기업이자, 예술가의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기타

등등’의 뜻을 가진 ETC(Enterprise of Temporary Consensus)라는 이름을 만들게 되었다.

Q. <도시신사 A씨의 일일>에 대해 소개해 달라.

ETC: 작년에 진행한 <도시신사 A씨의 쾌적한 하루생활>을 바탕으로 한 프로젝트다. 1971년

매일경제에 나온 ‘10-20년 후의 미래도시 중견샐러리맨의 쾌적한 하루생활’ 이라는 기사가 그

단초가 되었다. 2000년대 미래 도시에 대한 청사진을 그린 그 기사 속에 우리가 미래도시를 생

각할 때 중요하게 꼽는 속도, 통신, 교통, 자동화 같은 요소들이 다 들어있다. 근대화에 대한 꿈과

도시화에 대한 욕망으로 인해 도시들은 계속 허물어지고 재개발의 과정이 반복되는 것을 보면서

이 기사를 한번 현대인의 시점에서 각색을 해보고 싶었다.

또한 도시 연구하시는 분들과 교남동을 방문한 것이 이 프로젝트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지

금은 재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라 남아 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는 곳인데, 우리가 갔을 때는 대부분

의 주민들이 떠나고 극소수의 사람들만 살고 있는 상태였다. 그곳에 세워질 고층빌딩에 대한 조

감도와 청사진 같은 것들이 부동산에 붙어 있었는데, 60-70년대 꾸었던 꿈이 2013년에도 똑같

은 반복되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어떤 집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석면 여부가 표시된 건물들 사

이에서 나무로 지어져 그나마 안전한 집이었다. 안에 들어갔는데 아직 가정의 느낌이 남아있었

고,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집 자체도 마치 중산층의 큰 아버지가 살았을 것 같은 집이랄까, 그

당시에는 분명 “신사”였지만, 시간이 흘러 교남동이라는 곳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신사가 아닌 계

층으로 분리되어 집에서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어디론가 사라진... 그 집을 3주 동안 무단으로 청

소를 하고, 근처에서 주운 물건들로 우리 어머님 세대들이 집들이를 할 때처럼 테이블을 꾸며서

집들이 형태의 라운드 테이블을 진행했다.

올해는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34)에서 키워드를 뽑아내고 구보씨처럼 도

시를 걸으면서 마주치게 되는 단상들을 에피소드 식으로 풀어낼 예정이다. 작년에 진행한 <만 개

054

의 파도>가 연안지역 여성들의 생애를 통해 개인과 역사의 영향관계를 다루는 작업이었다면, 이

번에는 꼴라주나 스케치처럼 도시 이곳저곳에서 산발적으로 이벤트를 벌이면서 여러 장소와 시

대를 어우르는 방식이 될 것이다.

Q.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한 대목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 당시 서울이 안고 있는 문제들과

지금의 서울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ETC: 심지어 구보씨와 우리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사실 서울이라는 도시가 어떻다보다 할

일없이 서울을 배회하는 구보씨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고, 거기서 많은 영

감을 받았다.

Q. 지난 5월 16일 서울역 롯데마트 옥상 주차장에서 진행한 야유회에 이어 두 번째 행사였다. 총

다섯 번의 행사를 계획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구체적인 계획은?

ETC: 우선 지하철 2호선 순환선에서 퍼포먼스를 기획중이다. 실제 상황인지 퍼포먼스인지

모르겠는 상황들이 지하철 안에서 벌어지고,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퍼포먼스의 한 부분에 참여

하게 될 것이다. ‘지하철 00녀’처럼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중계되도록 해서 원하는 사람은 중간에

참여할 수 있게 할 예정이다. 네 번째는 공원에서 단체로 모여 운동을 하는 아주머니들로부터 영

감을 받았다. 사회 시스템을 키워드로 사회에서 통용되는 기호나 수신호를 가지고 특정한 움직임

을 만들어 참여하고 사람들과 다함께 율동을 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Q. ETC라는 팀명 자체도 익명성이 강한데, 작업 결과물도 시각적으로 정제된 느낌이 강하다.

ETC: 셋 다 시각화 방법에 있어서 의견이 다 다르다 보니 셋이 얘기를 과정 중에서 점점 더

정제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리서치와 프로젝트 기반의 작업이 주를 이루다 보니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 중에는 어떤 시각적인 결과물을 미리 설정하지 않는다. 프로젝트 중간에는 과정과

수행 자체에서 먼저 의미를 찾기 때문에 때로는 전시라는 형식에 고민이 생기기도 한다.

Q. 주로 출판물을 제작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가?

ETC: 프로젝트 기반으로 작업을 하다보면 1차 관객과 2차 관객이 나눠질 수밖에 없는데, 1차

관객으로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관객은 정말 적다. 그래서 1차 관객으로 전시나 프로젝트에 참

여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뭘 하는 사람이고 무엇을 왜 했는지를 이해를 돕기 위해서는 출판이 가

장 적합한 것 같다. 영상도 많이 남기긴 하지만 영상이 오히려 더 애매한 매체인 것 같다. 카메라

가 있으면 참여하는 사람들이 이를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2012년에 처음 만났을 때도 가상의 인물을 중심으로 한 이

협업과 커뮤니티

055

야기 기반의 작업을 했었고, 지금까지 작업 역

시 그래왔기 때문에 책이라는 매체가 빠질 수

없었다.

Q. 정기적으로 만나서 작업을 진행하는지?

ETC: 주로 목요일마다 만나서 회의를 하고

있다. 작년에 작업실이 있었을 때는 거의 합숙

하듯이 숙식을 같이 했었는데, 지금 작업실이

따로 없어서 주로 카페에서 만나 와이파이와 소

켓을 찾아 헤매고 있다.

Q. 세 분 모두 개인작업과 팀 작업을 병행하고

있다. 그 둘의 차이가 있는가?

ETC: 각자 이미 하고 있던 작업들도 하면서

도 혼자서는 하지 못할 작업들, 특히 스케일이

크거나 장기 프로젝트 같은 것들을 협업을 통해

서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할 수 있게 서로 체계

같은 것을 만들어 진행한다. 또한 개인작업 외

에 ETC로서 성취하고 싶은 부분도 있는데, 이

름을 다르게 갖는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또 다

른 자아가 되도록 해주는 것 같다.

Q. 협업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듣고 싶다.

ETC: 우리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달

라서 모인 것도 아니고,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더 구체화 시키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협업, 대

화의 대부분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 셋 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개입하면서 우리가 할 수 없고

우리가 보지 못한 부분까지 볼 수 있게 되는 측

면이 있다.

전보경: 갑자기 그 말이 생각난다. 쉬린 네샤

트 전에서 본 인터뷰 영상에서 개인작업과 영화

056

작업간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쉬린 네샤트가 이렇게 대답했다. 개인 작업은 내가 혼자서 할 수 있

는 것만큼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영화 작업은 내가 모르는 분야의 사람들과 내가 할 수 없

는 것, 그 이상을 같이 해주는 사람들과의 대화의 과정이라고. 우리도 각자 자기 작업을 하니까

혼자 작업을 할 때는 자기만의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지만, 다 같이 모였을 때는 한 명이 A를

던지면, 그 다음 사람이 B를 던지고 또 C를 던지면서 아이디어가 계속 변하고 확장되기도 하고

더 명확해지기도 한다.

진나래: 협업이 어떤 실질적인 면도 있긴 하지만, 그전에 굉장히 개인적인 작업을 해왔기 때

문에 나에게 있어 협업이란 나라는 사람, 자아를 빼내는 과정인 것 같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과

뭔가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 다른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인 것 같다.

이샘: 개인적으로 사람이 자기 자아를 얼마큼 가지고 있는가, 어디까지를 나라고 말할 수 있

는가를 생각해 봤을 때, 절반 정도가 고정적인 자기 자신인 것 같다. 보경씨를 만났을 때나 나래

씨를 만났을 때, 상대방과의 상호작용에 의해 이샘 A가 되기도 하고 이샘 B가 되기도 하는 게 재

밌다. 또 협업을 할 때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까지도 수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을

한다. ‘내가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건 좋은 협업이 아닌 것

같다. 어떤 사람이 감독의 위치에서 모든 것을 지휘하는 게 아니라 저 사람의 자아와 나의 자아가

만나서 나도 너도 아닌 어떤 다른 것이 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협업과 커뮤니티

057

송윤지

협업을 대하는 미술관의 자세

현대미술이 이처럼 다양한 맥락을 형성할 수 있었던 데에는 선구적인 미술가들의 노력뿐만

아니라 미술관이 기여한 바가 크다. 미술가들이 다른 장르와의 교류를 통해 미술의 경계를 허무

는 동안, 미술관들은 그러한 ‘장르-콜라보’ 작업들을 전시함으로써 그것이 다시 미술의 범주에서

다루어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온 것이다. 말하자면 미술관은 현대미술의 영역 확장을 위한 일

종의 플랫폼으로서 기능해온 셈인데, 이는 ‘미

술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이라는 미술관의 가장

기본적인 성격에 따른 것이다.

이러한 미술관의 기능에 따라, 기업들은 종

종 브랜드에 예술적 이미지를 덧씌우기 위해 미

술관과 협업하고자 한다. 가까운 예로 유명 보

드카 브랜드 앱솔루트와 서울시립미술관의 협

업을 들 수 있는데, 앱솔루트는 ‘트랜스폼 투데

이(Transform Today)’라는 새로운 글로벌 태

그라인을 런칭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 난지창작

스튜디오의 입주 작가들과 서울 곳곳에서 벽화,

설치, 퍼포먼스 등의 작업을 선보이는 ‘시티 캔

버스 프로젝트(City Canvas Project)’를 진행

하였고 7월 21일에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 앞 야외에서 미술관 외벽을 이용한 아트월

058

과 퍼포먼스, 시티 캔버스 프로젝트 참여 작가들의 작품들을 포함한 런칭파티를 개최하였다.

이처럼 미술관의 협업은 대부분 미술관이 공간과 인프라를 제공하고 비예술분야의 협업 상대

가 콘텐츠를 채우거나 마케팅을 맡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협업방식은 미술관에게 그동

안 다루지 않았던 분야에 대해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고, 미술관의 문턱을

낮춤으로써 대중친화적인 이미지를 강화하고 인지도를 높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렇다면 미술관과 다른 미술관 혹은 유사예술기관이 협력하는 경우는 어떨까? 보다 큰 규모

의 전시를 진행하기 위해 미술관이 국내외 유사기관과의 협업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그 결과가 사

실상 소장품교류전이나 기획전시의 수출입 등에서 크게 벗어나기는 어렵다. 협업이라는 것이 단

지 ‘함께 일한다’는 개념을 넘어, 상호간의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하여 시너지효과를 낳

기 위함이라는 것을 상기해 볼 때, 이러한 협업들이 보이는 단순한 결과는 아쉬운 대목이다. 같은

분야, 혹은 다른 분야의 유사예술기관과의 협업에서 우리는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있을까?

최근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영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지역미술관 연계 작가 교류

전인 <협업의 묘미>(2014. 5. 10 ~ 8. 31)와 일민미술관의 인문학박물관 아카이브 전시인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2014. 6. 26 ~ 9. 21)는 주목할 만한 사례다. 이들이 보여 준 협업은 협업의 취

지와 대상이 되는 기관의 선정, 협업의 결과로서의 전시의 형태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특성을 보

임으로써 단순한 교류전을 넘어 선 오롯한 하나의 기획전을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

다.

<협업의 묘미>전은 영은미술관의 주도로 일본 가나자와의 시립미술관인 21세기 미술관과 국

내 4개 지역미술관(경기도미술관, 겸재정선미

술관, 의재미술관, 일현미술관)과의 협업을 보

여주었다. 영은미술관은 국내 최초로 창작스튜

디오를 운영하기 시작한 미술관이자, 사립미술

관임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문화발전을 위한 연

계 프로그램 계발에 주력하면서 지역미술관으

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있다. 이러한 정체

성에 힙 입어 영은미술관은 다른 지역 창작스튜

디오들과 협업했던 2013년의 <공존>전에 이어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다른 지역미술

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이번 <협업의 묘미>전을

기획하였다. 특색 있는 지역 연계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지역미술관들을 엄선하여 서로의 장

점을 배우고 발전을 도모하는 장(場)을 마련하

협업과 커뮤니티

059

고자 한 것이다. 전시장의 2층에 각 기관의 개괄적 소개와 함께 기관별 특색 프로그램 관련 자료

와 출판물 등을 별도의 아카이브 섹션으로 전시하고 각 미술관의 사례를 발표하는 전시 연계 심

포지엄을 개최한 것 역시 그러한 의도를 보여준다.

참여 미술관이 단지 국내 지역미술관들에 그쳤다면 이 전시 또한 단순한 교류전으로 보였을

것이다. 영은미술관이 일본의 21세기 미술관을 협업의 주요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의 한수였다고

060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의 21세기 미술관은

세계 현대미술을 지역에 소개하는 한편 지역 전

통공예인 태피스트리의 현대적 발전을 이끌고

인구 45만의 가나자와시에서 연 평균 150만 명

의 국내외 관광객을 유치하면서 신칸센 노선까

지 만들어냈을 정도로 지역의 문화·경제에 기여

했다고 평가받는 지역미술관의 대표적인 성공

모델로, 영은미술관은 21세기 미술관과의 협력

을 통해 특별한 롤 모델이 없는 한국의 지역미

술관들에게 글로컬(glocal)의 성격을 갖는 지역

미술관으로의 발전상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다.

이번 협력을 계기로 향후 국내 지역미술관들이

일본의 또 다른 지역미술관들, 나아가 아시아의

더 많은 지역미술관들과 교류할 수 있도록 점차

규모를 확장할 계획이라고 하니, 앞으로 영은미

술관이 지역미술관의 새로운 성공모델로 성장

하길 기대해본다.

또 다른 예인 <다음 문장을 읽으시오>전은

인문학박물관의 이전을 계기로, 박물관 소장품

들을 일민미술관으로 옮겨온 전시다. 기획자들

의 선별기준에 따라, 20세기 한국의 근대화 과

정을 담고 있는 각종 책과 잡지, 신문 등의 인문

학 자료들은 박물관 식의 전시분류체계에서 벗

어나 ‘모더니티의 평행우주’, ‘인간의 생산’, ‘이

상한 거울들’이라는 세 개의 섹션 아래 재편집

되었다. 또한 텍스트 위주였던 소장품들은 사

운드, 영상, 설치, 인쇄물 등으로 변환되어 보존

문제에 관한 우려를 해소하는 동시에 관람객에

게 박물관 유물을 직접 보고, 듣고, 읽을 수 있

는 현상학적인 경험을 제공하였다. 한국 근현대

사의 큰 줄기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삶

을 섬세하게 직조하는 이러한 기획을 통해, 시

협업과 커뮤니티

061

대의 인문학적 유산들은 단지 미술관이라는 임시 거처에 보관되는 것을 넘어 현대미술의 맥락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이 전시를 현대미술의 맥락으로만 보기는 또 찝찝하다. 그것은 일민미술관이

라는 장소가 가진 맥락 때문이다. 일민미술관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에 처음 세워진 이래 동아

일보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문화관으로의 개조를 거쳐 1996년에야 비로소 지금의 미술관으로 거

듭난, 그야말로 한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겪어낸 역사적인 장소인 것이다. 또한 일민미술관은

2002년부터 국내 유일의 다큐멘터리영상 아카이브를 개설하여 정기적인 상영회를 가지고 있고,

2012년에는 신문박물관이 이전하여 함께 운영되는 등 자체적인 인문학 콘텐츠를 보유한 기관이

기도 하다. 현대미술관이자 인문학적 정체성을 가진 일민미술관의 장소성이, 전시되고 있는 인문

학박물관의 소장품에도 이중적인 정체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미술관 주도의 협업에서 중요한 것은, 미술관 자체가 어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영은미술관의 예와 같이 각각의 협력기관이 공통된 정체성을 가질 때에는 지속적인 네

트워킹을 통해 유사기관의 관련 제반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고, 일민미술관처럼 다른 시스템으

로 운영되는 기관과 협력할 경우에는 스스로의 운영체계가 갖는 성격에 맞추어 콘텐츠의 형태나

제시하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미술관들의 만남에

의한 더욱 다양한 변주. ‘협업의 묘미’란 그런 것이 아닐까.

062

이나연

그림과 돈에 대한 다소 이상적인 제안

돈 얘기를 하겠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쓸 적에도 퍽이나 가난했다니 용기를 내본다. 어울

리지 않게 돈 얘기를 해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건 한 아트딜러와의 대화 때문이다. 해외에서 작

품거래를 시작한 이가, 한국에서 작품을 거래하면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단다. 작가컨택에서부터

전시, 오프닝 파티에 이르기까지 갤러리라는 공간을 둘러싼 일련의 행위들이 결국 작품을 팔기

위한 것, 즉 돈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 모든 일들을 훌륭히 치르고 나서, 정

작 중요한 돈 얘기가 나오면 딴청을 부리거나 머뭇거리다가 세련되지 못한 실수들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진행한 문화 행동들이 돈 얘기가 나오는 순간 산업 활동으로 오염되고 만다는

것처럼 말이다. 이 돈에 대한 부끄러움이 문화계에서 일한다는 이들이 내세우고 싶은 마지막 자

존심인 걸까?

애초 가치측정이 어려운 미술의 값을 논의하다보니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일까? 작품가나

예술가들의 노동에 대한 가치 평가에 대한 논란은 갑자기 떠오른 문제는 아니다. 인적자본론이

대두되고 시간당으로 측정되는 양적노동 외로 질적노동이 인정되면서, 예술가는 자신의 능력으

로 소득을 창출하는 한 명의 사업가로 인정된다. 그 사업가들이 여전히 돈 얘기가 나오면 쭈뼛거

리는데, 그들을 대변하는 큐레이터나 딜러까지 또다시 돈 문제에 아마추어 시늉을 낸다면 문제는

심각하다. 시장이 형성되지 않은 작가들에게 작품가를 물을 경우, 팔리지도 않고, 팔릴 일도 없는

데 값을 매긴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삐딱한 대답도 나온다. 값을 매겨둬야 언젠가는 팔

지 않겠느냐는 낙관적 제안도 책임질 순 없다. 실제로 그림을 한 번을 팔아본 적 없는, 즉 시장가

라는 게 없는 화가들을 꽤 많이 알고 있으니 말이다. 작가라는 직업 자체가 돈을 좇았거나 경제에

밝다면 애당초 선택하지도 않았을 일이었을 진데, 그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해보겠다고 약간의 권

협업과 커뮤니티

063

리라도 요구를 하면 순수성을 잃었다는 말로 포

박해 버리는 현실을 타개할 방도는 없을까?

이 질문에 답을 얻기 위해 주목해 볼만한

건 기획자나 평론가가 아닌 아트딜러, 즉 화상

의 역할이다. 평론가와 기획자도 작가를 발굴하

고 소개하는 귀한 역할을 하지만, 화상이야말

로 작가의 식탁에 쌀과 고기를 올려줄 수 있는

이들이 아닌가. 실제로 이들이 미술계에서 가

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은 <아트리뷰>

가 선정한 파워 100의 상위 순위만 봐도 알 수

있다. 2013년도의 1위는 2,387억원을 주고 세

잔의 작품을 구입한 것으로 유명한 알-마야사

(Al-Mayassa) 카타르 공주고, 2위가 아트딜러

데이빗 즈워너(David Zwirner), 3위가 즈워너

와 동년배의 딜러 이완 워스(Iwan Wirth), 4위

가 아트딜러 신화의 선봉에 있던 래리 가고시안

(Larry Gagosian)이다. 미술계의 실권이 누구

의 손에 쥐여져 있는지 보여주는 순위표다-그

러니까 결국 돈 아닌가 말이다. 물론 앞서 거론

한 거래불능의 작가들과 몇 십, 몇 백억의 작품

가를 기록하는 작가들을 거래하는 파워딜러들

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지

만, 이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여러가지 다른 성격

을 가지고 그림을 거래하는 무수한 딜러들이 작

가와 가장 직접적인 형태의 협업을 하는 이들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이들이 돈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일을 한다고 해서, 미술관련 종사자 중

에서도 기획자나 평론가에 비해 조금은 부정적

인 시선을 받았던 건 아닌지 의심해 본다. 전시

를 잡아 판매와 연관 짓기 위해, 작가와 수시로

소통하며, 공간을 제공하고, 미술관 전시의 후

원자가 되기도 하는 이들을 미술계에서 굳이 떨

064

어뜨려, 미술시장이라는 이름 속에 옭아매두려

했던 건 아닐까. 혹시 그런 경향이 있었다면, 여

기선, 작가의 생계를 위해 작품을 돈으로 환산

해 주는 화상이야말로 미술시장을 벗어나 미술

계 전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재조

명해보고 싶다. 화상은 두 종류의 편견에 둘러

싸인다. 별다른 노동 없이 큰 대가를 얻는다고

과소평가 당하거나, 부자인 컬렉터들만을 상대

하는 고급스럽고 특별한 업무라 과대평가 받는

식이다. 화상에 대한 위아래로의 편견을 중간

에 붙들어 매, 제대로 된 평가를 해 볼 수는 없

을까. 화상이나 아트딜러라는 말이 다소 상업적

인 표현으로 여겨져 요즘은 갤러리스트라는 말

을 선호하는 듯하다. 애당초 그 직업의 숭고함

을 칭찬하기로 한 마당에 여기서부턴 이들을 갤

러리스트라 칭하기로 하자 수 있는 작품을 제공

하면서 예술품 중독자들을 위한 ‘고정’ 공급만

하는 것이 아니다. 훌륭한 전시, 새만찬, 파티,

우정, 많은 토론을 제공하는 시스템의 일원이

다. 주식, 부동산, 채권은 자산이고 그 통화가치

가 쉽게 줄어든다. 하지만 미술계는 더 많은 것

을 주고, 그 가치대부분은 고유하다. 생각해 보

라. 사람들은 그 일원이 되고 싶어 한다.” 갤러

리를 기반으로 움직이지만, 실제로는 전 세계의

미술 현장을 돌고, 사람들을 만나며, 작업실에

묶여있는 작가를 대신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존재. 갤러리스트야말로 돈을 쥔 컬렉터와 작가

의 작품이 만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

는 대표적 비물질 노동자다. 미술에 대한 식견,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반으로 한 세련된 태도,

뛰어난 경제관념, 극적인 인적 네트워크의 활

용, 스타 작가를 만들어내기 위한 정치력, 전속

협업과 커뮤니티

065

작가를 관리하는 경영 능력에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인간성까지. 말 그대로

21세기 개념의 르네상스맨이라 할 수 있는 전천후 멀티플레이어로서의 능력을 보여준다.

즈워너와 한때 어퍼이스트에서 2차 시장에 중점을 두는 갤러리를 공동 운영하기도 했던 이완

워스(Iwan Wirth)는 처음 갤러리를 시작코자 전속작가를 영입할 때, 가장 선호한 작가가 피필로

티 리스트(Pipilotti Rist)였다. 리스트가 원하는 조건은 풀타임 어시스턴트를 붙여달라는 것이었

고, 워스는 이를 받아들였다. 작가가 작업에 가장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을 수용해 지원하고, 그

를 바탕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을 때, 그 작품을 시장에 유통시켜 준다. 워스가 운영하는 하우

저 앤 워스 갤러리가 최근 엘에이에 분점을 내기 위해 LA현대미술관(MOCA)의 수석 큐레이터였

던 폴 시멜(Paul Schimmel)을 영입한 일도 의미있다. 이들의 협업 자체보다, 큐레이터였던 시멜

이 갤러리스트로 역할을 전환한 사실에 관심이 간다. 큐레이터보다 갤러리스트로서 작가들과 더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방식을 알기 때문은 아닐까 싶어서다. 물론 여기엔 또 돈이 얽혀 있겠다.

갤러리스트와 작가의 협력 관계를 말하는 데 가장 좋은 사례는 게빈 브라운(Gavin Brown)의

경우다. 1988년 24세에 작가로서 휘트니 미술관의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뉴욕에 처음 입성한 브

라운은, 작가 시절 교류한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 피터 도이그(Peter Doig), 마

크 렉키(Mark Leckey) 등의 동료들을 홍보하고 돈도 벌 필요가 있어 1994년 소호에 작은 갤러

리를 열었던 것이다. 동료들의 생계를 책임지고자 본인의 작업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등에 진 케

이스다. 작가였던 만큼 발상도 특이해서 1993년 첼시 호텔의 방을 빌려 페이튼의 데뷔전을 치르

게 한 바도 있다. 화이트큐브 갤러리가 가진 고정관념을 깨려고 애쓰면서 갤러리라는 명칭대신

사용하는 엔터프라이즈의 개념에 걸맞게 활동하고자 한다. 단 사업체라기엔 굉장히 자유분방한

곳이긴 하지만. 이 자유로움 속에서도 공생하는 작가와 갤러리의 모습을 모범적으로 구축해낸다.

드문 일이다.

이상 나열한 세 명의 갤러리스트들은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경우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작은 사

무실뿐이거나, 공간도 없이 발에 땀나도록 고객을 찾아다니거나, 2차 시장 운용으로 고객들의 신

뢰를 얻고자 애쓰던 시절이 있었다. 본인이 확신하는 작가를 영입하고자 삼고초려도 여러 번이었

다. 그들의 초창기 모습에서 평범한 중산층의 사람들이 그림을 사고파는 문화를 일궈낼 수 있는

단서를 찾고 싶다. 새로 출사표를 던지는 중소 규모의 신진 갤러리스트들이 많이 생기고, 그들의

열정과 인맥, 지식, 재능을 바탕으로 한국에도 젊은 중소규모의 컬렉터들을 만들어낼 순 없을까.

다단계 판매 전략과 유사한 것 같지만, 그들 젊은 갤러리스트들의 가족부터 시작해, 친척, 친구로

뻗어나가다가, 가끔 찾아오는 고객은 단골로 확보하는 시장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지역에서 작

은 규모로 시작되는 자생적이고 토착적인 커뮤니티 기반의 자연스러운 미술거래를 시작해 보는

거다. 유럽의 중소도시에선 이미 지역작가와 지역민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전혀 생소하고

엉뚱한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런 갤러리들이 판매에 자신이 생기고 운영자산도 마련되면 페어에

066

도 나가보고, 가끔 여행 삼아 해외 중소페어에도 나가면서, 점차 큰 갤러리로 성장해나가는 것 아

니겠는가. 그렇게 차근차근 작가에겐 그림이 팔린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소비자에겐 그림은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줄 수 있다면, 미술이 정치인이나 재벌들의 비자금마련이나 돈세탁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줄 수 있다면, 한국에서도 미술이 돈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줄 수 있지 않을까? 즉, 향유를 넘어 소유하는 문화 창출이 가능하지 않을까 말이다.

말로 하니 쉬워 보이고, 실상 어떤 집단적인 움직임으로 일어나기엔 불가능한 일이지만, 예술

계의 오랜 문제인 작가들의 생계와 작업의 분리를 해소시킬 유일한 방법은, 국공립 기관에서 나

오는 일시적인 지원금이라기 보다는 이 같은 자생성이라고 본다. 모든 사람이 갤러리스트가 되는

일은 없을 테니, 미술에 취미가 있는 이들이 부업으로 작은 움직임을 실천해 보면 어떨까. 예술가

가 부업을 해야만 하는 시대가 아니라, 경제력 있는 본업을 가진 이들이 부업으로 갤러리스트 노

릇을 하는 사례가 특수한 몇몇 예가 아닌 하나의 움직임처럼 일어나는 시대가 탄생한다면? 실제

로 뉴욕 첼시와 로워이스트사이드의 무수한 중소 규모의 갤러리들은 취미로 컬렉팅을 하기 시작

해, 본인의 수집품에 관심을 보이는 친구들에게 작가와 작품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다가, 그 일이

확장되면서 ‘불가피하게’ 공간이 필요해져 갤러리를 차린 경우들이 여럿 된다. 본격적으로 갤러

리스트가 돼야겠다고 작심했다기보다는, 어떤 자연스러운 요구에 의해 그 역할을 수행하게 됐을

뿐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수집에 대한 집착이 커질수록 판매에 대한 거부감이 생기긴 하겠지

만, 어쨌든, 두 쪽 다 작가에게 이로운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다.

허버트와 도로시 보겔 부부

2007년을 정점으로 했던, 한국에 불어 닥친 유례없는 미술투자 이상 열풍으로 책임감 없는

갤러리스트와 분별없는 미디어에 휩쓸려 얼마나 많은 젊은 작가와 초보컬렉터가 피해를 입고 상

심에 빠졌는지 안다. 한국미술계 전체가 아직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투자의 욕심을 걷어낸 뒤에라도 미술엔 돈을 쓸 만 하다고 떠들고 싶다. 다른

모든 상품들처럼 예술작품도 사회적으로 규정된 유용성에 따라 가치가 결정된다면 무슨 재미인

가. 무용한 것을 유용한 것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문화적 태도의 힘이다. 자본주

의의 기준 하에 쓸모없는 것들을, 우리의 의지로 쓸모 있게 만들면서 시스템에 저항해 보자는 얘

기다. 가장 쓸모 있는 물건으로 취급되는 ‘돈’은 사실상 먹지도 못하고 아무 기능도 없는 종잇조

각에 불과했다. 사실 그 자신 아무런 능력이 없는 돈의 힘은 어떤 재화로든 바꿀 수 있다는 가능

성에서 나온다. 그 가능성에 각종 상상을 가미해 무수한 의미와 가치를 불어넣어 숭배하기 시작

한 것도 인간이었다. ‘뭐든 살 수 있는 화폐만이 믿을 수 있는 것’이라는 물신성에서 비롯된 사고

방식을 바꾸는 시작점으로서의 미술품 매매는 어떨까. 미술작품은 돈보다 훨씬 아름답고, 지적

이며, 높은 이상을 내재할 뿐 아니라, 상상력도 충분히 자극하는데, 왜 돈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

협업과 커뮤니티

067

야 하는지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반복해 말해보건대, 이젠 무가치한 돈을 가치 있는 그림으로

바꿀 때가 됐다. 그러다보면, 언젠간 한국에도 허버트와 도로시 보겔 부부(Herbert & Dorothy

Vogel)가 탄생할 날도 오지 않겠는가. 우편 분류원이었던 허버트와 도서관 사서였던 도로시는

5,000점이 넘는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 작품 컬렉션을 만들어 수집의 역사를 새로 썼다. 도로시

가 남긴 컬렉션 철학을 적으며 글을 매듭지어 본다. “빚을 낼 정도의 비싼 작품으로 컬렉팅을 시

작할 필요는 없어요. 월급 범위 내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답니다.”

068

김미정

선택과 집중의 공백삼성미술관 플라토 <스펙트럼 스펙트럼>전

10월 12일까지 진행되는 플라토의 이번 전시 제목은 「스펙트럼-스펙트럼」이다. 아마 전시

제목을 보고 그동안 리움 미술관이 신진작가 발굴을 목적으로 진행해 온 「아트 스펙트럼」을 떠올

리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2001년 이후 5회 전시를 통해 48명의 작가를 배출한 「아트 스펙

트럼」은 올해 리움 개관 10주년을 맞아 플라토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탈바꿈한다. 새로운 형식이

라 함은, 과거 「아트스펙트럼」의 출신 작가들-물론 이들은 현재 한국미술계의 중요한 중견작가

들이 되었다-이 지금 자신들이 주목하는 신진 작가들을 각각 추천하여 함께 전시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전시 제목인 스펙트럼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스펙트럼에는 숫자

7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는데 제목에 충실하듯 지난 「아트 스펙트럼」의 출신 작가 7명과 그들

이 추천한 오늘의 신진작가 7명으로 구성되었고 말 그대로 ‘스펙트럼+스펙트럼’의 전시가 되었

다.

따로 또 같이

이번 전시의 참여작가는 김범+길종상가, 미나&Sasa[44](설치),+슬기와 민(디자인), 오인환(

설치)+이미혜(설치), 이동기(회화)+이주리(회화), 이형구(영상)+정지현(설치), 정수진(영상)+경현

수, 지니서(설치)+홍영인(회화, 퍼포먼스)로 구성 되어 있다. 이들은 이미 서로 깊게 알고 있던 사

이였거나 혹은 안면부지의 관계들도 섞여 있다. 그래서 14명의 작가는 함께 편지를 주고받거나

서로를 인터뷰하는 소통 방식을 채택하고, 이 과정들은 도록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이동기

는 이주리와 안면은 없지만 회화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을 통해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

의 인터뷰로 관객들은 두 작가의 만남 그리고 이주리라는 젊은 작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협업과 커뮤니티

069

출품된 모든 작품을 자세히 설명하기보다는 전시장에 놓인 순서대로 묘사해보자면, 먼저 로

댕의 <지옥의 문>과 <칼레의 시민들>이 서 있는 전시장 입구에는 지니서와 정지현의 작품이 관

객을 맞이한다. 지니서의 <Rivers>는 양면의 색이 다른 가죽으로 로댕의 죽음의 문과 전시장 입

구 사이의 기둥들을 묶어 건축적이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가진 공간을 만들어낸다. 정지현은 <

저편의 리듬>과 <종이 낙하 장치: 전보다 조금 무거워진>을 선보인다. 경험의 기억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일정한 시간마다‘빛과 중력의 계약을 잊지 않기로’라고 희미하게 적힌 메시지를 천

장에서 떨어뜨리고,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관객들은 무심히 밟고 지나가거나 우연히 마주하게 된

다. 아트샵으로 가는 계단에는 다양한 소품들을 사용한 길종상가의 설치물을 볼 수 있다.

전시장에 입성하게 되면, 슬기와 민이 사후 디자인한 그 동안의 <아트스펙트럼> 포스터를 지

나 정수진의 영상, 홍성인의 2008년 미국 쇠고

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를 자수로 섬세하게 담은

작품을 만나게 된다. 강렬한 작품들을 넘어가면

말의 움직임을 인간의 몸으로 완벽하게 수행하

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든 장비를 착용하고 전

시장을 걸어다니는 이형구의 퍼포먼스 영상을

보게 된다. 그리고 다시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포스터를 넘어 작은 방에는 미나&Sasa[44]의

작품과 이주리의 애니메이션이 있고, 이어 전시

장의 가장 밝은 방에는 김범과 오인환, 이미혜,

이동기, 경현수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앞에서 개인적인 움직임의 순서대로 전시

장의 풍경에 대해 묘사했는데, 여기까지 읽었을

때 이 전시장에서 작품들이 서로 짝지어진 작가

들끼리 함께 구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

을 것이다. 전시는 이들을 ‘짝’으로 묶기보다는

「스펙트럼-스펙트럼」이 14명이 참여하는 그룹

전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더 집중한 것으로 보인

다. 결국 두 명의 작가의 소통과 선택이 존재하

는 것은 맞지만 전시장에서는 각각의 독립적인

이야기를 발화하는 것이다.‘따로 또 같이’ 전략

을 사용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이 전시

에서는 ‘같이’보다는 ‘따로’의 힘이 더 크게 보

070

인다.

14명의 작가는 그동안의 작업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을 출품하거나, 혹은 새로운 작업들을

선보였다. 그러나 이 글에서 각각의 작품에 대

해 설명하지 않은 것은, 전시 내용이 리움 10주

년을 기념하고 아트스펙트럼을 재조명했다는

것이 주가 되는 전시이며 그렇기에 「스펙트럼-

스펙트럼」이 사용한 전시의 형식에 더 주목해야

하기 때문이다.

먼저 궁금한 것은 「스펙트럼-스펙트럼」전

에 참여한 「아트 스펙트럼」 출신 작가들의 선정

기준이다. 도슨트의 설명을 들어보니 그동안 아

트스펙트럼을 통해 발굴된 48명의 작가들 중 일

부는 이제 창작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도 있거

나 활동이 뜸한 이들도 있다고 하기에 7명의 선

택 기준은 추측은 가능하지만, 서문을 통해서도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도록이

아닌 리플렛과 전시를 통해서는 두 작가의 소

통 기간과 내용, 선정의 이유 등은 알 방법이 없

다는 것도 이 전시의 특징 중 하나라고 할 수 있

다. 관객이 가장 처음 만나는 설명서인 리플렛

은 출신 작가와 신진 작가를 한 틀로 묶어서 기

호까지 붙여 친절히 설명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두 작가의 시너지를 기대하게 되지만, 디스플레

이 된 위치 자체가 멀리 떨어져 있으며 작품의

내용적으로도 연결되는 부분들은 거의 발견하

기 힘들다.

더욱 궁금한 것은 신진작가들의 선정 방법

이다. 그룹을 보면 자신이 이미 아는 작가들도

섞여있으며 이 전시 때문에 처음 만난 작가들도

있다. 둘 사이의 오가는 소통의 내용들을 도록

으로만 확인할 수 있기에, 전시장에서 시각적으

협업과 커뮤니티

071

로 좀 더 분명하게 나타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무엇을 ‘함께’ 할 것인가?

선배 작가가 후배 작가를, 혹은 작가가 작가를 추천하는 형식은 이미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작년 하이트 컬렉션의「미래가 끝났을 때」그리고 프로젝트에 참여한 작가가 다음 참여

작가를 추천하는 「비디오 릴레이 탄산」을 예로 들겠다.

작년 하이트 컬렉션의 「미래가 끝났을 때」 전시를 기억한다. 이 전시 역시 현재 활발하게 활

동하고 있는 중견작가들에게 젊은 작가들을 추천받아 기획되었다.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의 책 중

한 챕터의 제목을 차용한 이 전시는 현재의 젊은 세대들을 돌아본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그러

나 당시 전시를 보면서 든 궁금증은「스펙트럼-스펙트럼」과 동일했다.「미래가 끝났을 때」의 큐레

이터가 선정한,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중견 작가들의 기준과 신진 작가들을 선정한 과

정 등은 별도의 홍보물을 통하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물론 추천제를 활용하는 전시는 이미 전시에 참여했거나 어느 정도 알려진 작가가 젊은 작가

를 추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관객은 참여 작가들에 대해 기대하게 된다. 또한 신선한 젊은 작가들

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일 것이다. 그러나 ‘추천’이 등장하면, 자연스럽게 ‘왜?’라

는 질문이 동반된다. 그 궁금증을 전시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추천한

작가와 추천받은 작가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의 장면들을 전시장에서도 충분히 펼쳐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3회를 맞이한「비디오 릴레이 탄산」은 현재 아르코미술관 스페이스 필룩스에서 진행되고 있

다. 젊은 작가들의 역동적인 영상으로 마로니에 공원의 저녁을 울리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비디

오 작업을 진행하는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상영할 곳이 마땅치 않고, 작품의 환경을 타협해야하

는 것이 현실이기에 새로운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탄생했다는 배경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도 추

천의 과정과 이유에 대한 설명은 따로 없다. 하지만 추천제는 이 프로젝트가 지속될 수 있는 중요

한 동력으로 자리한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상영하고 아티스트 토크 등을 통해 소통할 수 있

는 기회를 얻게 된다.

추천제를 활용한 다양한 전시들이 등장하고 있다. 세대를 거슬러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이거

나, 같은 세대의 작가들이 서로를 이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한다. 어쩌면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흐

름일 수도 있다. 다만 이제 일시적인 행사가 아닌,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그 과정을 효과적으로 보

여주고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한다. 그런 의미에서「스펙트럼-스펙트

럼」전이 가진 공백은 아쉽기만 하다.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무언가를‘함께’한다면, 공유와 공생의

의미는 더 확장될 수 있기에 앞으로 이러한 형식을 사용하는 전시들의 새로운 방향을 기대해본

다.

072

이 헌

민간거버넌스와 마을 공동체

‘동네’를 중심으로 한 마을공동체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이러한 마을조직은 주부와 청년

등 사회 여러 계층이 참여하며, 독서모임에서 마을기업까지 그 형태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데, 과거 지역 활동가와 일부 주민의 필요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하고 운영되던 조직이 최근 관

주도하에 마련된 민간주도형 거버넌스를 통해 체계적으로 지원받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이들 기관의 정책방향과 지원방식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마을 중심의 공동체 형성과 지속

가능한 운영, 그리고 확산의 선순환구조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민간주도형 거버넌스’와 ‘수혜자

중심의 지원형태’를 매우 중요한 요소로 설명할 수 있다.[1] 이 두 가지 요소는 문화예술분야에서

지원기관과 사업주체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점에 대한 개선점을 살펴보기 위한 제도적

제안과 시도(실험으)로 살펴볼 지점이 있고, 나아가서는 문화예술분야에서도 확산되고 있는 아티

스트-런 조직과 공동체, 지역과 연계한 단체의 운영과도 연결하여 생각해 보았다.

민간주도형 거버넌스는 소통의 역할과 예산운용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데 용이한 측면이 있

다. 민간 거버넌스이기 때문에 일정부분 담보되는 예산운용의 자율성은 수혜자중심의 지원태도

와도 연결이 되는 부분인데, 문화예술분야에서는 소위 ‘팔길이 원칙’을 강조하면서도 지원기관이

자 피감기관으로서의 입장과 기금의 수혜자이면서 사업주체자라는 상충되는 관계의 충돌이 늘

발생한 반면, 마을공동체 지원사업의 경우 민간 거버넌스를 통해 사업의 수행이나 성과, 그리고

그 행정처리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입장을 나타낸다.

서울시는 현재 서울시 산하 ‘서울시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를 통해 마을공동체 조직을 지원

하고 있다.[2] 주민 3인 이상이 모이면, 우리마을프로젝트, 분야별 마을공동체 사업, 주민제안사

업 등 크게 세 가지 분야에 지원할 수 있고, 분야별 마을공동체 사업의 경우 돌봄, 문화, 경제, 주

협업과 커뮤니티

073

거 4개 분야에 대한 제안을 상시로 받아 커뮤니

티 조직과 활동, 이에 필요한 거점 공간을 지원

하고 있다. 서울시 25개 자치구에서 수십 개의

커뮤니티와 이중 33개 다목적 커뮤니티 공간이

운영되고 있는데, 문화예술, 인문, 생태, 주거

등을 복합문화공간, 공방, 도서관, 문화카폐, 소

셜다이닝 등 다양한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좀 더 세부적으로는 마을공동체사업의 경우

씨앗기, 새싹기, 성장기로 지원형태를 단계별

로 구분하여 지원하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씨

앗기는 모임형성을 지원 하며, 새싹기에서는 이

를 바탕으로 주민필요와 문제에 대한 인식과 해

결 과정에 상설화가 이루어지면, 종합적인 마을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

고 있다. 단체의 활동이 전문화 될수록 지원금

도 증가하고 형태도 다양해지는 ‘인큐베이터’형

지원 형식이다. 이와 함께 ‘서울시마을공동체종

합지원센터’는 산하기관으로 서울마을미디어지

원센터,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청년허브, 서울

NPO지원센터 등을 별도로 두어 마을을 기반한

공동체 조직과 활동에 필요한 분야 및 계층별

지원을 분담하고 있는데, 청년허브의 지원시스

템도 마을공동체사업의 지원형태와 유사하다.

청년허브는 청년참, 청년활, 청년공간지원

사업을 단계적으로 시행하고 있는데, 청년참은

정책상 필요한 사업목적을 별도로 공고하는 것

이 아니라 청년들이 모임을 자발적으로 조직하

고 스스로 흥미로운 일을 실현하고자 하면 선

별에 따라 최대 100만원을 지원하고 있다. ‘청

년참’으로 조직 운영과 사업의 목적성이 담보된

경우 ‘청년활’을 통해 연간 1000만원 단위의 프

로젝트성 사업에 대한 지원과 공간임대료를 지

074

원받을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서울마을미디어지원센터는 마을의 소식은 물론 지역 내 활동하는

단체들의 소식과 활동을 공유하며, 지역주민이 자체적으로 미디어를 생산하고 대내외적으로 공

유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마을공동체 운영에 또 다른 전제는 ‘수혜자 중심의 지원형태’이다. 이는 앞서 ‘민간주도의 거

버넌스’가 야기하는 장점과도 연결되는데, 수혜자 중심의 지원형태는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

회, 「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과 거버넌스의 과제」의 ‘마을지향행정 1.0’에 잘 나타나 있다. 주요

내용은 ‘맞춤형 수시공모에서 관의 일방적인 주도를 지양하고, 사업의 성장단계별로 지원내용을

상세하게 구분하며, 주민 스스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성장을 유도하는 인큐베이터식 전략’

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요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예산의 운용을 ‘포괄예산제에서 바구

니예산’ 운용으로 변화시킨 것을 강조하고 있다.

민간주도형 사업의 실행과 성과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활용되는 것이

아닌 큰 용도 하에서 세부적인 운용과 사용은 사업주체들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권한을 일

임하고 신뢰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마을기업의 구성과 활동에 있어 마을기업인큐베이터의 활동도 빼놓을 수 있다. 마을기

업 인큐베이터는 지역 활동가의 개념을 포괄하면서 개인과 개인, 기업과 기업, 개인과 기업을 연

결시켜주기도 하고, 마을공동체 조직이나 마을기업을 구상할 아이디어만 있고 무엇을 어디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주민들을 위해 제도나 행정적 뒷받침을 지원하고 있다. 강북구 인큐베이터

이면서 수유재래시장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수유 다락방’에서 활동하는 곽윤주 인큐베이터는

인큐베이터의 활동을 ‘가능성의 지원’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큐베이터로서 “사업주체들이 성숙하

기 보다는 수동적이거나 자체역량을 개발하지 못하고 정체되는 경우. 또는 지원금이 끊기면 운영

이 중단된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내가 단체의 일원으로서 구성원들이 서로 하고자 하는 일

에 대한 지원을 더 잘 받을 수 있도록, 잘 운영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하고 참

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큐베이터는 마을기업의 부족한 역량과 영역을 보충해주는데, 커뮤니티

에 필요한 커뮤니티나 인력을 연결시켜주고, 마을조직의 전문성과 마을기업 구성원의 역량을 높

이는 것을 주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도시화와 재개발로 인해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이 희미해지고 경제적 가치에 따른 사회경제적

가치(계급) 중심의 공동체로 재편성 되면서, 지역경제나 공유경제를 회복시키는 마을기업과 공동

체 활성화를 위한 청년조직의 활동을 정책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토대를 제공하기 위

해 생태계조성에 치중할 수 있었던 것은 민간거버넌스가 갖는 유연성에서 기인한다고 판단된다.

이러한 운영방법, 주체(계층), 활용수단에 대한 세분화된 지원과 지원제도에 대한 유연성은 사업

주체와 사업포트폴리오를 확장하고 다변화하는 데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문화예술분야에도 다양한 지원제도나 신진그룹을 위해 지원제도는 마련되어 있다. 하지만,

협업과 커뮤니티

075

예술가들이 주체가 되거나 예술생태계를 조성하는 지원제도는 예술의 가시적인 성과나 수월성

측면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한 해에 수 만 명씩 배출되는 문화예술 관련 전공

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공적기금을 수혜받기 위해서는 지원자격을 갖추기 위한 실적과 활동경력

을 획득하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이처럼 최소한의 활동을 보장받기 위한 진

입장벽이 너무 높거나 몇 몇에 국한된 공공기금의 중복수혜의 문제는 문화예술분야를 ‘엘리트주

의’나 ‘그들만의 리그’로 호도되기에 충분하다.[3]

앞서 참고한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제고를 위한 기초연구」에서는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제고를 위한 정책과제로 크게 네 가지를 꼽았다. 첫 번째, 일반인-문화에술인-지원담당자간 소

통기반조성 두 번째, 표현의 자유 존중과 장르별 분배정의 실현을 위한 지원의 형평성제고, 세 번

째, 신진예술가-지역-소수자 등 약자에 대한 배려, 네 번째, 투명하고 합리적인 지원절차의 마련

등이다. 마을공동체 조직을 위한 지원제도를 문화예술분야의 지원형태와 단순 비교와 실질적인

실행에 무리가 있지만, 기금운용의 유연성과 결과나 성과의 수월성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위에 언급된 네 가지 정책과제에 대한 참고사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1] 유창복 서울시 마을공동체 종합센터지원장은 ‘마을공동체 1년, 시민토론회’,「서울시 마을만들기 사업과 거버넌스의 과제」

를 발표하면서 마을공동체 운영에 필요한 과제와 지향점으로 민간주도형 거버넌스와 수혜자중심의 지원제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2] ‘관에서 주도한 공동체 조직 또는 마을기업의 형태는 2011년 행정안전부에서 ‘자립형 지역공동체 사업’의 일환으로 취약계

층 일자리 정책이 마을기업 지원의 형태로 변화한 것이며, 서울시 사회적 경제 정책수립을 위한 민관 TF가 구성되면서 마을

공동체기업이라는 명칭으로 서울형 마을기업 정책을 추진하면서부터 발전. 과거 사업비 지원방식에서 주민주도의 공동체

성 복원과 강화를 정책의 목표이자 방법론으로 하는 서울형 마을기업의 입안되어 주민의 참여범위가 확장된 것’ (마을경제

생태계와 마을기업 김종남 서울시 마을기업사업단)

[3] 문화예술진흥기금에 국한했을 때, 지난 6년간 문예진흥기금액 총5371억원중에 복수지원자가 35%인데 반해 기금수혜율

은 75%에 이른다는 지적이 있어 문화예술분야의 기금수혜가 편중된 부분이 있다고 지적된 바 있다. 이에 「문화예술지원의

공정성 제고를 위한 기초연구(문화관광연구원 2010)」에 나타난 설문결과 공공기금지원의 문제점으로 ‘심사과정의 투명성’

, ‘심사방법의 구체적 전문성과 심사위원 구성의 공정성’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이 많았다.

076

윤율리

급진적 지속을 모색하는 다원예술축제 페스티벌 봄 디렉터 이승효 인터뷰

페스티벌 봄은 현대무용, 연극, 미술, 음악,

영화, 퍼포먼스 등 현대예술의 장르간 상호 교

류를 근간으로 다양한 예술가들의 작업을 소개

해 온 국제다원예술축제다. 올해로 8회째를 맞

이했고, 사실 이런 설명이 식상하게 느껴질 정

도로 이미 국내에서는 나름의 역할을 도맡는 주

요한 축제로 인정받고 있다. 최근 봄에서 이슈

가 되었던 젊은 디렉터의 선임, 그가 추구했던

변화들의 타임라인을 이번 지면을 통해 세세히 다루지는 않으려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

은 인터뷰와 기삿거리들이 충분히 생산된 바 있다.

합정으로 이사한 페스티벌 봄의 새 사무실 근처에서 짧은 휴가를 마치고 귀국한 이승효 디렉

터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사무국의 안방을 지켜오고 있는 배성림 홍보팀장이 함께 자리했

다. 장르와 장르, 예술가와 예술가, 더 나아가 기획자와 관객이 융화되는 거대한 수용체로서, 그

가 생각하는 다원예술축제의 역할론과 디렉터십에 대해 얼마간의 대화를 나누었다.

다양성이 한 곳에 모여 일으키는 전이 - 소리는 어떻게 영상이 되고, 연극은 어떻게 디자인이 되

는가?

윤율리 : 공식 일정이 끝났는데도 여전히 바빠보인다. 24일에는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NJP

Weekend Live’라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고 들었는데?

협업과 커뮤니티

077

이승효 : 경기문화재단에서 지원하는 공연장 상주단체 육성사업의 일환이다. 원래 백남준 아

트센터에 내가 예술감독을 겸하는 가네샤 프로덕션이 들어가 있었다. 매년 소소히 해오던 것이고

올해로 4년째가 되는데, 다만 이번에는 1년치를 묶어 크게 진행하다보니 마치 새로운 기획처럼

보이는 것 같다. 이번 8월에는 소리, 10월에는 미디어를 테마로 공연한다.

윤율리 : 이름에 무언가 특별한 의미가 있는지?

이승효 : 말그대로 주말에 벌어지는 라이브라는 뜻이다. ‘We Can Drive’의 의미도 있는데,

개인적으로 기획을 통해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드는 일에 관심을 두고 있다. 일본의 경우 최근

성공을 거둔 트리엔날레 두 개가 공교롭게도 모두 대도시 밖에서 개최되었다. 능동적으로 도시

밖으로 나가는 것, 일상의 밖으로 나가 참여하게 만드는 것이 가지는 힘이 있다고 본다. 백남준

아트센터도 서울 도심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다는 점이 하나의 모티브가 되었다.

윤율리 : 흥미로운 라인업이다. 더 정확히는 아티스트 개개인보다 그들의 조합이 이색적이다.

이승효 : 산가츠는 소리를 매개로 관객과의 인터랙션을 만드는 팀이다. 예컨대 공연장에서 통

용되는 특정한 룰을 정하고 참여를 유도한 뒤 다시 그것을 관찰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식이다. 반

면 후지이 히카루는 영화 감독이다. 영상을 통해 다양한 것들을 기록하는 작업을 병행해 왔다. 루

프트쿠츠는 테크니션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두와 김태춘, 김대중은 이제는 워낙 유명한 인디 아

티스트들이니 다들 아시리라 생각한다.

윤율리 : 얼핏 공통점이 없는 것 같은데.

이승효 : 처음부터 이들의 다름에 주목했던

것은 아니지만 최대한 여러가지 영역의 작업자

들을 포진시키기 위해 노력한 것은 사실이다.

참여 아티스트들의 다양성은 관객의 다양성을

담보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각기 다른 영역에

흥미와 관심, 취향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공간에

서 만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우리가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가기 위한 시작점이라고 본다.

윤율리 : 공연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가? 시간을 분할해 나누어 쓰는 전통적인 방식

이라면 라인업에 시너지가 생기지 않을 것 같

다.

이승효 : 백남준 아트센터는 상당히 큰 건축

물이고 카페테리아와 뒷뜰도 가지고 있다. 공간

을 넓게 사용할 것이다. 자세한 형식을 미리 소

078

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무언가가 다른 무언가의 도구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포인트다. 소리와 영상을 어떻게 결합시킬지, 공연 안에서 소리에 어떤 역할을 부여할 것인지 이

런 문제들이 대단히 중요하다. 단순히 혼합의 재료가 되는 것으로는 새로운 것, 재미있는 것이 나

오지 않는다. 연주가 영상이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연극이 어떻게 디자인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이 필요한 것이다. 결국 매체의 본질을 다시 묻게 된다. 소리가 무엇인지, 연극이 무엇인지.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 위해, 끊임없이 벽을 무너뜨리고 차이를 수용할 것

윤율리 : 그런데 왜 굳이 ‘새로운’ 것을 하려는 건가? 강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이승효 : 기획자로서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고 또 그것이 정말 즐겁다. 더 큰 차

원에서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예술의 중요한 사회적 역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새로움이란 바로

그 질문에 대한 환기다. 페스티벌 봄의 기획에는 흔히 실험적이라는 수식이 따라붙지만 ‘실험적

예술’이라는 것에도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예술을 통한 실험이 가능한 시대일까? 다른 방식

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하는 의문.

윤율리 : 예술의 불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이승효 : 나는 비관론자는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술의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예술은 일반적인 것, 사회적인 것들과 다른 차원에 있었다. 주술이나 종교였고 광기였다. 현대에

서는 그렇지 않다. 예술이 제도와 사회 안으로 들어온 시점에서 예술가는 더이상 특별함을 담보

받지 못한다. 무언가 새롭고 신선한 것들은 오히려 대부분 예술 바깥의 영역에서 만들어지고 있

다. 예술이 지루해지고 힘이 없어지는 원인 중 하나라고 본다. 예술가가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

다면 새로운 것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를 숙고할 필요가 있다.

윤율리 : 비전공자, 그리고 기획자로서의 입장에 치우친 생각 아닐까? 실기를 전공한 작가들

이나 실제로 작업을 해나가는 예술가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배성림 : 가령 아마 회화 작가들은 새로움에 대해 큰 관심이 없을 거다. 나 역시 그런 불필요

한 압박을 피하고자 페인팅을 선택했었다. 회화는 굉장히 운동 같은 면모가 있고 자기수련의 측

면이 강하다. 그런데 작업을 위해 내면으로 침잠하다보면 결과적으로 어떤 새로움을 맞닥뜨리는

순간이 있다. 외부의 세계가 아닌 내 속에서 그것을 발견한다는 점이 다를 뿐.

이승효 : 표피적인 새로움은 유행에 불과하다. 나 역시 아티스트의 고유성 같은 새로움을 보여

주고 싶다.

윤율리 : 요컨대 다양한 것의 수용으로 예술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승효 : 올해 페스티벌 봄에 대해 조언해주신 어떤분은 그것을 커뮤니티성이라 표현했다. 수

용이든 협업이든 융합이든, 그걸 뭐라 부르든 열심히 ‘연결’시키려 한다. 최종적으로는 강조했듯,

그것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협업과 커뮤니티

079

윤율리 : 페스티벌 봄이 추구해온 다원성도 같은 맥락인가?

이승효 : 한국은 쉽게 질문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나라다. 사회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심

지어 예술 안에서도 그렇다. 서로 대화가 안통하는 거다. 그것이 가능한 판을 만드는 게 페스티벌

봄의 목표였다. 소통을 어렵게하는 원인 중 하나가 너무 제각각 고립되어 성장해 온 씬의 특수한

환경인데, 한국과 일본이 특히 이런 경향이 아주 심하다. 그나마 일본은 이것이 거의 평평해져 경

계가 많이 허물어진 상태이고, 한국은 아직 그 단계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차이가 있다. 먼저 이

단단한 벽을 무너뜨려야 한다.

윤율리 : 일본의 상황에서 배울만한 점이 있다면 어떤 것들일까?

이승효 : 일본은 ‘듣보잡’들의 나라다. 세계적인 전문가들, 아티스트들을 많이 배출했기에 마

치 그들이 뭔가를 선도해 갈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다수의 다른 취향, 다른 오타쿠들이 꾸

준히 무언가를 함께 만들어간다는 점이 그들이 가진 문화적 근력이다. 일본식 모델이냐 유럽식

모델이냐를 놓고 본다면 우리도 일본식의 평평함을 추구하며 갈 수 밖에 없다. 평평해지는 과정

에서 발생하는 아마추어리즘은 경계해야 한다.

두려움과 불안함 가로지르는 급진성 - 일시적인 축제에서 지속되는 패러다임으로

윤율리 : 공대생 출신에 이력도 복잡하다. 시쳇말로 이것저것 뜬금 없는 일들을 해왔는데, 이

런 삶의 궤적이 디렉터십에 끼친 영향이 있을 것 같다.

이승효 : 늘상 하는 농담인데 천재들이 너무 많아서 전문가가 되기 힘들더라. 공대 출신으로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화적, 심리적 장벽들을 더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가깝게는 컴퓨터를 전공

한 사람들과 예술을 하는 사람의 뇌 구조가 상상 이상으로 참 많이 다르다. 다를 수 밖에 없도록

교육받아 왔다. 여전히 외국과의 격차를 느끼는 지점인데, 서양의 공대생들 정말 창의적이지 않

나. 산업 영역에서도 예술 영역에서도 똑같은 걸 우리가 하면 이상하게 재미가 없다. 삼성이 왜

애플 같은 제품을 만들지 못하는지 사실 우리 모두 그 이유를 알고있다.

윤율리 : 사람들이 타 분야의 것을 필요 이상으로 어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승효 : 익숙하지 않음으로 인한 두려움이 크다. 예컨대 공대생들에게 전공과 관련 있는 전시

를 추천해주면 선뜻 참석하지 못하고 꺼려한다. 수용의 측면에서도 이게 연극인지, 음악 공연인

지, 미술 전시인지, 낭독회인지가 규정되지 않으면 관객들이 불안해 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안

심을 느끼는 것이 얼마나 편안한가. 반면 자기 스스로 무언가를 규정하고 정의내리는 일은 불편

함, 심지어 불쾌함을 유발한다. 내 돈 내고 좋은 거 보러 왔는데 이게 뭐냐,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냥 그 상황 자체가 불편한 거다.

윤율리 : 어떤 측면에선 의도적으로 그런 불편함을 만들거나 이용하는 것 같다.

이승효 : 사람들을 불편하게조차 만들지 못한다면 그건 실패한 거라고 생각한다.

080

윤율리 : 그 불편한 걸 가져다 팔아야하는 홍보팀의 심정은 어땠겠나. 규정할 수 없는 걸 임시

방편으로 규정하고, 시장논리나 대중정서에도 타협해야 했을텐데.

배성림 : 매년 시행착오가 있었다. 예측불가능성이 너무 컸달까. 모든 작품의 대상이 하나하

나 다르다는 것이 어려움을 증폭시켰고, 어떤 프로그램은 제대로 된 타겟에 기획을 노출시키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이거 반응이 괜찮겠다 싶었는데 전혀 반대일 때도 있었고, 전혀 관련 없는

세대나 계층에서 특정한 공연에 관심을 보일 때도 있었다. 그냥 우리가 좋아하는 공연을 알리는

일이라면 훨씬 쉬웠을 것이다. 더러는 공연 현장에서의 참여 요청에 대해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

다.

윤율리 : 이야기나눈 것들을 기획적으로는 충분히 녹여내고 있는가? 올해 정기 프로그램에서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말해달라.

이승효 : 작품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 외적인 소통구조면에서도 우리가 말해야 할 것들이 있었

다. 그런데 여러 수용주체들을 폭넓게 끌어들이지 못했다. 급히 페스티벌 봄을 맡으며 시간에 쫓

겼던 것 같다. 더 적극적으로 다양한 분들을 만나고 더 래디컬하게 가겠다.

윤율리 : 처음으로 비수기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도 그런 의미인가?

이승효 : 페스티벌 봄의 축제를 지속되는 어떤 것으로 바꿔보려 한다. 물론 여기에는 현실적인

이유들도 있다. ‘전술에서 전략으로’를 통해 가장 먼저 협업의 문제를 다루었다. 수평적인 공동작

협업과 커뮤니티

081

업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겐 아직 낯선 문화다. 작업자들이 현실적으로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

는데 이런 지점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했다.

윤율리 : 다양성, 다원성을 추구하는 봄의 사무국은 어떤 사람들이 일하는 곳일지 궁금하다.

세간에는 일단 얼굴로 이력서를 한 번 거른다는 꽤 신빙성 있는 루머가 있다.

이승효 :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지향한다. 좀 뜬금 없지만 야생동물 유전자를

연구하던 분도 계시다. 지금은 대중 없는 사람들의 시대이고, 이들이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예술의 패러다임을 제시하기 위해 우리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

082

전효경

대안은 없다. 자기조직화가 미래다.

2005년에 스테판 딜머스(Stephan Dillemuth), 안토니 다비스(Anthony Davies), 야콥 야

콥슨(Jakob Jakobsen)은 자기조직화에 유사 선언서와 같은 글을 발표한다. 여기서 그들은 모든

제도는 ‘자기조직화’의 형태에서 시작했으며, 앞으로 동시대 미술의 근본 방향이나 목적과 동떨

어져 필요 이상으로 제도화된 국립 미술관, 대

학교 교육, 여타 저명한 미술기관들은 앞으로

자기조직화된 독립적 미술 조직에게 그 힘과 영

향력을 빼앗길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또한

현 신자유주의 시대가 가지고 있는 미술을 하기

위해 여러 구조적인 어려움들을 자기조직적인

수행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이 ‘자기조직화’라는 행동 방식에 대해 이렇게

나 유토피아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에

서 일까? 이번 글에서 필자는 동시대 미술에서

자기조직화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고, 자기조직

화의 완성단계인 ‘제도화’로 넘어가기 전의 중

간 단계인 ‘Artist-Run-Space’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 하고자 한다.

동시대 미술안에서 ‘자기조직화’라는 개념

이 통상적으로 이해되는 것은 주로 기존 구조

협업과 커뮤니티

083

에서 벗어나 특정 개인들이 모여 그룹을 만들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조직화

에 대한 믿음을 가졌던 사례들은 미술사적으로 무수히 많이 있었다. 흔히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

티스트 그룹을 보면 그렇다. 작가는 기본적으로 철저히 개인적인 비전을 미술의 형태로 구현하는

사람이지만, 도무지 섞일 수 없을 것 같은 묵직한 에고를 가진 아티스트들이 모여 한 가지(혹은

다수의) 방향성을 가지고 어떤 일을 꾸밀 때, 개인이 했을 때 보다 무엇인가 더 큰 정치적 사회적

시너지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는 것이다.

나아가 자기조직화 라는 개념에서 ‘조직’이라는 부분에 집중해보자. 조직은 그 특성을 어떤

특성을 형성하고 그 특성이 만들어낸 내부 구조를 지속하기 위해 필요한 구체적인 규칙과 동의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동시대 미술의 자기조직화를 철저히 수행했던 여러 조직 혹은 공동체들은 내

부적인 규칙과 그에 대한 긴밀한 동의가 이루어졌던 경우들이 많고, 그것이 발달했을 경우 ‘제도

적’인 성격을 띄곤 한다. 아티스트 간에 어떤 미적인 것이나 정치적인 담론들에 대한 토의와 동의

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면, 회가 거듭할수록 그 그룹안의 개인 사이에 단단한 규칙들이 만들어진

다. 외부자는 그 규칙들이 생기기 위해 필요했던 담론의 층위를 구체적으로 알기는 쉽지 않아도,

밖으로 드러난 조직의 특성을 통해 그 규칙이 드러난다. 이 단단한 규칙이 만들어진 다는 것, 그

리고 이 규칙이 외부자를 통해 공공연해 지는 것은 다른 말로 ‘제도화’를 의미한다.

이러한 수행의 결과는 아티스트 그룹, 그룹의 큐레토리얼 활동, 혹은 조금 더 발전된 형태로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Artist-run Space, 미술가가 운영하는 공간)로 나타난다. 아티스트 런 스

페이스는 말 그대로, 아티스트가 만들어내고 지속하는 공간으로 기존 구조에서 벗어나 독립적으

로 만들어진 곳이라는 점에서, 대안공간의 한 종류로 분류할 수는 있으나 동등한 뜻은 아니다. 우

리나라의 대표적인 예로는 대안공간 풀, 대안공간 루프, 시청각, 최근 새로 문을 연 커먼센터 등

이 있다.

2010년, 테이트 모던에서는 개관 10주년을 맞아 독립기관들을 초대하여 No Soul For Sale

이라는 국제적 이벤트를 만든 적이 있다. (참고: http://www.nosoulforsale.com/2010)이 행사

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대안공간인 대안공간 루프를 포함하여 리우 데 자네이루에 있는 아티스트

그룹, 비영리 미술기관 70여 팀을 초대하여 테이트 모던의 터바인 홀에서 퍼포먼스, 전시 등의

갖가지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이 행사에는, 뉴욕의 아티스트 스페이스, 이플럭스, 홍콩 파라사이

트, 모로코 라밧의 라파르망 22, 독립 출판기관 무스, 런던의 no.w.where 등이 참가했다. 세계

적으로 가장 제도화되고 ‘발전된’ 형태의 기관 들 중의 하나인 테이트 모던에서 10주년을 기념하

여 이런 행사를 진행했다는 것은 2005년에 딜머스, 다비스, 야콥슨이 자기조직화에 대한 선언서

에서 이야기 했던 동시대 미술의 대안이 다시 한번 독립적인 조직에 있음을 반증하는 것인지 모

른다.

아시아의 한 예로 홍콩의 대표적인 미술기관 중의 하나인 파라사이트를 들어보자. 파라사이

084

트는 1997년,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되기 전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한 아티스트

그룹이 1996년에 만든 아티스트 런 스페이스 였다. 그 후로 거진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 기반을

바탕으로 국제적인 담론과 여러 상황을 다루는 전시 뿐만 아니라 아티스트 레지던시, 국제 심포

지움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홍콩 미술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 하고 있다. 이것

은 특정 사회·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생성된 구체적인 담론을 바탕으로, 아티스트 그룹이 구성되

고, 그 시점에서 발전한 미술기관의 좋은 예가 된다. 다시 말해, 자기조직화의 상태에서 제도화로

발전된 사례인 것이다. 그 외에도 탄탄한 자기조직화의 과정을 거쳐 제도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아시아의 여러 사례로는, 2000년에 처음 만들어져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싱가폴의 루앙그루

파(ruangrupa), 인도네시아의 나샨 콜렉티브(nha shan collective), 타이페이의 큐브프로젝트

스페이스(TheCube Project Space) 등이 있다.

서울에서도 이런 사례들이 특정한 영향력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을까? 대안공간 풀이나 대안

공간 루프가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초기 대안공간들이 생겼던 순간을 물리적으로 공유

하지 않은, 다른 세대에 속한 필자 본인은 공간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의도와 힘이 지금까지 지

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서울의 미술 현장에서 보다

젊은 세대는 얼마나 구체적으로 기존 구조에 반해 ‘자기조직화’의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가? 세대

간의 문제, 기존 구조에 대한 극한의 불신 등을 가진 현 세대를 생각할 때, 진정한 대안적 문화적,

미술적 실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만한 문제이다.

협업과 커뮤니티

085

無籍큐레이터 Qrator

협업!? 부유(浮游)하는 언어에 대한 고찰 독립문화기획자 류성효 인터뷰

문화예술계에 핫한 키워드로 종종 언급되는 ‘협업’에 관한 용어들을 살펴보면 이미 현장에서

는 자연스레 사용돼 온 것들을 뒤늦게 이슈화 시키고, 제대로 성찰되지 않은 채 트랜디한 환경만

을 조성해 기존의 활동마저 오염시키는 듯하다. 정책적 반영에 대한 선의지로만 보기에는 현장

에서 일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늘 혼란스럽다. 특히 서울, 경기, 인천을 벗어난 지역 상황은 그 체

감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부산비엔날레를 비롯해 영화제, 연극제, 음악 페스티발 등에서 일을 하

면서 말 그대로 독립문화를 위한 독립문화공간 아지트(AGIT)를 운영하기도 했던, 그리고 부산을

기반으로 광주, 대구 등의 지역과 협력 작업을 하고 최근 서울에 거주하며 아시아의 주요 도시를

대상으로 교류와 리서치 작업을 진행 중인 독립문화기획자 류성효를 만나 ‘협업(Arts Collabo-

ration)’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최근 한국예술인복지재단과 콘텐츠진흥원이 공동주최한 ‘창조산업일자리 페스티벌’에서 기업과

예술가들의 협업 사례를 보여주는 <1+1 특별전>을 관심있게 봤다.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면서

느꼈던 예술에서의 협업(collaboration)에 대해서 말해달라. 최근 문화예술계에서 언급되는 협

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1+1 특별전>에서의 ‘협업’모델로 제시된 작업들은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형태가 아닐까 싶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들의 상품이 작가, 또는 작업과 연

계되면서 보다 세련되거나 강화된 이미지를 획득하기를 원하고 작가들은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보상을 얻거나 한정된 범위가 만들어지기는 하지만 금전적인 부분에서 자유롭게 실험을 즐기기

도 한다. 다시 말해, 예술현장에서 이야기하는 협업과는 구분해야 한다. 어쨌거나 ‘협업’이라는

086

주제를 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현대미술’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너무 광범위하다. 혼자

무인도나 깊은 산 속에서 스튜디오를 만들어 놓고 자기만족을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문화예술에는 필연적으로 협력이라는 개념이 따라 붙는다. 그렇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협업

을 이야기하는 것인지를 되묻고 싶다. 장르, 지역, 세대, 목적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협

업의 형태가 있고, 그 것들이 다시 또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협업을 협업이

라고 정의하고 질문하는지가 먼저 정리되어야 하지 않을까.

동의한다. 협업과 같은 용어가 명확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공모나 기금사업을 진

행할 때 기획안 안의 성찰이 결여된 용어로서의 ‘협업’, 그러면서도 하나의 유행어처럼 번져, 작

업과 프로젝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협업’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미 현장에서 자연스럽게 진행되어 왔던 ‘협업’이라는 것이 왜 마치 특별한 것처럼 이슈가

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분명 협업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다.

협업이라는 방법을 통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이끌어 냄에 관심이 많아진것도 이유일 것이다. 반

대로 협업이라는 형태를 유도하는 정책이나 지원 등 때문은 아닌가? 일례로 다원문화 지원정책

은 대학에 학과가 개설된 장르 중심의 기존 지원제도에서 소외된 작업, 예를 들어 소위 서브컬쳐

(subculture)라고 불리는 록(Rock)음악이나 힙합(Hip hop), 재즈(Jazz), 그래피티(Graffiti), 스

트리트 댄스(Street Dance) 등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도록 포함시켜 가는 소중한 과정 중 하나라

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 장르가 섞여 전형적 장르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작업도 포함해서 말이다.

그런데 다원이나 융복합 등의 지원 정책 대상이 협업을 해야 하는 작업으로 한정되어 이해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 봐야 한다. 이런 상황이 협업을 작가 스스로 대상화 시켜 고민하게 만드

는 이유이지 않은가. 이 생각은 지극히 주관적 견해지만 자연스럽게 필요에 의해 협력을 요청하

고 요청 받으며 진행되는 협업이라는 ‘과정’이 마치 작업의 ‘목적’인 것처럼 된다면 자연스럽지는

않다. 만약 이런 부자연스러운 흐름이 있다면 그건 그 부자연스러움을 고민하는 작가들의 문제라

기보다는 현실적이지 못한 정책의 문제다. 말이 길어지기는 하는데 크고 작은 협업은 특정한 누

군가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작가들에게 닥친 현실이다. 최근 이슈를 만들고 있는 협업이란 용어

는 일상적인 영역에서의 협업이 아니라 좀 더 개념적인 깊이를 동반한 협업, 또는 스펙타클하거

나 세련된 표현 양식으로서의 협업을 어떻게 이끌어 낼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고 본다. 물론 일

상영역의 협업에 대한 효율적 방법의 또 다른 고민일 수도 있겠다. 그나저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

려니 역시 협업이라는 말의 범위는 구체화시키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느껴진다.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다가 최근 서울을 비롯한 전국적으로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혹시나 문화예술적 움직임 중 협업 관련하여 지역과 서울(경기, 인천을 포함한)에서 분명한 차이

를 느끼는 지, 그 부분을 어떻게 보고 있는 지 궁금하다.

협업과 커뮤니티

087

서울과 서울 외의 지역은 확실히 다른 것 같

다. 지역에 있을 때는 지역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어쩔 수 없이 예술가들 간

의 협업 방식을 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제한적인 콘텐츠와 다양성의 빈곤 등을 끌

어안고 그 안에서 작업을 하다보면 식상하고 무

료해지기 쉽다. 비슷한 패턴이 맴돌면서 관성

화 되면 재미를 잃게 되는 것과 유사하다. 때문

에 의식적이거나 계획된 협업이라는 부분을 지

역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종종 활용하

게 된다. 장르 간 협업을 통해 지역 내의 작가들

이 작업을 하는 경우, 또는 동일한 장르라고 하

더라도 외부에서 온 작가와 함께 하는 과정 등

을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새로운 동기를 부

여하는 상황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리고 지역

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작업을 하는 작가를 초대

해서 자극을 유도하면서 새로운 형태에 대한 이

해도를 높이는 기회를 제공하거나 기획자를 지

역에 초대해 함께 호흡하는 과정을 만드는 것도

일종의 계획된 협업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건

부산에서는 몇 년 열심히 돌아다니면 어떤 일이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어느 정

도 알게 된다. 그리고 반복되어 캐스팅되고, 타

이틀은 바뀌지만 내용은 유사한 상황을 자주 목

격하게 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새로움이 없으

면 사람들의 문화적 수요를 꾸준하게 만들어 내

기 힘들다. 또한 기획하고 일을 진행하는 사람

들과 참여하는 예술가들에게도 재미를 주기 어

렵다. 이러한 문제가 협업이라는 형태를 적극적

으로 활용하게 되는 주요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

한다. 어쨌든 이런 상황의 문제를 협업과 연계

시키면 문화자원이 한정된 지역이 협업이라는

088

형태에 더 강한 니즈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

다.

그간 기획해 온 활동 중 자연스럽게 협력을

이끌어 낸 사례를 소개해달라. ‘협업’이라는 용

어에 구속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교감과 어울

림을 중시하시는 것 같다.

사실 그 동안 해 왔던 대부분의 작업들을 협

업이라는 범주에서 제외시키기는 어렵다. 하지

만 최근 협업이 이슈화 되는 상황에서 많은 사

람들이 기대하는 사례를 들기 또한 어렵다. 어

떤 일을 꺼내야 할지를 잘 모르겠지만 예를 들

면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추모공연이었던 ‘아름

다운 동행’은 여러 장르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

들이 모여서 따로 또 같이 여러 창작 작업을 진

행해 부산, 광주, 서울, 하동에서 공연을 했다.

이런 작업은 당연히 협업에 기인해 진행되었지

만 협업이라는 형태를 의식한 적은 한 번도 없

었던 것 같고, 전달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효과

적으로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만

들어 낸 형태였다.

그리고 부산을 방문했던 후쿠오카의 아티스

트에게 부산지역 친구들을 소개시켜준 것이 계

기가 되어 일본 친구가 그래피티, DJ, VJ 등의

아티스트 그룹을 이끌고 부산을 다시 방문해 지

역의 아티스트들과 함께 행사를 만들었던 적이

있다. 이 때 서로 작업을 관찰하고 경험한 친구

들이 상대의 장점을 살려 작업을 하자고 제안

해 시작한 작업이 있다. 후쿠오카의 사토비트

(Sato Beats)라는 DJ가 곡을 만들어 보내면 아

우라지(AURAGI)라는 힙합크루의 랩퍼들이 보

컬을 입혀 앨범을 제작하는 프로젝트였다. 이

작업은 서로에 대한 호기심과 존중이 기반이 되

협업과 커뮤니티

089

어서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앨범 발매와 동시에 부산과 후쿠오카에서 파티 형태의 공연을 하

는 등 연계 행사도 만들며 지속적으로 좋은 협업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그리고 오래 전 이야

기지만 서울에서 연극을 기반으로 하는 문화행사를 기획하던 ‘여인숙’이라는 팀과 함께 전시를

만들고 전시장 내에서 작은 음악 공연을 진행하며, 전시장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을 했던 것도 아

주 유쾌한 협업의 사례라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 외에도 다양한 사례가 있다. 독립문화공간 ‘아지

트(AGIT)’를 운영하면서 진행했던 아티스트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통해 부산을 방문한 수많은 나

라의 수많은 장르 기반 아티스트들이 부산의 작가들과 만나 함께 놀고 이야기하며 때로는 장난처

럼 때로는 진지하게 만들어 낸 크고 작은 흔적들이 모두 의미 있는 협업이라고 생각한다.

역시 현장에서의 어울림 자체는 기획서 안에 구겨 넣은 작위적인 용어사용에 비할 바가 아닌

것 같다. 한편으로 고민해 볼 지점은 이러한 현장상황에 대한 현 예술정책의 흐름은 오히려 다원,

융복합 등의 틀을 만들어 현장 작업의 의미를 경직시키고, 제약하는 것은 아닌가.

협업은 정확한 상호간의 필요가 있을 때 진행된다. 협업 자체를 위한 협업이 만들어지는 사례

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그리고 혹시라도 시장논리와 힘의 논리, 또는 이해관계

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작업을 지원하는 정책이 행정적인 구분을 위해 억지스

럽게 협업을 수식어처럼 붙이지는 않기를 바라고 있다. 맞는 예시인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어렸을

때 이미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그러면 갑자기 짜증이 나던 경험이 한 번씩

은 있지 않은가? 공부를 하고 있는 아이에게 좀 더 효율적인 공부 방법을 이해시켜 주거나 유도하

기 위해 어떤 과정이 필요한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인터뷰가 협업이 이슈화가 되는 부

분, 또는 협업과 관계된 지원정책 등에 대해 말을 하면 할수록 부정적인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앞으로도 오랜 시간동안 중요하게 인지하

고 접근해야 하는 것을 트렌드나 이슈의 형태로 가두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유행인 것 같으니

일단 한번쯤 건드려 보려고 한다거나 단순하게 패턴을 흉내 내면서 최신 흐름에 편승했다고 생각

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안타까울 뿐이다. 반대로 현장에서 치열하게 뛰어오신 분들이 협업을

고민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가고 애정이 생기는 것 같다.

예술계에 늘 필요한 덕목은 자신만의 문제의식과 성찰이다. 이 측면에서 지금의 경향성에 휘둘리

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일 이야기가 있다면 마무리 해달라.

짧은 경험이라서 사례로 언급하기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느꼈

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실험했었던 장르 간 협업이나 지역 간 협업은 결과를 떠나 과정 자체에

서도 기대하지 못했던 긍정적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진행하고 있는

비주류 문화예술 분야를 대상으로 한 도시 간 매개 프로젝트 ‘ART TERMINAL’도 여러 아티스

트들이 자발적으로 지역을 이동하며 원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지역에서 자유롭게 새로운 창작 기

090

회에 접근하는 방법을 현실적으로 제공해 보기 위해 구상했다. 한마디로 장르와 지역에서 자유로

운 비주류 문화예술 협업 촉진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일을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다 보니 나와

비슷하게 협업을 고민하는 친구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리고 협업이 가진 드라마틱한 감동까지

제공해 주는 사례도 종종 접하게 된다. 어설픈 마무리 같지만 협업이라는 것은 극복, 확장, 도전

등을 위한 적극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렇기 때문에 협업의 목표와 방법을 설명하는 수많은

키워드 들이 어쩌면 현재의 역동적인 문화예술계 경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생각해도 무방할

것 같으며, 더 많은 키워드 들이 더 치열한 극복과 확장, 도전을 위해 등장하기를 기대해 본다.

협업과 커뮤니티

091

박가희

지속 가능한 생태를 위한 원동력, 협업 THE SHOWROOM 디렉터 Emily Pethick 인터뷰

협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 때, 여러가지형태 또는 방식의 협업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협업에 대한 다양한 정의와 논의가 있겠으나, 이번 인터뷰에서는 협업을 우리의 (예술적)활동을

지속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춰 다뤄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협력

관계와 체계를 구축함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 있는 런던에 위치한 THE SHOWROOM

의 디렉터 Emily Pethick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존속을 위한 전략적인 연대라 할 수 있는 이들

의 협업 체계와 협력 과정 그리고 그 미묘한 관계에 내재된 문법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먼저, THE SHOWROOM(이하 SHOWROOM)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부탁한다.

SHOWROOM은 런던동쪽에 문을 연 것을 시작으로올해로 31년간 지속되어온 독립공간이

다. 프로덕션을 위주로 유명작가보다는 아직 미술계에 덜 알려진, 발굴되지 않은 작가에게 작

품 제작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강한 정체성을 지닌 공간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SHOWROOM을 통해 첫 번째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이는 SHOWROOM의 역사를 만들었다해

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의 디렉터로 일을 시작한 것은 2008년부터이다. 디렉터로 일을 시작했을 당시 SHOW-

ROOM이 있던 건물을 더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이 사진들은 SHOWROOM을 옮기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문화적으로 융성했던 런던 동쪽 지역에서 활동을 지속하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결국 현재 우리가 위치한 이 곳(런던 중심 서쪽 언저리)으로 이전을 결정하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 이웃들과, 그리고 새로운 디렉터까지 새로운 환경 안의 SHOWROOM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했다. 이 지역은 런던 동부와 경제적으로 차원이 달랐고 -부동산 임대료가 훨씬 비싼 지역- 공간

092

도 거의 두 배 가량 넓었으며, 주변 환경 또한 매우 달랐다. 사실, 지역자체에 내재된 가능성이 흥

미로왔으며, 이 점이 우리가 이 지역으로 이전하게 된 가장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역적으로 흥미로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지역은 영국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 중 하나로 실업률, 범죄율 등이 매우 높은 곳이다. 우리

가 활동하는 이곳에서 우리를 둘러싼 지역과 함께 공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은 이 지역으로 이

전하는데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우리가 하는 활동들이 어떻게 이 지역 안에 녹아들 수 있

을까, 또한 이웃과 이 지역 간의 관계를 어떻게 찾고, 구축해 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우리

는 주변 지역과는 상관없이 그저 덩그러니 자신들만의 예술 활동을 영위하는그런 공간이 되는 것

은 피하고자 했다.

지역과 함께 공존하기 위한 활동 혹은 노력들은 어떤 것이 있는가?

그래서 시작한 것이 <Communal Knowledge> 프로젝트이다. 2010년부터 시작하여 올해

로 4회째를 맞이했다. 우리가 처음 이 지역으로 이전했을 때, 이 지역은 너무나도 생소했다. 지역

에 대해 알기 위해 주민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그런 프로젝트를 시작했고, 실제로 이 프로젝트

를 통해 이 지역에 대해 알아 갈 수 있었다. 또한, SHOWROOM 은 일년에 4~5번의 전시를 진행

하고 있는데, 이는 작가들에게 커미션 작업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하는 동

시에 다른 방식으로 지역과 연계하고자 함이다. 프로젝트는 주로 지역 주민의 참여와 협업을 포

함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SHOWROOM 은 강한 지역적 네트워킹을 구축할수 있었고, 관계를

쌓아 왔다.

이처럼 우리는 지역주민단체와 자주 만남을 갖거나 프로젝트를 통해 개개인과 접촉해 왔다.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지역 커뮤니티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고 지속된 관계가 또다른 새로운 관계로 발전하거나 다른 주체들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을 가

능하게 했다. 우리가 맺고있는 모든 관계들, 우정이라 부를 수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단초를 마련

했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이를 통해 우리는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프로젝트를 통해 이웃에 대해 배워갈 수 있었고, 또한, 이웃을 통해 현재 우리 삶의 조건

에 대해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양육(parenting)’에 관한 프로젝트를 진행 한 적

이 있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 삶과 그 조건에 대한 이해에 대한 과정이었다.나 역시도 부모이고,

SHOWROOM에서 일하는 스텝의 대부분이 자녀를 둔 부모였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 모두가 진

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화두를 다뤘고 지역의 이웃과 작가는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싶었

다. 그들이 양육에 대해 어떻게 경험하고 있는지에 대해 말이다. 즉, 우리가 삶에서 직접 마주하

고 고민하는 것들을 작가들은 물론 이웃과 함께 나누는 그런 프로젝트를 하고자 했다.

협업과 커뮤니티

093

그렇다면, SHOWROOM에서 진행되는 모든 활동들은 지역과 연계되어 있는가?

물론, 아니다. 우리는 지역 커뮤니티와 연계되지 않는 작업에도 커미션을 하고 있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SHOWROOM에 연락해 온 다수의 작가들이 우리가 지역 주민들과 함께 하고 있

는 활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작업을 하기 앞서 이 지역과 커뮤니티에 대해 알아가고 싶어 한

다는 것이다.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활동 외에 다른 기관과의 연계한 활동에서, 어떻게 협업을 전개하는가?

작년부터 런던을 기반으로 한 세 기관(Chisenhale Gallery, The Showroom, Studio Vol-

taire)이 함께하는 ‘How to work together’ 프로젝트 외에도, 해외 기관들과 함께하는 ‘Cluster’

, ‘COHAB’,‘Circular Facts’ 등 다양한 형태의 협력적 연대를 구축하고 있다. 그중 ‘Cluster’는

비슷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는 기관들의 협력 네트워크이다. 긴 시간 관계를 가져온 이 네크워

크는 European Cultural Foundation의 지원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기금을 통해 우리는 서로

의 기관을 방문했고, 기관뿐 아니라 기관이 위치한 지역을 함께 탐방하였다. 협력하고 있는 기관

들은 모두 주요 도시의 주변부, 거주지역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성을 담은 각 기관만의 특징들을

나타낸다. 이러한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각자가 위치한 그 지역들과 연계하고 또 어떻게 서로

의 활동을 교류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고민한다. 동시에 지역을 넘어 어떻게 (예술의) 중심과 연

결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도 수반된다.

기관이 지닌 지리적 유사성 외에 어떠한 공통점이 기관간에 존재하는가?

우리 모두 작은 규모의 기관이며, 이러한 형태의 기관이 지닌 가치를 분명히 하고자 시도한다

는 것이다. 또한, 작은 생산자로서 우리가 하는 일들, 가장 중심적으로 하는 것은 생산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제작을 통한 시각적 산물의 생산뿐만 아니라, 일테면, 담론의 생산, 시각예술을 통한

공통의 지식 생산 혹은 공유 같은 것을 의미한다.

SHOWROOM 의 활동을 보면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생산자의 역할을 강조하는 듯하다. 기본적

으로 협업이라는 테제가 깊이 뿌리박혀 있는 듯하다. 언급했듯이 협업의 형태가 기관 간의 협업

은 물론이며, 지역주민과의 협업을 통한 활동이 중심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지역

연계, 네크워킹을 통한 협력 등과 같은 유기적인 형태의 활동이 SHOWROOM 의 디렉터가 되기

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혹은는 추구하고자 하는 형식이었는지 궁금하다.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것 같다. 2003~4년에 Cubitt의 큐레이터로 활동한 바 있

했다. 이후, 일 없이 떠돌던 차에 Tate에서 출산 휴가자를 대체하는 단기 채용이 있었다. 그렇게

094

Tate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Tate에서 일했던 경험은 나 자신이 좀 더 유동적인 환경에 적합한

사람임을 깨닫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Casco라는 또 다른 작은 규모의 기관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내게 중요한 것은 일하는 방식이며, 테이트와 같은 거대 조직이 내게는 적합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재확인했다. 물론 잘 정돈된 기관에서의 경험은 내게 도움이 되었지만,거대

조직에서 한 개인은 마치 거대한 기계의 매우 작은 부속품과 같이 느껴지게 했다. 매우 협동적인

구조였지만, 거대한 구조에 한 개인이 맞춰져야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잘 정돈되어야 하고, 구조화 되고, 조정되어야 했다.

내가 생각하는 큐레이터는 작가들이 도달하고자 하는 것을 돕는 사람으로서, 도달하고자 하

는 그 목표를 성취하는 과정 가운데 종종 그 어떤 것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구조와

협상하고, 기관과의 협상은 흥미로운 경험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와 같이 매우 가까운 거리

에서 작가들과 또는 주민들과 일해야 하는 기관에서는 일이 만들기위해서 정해진 규격이나 규칙

에 맞춰가려는 노력보다는 유연하고 즉각적인 태도를 필요로한다. 구조를 만들고 일을 진척시켜

가는 이러한 방식들이 내가 전에 일했던 기관인 Casco나 지금 몸담고 있는 이곳의 가장 큰 특징

이라 할 수 있다.

SHOWROOM의 활동은 역시 거대한 미술관 구조에서 진행되는 활동에 비해 매우 유연하고 살

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 같다. 이러한 유기적인 태도를 보여줄 수 있는 예가 무엇이 있을까?

유기적이라고 하지만, 우리의 활동에 명확한 구조와 공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감당

할 만큼의 활동을 하고 있지만, 도전적인 방식을 선호한다. 우리는 공간을 작업장이라 생각한다.

전시가 진행중일 때도, 우리는 무언가가 완결되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이곳에서 시작하여 다른 곳에서 다른 형식으로 나타나는 매우 유기적인 구조로를 갖는 셈

이다. 예를 들면, 지난가을 SHOWROOM 에서 소개된 Ciara Phillips를 들 수 있다. 그는 프린

트를 통한 화려한 색채의 설치를 선보였는데, 이 작품 외에도 전시장 중앙에 책상과 도구를 마련

하여 흡사 프린트 스튜디오로 공간을 변화시켰다. 전시 기간 내내작가, 디자이너는 물론 주변 지

역 노동자들을 초대하여, 이들의 참여를 통해 프로젝트를 구성해갔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그는

2014년 Turner Prize 후보가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가 그 프로젝트를 통해 진행했던 과

정을어떻게 테이트 미술관이라는 다른 컨텍스트에서 보여 줄 것인가이다. 이러한 과정은 우리가

말하는 유기적 방식을 명확히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어떤 한 가지로 시작하여 다른 환경에서 다른

방식으로 생성되어가는 것. 이는 놓아줄 때 새로운 무언가를 생성할 수 있다.. 그 시작점을 붙들

고, 완결로 보기보다는 놓아줄 때 가능성이 열린다. 지속되는 과정의 한 부분으로 전체를 이루어

간다고 할 수 있다. SHOWROOM 은 올바른 순간에 과정을 펼쳐 보이고, 무언가 실행할 수 있을

때 놓아주기를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협업과 커뮤니티

095

또 다른 예로 COHAB이라는 이름 하에

Casco와 Tensta Konsthall와 함께 협업하는

방식을 들 수 있겠다. 우리는 협업하는 가운데

함께 무엇을 생산하기도 하고, 이는 세 기관을

오가는 가운데발전시키는 방식으로 협업이 전

개되기도 한다. 정확히 규정된 무언가를 생산하

거나 완성된 작품을 단순히 투어시키지 않는다.

이것보다는 더 나아간 형식을 추구한다.

예를 들자면 COHAB의 일부로 SHOW-

ROOM 에서 커미션 프로젝트를 진행한 Rene

Gabri와 Ayreen Anastas가 있다. SHOW-

ROOM 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두 작가가

SHOWROOM 의 위층을 스튜디오로 활용하면

서 시작되었다. 전시 매일매일 작품을 발전시

키는 하나의 작업실의 형태로 차용하고 필름을

제작하였다. 과정을 통해 완성된 마지막 영상

은 후에 Casco에서 상연되었고, 이후, Tensta

Konsthall에서 전시로 보이게 되었다. 결과적

으로 우리는 두 작가에게 확장된 플랫폼을 제공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작가는 SHOWROOM

에서의 활동을 리서치 내지는 발전하는 단계로

고려하고 있으며, Casco와 Tensta Konsthall

을 그 이상의 단계로 삼았다.

협업을 통해서 예술적인 과정에 적합한 또

다른 가능성들을 생성한다고 볼 수 있다. Rene

와 Ayreen의 경우와 같이 두 작가가 SHOW-

ROOM 에서 전시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

들은 이 과정이 단지 시작에 불과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커미션을 통해 작가들과 호흡하는 이

러한 일련의 반복되는 과정을 통해, 즉 올바른

순간에 올바른 단계를 찾는다는 것은 SHOW-

ROOM 이라는 기관과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096

프로그램이 강력한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협업을 통한 유기적인 과정, 실천들이 가능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무엇인가?

지속적인 대화라고 생각한다. 지속적으로 대화를 통해 어느 순간에 프로젝트를 소개해야할지

적확한 순간을 감지하는 것 같다. 이는 작품 제작이란 측면에서 SHOWROOM 이할 수 있는 부

분이 있고, 작가가 지원을 필요로 하는 순간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들어 본 결과, SHOWROOM 이 작은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체성을 띌 수 있는

가장 큰 요소 중에 하나는 유기적인 태도를 통한 다양한 협업의 모색이라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다른 기관들과의 협업에서는 ‘기금’ 조성을 통해 전략적 동지를 만드는 것도 같다. 비슷한 형태의

기관들 간의 유사성과 연대라는 측면 외에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기금을 조달하는 영리한 전략적

연대라고도 볼 수 있는가?

SHOWROOM 에서 프로그램 진행 및 기획외에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프로그램

을 위한 기금 조성이라 할 수 있다. 프로덕션을 가능하게 하는 전략과 방법을 찾는 것 또한 프로

덕션 과정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프로덕션 초반에 실질적으로 어떻게 프로덕션을 이끌어 갈

수 있을지에 대해 항상 이야기하며, 이는 굉장히 협업과 협력을 요구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SHOWROOM 에서 단순히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 차이는 있

지만 어떤 프로덕션에는 작가가 좀 더 포함되어 있기도 하고, 대부분 방법과 수단을 찾는 것은 협

력적으로 구축해 나간다.

작가들과 진행하는 프로덕션은 그렇고, 런던에 있는 세 기관들과 함께 작년부터 진행하고 있

는 <How To Work Together>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은 기관간의 전략적 연대라고 볼 수 있는

가?

<How To Work Together> 프로젝트는 정확히 생산을 위한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사실, 프로젝트 이면에 내포된 진짜 목적은 사전에 미리 기금을 확보하고 커미션을

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작가들을 초대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기금 조성은 프로덕션의 일부라 할 수 있고, 많은 경우 기금을 매우 늦게 조

성하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사실 이 과정은 대부분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하지만,

무언가를 생산하기 위해 고전하고, 이러한 노고가 프로덕션의 한 과정으로 포함될 때 매우 흥미

로운 지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How To Work Together> 프로젝트를 위해서 우리는 모든 재원을 미리 조달하여 다른 상

황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사실 사전에 기금을 조성하고 커미션 하는 과정은 대다수의 기관이 일

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일하는 방식은 생산을 위해 불안정한 조건 속에서 유

협업과 커뮤니티

097

연한 태도를 요구해 왔다. 때때로 기금이 조성될 수 있을지 정말 알 수 없으며, 위험을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난 한해 동안, 일년 전에 예산이 확정되어 누군가에게 커미션이 가능하고, 게다

가 충분한 예산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올해에도 비슷한 상황을

재연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기금 조성 목표의 거의 절반을 달성했다.

다시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서,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 협업 프로젝트를 통해서

“어떻게 생산하는가”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찾고자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에도 언급했지만,

기관으로서 SHOWROOM 을 어느 정도 재정적 조달을 다양화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를 통해

서 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자 했다.

<How To Work Together> 프로젝트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가? 실제로 함께 일하면서 느낀 점

이 있다면 이야기 해달라.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프로젝트는 기관들에게 재정과 활동에 있어 지속가능하게 하는지에

변화를 주고자 시작됐다. 함께 협업하고 있는 세 기관은 규모적인 측면이나 활동하는 방식, 구조

가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함께 협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굉장히 도전적인 부분들이 많다. 지속적으로 협의와 절충을 필요로 한다.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우리가 실용적인 구조를 구축하려 할 때이다. 하지만 “어떻게 함께 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자기 반영적이거나 주제적인 잣대를 대입하려고 할 때 실용적인 구

조라는 것은 형성될 수 없다는 모순이 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어떻게 보면 생존을 위한 경쟁안

에 함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함께 무언가를 생산 또는 구축해가고자 한다는 측면이 더욱더

흥미로운 지점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 이러한 과정에 대해 비평적인 태

도로 지속적으로 임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또 다른 모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관계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다. 반면, 분명한 강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서로를 지지하고,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우리가 실질적인 해결책을 서로 공유할 수 있

다. 그리고, 함께 무엇을 한다는 것은 더 즐거운 일이다. 우리가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들이 협

력적 체계를 통해가능하다. 예를 들어, 대화 중 아이디어들이 문득 튀어나오는 것과 것이다. 대화

와 소통을 통해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반대로 경쟁하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미묘한 무언가가 존재하는데,이 또한 대화를 통해 뚜렷해진다. 이러한 미묘한 경쟁

안에서서로가 절충하고 관계를 풀어가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 중 하나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 주어 감사하다. 개인적으로 지속가능함에 대한 고민들을

하고 있던 터에 좋은 모델?을 제시해 주는 인터뷰가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 질문을 하면서 인터

뷰를 마무리하겠다. 앞으로 SHOWROOM 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098

지역과 연계된 또 다른 커미션 작업을 준비 중에 있다. 또한, 아직도 윤곽이 잡히지 않은

<How To Work Together> 프로젝트의 내년 프로덕션을 위해 계획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내년

프로젝트를 위해 거의 절반 정도 목표를 달성하기는 했지만, 기금 조성을 위해 계속 고군분투해

야 하겠다.

협업과 커뮤니티

099

흑표범

우리의 연대에 공명하라,

“AAA_Asia Anarchy Alliance” AAA_Asia Anarchy Alliance 기획자 Wu Dar-Kuen 인터뷰

일본 정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 결정을 두고 최근 동아시아의 정세가 더욱 불안해진 가운데

현 일본 사회의 우경화를 과거 태평양전쟁 전야의 일본과 비교하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하지만 대다수의 젊은이들에게 약 100년 전 동아시아를 침략했던 서구 제국주의와 일제 군국주

의는 그저 타인의 기억이라는 관념의 영역에 머물러있을 것이다. 이후 80년대 말까지 이어졌던

냉전 시기의 이념 갈등, 국가 폭력의 시절까지 지나간 역사 속의 전쟁, 식민지, 분단, 빨갱이와 같

은 단어들은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읽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지나간 기억으로서 꿈속의 몽타

주처럼 분절되어 흐릿하게 느껴진다.

하늘 높이 치솟은 고층 아파트 속에 둘러싸인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야만의 시간은 지금이다.

한류 열풍의 문화강국, 세계 GDP 15위의 경제강국이란 허울 속에 도사린 자살률 세계 1위의 생

존 지옥. 한강, 철탑, 망루, 반지하, 베란다, 공원 등지에서 엄연히 사회적 타살이라고 보아야 할

살풍경들이 섬뜩하게 행렬하는 21세기에서 우리는 떨고 있다. 특히 심각한 것은 체감 수치 청년

실업률 20퍼센트의 사회가 대량 생산하고 있는 경제적 미숙아들, 일명 88만 원 세대 문제이다.

화려한 스펙에도 독립적인 인격체로 홀로 서지 못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링 밖으로 떨궈지지

않기 위한 유일한 생존 지침은 단연코 경쟁이다. 그런데 청년들을 국민들을 그저 대체 가능한 값

싼 노동인력과 소비자들로 전락시키는 현대의 풍경은 피지배계급들을 국가 자산으로 착취하고

관리하던 오래전 그것과 참 많이 닮아있지 않은가.

대만, 타이베이의 콴두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2014.5.16-7.13) “AAA_ Asia Anarchy Al-

liance”(이하 AAA)전은 청일전쟁 이후 동남아시아의 120년을 “국가”와 “자본”이라는 필터를 통

해, 국가주의의 폭력성부터 도시 재개발, 원전, 양안 협정 등 자본주의적 쟁점들까지 폭넓게 다루

100

고 있다.

후쿠시마 311 대재앙 뒤로 3년 후인 2014년 2월 6일 도쿄 만에 예술가들이 세운 가상의 국

가들인 “People’s Republic of China Republic without People”과 “Xijing Men”, 그리고

“The New Government of Japan”의 대표들이 모여 핵에너지 반대와 자유의지, 인도주의적 중

요성을 주장하며 “AAA_ Asia Anarchy Alliance”(무정부주의적 아시아 예술 동맹)을 맺었다.

AAA 선언문:

AAA는 반핵과 반정부를 향한 예술 동맹 위에 세워진 국경 없는 나라이다.

AAA는 아시아 내부에 걸친 모든 연합 시스템을 통해 논의할 가치가 충분한 새로운

쟁점들을 드러낸다.

AAA는 세계화와 불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싸우는 모든 이들과 협력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을 위해 위에 동의한다면 AAA에 가입하길 권유한다.

정치권력을 지속하기 위해 다국적 기업들과 결탁한 정부들에 반대하며 무정부주의를 추구하

는 아시아 예술가들의 연합인 AAA는 정치, 경제 시스템으로부터 독립하여 아시아 각국의 서로

다른 갈등을 해소하고 “공생”을 향한 대안이 되고자 한다. 세계화와 지역적 국제주의에 대항해

태평양 섬들을 예술로 연결하려는 시도로 40명의 아시아 예술가들과 일본의 도쿄 원더 사이트를

점거해 전시를 열었고, 이어 “Sunflower”운동이 한창이었던 대만 콴두 미술관으로 그 행보를 옮

겨 왔다.

“Sunflower”운동은 지난 3월 대만 학생운동 단체가 친중국 정책과 중국과의 서비스무역협

정 비준에 반대하며 입법원(국회) 본 회의장을 점거해 약 24일간 장기 농성을 벌인 괄목할만한

사건이다. 대만 작가 Yuan Goang-Ming의 <The 561th Hour of Occupation>은 “Sunflow-

er”운동의 철수 전야를 기록한 영상 작업이다. 대만의 국가를 거꾸로 돌린 기묘한 사운드가 흐르

고, 국회를 점거한 학생들의 모습과 그들이 철수한 뒤 텅 빈 국회를 교차한 화면에서 숭고미와 동

시에 강렬한 공허감이 느껴진다. 또 Chen Ching-Yuan의 <Portraits in Legislature Yuan>은

“Sunflower”에 참여한 다양한 사람들의 얼굴을 기록한 13점의 초상 회화와 모델이 되었던 이들

이 작가에게 보낸 편지들로 구성됐다. 작가는 24일 간이나 지속된 불안한 점거 기간 동안 사람들

과 함께 머물면서, 모델과 화가가 일대일로 대면하는 초상화라는 형식을 통해 그들과 대화를 나

눴다. 경찰과 대치한 채 긴 시간이 흐르는 사이 참여자들 내부의 긴장감, 불신 등 이면의 변화를

주목하였고, 모델들에게 그곳에서의 기억과 앞으로 저항을 지속하기 위한 개인적인 계획을 편지

로 보내줄 것을 부탁한 것이다.

한편 또 다른 대만 작가 Chen Ching-Yao의 퍼포먼스 비디오 <International Radio Exer-

협업과 커뮤니티

101

cise>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국민체조 음악에 맞

춰 유치한 운동복을 입은 작가와 퍼포머들이 체

조를 하고 있는 유머러스한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전 국민적 몸의 기억인 국민체조가 일제

“황국신민 체조”에서 시작돼 유신시절 국민을

다스렸던 대표적인 군대 문화였던 것을 떠올리

면 웃음은 무거워진다. 무거운 웃음은 히틀러-

채플린-모리무라(작가)의 삼위일체 구도를 통

해 20세기 제국주의 망령을 떠올리게 하는 일

본 작가 Morimura Yasumasa의 퍼포먼스 영

상<A Requiem:Laugh at the Dictator>로 이

어지다가, 폐허처럼 변한 “장개석 만수”홀에서

귀신처럼 “Wansui(만세)!”를 외치고 있는 한

군인을 보여주는 Yao Jui-Chung의 영상작업

<Long Live>에서 멈춘다. 민족주의의 연장선에

서 신자유주의를 경고하고 있는 듯한 반복되는

짧은 외침은 모골이 송연하도록 섬뜩하다. 베트

남 작가인 Dinh Q. Le 역시 세 개의 채널로 구

성된 영상 작업<Sound & Fury>로 과도기적 국

가의 풍경을 기록하고 있다. 호치민의 묘지를

지키는 젊은 군인들의 공허한 표정, 국가가 허

가한 유일한 집회인 축구팬들의 뜨거운 거리 행

렬(베트남 정부는 80년대 한국의 3S정책처럼

미디어를 이용해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온통

축구로 돌리고 있다.), 공산주의 깃발 아래 베르

사체 광고판이 공존하는 베트남의 풍경은 어쩐

지 불안해 보인다.

그러나 바다색으로 칠해진 아름다운 기념비

에 후쿠시마 대재앙에 대한 수많은 트윗들을 기

록한Aida Makoto의 <Monument for Noth-

ing ⅳ>이야말로 21세기 이후 현대인들이 경험

한 가장 최대의 불안을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102

있을 것이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후쿠시

마 원전 사고는 일본 국민들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모든 매스컴이 혼란에 빠져있

었던 당시 그나마 빠른 정보들이 유통되던 트위

터를 주시하고 있었던 작가는 방사능, 핵에너

지, 후쿠시마에 대한 강렬한 논쟁들 속에서 일

본 국민들 내면의 대혼란을 목격했다. 작가는

사람들의 비정상적인 심리상태에 원전 폭발 보

다 더 큰 충격을 받았고 311 이후 일본 사회 내

부의 변화를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렇게 총 25인의 작가들이 참여한 콴두 미

술관의 도발적인 점거는 과거 어디에서 시작되

었건 정확히 현실 세계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

는 쟁점들을 겨냥하고 있다. 아시아라는 한 공

간 위에 겹쳐진 서로 다른 시간들은 현 아시아

사회의 쟁점들이 어느 특정국가, 특정세대, 특

정개인의 고독한 싸움이 아닌 긴 시간 속에 서

로 연결된 공동의 문제임을 밝히며, 국가에 의

해 묶여진 피지배 집단으로서의 국민에서 벗어

나 주체적 개인들로서의 연대를 통해 공생을 향

한 공동의 기억과 미래를 만들어갈 것을 강력히

촉구하고 있다. 과연 미래의 풍경에는 경쟁보다

는 연대가 어울려야 하지 않겠는가.

* 부록 : 기획자 Wu Dar-Kuen과의 인터뷰

1. 먼저 “어째서 아시아인가?”라는 질문을 드리

고 싶습니다. 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연대에 주목

한 이유와 “AAA_ Asia Anarchy Alliance”의

창단 계기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요?

협업과 커뮤니티

103

: 우선 “아시아”라는 이 말은 고대 *페니키아인들의 언어인 “Asu”에서 유래된 것으로, “Asu”

는 해가 떠오르는 곳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아시아라는 개념이 서구에서 온 것을 의미합니다. 아

시아인들에게는 좀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아시아”는 외국어인 셈입니다.

19세기 식민지 시대의 절정에서, 아시아는 기름진 자산을 보유한 유럽 식민지의 본토였습니

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무엇이 아시아인가”, “아시아라는 외국어는 어떻게 새롭게 해석될 수 있

을까.”라는 높은 차원의 의식이 아시아 철학자들과 예술가들의 가장 큰 화두가 되었습니다. 정치

적 그리고 문화적으로 아시아의 개념은 누구에 의해 어떤 종류의 이득과 이념을 위해 계획된 것

인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에서 비롯된 “민주주의”라는 단어와 더불어 “Anarchy”라는 단어 또한

유럽에서는 부정적으로 보여 왔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서구에서 아시아로 번역되었죠. 지난 세기

아시아에서는, 전체주의가 민주주의로 가장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민주주의와 국가, 정부가 도대

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합니다. 이 모든 의문들은 기본적이고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아시아에서 “Anarchy”라는 말을 사용할 때, 우리는 보다 새로운 의미에서의 지정학적

아시아를 말하려 합니다. 여기서 “Anarchy”는 더 이상 단순히 “무정부”나 “반정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Asia Anarchy Alliance”(이하 AAA) 전시와 운동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정치”

를 점검하고 재질문할 것을 희망합니다.

2. 이 전시는 청일전쟁부터 현재까지 120년의 긴 역사를 “국가”와 “자본”이라는 키워드로 엮어내

고 있는데요, 어떤 의도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 메이지 유신이래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탈아 입구”정책으로(“脫亞入歐”_아

시아를 벗어나 유럽에 합병하자는 논리) 일본은 서구 식민통치 대열에 합류하였는데, 이것이 일

본 군국주의의 시작입니다. 이후의 120년은 한국, 중국, 대만 등의 동남아시아의 근대사를 한데

단단히 엮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난 세기, 우리는 하나의 거대한 공장과 같은 세계화의 수순으로 신 자유주의에 진입

했습니다. 국경을 초월한 자유무역에 기반을 둔 기업들은 우리들의 “탄생, 노화, 병, 죽음”을 옥죄

고 있습니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와 같이 보이는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 국가적 공장의 노동

자가 아닌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우리 모두는 이 시스템을 떠받치는 기둥의 작은 나사가 되었고

이 가운데 더 심각한 문제는 *88만 원 세대 현상입니다. 우리의 생계, 교육, 의료 제도 등 미래의

많은 부분도 상품처럼 팔렸습니다. 중산층이 붕괴되고 소수의 몇몇 사람들에 의해서 거의 모든

부가 점령된 지금 우리는 아주 혹독한 상황 속에 있습니다.

104

최근 20년간 중국은 여전히 사회주의자의 붉은 옷과 붉은 모자를 걸치고 있었지만, 그 모자

아래 머릿속에는 자본주의가 들어있습니다. 또 대만은 자본주의 경제정책을 펴왔지만, 사회주의

에 대한 경계 역시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지금의 정세는 젊은 세대들에게 더욱 어려운 상황일 것

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아시아의 지역 사회, 예술, 정치를 위한 새로운 대안을 찾는 기회가 될 수

도 있겠죠.

3. 후쿠시마 원전 폭발 이후로 아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지형이 크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AAA는 후쿠시마 핵 재해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 1980년대의 버블 경제 이후로 지금까지 일본의 경제적 상황은 계속 하강하고 있습니다.

2011년의 3.11 일본 지진은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기만 할 총체적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이

로 인해 일본인들은 개발 도상의 자본주의 경제 이후의 문제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습

니다. 관두 미술관에서 가졌던 아티스트 토크에서 아이다 마코토도 핵 재난이 지진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고 말했죠. 지진은 회복될 가능성이 있지만 핵 재난은 예측할 수가 없는 문제이니까요.

방사선들은 결코 없어지지 않거니와 방사선에 한번 생태계가 노출되는 것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결과를 불러옵니다. 아무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죠.

3.11 일본 지진 이후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반핵 운동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반핵에 관련하

고 있는 AAA의 참여 작가들은 지식인으로서의 직관으로 시민 사회와 연대하고 있습니다. 아시아

전역으로 이 신념이 퍼져나가길 희망합니다. 앞으로도 아시아의 현대미술은 또 다른 쟁점들을 향

해 나아가겠죠. 모든 종류의 복잡한 쟁점들이 있겠지만, 특히 에너지와 경제, 사람들의 생활과 관

련된 문제라면 AAA는 절대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4. “공생”이라는 기치가 읽히는데요, “AAA”의 비전과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능성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 제가 생각하는 AAA의 제안은 공생입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하든, 무엇을 말하든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요?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죠. 타인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이유도 없고요. 우린

모두 좀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는 그 하나의 욕구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가끔은 이와 같은 욕

구 때문에 거대한 분열이 생기죠. 사람들이 공통된 상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지

금에 만족하고 다가오는 변화에 눈을 감아버리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공통된 목표를 가졌지만

서로를 해하기도 합니다.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와 논쟁하는 것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

리는 게 더 어려운 거죠.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 인간의 품위를 지키는 방법을 숙고해야 됩니다.

협업과 커뮤니티

105

이런 노력이 “시스템”과 “정치”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에 응답할 것입니다.

어릴 적에는 예술과 사회는 서로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나이가 들면서 서로 떼어낼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게 됐죠. 우리는 정부와 연계된 기업들이 자연을 이용해서 영리를 만들어내

고 사회를 계급화 시키는 것을 알잖아요. AAA의 주요 목적은 예술가들의 자유의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우리의 사회를 위해서 여러분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5. 한편 AAA는 최근의 이슈 중 “Sunflower” 운동을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데요, 이 운동에 주목

하는 이유와 “Sunflower”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실수 있을까요?

: “Sunflower” 운동은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대규모의 사회 운동입니다. 예술가들, 예술단체

들, NGO 커뮤니티가 여기에 참여했고, 정부의 부조리에 평화적이고 이성적인 자세로 맞섰습니

다.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 ”블랙 박스에 대항하여”라는 슬로건이 중국과의 양안 서비스 무역협

정(CSSTA)에 맞서는 주요 기치였습니다.

정부는 경찰을 동원했지만 예술가들과 학생들의 무기는 오직 사람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음

악과 시 등의 예술적 창작물들뿐이었습니다. 주류 방송 매체는 통제되었고, 우리는 소셜네트워

크를 통해 우리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우리 자신들을 미디어로 만든 것이죠. 지금까지 대만인들

은 인터넷 커뮤니티를 현실세계의 확장 혹은 각각의 개인성을 표현하는 대안적 매체로써 사용해

왔습니다. “Sunflower” 이후로는 “저항을 위한 사회적 에너지” 혹은 “사회적 저항을 가능하게 하

는”방법으로 소셜네트워크를 다시 생각해봐야 될 것 같네요. 50만 이상의 사람들이 3월 30일 점

거 퍼레이드에 모였습니다. 현실의 구조에서는 우리를 단순히 “좌파 미디어”로 치부할 수도 있지

만, 저는 이러한 에너지가 우리 미래의 변화를 향해 실제적인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물론 해바라기 운동 뒤에는, 중국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가 있습니다. 1997년부터 지

금까지의 홍콩이 바로 그 예입니다. 중국 정부는 홍콩에 그랬던 것처럼 대만을 향해서도 “정치보

다는 경제”라는 정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결국 선거에서도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제

한되고 있습니다.

제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해바라기 운동에 동참하기 위해 저에게 수업 중단을 요청한 적이 있

었는데, 그때 그들 세대에 흐르는 정의감과 저항성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아직 이 섬의 일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도, 대만의 젊은 세대들에게서는 분명 희망이 보입니다.

6. 마지막으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106

: 대만도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들이 많아서 훈수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제안을 해봅니다.

“ 자신의 선택을 믿고 그 미래를 위해서 절대 물러서지 말 것. 물러서면 끝이에요. 파이팅!”

참조:

*페니키아 Phoenicia_ 오늘날의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로 지중해 동안을 일컫는 고대 지명.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한 도시연맹의 형태를 취했으며, 거주민은 주로 해상무역에 종사했다.

* “88000KRW” (22000 TWD) generation_ 한국의 88만 원 세대와 같이 대만의 젊은 세대는 22000 타이완 달라 세대로 불린

다.

협업과 커뮤니티

107

이지민

객관적 시선으로 관계를 사유하다 작가 김소철 인터뷰

종로구 동숭동에 위치한 아르코 미술관 한 가운데에는 길목을 막고 서 있는 담벼락이 있었다.

그리고 2012년, 조경, 미술, 건축, 기획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모인 5명의 사람들은 이 담벼락을

허물어 통행이 가능하게 한 후 이를 둘러싼 주된 이해관계자와 지역 주민, 상인 등의 참여를 이끌

어내어 담벼락의 존폐 여부를 합리적으로 제시하고자 했다. 현재 담벼락은 허물어진 채로 흔적만

남겨져 있다. [2012년 아르코 퍼블릭아트 오픈콜] 당선자인 오프닝프로젝트팀의 <오프닝 프로젝

트>에 관한 이야기다. 본 프로젝트는 팀원인 김소철 작가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알게 되었다.

김소철은 ‘관계’에 주목하고 그것에서 다채로운 이야기와 가능성을 이끌어 내고자 하는 작가

다. 그는 설치, 기록, 영상, 퍼포먼스 등의 매체로 다양한 대상의 관계를 탐구해 왔다. 작년, 김소

철 작가는 새롭게 재정된 경범죄처벌법의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는 법규 내용에 대한 의

문과 비판에서 발족된 <즐겁지만 차분하게>(2013)라는 퍼포먼스 및 영상 작업을 발표했다. 속옷

만 입은 채 오토바이를 타고 정해진 코스를 주행하는 한 배우의 시위 연극을 촬영한 것인데, 관객

석 사이에 배치된 노트북으로 보여지는 영상으로 이를 지켜보는 관객은 그들의 대리자 역할을 수

행하는 배우와의 관계를 새삼 느낀다. <길티하츠클럽>(2012)은 참여자들로 하여금 익명으로 법

을 어긴 행위에 대해 고백하도록 하고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의 여부를 이야기하는 모임으로, 개개

인의 죄책감의 근원을 파악하고 단계적인 토론을 거침으로써 가치판단의 기준을 재정립하고자

하는 프로젝트이다. <맥아더 동상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2011)는 공공 장소에서 유도되는 특정

기억과 이데올로기를 재활성화 하는 기념비를 탐구하기 위해 인천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 주변

의 관광객을 드로잉으로 객관화했다. 정치논란과 관계없이 각자의 유희로 동상 앞에 서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의 모습은 정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국민의 관계를 어렴풋이 드러낸다. 앞서 언급

108

한 <오프닝 프로젝트>는 예술가와 예술기관, 건축가 생활, 예술과 일상 사이의 관계 속에서 발생

하는 문제점을 짚어냈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의 학부시절부터 다양한 작업과 전시를 지내온 그의

활동과 관심사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들어 보았다.

이지민 : 작업이 ‘관계’를 사유하는 것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작업에서 탐구되는 대상 자

체를 한 가지로 규정하는 것이 아닌, 대상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고자 하는 성향이 읽힌다.

김소철 : 관계에 대한 탐구는 내가 작업과정을 통해 대상이 되는 것들을 이해하고 동시에 나의

위치나 입장을 잡아가기 위해 중요하게 생각하던 것이다. 사람이 성장하면서 점차 활동하는 범주

가 넓어지고 관계하는 대상이 변해가는 것처럼, 내가 사유하는 관계의 대상도 개인적인 관계에서

점차 사회적인 것으로 옮겨 왔다.

이지민 : [동방의 요괴들 2013] 도록 인터뷰에서 민정기 작가를 통해 특정 시대의 지식인 미

술가가 활동하는 방향에 대해 알게 됐다고 밝혔다. 민중미술의 영향을 받은 작업이 있는지.

김소철 : 민중미술 작가들은 지배계급에는 반하지만, 말 그대로 민중의 삶과 이득에 관심을 가

져왔다. 공중이나 공공선 등의 목표에 민중미술의 방향성이 부분적으로 맞닿아 있다. 다만 억압

적이었고 선동적 정치(프로파간다)가 전면에 내세워져 있던 시대라 민중미술 대부분이 같이 선동

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냈다. 지금 당시의 미술을 뭉뚱그려 보면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다는

감상은 이런 데서 발생하는 것 같다. 긍정적, 부정적인 평가를 떠나서 태생과 역할이 납득할만 하

다고 생각한다. 다만 민정기 작가의 경우 소재에 대한 고민 못지않게 형식에 대한 고민으로 풀어

낸 점에서 매력을 느꼈다. 미술에서의 설득력은 그 형식에 있다고 여긴다.

최근작인 <오프닝 프로젝트>나 <즐겁지만 차분하게>가 영향을 받은 사회적 작업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당시의 미술과 형식적으로 유사한 점은 별로 없다.

이지민 : <오프닝 프로젝트>는 공공적인 장치의 진정성과 기능을 분석하기 위해 문제를 향한

영구적인 개입을 지양하고, 담벼락을 가깝게 둘러싸고 있는 시민들과의 소통을 방법으로 한 ‘민

주적’인 과정을 지난다는 점에서 흥미롭게 보았다. 미술관측과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했는데,

진행에 어려움은 없었는가?

김소철 : <오프닝 프로젝트>는 故 이종호 건축가가 마로니에공원을 열린 공원으로 재정비해

비운 것에 호응해 이를 아르코미술관 너머로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김수근 건축가의 미술

관 원설계도 그와 부합해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 아이디어가 현시대의 변화에 걸맞

아 이루는 것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르코미술관이 관리하는 영역과 담

벼락의 철거에 대한 사안은 한편으로 기관의 권력에 개입하는 것이었고, 미술관 측에서도 원했

던 것이 있어서 자주 요청사항이 있었다. 이에 협조하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

다. 그래서 주된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을 모으고 그들이 의사결정에 참여하길 바랐다. 공중과 함

협업과 커뮤니티

109

께 이해관계자를 중심으로 토론과 협의 등 민주

적인 절차를 통해 이곳을 정하고자 한다는 최종

안을 전달했으나, 미술관 측에서는 그 방식으로

결정할 수 없으며 관리가 우선한다는 입장을 밝

혔다. 그 동안의 프로젝트 과정과 입장이 무시

되는 것이어서 상당히 실망스러웠다. 현재 이도

저도 아닌 기괴한 형태로 남아있는데, 미술관에

서 언제 어떤 결정을 내릴지 두고 볼 일이다.

이지민 : 예전 작업에 대해 듣고 싶다. 한 가

지 대상을 일차원적으로 바라보기보다는 한 걸

음 물러나 거시적 관점에서 다른 대상과의 관계

를 탐구하고자 하는 성향을 읽었다.

안무자와 촬영자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한

영상인 <N.EW.S. part2>를 보면서 프레임에

담기는 풍경만을 좇아야 하는 촬영자의 시선,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발걸음과 움직임이 갖는 의

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두 가지의 대상은

함께 다루어져야만 한다는 특징이 있을 것이다.

특히 <나는야 잭슨 폴록>에서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이 일상적 행위와 빗대어지기 이전까지

관계되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연구와 사유가 어

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빨래하기라는 일

상적 활동과 비교한 이유가 있다면.

김소철 : <N.EW.S. part2>에서 카메라와 피

사체의 관계에 대한 태도는 나중의 영상작업에

서도 반복된다. 예를 들어 <즐겁지만 차분하게

>에서는 거리에서 대리시위를 수행하는 배우를

좇는 카메라가 배우의 모습을 소극장의 관객에

게 실시간으로 송출해주는 식으로요. 역할에 따

라 관계망을 만드는 방식으로 작업이 진행됐다.

<나는야 잭슨 폴록>은 보다 일상에 맞닿아

있다. 빨래하기나 청소하기 등은 허드렛일로 분

110

류되지만,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다. 특히 빨래는 유학시절 공동 세탁기를 사용하면

서 더욱 의식하는 의례가 되었다. 세탁기를 사용하기 위해 쿼터를 모아두거나 언제 세탁기를 사

용하러 가면 다른 사람에 의해 이용되진 않을지 등을 생활하며 주기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또 기

다리고 있는 시간에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나 상황이 명상적이기까지 했다. 저에게 일상에 대한

인식은 감각할 수 있는 것이다. 잭슨 폴록의 미술이 거대한 스케일과 환경을 강조하고 페인팅에

서의 액션의 숙달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 남성적이긴 하지만, 앨런 케프로 등에게 일

상의 미술화의 가능성을 이끈 것처럼 나에겐 세제를 흩뿌리는 행위가 그에 빗대어진 것이고, 이

런 감각적인 일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지민 : <물건을 소유하는 것에 대해>에서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탐구하고자 소유한 물건들

로부터 유발되는 기억에 주목했다. 사진으로 기록하고, 이름을 기입하는데 물건의 이름을 영어로

기록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김소철 : 유학시절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많은 유학생이 그렇듯이 저 역시

도 유학생활이 끝나갈 무렵, 그 곳에서의 행복한 고민의 시간을 이어갈 것인가 생각을 해봤다. 하

지만 나는 그곳에서 외부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곳에서 여러 가지 기억이 있지만, 학교 외

에 소속될만한 무언가가 없었다. (일례로 유학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선거운동을 위해 방문하고

당선되었는데, 당선 결과에 기뻐 노래를 부르고 행진하는 그곳 학생들을 보고 정치에 즐거워할

수 있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곳에서 오래 있는 것이 정체성의 뿌리를 내려줄 것이란 기

대를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귀국을 결심했다. 첫 개인전의 작업에서도 정체성에 대한 같은 생각이

공산품을 소비하는 것 속에서 찾고 싶었다.

귀국한 뒤에는 대안공간에서 주로 활동했

는데, 이는 이전의 추상적으로 사고하던 것들이

실제로 일어나던 공간이기 때문이었다. 귀국 후

한동안 유년기의 기억이나 개인의 정체성이 작

업의 동기가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개인의 이

야기가 빠지게 되고 사회적인 것에 더 쏠리게

되었다.

이지민 : 요즘은 어떤 작업을 구상하고 있는

지 듣고 싶다. 예술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해나

가고 싶은지도 궁금하다.

김소철 : 얼마 전에 <아주 잠깐 레지던시> 결

과보고전 때 출품한 작품이 있다. 홍대 앞의 사

진 이미지와 약간의 텍스트로 아홉 페이지짜리

협업과 커뮤니티

111

책을 만들었는데 그 내용은 홍대 앞에서의 발언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홍대 앞이 매력적이었고

매력적인 이유는 이 곳이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 편집자 등의 창작자들의 작업공간이었던 것

에서 시작된다. 정체성 표현을 비롯한 이런 창작활동을 저는 정치영역의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공간이 관광객을 위해 서울시와 마포구의 주도로 정비가 되며 임대료가 비싸지고 상업적이

게 되면서 현재 홍대 앞이 어디에 있느냐는 문제 제기에서 시작됐다.

사회에서 드러나 있지 않은 것을 감각할 수 있게 만들고 싶다. 최근 사회 활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관객이 각 사안에 대해 경험하고 감각할 수 있도록 하고자 한다.

경제와 커뮤니티

어떻게 건물주는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을까? / 이나연

[서평] 무형경제 Intangible Economies / 윤형민

두리반으로, 총파업으로, 미생으로 모인 예술가들 / 김수영

예술가들이 실천하는 같이의 가치 / 이슬비

개인들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 / 김하나

홍콩 지역 미술현장의 자생적 움직임 / 이성희

기본소득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 황규관

114

이나연

어떻게 건물주는 예술가와

사랑에 빠졌을까?

“태초에 가난이 계셨다. 이 가난이 힙스터와 함께 계셨으니 힙스터는 곧 유행이니라. 힙스터

가라사대 카페가 있으라, 바가 있으라, 벽화를 그리라, 자전거를 타라, 빈티지를 입으라, 메이슨

병에 마시라, 문신을 하라, 이국적인 음식을 먹으라. 그대로 되니 보기 좋았더라.” -힙스터 제네

시스

생산을 멈춘 공장, 혹은 공동화된 주택이 모여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네가 표적이다. 이

런 기운이 퍼지기 시작하면 노숙자들이 먼저 하룻밤 이상 몸을 누일 곳을 찾아 들어선다. 다음 순

서 역시 사회 구조에서 가장 아랫부분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일자리를 찾아 갓 상경한 어수룩한

시골청년이거나, 무허가주택에서 쫓겨나 또 다른 무허가주택을 찾는 이들일 수 있다. 집도 없고

돈도 없으며, 당연히 뒷배도 없고 보장된 직업도 없는 이들이다. 무법지대에서 그들만의 법을 만

들어가며 제법 공동체의 모양새가 갖춰진다. 어느 날, 최소한의 돈으로만 삶을 살기로 선택한, 그

러므로 미래의 가난이 보장된 이들이 이 지대에 발을 들여놓는다. 바로 젊은 예술가들이다. 동네

의 어른들은 혀를 차기 시작한다. 예술가연하는 치들이 그렇잖아도 심난한 동네분위기를 하 수상

하게 만들고 있다고 수군댄다. 예술가입네하고 돌아다니는 청년들은 한량 같은 생김과 다르게 부

지런하다. 하루는 으슥한 창고를 커피숍으로 만들어놓더니, 다음날엔 공장을 펍으로 바꿔놓는다.

비슷비슷하게 괴기한 외양을 한 친구들이 모여 그 공간들에서 죽치고 놀더니, 어느 날엔 또 버려

진 창고에서 전시라는 걸 한다. 그런데 그 전시엔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좋은 차를 타고 와서 구

경하는 진풍경이 펼쳐진다. 다음 날 봤더니, 유명한 신문에 이 전시가 소개되고, 무려 텔레비전

전파도 탄다. 엇비슷한 커피숍과 레스토랑이 점점 더 늘어나고, 낡고 괴상한 옷을 파는 가게도 많

아진다. 결국 이 콩과 팥처럼 비슷하고도 다른 젊은이 인구가 점점 늘어가다가 동네의 대부분을

경제와 커뮤니티

115

점령한다. 별난 이들이 만든 문화라는 걸 본답시고 관광객들이 찾아든다. 가난한 동네라 예산 운

운하며 청소라곤 도통 안 되던 곳인데, 갑자기 시인지 주인지 알 수없는 곳 주관으로 깨끗하게 도

로청소도 해준다. 우둔한 이들마저 그 이상함을 감지할 즈음이 되면, 역시 이상하리만치 집값이

치솟는다. 동네 분위기가 낯설어진 가난한 이들이 다른 곳을 찾아 떠나고, 집세를 감당 못하는 예

술가들도 떠난다. 거주민들을 내쫓는 데 성공한 허름한 건물은 허물어지고, 그 자리엔 멀끔하고

비싼 콘도가 지어진다. 장사 잘되는 카페와 바의 주인이 건물주인이라는 이름의 대머리 아저씨로

바뀐다. 콘도에 사는 이들은 증권맨이나 전문직에 종사하는 부자 젊은이들로 대체된다. 이전 거

주민과 세대는 같더라도 수입은 전혀 다른 이들이다. 예술가 동네라며 유명세를 얻은 이 구역에

이제 예술가는 없다. 예술도 없다. 돈만 남는다.

이 같은 일련의 과정을 두고 전문가들은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도시 재활성화)이

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이 순차적인 도시 재개발 진행과정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사람은 누굴

까? 적어도 싼값에 놀이터와 재미있는 커뮤니티를 가질 수 있던 예술가들은 아니다. 번잡한 동네

에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어진 노숙자나 무허가 주민들도 아니다. 비싼 렌트비를 내면서라도 힙

한 동네에 살아보려는 스트레스에 찌든 증권맨도 아니다. 위험한 구역의 범죄율 때문에 골머리를

앓던 지역 국회의원도 아니다. 바로 그 지역의 땅주인, 집주인이다. 쿨한 예술가는 별 다른 대가

없이 생산성과 창의성은 어찌나 높은 존재들인지. 여기저기서 재미있는 물건들을 잘도 가져다 꾸

며 놓고, 쓰러져가는 외벽에 예쁜 그림도 그려놓는다. 이즈음 부동산업자들의 마음에 기쁨이 깃

들기 시작한다. 우중충한 공장지대가 예술지구로 격상돼 인구에 회자되기 시작하면 건물주인들

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쿵쾅거리게 된다. 비단 직업이 예술가가 아닐지라도, 힙스터(hipster)라 불

리는 신비로운 생명체가 온몸으로 뿜어내는 ‘힙함’은 ‘가난의 때’를 ‘값비싼 빈티지’로 변모시킨

다. 언제나 음악, 문학, 요리, 디자인, 패션, 미술 등 문화적인 것이라면 무엇에건 열정적인 관심

을 보이면서도, 동시에 반문화를 추구하는 모순적 존재. 이 ‘아티스트-워너-비’인 힙스터 중에서

다시 예술가가 탄생하는 법이다. 실제 힙스터와 예술가의 라이프스타일은 대동소이하므로 이 글

에선 힙스터와 젊은 예술가를 큰 구분 없이 사용하고 있다.

어떻게 건물주들의 사랑스러운 뮤즈로서 예술가의 역할이 입증되기 시작했을까? 부동산 거

래가가 지구상 최고이자, 인구의 30%가 예술가라는 설이 있는 뉴욕의 경우를 예로 드는 게 좋겠

다. 지난 역사를 통해 아트씬의 움직임과 연계한 부동산의 고저를 가장 선명히 드러내 준 지역이

기도 한 까닭이다. 역사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범죄와 마약으로 들끓던 맨하튼의 다운타운 지역,

즉 소호와 이스트빌리지 지역을 아우르는 차이나타운과 인접한 동네에 예술가들이 터를 잡으면

서 시작된다. 피난과 전쟁 피해로 주인이 없어진 건물에 스쾃(squatting, 무단거주)을 하면서, 가

난하지만 넓은 작업실이 필요한 작가들이 모였다. 소호 일대가 쇼핑단지로 변모하면서 스쾃이 불

가능했던 다음 세대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대안으로 떠오른 곳은 미트패킹지역이자 창고와 자동

116

차 정비소 등이 있던 첼시. 또 다시 시간은 흘러 고급진 갤러리 지역으로 완전히 자리 잡은 첼시

를 피해 터를 잡아야하는 그 다음 세대 예술가들은 다리 건너 브루클린에 시선을 돌렸다. 이제 예

술인 구역은 덤보->윌리암스버그->부쉬윅->그린포인트로 이어지며 사실상 브루클린 전 지역으

로 확장된다. 브루클린의 남쪽에 위치한 선셋 파크에는 ‘산업도시(Industry City)’라 불리는 창

고가 있었다. 창고 주인은 전략적으로 지난 몇 년 전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간을 예술가에게 임대

했다. 그리고 최근엔 임대료를 급격하게 올리면서, 이를 감당 못하는 예술가들을 내쫓고 있다고

한다. 이 창고의 입주민 중 25%가 작가였단다. 따라서, 이젠 브루클린 아랫동네에서도 쫓겨나게

된 아티스트 군집들의 이동은 기차타고 가야하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허드슨 밸리와 퀸즈의 리지

우드까지 확장된다. 그래도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근거지로 삼았던 우범 지대를 문화지역으로 바

꾼 레드 훅과 캐롤 가든 지역의 경우도 있다. 다나 슈츠(Dana Schutz), 줄리앙 슈나벨(Juian Sc-

hunabel), 리사 유스카비지(Lisa Yuskavage), 앨리슨 쇼츠(Alyson Shotz) 등 유명 작가들의 작

업실이 많은 지역이다. 공장들을 고급맨션으로 바꾸려던 건물주인들 대신 예술가의 편을 들어준

지역 정부의 선택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힙스터의 성지인 윌리암스버그의 강변 끝자락에 위치

해 곧 철거될 예정이던 도미노 사탕공장에서 가졌던 카라 워커(Kara Walker)의 <설탕조각> 전시

는 힙스터 문화의 정점을 찍었다. 유명작가의 공장전시에 한 시간 이상 줄을 서고 관람을 원하던

뉴요커들과 관광객들의 열정과 갈망. 이것이야말로 근처 부동산을 올리는 최대동력이다.

부동산과 예술가 관계의 역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오래다. 예술을 사랑하는 척하는 부동산업

경제와 커뮤니티

117

자와 그들을 주시하는 예술가의 이야기는 1971년 한스 하케(Hans Haacke)의 <샤폴스키 외. 맨

하탄 부동산 보유 상황, 1971년 5월 1일 실시간 사회 구조(Shapolsky et al. Manhattan Real

Estate Holdings, A Real Time Social System, as of May 1, 1971)>란 작품으로 설명해 볼 만

하다. 하케는 샤폴스키 그룹의 부동산 투기를 취재해, 지도, 사진, 차트 등으로 가시화 했다. 이

작품이 뉴욕의 할렘을 중심으로 저렴한 부동산을 독점한 뒤에 임대료를 올리는 식의 투기를 밝혀

냈기에, 구겐하임에서 열릴 예정이던 작가의 개인전에 선보일 수 없게 됐다. 샤폴스키 그룹이 다

시 미술관의 큰 후원자였기에 당시의 관장이 사전에 전시를 막았기 때문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후원자들은 과연 그들 자신이 주인공이 된 예술작품에 관대하지 않았을까? 그 점 궁금하다. 한 미

술관의 관장이라는 이가 예술과 예술작품의 편에 서지 않고 후원자의 편에 선 탓에, 정작 샤폴스

키 측의 입장을 듣지도 못한 이야기.

근래엔 힙스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인물도 등장한다. 인종문제를 다루는 영화를 주로 제

작하는 스파이크 리(Spike Lee)는 2014년 초, <뉴욕매거진>을 통해 육성으로 백인들이 아프리

칸-아메리칸 문화를 파괴하고 있다고 따졌다. “왜 사우스 브롱스, 할렘, 베드 스터이, 크라운 헤

이츠에 백인 뉴요커가 유입되면서 시설들이 더 좋아지는 걸 받아들여야 하는 건가? 내가 워싱턴

파크 165번가에 살 때만 해도 젠장할 쓰레기가 매일 치워지진 않았다. 공립학교도 좋지 않았다.

경찰도 주변에 없었다. 125번가에서 새벽 3시에 백인 엄마가 유모차를 밀면서 지나가는 걸 본다

는 것을 당신에게 뭔가를 말해줄 것이다...빌어먹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신드롬이 도래했다. 이

118

건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 있었으니까! 단순히 와서 자기 것으로 만들 순 없단 말이

다.” 가난하고 다소 위험했더라도, 특색 있던 지역 문화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힙스터가 고유

문화를 망친다고 말한다. 존 맥호터(John McWhorter)처럼 ‘힙스터’란 흑인들이 백인들을 격하

시키는 말로 쓰던 ‘홍키(honkey)’라는 단어의 다른 말이라고도 지적하는 이들도 있다. 백인들이

‘니그로’라는 인종차별 발언대신 ‘떠그(thug, 건달)’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과 상응하는 단어라는

것이다.

그 명암도 존재하지만, 힙스터와 젠트리피케이션의 상관관계는 명확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본인들이 집값을 올려주는 귀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도 남은 세입자들은 왜 아직도 그 권리를 요

구하지 않는가가 의문이다. 본인들이 살던 집과 가게를 주인에게 권리금을 받으며 넘겨도 모자랄

상황임이 밝혀졌는데도, 왜 무력하게 쫓겨나는 신세를 감내하는가? 힙스터들은 보기보다는 셈에

어둡지 않다. 이 신인류의 특징으로 ‘정치적으로는 자유롭고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라는 연구결

과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본인들의 경제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혹독한 개인주의에 훈련된 이들은 단결의 힘을 모른다. 하여 그들의 미약한 힘을 모으면 집주인

보다 큰 힘을 갖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려한다. 단결, 투쟁, 동맹 따위 그다지 쿨하지 않

다. 2012년 ‘반짝’하는 희망의 빛을 보여줬던 ‘월가점거’가 결국은 공권력과 1%의 힘에 눌려, 이

슈만 남기고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 까닭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젠 보다 못한 정부가 나섰다. 집값

이 괴물인데다, 10세대 중 7세대가 월세로 생활

하는 뉴욕주는 집주인에게 이용되지 않는 방법

을 알려주는 사이트를 운영한다. ‘임대 가이드라

인 위원회(http://www.nycrgb.org)’는 세입자

의 권리를 알려주는 법조항 등을 수시로 업데이

트 한다. 어떻게 집을 구하는 게 현명한지에 대

한 지침은 물론, 질의문답 게시판까지 있다. 세

입자의 신고가 많은 집은 공개해 버리고, 세입자

들의 법적대응까지 도와준다. ‘악덕집주인닷컴

(http://shadylandlords.com/)’이라는 사이트

도 나왔다. 진상 집주인을 고발하는 장소다. ‘빈

대 등기소(http://bedbugregistry.com/)’라는

사이트도 있다. 미국 전체에 빈대가 나왔던 건물

을 기록한다. 밀도에 따라 빨간 마크가 짙어지는

경제와 커뮤니티

119

데, 당연히 뉴욕지역이 눈에 띄게 ‘빨갛다’.

글을 쓰다 보니,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을 때가 기억난다. 맨하탄에서 5년 넘게

살았던 건물의 주인이 갑자기 $200 (20만원 가량)이나 월세를 올려버린 탓에, 말 그대로 쫓겨나

듯 브루클린으로 이사했다. 참고삼아 적자면, 맨하탄의 방 하나짜리 아파트의 평균적인 월세 시

세는 최저가격대를 기준으로 $1,800에서 $2,500 (180만원-250만원) 사이다. 다시 한 번 밝히

지만, 방은 하나거나 스튜디오고, ‘최저’로 분류되는 가격대를 기준으로 삼았을 경우다. 이런 집

들은 대체로 2차 세계대전 전에 지어졌고, 엘리베이터가 없으며, 뉴욕의 상징과 같은 쥐과 바퀴

벌레도 섭섭지 않게 출몰한다. 어찌됐든 거친 맨하탄 시절을 지난 새로 이사 온 동네는 브루클린

의 최남단에 위치한 베이 릿지라는 곳이다. 조용하고 깨끗한 동네다. 뭣보다, 맨하탄에서 내던 월

세와 비슷한 돈으로 세배는 넓은 공간에 몸을 둘 수 있게 됐다. 게다가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화

가인 생활동반자 덕에, 건물관리인이 엘리베이터 앞에서 만난 이웃들에게 우릴 소개하며 “우리

건물에 아티스트가 들어왔다. 이제 우리 건물도 팬시해졌다!”고 말한 기억도 있다. 건물주인은 친

히 작업실을 방문해 그림을 감상하며 르네상스와 클래시즘을 거론하며 진지한 비평을 해주기도

했다. 미안하게도 집값을 올리는 데 일조를 해줄 만큼 영향력을 발휘하진 못했지만, 실제로 이 동

네의 집값도 매해 오르고 있다. 하긴 뉴욕에서 7년간을 머무르며 집세가 오르지 않았던 때는 월

가가 무너지면서 미국 경기가 바닥을 친 2008년 한 해 뿐이긴 했다. 과연 집값안정화라는 환상이

현실이 되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아, 힙스터든 아니든, 쫄바지가 어울리든 말든, 오늘도 일해

서 번 돈의 대부분을 다음 달 월세로 가져다 바치는 전 세계에 편재하는 세입자들이여, 단결...해

볼까?

추백: 아나키스트였던 작가 콜린 워드(Colin Ward)의 유명한 말이 있다. “지구적으로 봤을

때 상품들은 가능한 모든 자연권 원칙들을 위배하는 것이므로, 궁극적으로 그들(토지 소유자들)

은 모두 훔친 땅의 수혜자들이다.”

120

윤형민

[서평]무형경제 Intangible Economies

“돈은 믿음이 관건이다. 만약 아무도 믿음을

부여하지 않으면 돈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돈은 우리의 믿음을 투자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돈이 그 믿음을 되갚지는 않는다. 돈과

의 관계는 일방적이다. 우리는 돈을 찾아 나서

지만 돈이 우리를 찾아오지 않는다. 돈을 쥘수

는 있지만 돈이 우리를 안아주지는 않는다. 경

제가 믿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바로 그 이유

로, 배신도 많은 것이다.”

얀 베르볼트의 <무형 경제> 중<신념 돈 사

랑>

2012년 출판된 <무형경제>는 캐나다 밴쿠

버를 기반으로 발행되는 정기 미술 비평지 필립

과 대안공간 아트스피크가 공동 주관하고 시각

미술가이자 필립의 에디터로도 활동하는 안토

니아 허쉬가 기획한 글 모음집이다. 무형경제는

현재 경제학에서도 상용되는 개념으로, 이전에

는 문자 그대로 실제 형태가 없기 때문에 숫자로 환산하기 어려워 주목받지 못했으나 경제에 중

요한 영향을 미치는 종목들을 일컫는다. 이를 테면, 저작권이 과거에는 돈으로 직접 환산되지 못

경제와 커뮤니티

121

했으나 최근 상황이 완전히 바뀐 예이고, 좀 더

일반적으로 삶의 질 역시 경제학에서 논의 되는

개념이다.

허쉬는 <무형경제>를 열며 사회는 인간 관

계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현재 경제는

이를 반영하지 않고, 경제와 사회가 별도로 떨

어진 상태로 발전되어 온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

다. 이 책은 경제를 논할 때 흔히 이야기 되지 않은 욕망(소비자가 무엇을 원하므로 무엇을 만들

어 판다는 식의 단순한 숫자 개념이 아닌)을 비롯한 정서적인 영향력을 전체적인 주제로 삼고 있

다.

<무형경제>에 기고한 미술가 중 구동독 베를린 출신의 작가 올라프 니콜라이는 허쉬와의 대

화에서 서구와는 다른 이념하에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두 체제 간 정서, 인간관계, 개념의 물질

화가 어떻게 다른지를 그의 (독일 통일 이후의) 개념미술 작업과 연관지어 이야기한다. 구동독 시

절 물질의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물물 경제에서는 정서와 인간 관계가 경제에 직접적인 변수라는

것, 반면 개념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에 물화되지 않은 아이디어가 물건과 맞바꾸어지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웠다는 점- 따라서 저작권이나 초기 개념미술과 같은 예술 형태는 받아들이기 힘

들었다는 것이다.

얀 베르볼트는 엣세이 <신념 돈 사랑>에서 경제(economy)라는 단어의 어원인 그리스어 오

이코노미아(oikonomia)를 통해 유럽 종교이념의 역사를 들춰낸다. 2-6세기초기 기독교 신학에

서 오이코노미아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인데, 오이코스는 가정을 관리한다는 뜻으로 일반적으

로 경영을 의미한다. 당시 삼위일체가 신이 하나라는 개념을 흩트리며 이단으로 여겨지자 이를

옹호하기 위해 도입한 것이 이 오이코노미아 개념이다. 즉, 하나의 신이 가정, 삶, 세계(성부, 성

자, 성령)를 모두 관리하는 점에서 삼중이며, 예수에게 인간 역사의 경제, 행정, 통치를 위임한다

는 것으로 신의 권력과 단일성을 상실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이 모두를 좌지우지했던

중세시대 교회는 활자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당시 유럽에서 가장 번성했던 은행과 손 잡고 대규

모 면죄부 판매를 시작한다. 이것은 인류의 마르지 않는 자원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대대적인 거

래의 시작이었고, 이제 사람들은 면죄부 대신 도박으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걸고 믿음의 경제

체계를 유지해나간다.

최근 많은 주목을 받은 교황의 한국 방문은 종교적 믿음과 자본주의가 교차한 유, 무형적 거

래의 단적인 예를 보여주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

라고 신자유주의를 분명히 비판했지만, 역설적으로 교황이 방문하는 나라마다 미디어에서는 그

의 방문이 가져오는 유형 (기념주화와 우표 판매 등), 무형적 (교황이 방문한 성지가 관광명소가

122

되는 등) 경제 효과가 얼마나 큰지 환산하며 그의 방문을 축하하는 듯 하다.

그 외 캐나다 선주민의 후손인 큐레이터 캔디스 홉킨스는 20세기 초 시에틀에서 열린 골든

포틀래치 행사를 주제로, 전통적인 포틀래치에서 이후 변형된 포틀래치 문화, 그리고 퍼레이드에

서 현대 퍼포먼스까지 그의 입장에서 짚어나간다. 원래 포틀래치는 북미 선주민들이 행하던 일종

의 선물교환 행사로 호스트의 사회적 지위와 관용을 과시하는 자리였다. 유럽 이주민들이 기독교

를 전파하고 선주민의 문화를 억압하기 위해 이를 탄압한 후 사라진 문화이나, 그 이름은 선물 경

제의 대명사로 남아 잘 알려져 있다. 기업의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것을 포틀래치 경제

라 하고, 1950년대 기 드보르를 주축으로 한 상황주의자들이 만든 회보 포틀래치는 이름에 충실

해 판매되지 않고 모두 선물로 증정돼기도 했다. 그러나 시에틀의 골든 포틀래치는 이러한 선물

과 관용의 의미가 아니라 당시 신 상업 엘리트 계층이 선주민의 역사와 이미지를 이용해 도시 특

유의 페스티발을 열고자, 포틀래치 앞에19세기 말 골드 러시의 골드를 앞에 붙여 만들어낸, 역설

적인 성격의 상업성 축제였다.

<무형경제>의 정서와 경제의 상호관계의 이론적 배경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서 시작된

다. 모든 증여가 경제적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한 모스의 증여론은 분명 무형의 선물 개념

을 과학적 경제 담론으로 이끈 공로가 있지만 동시에 순수 증여의 가능성을 전면 부정한다. 모스

의 이론에 대한 비판서인 자크 데리다의 <주어진 시간: 1. 위조화폐>는 대신 선물을 주면서 보상

을 기대하거나 채무의식을 느끼는 순간 선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데리다는 마담

맹트농의 편지에 있던 ‘시간을 준다’는 표현을 문제 삼는데, 시간이 결코 누구에게 주거나 소유할

수 없기때문에, 이것은 자신의 삶을 준다 혹은 바친다는 의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즉, 시간을

준다는 것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공통체로 번역되는 커뮤니티 (community)는 라틴어 코뮨에서 나왔고 이는 함께 또는 묶음

이라는 뜻의 cum과 선물을 뜻하는 munis 가 합쳐진 단어라 한다. 즉, 공통체란 선물을 주고 받

으며 나누는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의미다. 이러한 개념을 다룬 예술 프로젝트로 물론 앞서 언급

한 상황주의자나 이 후 리크리트 티라바니야의 음식을 매개로 한 작품으로 대표되는 관계미학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런 직접적인 형태의 것이 아니더라도 경제 개념의 확장에 일조할 수

있는 것은 일의 분류가 상대적으로 유동적인 미술인, 또는 문화 산업 분야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

어야 할 것이라는 점에서 <무형 경제>는 의미있는 시도와 결말을 이끌었다고 본다. 우리의 상황

에서 대체 창조경제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정부가 아니어야 하고, 또 그것이 무엇이 되든 문

화인으로서의 책임이 따르는 것일테다.

경제와 커뮤니티

123

김수영

두리반으로, 총파업으로,

미생으로 모인 예술가들

두리반, 점거로 시작된 네트워크

2000년대 말부터 2010년대 초, 도시와 강산의 풍경이 빠르게 바뀌었다. 이명박 정권의 핵심

사업인 4대강 살리기, 이명박-오세훈 서울시장의 뉴타운 개발 정책의 결과였다. 2009년 새해 벽

두부터 용산 재개발 참사가 벌어진데 이어, 홍대앞 두리반, 명동 마리, 제주 강정마을 등 여러 곳

에서 철거와 그에 반하는 투쟁이 이어졌다. 개발 중인 도시를 다루는 작가들의 작품과 전시도 여

럿 모습을 드러냈다. 몇몇 콜렉티브는 철거 현장에 점거, 침투, 연대와 같은 방식으로 뛰어들기도

했다. 2009년 7월에는 한강 르네상스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에 들어간 종로구 옥인아파트에 살던

한 작가가, 동료 작가들을 옥상에 초대해 바캉스를 열었다. 띁겨져 나간 철골을 비집고 들어가 작

품을 전시하거나 폐허를 마당삼아 놀이를 하면서 작가 그룹 옥인콜렉티브가 결성됐다. 리슨투더

시티는 내성천, 4대강, 두리반, 두물머리 등 수많은 투쟁 현장에 동분서주하며 도시공간에 대한

예술적 개입을 시도했다. 도시투어, 건축비평, 출판, 세미나, 컨테이너 전시 등 그 형식은 다양했

다.

파헤쳐진 주거지와 강산이 즐비했으나, 아마도 많은 예술가들은 그 중 ‘상징적인’ 장소로 두

리반을 꼽을 것이다. 2009년 12월 철거에 들어간 칼국수집 두리반 건물에서 시작된 점거농성은

젊은 예술가들의 연대에 힘입어 점거 500여 일 만에 승리로 마무리됐다. 모인 이들은 조직화된

활동가들보다는 시인, 뮤지션, 휴학생, 10대, 홍대 주변부를 배회하는 젊은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정기적으로 음악회, 전시회, 독립 다큐 영화제 등이 열렸고, 그 가운데에서 언더그라운드 뮤지션

들의 생활협동조합인 자립음악생산조합이 결성됐다. 이 조합의 운영위원 단편선은 “두리반에서

의 위계없는 관계와 서로가 서로에게 배우는 태도 속에서 네트워크 그룹이 만들어졌다. 누군가를

124

둘러싼 세계를 바꿔나갔다는 경험에서 희망을 느낀다.”[1]라며 두리반 청년들의 정치적 주체화에

의미를 부여했다. 두리반의 자생적 네트워크 그룹은 자립 음악, 대안문화운동, 생태주의 등 다양

한 지향성을 가지고 마리로, 강정으로 가 투쟁현장에 결합했다. 그리고 2012년 메이데이 총파업

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

이 시기 자립음악생산조합을 중심으로 한 음악가들의 왕성한 활동은 이태원 꽃땅, 문래동 로

라이즈, 한예종 대공분실 등의 공연장을 통해서도 이어지며 2010년대 초반 하나의 씬을 만들었

다. ‘자립 음악가’와 젊은 미술인들은 여러 형태로 교류했다. 옥인콜렉티브가 라디오스테이션을

통해 자립음악생산조합의 한받, 박다함과 토크를 진행하거나(<파동, the forces behind>, 두산

갤러리, 1. 12-29, 2011), <북조선 펑크로커 리성웅>(아트선재 오픈콜, 3. 17-4. 18, 2012)에서

는 한받 외 자립음악생산조합 음악가들의 공연과 미술가 이수성, 이병재의 설치가 협업을 이뤘

다.

최고은 씨의 사망과 예술가의 생존권

한편에 개발과 도시공간을 둘러싼 이슈가 있었다면, 다른 한편에는 경제 양극화로 야기된 생

존권 문제가 존재했다. 전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적 안전망이 사라진 신자유주의, 승자독식이 가

속화되는 삭막한 상황에서 ‘88만원 세대’ 이후의 청년세대 담론이 고개를 들던 차였다. 2011년

1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가 생활고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한 청년 필자는 “최고은 씨

의 사망 소식을 듣고 우리는 ‘연민’이 아닌 ‘두려움’을 느꼈다”[2]라고 진술한다. 그의 죽음에서 자

신들의 미래를 봤다는 말이다. 화려한 문화산업의 이면에서 문화 생산자에게 가해지는 착취, 변

화된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미학화된 노동’의 문제 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최고은 씨의 사망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예술인들의 열악한 삶의 환경에 대한 이슈가 사

회적으로 크게 부상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해 11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고 예술인 복지법이 제정됐다. 예술인 복지법은 예술인 산재보험과 생활이 어려운 예술인

에게 창작준비금을 지급하는 긴급지원을 골자로 했으며, 2013년 1월부터 창작준비금 월 100만

원이 예술인 900명에게 3개월간 지급됐다. 그러나 출연 실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예술인에서 제

외된다는 점 등 실정을 고려하지 못한 문제점들이 노출되었으며, 여러 예술인들에 의해 개선책이

요구되고 있다.

예술인들 사이의 자발적인 움직임도 일어났다. 2011년 11월, 최고은 씨와 뮤지션 달빛 역전

만루 홈런의 사망 1주기를 기해, 예술인 소셜 유니온을 위한 초동모임 ‘밥먹고 예술합시다’가 열

렸고, 2012년 준비위원회가 출범된 상태다. 여러 장르의 예술인을 아우르는 노동조합 개념의 예

술인 소셜 유니온은 “다수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처우와 보상이 상식 이하 수준”이라고 지적하며,

“예술인 권리 실현과 예술 환경의 본질적이고 진보적인 개선”을 목표로 한다고 밝혔다.[3]

경제와 커뮤니티

125

총파업, 예술가는 어떻게 파업하는가

2012년 5월 1일, 기존의 노동절 집회와는 사뭇 다른 비주얼의 총파업 대오가 모습을 드러냈

다. ‘도시를 멈추고 거리로 나가자’는 구호를 내세운 이 집회는 2011년 뉴욕 월가에서 시작된 오

큐파이 월스트리트가 선언한 메이데이 총파업(General Strike)으로, “2012년 5월 1일을 99%를

위하지 않는 시스템에 대항해 일하지 않는 날, 집안일 하지 않는 날, 학교에 가지 않는 날, 소비하

지 않는 날, 즉 “99%가 없는 날”로 만들자는 제안에서 시작되었다. 오큐파이를 주도한 ‘불안정노

동자(Precariat)’들은 자본의 필요에 의해 밀려난 비정규 노동자, 파트타이머, 백수, 예술가, 장

애인 등 이질적인 사람들의 집단으로 규정된다. 노동시장의 변화로 ‘공장의 계급’이 아닌 ‘거리의

계급’이된[4] ‘잡민’들이 기존의 체계를 움직이는 모든 행동을 멈추고자 감행한 파업이었다. 미술

디자인 라운드테이블, 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 수유너머, 잡년행동 외 30 여 워크그룹과 각양

각색의 참여자들이 모여 예술가의 생존권, 여성, 장애, 생태, 강정 마을, 반 삼성, 청소년 인권 등

다양한 의제를 제시했다. 시각예술 분야의 작가들은 “상상력에 밥을” “예술가에게 기본소득을”등

의 구호로 만든 대형 풍선과 현수막, 피켓을 제작하고 총파업 행렬에 가담했다.

총파업 퍼레이드를 준비한 ‘미술 디자인 라운드 테이블’의 시각예술 분야 작가들은 다시 한자

리에 모였다.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열린 전시 <총파업 전시-도시를 멈추고 거리로 나가자!>(6.

9-16, 2012)에서 였다. 총파업을 진행한 미술인과 비미술인들이 함께 참여했으며, 총파업에 대

한 다양한 기록과 생각을 전시 형태로 공유했다. 또한 전시가 열리는 한켠에서 ‘미술 디자인 라운

드테이블’ 토론회(6. 17)를 열어 개별 작가들이 그간 미술계의 부조리를 겪으며 느꼈던 답답함을

토로하고 공감을 나누었다. 대부분의 미술기관에 아티스트피(fee)가 책정되어 있지 않은 문제,

기금 수혜시 요구되는 과도한 행정 업무, 기금에 의존하는 작업의 위험성, 기본소득의 필요성, 전

반적인 미술계 체질 개선의 필요성 등에 대한 대화도 이어졌다. 이곳에 모인 미술인들이 총파업

을 준비하고 토론회를 겪으며 공유한 문제의식을 공적으로 발언하고, 공동의 힘으로 개선을 도모

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 끝에 해를 넘겨 ‘미술생산자모임’의 첫 공개 토론회를 마련했다.

미생모 시청각 모임, 미술인의 제도적 환경 개선

2013년 12월 시청각에서 열린 미술생산자모임(미생모)의 첫 공개 토론회는 성황을 이루었

다. 미생모 멤버[5]를 비롯하여 미술을 하면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젊은 미술인들, 암울한

미래에 짖눌린 미대생들, 제도권 안팍의 미술 관계자들이 자리를 메웠다. 미생모는 이 첫 토론회

에서 작가가 당면한 제도적 불합리와 ‘먹고살기’의 문제 뿐 아니라 미술생산에 관련된 모든 종사

자들(작가, 큐레이터, 테크니션, 코디네이터, 인턴, 지킴이, 도슨트, 비평가 학예사 시간강사 등)

이 처한 환경을 폭넓게 아우르고자 했고, 작가의 창작 환경을 둘러싼 다양한 이슈가 제기됐다. 불

투명한 작품판매 시스템의 문제, 미술대학 통폐합 문제, 미술계 인턴 급여문제, 예술인복지법의

126

개선안, 예술기금의 한계를 벗어난 독립적 활동기금 구축 가능성 등이 논의되었다.

미생모 토론회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2014년 1월, 작가이자 기획자인 홍태림은 웹진 크리

틱-칼에 <공장미술제>(문화역서울, 1. 10-24)와 관련하여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6]를 발표했다. 참여한 작가들에게 아티스트피를 지급하지 않은 점, 작가 선정 방식이 기

존의 공모제에서 추천제로 변경된 문제, 기획자 측이 기획의도와 작품 내용에 대해 작가와 충분

히 소통 하지 않은 문제점 등을 지적했다. 미술계의 부조리한 면면을 보며 많은 젊은 작가들이 느

껴온 분노가 홍태림의 글을 계기로 표출됐고, 이렇게 일어난 반향은 토론회로 이어졌다. 3월 16

일 대안공간루프에서 비평가 임근준의 사회로 홍태림, 권혁빈, 서진석, 김노암이 참여해 ‘한국 미

술계와 작가의 권익 문제-공장미술제 사례와 함께’라는 제목으로 공개 토론회가 개최됐다. 논란

이 된 공장미술제의 문제점을 둘러싼 공방과 함께, 젊은 작가의 권익 및 기성 체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방법 등이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아티스트피, 작가의 처우 개선, 예술가의 노동을 둘러싼 이슈는 이후에도 곳곳의 논의로 이어

졌다. 청년세대 예술가들의 작업과 삶을 조명한 <본업: 생활하는 예술가>(두산갤러리, 1. 15-2.

22, 2014)전의 부대행사 토크(2.22)에서는 참여작가 권용주가 창작 활동과 생계를 위한 부업 사

이를 오가는 생활에 대한 고민을 토로했다. 또 이 전시에 대한 단상으로 시작되는 서동진의 칼럼

‘노동하는 예술가’[7]는 오늘날 ‘심미화된 자본주의’의 상황에서 예술가가 노동자임을 자임할때

일어나는 모순을 지적했다. 이 밖에도 ‘예술에 투여되는 노동을 계량화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이론적으로 조명한 신현진의 글8 등이 발표되며 최근까지 단발적인 후속 논의가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술생산자모임은 지난 7월 아티스트피를 둘러싼 실태조사 설문을 작가/큐레이터

용으로 나누어 실시했으며, 향후 예정된 미생모 토론회를 통해 아티스트피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

를 펼칠 것으로 알려졌다.

두리반, 총파업 등 정치적 현장에서 출발한 예술가들의 활동 흐름은 미생모를 통해 ‘미술 생

태계’ 현장으로 옮겨졌다. 다각적인 ‘삶’의 환경에서 ‘미술하는 삶’의 환경, ‘미술인의 현안’으로

초점이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미술계 내부의 사건과 의견들을 만나 논의가 확장, 논란도 뒤따랐

다. 미생모와 공장미술제의 토론회 이후, ‘예술의 정치적 의제’ 혹은 ‘미술 제도의 개선책’이라는

화두는 쉬이 결론이 좁혀지기보다는 인접한 여러 아이디어와 만나 확산과 모색을 거듭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 토론회를 중심으로 부상한 일련의 이슈는 현재 진행 중인 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술가들이 자신의 창작환경을 돌아봄으로써 다각도로 펼쳐낸 이야기들이 어떤 상을 그

리며 정리, 심화, 발전되어 나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경제와 커뮤니티

127

[1] 단편선, ‘두리반과 마리에서의 음악’, 점거의 기예, 광주비엔날레 20주년 기념 심포지움 발표 중, 2014. 10. 9

[2] 한윤형, 최태섭, 김정근, “열정은 어떻게 노동이 되는가”, 웅진지식하우스, 2011, p16

[3] 나도원, ‘예술가란 직업은 무엇인가’, 예술인소셜유니온(준) 블로그, http://blog.naver.com/art ist_

union/70142384816

[4] 이진경, ‘프레카리아트와 백수, 어떻게 ‘총파업’할 것인가?’, 노마디스트 수유너머N, www.nomadist.org/xe/

life/632890

[5] 미술생산자모임의 멤버(2013. 12. 17 기준)는 리슨투더시티(박은선, 권아주, 정영훈, 김준호, 우에타 지로), 옥인콜렉티

브(이정민, 김화용, 진시우), 파트타임스위트(이미연, 박재영), 강정석, 조혜진, 오용석, 이수성, 김영글, 정윤석, 워크온워

크(장혜진, 박재용). 출처: 미술생산자모임 자료집 http://listentothecity.org/wp-content/uploads/2013/12/web-

spread.pdf

[6] 홍태림, ‘제4회 공장미술제의 심각한 문제점에 대하여’, 크리틱-칼, http://ewsngod.nayana.kr/zexe/

mainissue/4063

[7] 서동진, ‘노동하는 예술가’, 경향신문, 2014. 3. 24

[8] 신현진, ‘예술과 노동’ 1~3, 똑똑 커뮤니티 아트, http://blog.naver.com/ggcfart

128

이슬비

예술가들이 실천하는 같이의 가치

예술가의 곤궁한 생계 문제는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 위기의 예술가에 대

한 문제의식과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무자비한 시장경제 속에서 예술가들의 생존논리가 그 어

느 때보다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소득수준만 놓고 본다면 일부를 제외하고 예술은 수익성이 거의

없는 분야라 할 수 있다. 작품 활동만으로는 생활비조차 벌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예술

가들이 부업전선에 뛰어 든다. 하지만 예술을 하기 위해 시작한 부업에 발목 잡혀 결국 작업을 그

만두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만큼 예술가가 작품이나 예술 컨텐츠를 통해서 먹고 사는게 어렵고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예술가들은 기존 시스템 안

에서 발버둥 치느냐 아니면 그 시스템을 벗어나 또 다른 환경을 만들 것이냐의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최근 예술가 혼자의 힘으로 버티기 어렵기 때문에 서로 연대해서 자립하려는 움직임이 주

목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협동조합’[1] 형태를 표방한다. 예술가들이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는

것은 이것이 민주적인 참여 형태로 서로가 공동체를 책임지고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다.

하지만 최근 1년 사이에 갑자기 협동조합 붐이 일어난 것은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기획에서 이

루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정부의 정책에 의해 야기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2012년 ‘세계

협동조합의 해’를 맞아 정부는 2012년 12월 협동조합 기본법을 통과시키고 2014년 기본법

을 개정하면서 협동조합을 적극적으로 장려해왔다. 현재 5명 이상이면 누구나 금융업과 보험

업을 뺀 모든 분야에서 협동조합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협동조합이 하나의 대안처럼 받아들

이는 분위기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협동조합이 자본주의의 승자 독식구조를 해결할 대안적

인 경제 모델로 주장한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협동조합의 신화로 회자되었던 몬드라곤 그룹

의 모태인 파고르가 파산하면서 우리는 협동조합이 완벽하지 않다는 교훈을 얻었다. 협동조

경제와 커뮤니티

129

합이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예술가에게 협동조합은 거부

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지고 있다. 자립과 연

대,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13년 3월 서울시 최초로 예술생산자 협동

조합으로 등록한 ‘룰루랄라예술협동조합’(이

하 룰루랄라)은 예술가들이 지속적으로 작업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다양한 형태

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전시기획과 판매, 아

트숍 운영을 비롯해 올해에는 예술에 대한 이

해도를 높이고, 예술가들의 활동을 알리는 일

에 좀 더 집중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업으로 작

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인 ‘성미산학교 예술가

수위 프로젝트’와 제주올레의 지원으로 예술

가들이 한 달간 제주도에 머물며 올레 마을 활

성화를 위한 예술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룰

루랄라의 경우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

령층의 예술가들이 섞여있다는 것이 특징적

이다. 그리고 조합의 주축 멤버들이 한국민족

예술인총연합 출신으로 행동주의적이고 정치

적 색채가 강했다면, 문턱을 낮춰 최근에는 다

양한 예술가들이 참여하면서 더 이상 끼리끼

리 모이는 식이 아니라 좀 더 유연해진 방식으

로 현실의 문제를 공유하고 있다. 현재 룰루랄

라의 조합원은 80여 명에 이르며, 조합의 서

포터 ‘예럴랄라(YES)’ 멤버가 30명 정도 된다.

‘이웃문화협동조합’은 ‘문화와 예술로 이

웃과 함께 잘 놀고 잘살자’라는 캐치 프레

이즈를 내걸고 경기도 수원 지동에 터를 마

련해 지역의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기 위

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주)이웃(EWUT)

에서 2013년 4월 협동조합으로 전환해 현

130

재 예술가, 지역주민 등 조합원은 현재 70여 명에 이른다. 조합에서는 조합원과 지역 사람들

이 이용할 수 있는 사랑방인 핑퐁공방 운영하고 있으며, 수익사업으로 친환경 직거래 장터인

‘오가닉아트페스티벌’을 진행하며 예술가와 지역 사회가 만나는 커뮤니티를 활성화시키고, 문

화예술 생태계를 구축하는데 집중하고 있다. 10월 말에는 목공, 패브릭, 요리, 도예 등을 할

수 있는 공동작업실을 열어 이곳에서 다양한 워크숍을 진행하고 판매로 연결시킬 계획이다.

흔히 협동조합하면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자립음악생산조합’(이하 자립)을 꼽는다. 2010년 홍

대 앞의 철거농성장 두리반을 돕기 위해 모인 음악가들의 준비모임으로 결성해 2011년부터 위

해 공식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인디 중의 인디라고 할 수 있는 이 모임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음

악을 지속할 수 있는 생태계를 활성화시키는데 집중한다. 조합에서는 다양한 공연을 기획하고 아

카데미를 개최해 참여 조합원들에게는 적은 액수이만 페이를 지급하고 있다. 또한 음악을 생산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 음반 제작을 위한 대출사업(최대 50만원)은 하고 있

다. 이러한 사업은 음악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만 현재 시행되는 협동조합 법에는 허용되

지 않는 부분이라 자립은 아직 임의단체 상태에 머물고 있다. 현재 조합원은 200여 명에 이른다.

협동조합이 기본적으로 수익을 내는 구조라면 ‘예술인소셜유니언’은 예술인들의 노동조합

을 상상하고 주장하고 있다. 예술노동의 문제, 예술의 사회적 권리와 역할의 문제를 전면적

으로 제기하며 다양한 세미나를 개최해 ‘예술과 노동’의 개념을 알리고 공감대를 확산시키

는데 힘쓰고 있다. 하지만 대중뿐 아니라 예술가 스스로도 이러한 인식이 부족한 편이다. 예

술인소셜유니언은 예술인복지법 개선을 위한 노력 뿐아니라 예술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

을 제시하고 있으며, 지난 7월 공연예술인의 노동환경 실태 파악 및 제도 개선을 위한 국

회토론회를 공동주최했다. 앞으로 예술인들의 자율적인 커뮤니티 활성화, 기존 예술단체

에 대한 비판기능을 강화할 계획이다. 2012년 10월 발족한 ‘예술인소셜유니온’ 준비위원회

는 현재 가입자가 100명에 이른다. 2014년 말과 2015년 초 중으로 공식 출범할 예정이다.

위에서 협동조합의 대표적인 사례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협동조합은 예술가들의 생계 자체를 모

두 해결해줄 수는 없지만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발판이 될 수 있다. 협동조합이 경제

적으로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충분한 수의 조합원을 확보해야 하지만, 조합원 수가 많아

지면 그만큼 응집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협동조합은 자본의 축적보다 조합원들 간에 적절

한 분배를 통해 균형을 맞추고 함께 사는 방식을 고민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전체적으로 조합

원 수가 늘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협동조합에 있어서는 느슨하지만 긴밀한 연대가 절실하다.

그리고 협동조합의 수가 늘어나고 그것이 차지하는 몫이 커진다고 해서 승자독식의 자본주의

와 중앙집권화된 국가구조가 자동적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협동조합간의 연

대 의식 역시 중요하다. 하승우 풀뿌리자치연구소 이음 운영위원은 협동조합이 섬으로서 존재

해서는 힘을 발휘할 수 없고, 설령 섬으로 존재하더라도 그 섬들이 이어져야 사회변화를 바라

경제와 커뮤니티

131

는 다양한 세력과 연대해야 한다고 말한다.[2] 자립의 경우 2012년 팔당생명살림과 상호협력 협

약(MOU)를 체결한 바 있으며 많은 협동조합이 다양한 방식으로 조합 간의 협력을 시도하고 있

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자립과 연대는 일상이자 예술, 그리고 사회적 실천이다.

[1] 협동조합은 공동의 목표를 가진 조합원 모두가 출자금을 내고 함께 경영하는 사업조직을 말한다. 수익성을 추구하기 때문

에 일종의 기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은 공익적인 가치와 책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주주의 이익을 추구하는 주식

회사와는 구별된다. 주식회사는 주식을 많이 가질수록 결정권이 커지는 반면, 협동조합의 권한은 1인 1표로 조합원 중심이

다.

[2] 하승우 〈협동조합운동의 흐름과 비판적 점검〉,《문화과학》 통권 제73호 (2013년 봄) pp.91-109.

132

김하나

개인들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

2013년의 서울소셜스탠다드는 주거-생산-재생산 영역에 걸쳐 확산되고 있는 ‘1인화’ 현상

에 주목하고, 그에 상응하는 기분 좋은 거주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습니다. 제 3의 공공공간인 카

페의 관찰을 통해 ‘적당한 거리감을 갖는 1인들의 커뮤니티’라는 형태가 사회에서 일반화되고 있

음을 발견하고, 혼자이면서 함께 사는 집-셰어하우스를 새로운 주택의 스탠다드로서 제안하고자

하였습니다.

경제와 커뮤니티

133

혼자이지만 함께 사는 생활

한국은 ‘가족’이라는 개념이 꽤나 오래 지속

되어왔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느슨한 커뮤니티

속에서 소속감 및 안도감을 취하고 있다는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기술적으로 접근해 보자면, 외

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아파트라는 주거형태

가 발전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주택 면적이라

는 것이 분양 면적으로 대변되면서 복도와 엘리

베이터 등의 수직동선, 또는 특별한 기능을 갖

는 놀이터나 노인정, 헬스장과 같은 공용공간과

개인을 위한 전용면적으로 양분화 되었습니다.

이렇게 분양 면적의 개념이 강한 주택시장에서

‘특별한 목적 없이 느슨한 커뮤니티가 이루어질

수 있는 성격의 공유면적’을 제안해보고 싶었습

니다. 카페 같기도 한 이 제 3의 공간이 개인들

의 사회적 공간으로서의 집으로 재미있는 라이

프스타일을 가능하게 해준다고 믿습니다.

셰어하우스란 전통적으로 사적인 공간에 포함되는 부엌, 화장실, 거실 등을 필요에 따라 여러

명이 공유하는 주거 형태를 뜻합니다. 집에 위치한 이런 제3의 공간-공유주방, 공유욕실 등에서

함께 사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상은 조금은 특별하기도 하지만 보통의 집에서의 생활과 크게 다

르지는 않습니다. 욕실과 화장실 그리고 주방 등의 공유 공간은 일단 1주일에 1회 청소서비스가

제공됩니다. 하지만 사용 후 같이 사는 사람을 위해 간단한 정리를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

니다.

통의동집은 개인실의 전용공간(Private space)-정림건축문화재단 사무실과 라운지의 매개

공간(Semi public space)-서촌의 골목 공공공간(Public space)-함께 쓰는 주방의 공유공간

(Semi private space) 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간의 구성과 위계의 변주가 입주민의 매일, 일

상의 경험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하였습니다. 통의동집 1층의 매개공간을 특별히 “라운

드어바웃” 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역 건축가는 물론 주민까지 드나들 수 있는 도서관이자, 정

림건축문화재단에서 기획하는 여러 가지 워크숍, 강연이 열리는 공간입니다. 물론 통의동집 가족

에게는 안마당이자 공동 서재, 쉼터가 됩니다.

공유가 일상인 동네, 통의동

134

통의동에 집을 정한 이유는 우리가 제안하

는 ‘혼자이면서 함께사는’ 가족이 잘 어울리고

받아들여지기 쉬운 환경이라고 생각했기 때문

입니다. 통의동은 첨단을 달리는 도심의 편리함

과 오래된 동네의 차분함이 교차하는 묘한 느낌

의 지역으로, 몇년 전부터 창성동, 효자동, 옥인

동 등과 함께 ‘서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

러한 환경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건축가, 디자이너, 문예

가, 음악가 등 창작과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

로, 서촌에서 일하고 생활하고 휴식하면서, 지

역의 분위기와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있습

니다. 곳곳에 산재하는 작은 카페와 음식점, 서

점과 갤러리는 그들이 자연스레 모이고 교류하

며 공동체의 분위기를 표출하는 장소가 되고 있

습니다. 우리가 구현하고자 했던 지금 서울의

자연스러운 공동체 감각, 혼자이면서 함께 있는

듯한 느슨한 감각이 지역 전체에 뿌리내리고 있

었기 때문에, 우리의 집은 당연한듯 통의동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혼자 사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

‘공유주거’라는 라이프스타일에는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많이 있습니다. 조금만 떠올려봐

도, 임대료의 지불방법과 같은 경제적인 문제에

서부터 공용설비나 공유공간의 유지관리, 일상

생활에서의 트러블, 괜한 불란을 일으킬까 말로

꺼내지 못하는 이웃의 행동거지에 대한 불만 등

등. 쉐어 생활에 관심이 있으면서도 좀처럼 엄

두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러한

미지의 숙제들이 매일 일상을 나누는 사람들과

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러운 커뮤니

경제와 커뮤니티

135

티를 만드는 것은 아직 사업시작단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여전히 어렵습니다. 하지만10월 역

삼동에 다양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는 SHARE ROOF withsomething을 준비하면서 혼자 살면

서도 함께 사는 듯한 적당한 거리감, 느슨한 커뮤니티를 특징으로 하는 공유주택은 너무나 친밀

한 공동체 속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도, 혼자 살면서 겪게 되는 효용대비 높은 주거비용지

출과 보안 문제, 고독감 등의 문제를 해소하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들어 나갈 수 있는 주거임

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습니다.

사유(私有)를 유지해야 하는 부분과 공유(共有)할 수 있는 부분이 만나서 이루는 미묘한 긴장

감, 이런 다양한 주거 선택지가 서울 곳곳에 늘어나면 좋을 것 같습니다.

136

이성희

홍콩 지역 미술현장의 자생적 움직임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과 지역 미술현장과의 간극

유명 브랜드 상점들이 즐비한 홍콩 거리에서 국제적인 갤러리들의 간판도 그 사이를 메운다.

면세구역인 홍콩은 미술품 거래의 용이함을 강점으로 하여 아시아 미술시장의 중심으로 자리매

김하였고, 최근엔 아트바젤이 홍콩아트페어를 인수하면서 미술시장 측면에선 순항 중이다. 그러

나 홍콩의 국제적인 미술입지와 홍콩 지역 미술현장과의 간극은 꽤 크다. 아트바젤홍콩과 국제적

인 미술관 M+의 설립은 홍콩 지역미술을 활성

화에 기여하는 것과는 큰 상관이 없다는 게 지

역 미술인들의 반응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규모

의 행사와 프로젝트는 ‘그들만’의 잔치일 뿐, 오

히려 지역 미술현장과 괴리감을 증폭시키는 작

용도 한다는 것이다.

홍콩작가 듀오 C&G(클라라와 검(Clara &

Gum))는 홍콩미술계의 국제화 추세와 간극을

보이는 홍콩 현대미술사의 면면을 퀴즈로 파헤

치는 프로젝트, <생각만큼 사소하지 않은: 홍

콩 아트 퀴즈(Not as Trivial as You Think:

Hong Kong Art Quiz)>를 2014년 5월 아트바

젤 기간 중에 선보였다. 이들은 홍콩의 예술생

태계가 미술시장의 일환이거나 오락과 생활방

경제와 커뮤니티

137

식으로 예술을 소비함으로써, 소비하고 소비되

고자 하는 욕망에 치우쳐 균형을 잃었다고 지적

한다. 그래서 미술사, 미술비평, 미술교육과 함

께 예술적 제작, 예술 생태계의 장기적인 발전

전략, 예술의 정치에 관한 이슈들에 관한 토론

이 그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고 이 프로젝

트를 준비했다. C&G는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

의 레지던시 기간 중 홍콩미술의 지난 50년 역

사와 정치에 관하여 조사하면서 발견한 중요한

이야기들을 엮어서 퀴즈로 구성, 실제로 작가,

학생, 비평가, 행정가를 비롯한 미술계 전문가

들로 구성된 4팀이 퀴즈에 참여하여 실감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C&G

와 같은 복장에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가발을 쓴

참여자들은 질문에 답을 할 때마다 무대로 뛰어

오르고 서로를 방해하고 기물을 파손하며 ‘막장

극’을 연출했다. 아트바젤이 열리는 장소에서도

가장 큰 홀에서 그곳을 가득 채운 홍콩미술인들

과 함께 신명나는 아트퀴즈를 벌임으로써, 이들

은 미술시장에만 치우친 홍콩미술계에 일침을

가하는 역할을 해냈다.

도시개발의 최전선에서 자생만이 살길

홍콩은 세계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도시로

꼽힌다. 주택 평균 가격이 연평균 가구소득의

14.9배에 이르고, 주택 임대료도 세계에서 가장

비싸다. 홍콩인들은 중국 부호들의 부동산 투기

가 집값을 천정부지로 치솟게 만들었다고 입을

모아 얘기한다. 또한, 임대료가 가장 비싼 상업

지구 중 한 곳인 센트럴과 소호의 상점가는 1년

이 멀다하고 생성과 소멸을 반복한다. 홍콩 상

업갤러리들이 밀집해있는 소호 갤러리지구에

138

서도 많은 갤러리들이 임대료 부담 때문에 이곳

을 떠나 도시 외각에 새롭게 둥지를 틀고 있다.

사실 어마어마한 임대료 때문에 소호에 남아있

는 대부분의 갤러리들도 쇼케이스 정도의 작은

공간을 보유하고 있는 실정인데, 큰 규모의 설

치작품, 실험성을 갖춘 작품이나 그룹전을 소개

하기 위해서 갤러리들은 중심지에서 벗어난 외

각 공장지대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포탄, 쿤통, 에버딘, 차이완 등). 예술이 도시에

서 젠트리피케이션을 가속화시키고 결국 이후

그 장소들을 떠나 새로운 곳을 개척하는 역할을

하는 일은 세계 대도시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경

향이지만, 현재 홍콩은 분명 그 중심에 있는 듯

하다. 상업갤러리들도 공간을 유지하기 힘든 상

황인데, 지역 비영리공간이나 예술가들의 작업

공간은 서민 상업지역, 공장지대로, 심지어 농

촌으로 멀어져가고 있다. 도심지 땅이 절대적으

로 부족해 끊없이 바다를 메우고, 산 중턱에까

지 30-40층 높이의 건물을 지어대는 숨막히는

도시에서 예술의 자리는 어디일까?

이런 연유에서 홍콩의 비영리공간들과 작

가들의 활동은 정부와 도시개발자들에 맞서, 공

간을 점유하고 쫓겨나면 새로운 곳을 찾는 일련

의 과정과 함께 해왔다. 일례로, 홍콩의 중국 반

환 1년 뒤인 1998년에 예술가들은 상대적으로

임대료가 저렴한, 방치된 정부 창고건물이 있는

오일 스트리트에 커뮤니티를 형성했다. 곧 아

트 컬렉티브인 비디오타지, 아티스트 코뮨 등이

둥지를 틀고, 젊은 예술가, 디자이너, 영화인들

이 활동하는 홍콩예술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

나 홍콩섬에서 접근성이 좋은 오일 스트리트 아

트 빌리지에서 그들의 체류는 오래가지 않았다.

경제와 커뮤니티

139

2000년대 초 정부는 예술가들에게 건물에서 떠날 것을 요청했고, 곧 전기를 끊어버리는 극단적

인 조치를 취했다. 예술가들이 떠난 후 ‘오일 스트리트를 살려내자(Save Oil Street)’는 캠페인이

펼쳐졌고, 릴리 라우(Lily Lau)는 등산장비를 이용해 건물에 매달려서 “이곳은 토지개발자들에게

서 자유를 되찾아야 한다.”고 벽면에 중국어로 쓰는 퍼포먼스를 하고 영상으로 담았다. 가혹하게

예술가들을 내쫓은 후 홍콩예술위원회는 오일 스트리트 빌리지를 오랫동안 방치했다가, 현재는

Oi!이라는 이름으로 공간을 운영하며 오픈콜을 통해 기획을 꾸려나가고 있다.

오일 스트리트에서 예술가들이 떠난 뒤, 10여년이 훌쩍 지난 2014년 얼마 전 그곳에서 과거

오일 스트리트를 회상하며, 현재의 젊은 작가들이 자생성을 모색하는 다양한 방식을 소개하는 전

시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는가(Can We Live (Together))>가 열렸다. 전시의 기획은 홍콩의 서

민 상업지구 야우마테이에서 활동하는 아트 컬렉티브 우퍼텐(Wooferten)의 창립멤버인 리 춘펑

(Lee Chun Fung)이 맡았다. 우퍼텐은 2012년 <야우마테이 자기구조 프로젝트와 시위전>을 통

해 지역주민들과 함께 그들의 터전을 스스로 지켜내자는 움직임을 만들기도 했다. 한편, 2009년

우퍼텐의 창립 이전부터 리 춘펑은 80년대 이후 세대의 행동주의 예술가들과 함께 무분별한 도

시개발에 반대하는 사회적 예술 활동(스타페리 선착장 철거 반대, 광저우-홍콩 고속철도 반대운

동 등)을 전개해왔다. 다시 돌아와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는가>전시에서 기획자는 홍콩 드라마

의 대사를 인용, “조화란 백 명의 사람들이 같은 문장을 말할 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백 명의

사람들이 백 개의 다른 문장을 말하지만 서로 존중할 때 생기는 것이다.”라고 하며 정부 주도의

예술정책이 자생적인 연대를 대신할 수 없음은 은유한다. 그러면서도, 과거 예술가들이 자발적으

로 이룬 오일 스트리트 아트 빌리지와 현재 정부가 운영하는 Oi!, 두 개의 서로 다른 예술 생산 체

계 사이에서 접점을 찾을 수는 없는지 질문을 던진다.

<만약(홍콩에서의 죽음)(As If (Death in Hong Kong)>은 과거 오일 스트리트 아트 빌리지

에서 활동했던 아티스트 코뮨의 전시 ‘홍콩에서의 죽음’의 자료와 관련 아카이브, 당시 전시 참여

작가들의 인터뷰로 구성한 프로젝트이다. 과거 아티스트 코뮨은 이 빌리지에서 가장 끝에 위치

한 인기 없는 장소를 빌렸고, 그곳이 과거 영안실이었던 점에 착안해 전시 제목을 붙였다. 16년

이 지난 지금 그곳은 Oi!이 되었고, 아티스트 코뮨도 해체된 지 오래다. 시간과 공간의 전이를 반

영하는 ‘죽음’은 현재의 홍콩의 정치적 상황을 환기키시면서, 잊혀진 과거 오일 스트리트 아트 빌

리지의 중요성과 지역 미술현장에서 자기 조직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편 오일 스트리트가 위

치한 노스포인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작가 조 유(Joe Yiu)는 역사와 현재가 만나는 이 장소가 지

역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 이야기하고 상상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는 다양한 미술기관

과 문화종사자, 지역주민들에게 현재의 Oi!에 대한 바람을 표현해달라고 요청하여, 그를 바탕으

로 광고 형식의 영상을 제작했다.

또한, 전시 참여작가 마이클 렁(Michel Leung)은 우퍼텐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140

야우마테이의 게릴라 농부 망고 킹(Mango King)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됐다. 망고 킹은 도시의

좁은 유휴 공간을 극대화하여 고구마, 파파야 나무, 망고 나무, 바나나 나무, 리치 나무 등 다양한

종류의 과일과 야채를 심어 자신의 음식을 생산하는데, 작가는 망고 킹이 도시풍경을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며 유기적으로 농사를 짓는 모습을 따라서 지도를 그리고 사진으로 기록했다. 홍콩의

저널리스트 크리스토퍼 디월프(Christopher DeWolf)는 망고 킹과 마이클 렁의 활동에 관한 기

사에서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이지만, 사실 개발되지 않은 넓은 토

지와 자연이 존재한다. 그러나 정부의 정책은 도시 거주자들과 자연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계발하

는 방식이 아니라 그 둘 간의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전개됐다. 사실 1990년대 초 홍콩 청과물의

1/3이 홍콩 내에서 생산되었지만, 현재는 그 수가 2.3퍼센트로 급감했고, 모든 농산물이 중국과

타지에서 수입된다. 그러나 최근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출생한 젊은이들이 유기농업에 관심

을 갖는 추세다.”라고 설명한다. 마이클 렁 역시 망고 킹을 따라 도시 농부로서 지역 주민들과 함

께 공공의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 도시에서 자생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거리로 나온 예술가들C&G

앞서 소개한 홍콩의 작가 듀오C&G는 홍콩 비영리 예술공간 C&G Artpartment의 운영자이

자 사회운동가로서 홍콩의 교육과 제도에 관한 비판과 대안모색을 지속해왔다. 공간 설립 초기부

터C&G는 정치적인 이슈를 담은 전시만을 기획해왔고, 공간과 기획의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정

부에 공간 운영기금을 신청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지켜왔다(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대안 미술교육

을 하면서 수강료 내지는 공간 사용료를 받는 것으로 운영비 일부를 충당해왔다). 이들은 예술가

이자 운동가로서 매체에 자신들의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길거리에서 특색 있는 퍼포먼스를 펼

쳐 주목을 받았다. 처음으로, 2004년 7월 1일 홍콩의 중국 반환 기념일에 중국 전통의상을 입고

자신들의 약혼식을 거리에서 진행했고, 자녀를 출산한 이후엔 유모차를 끌고 다니며 온갖 시위에

참석했다. 이들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뉴스와 신문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고, 이 작가들은 이러한

기회를 통해 지속적으로 발언을 해왔다. 또한 듀오 중 화가인 검 쳉(Gum Cheng)은 대중매체에

자신들이 보도된 모습을 흑백 유화로 기록하는 작업도 병행해왔다. 매체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수

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생각을 매체

에 적극적으로 전달하겠다는 그들의 노력과 그것을 일종의 기록화로 남기는 C&G의 행보에서 예

술의 사회적 기능이 작동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홍콩 대학생들의 수업 거부 이튿날인 9월 23일, C&G는 어드미럴러티 정부청사 주변에서 예

술가들과 시민들이 함께 들풀을 그려서 정부청사 주변 화단과 벽에 걸어두는 프로젝트를 진행했

다. 낮부터 밤까지 지나가던 행인들도 거리에 앉아 민주주의를 향한 염원과 꺾이지 않은 의지를

담은 들풀을 그려냈다. 물론 이 행사를 만든 C&G도 드로잉을 그려냈고, 항상 함께하는 그들의

경제와 커뮤니티

141

두 딸도 들풀 그리기에 참여했다. 수많은 사람

들이 참여해 그려낸 한 장 한 장의 드로잉은 나

뭇가지에 바리케이드 사이 사이에 노란 리본으

로 고정되었다. 한국에서 세월호 참사 실종자의

무사귀환과 추모의 상징으로 단 노란 리본이 홍

콩에서는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으로 도심을 장

식하고 있다. 나는 그곳에서 들풀을 그리는 사

람들에게 말을 건네고 대화를 나누며 그 마음을

공유했고, 일종의 뭉클함을 안고 다음날 한국으

로 돌아왔다. 이후 홍콩 시위 소식은 SNS뿐만

아니라 한국의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실시간으

로 접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모든 홍콩 친구들

은 시위 현장에 나갔고, 심지어 그런 사안에 전

혀 관심이 없던 홍콩 거주 일본인 친구들까지

센트럴로 향했다.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C&G는 요즘

많은 홍콩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현 사안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

들이 보기에 형과 누나들이 학교에 가지 않고 도심은 연기로 가득한 상황이 이상하고 궁금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C&G는 자녀들에게 홍콩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직접적으로 가르치진 않지만,

자신들이 참여하는 예술활동에 그들이 자연스럽게 동참하도록 함으로써 천천히 경험하게 한다고

했다. C&G의 두 딸은 ‘우산 운동(Umbrella Movement)’ 기간 중에도 학교와 유치원 대신 거리

에서 부모와 함께 우산에 그림을 그리고, 학생들과 함께 자리를 지켰다. 지금 거리로 나가서 목소

리를 내지 않으면 다음 세대의 미래는 없다고 하는 이 작가들을 비롯한 많은 홍콩 젊은이들은 미

래를 향한 ‘우산’인 것이다. 정치 사회적 급변속에서 홍콩 지역미술계의 구성원들이 홍콩인들의

삶의 조건에 고민하고, 예술적 창조와 도시 사이의 관계망을 만들어가는 모습은 예술의 가치와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142

황규관

기본소득은 어떻게 예술이 되는가

며칠 전 언론에는 우리 사회의 40대 구직자 중 70%가 67~70세까지 일해야 생존이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보도되었다. 그 중 12.8%는 71세가 넘어서도 일을 해야

한다고 답했다 한다. 또 한 편으로는 2014년 8월 신입사원 채용규모 59만 4000명 중 50대 이상

이 43만 4000명이고, 그 중 60세 이상이 19만 9000명이라는 통계가 있다. 정부에서는 이런저런

해결책을 내놓는다고 부산을 떨지만, 이미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앞으로 일자리는 3차 산업인 서

비스업에서 발생할 거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통계가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피부에 와

닿은 느낌으로는 3차 산업인 서비스업에서의 고용창출이란 고작 해봐야 시간제 아르바이트가 아

닌가 싶다.

이러한 일자리 품귀 현상은 점점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이고, 우리 사회의 부박한 정신문화를

봤을 때 일자리를 놓고 세대 간 갈등이나 안 일어날지 우려가 될 정도이다. 이 현상에 대해 구조

적 접근을 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다만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밑천삼아 봤을 때, 앞으로 현대 사

회는 노동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매우 곤란한 지경에 빠지지 않을까 싶다. 이미 한국은

행에서도 고성장을 포기한 느낌을 준다. 물론 정치인들이야 언제나 일자리를 늘리네 어쩌네 호들

갑이지만 말이다. 사실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그저 희망 사항에 불과하고, 늘어난 일자리라는 것

도, 참으로 민망하다 못해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열패감을 주기에 딱 알맞은 것들뿐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의 이러한 구조적 불일치는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해 보면 매우 많은 틈을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 틈으로 따뜻한 햇살과 감로수가 들어올지 아니면 악마의 서늘한 손길이

들어올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예술이 삶으로부터 자율성을 갖는 만

큼 타율성을 갖는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예술적인 사태가 될 수도 있다. 사실

경제와 커뮤니티

143

예술가에게 무기력은 치명적인 독이다. 시쳇말

로 예술가들이 이슬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면, 우리 사회의 ‘밥’ 문제에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예술가의 내면에서 번식하는 무기력

은 의외로 자신의 작품활동에 대해서보다 몸담

고 사는 세상의 모습에서 일차적으로 발원할 가

능성이 높다. 이것은 예술의 자율성이 그만큼

물리적 세계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

미한다. 보들레르와 플로베르는 돈벌이를 위한

세상과 타협하는 것을 비판하며 ‘순수성’을 지

켜냈지만, 그들에게는 예술의 자율성을 보장받

을 수 있는 삶의 강제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지

대에 있었다. 물론 보들레르는 가난하고 힘든

삶을 살았으나 그는 결정적일 때 손을 벌릴 수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극소수의 사례를 들어

예술의 순수성을 부르짖는 것은 허망한 노릇이

다. 빈센트는 과연 동생 테오 없이 그림을 얼마

나 그릴 수 있었을까.

많은 예술가들이 이렇듯 예술의 자율성을

위협하는 외부세계를 갖고 있는 것은 명확한 일

이다. 심지어 예술의 자율성을 버리고 예술을

전적으로 상품화시키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

은가. 그러나 예술의 자율성을 위협하는 외부세

계는, 바로 예술이 바라봐야 할 예술의 거울이

기도 하다. 혹은 원천이기도 하며 예술을 삼켜

버리는 거대한 심연이기도 하다. 통상 예술의

바깥에 있다고 여겨지는 ‘먹고사는 문제’는 예

술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아니 그것은 예술

의 영역으로 한 겹 두 겹 접혀져 들어오고 그에

반응하는 예술은 구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한 올

두 올 흘러나간다.

144

칼 폴라니는 그의 저서 《거대한 전환》에서 노동, 토지, 화폐는 근대산업체제에서 필수적인 요

소이지만, 그것들은 “분명 상품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특히 “노동이란 인간 활동의 다른 이름

일 뿐이다. 인간 활동은 인간의 생명과 함께 붙어 있는 것이며, 판매를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

른 이유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활동은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으며, 비축할

수도 사람 자신과 분리하여 동원할 수도 없다.” 노동이 이러한 인간 활동이라면 예술도 인간 활동

이며, 이것 또한 “생명의 다른 영역과 분리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노동이 더 아래 심급으로

내려가면 예술과 만나는 지점이 존재한다. 그것의 예를 크로포트킨은 중세건축물에서 찾은 바 있

다. 즉 “단 한 사람의 상상력에 의해 부여된 몫을 수천 명의 노예들 각자가 분담하면 되는 고립된

노력의 결과가 아니”(《상호부조론》)라는 것. 뒤집어 말하면 자본주의적 분업 노동에서는 불가능

하다는 것.

폴라니나 크로포트킨이 말하는 노동은 당연히 생존을 위해 강제로 해야 하는 자본주의적 노

동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활동의 ‘일부’로서 생명의 영역을 가리킨다. 이 생명의 영역이 지켜질

때 삶의 활력은 유지되고 그 활력은 물리적인 삶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까지 당연히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물을 수 있겠다. 자본주의적 극한 상황과의 갈등 혹은 길항 가운데에서 예술은 탄

생하는 것은 아니냐고.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물음이지만 나는 지금 예외적인 천재의 경우를 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위한 일반적인 환경과 물적 토대의 중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이 일반적인 환경과 물적 토대를 위해 지금 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그렇다. 기

본소득이다!

기본소득에 대해서 내가 갖고 있는 정치한 이론은 없다. 어찌 보면 이 기본소득에 대한 개념

이야말로 “너무 어처구니없이 간단한 진리”(김수영, 「꽃잎3」)에 속한다. 요약하면 사회의 구성원

들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돈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 돈은 시혜도

아니고 동정도 아닌 사회 구성원의 권리이다. 기본소득은 사람이 사회에서 하는 모든 활동과 노

동(예를 들면 ‘그림자 노동’이라 불리는 가사노동 같은 것), 문화, 역사나 전통 등은 모두 사회의

부를 증진시키는 데 기여를 했다는 관점에서 나온다. 이것은 노동의 결과로서의 생존이 아니라,

생존의 결과로서의 노동을 말하는 것으로 그동안 우리를 짓눌러 왔던 가치를 거꾸로 세우는 것에

다름 아니다,

기본소득은 이런 점에서 생산적 복지로 명명되는, 노동을 강제하는 복지와도 철학 자체를 달

리 한다. 기본소득은 그러니까 “‘존재’ 그 자체를 위한 소득이다.”(바티스트 밀롱도) 여기서 언제

나 대두되는 의문이 과연 사악한(?) 인간들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돈을 줘도 되는 것이냐는 것이

다. 그것은 다른 측면에서 소비를 부추기고 도덕적 해이를 촉진하는 결과로 나타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일단 노동 없이 대가를 지급한다는 점에 대해서 선량한 시민들은 불쾌한 감정을 전혀 숨

기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나 기본소득은 그 대가의 내포를 전혀 다르게 충전한다. 우리는 이미 대

경제와 커뮤니티

145

가를 받을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말이다. 왜? 우리는 이 공동체에 존재하고 움직이면서,

웃으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그리고 어려움을 당한 이웃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착각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현대인의 내면이 마치 인간의

원래 본성이라도 된다는 듯한 인식 말이다. 과연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냐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지난한 논쟁과 대화가 필요하다. 그것을 여기서 밝힐 수 있거나 언급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

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인간의 탐욕과 사악함은

극단적인 자본주의가 우리의 내면에 휘갈겨 놓은 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인간의 내면은 자신의

신체에 기입된 세계의 기호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쾌와 불쾌는 우리 밖의

다른 사물이나 사건과 관계되어 있음은 경험적 사실에 가깝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탐욕과 사악함은 자본주의 문명의 흔적이지 인간의 본성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기본소득이 지급되면 생존에 강박된 시간의 고삐가 풀림으로써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성급한 일이다. 기본소득 아래에서의 시간은 우리의 것

이 된다. 최소한 지금보다 많은 시간을 우리는 되찾을 수 있다. 그 시간에 우리는 사랑을 나누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쓸 수 있다. 길을 지나가다가 잠시 붉은 석양 앞에서 한동안 서 있을 수도 있

다. 폐지 줍는 할머니의 수레를 밀어줄 수도 있다. 물론 술을 마실 수도 있다. 기본소득이 삶의 모

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일단 시급한 중증을 치유하고 다른 삶을 실

험할 수 있는 여유는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실험하는 삶, 그것이 예술과 과연 얼마나 다른 것일까.

그리고 이 얼토당토 않는 기본소득에 대해 말하고, 요구하고, 꿈꾸는 것 자체가 실험 아닐까? 기

본소득의 결과로 확보된 예술의 자율성을 누리는 것도 물론 예술적이지만 기본소득을 꿈꾸는 것

자체도 예술적인 것이다.

그렇게 기본소득과 예술을 뒤섞을 상상력을, 아직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참고서적

《녹색평론》 2009년 9-10월호

《녹색평론》 2013년 7-8월호

《조건 없이 기본소득》(바다출판사)

《모두에게 기본소득을》(박종철출판사)

《분배의 재구성》(나눔의 집)

교육과 커뮤니티

이치로, 고구마, 예술 그리고 교육 / 이정헌

전시 그리고 ‘커뮤니티’ / 전효경

총체적 전망을 향한 교육이라는 희망 / 신양희

미술대학 교육? 과정, 대화, 다양성을 존중할 때 / 장승연

큐레이터: 양성하거나 육성하거나 교육하거나 / 장혜진

가르침 없이 배우는 것은 가능한가 / 류혜민

문화생산자로 성장하기: 홈 워크스페이스 프로그램 / 김진주

148

이정헌

이치로, 고구마, 예술 그리고 교육

지난여름, 한 지역 공무원에게 그만 해외사례 타령을 해버렸다. 어쭙잖게 말한 탓인지, 이후

지옥을 맛봐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에서 한 번 더 하련다. 몇 년 사이 중앙 정부 부

처와 각 지자체에서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고

있으나 성공이라 할 만한 게 (아직은?) 없는, 문

화-예술로 마을만들기, 지역재생과 공동체 활

성화에 대한 사례다. 해외에는 분명 성공한 사

업들이 존재한다. 지역경제 활성화(!), 노령인구

감소(!!), 공동체 활성화(!!!), 행복지수 상승(!!!!)

을 수치화 된 지표로 입증한 사례 말이다. 그런

데 국내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선진사례에 대

한 ‘벤치마킹’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국내 상황

에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일까. 아마도

국내 사정으로 보자면 이 사례의 원동력이 전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열도의

최남단, 가고시마현 가노야시의 야네단 마을 이

야기다.

1990년대 중반까지 130가구 290여명이 살

던 야네단. 전체 인구의 40퍼센트가 65세 이상

이며, 고구마 농사가 주수입원이었던 낙후된 농

교육과 커뮤니티

149

촌 마을. 1996년, 토요시게 테츠로 씨가 야네단의 촌장으로 취임한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마을주

민들에게 소박한 제안을 했다. 다 같이 돈을 모아 도쿄돔에 가서 스즈키 이치로(야구선수, 일본의

영웅)의 경기를 보자고. 마을주민들도 이치로가 선보이는 독특한 타격폼을 직접 보고 싶었던지

촌장의 제안에 따랐다. 그 후 경기관람용 공동자금 마련을 위해 방책을 내놓은 것은 지역의 주요

농작물이었던 고구마 공동경작이었다. 오로지 이치로를 보고 말겠다는 공적 목표를 향해 학생을

비롯한 노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33만 엔을 모았다. 안타깝게도 주민들이 일본 최

남단에서 도쿄까지 올라가 도쿄돔에서 비싼 야구 티켓을 사기엔 부족한 돈이었고, 결국 차선책으

로 후쿠오카돔에서 경기를 관전한다. 이 소소한 사건이 야네단이 공동체의 공적 목표를 처음으로

확인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지역재생은 시작됐다. 공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가치로 한 야구선수를

보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니 정부지원금 따위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이후 이들은 고구마 소주 ‘야

네단’(국내에도 판매한다)을 만들었고, 수익금 전액을 마을 주민 보너스로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

쯤 되자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마을사업에 참여하는 건 당연했고, 자연스럽게 자립경제가 자리잡

기 시작했다.

마을공동사업이 잘 돌아갈 수 있다는 걸 본 촌장은, 더 나아가 2006년부터 예술과 교육에 손

을 댔다. 290명이 고작인 조그만 농촌마을에서 예술을 접하고 미술교육을 받고 싶다는 게 그들

의 두 번째 공적 목표가 되었다. 첫 시작은 빈집을 리모델링하여 외지 예술가들을 에게 작업 공

간을 내어준 ‘영빈관 사업’. 월 3만 엔이란 싼 가격에 작업실과 거주시설을 대여해주되, 가주작가

는 3개월에 한 번씩 전시를 개최하고 주민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을 하조건이 걸려 있다. 마을

운영위원회는 전국단위로 작가 공모를 시작했고 첫 해 1명의 화가를 선정했다. 작가는 자신의 가

족을 데리고 마을 레지던시에 입주, 무기한 거주하며 지역과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주민들로부터

고무적인 반응이 일어나자 이후 화가, 도예가, 사진작가, 영상 작업을 하는 이는 물론 요리연구가

까지 입주하는데, 현재 공모 경쟁률이 꽤 높아진 상태이다. 입주작가들은 작품 활동뿐 아니라 지

역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저학년 아이들과 장년층을 대상으로 한 미술교육

은,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아트상품까지 개발하기에 이른다. 전분을 위한 고구마 경작이

전부였던 마을은 점차 뜨거워졌고, 옛 수퍼마켓 건물을 개조한 ‘갤러리 야네단’를 만든 후 작가의

작품과 주민들의 작품을 함께 전시되기에 이르렀다. 교육 프로그램에서 제작한 아트상품과 차를

함께 팔며 수익도 챙겨갔다. 이밖에도 교육 프로그램은 더 있다. 2007년부터 “지역의 사업 지도

자를 양성”하겠다는 목적 아래, 지역재생과 귀농 및 귀향의 의미를 재인식시키기 위해 ‘야네단 고

향마을 창세학원’이 설립한 것이다. 모두가 유니폼을 맞춰 각잡고 앉은 모양새가 적잖이 위압적

이나, 창세학원은 현재 국내에 유행하는 산촌유학 개념을 갖추고 있다. 공동체의 중요성과 그 안

에서 개인의 자율성에 대한 교육을 시키는 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 또한 2008년부터 매해 거주

작가와 외지 작가, 주민이 함께하는 야네단 예술제가 개최된다. 여기서 재밌는 건, 외지 사람들을

150

끌어들이기보다 마을주민들끼리 작품을 만들고

공연을 하며 즐기자는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

에 공무원이 참여하지 않는다. 오직 주민과 작

가가 있을 뿐이다. 마을의 고령화 인구는 2011

년 26퍼센트로 떨어졌으나 행복지수와 인구는

각각 7.19(2008년 기준, 일본 평균 6.44), 314

명으로 증가했다.

버블경제가 무너진 이후 지역재생과 공동

체 활성화에 골몰해 온 일본에서도 야네단은 독

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본에서

문화-예술로 지역재생 사례를 이야기할 때 곧잘

에치고츠마리 대지예술제가 등장한다. 유휴공

간 활용은 요코하마의 아트뱅크 1929(Artbank

1929)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많이 알려진 이

사례들은 NPO(Non Profit Organization)들

이 나서서 시작됐고, 여전히 그렇게 움직인다.

불행히도 국내엔 에치고츠마리 사례도 경제 지

표에만 한정지어져 소개되면서 곡해되는 실정

이다. 하여튼, NPO 단체에도 종류가 다양하다.

그 가운데 문화-예술 부문 단체는 지역재생 사

업에 적극적인데, 그들 스스로 고향으로 귀향하

거나 낙후 지역을 탐색해 자발적으로 사업을 벌

인다. 이들은 장기 경기불황으로 인해 지속되는

어려운 재정 상황과 행정 서비스의 다양화, 이

에 대한 지출 증대에 의해 시민 메커니즘의 활

용이 중시되며 등장했다. 즉, ‘관에서 민으로’

, ‘민에서 가능한 일은 민에게’, ‘아래에서 위로’

라는 공공적 주체로서의 시민 단체다. 그런데

야네단의 경우는 NPO마저 투입되지 않은 채

자생한 변종인데, 완벽하게 제 역할을 자생적으

로 해내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농촌지도자의 중요성과 자립적 생계라는 점

교육과 커뮤니티

151

만 놓고 봤을 때 자칫 새마을운동이 떠오를 수 있으나, 분명 그 궤적이 다르다. 제2의 새마을운

동이 준비되고 있는 암울한 현재, 한국은 왜 이 사례에 주목하지 않을까? 이유를 추측해 봤다. 문

화-예술로 지역을 살려낸 게 아니라고 보거나, 그들이 만들어낸 결과물이 보잘 것 없다고 여기거

나, 정부나 지자체가 참여하지 않았기에, 혹은 셋 다이거나.

우리도 이치로를 보러 가자, 고구마를 경작하자, 고구마 소주를 만들자, 빈집에서 작가 레지

던시를 하고 문화센터를 만들자고는 하지 않겠지, 라는 걱정을 담아 야네단 이야기를 공무원에게

건넸을 때, 그 마음은 철저히 배신당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한 지역의 공무원들이 꼭 그렇게 일을

벌이자고 했다. 이치로 보러가자는 말만 빼고. 그러니까 현상만 보고, 그 기저에 어떤 의미가 깔

려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니면 내가 잘못 말했거나. 애초에 지자체는 ‘관에서 민

으로’나 ‘아래에서 위로’, 혹은 공공에 대한 관념이 없다. 여전히 위에서 아래로 내려간다는 태도

를 취한다. 특히 올해 초부터 중앙정부 예산이 대거 투입되는 공동체 활성화, 지역재생이 바로

이 점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 없이, 그저 내려온 돈을 받아 가지적 성과만 만들어보자

는 심산인 것처럼 보인다. 공공예술이 포함되는 마을만들기나 지역재생 사업이 ‘경관조성형’이나

‘관광형’으로 분류되는 현실을 보면 이렇게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또한 무서운 것. ‘저런 촌장을 육성하자’, ‘촌장의 사업정신을 벤치마킹하자’ 라는 말이 나오

진 않을까? 안 되겠다. 아, 조심스럽다!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공무원이나 기획자 대상의 문화

예술 교육 프로그램처럼 ‘역량강화’라는 미명 하에 선진사례를 답사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 목표

설정과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론과 여기에 내재되어야 하는 자율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

일 테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네 문화로 이해되는 ‘공공성’의 의미 밝히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중

요한 건 인식을 심어주는 교육이다. 벤치마킹, 역량강화보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문제점을 함

께 인식하고, 그 안에 제 위치를 깨달으려는 노력, 그 노력을 하게끔 하는 교육이 필요한 듯 싶다.

우리도 이치로를 보고 싶다, 는 바람을 가지게끔 하는 노력.

참고자료

고희탁, <일본의 공사 관념의 특징>, 2013 공공학회 학술대회 배포 자료

엄광현, <일본의 공공미술 사업과 문화예술 NPO>, 2013 공공학회 여름 세미나 발표 자료

신승환, <문화예술교육의 철학적 지평>, 2008, 한길아트

일본 총무성, <창조적 인재 정착 · 교류 촉진을 위한 사례 조사, 가고시마현 가노야시 야네단의 노력과 주민의식 변화에 대하여>,

「도시와 거버넌스」 17권, 2012 (鹿児島県鹿屋市「やねだん」(通称)における取組みと住民意識の変化について、都

市とガバンス Vol.17、2012 創造的人材の定住·交流の促進に向けた事例調査、総務省、平成24年)

152

전효경

전시 그리고 ‘커뮤니티’

‘커뮤니티’라는 개념에 대한 관심이 동시대 미술 범위 내에서 점점 확장되고 있는 지금, 필자

는 전시를 기획하고 구현하는 맥락에서 이 커뮤니티 개념을 의식하고자 한다. 전시의 맥락에서

커뮤니티를 인식한다는 것은 전시가 특정 범위의 그룹 혹은 불특정한 전시 관람객의 공통된 경험

의 장으로 상정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특히 필자는 이 ‘공통된 경험’을 의식하면서, 전시를 만드

는 데 있어서 어떻게 ‘공통된 것’의 정치성이 한 조직 안에서 구체화 되고 적용될 수 있는지 궁금

했다. 한 그룹이 더 긴밀해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그 구성원이 함께 보내는 시간

의 문제라면, 항상 일시적일 수밖에 없는 전시의 특성 안에서는 어떻게 이런 교육의 효과가 나타

나고 또 어떤 지속성을 가질 수 있는지 이야기해 보겠다.

전시의 맥락에서 커뮤니티 개념은 ‘전시를 기획하는 과정’과 ‘전시가 개최되고 난 후’ 크게

두 가지 조건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획하는 과정에서 기획자를 비롯한 기획에 참여하는 모든 사

람들 사이에서 커뮤니티가 이루어지고, 전시가 개최되고 난 후에는 관람객으로 그 범위가 넓혀

질 것이다. (대신 관람객의 경우 특정 커뮤니티가 생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

다.) 전시를 보는 것과 만드는 것은 매우 다른 활동이지만, 기획자 및 기획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

이 겪은 배움의 경험을 중심으로 전시의 장에서 또 다른 배움의 경험이 파생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기 위해서, 로거 M. 뷔르겔(Roger M. Buergel)이 지난 2012년 부산비

엔날레와 2007년 카셀도큐멘타 12에서 만들었던 배움위원회와 자문위원(Advisory Board)의

예로 들어 보겠다. 뷔르겔은 2012년 부산비엔날레 총감독이 되고 난 후 본인이 외국인으로서 부

산과 한국의 지역성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먼저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많은 ‘외국인’ 기획자

가 비엔날레와 같은 전시를 위해 초대됐을 때 겪는 딜레마이며, 지역 시민들에게는 뻔하게 느껴

교육과 커뮤니티

153

지는 딜레마임에도 불구하고 기획자가 그것을 단적으로 선언하거나 전시 기획의 전제로 앞세우

는 경우는 드물다.) 그는 전시 기획에 앞서 기획적인 주장이나 모토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되려

한가지 방법론을 전시 기획의 전제로 상정했다. 그는 전시 제목을 ’배움의 정원’이라고 정하고,

오픈콜을 열어서 부산에서 거주하는 사람 혹은 전시 기획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했다. 처음

에 약 300명 정도가 모여 정기적인 모임을 갖기 시작했고, 약 8-9개월의 기간을 지내며 마지막

까지 남은 사람들은 약 50명 뿐이었다. 이 모임에서 사람들은 부산비엔날레가 부산이라는 도시

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부터 비엔날레 참여 작가의 구체적인 작업과정을 공

유하기 까지 여러 방면에서 전시 기획 과정을 가까이에서 보고 간접적으로 나마 만들어지는 과정

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50명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부산 내 지역이나 나이, 관심

사 등을 기준으로 배움위원회 조직 내부의 작은 조직을 구성하기 시작했고, 보다 적은 수의 구성

원을 중심으로 각각의 그룹이 몇몇 아티스트의 작업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각 그룹의 구성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오픈콜을 시작으로 모여진 이 조직은 후에 직접 새로운 활동을 계획하는 등 총감독의 지휘나

부산비엔날레 내부자의 선두가 없이도 능동적인 성격을 가지기 시작했고, 사실 총감독 ‘본인의

배움’을 주된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이 조직은 모여서 잡지를 만들고 비평적인 모임을 갖는 등의

활동을 하면서 후에 자발적인 배움의 장을 만들어 나갔다. 더불어 배움위원회 내부의 활동 외에

도 부산비엔날레 전시 ‘배움의 정원’에서 이루어지는 실질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있어

서도 기여를 했는데, 구체적으로 그들 각자가 배움위원회 활동을 통해 획득한 전시에 대한 지식

이 어떻게 불특정 다수의 관람자에게도 공유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이런 것들은 배움위원회가

직접 진행하는 도슨트 프로그램이나, 강연식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그램 참가자와의 대

화를 통해 만드는 도슨트 진행 방식 등이 있었다.

2007년 도큐멘타 12의 총감독으로도 활동 했었던 뷔르겔은 사실 이와 매우 유사한 방법론

을 카셀 지역의 주민들과도 진행한 바 있다. 이 그룹은 ‘자문 위원Advisory Board’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부산에 거주하는 ‘보통’의 지역시민들이 모였던 배움위원회와는 달

리, 지역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견해나 교육에 대한 제안을 해줄 수 있는 지역의 ‘전문가’들이 모

였고, 카셀 도큐멘타가 1955년에 처음 만들어진 이후 발전된 도큐멘타의 기능이나 미술계에서

의 입지를 이해하고 자문할 수 있는 ‘전문적인’ 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도큐멘타가 오픈하

기 1년 6개월 전부터 규칙적인 모임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이것은 도큐멘타가 부산비엔

날레와 그 성격과 지역적인 기능을 전혀 달리한다는 점에서 교육에 대한 지역시민의 활동 방식이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잠깐 쉴러의 미학 교육에 대해서 살펴보면, 쉴러는 인간이 어떤 가능성을 가지게 되는 순간은

이성과 감각이라는 이 상충하는 두 가지 요소가 적절하게 조합되었을 때 나타난다고 역설한다.

154

랑시에르는 이에 덧붙여 쉴러의 미학교육이 사유할 수 있는 능동적인 활동과 어떤 감각을 수동적

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축적된 하나의 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랑시에르는 쉴러의 미학적인

교육이 정치적인 혁명으로 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시 말해서 이것은 (모더니티의

개념에서) 예술이 현실 정치에서 자율성을 가질 수 있었던 데에서부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정치

성을 획득할 수 힘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전시의 개념에서 확장해서 이것을 이해해 보자

면, ‘공통된 경험의 장’에서 개별 작품 혹은 전시 전체가 주는 감각을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서

이전에 하지 않았던 또 다른 사유를 촉발할 수 있다면, 결국 엄밀히 말해서 수행적인 효과, 즉 정

치적인 개혁으로 까지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쉴러의 미학 교육에 대한 개념은 뷔르겔의 전시 기획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전시장을 방

문하는 관람객과 배움위원회 위원들과의 활동에 대해 작품을 이해하고자 하는 ‘능동적인 행위’와

작품이 주는 감정과 느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이 두 가지 행동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부

산비엔날레 도록의 <들어가는 글>에서 작품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이 필요한데,

이 희생은 작품을 보는 틀에 박힌 습관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랑시에르는

이렇게 습관을 버릴 수 있는 활동이 매우 ‘능동적인’ 행위이며, 구체적인 미학적 경험이 가능하도

록 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것은 관람자에게 요구된 태도였을 뿐만 아니라 기획자 본인과, 함께

작업했던 배움위원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태도였다. 전시를 기획하고 또 감상하기 위해서 상

식적인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향을 서로 주고 받기 위해서 기존에 만들어진 사고방식의 틀을

깨는 것이다. 배움위원회나 혹은 그 유사한 방법론이 사회 과학적으로 그 효과를 증명 받은 사례

는 없지만 이 조직의 가장 큰 결국 커뮤니티를 이룬 각 구성원이 함께 활동했던 과정을 통해 가질

수 있었던 ‘친밀감’ 그 자체 일 것이다. 전시 기획의 과정에서 구성원이 함께 하면서 대화를 통해

새로운 컨텐츠가 생기고 그 친밀감 때문에 촉진되고 또 정제된 컨텐츠의 질이 높아질 때, 불특정

한 관람자와 같이 특정 구성원에 속하지 않은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부산비엔날레의 배움위원회가 도큐멘타 12의 예와 가장 다른 점은, 배움위원회 구성원들은

시각 예술 혹은 문화 관련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한 조직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의 다

양성의 범위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배움위원회는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규정되지 않았던 활동 방

식이 그들의 행동 반경을 넓히고, 자율적으로 그룹 자체가 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가지

고 있었던 것 같다. 전시가 끝난 이후로도 약 2년간 지속된 배움위원회 커뮤니티는 지금 까지 그

이름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각 구성원들의 관계를 바탕으로 사적인 자리에서

그 연대를 지속하고 있다. 기획자와 배움위원회가 같이 만든 커뮤니티 내의 친밀함은 지금 이 순

간 눈에 보이는 형태로 증명할 수 있지는 않더라도 그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각자의 자리에서 새

로운 수행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교육과 커뮤니티

155

신양희

총체적 전망을 향한 교육이라는 희망<교육은 혁명의 미래다> 서평

지난 20여 년 동안 정부는 대학에 대학구조조정(개혁)을 지속해서 요구해 왔다. 이 정책은 대

학 또한 시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자 대학 운영에 기업 경영 모델을 도입하

는 것이었다. 가령 정부는 90년대 중반 대학구조조정을 위해 ‘학부제’를 도입하여 이를 강제적으

로 시행하도록 했고 그 결과 학과들은 부문별

하게 통폐합됐다. 이 정책은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의 폭을 늘리고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열린

교육을 지향한다는 외피를 쓰고 있었지만, 사실

상 시장에서 생존하기 어려운 학과의 존폐를 가

늠하는 시험대였다. 이처럼 취업 시장에서 인정

받지 못하는 기초 학문, 인문, 철학, 역사, 예술

등의 학과는 지금도 여전히 통합되거나 사라지

는 중이다. 물론 지금은 학과뿐만이 아니라 대

학의 운명마저 위태로운 상황이다.

정부가 모든 곳에 신자유주의적 기업 경영

방침을 강하게 들이미는 것이 현재적 조건이라

면, 상아탑 구실마저도 제대로 못 했던 대학들

이 이 칼날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수 있다. 교육 또한 이 체제의 산물이라면 그것

을 잘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이러

156

한 질문을 역으로 한다면 이 체제 또한 역사적 산물이며, 그 체제 아래에서의 교육도 정치경제적

이고 역사적인 조건 아래 형성되어왔고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따라서 얼마든지 다

른 교육 체계도 가능하다.

이러한 시선을 선점하고 있는 책이 스탠리 아로노위츠(Stanley Aronowitz)의 『교육은 혁명

의 미래다』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미국의 노동 계급과 노동자 교육, 보편적 교육이 정착되어

가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현재 신자유주의 시장 경영에 완전히 노출된 미국 대학 교

육의 현장(국내 대학 교육 현장이 놓여 있는 상황과 아주 유사하다.)을 비판한다. 한데 이 책은 노

동 계급과 노동 운동, 노동자 교육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현실을 읽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

다. 즉 저자는 단순히 교육의 위기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계급에 교육은 어떤 의미이

고, 노동 계급이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런데 노동 계급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 체제에서 교육이 과연 혁명의 미래라고

상상하는 것이 가능할까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더군다나 신자유주의 기업 경영이 전 사회를 관

통하고 있는 상황에서 교육 체계를 개선한다고 하더라도 전체적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가능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논지이다. 그는 노동자 교육을 노동 계급의 운동과 투쟁

이라는 긴 역사에 둠으로써 현재의 교육 체계가 정당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나아가 노동 계급이

진정한 교육을 통해서 총체적 전망을 획득하길 희망하고, 미래의 해방을 위해 현재의 교육이 나

아갈 바를 지적한다.

미국 (학교)교육의 역사

이 책의 원제 ‘Against Scooling: For an Education that Matter’에서 ‘Scooling’은 제도적

으로 정착한 ‘학교 교육’을 뜻한다. 저자는 학교 교육과 교육(Education)을 혼동해서는 안 되며,

학교 교육은 보편적 공교육의 출현과 함께 일반화된 교육 체계라 지적한다. 1부 ‘죽은 학교’에서

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교육 체계의 변화를 살핀다. 여기서는 노동 계급 내에서 일어난 노동자 교

육의 탄생과 쇠퇴, 보편적 공교육이 자리 잡아가는 역사적 과정과 그에 반대하며 출현했던 자유

학교 운동과 같은 저자의 경험, 그리고 현재 대학 교육이 어떤 모습으로 체제에 복무하고 있는지

를 그려낸다. 일종의 시대적 서술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미국에서 노동 계급이 형성된 순간부터 1950년대까지 노동 계급 교육이 보편 교육의

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공립이든 사립이든 노동 계급이 학교 교육을 받기

이전, 이 역할은 노동자 집단 내부에서 혹은 노동조합을 통해서 이루어졌으며, 성인 교육, 이민자

교육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독서모임들이 술집, 노동조합 강당 또는 전국

연맹에 속한 사회주의 분파의 지부 사무실에서 진행(73쪽)”되기도 했다. 노동 계급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관련 서적, 역사와 고전 등을 읽으면서 계급 의식을 함께 공유할 수 있었다.

교육과 커뮤니티

157

그러나 노동자들 사이의 좌파지식 문화는 1950년대 들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정치

적 탄압으로 인해 급속히 쇠퇴하는 운명을 맞게 된다. 한편으로 노동 계급은 국가가 운영하는 보

편적 교육 장으로 흡수되어 버리면서 계급적 연대는 사그라지게 된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은 전

후 호황기였음에도 인종, 젠더, 반전 시위 등 여러 저항 운동이 등장하게 되는데 계급 의식은 상

대적으로 많이 약화된다. 이러한 흐름 아래에서 자유 학교 운동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일지 모른

다. 저자 또한 이러한 대안 학교 설립에 관여했고 그 경험이 책에 잘 진술되어 있다. 물론 대안 학

교에 대한 비전들이 오래가지는 못하고 대부분 보편적 교육 장으로 흡수되어 버렸지만, 저자는

기존 학교 교육과는 다른 체계를 위한 시도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어 한다.

저자는 현재와 같은 신자유주의 모델이 공립대학뿐만 아니라 사립대학, 지역의 대학에 자리

잡기 시작한 시기를 1970년대 이후, 즉 전후 호황을 지나 불황이 시작된 정세에서 찾는다. 레이

건 정권과 함께 시작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적 노선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고, 그 체제가 교

육에도 전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따라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공교육

에도 시장과 기업 논리가 점진적으로 침투하면서, 대학은 기업 경영 체제를 완전히 흡수하게 된

다. 대학들의 등급은 확실해졌으며, 이에 따라 노동 계급 학생들의 서열도 더욱 분명해졌다. 이러

한 체계 아래에서 학교 교육은 시장과 기업이 원하는 노동자를 재생산하고 이들이 이 질서를 더

잘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을 가르치게 된다.

기업 모델식 대학과 변화의 주체

기업 경영 모델의 잣대가 대학 교육을 지배하면서 대학과 기업은 긴밀히 연결되고, 대학 운영

의 변화로 인해 교육 본연의 임무가 여러모로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몸담은 노동자들

의 자리도 협소해졌다. 2부 ‘삶의 교육’은 그러한 변화가 어떻게 교육 현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를 고찰하며 이에 대한 저항으로써 대학 노동조합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저자는 대학 교육에 기업식 모델이 도입되고 전문 경영인 그룹의 탄생을 가장 큰 변화로 꼽는

다. 이들은 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들의 핵심적 권리인 강의와 학습을 운영할 권리를 빼앗아 갔고,

건물, 토지, 서비스 재정 등 모든 운영에 기업 경영 모델을 도입했다. 이 경영인들의 주된 관심은

취업 시장과 주식 시장이며, 그들은 대학이 민영화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절차를 생산

한다. 이에 대해 저자는 “이제 대학의 지적 소임은 장식품일 뿐이다. 주로 실익이 있는 지식의 생

산과 전달이라는 기능을 정당화하는 메커니즘”(178쪽)이라 평가하며 이들 경영인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논리는 대학 내부에서 교육(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이러

한 민영화 아래 종신직 교수의 비율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그 자리를 비정규직 강사들이 채워

나간다. 심지어 조교가 수백 명의 학생을 상대로 교양 과목을 담당하는 형식 또한 강화되고 있다.

158

일부 교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비정규직 강사나 조교는 기업식 운영 논리에 따라 손쉽게 대학의

부속품으로 내려앉게 되는 것이다. 기업 경영에서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장 먼저 손을 대는 것이

인건비인 것처럼 대학에서도 이 억지가 고스란히 적용된다.

저자는 이러한 상황에서 교수평의회와 위원회, 나아가 대학 노동조합 등 교육을 떠맡고 있는

주체들의 저항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책에서는 1970년대 이후 노동 운동 내에서 대학 노동조합

의 여러 성과를 소개함으로써 현재적 유효성을 짚어낸다. 물론 저자는 노동조합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기업 노동조합 등은 경제적 불평등에 반대하면서도 좌파적 유산이

나 진보적 이념을 폐기했다는 점을 들어 오늘날 노동조합이 처한 문제점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대학 노동조합이 노동 운동의 중요한 사례이길 희망한다. 대학 노동조합은 교육

에 몸담은 주체들이 노동 계급으로서 노동 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며, 여기서 교육 운동과

노동 운동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사회적으로 노동 운동이 급속히 축소되었고 노동자 교육의 전통도 거의 사라져 버렸다. 이러

한 현실에 대해서 저자는 “노동 운동에는 새로운 에너지와 상상력이 필요하며, 이런 변화를 통해

헤게모니에 저항할 수 있게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역사적 사명을 소생시켜야 한다. 어떻게 이런

전진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노동의 의제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222쪽)라고 진술

하는데 그는 노동자 교육이 여전히 그 밑거름이길 소망한다.

총체적 전망과 교육

3부 ‘교육혁명’에서는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와 파울로 프레이리(Paulo

Freire) 의 사유를 바탕으로 노동자 교육에 대한 논의가 이론적으로 확장된다. 저자는 먼저 『옥중

수고』에서 교육에 대해 그람시가 진술했던 견해를 발췌해 낸다. 그람시는 공립학교의 운영이 직

업 교육과 전문 교육보다는 인문학 교육인 ‘형성적 교육’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익에 구애받지 않는’ ‘형성적’ 유형의 교육은 사실 소수 상류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이었다. 그

람시는 소수의 지배 엘리트를 양성했던 이 교육 유형이 노동 계급의 새로운 지식인을 생산하는데

중요한 참조점이 될 수 있음을 발견했다. 그렇지만 그람시에게 이 지식인은 “종래의 통치자라는

특정 계급에서 새로운 평등주의 사회 질서를 형성하는 데 관심을 갖는 사회 집단, 곧 노동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집단이라는 역사적 영역의 개념”(233쪽)을 형성하기 위해서 활동하는 자를 지시하

는 것이었다. 이들은 혁명 활동인 기동전(그람시가 제시한 혁명 투쟁의 전략과 전술 중 하나)을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고, 이들이 권력의 원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시사했

다.

저자가 그람시를 통해 지식인 활동가의 역할 모델을 중시했다면, 『페다고지』를 쓴 프레이리

의 관점을 통해서는 이러한 활동이 노동 계급 전체로 확장하기를 의도한다. 프레이리의 『페다고

교육과 커뮤니티

159

지』는 대개 교육학의 방법론으로 해석되고는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해석에 반대하며 “프레이리

의 페타고지는 진정한 의미의 혁명적 페다고지”(242쪽)이며, “하부 구조에서 억압받는 역사적 주

체인 개인의 해방”(244쪽)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즉 프레이리가 주장하는 페다고지의 목

적은 아래에서 시작하는 혁명을 발전시키는 것이며, 여기서 혁명은 “영적 해방뿐만 아니라 경제

적, 정치적, 물적 해방을 포함하는 의미에서 자유를 성취하는 영원한 혁명”(250쪽)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해방을 통해서 (미완의 기획인) ‘온전한 인간’을 지향할 수 있게 되고, 개인

을 넘어 인류를 사유하는 총체적 전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총체적 전망에 대한 프레이리의 견해에 저자는 깊이 공감하는데, 이 전망은 억눌린 자

들의 보편적 인간화를 실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간화는 단지 현재를 살고 있는 인

간만이 아니라 인류라는 역사적 시간, 인간이라는 보편적 의미를 확보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총체적 전망 아래서 억눌린 자의 해방을 위한 교육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교육은 ‘학교 교육’이라는 역사적인 한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분명히

다른 체제를 상상할 수 있는 것처럼 다른 교육을 상상할 수 있다. 현재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한에

서, 그리고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한에서 오늘의 교육은 혁명의 미래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

다.

160

장승연

미술대학 교육? 과정, 대화,

다양성을 존중할 때공성훈 인터뷰

‘미술과 교육’은 미술계의 중요한 화두이다. 그리고 이는 보통 감상자에게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시와 더불어 다양한 연령대의 미술 관람객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마련하

는 것은 이제 하나의 기본 구성틀처럼 보편적인 제도가 되었다. 에듀케이터, 도슨트 등 미술과 교

육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전문인들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러나 지금, 이 인터뷰는 다른 포커스에서 ‘미술과 교육’이라는 화두에 접근해볼까 한다. 바

로 작가가 되기 위해 미술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교수(작가) 사이에서 생각

해 볼 ‘미술과 교육’의 문제이다. 미술이라는 예술 장르의 특성상, 미술대학은 다른 학과 전공에

비해 특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작가 양성을 위한 요람으로서 미술대학이 노력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혹은 꼭 미술대학의 목표는 작가 양성에만 초점을 두어야 할까? 예술적 ‘창의성’이란

대학 강의를 통해 양성될 수 있는 부분일까? 예술을 “가르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 있다면 무엇

일까? 작가이자 선생으로서 각기 두 일을 병행하고 있는 미술대학 교수들의 생각은? 이와 같은

질문들을 토대로,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수상 작가이자 성균관대학교 예술대

학 미술학과에 재직 중인 공성훈 교수와 대화를 나눴다.

재직하고 있는 미술대학 구성과 현재 맡고 있는 수업은?

현재 성균관대 예술학부는 미술학과, 디자인과, 영상학과, 무용학과, 연기예술학과, 의상학과

로 구성되어 있다. 기존 미술교육과에서 1998년 예술학부로 통합되었고, 이후 의상학과까지 포

함되었다. 현재 미술학과는 동양화전공, 서양화전공으로 나뉜다. 서양화 전공 교수로서 이번 학

기에는 1학년, 3학년 그리고 대학원 학생들의 실기 수업을 맡고 있다.

교육과 커뮤니티

161

1학년 학생들의 수업 진행방식이 궁금하다. 바로 직전까지 입시미술을 배우던 학생들인 만큼

미술에 대한 시야를 넓혀 줄 특별한 수업이 필요할 것 같다.

특별한 방식이 있다기보다는, 과제를 내주고 그 과제 결과물에 대한 크리틱을 진행한다. 작업

은 과제로 별도의 시간에 하도록 하고, 수업시간에는 이야기를 많이 나누려고 한다. 학생들이 의

외로 ‘내가 왜 이 작업을 하는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잘 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하고

표현하는 훈련을 시키려고 노력한다. 아직 쉽진 않은 것 같다. 예전에 비하면 학생들의 자발성이

나 적극성, 능동적인 태도도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다. 요즘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보면, 혼자

서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훈련이 잘 안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대학 미술 수업의 크리틱을 중요시하는 이유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을 부탁한다.

우리 사회에서 미술을 두고 대체로 어떤 스타일이나 감각만을 보는 것 같다. 물론 스타일, 감

각 등이 미술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고, 원래 미술이란 것이 기본적으로는 사적인 작업인 점은

맞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미술은 분명 사회 제도 안에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미술대학,

갤러리 같은 사회제도와의 관련을 무시할 수도 없다. 조금 과장하자면, 미술은 하나의 사회적 사

건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미술이란 단순히 감정을 토해내는 표현에 머무는 게 아니고, 그저 잘 그리고 잘 만들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무언가 이야기할 게 있으니 대학과정을 통해 교육을 하는 것 아닌가? 내 생각에는

작가는 나름대로 비평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이전의 미술에 대하여 나름대로 나의

비평적인 시각, 독자적인 입장을 갖기란 비평적인 태도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능하면 학생들이

작가로서의 열정과 함께 비평적인 냉철한 안목을 동시에 가져서 현장에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

다. 그것이 미술대학에서 해야 하는 교육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이론 과목을 통해서도 필요하고,

실기 수업에서의 꾸준한 대화와 크리틱을 통해 이뤄가고자 한다.

그럴 경우, 학생들이 너무 개념을 위한 미술을 하게 되는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까?

중요한 건 ‘정도’의 문제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 그런 훈련을 받아본 적 없는 어린 학생들에게

과도하게 논리를 앞세우고 크리틱을 앞세울 때 자발적인 결정력을 잃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사

실 우리 같은 기성세대 작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어찌 보면, 논리적 비약이야말로 작가들의 특권

일지도 모른다. 칼날이 예리할수록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보푸라기들을 자꾸 없애버리려는 경향

이 있다. 사실은 때때로 명확하고 정확한 이해에서 작업이 나오는 게 아니라 엄청난 오해에서 작

업이 나올 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순간의 에너지들이 크리틱이나 이론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사라질지도 모르기에 균형과 정도를 늘 중요하게 염두에 둔다. 아직 학생이기 때문에 그런 점을

늘 우려하고 고민하고 있다.

162

대화 중심의 수업을 꾸준히 진행해 온 결과, 예상했던 만큼의 학생들의 반응과 결과를 느끼

는가?

그래도 내 생각엔, 우리 학생들이 ‘엉뚱한 소리’는 안하는 것 같다.(웃음) 어쨌든 작업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현상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자꾸 엉뚱한 얘기

를 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작가들이 대체로 어떤 발상을 하고 그것을 실제로 작품화, 시각

화 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다 보면, 정작 어느 순간 처음 발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있다. 사실 발상의 단계는 아주 단순한 상태에서 시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프로

세스가 한창 진행되어 작품이 된 상태에서 여전히 ‘발상’에 대한 얘기만 한다면 그것이 바로 엉뚱

한 소리다. 실제로 프로세스 속에서 끼어드는 수많은 변수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 물리적 조건들,

생각의 변경과 변화 같은. 실제로 작품을 만들고 나면 첫 발상과는 굉장히 떨어져 있게 된다. 중

요한 점은 ‘발상’이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의를 통한 교육의 중요성만큼, 졸업 이후 미술 현장에 학생들이 진출할 수 있도록 유도해주

는 것 또한 미술대학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본다. 다른 학과는 취업 등으로 자연스럽게 학생들이

사회로 나아가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에 비해 미대는 조금 상황이 특수하기 때문이다.

전시, 신진작가 발굴 프로젝트 같은 그런 기본적인 사항에 대한 이야기 말고 조금 넓은 시각

으로 설명하자면, 우리 학과는 ‘크로스 리스팅’ 제도를 권장하고 있다. 다른 학과의 전공수업 중

지정된 몇 개의 수업을 수강하면 미술학과 전공 수업을 수강한 것으로 인정해주는 제도다. 예를

들면 같은 예술대학 수업은 물론, 불문학과의 프랑스 예술론 같은 수업, 심지어 공대 수업도 전공

수업으로 인정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시스템에 의한 부작용도 있다. 정작 학과 수업에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문제도 결국 각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하는 것이고, 미대에

들어온 학생들이 꼭 모두 작가가 되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는 환경도 아닌 현실을 반영해야 한

다. 자신의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인 안목과 관심분야를 알아가는 시기가 대학생 시절인 만큼 학

생들이 다양한 경험을 넓힐 수 있도록 독려한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다른 공부도 얼마든지 가

능하며, 우리학교의 경우 복수전공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많이 하고 있다.

미술대학의 시각이나 분위기가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전에는 작가로 성장하는 것만

을 우선시하는 분위기가 분명 있었고, 복수전공을 반대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고 본다.

그때도 마찬가지지만, 복수전공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단 복수전공을 하면 두 배로

공부를 해야 하는데, 각각 절반씩만 공부를 하는 게 문제인 것이다. 종합대학에 속해 있는 미술대

학으로서 취할 수 있는 역할이란 바로 그런 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학교의 경우에는 다

른 학문적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장점으로 살리는 게 좋을 것 같다.

미술대학 학생들의 경우 보통 어떤 과를 복수전공하는 추세인가?

교육과 커뮤니티

163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성균관대의 경우는 매우 다양하다. 디자인과와 영상학과가 가장 일반

적이고, 철학과 복수전공이나 심지어 전에는 법학과 복수전공하는 학생도 있었다. 다소 엉뚱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당시 학생에게 행정고시를 준비해서 문화부에 들어가면 또 그렇게 미술계에

서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런데 이후로 소식은 못 들었다.(웃음) 미술대학의

가장 큰 교육 목적은 작가 양성이 맞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다 작가로 성장할 수는 없고 또 그런

환경도 아닌 만큼, 학생들의 다양성을 열어둘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하는 것 또한 학교의 역할이

라고 생각한다.

학교에 교수로 재직 중인 작가들의 경우, 작가로서의 개인 활동과 미술대학 교수직을 병행하

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많이 이야기한다.

무엇보다 작업에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한 게 문제다. 아무래도 학교에 속해

있는 만큼 행정적인 일을 위한 소모가 많기 때문에 어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내가 성균관대에

처음 온 2001년은 미술교육과가 예술학부 미술학과로 바뀐 지 3년 정도 지났을 때였다. 당시 행

정적으로 진행해야 할 일이 매우 많았고, 학과 커리큘럼도 미술교육과 시절 그대로여서 전부 수

정했다. 이후 실기실 및 공간, 학교 내 갤러리 리모델링도 진행하는 듯 정말 바빴다. 나의 경우는

그렇게 시스템이 개편되고 10년 이상 지나고 나니, 이제 조금 시간을 조율하고 각각 병행하는 게

나아진 것 같다.

다른 미술대학 교수들과도 활발히 교류를 하는 편인가?

이전에는 대학미술협의회 활동도 하고 다른 학교 교수들과 만날 기회가 많았는데, 확실히 최

근에는 기회가 적어진 것 같다. 물론 만나더라도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게 쉽지는 않다. 각

교수들도 작가로 활동하는 이들이고, 미술이라는 것과 제도, 미술교육에 대해서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또한 서로 상반되는 의견일 때도 많다. 따라서 잘못하면 남의

입장에 대한 공격이 될 수도 있고.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

요즘 한창 미술대학 졸업 전시 시즌이다. 10년 이상 학교에 재직하면서 졸업 전시의 변화 양상을

느낀다면 어떤 부분들을 꼽을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크게 변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기본적인 틀을 바꾸기란 쉽진 않아 보인

다. 단, 졸업 작품 심사는 더욱 엄격해졌다. 교수들의 생각에 단순히 작품의 수준이 좋지 않아서

탈락시키는 것은 아니다. 선생으로서 보고 싶은 것은 학생들이 자기 작품을 진행하는 과정이다.

발상으로부터 작업 개념의 변화들을 어떻게 모색해 가는가, 어떤 재료를 시도하고 실험하고 해결

점을 찾는가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야 하는데, 우리 학교의 경우는 그 과정 전체를 보고 평

가를 한다. 그 과정이 나태할 때 심사에서 떨어뜨린다. 결과물만 보는 심사를 지양한다. 이게 바

164

로 미술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 아닌가 싶다.

미술대학 교육이 추구해야 할 근본적인 방향에 대하여 생각하는 점이 있다면?

예전에 학과 커리큘럼을 바꿀 때 생각했던 게 있다. 미술대학에는 크게 세 개의 공간이 있어

야 한다. 하나는 워크룸이다. 바로 실제 작업을 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기본 실기실 외에도 컴

퓨터실, 목공실, 금속실 같은 전문적인 랩들을 마련하면 좋겠지만 아직 현실적인 여건상 어려운

실정이다. 또 하나는 쇼룸이다. 정식 갤러리뿐만 아니라 과제전을 한다던가, 혹은 학생들이 언제

든지 자발적으로 작품을 디스플레이할 수 있는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토크룸, 즉 작업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다. 토크룸의 경우는 실제 물리적인 공간만을 의

미하지 않는다. 하나의 프로그램으로서 수업 이외의 크리틱 시간을 공개적으로 갖춰야 한다. 우

리 학교의 경우는 4학년생들의 크리틱을 매우 중요시한다. 외부에서 작가, 평론가들을 초청해 공

개적으로 진행한다. 사실 학생-교수, 작가, 평론가 간의 대화뿐만 아니라, 선생님들 사이의 대화

의 창구를 마련한다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회이다. 각 선생님들이 미술에 대해 서로 어떤 태

도와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갖춰야할 중

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또한 작가 초청 세미나를 마련하는 등 공개 프로그램을 자주 개설하여 학

생들과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제도적으로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긴 인터뷰에 감사드린다.

공성훈

1965년 인천 출생. 서울대 미술대학 서양화과, 서울산업대 전자공학과 및 서울대 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1991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국내외 주요 기획전 및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최근 2015년 1월 11일까지 천안 아라리오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

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을 수상했다. 2001년부터 성균관대학교 예술대학 미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교육과 커뮤니티

165

장혜진

큐레이터: 양성하거나 육성하거나

교육하거나

직업(job)으로 큐레이터를 논하는 것은 이제는 진부하고, 다만 큐레이터의 역할(role)은 분명

논의의 대상으로 남아있다.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을 큐레이터라고 하는 것인지 애매모호한

상황이 많은데, 전시/프로젝트에서는 참여작가나 디자이너, 번역자 등이 하는 일을 제외한 역할

을 한다. 과연 이것을 큐레이터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할까하는 질문부터, 전

시나 프로젝트에서 큐레이터가 큐레이팅한 것이 무엇인지,큐레이터로 어떤 선택과 판단을했는

지, 행정을 집행하거나 전시 전반의 과정이나

특정 참여작가, 작품을 실행에 이르기까지 코디

네이터 역할에만 그친 것은 아니었는지에 이르

기까지여러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최소한의 큐레이팅이 없

는 전시 혹은 큐레이터가 없는 전시는 여러 의

미에서 처참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물론, 지금 이 글은 큐레이터의 역할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는것이 아니라 지금 국내

에서 이뤄지고 있는 여러 큐레이터 교육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목적이다. 본격적으로 글의 원래

방향에 맞춰가기전에, 글을 쓰는 본인 또한 큐

레이터로 일하며 ‘큐레이터’와 ‘교육’을 눈앞에

두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정리되지 않는 복잡한

166

심경을 다소 두서가 없더라도 먼저 쓰고 싶었

다.

몇 년 사이 큐레이팅을 배우거나 큐레이터

가 되기 위해 국내에서 미술 관련 학과를 졸업

한 사람들이 유학을 떠난 경우가 많다. 큐레토

리얼 스터디(curatorial studies)가 정규 과정

으로 편성된 영미권과 유럽의 대학에 많은 한국

유학생이 있고, 학정규 과정은 아니지만, 큐레

이터 교육에 초점을 맞춘 1-2년 과정의 코스(네

덜란드의 De Appel 등) 역시 꽤 인기가 있었다.

그만큼 국내에는 큐레토리얼한 어떤 것을 학습

할 수 있는 과정이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큐

레이터가 서서히 직업으로 분류되는 분위기와

함께 큐레이터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도 증

가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자신을 큐레이터라

생각하면서도 큐레이터로서 정확히 무엇을 해

야 하는지, 큐레이터로 일하고는 싶은데 무엇

을/어디에서 배워야 하는지 잘몰랐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각 대학의 미술사학과, 미학과, 미

술이론과,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하고 현장으로

나왔다. 이 졸업생들은 국공립 미술관, 사립 미

술관, 갤러리, 대안공간 등 기관에서 일을 시작

하며 이미 기관에서근무 중인 큐레이터의 역할

을 보조하거나, 큐레이터 비슷한 일을 하거나,

큐레이터가 되었다. 자의적으로 기관 밖에서 활

동하거나 이따금 근로 계약이 종료될 때마다 독

립 큐레이터로 일하기도 한다.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 (GBICC,

Gwangju BiennaleInternational Curator

Course)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국내에도 서서

교육과 커뮤니티

167

히 큐레이터 교육과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광주비엔날레재단은 2009년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를 시작해 매년 국내외 신진 큐레이터 중25명 내외의 참여자를 모집하고 선정했

다. 큐레이터 코스의 디렉터는 국내외 유명 큐레이터 한 명을 선정하고, 해당년도 비엔날레 디렉

터, 큐레이터를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만들어 국내외 참여자들이 강연을 듣고, 주제에 따라 발표

하고, 국내 각 지역 미술기관을 방문하는 형식이다. 매 코스는 1개월 과정으로 운영되며, 참여자

들은 비엔날레를 만드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관찰하거나 어느 정도 참여해 볼 수도 있다. 약 한 달

이라는 짧은 기간에 실행되는데 비해 광주비엔날레의 규모가 크다보니 스스로 “국제 기획자 양

성소”라 표현하듯 각국에서 이미 큐레이팅 활동을 시작한 참여자들과 디렉터/강연자로 참여하는

국내외 유명 큐레이터과의 네트워크 형성이 교육과정의 여러 목표 가운데 하나인 듯 보였다. 여

타 큐레토리얼 코스에 비해 재미있는 것은 ‘누가 강의자로 초청되어 참여자들을 가르쳤는지’는

매 과정마다 보도자료를 통해 상세히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프로그램의 수혜자이자 참

여자가 누구였는지는 어느 해에도 분명히 나와있지 않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 (DCW, DOOSAN Curator Workshop)

두산갤러리는 2009년 신진 작가 지원을 위한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2011년에는 신진 큐레

이터를 양성하기 위한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몇 개

의 큐레토리얼 과정 가운데 프로그램의 목적이 가장 간단명료하며, 두산갤러리 웹사이트에서과

거부터 현재까지 매해 과정에 선정된 참여자들이 누구인지 짧은 프로필과 함께 살펴볼 수도 있

다.

매해 3명의 신진 큐레이터를 참여자로 선정하고, 정기적으로 워크숍, 세미나를 진행한 뒤 이

들이 ’공동’으로 기획한 전시를 다음 해 1월에 워크숍의 결과물로 내어놓는다. 그간 ”파동”(2012,

강소정, 김수영, 조은비 기획), ”다시-쓰기”(2013, 김소영, 윤민화, 최다영 기획), ”본업: 생활하는

예술가”(2014, 이성희, 장순강, 홍이지 기획)가 워크숍 보고전 격인 전시로 나왔는데, 두산갤러리

는 2012년 워크숍까지 서울과 뉴욕 두 군데에서 이 전시를 열었고, 2013년 워크숍부터는 두산

갤러리 서울에서만 전시를 지원한다. 2014년 제4회 워크숍에는 김소람, 박보람,박은지가 참여자

로 선정되어 2015년 1월에 열릴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두산갤러리의 취지는 명확하다. 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신진 작가와 기획자를 양성하

는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상을 수여한다는 것. 두산큐레이터 워크샵 역시 매해 큰 변동없이 안

정적으로 운영 중이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은 참여자들이 ‘공동 기획’으로 전시를 만든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러

현장의 예에서도 찾을 수있지만, 공동이 기획하는 전시는 참 쉽지 않다. 세 명이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기 위한 협의, 한정된 예산 안에서 각자 전시의 주제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작가와 작품

168

을 선정하기 위한 합의, 전시 공간을 구성하기 위한 논의 등 무한한 타협과 협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 워크숍 (IAS Curator Workshop)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프로그램으로, 2012년 “신진 큐레이터 양성 프로그램”으로 시작했고

2014년 두 번째 과정부터 “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 워크숍“으로 명칭을 변경했다. 한국문화예술

위원회 산하 아르코미술관, 인사미술공간 등에서는 이외에도 ”아르코미술관 신진큐레이터 인턴

십 프로그램“을 통해 큐레이팅 인력을 고려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또한, 2005년부터 ”전문가

성장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신진작가와 큐레이터 등 시각예술전문가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

설한 바있다. 글에서 언급하는 국내 프로그램 중 가장 오래 되었는데, 국공립 기관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임에도 광주비엔날레 국제 큐레이터 코스와 마찬가지로 그간의 과정을 정리하거나 소개

하고있지 않다.

다행히 2014년부터는 ”인미공 워크숍“이라는 웹페이지를 개설해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과정 역시 신진 큐레이터가참여대상이며 이들이 제출하는 전시 기획안 혹은 전시 서평을 통해 5

명의 참여자를 선정한다. 참여자들로 팀을 구성하고, 전문가 특강, 읽기/연구/글쓰기 워크숍 등

의 커리큘럼을통해 각자 전시 주제와 작가 조사, 연구를 수행하며 기획안을 만든다. 최종 평가를

통해 기획안을 선정하고 다음 해 전시로 만들도록 한다.

워크숍의 결과를 전시로 만드는 것은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과 동일한 형식이지만, 과정에는

큰 차이가 있다. 두산 큐레이터 워크샵은 세 명의 참여자가 하나의 ‘팀’을 이루게 하는 반면, 인사

미술공간 큐레이터 워크숍은 선정된 다수의 참여자들이 자체적으로 여러 팀을 구성하게 한다. 전

자는 공동으로 하나의 전시를 결과로 만들며, 후자는 참여자 선정 과정 이후 또 한 번의 내부에서

기획안 경합(competition)을 통과한 팀이 전시를 만들 기회를 갖는다. 인미공 큐레이터 워크숍

은 일부 강의의 경우 공개 강연으로 진행하기도 한다. 2015년 프로그램은 올해와 다른 형식을 취

할 예정이라고 한다.

큐레이팅 스쿨 서울 (CSS, Curating School Seoul)

앞서 소개한 프로그램들은 국공립 및 사립 기관이 주도하여 운영했다면, “큐레이팅 스쿨 서

울”은 개별적으로 활동하는 세 명의 큐레이터가 주축을 이뤄 운영한 프로그램이다. 현재 시청각

을 운영 중인 현시원,워크온워크의 박재용, 장혜진(본인) 이렇게 세 명의 큐레이터가 2012년부

터 큐레이팅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고, 2013년 예술인복지재단의 지원으로 프로그램을 운

영했다. 경직된 어깨에 힘을 빼고 가볍에 움직이자는 태도로 시작하였지만 이름은 큐레이터 워크

숍, 코스가 아닌 마치 정규 학교처럼 일면 진지한 ‘큐레이팅 스쿨’로 정했다.

교육과 커뮤니티

169

이 과정은 큐레이터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큐레이팅이라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었다.

큐레이팅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의심하며, 미술에 국한하지 않고 무엇

인가 일어나도록 준비하고 기획하는 사람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10명 안팎의 참여자를

선정하였는데 전시 기획자, 영화 관련 프로그래머, 사서, 디자이너, 작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총 10회 진행한 수업 중 일부는 공개강연으로 진행하여 프로그램 참여자 외에도

수강이 가능했다.

‘0학기’라는 이름은 추후 프로그램을 본격적으로 운영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정했다. 3개월

과정으로, 동시대 미술과 닿아있는 다양한 세대의 작가, 큐레이터들과 함께 큐레이팅의 방식과

큐레이터로서 태도에 대해 함께 이야기했다. 현장 수업의 형식으로 특정한 지역을 방문하거나 참

여자들이 주체적으로 선정해 탐구하는 야외수업, 야간 현장방문도 있었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공립 및 사립 기관 프로그램과 달리 큐레이팅 스쿨 서울은 자체적

재원 마련의 문제, 운영자들의 활동과 일정에 따라 운영이 유동적일 수 밖에 없는 점을 가지고

있다. 2013년 ‘0학기’ 이후 2014년에는 이러한 이유들로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없었다. 현재,

2015년에 진행할 ‘1학기’를 위해 본격적으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2014 아시아문화정보원 아카데미아티스트·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 (ACIA 2014 Artist and

Curator Study Program)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지금 국내 미술계(심지어 국외 미술계까지)의 뜨거운 감자가 아닐까.

이 거대하고 정체가 좀체 드러나지 않는 거대 사업 가운데 아시아문화정보원이 있다. 아시문화정

보원은 사업의 큰갈래 중 교육과 관련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며, 2015년 후반기 개관을 앞두고

몇 가지 시범 교육 사업을 시행했다. 세부적으로는 아티스트·큐레이터, 레지스트라, 아키비스트

교육 프로그램으로 큐레이터 외에도 전문성이 필요한 현장 인력을 위한 프로그램들이다.

같은 지역에서 열리는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 코스와 마찬가지로 외국인 신청자 역시 참여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아시아 국적이어야 한다. 파일럿 격으로 진행한 올해 프로그램은 국내

6-7명, 국외 3-4명의 작가, 큐레이터가 3주동안 합숙하며 진행했고, 아시아, 협업, 아티스트/큐

레이터의 위치, 탈식민, 전통, 아시아 등의 키워드를 강연, 워크숍, 발표와 현장 방문의 형식으로

탐구했다.

운영 측에서 올린 공고에서 프로그램 내용이 자세히 소개하지않아 많은 사람이 이 프로그램

의 정체를 궁금해 했다. 다행히 본인이 일하는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2014에 프로그램

참여자들이 방문하여 현장에서 초청된 작가, 큐레이터와 수업을 했기에 가까이에서 이 프로그램

을 관찰하고, 참여자들에게 직접 프로그램에 관해 들을 수 있었다.

이번 파일럿 프로그램의 경우 초청된 강연자를 중심으로 운영하기 보다는 비록 일시적인 첫

170

만남이지만 참여자들의 역할을 고루 분배하고 합숙을 진행해 밤낮없는 토론과 의견 교환이 이루

어졌다고 한다. 아시아 권역에서 활동하는작가, 큐레이터인 참여자들은 프로그램 종료 후 스스로

장기적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만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이 과정의 경우 시범 사업의 일종이었고, 2015년 하반기 아시아문화전당개관과 함께 본

격적으로 운영할 정보원의 교육 프로그램이 아직 준비 단계에 있으므로 지금은 판단을 내리기 보

다 당분간 유심히 지켜볼 수 밖에 없겠다.

광주비엔날레

국제큐레이터코스두산 큐레이터 워크샵

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

워크숍큐레이팅 스쿨 서울

아시아문화정보원

아카데미

아티스트·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

시행지역 광주 서울 서울 서울 광주

시작년도 2009 2011 2012 2013 2014

주관 광주비엔날레재단 두산갤러리 한국문화예술위원회현시원, 박재용, 장혜진

큐레이터

아시아문화개발원

정보원사업팀

사용언어 영어 한국어 한국어 한국어 영어

시행연도2009, 2010, 2011,

2012, 2013

2011, 2012, 2013.

20142012, 2014 2013 2014

지속여부 미정 2015년 예정 2015년 예정 2015년 예정 예정

참여자 선발 국내외 대상, 25명 내외

국내 대상

실무경력 2년 이상의

신진기획자 3명

국내 대상, 신진 큐레이터

5명 이내

창의적인 사고를 통한

성장이 기대되는

예비기획자, 현재 재직자,

대학원생 지원가능

(40세미만)

국내 대상, 10명 내외 선발

외 프로그램별 신청자 최대

30명

국내외 대상, 10명

이내(한국인 6~7명,

아시아 국적의 외국인

수강생 3~4명)

교육기간 1개월 10개월 7개월 3개월 3주

형식강연, 국내 기관 및 전시

방문강연, 워크숍, 연구 강연, 워크숍, 연구 강연, 워크숍, 현장 방문 강연, 워크숍, 현장 방문

결과보고 없음 공동 기획 전시 기획안 선정 후 전시 글쓰기 없음

글에서 언급한 과정들 외에도 각 기관에서 운영하는 자체적인 과정이나 예술인복지재단, 예

술경영지원센터 등의 지원을 받은 크고 작은 큐레이터 교육 과정이 생겨났다. 매달 여기저기에서

열리는큐레이터를 위한 강연이나 프로그램을 미리 정리해서 알아두지 않는다면 이런 프로그램이

언제 있었나 싶을 만큼 그 수가 많다. 어떤 프로그램들은 신진 큐레이터를 위해 국내외 유명 큐레

이터와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는 장을 열었다는 취지를 프로그램의 미션으로 세우기도 한다. 열

띤 강연 끝 저녁 무렵 네트워킹 파티까지. 영화 <E.T.>의 한 장면처럼 저 큐레이터와 내가 손가락

을 조용히 맞대는 상상을 해본다. 또는 컴퓨터가 시스템 명령어를 말하듯 ‘네트워크에 성공적으

로 접속하였습니다.’ 라던가.

교육과 커뮤니티

171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한 큐레이터를 위한 교육 과정들은 국내 미술계가 큐레이터라는 역할,

큐레이팅이라는 행위 자체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했다는 반증이라 생각한다. 지금까지

열린 여러 큐레이터 교육 프로그램을유심히 지켜보는 사람으로서, ‘큐레이팅 스쿨 서울’을 시작

하고 큐레토리얼한 어떤 것을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큐레이터의 입장에서

막연히 이런 프로그램들이 열렸다는 사실 자체를 반갑고 고맙게만 생각하기는 힘들다. 2009년

이후 본격적으로 많은 교육 과정이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런 과정을 수료

했다고 하여 큐레이터로 인증 혹은 인정을받는 것도 아닌데. 큐레이팅 코스를 수료하거나 비공식

적인 교육과정을 통과하는 것이 큐레이터가 되기 위한 ‘관문’은 아니다.

대학이라는 정규 교육 과정에서도 아주 낮은 비율로 전시 기획 실습이있기는 하지만, 현장에

서 일할 전문적인 인력을 양성하기에는 턱없이부족하다. 그렇지만 지금도 국내 미술 관련 학과

학생들은 적지 않은 수가 큐레이터가 되기를 꿈꾸고, 저 공간에서 이 작가와 함께 전시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졸업 직후 각종 미술 현장에서 인턴으로 경력을 시작하며 난생 처음으로 전시

현장에 들어가 큐레이터가 하는 온갖 일을 큐레이팅이라 생각하며 배우게 된다. 큐레이터와 큐레

이팅에 관해 잘 짜여진 교육 과정을 통해 학습한 적이 없더라도 그렇게 서서히 스스로를큐레이터

로 임명하기 시작한다.

기존의 신진 큐레이터 프로그램은 현장에서 2-3년 일한 경력이 있는 큐레이터로 선정 기준

을 제한한 경우가 많다. 현장에서 일할 신진 큐레이터를 위한 프로그램이라면 지금의 선정 기준

은 오히려 경력이 전혀 없는 졸업 직후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대폭 변경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큐레이터를 지망하는 관련 학과 졸업생과 현장 큐레이터 사이에 무엇이 있는가 질문해보면, 지금

의 답은 미술관 인턴뿐이다. 이것은 정규 교육 과정에서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지만 지금 시행되

고 있는 프로그램들이 대상과 목적을 수정한다면 개선할 수 있는 문제라 생각한다.

신진 큐레이터를 새롭게 정의하고 접근하여 교육 과정을 재구성하는 것과 함께 필요한 것은

이미 현장에 있는 수많은 큐레이터를 위한 재교육 과정이다. 이들은 현장에서 실무를 수행하고,

때로 직접 전시 주제를 고민하고, 참여 작가와 작품을 선정하는 기획 단계부터 전시 설치와 도록

만들기, 철수까지 큐레이팅의 과정 전반을 주체적으로 수행한다. 지금의 큐레이터들은 대부분 현

장 경험을 통해 몸으로 큐레이팅을 익혔다. 국내 일부 대학 학과와 큐레이팅 과정이 있는 국외 대

학에서 큐레이팅을 배우는 경우, 이들이 받은 교육과 국내 실제 현장에서 일하는 것은 완전히 다

른 이야기다. 이런 상황에서, 직업인으로서 큐레이터는 매 전시나 프로젝트마다 다른 작가와 작

품을 마주하며 이를 실행하기까지, 혹은 실행 이후에도 작가와의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문제라

든가 현장에서 설치 문제 등 예상치못한 곤혹스러움에 처하곤 한다. 무엇보다, 큐레이터라는 직

업의 역할과 책임이 어디까지인지에 관해 많은 기관과 큐레이터, 혹은 큐레이터 사이에도 과연

큐레이터라는 직업과 이들이 수행하는 큐레이팅이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관해 너무나

172

다른 여러 생각이 존재하는 듯 하다.

이미 현장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는 많은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연 큐레이터란 어떤 일을 하

는 직업이며, 큐레이팅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혼자가 아닌 동료 큐레이터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

는 장이다. 그리고 전시나 프로젝트 기획에 있어 아주 기능적인 부분들, 공간 구성, 재료 파악, 프

로덕션,미디어 장비, 아카이브 등 현장에서 발생하는 실질적인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강연이 아닌 워크숍 형식의 실무 교육이 절실하다.

큐레이터를 양성/육성한다는 말은 문화를 융성하겠다는 정부의 공언만큼이나 공허하다. 이

런 표면적 수사를 과감히 걷어내고 큐레이터에게 정말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자.

한 해를 마무리하느라 바쁜 동료 큐레이터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며.

교육과 커뮤니티

173

류혜민

가르침 없이 배우는 것은 가능한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방법에 대한 다소 황당한 성공 실화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

> 첫머리에 조세프 자코토의 경험으로 소개되어 있다. 자코토는 당시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던 벨

기에의 한 학교에서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불문학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네덜란드어를

하지 못했던 자코토는 학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이런 난감한 상황에서 자코토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 번역본으로 출간된<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책을 학생들에게 주고 어떤

가르침 없이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라고 주문했다. 그는 학생들이 책의 제1장 반 정도까지 익힌

것을 쉼 없이 되풀이하게 했고, 나머지 부분은 이야기할 수 있을 만큼만 읽으라고 시켰다. 자코토

는 당연히 끔찍한 결과를 예상했지만 예상과 반대로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학생들이 단지 번역문

만을 통해서 스스로 프랑스어를 이해하고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우연한 사건은 자코토의 교육철학을 새로운 토대 위에 가져다 놓게 된다. 먼저 습득한 지

식을 학생에게 전달하는 역할, 어떻게 하면 더 잘 설명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지금까지의 교사의 역

할이 완전히 전복되어 이해되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자코토는 교사의 지능을 어떤 방식으로든 학

생에게 전달하지 않고, 오로지 책의 지능과 학생의 의지가 연결되는 ,교사와 학생 사이에는 의지

와 의지 관계만이 성립되는 관계로 이 사건을 정리했다. 이제 그에게 설명은교육자의 행위이기에

앞서, 교육학이 만든 신화였다.

20세기 초 프랑스에서 셀레스탱 프레네가 행했던 공교육 개혁을 살펴보면 이러한 개념이 프

랑스에서 어떻게 실천되어오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프레네가 제시하는 교육에서 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앎의 과정에 동행하는 협력자로서 규정되고, 학생들은 자신의 삶과 경험

에 기초해 스스로 학습을 조직하는 방식을 배운다. 프레네는 자신이 제시한 교육법에 대한 어떠

174

한 규정서도 만들지 않았고, 프레네 방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프레네의 경험, 프레

네의 질문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프랑스에서 프레네 교육을 택하고 있는 교사들은 연대를 통

해 모든 자료와 철학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끊임없이 확대되고 변화하는 살아있는 유기체 같은

교육 방법을 고민해나간다.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이하 리트머스)에서 올해 3년째 진행해온 바벨 디스코스(Babel

Discourse)는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에 소개된 자코토의 일화를 참조한 언어 중심의 공

동체 실험이다. 내국인과 외국인이 함께 아시아권 언어 (태국, 인도네시아, 네팔, 베트남, 중국,

러시아 등)를 학습하는 공동체를 구성했고, 원곡동 레스토랑 요리사, 한국으로 이주해 온 중국 친

구, 인도네시아에서 유학 온 무용가등이 각 팀의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리트머스가 위치한 경기

도 안산시원곡동은 거주민의 약 80%가 외국인으로 국내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이 밀집되어 있는

곳으로 다양한 언어가 자연스럽게 공존하여 쓰이고 있는데, 중국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인도네

시아어, 네팔어, 타이어 등의 각기 다른 문자로 된 간판이 거리에 즐비해 있다. 언어를 중심으로

한 바벨 디스코스의 시작은 이주민들에게 한국어를 배우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언어를

배움으로써 자연스러운 유대관계를 형성하고자 하는 취지였다. 그렇지만 결과를 먼저 이야기하

면 바벨 디스코스 참여자 중 일정 수준의 언어 실력에 도달한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각 언어별로

난이도 차이가 있었고 개개인마다 언어에 대한 관심 정도가 달랐기 때문에 도출된 당연한 결과였

다.

그럼에도 바벨 디스코스가 3년간 유지됐던 이유는 참여자 모두가 이 낯설고 새로운 언어와

문화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여자들은 모두 그 언어에 대해 무지했으며 모르

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었고 앎에 대한 의지로 무장했다. 또한 낯설고 알 수 없는 언어라는 세계에

는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든지 접근 가능하고, 어떤 길이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누

구도 할 수 없었다. 서로가 서로의 무지한 스승이자 무지한 학생이 되는 이상한 상황에서 참여자

들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문화에 접속하는 서로 다른 엉뚱한 길이 만들어 졌다.

네팔팀의 경우 3년간 거의 팀원이 바뀌지 않은 유일한 팀이었는데 덕분에 언어에 대한 일정

수준의 접근과 네팔 문화를 일상으로 가지고 오려는 시도, 그리고 그 시도를 아티스틱한 방식으

로 풀어보려는 노력까지 이어졌다. 네팔팀에서 작년에 자체 제작한 <생존 네팔어> 핸드북은 지난

2년간 공부한 노하우가 그대로 담긴 책인데 네팔어의 경우 어순이 우리와 같아서 타 언어에 비해

배우기 쉽다는 장점이 있었다. 올해의 경우 ‘바벨탑 복원을 위한 자발적 임시 놀이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네팔 현지 작가들과 페이스북을 통해 일상에서 발견하는 이미지, 사운드, 문자를 교환

하면서서로 피드백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그 결과들은 내년 1월에 네팔에서 전시로 묶어낼

예정이다.

인도네시아어도 영어 알파벳을 문자로 사용하고 발음이 어렵지 않아서 다른 언어에 비해 쉽

교육과 커뮤니티

175

게 배울 수 있는 편이었고 언어 학습에서 실제

로 진전이 있는 팀 중 하나였다. 작년까지는 한

국에서 무용을 전공하는 무용가 선생님이 있었

는데 언어가 아닌 몸의 움직임으로 타인과의 접

점을 만들어내는 시도들이 있었고, 올해는 다시

새로운 선생님과 참여자들이 모여 언어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언어를 배우는 데 있어서 문자가 다르면 일

단 장벽이 생기고, 거기에 발음까지 어려우면 (

특히 성조가 있는 경우)많은 참여자들이 좌절을

느꼈는데 60여개의 자음과 모음이 있고 5가지

성조까지 있는 태국어의 경우가 그랬다. 성조가

있는 언어의 경우 노래를 통해서 접근하는 방법

을 택했는데 4가지 성조가 있는 중국어도 이런

방식을 택했다. 중국 노래방, 식당 등 중국의 언

어와 문화를 접하고 학습하기 좋은 공간들을 활

용했던 중국팀은 자주 갔던 노래방에서한해의

결과를 전시하기도 했다.

가르침 없이 배우는 것은 가능한가? 랑시

에르는 그의 책 <무지한 스승>에서 가르침 없

이 깨달음에 도달하는 평등교육을 제안하고 있

다. 자코토가 실현했던 가르침 없는 스승의 교

육체계를 바벨 디스코스에서 실험하는 과정은

랑시에르가 그의 책에서 언급하듯 “출구를 모르

는 숲을 가로지르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그 낯

선 숲을 가로지르는 경험은 실상 우리가 삶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상에 적용되는 것이다. 새롭고

낯선 시간에 마주친다는 것은 두렵기도 하고 서

투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체득하는 감각이 쌓

여 한 개인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반복적이고 일상화되어 있는 것을 벗어나

낯선 숲 사이로 뛰어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176

필요로 하는 일이다. 최근 많은 사람들이 공감

하는 드라마에서는 “회사는 전쟁터이고 밖은 지

옥”이라고 했다. 어떤 시스템 안에 있다면 비록

그 속이 전쟁터일지라도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매뉴얼이 있을 것이고 개인은 그 안에서 각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 묘

사되는 바깥은 지옥 같이 광활한 낯선 숲이 될

수도 있겠지만, 실은 자신의 호기심과 앎의 의

지로 만들어가는 삶을 실현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는 랑시에르와 자코토가 말하는 가르

침 없는 배움이 스스로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

로 낯선 숲을 가로지르게 하는 앎의 과정을 제

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벨 디스코스에서 지

난 3년간 실험했던 것은 그런 낯선 숲에 과감히

부딪치고 혼자 길을 찾다가 헤매기도 하고, 때로는 누군가와 연대하는 과정들이었다.

교육과 커뮤니티

177

김진주

문화생산자로 성장하기홈 워크스페이스 프로그램

중동과 이슬람이 등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주변에 몇이나 될까? 시리아

와 이스라엘 사이에 낀 레바논의 수도인 베이루트에 매일 3시간 씩 정전 사이클이 있다는 걸 아

는 사람이 미술계에 얼마나 될까? 문화/예술 기관에 대한 국가적 기금 지원은 상상도 안되며, 미

술이나 공부보다는 분쟁 속 생존기가 가까울 이런 곳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배울 수 있는 대안

적 교육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아슈칼 알완Ashkal Alwan이라는 비영리 미술 공간에서 운영하

는 홈 워크스페이스 프로그램Home Workspace Program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음은

올 1월 2일부터 8월 3일까지 베이루트에서 살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접한 이야기이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아슈칼 알완은 레바논조형예술가협회 정도로 번역될 영문 별칭을 달고있

다. 하지만 국가기관도, 지방자치단체 산하기관도 아니다. 작가로 시작해 기획 활동을 하는 크리

스틴 토메Christine Tohme가 1993년부터 약 20여년 넘게 디렉터로 일하며 다른 여러 기획자,

작가와 함께 운영해오고 있는 미술 공간이다. 상시로 운영하는 공간 하나 없이 작은 사무실 책상

과 이메일 계정 하나로 1995년 사나예 정원 프로젝트Sanayeh Garden Project를 시작해, 2000

년 함라 프로젝트Hamra Project까지 정원, 번화가 등 도시 공간에 역동적으로 개입하는 활동

을 벌여왔다. 이후 2002년부터 실천과 담론 중심의 홈 웍스 포럼Home Works Forum, 젊은 레

바논 작가의 영상 작업을 지원하는 비디오 웍스 Video Works까지 굵직한 일을 벌이면서도 딱히

큰 공간을 가지지 않았다.

포럼을 운영하다보니 컨템포러리 미술 씬이나 이에 대한 정규 교육이 미약한 베이루트 상황

에서 젊은 작가를 키워낼 배움의 장이 절실했다고 한다. 이 교육 프로그램을 준비하기 위해 크리

스틴 토메는 기획 활동을 한창 하다가 중도에 영국으로 유학을 갈 정도로 열성이었다. 그러던 중,

178

2011년이 되서야 작가, 기획자 교육 프로그램

인 HWP를 시작하면서 공부할 공간이 필요해

지금의 비교적 큰 공간을 마련했다.

홈 워크 스페이스라 불리며, 이제는 아슈

칼 알완이 기획하는 홈 웍스 시리즈의 중심이

된 이 공간은 베이루트 주변부, 시리아 난민들

이 주로 모이는 벼룩 시장 숙 알 하드Souk al

Ahad가 고가 도로 아래에서 주말마다 열리고

공장이 밀집한 지스르 엘 와티Jisr el Wati 에

위치한다. 운영하는 공간은 없었지만 사람들과

도시 중심에 가까웠던 이전과는 사뭇 달라진 조

건이다. 국제적 흐름에서 컨템포러리 아트를 하

고 있는 거의 유일한 동세대 동지인 베이루트

아트 센터Beirut Art Center가 바로 옆 건물에

자리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는 공장과 트럭의

소음만 가득할 뿐 행인도 찾아 오기 쉽지 않고

미술과는 별 상관 없어 보이는 동네에 입장한

것이다.

현장, 그리고 사람과 어떻게 다시 관계 맺을

수 있을까라는 숙제가 남았지만, 잃은 것 대신

다양하게 활용될 수 있는 넓은 공간을 얻었다.

AA의 후원자 중 한 명의 건축가가 소유한 건물

2층을 통채로 쓰는 이 공간은 과시보다는 필요

에 의해 짜여졌다. 사무실, 전시와 스크리닝 등

다목적으로 쓰이는 홀, 작업실로 쓸 수 있는 방

들, 냉장고와 개수대 등 부엌 시설, 커피와 간단

한 샌드위치를 파는 카페테리아와 소파, 시리아

에서 온 공간 관리인이 가족과 함께 사는 작은

방, 영상으로 현실에 반응했던 레바논 작가들의

작품 DVD를 소장한 도서관, 비디오 에디팅 룸,

강연장으로 알차게 구성되어 프로그램에 참여

자들이 자율적으로 공부하며 우정을 나누는 교

교육과 커뮤니티

179

육의 현장으로 알맞다.

프로그램 명칭에 두 해를 한 회에 같이 표

기하는 이유는 이 프로그램이 정말 학교처럼 가

을학기에 시작해 여름 방학 전에 끝나기 때문

이다. 그래서인지 HWP라는 이니셜이나 긴 정

식 명칭 대신 학교school라 간단히 줄여부르

곤 했다. 참여했던 2013-14는 종전에 두 차례

에 진행된 것과 운영 방식을 달리했다. 이전에

는 10~15명 정도의 작가 위주의 참여자를 선별

해 살 집과 작업 공간과 약간의 작업 지원비를

제공해 주는 반쯤은 레지던시로 운영되었다. 세

번째인 2013-14 또한 초기에는 마찬가지로 지

원자를 받았고, 추려진 후보들과 스카이페 미팅

을 진행했다. 지원 결과를 기다리던 시점 아슈

칼 알완 사무실에서 이메일이 한 통 왔다. 코스

모폴리탄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며, 듣고 싶은 모

두에게 프로그램을 열어주겠다는 HWP 프로그

램 교육 위원회의 결정을 알리는 글이었다. 그

래도 애초에 지원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난감한

소식이었다. 아슈칼 알완은 변경된 사항을 보완

해 인터뷰에 참여한 기존 지원자들이 그래도 베

이루트에 오고자 한다면 신청을 받아 심사 과정

을 거쳐 일정 정도의 생활비를 지원하겠다고 약

속했다.

운영 방침 변화 덕인지, 지도 교수인 안

톤 비도클레Anton Vidokle와 잘랄 투픽 Jalal

Toufic의 명성, 또는 베이루트에 대한 환상 때

문인지, 레바논 출신을 제외한 참여자 중 수적

으로 대다수는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독일,

프랑스 등지의 유럽 국가의 미술 대학의 단체

참여자들이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총 5개 챕

터가 진행되는 동안 매번 반복되는 모양새가

180

초기에는 7~80명의 참여자들이 각 챕터 초기

에 마련되는 공개 강연회를 꽉 매운다. 그리고

3~4주가 지나 중반으로 넘어가며 비교적 소규

모의 내부 워크숍이 이어지면서 참여자의 수가

2~30명 정도로 줄어든다. 이들이 마지막 챕터

까지 참여했던 고정 멤버인 셈인데, 단체 참여

자들 보다는 각자 이미 작가나 기획자로 활동하

며 프로그램의 교육 내용에 대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국적이나 지역적 배경 또

한 멕시코, 파키스탄 등으로 다양했다. 비 레바

논인들이 매 챕터 마지막에 남아있게 되다보니

이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유대 관계도 생겼다.

한편, 아슈칼 알완은 운영 목표에서도 밝히

고 있듯이 레바논과 그 이웃 아랍 지역에서 활

동하는 작가나 기획자들을 지원하는데 우선한

다. 인접국간의 정치적 관계로 입국 불허 국가

가 적용되는 상황에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라말라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영상작가, 프랑스 이중국적의 리비아인 도예작

가, 이집트 카이로에서 교육받고 활동하는 젊은

설치작가 등과 HWP를 통해 동료가 될 수 있었

다. 이렇게 어려움을 감수하고 이뤄내는 마이너

리티에 대한 우정은 ‘뜨거운 감자’ 같은 바로 지

금의 이슈를 모더니티나 역사 쓰기에 대한 비판

적인 지적 사유와 함께 담아내는 교육 내용을

가능하게 했다. 단적인 예로, 당시 한창 세계 뉴

스를 오르내리던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와 시리

아 내전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를 직접

만나 그들의 작업을 접할 수도 있었다.

여기까지 듣다보면 이런 의문이 당연이 들

것이다. 이것이 정말 컨템포러리 아트인가? 당

대성을 현장성으로 오독한 것 아닌가? 여행이니

교육과 커뮤니티

181

까 가능했던 경험이고 시각 아닌가? 베이루트에서 보고 듣고 배운 것을 곱씹을 때면 나 또한 당

연히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정답은 없겠지만, 크리스틴 토메가 스스로를 정의하고 동료를 부

르던 호칭을 떠올려본다. 그녀는 아티스트, 큐레이터 보다는 컬처럴 프랙티셔너cultural practi-

tioner를 즐겨 사용했다. 그 이유는 작가, 기획자의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직함보다 이들의 활동

에 구체적인 표현을 찾고자, 즉 예술을 포함한 넓은 범위에서 문화를 만들고 행동하는 사람이라

는 뜻에 가깝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는 작가나 기획자를 만들어내는 교육 프로그램이 그래도 레바논에 비하면 꽤 많은 편

이고 교육 내용도 충실하다. 포트폴리오나 전시 잘 만들기, 작업이나 프리젠테이션 수려하게 하

기, 성과물 쌓기나 경력 쇼핑 바구니 채우기에서 무엇이 지금 앞에 놓인 적지 않은 기회들을 다르

게 만들 수 있을까? 모두가 다 전쟁으로 망가진 사회 시스템에서 할 수 있는 혁명적 급진성을 실

천하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실험 정도는 시도해 볼 수 있는 것 아닌가 싶다. 크리스틴 토메 스스

로 밝혔듯이, 2013-14년의 HWP에서 운영 방침을 바꾼 것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그야말로

실험이었다. 그리고 아슈칼 알완은 이 실험에서 장점인 열린 구조를 다음번 HWP에서 체계를 갖

춰 형식으로 수용했다. HWP 2014-15는 공개 강좌와 내부 워크숍의 병행을 유지하면서, 고정

참여자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는 식으로 운영된다고 한다. 한국 상황으로 돌아가 보면 비교적 국

가적 영역이든 비영리 영역이든 공적, 제도적 틀이 갖춰진 편이다. 이 제도 안에서 내용을 실험해

보는 묘미를 찾아가는 교육 프로그램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예술과 노동

신현진

사례비만 받을까 인건비도 받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계약서를 쓰고 일하시나요?

예술가라는 직업: 샤먼, 천재, 전문가, 노동자

대중미술계- 제1회, <아티스트 스타> 제작발표회

184

신현진

사례비만 받을까 인건비도 받을까

그것이 문제로다

일단 사례비는 행사를 기획하는 주체가 참

여하는 이의 시간이 소중함을 인정하는 표시라

는 의미에서 숨을 쉬는 사람(예술인이 아니더라

도)이라면 누구나 마땅히 지급받아야 하는 권리

라고 생각한다. 예술기획에 있어서 사례비는 예

술과 노동의 문제가 아니다. 사례비를 줄 것인

가 혹은 말 것인가의 문제는 사례비를 어떻게,

얼마를 책정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우선되

는 문제이므로 인권의 문제라고 명명하고자 한

다. 왜냐면 우리는 사례비를 책정하는 문제가

나오면 예술가란 누구이며 누구에게 얼마를 주

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하면서 딜레마에

빠지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는 얼마를 주고 누구

에게는 얼마를 주어야 한다는 고민의 시작은

이미 명예, 혹은 자본이라는 재화의 (분배) 영역

으로 문제를 이동시킨다. 더구나 재화의 문제를

논하기 시작하면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추상

적인 영역에까지 환원되어 거슬러 올라가게 되

고 그러다 보면 사례비를 주어야 하는가 말아야

그림1. 세계 인권선언문 (UN, 1964)

http://udhr60.humanrights.go.kr/00_main/main.jsp

예술과 노동

185

하는가라는 문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논리의 함정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예술 이전에

인권의 문제가 우선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나는 아예 예술 바깥에서 해결책을 찾아야겠다는 입

장을 갖게 되었다.

사례비는 모두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치더라도 그것의 양적인 차별의 기준을 정하거나 혹은

인건비라는 이름을 달 수 있는가의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이 문제는, 아니, 그 딜레마란 예

술의 가치를 숫자로 계량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우리는 이 감성 영역의 계량화라는 문제를 놓

고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너무나도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제껏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보

건대 이 문제는 ‘예술의 자율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3가지의 입장으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부류의 논리는 모더니즘 미학과 정치적 아방가르드라는 이원론적인 입장이다.

이들의 입장은 모더니즘과 정치적 아방가르드의 대립의 차원에서 이미 수많은 논의가 진행되었

다. 양측은 각각 몇몇의 주제들이 포진된 논리가 있고 그 논리를 이루는 요소는 대부분 다른 측의

입장과 호환되지 않는다. 모더니즘이나 정치적 아방가르드나 모두 옛날이야기이지만 예술과 노

동의 상관관계를 규정하는 문제에 있어서 해하는 요소들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유효하

며 각 입장에 반론의 근거로 제시되기 때문에 교통정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 번째

부류가 모더니즘이나 정치적 아방가르드가 모두 아닌, 이원론으로부터 벗어나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필자는 인권이라는 이슈로부터 해결책을 찾기로 했다. 사실 이런

세 번째 부류의 입장은 안드레아 프레이져의 작품을 연구하면서 알게 된 그리고 내 동생이 준 가

르침이기도 하다. 필자의 동생이 말하기를 ‘결국, 권력과 자본으로만 가치 평가가 되거나 불평등

만은 피하자는 거잖아’ 했다. 여기에 얼마 전 시청각에서 개최된 ‘미술 생산자 모임’이 모순적인

발제를 포함했다 하더라도 ‘행동하는 이’에게 보내는 경의의 손뼉을 쳐야 하는 이유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예술이 자율성을 갖는다고 믿는다. 예술작품이란 언어로 합리화할 수 있는 영

역 너머의 가치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예술가의 천재성을 믿으며 타고

난 혹은 획득한 작가적 감각이 예술가가 아닌 사람과는 다른 우월한 가치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영역의 가치는 예술 ‘생산’을 ‘창작’으로 전환하는, 비이성적인 감성의 영역을 가시화하는

그림2. 천재의 이미지: 이중섭, 피카소, 백남준, 이상, 고흐

186

마술과 같은 추상적인 능력이기 때문에 양적으로 계산될 수 없다. 물론 반 이성적인, 감성의 영역

이라고 너무나 거칠게 단순화해버린 이 영역은 두 번째, 세 번째 부류의 입장에서도 인정되지만

이들은 이 감성적 능력을 소수의 천재만이 가진 능력으로 구분하지는 않고 개성에 가까운 가치로

간주한다. 감성의 영역을 가시화 하는 예술작품은 이데올로기와는 독립된 것이므로 어떤 내용을

기표화하였는가가 아니라 그 가치는 형식에서 찾아지며 찾아진 형식은 예술가의 오리지널리티를

대표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입장의 대표적인 입장은 형식주의(특히 모더니스트의 형식주의)에서

찾아진다.

언어화할 수 없는 감성의 영역은 말 그대로 언어화할 수 없거나 어려워서 사회적인 인정을 받

기 위해서 비평가에게 의존해 왔다. 비평가는 이 애매모호한 영역에 대한 자신의 해석을 마치 정

답 인양 설득할 학문적 지식과 언어 능력을 가진 이들이다. 그런데 비평가는 객관성을 가지는가?

비평가라는 위치는 예술단체, 예술의 감성적 영역을 이미 체득한 귀족계층 등과 함께 자율성의

개념을 옹호하는 근대의 미학을 기저로 하는 예술계를 형성한다. 비평가는 피에르 부르디외가 쓴

1970년대의 대부분의 저작이 비판하는 지배계급의 취향을 정당화해 온 예술계(Art-world)를 지

탱해주는 힘들의 하나이다. 첫 번째 부류는 이러한 예술계의 메커니즘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

부르디외의 『구별짓기』라는 책에 의하면) 예술계의 원동력이 되는 문화자본은 교육체계와 가정

을 통해 학습된다. 문화자본의 내용 중에서 예술의 감성적 영역을 이해하기란 학교교육 바깥에서

더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예술을 자주 접하는 환경의 가정, 귀족계급의 출신은 이러한 감성

적 영역의 지식을 더 쉽게 체득, 계승한다. 문화자본은 후천적으로도 학습 가능한데 비평가를 포

함한 이론가들이 예술을 논함에 있어 서로를 참조하면서 논리적 코드를 만들어가고 학습하게 하

지만 이것도 시간 투자가 필요하긴 마찬가지다. 부르디외는 원칙적으로는 예술적 체계, 코드가

여러 개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러한 다원적인 조건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구조 간의 경쟁

에서 정통성을 얻는 근거는 역사와 시간성을 겸비한 지배계급, 혹은 귀족계급의 문화가 항상 승

리해 왔다고 한다. 자신의 감성적 영역을 논리화 혹은 구조화할 수 없는 (혹은 그럴 시간적, 재정

적 능력이 되지 않는) 피지배계급은 학교에서 학습한 데로 논리화되고 구조적으로 단순하게 코드

화되어 제시된 의미구조를 받아들여 학습된 코드의 의미작용을 포함하지 않는 예술의 감성 영역

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 더구나 민중 계급은 미술의 감성적 영역을 이해하거나 담론을 비평적으

로 바라보는데 필수적인 오랜 시간을 투자할 수 없으므로 악순환은 계속된다.각각의 미적 논리구

조(믿음체계)는 담론의 장에서 경쟁이 일어나는데 이때 승리하는 담론이 당대의 예술을 규정한다

는 것이 ‘문화의 장(예술계)’가 가진 속성이다. 이 형상은 바꾸어 말하자면 이전 미술사에서의 수

많은 예술운동이나 정통의 취향에 반대하는 새로운 담론의 제시가 문화의 장에서 이루어지는 아

방가르드라는 이름의 경쟁(인정 게임)의 양상이다.

이러한 인정 게임의 메커니즘을 내면화한 첫 번째 부류는 자신의 예술세계가 정치적이거나

예술과 노동

187

혹은 팔리지 않는 개념미술이라고 하더라도 궁

극적으로 민중이나 피지배계급을 옹호하는 감

성이 아닌 자신의 예술체계의 승리를 추구하는

부류이다. 그리고 승리 이후에 얻어질 천재로

서나 정통적 계보의 후계자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자 한다. 혹은 인정 게임에서 승리를 쟁취

한 후에 가질 수 있는 권위나 권력 혹은 인지도

를 추구하는 부류이다. 이러한 속성의 이면이란

예술은 너무나 지고 지순한 영원한 진리의 영역

을 차지하므로 정치와 자본으로부터 독립되어

야 한다는 무목적성이라는 예술적 자율성의 논

리이다. 이들은 예술의 자율성의 기본 권리와

의무를 수행할 만큼의 재력이 있거나 혹은 천재

로 대변되는 영원불멸의, 이상적인 가치를 추구

하는데 함께 딸려오는 전제 조건을 받아들인다.

이들은 눈앞의 이익과 거리를 두려는 의지를 가

지고 가난(부자는 시간)을 감내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어찌하여 예술의 가치를 한낱 돈으로

환산하려 드는가”라며 개탄할 것이고, “학교는

눈 앞의 실리나 경제 논리로 운영되는 곳이 아

니라 지고지순한 학문을 하는 장소이다”, “언제

우리가 돈 때문에 예술 했어?”, “우리도 인턴할

때는 다 그렇게 힘들었어,” “(우리 예술단체에

서) 전시 기회를 갖는 것도 영광으로 알아야지

무슨 사례비까지 받으려고 하느냐, 30만원으로

재료비와 운송비까지 퉁 치자,” “이 바닥이 원래

다 그렇게 해”라는 말로 자신과 동료를 격려한

다. 그러나 예술이 지배계급의 취향인 경우에만

그 정통성이 인정되는 것이라면 가난한 자들은

김이 샐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역사적 아방가르드의 입장과 상당 부분 교집합을 가진다. 역사적 아방가르드

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미학적 아방가르드가 추구하는 자율성이란 비현실적인 이상을 추구하게

그림3. 피에르 부르디외 저, 최종철 역,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새물결, 2005.

그림4. 칼 안드레, The way north, south and west

(uncarved blocks). 1975 units:

each 30.5 x 30.5 x 91.5cm; 91.5 x 122.0 x 152.5cm

installed

188

함으로써 현실 사회의 부족함을 가리는 환영이다. 인간 상호 관계, 자연과 인간과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지는 모든 물질적, 경제적 관계의 총체는 그 사회의 물적 토대이다. 예술의 개념 또한 토대

의 반영이며 예술은 사회의 진보에 직접 참여해야 한다. 부르디외가 파악한 예술계의 논리를 잘

알고 비평적인 입장을 가지는 두 번째 부류는 예술계의 정치적인 담합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사

람들이다. 그리고 미학이 지배계층의 취향을 반영하고 경쟁과 같은 사회적 메커니즘 아래 작동

할 뿐이라면 그것의 자율성은 이미 사라진, 물질적인 토대를 반영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리

고 미학은 자본이나 상류계층의 취향에 의해 지배당해 왔다는 사실에서 자신들, 특히 80년대 이

후의 세대의 논점을 출발시킨다. 이들은 랑시에르처럼 피지배계급의 감각을 소외시킨 모더니즘

적 미학에 반기를 든다. 그들은 미학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닌 ‘미적인 것’ 자체가 새로이 정립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바디우에 동의한다면 ‘철학적인 사건’이 일어날 만한 새로운 사고에 의한

‘비미학’을 추구해야 할 것이라고 믿을 것이다. 여기에 화답하는 최근의 담론 또한 이들 (부르디

외, 랑시에르, 바디우 등등)의 논리를 민주주의의 실현으로까지 끌고간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

람이 예술가라는 모토나 관객이 참여해 예술작품을 완성시키는 관계미학적 예술 생산방식은 이

들의 논리에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은 악용되곤 한다. 그 사례는 공공미술과

프로젝트 형 사업이다. 기획의 시작부터가 민주주의가 아닌 파퓰리즘에서 시작되는 공공 미화와

주민 위로 프로그램적인 미술행사 기획들 허다할 뿐만 아니라 미학적인 완성도는 안중에도 없어

서 예술의 사회화나 민주화는 ‘하향 평준화’와 동의어가 된다. 그렇지만 감성적 영역이 평등하다

는 전제에서 출발한 이 두 번째 부류는 공공미화 프로젝트나 관계미학에서 미학적 수준을 말할

수 없고 해서도 안된다. 더 큰 문제는 원칙적으로는 이러한 의도에 동의하는 두 번째 부류의 작가

들에게 단체의 기획에 얼굴마담으로 참여하는 듯한 양상을 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두 번째 부류

의 작가는 이러한 프로젝트성 혹은 문화를 통한 재개발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오브제를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작 사진의 작업을 만들고 발전시키는데 드는 시간과 재정적인 투자보다 프

로그램을 진행하는 행정가로 둔갑된다. 그래서 작가들은 전시 기회라는 미끼로 인해 잉여노동을

무보수로 해주게 된다.

두 번째 부류는 지금껏 미적인 것의 우열을 가리는 기준자가 미학을 기준으로 하였기 때문

에 일단은 개인이 가진 미적인 가치를 평등하게 보겠다는 부류이다. 원칙적으로는 옳아 보인다.

그런데 감성이라는 추상적 영역의 가치를 평준화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러한

감성적 영역의 가치판단 기준자가 자본으로 대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1969년에서

1973년까지 활동한 예술인 노동자 협회 (Art Workers Coalition)의 칼 안드레와 로버트 모리스

와 같은 몇몇 작가는 이 정신을 받아들여 자신을 노동자와 동일시했다. 네오 아방가르드로 구분

되는 이들의 작품 제작 방식은 구매나 목수가 대신 제작하도록 하여 천부적인 재능을 대변하는

장인적인 손길을 무의미하게 만듦으로써 예술과 예술계 바깥 사이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던 전례

예술과 노동

189

이다. 이들은 철공소 직원들과 함께 총파업에 참여하였으며 노동자 유니폼을 즐겨 입었다. 2012

년 5월 1일 한국의 여러 예술가 그룹들도 ‘상상력에 밥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총파업에 참여

하였다. 자신의 상상력이 예술가가 아닌 사람과 똑같은 수위의 가치를 갖는다면 그들의 작업은

인건비로 환산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리스와 도날드 저드의 경우 이

미 판매된 자신들의 작업이 컬렉터(Giuseppe

Panza)가 허가한 Ace 갤러리에서의 전시를 위

해 자신들의 허가없이 재생산되려 하자 그 작

업은 자신들의 작업으로 간주하지 말라고 선언

한다. 이는 곧 천부적으로 타고난 자신의 손길

이 닿지 않은 재생산품에 자신만의 오리지널리

티가 묻어날 수 없다는 논리를 선택한 셈이고

그럼으로써 자신의 신념을 버리고 자신을 예술

계 안에 머물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궁극적인

목표가 예술계 안에서의 유리한 고지 확보인 안

드레와 모리스 같은 작가들은 첫 번째 부류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건의 이면은 그가 자신

의 저작권의 한계를 정신적인 부분, 개념이 아니라, 장인적인 손길, 신체, 감성의 영역으로 제한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이들이 작품생활 초기에 시도한 작품 제작 개념은 예술

가들의 작업에 대한 보상이 사례비를 넘어서 인건비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개념을 도출하게 한다.

이들이 구매한 재료 혹은 완제품의 가격과 고용한 목수의 인건비, 자신의 인건비 등으로 예술적

노동을 양적으로 구체화가 가능해진다. 예술의 감성적 영역의 가치를 어느 정도는 숫자로 계량하

는 것이 가능하다는 논리이다. 문제는 네오 아방가르드 작가들의 예술의 자율성은 없으며 사회

를 반영해야 한다는 개념을 적용하면서 자본주의 논리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점이다. 사회와 자본

을 반영하는 두 번째 부류의 논리는 예술 작품은 일단 팔려야 한다는 시장의 논리를 받아들여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술인의 생계와 자신의 작품 활동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대학교가 시장의 논리에 따라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는 미술학과를 폐과하고 책상 하나만 주면

되는 패션학과를 대신 설립해도 된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렇지만 그러면 참 재미없는 세상이 될

것 같다. 나 같이 티켓에 돈 쓰기가 어려운 사람은 원하는 종류의(아마도 실험성이 짙은) 예술에

돈으로 투표할 수 없기 때문에 대중예술만 향유하거나 비싼 돈을 주고 볼 수 있는 예술은 구경조

차 하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자기조직화 (self-organization), 대안경제, 자주출판(레이블)

이라는 움직임들은 이러한 논리를 받아들이고 현재의 자본주의 안에서 자신의 목소리가 유지되

는 방법들을 모색하는 움직임들이다. 이 중 자기조직화는 시스템을 대체, 보완 내지는 개혁하고

그림5. 상상력에 밥을 이라는 배너를 들로 행진하는 예술가들,

2012년 5월 1일 총파업 장면[사진 = @GeumMin],

m.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66977

190

자 하는 움직임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용어이다. 대안경제, 자주출판(레이블)은 자신들의 시장

이 이미 소수에 국한된 것임을 인정하고 언젠가는 천재의 지위에 올라 전 세계를 평정하거나 자

본주의를 전복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협동조합이나 자주 출판이라는 근근이 연

명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것만으로 만족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정부로부터의 지원의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이전에는 그리고 첫 번째 부류가 말하는 논리

는 예술의 가치가 돈으로 환산될 수 없기 때문

에 그리고 예술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팔릴 수

없으며 예술시장이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

를 내재하기 때문에 국가는 예술을 지원할 의무

를 가진다고 말하면 되었다. 그런데 논리와 이

성을 근간으로 하는 두 번째 부류가 가진 딜레

마는 여기에 반론을 내세우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예술가와 비 예술가의 가치가

동일하다는 자신의 논리를 따르기 위해 이제 국

가로부터의 지원을 받으려면 예술가들은 경제

적인 투자가치를 증명하거나 자신의 정신적 가치이거나 물질적 가치이거나 간에 정당성을 확보

할 만한 계량적 근거를 제시해야 하게 되었다. 정책 관련 학자나 행정가들은 많은 유권자들에게

어필하고 지원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예술인들이 보조를 받으려면 자신이 예술인이라는 사

실과 예술이 사회에 기여하는 바를 수학적인, 양적인 통계자료로 제시해야죠” (그러면 도와주겠

노)라고 충고한다. 사회와의 연결을 선언하는 두 번째 부류는 예술가의 능력이 비-예술가들과는

다르다는 개념을 가지고서는 사회를 대표하는 정책을 만들고 수행하는 이들의 말에 반론을 제기

하기 어렵다. 논리의 앞뒤가 맞기 위해서는 그렇게 한다고 치자. 그렇지만 행정 공무원이 원하는

정책에 따라 첫 번째 부류와 두 번째 부류의 잣대를 바꾸어가면서 들이댄다면 어디까지 수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세 번째 부류는 기존의 의미 체계 바깥에서 해답을 찾는 안드레아 프레이져와 같은 경우이다.

그는 실리적인 해결책을 찾은 듯해 보이는데 예술인이 노동자라고 쳐도 도대체 ‘누가’ 그들에게

돈을 주어야 한다는 말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내어준다. 그는 예술창작에 있어서 창작의 주체(

저자)가 비용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그는 작가와 예술단체 (기획자) 사

이의 창작 주체의 경계선 긋기를 시도한다. 전시, 공공미술, 프로젝트성 작업에서 예술가와 예술

단체 모두가 예술 창작의 주체가 되면 특히 프로젝트성 사업에서 예술가의 작업과 주최 단체의

프로그램, 그리고 전시물에 대해서 창작의 주체가 각각 다르다는 것이다. 가상으로 사례를 만들

그림6. he Barefoot College, in Suplex-Selforganization

자료집. pp. 36-7. 위의 사례는 자본주의로부터 자급자족이

가능하기 위해 전기를 자가발전기를 도입한 어느 자유대학의

이미지이다. 출처: www.barefootcollege.org and Marjetica

Potrcˇ

예술과 노동

191

어 보자면,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에 어떤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을 가지고 전라북도가 프

로젝트성 공공미술 사업을 벌인다고 치자. 그리고 관객과 이야기를 하는 과정을 작품으로 만드

는 작가 A를 초대한다고 치자. 작가 A는 관객과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자신의 작품이 끝나므로 결

과물을 굳이 안 만들어도 되는 작가이다. 프레이저의 논리를 따르면 작가는 프로젝트에 초대되니

일단 사례비는 받아야 한다. 작가의 작품 생산 바깥 부분인 전라북도의 기획에 해당하는 부분, 예

를 들어 용수리의 사연을 공부하고 분석하며, 용수리에 걸맞은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작가

와의 대화나 강연을 준비하며, 전시용으로만 필요한 도큐멘테이션에 필요한 기록 인력의 고용과

제작 편집, 이것을 전시할 때 필요한 장비 임대, 전시구조물 제작은 기획의 주체인 전라북도가 책

임져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내용은 안드레아 프레이저가 헬뮤트 드랙슬러와 공동기획한 작업인

<서비스: 프로젝트성 예술 실천의 여건과 관계(Services: Conditions and Relations of Project

Oriented Artistic Practice)>의 요지를 적용해 본 것이다. <서비스>에서 그는 자신을 ‘서비스

제공자’이고 자신이 제공하는 것이 ‘서비스’라고 규정하였다. 프레이저는 자신의 작업이 아닌 기

획자의 기획 내용으로 인해서 부차적으로 생기는 행적적인 업무를 서비스로 규정하면서 작가가

제공하는 서비스 영역에 대한 보상을 요구한다. 착취라는 개념이 유물론에서는 잉여가치로부터

의 소외를 의미하므로 프레이저는 작가의 노동으로 생산된 전시라는 잉여가치로부터의 소외를

근원에서부터 제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여기서 전라북도의 프로젝트와 전시의 저작권

은 전라북도가 가지게 될 것이다. 저작권이라는

것이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생산의 주체가 누구

인가를 경계선을 긋는 것이므로 위의 논리는 작

가에게 인건비나 용역비 항목으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부여받는다.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예술단체

는 “전시 기회를 주는 것도 고맙다고 할 것이지

감히…” 혹은 “우리도 정말 돈이 없어요, 큐레

이터들도 밤새고 일했어요” 등등을 언급할 수

도 있다. 그렇지만 왜 그런 희생을 감수해야 하

는가? 프레이저나 부르디외의 경우 그것은 예술

계라는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념이거나 예술계

라는 경쟁 시스템을 보존하려는 데에서 이유를

찾는다. 돈이 없는데도 무리하게 전시를 감행하

고 그것을 전시 관계자나 작가들이 감내해야 한그림7. 지그문트 바우만 저,안규남 역 ,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 동녘, 2013년 08월

192

다는 것은 기획의 주체가 전시를 통해서 예술계 안에서의 인정 게임에서 승리를 하려는 암묵적인

규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을 인정한다고 치자. 그런데 예술계가 이미 사회와 자

본에 귀속되어 자율성을 잃어버린 채 귀족계급의 미학을 반영한다면 예술계를 위해 헌신을 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혹시 자신이 귀족계급이 아니라면, 혹은 첫 번째 부류의 작가가 아니라면 예

술계의 보존을 위해 작가가 감내해야 하는 수위는 너무나도 지나치다. 예술단체가 매개자가 아니

라 창작의 주체로 지목되면서 야기되는 또 하나의 이슈는 자율성이 없어져 사회와 자본에 귀속되

어 작동하는 예술계 대신에 그 안에 존재하는 예술 주체 각각의 자율성은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자본과 사회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인다. 창작자의 경계가 분명해지면서 작가는 전

시와 자신의 작품의 경계가 애매해지기보다는 자신의 전달하고자 하는 표현의 영역을 자신의 고

유의 것이 되도록 하기 때문에 표현의 자유라는 권리를 행사할 경계가 함께 규정된다.

사례비만이냐 아니면 인건비도 받을 것이냐의 문제를 이렇게 3개의 분류를 해보는 것은 세

번째 부류가 낫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 부류는 필자가 우연히 발견한 하나의 시도

일 뿐이다. 궁극적인 목표는 분배가 불균형하게 이루어지는 불의에 대한 저항이며 인건비냐 사례

비냐에 내재한 논리 자체를 극복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첫 번째 부류가 극단으로 가는 경우 감성

을 우위에 두는 형색을 띄고 두 번째 부류가 자본주의에 휘둘리는 형국에서 세 번째 부류는 민주

적으로 그리고 합법적으로 해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모더니즘 미학과 역사적 아방가르드

라는 근대철학의 산물을 초월하는 논리적으로는 이상적인 시도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로부터 자

유롭지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궁금하다.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예술과 노동

193

신현진

계약서를 쓰고 일하시나요?

1. 사회 안에서 계약서가 작동하는 조건

계약서를 쓰는 작가에 대한 인상은 참 스

마트해 보이고 진보적이다. 반면 계약서를 쓰

는 작가는 계약의 대상, 즉 갑과 을의 관계에서

‘을’이 되므로 계약서에 쓰인 그대로 납품을 해

야 하는 법적 책임에 종속되는 대상이 된다. 그

렇다면 계약서는 꼭 써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쓰지 않는 편이 나을까? 계약서를 쓴다면 무슨

내용을 포함해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계약서라

는 방법론이 실질적으로 유효하기나 한가? 계약

서를 쓴다 한들 그 내용이 공평하지 않아서 아

무런 법적 보호망을 가질 수 없다면 계약서는

종잇장만도 못하게 된다. 그리고 계약서를 쓰면

아무도 구매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예 계약서

를 써주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와 계약서가 관

련된 이슈를,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내용

이 계약서에 들어가야 사회의 차원에서 윤리적

인가를 고민하기로 하고 이를 다음의 순서로 적고자 한다.

↑ 신현진. “예술인이 고귀한 천직 같지만 자본주의는 이들을

임시 용역으로 정의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말하지 않는 16가지 현실, article, 2012년

10월호. 에서 발췌, 재구성.

194

1. 계약서가 작동하는 사회적 조건 2. 이슈 #1: 상품과 작품의 경계에서의 계약서 3. 이슈

#2: 동시대 예술 프로덕션에서 계약서가 명시해야하는 노동의 범위 4. 결론:딜레마와 관련 링크

좀 김이 새는 이야기로 이 글을 시작하자면…필자는 이 글을 위한 조사 단계에서 유명 예술

단체들의 동료들에게 단체가 사용하는 계약서를 좀 보여줄 수 있는가를 묻고 다녔다. 이는 ‘갑’이

‘을’에게 오늘날 요구하는 의무의 범위를 알고 싶어서 였다. “모두가 협조적이었지만 한 친구는

자기 단체의 계약서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다음과 같은 비웃음 섞인 코멘트를 덤으로 주었다.

“계약서를 비교해서 뭔가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은 소용없어요. 우리 ** 미술관 계약

서의 내용은 원하는 만큼 상세하지 않을 거요. 구체적인 내용이 없는데 비교하거나

연구할 거리도 없는 거지. 어떤 작가들은 미술관 측에 구체적인 내용을 계약서에 넣

자고 요구하기도 하는데 나는 그 사람들이 오히려 바보라고 생각한다오. 왜냐면 너무

자세하게 쓰면 정작 계약을 이행하는 과정에서 유연성이 없어지기 때문에 불편함을

막으려는 거지요. 게다가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데… 다 배려해서 그러는 건데 고마워

하지는 못 할망정 … 그것도 모르고, 내참. 계약서를 쓰는 게 모욕이 될 수도 있는 우

리나라 같은 문화에서 서로를 믿어야지.”

“헉, 그러게요 …(제기랄, 너는 그런 우월감에 넘치는 말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어서

참 좋겠다.)”

여기서 우리는 ‘계약서를 써야 된다’나 ‘쓰지 않는 편이 낫다’이거나 혹은 ‘계약서에는 무엇을

써 넣어야 스마트 한 것인가’의 고민 이전에 우선하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는다. 상기한 유명 단

체의 사례로 보건대 그들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일을 하는 방식으로 ‘사적인 관계’를 선호

한다. 이는 작가-계약과 같은 사회적인 관계의 작동 원리가 ‘인격과 감성에’ 있다는 입장이다. 위

에 언급한 동료의 말처럼 자신이 다 알아서 잘해 줄 테니 믿고 따르라는 입장이 이에 속한다. 달

리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서로를 믿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으며 계약서도 필요 없고 소위 말

하는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의’ 세상이라는 주장이다.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런데 그 사적

인 인간관계라는 것이 혹은 을의 안녕이 갑의 ‘자비’에 의존해야만 한다면 글쎄~라는 생각이 먼

저 든다. 게다가 나는 오해를 싫어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불필요하거나 거북하리 만치 솔직

한 돌직구를 던지거나 혹은 정 반대로 주절주절 배경 정보를 자세하게 늘어놓으면서 말이 길어지

기 마련인데 친구들은 이런 나의 대화 매너를 지적한다. 같은 이유로 나는 계약서를 쓰는 것을 좋

아하는데 서로의 기대치를 ‘액면가 그대로 알고 시작하고 싶은 마음에서’라고 대응하곤 한다. 나

같이 계약서 쓰기에 동의하는 사람의 입장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고 일을 하는 사회적인 관

예술과 노동

195

계의 작동 원리가 ‘이성에’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극단적인 경우 감정이 개입될 필요 없는 ‘공적

인 관계’ 맺기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명료함을 담보하는 반면 이면에는 인간에 대

해 근본적으로 불신을 가졌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음…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있는 자들의 자비

에 의존해야 한다는 입장은 아니꼬와서 싫다.

결국, 계약서가 작동하는 하는 조건은 사회 안에서 인간관계이므로 계약서를 쓰냐 안쓰느냐

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간과 인간이 관계하는 과정에서 갑과 을의 존엄성이 공평하게 상

호 존중되는가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인격이나 자비에 의존하건 아니면 이성에 의존하건 사

회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과정은 윤리적 가치를 실현하는가가 우선되는 문제라는 것이다. 결론은

윤리가 실천되는 사회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는 주제로 옮겨가야 한다는 것인데 이

자리에서 윤리적인 사회를 만들자고 떠들어 봤자 나는 그런 말을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니 내가

좋아하는 계약서를 쓰자는 입장을 고민하는데 본 지면을 할애하고자 한다.

계약서는 써야한다는 입장을 옹호해 보자면 우리는 계몽주의 이래 이성(화폐)에 의해 사고하

는데 익숙해진 사람들임을 들고 싶다.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인간이 활용하는 감성(인격)적 영역

과 이성의 영역을 처음 구분한 사람은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인 듯하다.짐멜은 화폐경제가 활

발해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화폐 경제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였다.[1] 그에게 있어

화폐는 공동체마다 혹은 각 인격체마다 상이한 문화적, 감성적 가치의 잣대를 이성적 계산이 대

신할 수 있게 한 도구이다. 화폐경제 이전의 교환경제에서는 물물교환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교

환이 이루어지는 합의점은 각 당사자의 자비로운 인격이나 혹은 언쟁에 달려있었다. 토마토 한

근이 생선 한 마리와 교환될지 혹은 세 마리를 주어야 될지의 합의는 서로의 관계에, 그리고 각자

의 주관적 판단에 근거했었다. 그런데 화폐가 생겨나면서 토마토와 생선이 가진 가치의 편차를

인격에 의존하지 않고도 양적으로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고 서로의 논리를 따질 필

요도 없어졌다. 그러므로 화폐는 인간관계라는 현상을 수학공식의 수준으로 정밀화하는 이성의

도구임이 맞다. 더 나아가 짐멜은 화폐의 유통과 도시의 생성이 시기를 같이 하면서 사회는 인격

이라는 감정이 배제된 공식적인 관계로 돌아가기 시작한다고 보았다. 화폐경제와 이성으로 사회

가 돌아가기 시작한 지 300년이 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줄 알아야

하는 전문가적인 예술인의 모습이나 계약이라는 이성적 시스템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

른다. 어쨌든 이 글을 위한 리서치에서 계약서를 구해 볼 수 있을 만큼 많은 이들이 계약서를 구

비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같은 이유로 이성과 합리의 이름 아래 자본주의가 승리하기도 했고 이른바 이성의 야만

성이 횡포를 부리기도 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단(!) 이성의 도구인 계약서를

쓰는 입장들을 고민을 한 후에는 반드시 계약서의 ‘어느 내용이’ 윤리를 성취하는가를 평가해 보

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성 vs. 인격(감성)의 입장을 부연하자면 계약서라는 이성의 논리가 실

196

천이라는 감정의 수위에서도 공평하게 느껴지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거나 필

자가 원하는 것은 누군가가 계약서를 쓰게 할 만큼 설득하려는 것이니까.

2. 이슈 #1: 상품과 작품의 경계에서의 계약서

작가-계약서를 고민한 사례들을 찾아보니 19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개념미술이 등장

하는 그리고 개념미술 작가의 상당 부분이 예술 작품을 팔수 없는, 향유만 가능한 형태로 제작하

겠다는 예술작품의 ‘비물질화’가 발전되는 즈음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 작가-계약서의 내용

은 모두 작품 판매가 야기하는 작가의 권리 침해의 문제에 대비한 방비책들이었다.

예술작품이 상품화되고 자본주의에 포섭되는 당시의 상황에 반기를 들어 생겨난 개념미술

은 예술 실천의 결과물이 팔 수 있는 오브제 형식으로 남지 않도록 하거나 공산품을 그대로 설치

하는 방식으로 실현해서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없애곤 했다. 이 때에는 예술인 노동자 협회(Art

Workers Coalition)의 운동이 활발했던 때이기도 해서 예술가의 권리 보장에 대한 고민도 같이

이루어졌는데 이 즈음에 예술 작품과 관련된 계약서 초안 2개가 만들어졌다. 그중 하나는 아트

딜러인 세스 시글럽(Seth Siegelaub)과 변호사인 로버트 프로얀 스키(Robert Projanski)가 만

든 <작가의 판매 및 소유전환 권리 동의서>([영문링크] [국문링크], 1971; 이하 계약서)이다. 시

글럽이 국제 미술계에서 널리 쓰일 수 있을 만

한 계약서의 초안을 만들려 했던 목적은 그가

서문에서도 밝히듯이 작가도 자신의 작품이 판

매된 이후에 증가하는 금전적, 상징적 가치에

대하여 관여하고 보상을 보장받을 수 있는 제도

를 정착하려는 것이었다. 이 계약서의 제2조에

의하면 컬렉터나 컬렉터의 대리인은 작품을 양

도할 때 발생한 부가가치의 15%에 해당하는

금액을 작가에게 30일 이내에 지급할 것을 서

약하도록 되어있다. 이들은 본 계약서 끝자락

에 점선을 찢어서 간직할 수 있도록 한 ‘양도 이

력서’를 첨부하였다. 작품이 새로 양도가 이루

어지는 경우 양도 이력서에는 새로운 컬렉터와

작가의 이름이 갱신되어야만 양도 자체가 유효

하다는 조항이 있기 때문에 컬렉터는 양도 사실

을 양도가 발생한 지 30일 이내에 작가에게 알

려야만 하고 작가는 작품의 금전적 가치의 증가

↑ contracts

세스 시글럽(Seth Siegelaub)과 로버트 프로얀 스키(Robert

Projanski)가 만든 ‘작가의 판매 및 소유전환 권리 동의서의

포스터 이미지

예술과 노동

197

를 추적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마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1년 뒤인 1972년) 다니엘 뷔렝은(Daniel Buren)은 미셸 클로라(Michel

Claura)와 함께 또 다른 내용의 계약서를 완성하였다. 이 양식은 그가 지금까지도 사용해 온다고

한다. 금전적 가치에 대한 권리확보에 중점 둔 시글럽의 계약서와는 달리 뷔렝의 계약서는 이름

부터 계약서가 아니라 ‘경고,’ 혹은 통보, 공지, 등(이하 경고장)의 의미를 가지는 불어인 ‘Aver-

tissement([원문링크] [국문링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뷔렝의 경고장은 마지막 버전을 완성

하기 전에 2개의 버전이 있었고 이전 버전에는 증명서라는 이름을 붙였었다. 그의 계약서는 여러

모로 시글럽의 계약서와 비슷하지만 다니엘 뷔렝의 경고장은 작품 가격이 증가에 대하여 자신에

게 오는 지분에 대한 조항은 넣지 않았다. 다만 그의 사망 후 양도에 따른 차익의 15%는 뷔렝의

자산을 상속하는 이에게 주어진다. Avertissement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지점은 서류의 앞머

리에 나온다. 뷔렝은 “본 경고장의 목적은 경고장이 지시하는 해당 작품의 저작자의 이름을 남용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며 아래에 첨부된 경고장에 서명함으로써 경고장의 소유자에게 해당

작품의 가치가 확인됨을 이에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바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심지어는 소유권자

(구매자, 컬렉터)가 경고장이 명시한 조건을 따르지 않는 경우 해당 작품이 뷔렝의 것임을 증명할

수 없도록 하는 조항을 넣을 만큼 자신이 해당 작품의 저작자로서의 존재 증명이 가장 큰 목적이

었다.

시글럽의 계약서에서 특기할 만한 두 번째 사항은 작품이 판매 혹은 양도된 이후 작품이 전

시되는 경우 작가가 자신의 작품의 내용적(개념적) 측면에 개입을 보장받으려 한 점이다. 작가

는 이 계약서로 해서 일생 동안 자신의 작품에 개념적 통제권을 획득한다. 시글럽의 계약서 제7

조에 의하면 “컬렉터는 해당 작품이 일반에게 공개되는 전시를 계획하거나 전시에 포함하는 것

을 허락하려는 경우 작가에게 자신의 의도를 서면으로 고지하여야 하며 동시에 전시기획자가 컬

렉터에게 제안하면서 밝힌 전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에 대하여 자문한다. 앞서 언급된 고지는 해

당 작품이 일반에게 공개되도록 허락하거나 공개하려는 컬렉터의 의도를 전시 주최나 일반과 공

개적으로 소통하기 전에 수행되어야 한다. 작가는 컬렉터와 전시 주최 측과 즉각적으로 소통해

야 할 것이며 해당 작품의 전시 제안과 관련하여 모든 자문이나 요청에 응답해야 한다. 컬렉터

는 본 조항을 준수하지 않는 한 해당 작품을 일반에게 공개하거나 전시를 허락할 수 없다” 고 못

박고 있다. 그렇지만 작품이 가진 개념의 온전성에 대한 고집이 가장 강했던 작가는 마이클 애셔

(Michael Asher)이다. 마이클 애셔의 작업은 개념미술이자 제도 비평의 선구자적인 위치를 차지

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의 작업 <Untitled>(1975)는 상업 갤러리를 깨끗이 비운 뒤 전

시장과 사무실 사이의 벽까지 허물어 전시와 예술제도를 돌아가게 하는 행위자(딜러)를 보여주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작업은 갤러리의 페인트를 모두 벗겨내어 전시장의 구조를 겉으로

드러내는 작업이었다. 문제는 마이클 애셔의 딜러가 애셔의 작품을 Panza 컬렉션에 마이클 애

198

셔와 상의 없이 팔겠다고 나서면서 일어났다. 그의 작업은 장소-특정적이어서 작품의 위치가 바

뀌면 그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에 이를 염려한 마이클 애셔는 자신을 위한 특별한 계약서를 만들

기 시작한다. 그는 그의 작품이 놓이는 특정 장소와의 관계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작업이 구매가

되어 자신에게서 떠나더라도 장소를 옮겨야 하는 경우에는 작품을 파기해야 한다는 조항을 계약

서에 넣었다. 덕분에 마이클 애셔는 자신의 미술사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팔리지 않는 작업, 심

지어는 회고전에 넣을 수도 없는 작품을 제작한, 그러나 자신의 작품이 가진 개념의 온전함을 끝

까지 지킨 작가가 되었다.

뷔렝과 시글럽, 애셔가 쓴 법적 서류가 성취하려 했던 가장 큰 목표는 작품의 판매 이후에도

작가의 의도와 개념이온전하게 보호되는 장치를 마련하는 데 있다. 이들이 이렇게 보호하려는 가

치는 작품에 들어있는 상품과의 구별되는 고귀한, 해쳐서는 안될 형이상학적 가치이다. 이 형이

상학적 가치는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해야하는가의 문제이다. 예술의 창조성이 자율적이어야─작

가의 권리가 옹호되어야─보호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이들 작가들은 애셔와 시글럽의

경우 작품의 내용에 대한 통제권을 부여하는 조항을 넣음으로써 예술가의 (자본으로부터의 ) 자

율성을 보강하고자 하였다. 뷔렝의 경고장은 전시 허가권만을 명시하고 전시 내용에 개입하는 조

건이 상대적으로 느슨하다. 이는 뷔렝이 작품의 의미(가치) 형성을 수용자(관객과 컬렉터)에게도

열어 놓았음을 대변한다. 시글럽이나 뷔렝이나 작가의 자율성을 공적으로 보장받으려는 법적 장

치가 저작자를 분명히 하고 내용에 개입하는 권리에 두었음을 시사하지만 뷔렝의 입장은 예술작

품의 수용자의 권리를 옹호함으로써 어느정도는 자율성에 입각한 가치와 권리를 축소되어도 좋

다는 입장이다. 어쩄거나 이들의 고민이 계약서를 고민하는 우리에게 매우 유용한 교훈을 제공

해주고 있다. 그 교훈은 첫째, 예술의 창조성은 작가의 저작권에 귀속되는 예술 작품으로 그 한계

범위가 고정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이를 위해 계약서에 어떤 문구를 사용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얼마전 차지량작가가 공개한 <아트스타 코리아>에 참여하는 작가가 제작

한 작품의 저작권이 CJ에 귀속된다는 내용을 포함한 계약서는 첫 번째 교훈에 정반대되는 행태이

다. 작가의 작품의 저작권을 날로먹은 뭐, 씨부ㄹ%*♬£ □&≥ ⅞#@ 개뼉다귀같은, 예술 작품의

창조성을 빼앗아가는 도둑질이다. 물론 CJ는 100만원이라는 재료비를 주었지 않느냐, 그리고 무

엇보다도 작가가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느냐라는 반론을 할 수 있다. CJ가 유리해 보이지만 한

국의 미술관이나 해외의 비슷한 사례를 보면 재료비가 지급되고 새로운 작품이 제작, 전시에 포

함되는 경우 저작권이나 소유권은 작가에게 돌아간다. 다만 작품이 일정기간 안에 판매가 된다

면 작품제작에 사용된 재료비는 미술관이나 화랑에 돌려주어야 한다. 그러니 CJ는 무식하거나

도둑놈이다. 그리고 더 큰 교훈은 계약서란 받은 자리에서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뷔렝, 애셔, 시갈롭은 지난번 필자가 쓴 예술의 자율성과 관련된 글의 논리에 의하면 예술계

의 인정게임의 핵심인 예술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첫 번째 부류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이 작품을

예술과 노동

199

판매하지 않았다면 계약서를 만들 필요도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즉, 이들의 계약서는 모두 판매

와 관련된, 즉 판매의 시점에서 작성된 법적 보호장치이다. 사실 이들의 고민은 예술의 자율성이

자본주의 체계에 귀속된 이후의 시대를 사는 오늘날의 작가는 자신이 작품을 직접 팔아야만 된

다는 벤야민의 ‘생산자로서의 작가’ 개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상기된 계약서의 존

재는 이들 또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작가는 작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나가야 한다는 개념에는 이

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시글럽의 계약서는 비물질적 개념미술을 서명된 서

류로 남을 수 있게 하였다는 비판을 받는다. 저작자의 서명을 포함하는 서류는 결국 개념미술도

판매가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개념미술의 계약서는 개념미술 작품을 법적으로 대체한

다. 개념미술의 시작이 판매와는 상관없는 예술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들의 예술 실천은 막시즘

에서 이야기하는 예술가는 없고 예술하는 사람들만 있는, 즉 공산주의 경제체계가 예술에 부여한

예술적 가치의 우열이 무의미해지는 지점까지 도달하지는 않았다. 뷔렝은 저작권이란 작품을 판

매할 때나 필요한 것이라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작품 가격의 증가에 대한 지분도 추구하지

도 않지만 경고장도 어느 정도 비슷하게 저작자를 구별하는 기능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이들의

작품은 그들이달 작품을 판매해야 하는 현실에 부딪히면서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자

신의 작품을 자본주의 사회가 예술작품에 부여하는 상품의 위치와 중첩된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

다.

3. 이슈 #2: 동시대 예술 프로덕션에서의 계약서가 명시해야 하는 노동의 범위

오늘날 ‘예술작품이 작가의 생계수단이라는’ 데에 문제를 제기하는 작가는 적어 보인다. 그

러므로 예술작품이 상품이 될 수밖에 없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추세라고 하겠다. 다만 예술

을 상품으로서 생산 판매하는 경제인과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기 싫은 딜레마를 가질 뿐이다.

이러한 딜레마는 얼마 전 예술인 복지 법이 제정되면서 불거진 사안에서도 발견된다. 복지 법에

는 미술인들이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고용되어야 하며 그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 부분

이 있었다. 정부는 작가들이 “준 실업자,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 자영업자로서의 자기 인식이 필

요”[2]하다는 입장에 서는데 작가들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작가의 창조

활동이 추상적인라서,작가란 경제와 거리를 둔, 즉 언젠가는 거장이 될 잠재성을 성취하는데 전

재조건인 예술계가 요구하는 경제적 희생을 감수해야하는 가난한 천재의 위치를 고수해야 예술

의 자율성을 고수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복지법을 수용하지 않으면서까지 가

난한 천재가 상징하는 자율성을 옹호하는 이들이 대부분인 반면 미술계의 현실은 이렇다. 정부가

인정하는 고용을 증명할만한 작품 판매나 전시에 초대되는 기회가 작가 수에 비하면 엄청나게 드

물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인 복지법은 이미 산업화된 음악이나 연극계와 같은 공연자 중심이라

는 비난을 받았고 이 때문에 예술가들 특히 시각예술과 문인들이 예술인 복지법의 실질적으로 혜

200

택에서 배제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3] 필자 또한 정부가 예술인을 일용직 노동자로 보아서

는 안된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4] 당시의 주장은 계약서를 쓴다는 것은 예술가를 피고용인

으로 만들어 예술의 자율성이 파괴되는 것에 대한 우려가 크게 작용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좀

더 공부를 하면서 배운 사실은 예술의 자율성이 반드시 파괴되지 않고도 예술인이 고용될 수 있

다는 것이다(예술의 자율성이 유지되어야 하는가는 또 다른 이슈이다). 아니, 예술인의 고용과 예

술인의 천재 작가 지위는 무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최근 작가의 계약 관련 이슈는 판매에 있다기 보다 고용 조건에 초점이 맞추어지는 듯하다.

앞서 이슈#1에서 논의 하였듯이 예술의 자율성은 작품으로만 한계적으로 보호되는 대상이다. 그

러므로 작품 이외의 것에 해당하는 고용조건으로 계약관련 논의의 초점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지

도 모르겠다. 마이클 애셔의 계약서는 이러한 최근의 작가-계약서 관련 논의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의 계약서에는 커미션 된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만들어진 선언

문이나 작가노트, 드로잉의 저작권과 소유권이 작가에게 돌아간다는 조항이 들어있으며 커미션

된 작품의 제작 이외에 부수적으로 요구되는 노동은 보수를 따로 지급받아야 한다고 못을 박았

다. 여기서 말하는 부수적인 노동이란 작품의 설치, 설치에 필요한 목공사, 강연과 같은 교육 프

로그램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부수적인 것, 그러나 작가의 의무에 포함될 수도 있다고

과거에 여겨졌던 활동을 분리하는 행위는 자율적인 작가로서의 권리 보장을 가능하게 한다. 달리

말하자면, 작품을 제외한 다른 부가적인 활동을 고용된 상태로 수행하겠다고 선언하겠다는 말이

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이러한 부수적인 활동은 양적으로나 규모 면에서 증가하였을 뿐만 아

니라 다양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부수적 활동의 확대는 예술 실천의 양상을 크게 변화 시켰다.

니콜라 부리오가 ‘관계 미학’이라는 용어로 풀어 내었듯이 작가가 새로운 사회적 조건을 기반으

로 하는 관계 맺기의 상황을 연출하는 경우,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관객 참여적 기획, 퍼포먼

스,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 실천의 양상은 결과물로 아트 오브제의 생산을 포함하지 않

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부류의 작품이 예술행사에 포함되는 경우에는 작품의 생산과정에는 강

연,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 (공동체의) 연구조사, 도큐먼트, 참여 관객의 섭외, 미팅의 주선 및 회

의의 중개, 작품을 제외한 다른 전시물의 제작, 초대장의 디자인, 퍼포머의 섭외 및 관리 감독, 비

디오의 촬영 및 편집, 자문, 부가적인 지원의 모금, 스크리닝, 글쓰기, 홍보, 보존, 등을 포함하게

된다. 부수적이었던 노동은 반드시 필요한 노동이 되었으며 양적으로도 엄청난 증가가 이루어졌

다. 그래서 오늘날의 예술 실천은 많은 경우 작품의 제작이라기 보다 프로덕션이라는 정의가 더

합당해 보이며 작가 고유의 업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활동’ 없이는 예술 전시와 행사가 생산(프

로듀싱) 될 수 없게 되었다.

ArtLeak를 운영하는 다리아 구(Daria Ghiu)는 이러한 활동을 ‘문화를 좀 더 명료하게 표현

예술과 노동

201

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노동’으로 규정한다.[5] 전시 혹은 예술행사의 프로덕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인 노동은 작가이거나 작가와 비슷한 정도의 예술 창작에 대한 이해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만 수행될 수 있는 노동이다. 그런데 이런 노동이 초대되거나 작품을 판매하는 작가가 자신의 창

작의 일부로 포함해서 보수를 줄 필요가 없는가에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런 노동은 후배 신진

작가나 대학생이 아르바이트로 보충하던 영역이었으나 양적인 증가와 함께 설치와 작품 운송, 아

트 핸들러의 업무는 좀 더 전문화되는 추세여서 예술계에서 한 분과를 차지할 만하다. 이러한 노

동은 작가의 책임의 한계 너머로 이동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가 동시대 예술에 필수적이

되었다면 예술노동 전체에 포함되는 노동 또한 명확히 규정되는 것이 옳다. 작품 제작이라는 저

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작가 본연의 노동과 ‘문화를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과정에 개입되

는 노동’을 전체를 우리는 ‘예술노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중요한 것은 예술노동에 포

함된 이 두 가지의 노동 모두를 예술인이나 예술 복지법은 예술인의 고용활동으로 인정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랬을 때 작가는 작품의 제작만이 아니더라도 예술노동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고용

에 대한 정부 차원의 보호를 정당하게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작권의 보호를 받는 작가 본연

의 노동에 대한, 즉 예술 창작의 자율성까지 보호받게 된다. 애셔와 시글럽의 계약서의 사례가 암

시하는 바를 적용해 본다면 작가의 자율성은 창작자가 갖는 작품의 내용에 대한 통제권에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작가는 창작자로서의 작가의 이름과 지위를 노동자와 공유하되 계약서를 통해

저작권을 강화함으로써 예술가로서의 자율성을 보로하고 부가적 노동을 자발적으로 고용됨으로

서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를 모두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그래서인지 1970년대 만들어진 계약서가 모두 작품 판매와 관련된 것인데 반하여최근의 계

약서와 관련된 논의의 키워드에는 변화가 보인다. 작가들은 예술 작품은 일단 팔려야 한다에는

동의하지만 작품의 판매 ‘만’이 예술인의 생계와 자신의 작품 활동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에는 고

개를 흔든다. 이들은 예술 기획과 실천이 산업

화되고 예술가의 활동 영역이 넓어졌지만 예술

작품을 파는 사람에게만 작가로서의 혜택이 돌

아가는데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오늘

날 계약과 관련된 키워드는 작품에 있지 않고

예술 프로덕션 과정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초점

이 모아지는 경향이다.

최근 2009년에 쓰인 작가-계약서의 사례

중에서 내용이 무척 자세하게 쓰인 사례는 매리

베쓰(Mary Beth Edelson)의 전시 계약서 ([국

문링크] 영문)에서는 작품 제작 이외의 위에 언

↑ 소더비는 당시 진행 중이던 임금협상을중지하고 좀

더 값싼 노동자를 고용하기 위해 지금껏 일해온 노조에

가입된 아트핸들러를 쫓아내었다. 이에2011년 11월 1일

아트핸들러들은 소더비 점령을 시도하였다.

출처: http://art-leaks.org/2011/11/16/stop-the-war-

on-art-workers/

202

급된 활동들을 포함하였으며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 계약서에 주최 예술단체를 ‘고용인’으로 명

시하였다. 또한 전시의 참여와 참여 작품에만 의무를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부수적

인 노동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그의 입장을 따르자면 작가는 계약서를 써서 피고용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미학적 입장에서의 예술의 자율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면

이들이 호소하고자 하는 부분은 자신의 작품의 판매와 내용적 자율성 부분을 뺀 나머지에 노동

에 대한 권리의 보장이다. 작품이 전시에 초대된다는 기쁨에 자발적으로 강요받았던 부가적인 노

동이 불평등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계에서의 불평등한 사례를 모아두는 창고 역할을 하는

ARTLeaks.org의 No Fee Statement 캠페인은 또 다른 방식으로 부가적 노동의 보상을 고민한

다. 작품의 판매가 아닌 전시의 참여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는 캠페인의 내용은 예술 관계자들에

게 자신이 일하는예술기관, 단체가 작가에게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는다면 ARTLeaks가 만든 <무

보수성명서> 양식을 다운로드해기입하고 공개, 발표하도록설득하고있다. <무보수성명서>의([국

문링크] [영문링크]) 내용을 보면 전시/프로젝트/비엔날레의 명칭, 성명서를 작성한 본인과 보수

가 지급되지 않는 참여하는 작가의 이름, 후원단체의 이름과 주최 단체의 성명을 모두 기입하도

록 되어있다. 이들의 목적은 사례비/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불평등의 상태를 파악하고, 공론화하

는 것이다.

사례비 요구의 움직임은 1974년 설립된 뉴욕의 대안공간 아티스트 스페이스(Artist Space)

와 W. A. G. E.(Working Artists and the Greater Economy[일하는 작가와 더 나은 경제])에

의해서도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프로젝트의 목표를 사례비 지급의 합법화와 함께 문화생산자와

이들의 노동을 요구하는 제도와 예술기관들 사이의 모범적인 실천을 위한 지속가능한 모델을 설

립이라고 밝히고 있다. 이 프로젝트의 요지는 비영리 예술단체들에게 작가와 문화 생산자들을

전시 등,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예술인을 초대할 때에는 사례금을 주겠다는 선언을 독려하고 동의

하는 단체에게 증명서를 주기로 하였고 사례비 측정에 근거가 되는 원칙을 명시하였다. 이들이

내건 원칙은 비영리를 포함한 예술기관에 문화콘텐츠를 제공하는 예술노동이 필수적임을 인정

하고 계약으로 고용되는 모든 노동에 대하여 예술노동을 단체가 고용하는 다른 분류의 인력에 보

상하는 기준에 준하는 가치로 사례비를 지급하라는 것이다. 이들이 내건 원칙들은 왜 ‘문화를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노동’이 보상받아야 하는가와 상당히 비슷한 논리이다.

덧붙여 사례비의 양은 예술단체의 재정적 능력에 편차에 따라 상대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라는

원칙을 제시한 점은 특기할 만 하다. 이는 예술노동자로서의 동료의식과 형평성에 입각한 논리를

가시화하고 있다. 그러나 형평성 있는 보상의 수위를 판단하기 위해선 예술기관의 재정상태가 자

발적으로 공개되어야 한다는 어려움을 내재한다.

4. 결론: 딜레마

예술과 노동

203

이 글을 시작하면서 계약서를 쓰자는 입장들을 고민한 후에는 반드시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윤리적인가를 평가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었다. ArtLeak나 W.A.G.E.의 경우도 계

약서 자체에 대한 논의라기보다 계약서를 쓸 때 고려되어야 하는 윤리적 이슈를 다룬다. 그러므

로 이들의 시도들이 예술계에 팽배해있는 노동의 착취를 차단하고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의도를

가진다는 점에서 윤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윤리적이라

기보다는 윤리를 다루거나 윤리에 호소하는 것이다. ArtLeak의 경우 사례비 지급을 하지 않는다

는 행위에 ‘수치심’을 유발하여 사례비 지급에 동기를 부여한다. 그리고 이를 독려하기 위하여 관

계자의 고발을 필요로 한다. 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는 예술기관 직원이 “우리 단체는요, 예술인

에게 사례비를 안주는 거 있죵~ “하고 고자질을 한단 말인가? 있다 하더라도 그 수가 예술계에

서의 관습을 바꿀 만큼이 될 수 있을까? 그렇게 되었으면 하지만. 오히려 W.A.G.E. 시도는 운영

의 투명성과 이의 자발적 공개를 기본 전제로 하므로 법적 제재를 통한 실현이 가능해 보인다. 현

재 공공기관은 이미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자원 운용에 관한 서류를 본다고 해도 그 서류가 사례

비나 부가적 노동에 대한 보상을 살펴볼 수 있는 방법으로 작성되어있지는 않다. 더구나 민간단

체의 경우 지원금이 프로그램에만 사용될 수 있고 운영비에는 사용될 수 없는 상황에서 지원금의

일부를 운영비로 돌려야만 단체의 존립이 가능한 한국적 상황에서는 운영의 투명성과 공개를 단

지 옳다는 이유로 고집하는 데에는 (윤리적) 한계가 있다.

필자는 앞서 예술인의 모든 활동을 예술 노동으로 통합하고 그 아래 저작권으로 보호되는 ‘창

작으로서의 노동(이슈#1)’과 ‘문화를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노동(이슈#2)’을

분리하자고 주장하였다. 필자가 조사 단계에서 살펴 본 계약서에 의하면 한국 공공 미술 기관은

저작권에 대해서 무척 너그러웠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도 ‘문화를 좀 더 명료하게 표현하는 과정

에 개입되는 노동’을 보상하거나 혹은 그러한 노동 자체를 명시한 경우는 아직 보지 못 했다. 필

자의 주장하는 바의 요지는 법이 인정하는 작가로서의 활동 범위를 확대하는 한편 작가의 저작권

이나 작품에 대한 통제권을 동시에 보장받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고려되어야 하는 사항은 이

러한 작가의 활동 영역의 확대는 현재의 ‘미술 생산의 양상이 좀 더 공연예술 시스템과 닮아가는

것, 산업화 되어가는 것’을 반영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연 분야의 사례를 봄으로써 필자

의 상상에 대한 현실성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필자는 예술인 복지 재단이 공유

하는 [공연예술-표준창작계약서시안]을 살펴보았다. 공연예술-표준창작계약서시안의 제8조 2항

에 의하면 “을은 공연의 제작자, 연출, 다른 창작자들과 긴밀한 협의하에 작업하여야 하며, 수정

요구를 할 때는 이를 적극적으로 반영하여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적극적’이라는 단어는

참 무서운, 애매모호한 단어이다. 적어도 필자의 상상이란 계약서로만은 해결이 안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불리하더라도 윤리적인 행위를 하게 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절감

한다. 그래도 좋은 소식도 들려온다. 세스의 계약서를 사용하고 1970년대에 판매된 한스 하케의

204

작업은 얼마 전 옥션에서 판매되었고 [하케는 15% 작품 가격의 상승분을 받았다.] 계약서를 쓰고

도 판매가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렇게 해서, 이 글을 시작하면서 이미 예상하

였듯이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윤리적인, 공평한 분배와 보상의 논리가 소개되었을 뿐 이것

이 현실적으로 적용될 것인가는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도 필자가 스스로 위안하는 바는 이 글이

설득할 때 쓸만한 가설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다. 어찌 되었거나 갑의 횡포를 막을 만큼은 막

아 보아야 하지 않는가?

[주]

[1] 게오르그 짐멜. 홍기수 옮김. “현대 문화에서의 돈”, <문명전개의 지구적 문맥 I : 인간의 가치 탐색>,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2011. Pp. 152-160. 원문: G. Simmel, H.J. Dahme ed.Aufsätze und Abhandlungen: 1894-1900, Gesa-

mtausgabe, Vol.5, Frankfurt, Suhrkamp, 1992.공식적인 관계는 다음의 책에서 발견된다. 게오르그 짐멜 저, 김덕영, 윤

미애 옮김.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2]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인복지제도도입을위한토론회자료집. 아르코미술관, 2009년 7월 14일(화)

[3] 정필주, 예술인 복지법이 말하지 못한 예술인 이야기, Contemporary Art Journal, vol. 8, 2011

[4] 신현진. “예술인이 고귀한 천직 같지만 자본주의는 이들을 임시 용역으로 정의한다”, 오늘날 자본주의가 말하지 않는 16가지

현실, article, 2012년 10월호.

[5] Daria Ghiu. ‘We’re all fed up with artists not being paid worldwide’ 출처: http://www.turnonart.com/inter-

views-europe-art/were-all-fed-artists-not-being-paid-worldwide(2014.2.5 접근)

예술과 노동

205

신현진

예술가라는 직업: 샤먼, 천재, 전문가, 노동자

1. 게으른 샤먼

옛날 옛날 한 옛날에 호랑이가 담배 먹던 바

로 그 시절 놈팽이가 하나 살고 있었다. 뭐 지가

하늘과 동물의 정기를 느끼고 꿰뚫어 볼 수 있

다는 둥 손짓 발짓으로 뭔가를 끄적거리는데 언

어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의 일이라 그가 뭐라고

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게

다가 모두 다 함께 사냥하자는데 일은 않고 사

냥감이 불쌍하다는 둥 징징거리는 통에 이웃들

은 차라리 이 놈팽이가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

에 그를 동굴에 가두고 반성하도록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이 놈팽이가 동물 비슷한 형체를 동굴

벽에 그렸는데 그날 멧돼지가 5마리나 잡혔다고 한다. 사람들은 수군대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의

견은 둘로 갈리는 듯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땅에 동그라미에다가 작대기 네 개

만 붙인 동물 그림과는 달리 그의 그림에는 ‘그 뭔가 다른 느낌!’이 있어 자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게다가 그의 그림에는 뭔가가 들러붙어있는데 자연과 인간의 사이를 오가는 샤먼의 (초)능력일

수도 있다며 기뻐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그가 그린 것이 멧돼지이고 그것이 사냥에 성공

을 가져왔다고 믿으면서 쓰잘데기 없는 줄로만 알았던 이 놈팽이가 사냥에 유용함을 증명하였다

고 그에게도 멧돼지를 나눠주며 기뻐했다. 이 이야기는 예술가의 기원과 얽힌 놈팽이에게는 해피

엔딩인 허구이다. 그가 보여준 ‘뭔가 다른 느낌!’이 기쁨일지, 신령함일지, 혹은 유용함일지가 당

세계 최초의 평론가 _Early Art Critic by Joe di Chiarro

206

시에는 구별되지 않았지만 시대에 따라 예술가들의 지위와 행동거지를 바꾸어 왔다.

2. 천재로서의 예술가

세월이 흘러 필자가 회화과를 다니던 1980년대 말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에서 예술가가 된다

는 것이 예술가라는 직업을 갖는 것이려니 하는 친구들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혼날 각오를 하고 들이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고매한 예술을 추구하는 사람으

로서 감히 돈과 결부된 직업과 자신의 소명을 연결한다는 것은 천박하고 혐오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사고는 게으른 샤먼으로서의 예술가가 수행했던 ‘그 뭔가 다른 느낌!’을 창조하는 특별한

능력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당시 교수님들이나 화단의 작업은 추상화 일색

이었고 그들의 이론은 ‘구상 회화를 키취로 간주하고 추상예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추상예술을

읽고,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기 위해서는 감성의 훈련과정을 거쳐야 하며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만 읽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주체로서의 예술가를 일종의 천재의 지위에 올려놓은’ 클레멘테

그린버그에 기대고 있었다. 이로써 예술가는 사회와는 동떨어진 가난한 천재와 동일한 것이 되었

다.

이들과 비슷한 입장을 표명하는 피터 쉬엘달의 글이 2011년<프리즈(Frieze)> 4월호에 인용

되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술가들이여 주목하라! 아마도 당신은 당신의 작업에 언어를 사용할는지는 모른다.

당신은 이론적 학식이 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작업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혹

은 무엇에 대한 것인지도 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면 안된다. 그건 내가 할 일이

다. 당신은 작품을 만들어라. 비평가들에게 작품에 대해 말하도록하라. 만들기는 말

하기보다 우월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 거래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다.”[1]

그의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된다. 첫 번째 해석은 그가 그린버그 계보의 입장에 선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작품에서 우러나오는 감성이나 혹은 이성 너머의 가치는 제작 완료된 이후에 언어 영역

의 전문 종사자인 비평가에게 의해 매개가 되어야 겨우 전달될 만큼의 난해한 요소이다. 작가가

가진 논리적인 기질을 억누르고 말을 말라는 그의 주장은 감성 혹은 이성 너머의 영역에 대한 도

그마적인 추구이자 ‘만들기’를 통해 증명되는 신비한 천재의 매너를 작가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예술에서 감성이나 이성 너머의 영역이 가진 가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필자의

취향으로는 천재 예술가 신화의 창조에는 불편함을 느낀다. 왜냐면 예술가들이 창조해 내는 ‘그

뭔가 다른 느낌!’을 천재나 현실계 바깥을 감지하는 샤먼의 능력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따라오

는 딜레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 ‘느낌’을 취향이라고 간주한다면 어떤 이의 취향은 천재의 것으로

예술과 노동

207

다른 이의 느낌은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불평등의 정치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뭔가 다른’

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다 보면 인간의 역사에서 현실계 바깥이란 물리적으로 증명되지 않기 때문

에 ‘뭔가 다른’을 종교적 영역에서의 믿음의 대상과 구별할 수 없다. 쉬엘달의 언급으로 다시 돌

아가면 그가 나열하는 예술가가 갖추어야 하는 역할 행동은 비평가와의 구별되는 직능적 역할을

강조하는 일이다. 이것이 두 번째 해석이다. 그는 언어 영역이 발달된 예술가에게서 조차도 자신

의 작업을 스스로 언어화하는 것을 금지하며 그것은 평론가의 직분임을 강조한다. 예술을 둘러싼

사회적 행위에는 예술가와 같은 생산자, 예술 제도 기관이나 비평가와 같은 매개자, 그리고 관객

이나 컬렉터 등의 수용자로 분업화된 직위로 이루어진 시스템이 있고 그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

진 기능을 우수하게 수행해 내는 사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 사람을 우리는 전문가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제작자와 매개자 사이의 전문가적인 분업을 강조하는 예술가라는 직업에 요구되는 태

도는 이제 천재성과 전문가의 자질이 오버랩된 무엇이다. 이때만 하더라도 천재와 전문가는 조금

애매모호한 경계선에 위치했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전문 예술가라는 명칭에 합당한 사회적인

역할 행동이나 매너는 천재보다는 경제분야에서의 전문직 노동자와 더 가까워진다.

필자는 이제 예술가가 전문 직업인이 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그 이유는 감성의 영역보다 이성

을 강조하는 계몽주의 전통과 자본주의가 함께 발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본다. 먼저 삶의 방

식을 이성에 방점을 두는 경향은 칸트의 계몽사상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계몽은 인간이 스스로 초래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는 다

른사람의 도움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신에게서 비롯된 이

미성년 상태는 이성 자체의 결핍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의

이성을 사용하려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서 기인한다. 과감히 알려고 하라! 너 자신

의 이성을 사용하는 용기를 가져라! 이것이 계몽의 표어다.”[2]

칸트의 주장은 세상의 본질과 현실을 지배하는 힘은 더 이상 왕족과 주교의 권위에서 오는 것

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위대함에서 온다는 당시의 시대정신을 명료하게 하였으며 어른이 되기 위

해서는 이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논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의 글이 출판된 지 불과 몇 년 뒤 공장

의 노동자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도 성년의 인간이자 이성으로 판단할 권리를 보장해 줄 공화

국의 국민이 되기 위해 프랑스 대혁명에 가담하였으며 이제 사회는 이성의 논리로 돌아가기 시작

한다.

인간의 이성적 영역에 대한 강조가 사회적 행위에서도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현상을 연구한

이는 사회학자인 게오르그 짐멜인 듯하다. 짐멜은 화폐경제가 활발해지는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화폐 경제가 사회에 미친 영향을 정리하였다.[3] 그에게 있어 화폐란 공동체마다 혹은 각 인

208

격체마다 달랐던 문화적, 감성적 가치의 잣대를 이성적 계산이 대신할 수 있게 한 도구다. 화폐

경제 이전인 교환경제에서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합의점은 각 당사자의 자비로운 인격의 정도

나 혹은 언쟁에 달려있었다. 토마토 한 근이 생선 한 마리와 교환될지 혹은 세 마리를 주어야 될

지의 합의는 서로의 관계에, 그리고 각자의 주관적 판단에 달려있었다. 그런데 화폐가 생겨나면

서 토마토와 생선이 가진 가치의 편차를 인격에 의존하지 않고도 양적으로 정확히 계산하고 지불

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화폐는 인간관계 현상을 수학공식의 수준으로 정밀화하

는 이성의 도구였다. 문제는 생활에서 인격이라는 감성이 배제될 수 있게 한 것이 돈이었다는 사

실이다. 인류 사회는 한쪽은 이성, 다른 한쪽은 자본과 시장이 동전의 양면처럼 구성된 기능적 시

스템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사회가 기능을 수행하는 구조에서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낼

수 있는 사람은 전문가였다. 해롤드 퍼킨은 그의 저서에서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전문가 사회

가 대두되는 상황을 적었다.[4] 산업사회의 발전이 진행되던 19세기는 몇 가지의 이데올로기가

혼재되어 있었던 시대였지만 과거지향적인 귀족계급의 이상이 아니었던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계

급에게 계급 상승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각자의 능력과 지식에 비례하는 가치관에 근거했던 자본

주의의 기업가-매니저 모델이 이데올로기의 헤게모니 싸움에서 점차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업가와 동일시되었던 전문가의 태도는 시장에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이

었으며 사회 구성원과 정부를 대상으로 그의 봉사가 필수적으로 중요하고 궁극적으로는 보상받

을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행동양식은 자연스럽게 근대 산업화 사회의 시민에게 롤-모델이 되

었다.

미술의 영역에서 시도된 전문가를 키워내

려는 노력은 아카데미의 설립으로 대변된다. 프

랑스에서는 예술대학(Academie Royale de

Peinture et de Sculpture, 1648년)이 세계 최

초로 생겨났으며 영국도 뒤따라 왕립 예술대학

(Royal Academy in London, 1768년)을 세워

전문 예술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퍼킨의 전문

가 개념을 적용하면 아카데미 설립 이후 전문

인으로서의 예술가 개념은 천재성을 간직한 채

예술작품 시장의 생산자로서, 전시 시장의 작품

공급자로서 잠재적 소비자인 전시 기획자와 컬렉터, 관객에게 자신이 전문가적인 자질을 갖추었

음을 증명하고 전문가적인 매너를 수행한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경제 영역과 이성 중심

적인 사고가 발전을 거듭하고 사회 전반에 침투된 환경에서 경제 영역에서의 전문가의 행동양식

과 유사한 활동이 예술 시스템에서도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 예를 들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브

Institutions by Artists 컨퍼런스에서 열린 토론 장면

예술과 노동

209

랜드화 (비즈니스 아이템을 개발) 해서 같은 패턴을 판화 찍어내듯 반복하는 예술가의 경우가 그

렇다. 물론 매너리즘의 결과물이라도 예술적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작업 중엔 예술적 가

치가 우수한 경우도 많다. 다만 그런 현상과 경제분야와의 유사점을 지적하려는 것뿐이다. 천재

로서의 예술가의 개념은 먼저 꽃 피었는지는 몰라도 이보다 먼저 시작된 자본주의와 이성의 만남

이 남긴 여파는 오늘날에 와서 천재 예술가 이후의 세대들에게 ‘전문가적인 매너로 행동하기’라

는 징후로 나타난다. 그런데 얼마 전 ‘예술가들이 전문가화되어야 하는가?’를 키워드로 하는 논쟁

이 기획되었다.[5]

찬성팀은 선배가 인생 전체에 걸쳐서 깨달은 예술가로서의 삶과 지혜를 제도의 형식으로 후

대에 물려주고 이를 따르는 것이 전문가가 되는 것이니 예술가도 전문가가 되는 것은 원칙적으로

옳다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반대하는 팀은 예술가들은 기업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불평등

이 입증된 비윤리적인 자본주의와 기업가적인 모델을 상징하는 ‘전문가 되기’라는 모토를 왜 따

라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직관에 따라 예상치 못한 일을 저지를 수 있어야 하

는 것이 예술가들인데 선배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배워서 전문가가 되면 그러한 기능을 할 수

없으니 전문가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이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양측은 일종의 합의 점을 발견하였는데 우리 시대의 생존 조건이 자

본주의에 근거하고 ‘시장 밖에서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으니 무작정 살아갈 것이 아니

라 좀 더 영리한 전략을 가져야 하지 않겠느냐’였다. 자본주의를 없애버릴 수 없는 현재의 상황에

서 대부분의 예술가들은 그 영리한 전략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자신의 덕목으로 삼는다. 예를 들

면 1인 기업가처럼 자신을 프로모션하고 미술 및 전시 시장에서 자신의 역할과 상대방의 정치적

관계를 정확하고 신속하게 판단하며 이에 대처하는 행동을 취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기술의 습

득은 매니지먼트와 작가 역량 강화라는 명칭을 달고 예술 제도 기관에서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전문가화를 받아들이면서 예술가들은 노동자로서의 특징 또한 자신의 본성으로 함께 받아들인

듯하다.

전문가가 되었던 예술가들이 이제 노동자 직위를 함께 수용하는 단계가 되었다는 주장은 새

롭지도 않다. 이미 2014년의 젊은 세대 예술가들은 자신을 노동자라 부른다. 물론 예술가가 노

동자를 자처하는 경우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아방가르드 작가, 사회주의 리

얼리즘, 구성주의 작가의 사례가 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 예술가들을 주축으로 ‘예술 안에서의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연구, 소개되고 있다. 2012년 같은 예술가들은 노동자 총파업에 가

담하여 가두시위를 벌였다. 그 이후 비슷한 구성원들은 ‘미술 생산자의 모임(미생모)’을 가지며

꾸준히 예술가의 노동에 대한 보상과 권리 확보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2013년 구민자 작

가는 <예술가-공무원 임용규정 마련을 위한 공청회>를 조직하고 패널에게 예술가가 공무원으로

임용될 때의 자격요건을 토의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2014년 현재 예술인 소셜 유니온(예술

210

인 사회 노조?)이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자발적 노동자 선언 이외에도 이들이 ‘노동

자처럼 행동한다’에 대한 확인은 무엇을 통해 가능할까? 유진상 평론가는 2014년 4월 어느 미술

잡지에 후배 예술인에게 보내는 글을 기고하였다.[6] 그는 “이번 논쟁은 마치 기업의 노사분쟁처

럼 전개되었다. 회사 측간부들이 노조측 대표들과 노동 조건 등에 대해 따져보는 것처럼 다뤄졌

다”고 쓴다. 그의 글의 전체 논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그를 인용하는 이유는 단지 그 또

한 예술가들이 자신을 노동자와 동일시하는 현상을 발견하였기 때문이다. 예술인이 이전의 정의

와는 달리 ‘노동자로 보이게 하는 행동’에 대한 필자의 주관적인 기준자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노

동자는 고용-피고용의 관계가 작품 의뢰와 같

이 일대 일의 관계라기보다는 특정 산업, 즉 창

조산업이나 예술계와 같은 시스템이 있고 그 안

에서 창조적이라기보다는 어느 정도 규격화된

직무를 수행하는 집단을 대표하는 용어다. 둘

째, 노동자는 고용의 주체가 존재함을 전제로

한다. 고용의 주체는 자신의 (물질적, 비물질적)

이익을 염두에 두고 그것의 성공적인 수행을 위

해 피고용인과 임금지불의 조건을 명시하는 계

약을 체결함으로써 ‘갑’과 ‘을’이라는 서열관계

를 맺는다.

3. 노동자로서의 예술가

얼마 전에는 <아트 스타 코리아>(이하 아스코)라는 TV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필자는 이 프

로그램을 사례로 미술계의 다른 영역과 다르지 않게 <아스코>에 참가한 예술가들에게서도 기존

의 천재 이미지보다는 자신을 노동자로 규정하는 만한 태도들을 상당 부분 발견하였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을 사례로 들고자 한다. 그러나 <아스코>라는 프로그램으로 인해서 대중의 미술에 대한

이해가 높아진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으며 이를 반가워하는 사람의 하나임을 밝히고 싶다.

먼저 참여자들을 살펴보면 미술 관련 학위가 없는 사람도 몇몇 있었고 전시를 몇 차례 참여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겸손하게 자신을 신진작가나 예술가 지망생과 동일시하는 분위기였

다. 일단 참가자 자격을 전문 예술가가 되기 이전으로 상정하면서 이들은 예술계라는 (회사) 조직

의 신입사원이나 견습생으로 행세해도 되는 안전망을 확보했다.

과거 해외 리얼리티 쇼는 도날드 트럼프, 제프리 다이치, 찰스 사치라는 거물 한 명을 프로그

램의 얼굴마담으로 내놓고 그들의 눈에 들기 위한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포맷을 갖는 것이 보편적

이다. 유명 예술인은 게스트의 자격으로 초대되어 참여했었다. <아스코>의 경우는 예술계의 거물

<한국미술계와 작가의 권익-공장미술제 사례와 함께> 공개

토론회 광경

사진 하장호 출처: ewsngod.nayana.kr/zexe/frecri/5382

예술과 노동

211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집단으로서 미술계의 권위를 대표하였고 프로그램 내내 높이 존중되었

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에서 승자가 도날드 트럼프의 견습생이 되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는 경

우는 제목도 아예 <견습생(apprentice)>이라 붙여졌는데 리얼리티 쇼에 참가하는 이들의 리얼리

티는 어디에 있는가를 좀더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하겠다.

이들의 최종 목적지는 어디인가? <댄싱9>을 리뷰한 한정호 칼럼니스트는 프로그램에 참가한

현대무용 지원자들이 바라는 이상적인 미래상은 궁극적으로 “극장 시스템에 자신들이 참가해 생

계와 자아실현을 함께 이루려는것”[7]이라고 규정했다. <아스코>의 피디는 참가자들에게 기회를

주라며 방송 이후 미술계로부터의 선처를 권유했다.[8] 그러므로 그들의 최종 목표는 대중과 소

통하고 그들로부터 사랑받는 스타가 아니라 미술계에서 자리를 잡는 것이다. <아스코> 파이널리

스트 중 한 사람은 “예술은 뭐, 술 잘 먹고, 인사 잘하면 그게 예술이지!”라는 어느 어르신의 충고

로부터 영감을 받아 “안녕하세요”라는 제목으로 신입사원의 통과의례라고 해석 가능한 작품을

출품한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업계의 존재를 암시하는데 그 업계라는 것은 예술계이다. 그런데 문제는

예술계가 견습생을 길러내는 시스템을 가진다면 그 업계는 평등한 가치인 창조성이나 ‘뭔가 다른

느낌’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포뮬라와 같은 규격화된 직능의 학습과 인간관계로 작동한다는 것

이다. 방송에는 심사위원이 파이널리스트에게 ‘실력이 늘었다’며 덕담을 건네는 장면이 포함되

었다. 사실 현대예술 담론에 익숙한 사람의 한 명으로써 파이널리스트의 작품이 에피소드가 넘어

가면서 현대미술 담론에 자주 등장하는 취향에 가까워졌기 때문에 이 심사위원의 코멘트에 동감

한다. 하지만 동시에 시청자에게 자신의 판단 기준자를 명료히 하기엔 터무니 없이 적은 방송 분

량을 근거로 심사위원의 코멘트를 해석하면서 드는 의심은 예술이 학습으로 1등을 할 수 있는 무

엇인가? 혹은 이들의 작품이 심사위원의 취향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는 아닐까?이다. 그렇다면 이

신입사원처럼 행동하는 참가들이 가까워질 수 있었던 최종 목적지는 이성으로 규격화된 직무를

실천하는 장소에 가깝다는 확대 해석도 가능하다.

더구나 그 업계는 경제분야와 유사한 서열관계에 의해 작동된다. <아스코>는 ‘갑’과 ‘을’의 관

계 혹은 잠재적인 ‘갑’과 ‘을’의 관계를 보여준다. 참여 작가 한 명은 멘토에게 “저 질문 있는데요!

어드바이저하고 멘토하고 그 차이가 뭐예요?”라고 묻자 이에 대한 동료 참여자의 반응은 ‘무례하

다’, ‘공격적이다’ 등을 포함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심사위원의 말씀에 공감하고 순한 양처럼 받

아들이기 때문에 “출연자들의 어마어마한 개성을 보면 이들이 일렬로 서서 심사위원들의 심사

평을 얌전히 듣는장면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9] 라는 평을 듣는다. 굳이 필자가 바라는 예

상 답변이 있다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죠, 해석이란 인구의 수만큼이나 다양하기 마련이지

요, 혹은 고민해 보겠습니다”쯤이 안전해 보인다. 앞서 언급한 참여 작가의 질문에 대하여 멘토는

“멘토나 어드바이저나 그것의 정의를 내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아. 작업 방향에 뭔가 말을 해서 심

212

사에 도움을 주는 것이, 심사에 불리한 것을 알려주는 것이 나의 역할, 직무인 거 같아”라며 자신

이 모범답안에 접근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작가가 영감을 받거나 타인으로부터 배움을 얻는것 그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다. 그러나 개인

작품의 제작방향에 타인의 의견이 공식적으로 영향을 미쳐도 되는 시스템은 (예술가가 아닌) 학

생이 모범답안을 작업으로 내놓는 경우이거나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부응해야 하는 피고용인(노

동자 혹은 디자이너) 관계에서 납품할 물건을 생산하는 경우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아스코>에서

멘토의 제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작업이있는가를 확인할 바는 없다. 그러나 방송된 부분에는 참여

작가가 기꺼이 의견에 동의하고 적어도 작품의 방향을 어느 쪽인지는 모르지만 바꿀 의향이 있음

을 밝히는 부분이 나온다.

그렇다면<아스코>에 참여하는 예술가의 작업은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을까? 저작권은<아스

코>에 있다. 참여자들은 계약서에 서명하였고 그들의 작업은 방송사에 귀속된다. 계약서는 기업

의 수직적인 경영 원칙을 따라 피고용인으로서의 직무 수행이라는 의무를 수반한다. 그러므로 법

률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이들 예술가들은 자신의 이름을 걸고 자신의 작업을 제작하는 것이 아

니다. 이들은 고용인이 지시하는 화장품, 가방, 자동차 회사와의 콜라보레이션이라는 미션을 받

아들고 계약을 완료하기 위해 문제 해결기술을 발휘하는데 심혈을 기울이는 피고용인이다. 상업

회사와의 광고성 콜라보레이션을 아트디렉팅이나 디자인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관과 관심사에 따

라 실천되는 창조활동으로 구분되어야 하는지는의문이다. 창조 산업에서의 생산은 출발점에서부

터 저작권은 포기한 상태로 수행되고 예술가들은 계약의 의무를 수행하는 노동자가 되므로 오리

지널리티가 중요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생산방식은 경제분야와 유사하게 예술계에 이미 널려있는

개념을 가져와 짜깁기식의 결과물을 생산한다. 몇개의 원형에 기존의 개념들을 짜깁기해서 새로

운 조합을 만들어내는 플랫폼식 생산방식은 신자본주의의 대표적 생산방식이다. 물론 부가가치

는 기업에게 돌아간다. <아스코>참가자들이 남의 아이디어를 훔쳐왔다는 혐의를 씌우며 오리지

널리티의 문제를 갖다대려는 것은 아니다.[10]오리지널리티는 차용의 형식이 수용되면서 순수예

술 영역에서도 이제 무의미한 가치가 된 지 오래다. 이성적 판단으로 규격화된 포뮬라에 맞추는

것 이외에 욕심이 없는 노동자는 베트남전쟁 희생자의 이름으로 구성된 마야 린의 모뉴먼트, 큐

레이터와 도슨트를 활용하는 안드레아 프레이저의 퍼포먼스, 혹은 yba의 작품이나 방사능 오염

으로 어마어마하게 커져버린 고질라 (Godzilla) 등을 가져온다.

오리지널리티가 중요한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찌질한 행위로 간주될 법한 타인의 작품에서 재

료를 빌어오는 예술 실천을 연구한 이로 니콜라 부리오가 있다. 그는 작가들이 3차 서비스 산업

에서 포스트 프로덕션으로 불리는 행위, 즉 기존의 작업에서 만들어진 시청각 자료를 재활용하는

활동으로 작품을 생산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예술은 3차 산업에 도달하였다고도 주장한다. 그의

주장이나, 작가들의 선언에서나, 그리고 <아스코>가 제공하는 실마리들에서 볼 때 예술가의 활동

예술과 노동

213

은 일정 부분 노동자의 자격으로 행해짐은 분명하다.

* 예술과 예술가의 가치

3차 산업에서의 노동과 유사한 활동의 결과물은 예술이라 부를 수 없는 것일까? 부리오라면

이 또한 예술이라고 선언할 듯하다. 부리오는 포스트 프로덕션의 형식을 선택하는 예술가들은

예술가와 관객이 만나는 현장에서의 형성되는 관계를 통해 발생되는 정신적 교감에 예술적 가치

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11] 이들의 활동을 예술이라고 결정짓는 교감은 그 옛날 옛적부터 지금

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를 어떤 이름으로 불렀건 간에 예술가가 만들어낸 ‘뭔가 다른 느낌’과 동의

어는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느낌이 예술의 가치가 시작되는 지점일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전통과

시대를 막론하고 공통분모로 남는 것이 뭔가 다른 느낌이니 그 느낌은 소중한 것임에 틀림없다.

수천 년을 지속해온 것을 보면 말이다. 그리고 그 느낌의 생산은 굳이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활

동이 아닐 수도 있으며 그 느낌의 가치를 희소성의 가치가 아니라 평등의 가치로 구분할 수도 있

다. 어쩌면 우열관계의 점수가 매겨진 예술 작품은 예술이라 부르지 말고 미학적 산물이라고 불

러야 할 옳을 것이다. 왜냐면 앞서 길게 주저리주저리 밝혔듯이 우리는 그 뭔가 다른 느낌을 정

의하고 좋고 나쁨을 구별하려 들었고 그 기준자를 학문적 수위로까지 발전시킨 것을 미학이라 부

르기 때문이다. 미학이 뭔가 다른 느낌을 기쁨이나 신령함으로 정의하고 이를 만들어 내는 사람

을 천재 작가로 정의하는 시대는 감성이나 이성 너머의 상상계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

영한 것이다. 그리고 뭔가 다른 느낌을 개념과 스펙터클의 조합이라 정의하는 이성과 자본주의

의 논리가 주도하는 오늘날에는 예술가로부터 전문직업인의 태도를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결

과적으로 인류는 현재까지 이성과 감성(혹은 그 너머)이라는 두 개의 가치를 상반된 위치에 놓고

이분법적인 실험을 해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예술이 이 두 개의 상반된 가치 중에서 이성적인

공식(formular)과 자본주의적인 논리 아래에 두어진 노동이 된다면 예술이 더 이상 뭐 그닥 대단

해 보이지는 않는다. 적어도 샤먼의 초능력이나 예술계 전체가 전문가적인 직무를 다하면서 의존

해야만 하던 천재성과 비교할 만한 것은 못될듯하다. 그렇다면 노동자가 된 현재의 예술가들은

제3의 옵션을 시도해 보았으면 하는 바램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이와 관련하여 사회가 기능적 시스템으로 작동한다는 체계이론을 발전시킨 사회학자 니클라

스 루만이 떠오른다. 그에게 있어 ‘뭔가 다른 느낌’은 애초에 언어화 될수 없는 영역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해당하는 뇌가 바깥의 세상을 인식하는 과정에서 감성을 논리화할 수 없다는 신경

생리학이 이중적 폐쇄(double closure)로 부르는 인간 감각 지각 능력의 한계에서 출발하는 사

회이론을 발전시켰다. 때문에 그의 이론은 “‘감각에 의한 지각 능력’을 깎아내리고 이해와 합리

적으로 반성하는 기능을 우선하는”[12] 모더니즘의 인본주의적, 이원론적 전통을 극복하려는 시

도였다. 계몽주의에서 시작된 이성에 대한 예찬은 인간에게 만물의 영장이라는 지위를 부여하였

214

지만 유토피아를 지향해야만 하는 목적론이나 정치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

문에 그는 인본주의적 입장에서가 아닌 사회의 작동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그의 논리는 감성이

나 이성 어느 한쪽에 강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현상의 메커니즘만을 회고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원론을 극복한 새로운 시각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러한 생각은 유토피아 이후의 예술, 혹은

미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다시 정립하려는 일련의 학자들이 주장하는 논리와도 상당 부분 부합한

다. 부르디외도 특정 계층의 취향만이 반영되는 문화의 장에서의 불평등을 반대하였고 랑시에르

는 감성의 정치가 노동자 계급을 소외시켰기 때문에 미학에 대하여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미학

의 입지가 약해지자 학자들도 앞다투어 미학의 대안을 제안한다. 랑시에르는 노동자 계급을 포함

하는 미적인 것을 새로이 정립해 가야 한다고 하고 도날드 커스핏은 역사를 뛰어넘어 감동을 주

는 ‘새로운 오래된 거장(New Old Master)’ 찾아 나서서는 루시엥 프로이드와 사라 루카스를 오

늘날의 거장이라고 칭송하며 폴 크라우더는 표준의 미학과 예술적 가치를 생산자의 오리지널리

티와 수용자의 해석 사이의 상호작용으로 구축해 나가자고 하고 단토는 평론가에게 좀 더 다양한

논의를 제시하라고 한다. 이들은 이성과 자본에 경도된 현재의 패러다임을 극복하려 하지만 루만

이 이원론을 극복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대신 목적지를 제시하지 못하는 한편 다른 이들은 현존

의 지배 계급이 가진 정치적 특권을 극복하는 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공인

된 학자들도 찾아내지 못한 예술과 예술가의 가치에 대해 확신을 갖기까지 아직은 갈 길이 멀지

만 이들이 오늘날의 예술인 노동자들에게 출발점을 제공한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려울듯하다. 적

어도 우리는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온 것이 ‘뭔가 다른 느낌’이었음은 확인하였다.

[주]

[1] Peter Schjeldahl. “Of Ourselves and of Our Origins: Subjects of Art,”Frieze, Issue No. 137, March 2011. 그는

The New Yorker의 문화섹션 주필이다.

[2] 임마누엘 칸트 저, 정지인 강유원 역.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월간베를린』, 1784. http://2008new.tistory.

com/410, Immanuel Kant. Friedrich Gedike & Johann Erich Biester, ed., “Beantwortung der Frage: Was ist

Aufklarung?” Berlinische Monatsschrift, Dec. 5, 1784.

[3] 게오르그 짐멜. 홍기수 옮김. “현대 문화에서의 돈”, <문명전개의 지구적 문맥 I: 인간의 가치 탐색>,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2011. Pp. 152-160. 원문: G. Simmel, H.J. Dahmeed.Aufsätze und Abhandlungen: 1894-1900, Gesa-

mtausgabe, Vol.5, Frankfurt, Suhrkamp, 1992. 비슷한 내용은 다음의 책에서도 발견된다. 게오르그 짐멜 저, 김덕영,

윤미애 옮김.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새물결, 2005

[4] Harold Perkin, The Rise of Professional Society: England since 1800, Routledge, London/New York, 1989,

p.xiii. Dan Fox. “A Serious Business: What does it mean to be a professional artist?” Frieze, Issue 121, March

2009. 로부터 재인용. (출처:http://www.frieze.com/issue/article/a_serious_business/ 2014년 1월 29일 접근)

[5] (출처: http://arcpost.ca/conference/debate-two, 2014년 7월 15일 접근)

[6] 유진상. “컬럼-후배-미술인들에게”, 월간미술 , 2014년 4월호 (출처:monthlyart.com/컬럼-후배-미술인들에게, 2014년

7월 15일 접근)

예술과 노동

215

[7] 한정호_공연칼럼니스트, 댄스서바이벌프로그램을바라보는시선. Weekly @예술경영, No. 254. (출처: http://webzine.

gokams.or.kr/01_issue/01_01_veiw.asp?idx=1286&page=1&c_idx=&searchString=%EB%8C%84%EC%8B%

B1%209, 2014년 7월 15일 접근)

[8] 이경호. ‘아스코’PD “시즌2 제작? 활발하게논의중이에요”, 코리아 데일리 뉴스, 2014년 6월 15일 (출처: http://www.

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607064, 2014년 7월 15일 접근)

[9] 배선영, 「어째서아트서바이벌인가? ‘아트스타코리아’ 임우식 PD의대답」, 조인스,2014년03월27일 6:00입력된 기사. 출

처: http://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x?tm=&ctg=&total_id=14280806, 2014년 7월 15일 접근)

[10] 리처드 세넷, 유병선 옮김. 『뉴캐피털리즘』, 서울: 위즈덤 하우스. 2009 (Sennett, Richard, The Culture of New Capi-

talism, Yale University Press, 2005

[11] Bourriaud, Nicolas, Post Production, Lukas & Sternberg, 2002.

[12] Luhmann, Niklas, translated by Eva M. Knodt. Art as Social System, Stanford University Press: Stanford,

California, 2000.

216

신현진

대중미술계- 제 1화, <아티스트 스타> 제작발표회

“본 글은 대중미술계를 상상하면서 쓴 소설로, 내용은 모두 허구이며 거론되는 인물은 실제 인물

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네?”

“그래, 우리 김연웅 기자 자네가 맡도록 하지.”

“제가요? <스타 아티스트>를 말입니까?”

“입사한지 2 년이 넘어가니 이제 비중 있는 프로그램도 맡아야지?”

예술과 노동

217

“그거 미술 프로그램인데요?”

“응. 알아.”

“어… 저… 전 미술은 젬뱅인데요?”

“그게 뭐가 문젠가? 그래 봤자 이것도 텔레

비전 프로그램이야. 후속 기사까지 생각하면서

써보란 말일세.”

“미술 하는 사람들은 뒷조사해봤자 높으신

분들 가십밖에 안돼서 신문엔 내지도 못…”

“그러니까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실력 발휘를

해보게나. 참가 작가나 관계자 배경에 대한 팩트를 확보해야지. 팩트를.”

“그래두… 전 연예부 기자지 문화부 기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맡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

다.”

“자네 연예부 기자만 몇 년만 하구 기자질 관두려는 겐가? 언제 우리 신문사에 문화부와 연예

부가 따로 있었던 체를 하고 그러나? “

“아니 뭐 미술이야.. 뭐… 돈 있는 놈들이 돈 지랄…”

“무슨 잔말이 이렇게 많아 상관이 잘 판단해서 업무분장을 해주면 왜 그러시는지 고민 먼저

해야 할 것이지 새파랗게 젊은 것이 … 미술은 문화가 아니고 연예도 없단 말이야? 무슨 그따위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기자가. 자네 자질이나 의심스러운 말을 할 거면 당장 다 집어치워. 창피한

줄 알아야지! 제작 발표회가 한시간 있으면 프레스 센터에서 있으니까 참석하는 데 늦지나 않게

어서 준비해.” 하며 편집장이 보도자료를 던지듯이 김기자 쪽으로 휙~ 밀어 던진다. 그가 다른

기자들의 낯을 살피려 시선을 돌리니 모두들 딴 곳을 쳐다보기 시작한다.

‘동료 좋다는 게 뭐냐 하더니 다 개수작이었구먼… 저 새끼 ‘다 집어 치우라’는 소리는 밥 먹

듯이 하구’

연예인의 연애 스캔들만 쑤시고 다니는 김기자는 미술이 자신 없다는데도 굳이 그에게 기사

를 주는 편집장이 얄궂기만 하다. 더구나 후속 기사까지 아예 통째로 맡으라니. 회의는 보통 기자

가 자신이 쓰고 싶은 꼭지를 제안하는 게 상례인데 편집장이 내려주는 걸보니 선배 기자들이 이

미 손사래를 치며 거부했을 거라고 짐작을 해본다. 그와 친했던 오선배는 아예,

“류현진 선수가 12 승을 거두었는데 ... 커쇼와 함께 개발한 슬라이딩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218

합니다. 류현진 선수가 다저스에서의 생활에 완전히 적응하고도 남았다는 이야긴데요…”라면서

화두를 돌린다.

“그랬지. 그래서?”

‘아이참, 너무한다 너무해. 선배라는 작자나 편집장이라는 작자나 무대뽀로 찍어 누르기만 하

면 뭐가 다 되는 줄 알고… <러닝맨>의 송지효가 지금 애인인 소속사 대표랑 춘천에 떴다고 하는

데… 거기 가봐야 하는데… 춘천에는 리쌍의 개리도 저녁 공연이 있을 예정인데…. 편집장은 아

무래도 사장에게 돈을 먹은 모양이다. 대놓고 다루지 말라고 하면 언론의 자유니 뭐니 할 테니 은

근히 사보타주 하는 게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편집회의가 끝나고 기자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꼭지와 관련된

서류들을 집어 들고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편집장은 김기자를 힐끗 보는데 눈치를 보는 건지 아

님 째려보는 건지… 워낙 쬐끄만 눈이라 분간하기 어렵다. 그런데 대뜸, “거기 가면 내가 자네에

게 얼마나 커다란 호의를 베푼 건지 알게 될 거네.”

한시간 후. 김기자는 KTS 방송사가 S 자동차 후원으로 기획한다는 <스타 아티스트> 의 제작

발표회가 열리는 프레스 센터를 터벅터벅 들어서고 있다. 로비에는 S 자동차가 출시하는 ‘브라보

2’로 보이는 소형차 세 대가 낮은 좌대에 진열되어있다. 로비가 화려한 색채의 소형차 브라보로

가득한 것이 짐짓 흥을 돋우는데 일조하는 것 같다. 게다가 가운데 진열되어 있는 짙은 흑장미 색

의 브라보는 김기자가 출시 전부터 침을 흘리던 색의 자동차다. 양쪽에는 브라보 같기는 한데 좀

색다른 차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브라보 3가 나왔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 아무래도 튜닝을 많이

가한 브라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는 앞 뒤 범퍼를 낮추고 삐죽 튀어나오게 한 것이 스포츠

카스러운 느낌이고 다른 한쪽은 연한 파스텔 톤의 연두색 브라보2가 앙증맞게 ‘나 귀여워요’하는

것 같다. 자동차 옆에는 그 차의 주인인 것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이 장난감처럼 커다랗게 만든 자

동차 키를 한 손에 쥔 채 팔을 높이 쳐들고 기뻐하는 사진이 이젤에 기대어져서 전시되고 있었다.

튜닝을 하면 돈이 많이 들텐데 어디 부잣집 아들인가 싶다.

‘그래애, 이번 TV프로그램에 돈도 많이 썼을 텐데 광고도 하고 싶겠지’

라고 혼잣말을 뱉으며 장미색 브라보의 좌대 주위를 한 바퀴 더 돌면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

다. ‘그래 조금만 기다려.넌 곧 내 꺼가 될 거다!’라고 속으로 되뇌어 본다. 그리곤 차 한 대마다

붙어 있던 레이싱 걸 유니폼을 입은 모델들을 감상한다. 연두색 브라보 옆의 레이싱걸은 모델치

예술과 노동

219

고는 좀 키가 작아서 그런지 다리 기럭지가 착하지 못하다. 5층 기자회견장에 가니 입구에는 아

래층에 있던 자동차 모델과 동일한 유니폼을 입은 아가씨들이 기자들에게 뭘 설명하고 있다. 먼

저 도착한 기자들은 뭔가 열심히 들으며 자기 끄덕이기도 하고 자신들의 명함을 상자에 넣고 입

장한다. 김기자의 차례가 되어 그도 도우미의 이야기를 듣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자들이

각자의 명함을 넣어서 응모를 하면 추첨을 할 텐데 나중에 뽑히면 심사위원이 될 자격이 부여되

며 심사를 해주는 대가로 독점 아니 1차, 밀착 취재는 물론 상품으로 브라보를 준단다! 허걱! 서

둘러서 명함지갑을 여는데 명함이 다 떨어졌다! 아차 하는 마음에 그냥 흰 종이에 이름과 소속을

쓰면 안 되느냐고 양해를 구하는데 도우미가 잘 모르겠다며 난색을 표한다. 김기자는 자기가 <조

중동 데일리> 소속인데 자기가 빠지면 자기 손해가 아니라 당신네들 손해라며 으름짱을 놓다가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복사지를 빼앗듯이 가져다가는 명함 사이즈 비슷하게 찢어서 자신의 이름

을 써넣고 도우미들이 말리기도 전에 추첨 함에 쑤셔 넣는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하는 도우미

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기자회견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발표회장 안에는 이미 여러 명의 기자들이 자리 잡고 <스타 아티스트>의 관계자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난번에는 미술잡지 기자만 대부분이고 연예기자는 대여섯 명이었다던데 이

번에는 김기자 같은 연예 기자들을 포함해서 스무 명은 훌쩍 넘을 듯하다. 민중의 소리 한기자,

고발 뉴스의 이기자, 한겨레의 강 기자가 내 쪽을 힐끔 보고는 자기들끼리 쑥덕댄다. 표정을 보니

좋은 소리는 아니지 싶다. <조중동 데일리>에서 일하는 대가다. 김기자는 ‘미술-리얼리티 프로그

램을 다시 만드는 이유가 있군. 그 프로가 이렇게까지 성공한 거였나? 시청률이 1%도 안됐었을

텐데…S자동차 사장과 CJ 사장이 처남 매제 사이라서 경쟁하려고 그러나?’등등 이것저것을 상상

을 해본다. S자동차 사장은 변호사에다 미국 MBA 출신이라 스펙이 빵빵해 보여도 CJ처럼 오래

된 갑부 집안의 사람이 아니라 그래서 문화적 소양이 많이 부족한 좀 떨어지는 집안 출신이라는

소문이다. 어찌 보면 재벌가에는 데릴사위로 입문한 셈이라 요즘 문화 사업에 손을 많이 대는 것

이 문화 마케팅도 마케팅이지만 계층 상승욕구의 발현이라는 견해가 나돌고 있다.보통 돈이라는

게 계층 상승에 도움이 되는 거 맞다. 귀족들만이 했었던 고급문화를 즐기거나 즐기는 척을 할 수

도 있고 그렇다. 돈이 얼마나 있고 어디에 쓰는가에 따라서 일정 정도의 계층이 상승되는 것은 맞

는데 진짜 귀족 행세를 할 수 있는가는 또 별개의 문제다. 지배계층이나 귀족계층 안에서 낮은 서

열로의 업그레이드는 이제 경제자본을 확보한 많은 사람들이 꿈꿀 수 있게 된, 이미 차지한 영역

이 되었다. 인터넷을 뒤지면 예술과 관련된 논객의 블로그가 수두룩 빡빡이다. 우리나라 누구누

구도, 아마도 유병언을 포함해서 1명이상이, 외국 유명 미술관의 자문위원회 멤버쉽을 돈으로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1%다. 1%의 계급으로 진입하기란 녹록치가 않다. 지금 돈이 있

는 사람과 옛날부터 돈이 있었던 사람과는 매너에서 차이가 난다. 그 1%가 가진 돈으로 선조 때

220

부터 살수 있었던 문화 향유의 시간, 여가의 양이 축적된 것을 문화자본으로 환산했을 때의 수

준은 도저히 따라가기가 어렵고 그 사람들이 입을 벌리면서 내 뱉는 이른바 문화적 소양은S자동

차 사장이 아무리 돈으로 처발라도 취향에서 격이 낮음이 들통 나곤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까 많은 학자들이 문화자본은 세습되는 것이고 계급투쟁은 시작부터 커다란 난관을 가지게 된다

고 하는 거다. S 자동차 사장이 대기업 사장이면서 타 대기업 사장이나 이사들 틈에서 무식한 머

슴 취급(을 은연중에) 당하는 게 참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이전 시대와 비교하면 이 사람도 귀족

이 할 건 다하는 중이다. 해외 유학파에 속옷까지 명품으로 도배하는 건 기본일 것이고 테니스나

수상 스키를 타고 발레를 구경하며 꽤 많은 양의 예술품 컬렉션까지. 그런데 그래도 뭔가 부족한

건 1%가 유명하거나 비싸고 실험적인 예술을 구매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구매

한 것끼리의 믹스 매치가 미술 사조적 맥락, 레퍼런스를 알고 완전히 이해하고 더구나 좋아하는

가까지 드러내는지, 그것이 암기가 아니라 저절로 풍겨 나오느냐가 그 사람이 머슴인지 귀족인지

를 구별하는 관건이다. S 자동차 사장이 그 관문을 통과할 만한 능력이 되었을까? 김기자는 그러

나 현재로서는 그걸 알지 못한다.

그때 황인식 PD가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이제 시작하려나 보다. 이 더운 날씨에 알록달

록한 머플러를 두른 것이 문화 프로그램에 맞게 코수프레를 하는 모양이다. 쫌 있어 보이기는 한

다. 그의 뒤로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오고 무대 위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심사위원 리스트

에는 유종상(평론가)와 박금자(인터내셔널 갤러리 대표) 씨, 노경열(회사원)이라는 이름이 적혀있

다. 평론가가 불루 칩급의 인물인데 비하면 갤러리 대표로 나온 금자씨는 급수가 낮아 보인다. 삼

성이니 현대니 대기업과 결탁해서 몇백억의 돈 세탁을 해줬네 500억을 아직 안 줬네, 있는 놈들

이 더 하네 뭐 신문을 가득 채우던 그런 말 많은 갤러리와는 비교가 안되는 수준의 갤러리인데 근

래에 공공미술 수주를 좀 많이 받았던 게 전부다. 이어서 평범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짙은 색 수

트 정장을 입고 들어오는데 리스트에 있는 회사원-심사위원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참 낯이 익

다. 엇, 아까 연두색 브라보 옆에 있던 사진의 남자다! 그 뒤를 사회를 볼 예정인 성시경이 등장한

다. 언제 봐도 오오, 정말… 길다. 오늘은 온갖 멋을 다부린 모습이다. 이어서 누가 들어오는데 어

깨가 훌렁 다 드러난 길다란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푸훗. 모두들 어이가 없어하는 모양새다.

“저 여자 누구야? 정신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데 처음인가 보지, 에고. 어쩌냐.”

옆자리의 스포츠 투데이 기자가 동료와 <스타 아티스트> 관계자의 뒷다마를 깐다. 그들의 말

예술과 노동

221

을 들어보니 이 여자는 이 프로그램을 후원하는 S사 문화홍보부 직원이다. 비비안이라는. 그 뒤

로 작가들로 보이는 사람들 댓 명이 우르르 등장한다. ‘오홋’ 김기자가 보기에 무대 위로 걸어들

어오는 작가들의 아우라가 장난 아니다. 몇몇은 유명한 심지어는 김기자도 아는 40대의 작가들

이 들어있다. 김기자는 어떻게 저렇게 나이 든 작가들이 게다가 유명한 작가들이 여기에 참여하

는지 어안이 벙벙할 뿐이다.

“이거 신진작가들의 서바이벌 아니었어?”

라며 옆의 기자 쪽을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듯이 반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데 스포츠 투

데이 기자가 맞장구를 친다.

“왜 그러지? 왜 자기의 평판을 자발적으로 까먹으려는 거지? 뭐가 이점이 있다는 거지?”

김기자와 주변의 동료들도 이미 웅성대고 있다.

곧이어 황인식 PD가

“저희 <스타 아티스트> 제작 발표회에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번 <스타 아티스트>

기획팀은 대중들이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예술 감상에 대한 소양도

상당하다는 걸 피부로 느낍니다. 이전에도 현대 예술과 대중 사이의 접점을 찾겠다는 의지는 빈

번하게 시도되었으나 그 효과가 가시적인 수준까지 가지는 못 했습니다. <스타 아티스트>는 그것

이 대중들이 예술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는 너무 적어서였지는 않은가, 방법이 혹시 진부해서이지

는 않은가 하고 고민해봤습니다. 이번 기획은 일반 대중에게 예술에로의 새로운 참여 방식을 제

시하기 때문에 획기적인 기획이라 자부합니다. 여기 모신 작가들은 연령 성별 학력 직업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과 소통을 원하는 분들로 구성되었으며 <스타 아티스트>는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이들 개성파 작가들이 스타로 거듭나시도록 야심 차게 기획된 프로그램을 보여드릴 것을 약

속합니다.*”

그래도 아직 기자단에서는 저희들끼리 몇 마디 주고받을 뿐 별 반응이 없다. 조이뉴스의 김양

수 기자가 한마디 한다.

“대중과 관련된 새로운 참여 방식이 구체적으로 뭡니까? 또 관객 투표인 가요? 관객 투표하는

방식은 이미 몇 년 전에 열린 <10큐레이터, 10전시>라는 기획 공모에서도 이미 시도해 본거지만

인기도를 측정한다고 뭐가 달라졌나요? 그저 프로모션 스턴트 가지고 새로운 시도를 한다고 과

장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다고 시청률이라도 뭐 높아지기나 하겠습니까?”

222

“저희 프로그램은 그저 인기도를 조사하고 결과를 심사에 낮은 비율로 반영하는게 아니라 관

객들이 작품의 평가에 직접 참여하시게 됩니다. 관객분들의 한 표 한 표가 작가분들의 당락을 결

정하게 됩니다.”

“<나가수>같은 건가요?”

“말하자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인기투표라는 거 아닙니까?”

“서바이벌 룰을 말씀드리자면 작가는 미션을 받고 이를 자신의 직업관에 따라 해석해서 작품

을 제작하고 자신의 예술 창작 과정과 제작 의도를 방송을 통해 보여줄 수 있게 됩니다. 심사위원

은 평론가, 딜러, 일반 관객, 연예인 그리고 언론인 한 명이 더해져서 총 다섯 명으로 구성됩니다.

이분들이 작품을 평가하게 되는데 방송 분량의 상당 부분이 이 심사 과정에 할애될 예정입니다.

사회는 심사위원이 한 명씩 차례로 돌아가면서 맡게 되고 사회자는 각 심사위원의 의견을 수렴해

서 각 회에서 누가 탈락하고 누가 살아남을지를 확정하게 됩니다. 저희 방송 관계자들은 이 심사

과정이나 토론 내용이 얼마나 재미있게 진행되는가가 프로그램의 성공 여부가 달린 관건인 만큼

선정된 심사위원들에게 무척 큰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김기자도 한마디 한다.

“그럼 토크쇼라는 겁니까?”

“작가분들이 작품을 만드시는 장면을 생생하게 담으면서 그래도 탈락자가 생긴다는 점에서

는 리얼리티 쇼지요. 그렇지만 예술에 대해서 그것도 현대미술에 대해서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보

겠다는 야심이 담겼다는 점에서는 토크쇼 맞습니다. 그래서 심사위원 분들을 보시면 미술 관계자

이신 유종상 선생님은 평론가이시니 뭐 말할 것도 없고요 성시경 씨는 프로그램의 진행을 도와주

시기도 하지만 각종 오락 프로그램의 호스트로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시는 연예인이라서 심사

위원의 한 사람으로 특별히 초빙되었습니다.”

성시경이 한마디 한다.

“제가 교양이 있어서 섭외한거라면서요. 개그맨 역할을 하라고 선정된 줄은 몰랐습니다. 흐

예술과 노동

223

흠!”

“아니이, 그런게 아니라 시경씨는 명문대를 나온 재원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희가 그렇

게 애써서 모신거라니까요.”

황PD가 웃으면서 성시경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살짝 찌른다.

“그렇..겠지요. 제가 좀 지적인 이미지를 갖고있지 않습니까, 으핫핫핫핫핫”

시경이 예의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그 자리의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 보려 한다. 그런 그에게

PD는 고맙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다음 심사위원을 소개한다.

“그리고 일반인을 대표로 나오신 노정열 씨는 영업사원이신데 아래층에서 혹시 보셨는지 모

르지만 ‘말솜씨’만으로 4개월 연속 판매왕 자리를 거머쥐실 정도의 능력자이십니다. 차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셔서 아래층에 전시된 브라보는 노정열 씨가 상으로 타게 된 자동차를 본인이 원하

는 색깔과 모양으로 튜닝한 자신의 예술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름 자신만의 미학도 갖고

계신거죠. 하하. 이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몇 번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무척 예리하시고

유머스럽기까지 하신 분이었어서 여러모로 적격자가 아닌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술 관계자보다 일반인의 숫자가 우세한데요. 어떤 의도로 심사위원을 구성하신 겁니까?

일반 대중이 키워드일 거라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군요.”

한겨레 기자다.

“예리하시군요. 그리고 실로 정말 중요한 발표를 아직 못해드린 사실이 하나 있는데요. 저희

프로그램에 세계적인 석학이자 프로그램의 기획에 도움을 주신 매우 소중한 분이 참여하시게 됩

니다. 여러분도 자끄 랑시에르 선생님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감성의 분할》, 《미학 안의 불편

함》이라는 책을 쓰셨고 무지한 스승》도 널리 읽히고 있습니다. 이 중 저희가 영감을 받은 부분은

무지한 스승이라는 개념입니다. 그분의 생각은 저희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개념적인 바탕을 제공

해 주셨습니다. 더구나 랑시에르 씨는 저희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주시겠다는 말씀을 전해주셨습

니다! 이분이 몇 번의 에피소드에 출연하게 되실지 어떤 역할을 하실지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곧

알려드리게 될 것임을 약속하면서 가능한 한 그분의 출연이 의미 있는 에피소드가 되도록 하겠다

는 의지 또한 여기서 약속드리고자 합니다.”

이를 발표하는 PD의 얼굴은 잔뜩 상기된 것이 정말 자랑스러워 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랑시에르 씨의 섭외는 후원사인 S자동차와 랑시에르 씨와의 인연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224

저희 방송사는 섭외를 맡아준 S자동차와 비비안 씨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언론계

를 대표하실 심사위원은 여러분 중에 한 명이 되실 겁니다. 이미 문 앞에서 도우미들을 통해 전해

들으셨겠지만 오늘 와주신 그리고 심사위원에 자원해주신 기자분들 중에서 한분은 추첨으로 저

희 프로그램과 여정을 함께하시게 됩니다. 미리 섭외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상품에 대한 공정성의

문제도 있고 선정되지 않은 타 언론사 관계자 분들의 편파적이지 않은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서

추첨이라는 아이디어를 내 보았습니다. 아래층에서 보셨듯이 추첨에 당첨되고 저희 프로그램과

함께 해주시는 기자분께는 ‘젊은 나의 개성표현, 브라보2’가 상품으로 전달됩니다! 이 또한 S자동

차의 후원으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팔을 벌려 비비안을 소개하는 제스처를 하니 비비안은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와 고

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바로 제자리로 돌아간다.

“그래서 일반대중하고는 어떤 관계라고요?”

“아, 죄송합니다. 랑시에르 씨의 참여 발표 때문에 잠깐 생각이 흐트러 졌습니다. 일반대중이

미술을 보는 방식이 토크쇼의 형식으로 소개된다는 겁니다.”

한겨레 기자는PD의 대답이 맘에 안 들었는지 더 들을 생각은 않고 동료에게 나지막이 속삭

인다. ‘랑시에르가 드디어 노망이 들었나 보지.’ 멀리 뒷 쪽에서 다른 기자 한명이 손을 들고 질문

한다.

“철학자가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그것도 오락 프로그램에 나온다고요? 아무리 랑시에르라고

해도 텔레비전에 나온다니 것은 이해가 안 되는군요. 아무래도 학자면 텔레비젼 프로그램이 파퓰

리즘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사이비 해방이라고 싫어할 것 같은데요?”

“먼저 <스타 아티스트>가 전형적인 오락프로그램은 아닙니다. 저희 방송사의 철학은 방송이

란 일반 시청자들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그리고 ‘예술이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잘 모를 뿐이다’라는 문구는 이제 진부하다고 주장합니다. 저희가 새로이 내세우는

모토란 ‘우리 모두는 예술을 이미 알고 있다. 다만 알고있는 예술을 이야기할 장소가 딱히 없었을

뿐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기자님이 해방이라는 단어를 쓰셨는데요. 저희 프로그램이 무지한 스승

에서 개념을 가져왔고 랑시에르 씨가 해방을 원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해석을 막을 수는 없겠지

요. 그렇지만 저희 프로그램이 해방을 꿈꾼다고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저희는 아시다

시피 텔레비전 프로그램입니다. 저희는 아까 말씀드린 데로 그리고 보도자료에 적힌 데로 ‘현대

예술과 노동

225

예술과 대중 사이의 접점을 찾아보면서’ 시청자들의 놀이터를 만들겠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김기자는 속으로 ‘해방? 아니 이런 좌빨종북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종편 방송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라고 생각해본다. 이 프로그램이 한 시즌의 끝까지도 못 가고 끝나겠구나 싶은데, 랑

시에르 같은 유명인사가 온다면 그 에피소드까지는 서바이벌을 할 것 같기도 하고, 방송에서 비

전공자가 예술을 쉽게 얘기할 수 있다는 이 터무니 없이 허황된 계획이 PD 혼자만의 생각이면 편

성부에서 제작 발표회까지도 못 가고 잘렸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니 뭐가 이런 프로그램을 가능

하게 한 걸까라는 고민에 빠진다. 다른 기자들은 예술계 이벤트라서 그런지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았고 무대 위에서 황인식 PD도 작가들을 한명씩 소개하고 있다. 작가들이

여러 명 나와서 그런지 그다지 자세한 설명을 못하는 분위기다. 기자들의 질문은 유명 중견 작가

인 배현우 작가와 김원찬 작가, 아버지가 유럽계 미국인인데다 잘생긴 재미동포 2세 크리스 강에

게 집중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김 기자는 ‘왜 S 자동차는 그렇게 많은 돈을 여기에 쏟아 붓는

것일까?’ 그러다가 S 자동차의 브라보가 그다지 비싼 차가 아니라는 생각에 미쳤고 그들의 소비

자 타깃인 30-40대와 어떻게 연결되기나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져 간다. 30

대 후반에 대리나 과장, 40대 중반에 차장쯤이 되면 3천에서 5천만 원 월급을 받을 거고 30대 싱

글족이면 세단이나 외제차를 몰까? 소형차를 몰까? 돈 없는 난 소형차지만 브라보가 귀여워서 좋

은데. 40대가 소형차를 모는 건 쪽팔릴까? 40대에 아이들 다 키워 놓고 나면 자신만의 라이프를

생각할 법도 하고. S기업이 토요다 자동차처럼 튜닝 산업에 손을 뻗쳐 브랜드를 만들어 튜닝 가

격을 확 내려버린다면 그래서 외제차 삘이나도록 저마다 싸게 디자인을 할 수 있다면 명품을 못

사는 중산층 소비자들의 이고(ego)를 충족할 수 있는 디자인 상품이 되려나? 자동차 튜닝시장이

이만한 투자가치가 있을까? 그리고는 다시 S자동차에 사장이 성골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미친

다. 성골 출신이 아닌 자가 성골의 무리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떤 생각을 할까? 새로운 문화의 트렌

드를 만들어 문화의 장에서 벌어지는 인정게임에 승리를 하는 것이다. 인정게임에 성공하는 문화

의, 예술의 논리는 당대의 예술을 규정한다고 했다. 보수적인 계급사회의 특징이 두드러지는 70

년대 프랑스를 분석한 사회학자의 말이니 일단 믿어보면 계급 상승이나 계급투쟁이 인생의 원동

력처럼 들린다. S자동차에 사장이 돈으로 문화의 헤게모니를 거머쥐려나 보다. 얼마나 돈이 남아

돌면 그런 상상을 하다니 돈이 많기는 많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도 안되라는 생각이 들

기도 한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있을 무렵 무대 위에서는 이미 작가 소개가 다 지나가고 문 앞에서 명함

을 받아 넣던 도우미들이 추첨 상자를 올려놓은 테이블을 끌고 나온다. 심사위원인 유종상 씨가

나와서 추첨 함에 손을 넣어 이리저리 휘젓는가 싶더니 명함을 하나 꺼내드는 모습이 보인다. 몽

226

상에서 현실로 돌아온 나는 누가 선택이 될지 귀가 쫑긋해진다.그는 꺼내든 명함을 들고 마이크

앞으로 가서 말하길

“<조중동 데일리>에 김연웅 기자님입니다” “어어”

정말로? 하는 표정으로 멍 때리는데 황 PD가 내 쪽을 보면서 뭐 하냐는 듯이 어서 올라오라

고 손짓한다. 그렇게 얇은 종이에 이름만 휘갈겼는데 어떻게 그걸 꼭 집어냈지? 내게도 이런 행운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빨간 브라보 2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유종상씨가 자신이 뽑은 명함을

들어 올려서는 기자단들에게 천천히 돌려서 보여주고는 명함을PD에게 건네준다. 다른 기자들은

김이 샜다는 표정이다.

“<조중동 데일리>에 김연웅 기자님 축하드립니다. 유종상 선생님, 다시 나와서 브라보의 열

쇠를 전달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PD가 말한다. ‘어떻게 내 명함이 거기에 들어있었을까?’ 유종상 선생은 키를 건네주고

악수를 한 다음에 농담을 건넸다.

“기자님 축하드립니다. 근데 황인식 PD, 우리도 심사위원인데 우린 차 한대씩 안 주나요?”

제작발표회가 끝나고 다시 신문사로 돌아온 김기자는 새 차가 생겼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어

쩔 줄을 몰라 하고 있다.그리고는 갑자기 생겨난 의욕에 밤늦게까지 보도자료와 인터넷, 경향신

문의 선배 문화부 기자와 통화를 해서 참여 작가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다음은 그가 찾아낸 참

여 작가들의 짧은 프로필과 특이 사항들이다.

1. 한공모** - 채진서, 최민준, <s>구철주</s><s>, </s><s>박남희</s><s>, </s><s>김영주</s><s>,</s> 20대 후반~ 30 대 중반으로

구성된 작가 콜렉티브, 개념미술 작가. 제도 비평, 대중미술계를 주제로 한다고 함. 한공모의 과거 행적과 <스타 아티스트>에 참

여하게 되는 배경은http://blog.naver.com/artfirm/90184487431에 있음.

2. 김원찬 - 45세, 공공미술작가, 커뮤니티 프로젝트 아티스트, 약간 장미여관이나 아저씨 같은 인상, 유쾌한 성격, 리더십 짱. 공동

체에 관심이 있고 관계미학과 관련이 깊어 모든 공공미술 프로젝트에서 빠진 적이 없어 보임.

3. 배현우 - 48세, 사진작가, 날카로운 이미지, K대 사진학과 교수, 흑백 풍경 사진이 주를 이룸. 그의 작품은 모든 미술관에 소장되

어있음. 국전에서 대상을 받음. 정말 잘 팔리는 작가라 무서운 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없다는 작가. 전혀 권위적이지 않고 관객과의

소통이 주 관심사.

4. 박소연 - 47세, 박이소의 아이들이라는 별명 붙은 작가. H대 강사. ‘틈’ 개념으로 알려진 작가. 이해하기 좀 많이 어려움. 좀 더 리

서치 필요. 퍼포먼스와 조각 위주.

5. 최유진 - 34세, 산업 디자이너, 문화 사회적기업 <팬>의 대표. 순수예술 작가와 같이 일하기는하는데 본인 자신은 순수예술이 아

닌 디자이너 출신.

6. 임동은 - 29세, 벽화 알바생, 미술 대학 중퇴. 일러스트레이터 혹은 아웃사이더 아트로 구분될 수 있음.

7. 크리스 강 - 23세, 한국계 미국인 작가. 팝아트. 주로 회화. 만화 주인공 이미지가 많음.

예술과 노동

227

8. 양현모 -28세, 그래피티, 액티비스트. G20 때 이명박 대통령을 쥐로 표현한 주인공이라는 소문이 있으나 정확한 사실이나 신상은

알려진 바 없음.

9. 김혜영 - 35세, 사진 및 회화. 근대화 프로젝트가 주제.

10. 나한령 - 32세, 로얄 칼리지 졸업. 현대미술은 형이상학에 천착했던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한계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

의 감수성을 회복해야 한다고 함. 뭔 말인지 잘 모르겠음.

이렇게 열 명의 프로필을 적고 나서 기지개를 켜는데 벌써 자정이다. 김 기자는 이 정도면 내

일 편집장과 할 말이 좀 만들어지겠지라고 생각한다.

“무엇의 시작인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시작이다.”

(다음 호에 계속)

미주

* 다음의 기사를 참조한 내용입니다. 김양수. “‘아트스타 코리아’ PD, 현대예술-대중의 접점 찾겠다,” 조이뉴스 24, 2014

년 03월 27일. 목 15:57 입력. 출처: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200&g_

serial=811989

** 한공모’라는 이름은 2012년 인사미술공간에서 소개된 전시 <한선정 개인전, 책상 위의 한선정 작가는결국…>의 작가 한선정

이 실은 그 프로젝트에 가담한 작가가 9명의 이력을 한데 모아 탄생시킨 가상의 인물이라는 아이디어를 그대로 모방한 것입

니다. 한공모는 한선정과는 달리 5명입니다. 그리고 한선정 작가의 홈피는http://www.hansunjung.com입니다.

부정성과 예술

이병희

싱가포르,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부적절한 몇몇 만남

‘먹기’와 예술행위의 부적절한 만남 part. 1,2

휴먼_비휴먼 거래

230

이병희

싱가포르, 자카르타, 족자카르타,

쿠알라룸푸르에서의 부적절한 몇몇 만남

거주지 #1 : The Axiom

매년 8월이면 싱가포르 시내 곳곳에서 싱가포르 국기가 내걸린 것을 볼 수 있다. 2년 전 이맘

때, 싱가포르에 도착해서 느꼈던 이상한 내셔널리즘적 분위기가 떠오른다. 8월 9일이 되자 갑자

기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축하 행사를 한다. 국경일 경축행사. 글로벌 금융기관들

의 허브인 마리나 베이에서 매년 열리는 국경일 경축행사의 폭죽쇼는 국가차원에서 열리는 가장

대규모의 행사이다. 일 년에 한번, 아마도 이 시즌은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개국 정신과 개발 의지

를 다시 한 번 고취시키기에 적당한 때임이 틀림없다.

싱가포르가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해, 갑자기 현대 국가로 초고속 성장을 한 데에는

싱가포리안 1세대의 의지와 노력이 대단했다. ‘성장’이라는 목표를 향한 획일적인 노력과 발전과

개발에 대한 의지 덕택으로 이 나라는 매우 단 시간에 깨끗하고, 범죄율이 낮으며, 부가 축적된

동남아의 허브로 탄생하였다. 물론 싱가포르란 나라가 통제 가능한 규모의 작은 나라이기에 이것

이 비교적 가능하였는지도 모른다. 다른 민족 국가들과 달리 싱가포르는 ‘근대’라는 시기를 폭력

의 시기로 겪지 않았다. 애초부터 정치담화에 기반해 국가를 건설했다기보다는, 쟁투의 장이 만

들어 질 여지를 남기지 않고, 그 자리에 경영과 행정의 나라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싱가포

르는 자연스럽게 처음부터 신자유주의-지구촌의 조건을 현실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내가 보기에

싱가포르를 가장 적합하게 설명하는 것은, 지리적으로는 동남아시아라는 어떤 거대 영역의 한 교

두보이자 글로벌 인력들의 일시 거주지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물론 로컬-싱가포리안은 존재하지

만, 싱가포르를 버티고 있는 강한 기반 중 하나가 인터내셔널 자본과 노동력이다. 사회 문화적인

측면에서 동남아시아 전체를 보면, 여전히 정치적 불안정과 내국인들의 극심한 부의 불평등, 오

부정성과 예술

231

염과 공해, 쾌적하기 어려운 지리, 기후 조건 등등 여전히 문제가 많다. 이 혼란의 한 가운데, 안

정되고 깨끗하고 경제적으로 발전가능한 나라를 건립한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

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러한 발상 자체가 매우 증상적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깨끗함, 발전,

정치 사회적 소요 없는 안정 등 싱가포르의 특성이라 할 만한 것들이 주변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들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삶이란, 시공간을 넘어서 뒤섞이는 삶이다. 경제적인 교류나 종

교적인 다양성 인정 등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들의 삶이 계속 섞여 가다보면, 각 국가들을 여태껏

만들어오고 있는 어떤 특색들, 문화들, 양상들이 뒤섞이게 되어있기 때문에 어떤 예외 경계를 만

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싱가포르는 이미 어떤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여기는 이 ‘예외’라는 경계가 매우 강박적으로 유지된다. 사실상 이러한 시스템은

실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구조인데, 이것이 이제는 거의 보편이 된, 글로벌 계급 구조에 입각

하여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이다. 인터내셔널 인텔리와 기업가, 로컬 공무원과 사업가, 로컬 매

개자와 금융기관종사자, 인터내셔널 육체노동자 이런 식으로 구분된 사회구조는 이미 문화적으

로도 섞이기 힘든 어떤 단단한 벽을 형성하며 안정화되어있다. 이 영역에서 적응하여 살지 못하

면, 추방 혹은 (비)자발적 이주를 하여야한다.

사실상 계급 간 혹은 문화 간 어떤 교환, 이동, 갈등을 일으킬 계기 자체가 싱가포르에서는 차

단되어있다. 한마디로 불만이 있거나 문제가 있으면 이곳에, 거주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상 국가 또한 맘에 드는 국민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국가가 얼마나 올바른 장치여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실감케 한다. 그렇다 이곳에서의 거주는 추방과 길들여지기라는 것 사이에서의 강요

된 선택이다. 길들여지기를 선택하면, 이곳에서의 일상은 말 그대로 단조롭고 지루하며 기계적이

다. 역동적인 사회에서는 온갖 갈등과 폭력적인 충돌 때문에 살기 어렵지만, 이렇게 안정만이 최

고의 가치인 사회에서는 인간 자체가 마치 살아있는 시체들 같다.

‘타자’와의 공존은 갈등에 기반한다. 그런데 이 타자에 대한 불편한 인식이 공론화되지 않고,

개인차원에서 묻히며, 커뮤니티를 제대로 형성하지 않는다. 동남아시아, 나아가 최소한 지금 거

래가 이루어지고 있는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보자면, 이곳은 어떤 전체 지역에서의 한 부분이다.

그러고 보면, 타자간의 불편한 동거에서 안전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것이 얼마나 임시방편적인가

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판타지가 제법 견고한

글로벌 시스템에 의해 구축되었고,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지극히 시스테믹한 병리현상이라는

점에서다.

이곳에서의 거주? 한마디로, 애니메이션 <Wall.E>(Andrew Stanton, 2008)의 Axiom호에

탑승한 기분이다. 물론 무척 덥다는 것을 빼고는. 지극히 예외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이제는 일반

인, 싱가포르란 이 현상 자체가 전 지구적 현재 상황과 너무도 잘 들어맞는 다는 점에서 씁쓸한

232

현실이다. 하나의 글로컬이라는 영역에서의 삶과 추방은, 좀비 혹은 살아있는 시체들의 삶이거나

아니면, 말 그대로 망각의 강을 넘어선 죽음 자체이다.

우리가 역사에서 겪어왔듯이, 사회문화적 갈등이란 것은 일종의 그 사회의 증상적인 징후들

과도 같은 것이다. 이 갈등 혹은 문제나 이슈들은 그것이 심화될수록 그것을 딛고 형성되는 어떤

창조적인 담화-문화가 배태될 가능성의 영역이 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된다. 마치 질

병이 건강함에 대한 필수적인 한 부분인 것처럼, 그리고 그 질병이 매우 특이한 것일수록 건강의

조건 혹은 정의 자체가 바뀔 수도 있는 것처럼, 어떤 예외상태로서의 갈등, 혹은 증상들은 그 사

회의 매우 필수불가결한 영역이자,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할 영역이다. 이 가능성의 영역으로부터

행위들이 양산되고, 문화가 형성된다. 그게 바로 새로운 주체와 사회를 일궈가는 어떤 원천이 된

다. 즉 역사-사회-정치적 갈등이라는 것 또한 창조적인 문화의 한 양태라는 것이다. 흔히 소비사

회에서 쉽게 생각하는 즐기는 오락물로서의 대중문화를 떠올리며, 문화는 재밌고 즐거운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문화는 우리 삶의 모든 좋고 나쁜 증상들이 모이는 어떤 웅덩이다. 이 웅덩이에

서 끔찍한 괴물이 생겨나건, 꼬물꼬물 올챙이가 태어나건 간에, 그 웅덩이는 뭔가 생겨나는 곳임

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의 메타언어로써 그 사회의 어떤 증상적인 징후로서의 문화는 표현되고,

표출되고, 행동되어야만 어떤 다른 차원을 상상케 할 수 있다.

거주지 #2 : The Limbo country

국가의 기능 상실은 이미 오래전에 일어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극히 근대적 발상의 상징 장

치인 ‘국가’에 대한 어떠한 판타지나 기대가 무너졌다고 해야겠다. 즉 국가라는 것이, 국민을 위

해 어떠어떠한 기능을 하는 기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됨으로써, 이제 국가란 상

징체계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기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낫겠다. 사실상 이러한 판타지의 소

멸과 종말론은, 전지구화와 신자유주의의 협업이 만들어낸 일련의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근대 내

내 그토록 세우려 했던 제도인 국가는 여권 없이 맘대로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은, 내 민족의 뿌

리가 있고, 조상이 있고, 부모 세대에서 이어 내려온 유산이 있다고 믿었던 영토였다. 이것이 현

대를 거쳐 해체되는 와중에, 설상가상으로 모든 것이 가상세계가 다른 영토들, 그것은 국가이기

도 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머릿속이기도 하고, 나아가 미생물의 세계, 우주의 세계이기도 한

데, 그 모든 세계의 비밀 혹은 독자적인 무엇인가를 까발리는 듯하였다. 바로 그때 이후의 삶은

근대에 쌓아온 온갖 상징적인 것들의 종말을 목도하는 삶이 되고 있다.

국가라는 근대적 발상의 기구가 그 지위를 상실하고, 그것이 현실화되면서부터 아시아의 대

부분의 나라들에서는 정치와 생활은 유리되고, 일상생활에서 불신 혹은 무관심이란 형태의 새로

운 커뮤니티가 자라났다. 그 불신과 무관심의 동네에서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아주

외설스러운 동네이다. 이 적나라함이란, 가령 우리 사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니 아주 끔찍

부정성과 예술

233

한 재난이 일어나 수백 명 수천 명의 목숨이 그냥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되어도, 이미 그 원인과

심지어 그 결과까지도 다 적나라하게 예측할 수 있고 겪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미 그 적나

라한 실체가 무엇인지 안다. 그러한 적나라한 불합리함 자체가 우리의 현실조건이다. 이 현실조

건이 현대 주체로 하여금,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떤 무관심이니 무능력의 상태를 지속하게 한다.

한편으로는 아직도 새로운 테크놀로지 개발에 기방하여, 새로운 미래 혹은 새로운 주체를 꿈

꿀 수 있다는 희망을 키우고 있다. 아마도, 언젠가는 3D 프린팅 아니 나아가 4D프린팅으로 우주

선을 조립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과연, 그것이 새로운 것 맞는가? 지극히 진부한 다

양 중에 하나가 아니던가. 이미, 우리는 너무 다양한 것들 속에서, 취사선택조차 지겨운 지경에

있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지금 형성되는 커뮤니티는 이토록, 불신과 무관심 그리고 소외와 무능

력이라는 부정적 정서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다. 이것이 음산하게 활성화되고 있다.

마치 우리가 지옥의 문턱, 혹은 림보에 살고 있는 산-죽은 자들인 냥 느낄 때는 바로 이때이

다. 즉 온갖 사회적 문제들이 생명들을 아주 가볍게 앗아갈 때, 그리고 그 앞에서 최소한의 인간

적인 어떤 정서들도 발현되지 않음을 목도할 때, 그리고 이것이 무한히 반복될 것 같은 불길한 느

낌이 엄습할 때, 우리는 이 현실이 출구 없는 림보처럼 느껴진다. 산-죽은 상태의 영원한 지속. 이

상태에서 계속해서 변태적으로 살아남고자 기를 쓰고 있는 것은 살아있는 국민이 없는 ‘좀비-국

가’이다. 한국의 경우만 하더라도 근현대사 내내 겪고 있는 온갖 비극적 사태들은 이미 그것이 국

가라는 영역 내에서는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들이었고, 한 번도 해결이 된 적이 없으며, 제대로

된 예방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즉 이미 기능을 상실한(어쩌면 태생 자체가 무능력인) 좀비 상

태로서 존재하는 국가란 기관은 국민들을 산 채로 덥석덥석 뜯어먹으면서, 기생하는 이상한 괴물

이 되었다. 당연히 여기서 제 정신을 차리고 살아남고자 어떤 생명차원의 고유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은 마치 정신병자인 냥 계속해서 착란적인 현재성을 경험할 수밖에 없다. 현실의 모든

상징적인 제도들이 (태생 조건 자체가) 무능력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기능한다는 착각, 착란 속

에서 너무도 열렬히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에 도무지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도대체 어떻게 생명이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을까. 공동체는 삶의 터전이고, 그 속에서의 부

정적이건 긍정적이건 치명적이건 암울하건 행복하건 간에 커뮤니티는 그 공동체를 어떤 방향으

로 끌고 가는 지표를 만들어낸다. 이제 우리는 국가라는 체제에 대해서 수많은 이야기를 했다. 해

오고 있다. 과연 이 국가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만드는 것이 무능한 국가에 잡혀 먹히지 않는

방법일까? 물론 우리에게는 이미 국가를 대체하는 수많은 것들이 있다. 사실 국가에 대한 판타지

처럼 별 기대 없이 가입할 수 있는 커뮤니티들이 있다. 쉽게 가입하고, 쉽게 잊어버릴 수 있기에

오히려 마음대로 가입할 수 없고 쉽게 빠져나올 수도 없는 국가장치보다 오히려 환영받는 커뮤니

티들이 있다. 각종 일터를 포함하며, 온간 인터넷 동우회들, 글로벌-각종 연대, 글로벌 좌파 연대,

아니면 글로벌 생태주의자들의 연대, 혹은 우리 아이 바로 키우기 연대 등등. 국가에게 기대하였

234

던 모든 판타지는 각각 소소한 분야들로, 분산되었다. 마치 세상이 ‘구글 플러스’같다. 사람들의

삶은, 분산된 분열적 삶이 된다. 커뮤니티조차 분산되고, 일관성이란 영역은 마치 시대착오적인

괴짜들의 세상 같다. ‘휴먼’이란 존재가 이제는 더 이상 총체성의 주체가 아니라, 분열 상태에서

접속하는 어떤 단자들인 냥 보인다. 글쎄 초고속으로 ‘휴먼’이 ‘포스트-휴먼’이 되었다고? 물론

포스트-휴먼이란 현상이 비록 현실을 기술하는 가장 적합한 기술일지언정, 섣불리 파라다이스가

도래할 듯 촐싹댈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즉, 지금의 분산된 커뮤니티가 진정 국가-판타지를 대체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비록 차원이 다를지언정, 아직까지도 가장 강력하고 폭력적으

로 국민이란 이름의 생명을 보호-추방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거주지 #3 : nowhere

불쾌할 수도 있고 위험할 수도 있지만, 사회에서는 지극히 필요한 어떤 개인의 자유로운 욕망

과 충동들은 억압될수록, 혹은 변태적인 하나의 길로 인도할수록 지극히 병리적인 것이 되고 만

다. 그리고 그것의 가능성은 자꾸만 도착적인 것이 되고 만다. 올바르건, 아니면 탐욕스럽건, 불

온한 것이건, 사악한 것이건 그 욕망을 억누르고 사는 사람들, 아니 그 욕망의 차원이 상실된 사

람들은 산-죽은 상태의 좀비상태가 된다. 그곳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근대적 주체가 갑자기 착란적인 현대에 도착하였을 때, 그가 겪는 세상은 우울한 정신증적 세

상이 될 것이다. 그 세상은 사실상 우리의 현실이다. 글로벌-신자유주의의 토대에서 발행하는 전

쟁-테러-기아-착취-지구온난화 등. 전 지구적 전영병-방사능의 확산과 오염. 미 국방부와 MIT(

대학)기지를 중심으로 발전하는 로보틱스의 세계와, 3D 나아가 4D 프린팅과 유전자복제의 일상

화. 어떠한 신비함도 허락되지 않는 온갖 쓰레기 같은 정보들과 지식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

와중에 중국 어디에서는 최소의 비용으로 3디 프린팅을 활용해 집을 짓고, 또 어디에서는 줄기차

게 휴먼복제를 연구 중이며, 인간의 뇌는 마치 컴퓨터 하드처럼 곳곳이 파헤쳐지고 있다. 아직도

방사능은 바다 전역으로 퍼져서 이제 해양생물의 또 다른 서식조건이 되고 있으며, 질병은 하나

를 정복하면, 새로운 하나가 생기는 식으로 계속 복제-계발되고 있고, 아직도 경제-종교 문제가

맞물린 전쟁은 비-휴먼적으로 살생을 자행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테크놀로지가 인공 지능화되어

진화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인간이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재앙들은 더 심해지고 있는 게 사실이

다. 이젠 테크놀로지의 진화와 인간적인 재앙의 진화는 마치 미래에 대한 양/음의 대항처럼, 하지

만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하나의 반전된 양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 불가능한 공존의 지대, 일단 여기에 우리는 거주하고 있다.

거주지 #4: Return of The Nation

인도네시아에서 최근에 대선을 치렀다. 최근 뉴스에서는 일종의 민주계열인 조코위가 승리했

부정성과 예술

235

다. 신기한 것은 1960년대부터 1998년까지의 수하르토 치하의 그 말도 안 되는 인권유린 상태

와 군부독재시절을 겪었으면서도, 여태 40% 이상은 코쿠수스 출신의 프라보워를 지지하였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과연 정치가 ‘그’ 정치일까. 아니면, 전 세계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지구경영시

스템이 여기서도 작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는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지만, 군부독재라는 것이 과연 근대국가 형성에 있어서 필수불가결인

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부분의 아시아 국가들은 폭력적인 독재자 하에서 민족주의를 잉태

시켰고, 개발을 추진했다. 결국 대부분의 나라에서 독재는 일부 독재자 네트워크를 위한 소규모

의 왕국을 돈독히 하는데 기여하며 대부분의 국민이라는 이름의 시민들을 그 국가 재건의 노동

자, 하수인, 노역자로 만드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독재기간 동안 행해진 폭력은, 군사문화의 악행

의 일환으로 이뤄진 것으로, 어찌 보면 이 자체가 예외상태였음에도 버젓이 부정할 수 없는 역사

의 일부가 되었다. 보도되지 않고, 기록되지 않은 갖가지 폭력들이 난무하였고, 일반 시민들은 무

참하게 학살당하기 일쑤였다. 독재자를 타도하고자하는 시위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드디어 독

재자는 처벌되거나, 아니면 형 집행을 당하는 것으로 ‘근대 국가’ 를 세우려는 민족주의 이데올로

기 시대가 마감을 한다.

그런데 현대사는 전지구화의 바람 속에서 매우 혼란스럽게 진행되었다. 민족주의는 지역이기

주의로 비판되고, 독재와 더불어 처단할 것이 되는 한편, 모두 다문화주의로의 이행을 하며, 갑자

기 한민족을 외치던 사람들이 다문화가족을 만들고, 갑자기 다국적기업에 취업하여, 인터내셔널

들과 경쟁 아닌 경쟁을 하게 된다. 내 영토에 외국인 자본이 들어와 땅을 사고, 기업을 건설하고,

부동산을 소유한다. 이제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독재자와 국민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어떤 큰 손

들과 그 메커니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노동자층으로 바뀌게 된다. 노동의 흐름은 자국 내

에서, 이웃국가로, 나아가 서방세계로 이어지며, 큰 손들은 민족과 피부와 계급을 떠나 어떤 시스

템으로 자리 잡게 된다.

비슷한 아시아의 근현대사 속에서 인도네시아 또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대통령 선거 자체가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정치적인 변환을 모색한지 겨우 16년 밖에 되지 않았

다. 수하르토의 사위이자, 고급 명망가 출신이며 군사출신인 프로보워는 민주항쟁당의 목수 출신

의 평범한 조코위와 매우 경쟁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온 것으로 보도된다. 물론 상식적으로는 젊은

층과 노년층, 민주적인 개발중심의 중산층과 민족주의적인 보수층 등의 대결로 보이지만, 그 내

부로 들어가 보면 과연 이 대결구도가 정말 극명한 과거 군사정권타도와 민주화의 열망이라는 건

강한 어떤 구도인지는 모르겠다. 현대는 이미 하나의 국가가 홀로 존재하지 않는 이상하게 중첩

된 구조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이미 그 기능과 자리를 어떤 전 지구적 시스템에 내어주었고, 국민

들은 단지 이름뿐인 국가의 테두리를 이어놓는 숫자들에 불과하다. 물론 선거 결과 또한 숫자이

다. 이 숫자만 갖고서는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괴상하고 불순한 추측은 현대의

236

좀비화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게걸스럽게 잡

아먹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국민을 보호하고 국

민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영토라는 식의 근

대적 발상에 사로잡힌 정신증적, 망상적 주체란

점에서 지극히 불길하다.

거주지 #5 : The Planet Earth: trash ball

작년과 올 해 방문 중에서, 가장 비교되는

도시는 족자카르타와 자카르타이다. 자카르타

를 검색해보면 수많은 오토바이와 오염, 쓰레

기, 시내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면 냄새가 진동

하는 더러운 하천, 극심한 교통체증이 내용의

대부분이다. 실제로 자카르타 시내 중심지에는

고급 호텔들과 거대 쇼핑몰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옆으로 박물관, 미술관, 대사관, 공원들이 위

치해 있으며, 그 사방으로 고급주택가가 이어진

거대 도시이다. 여러 글로벌 기업체들이 자카르

타 중심가로부터 방사선모양으로 뻗어있다. 작

년 내가 자카르타를 방문했을 때에도, 여전히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오염문제와 대중화되지

못한 대중교통 현상 때문에 자카르타의 하늘을

항상 회색빛 때로 둘러쳐져 있었고, 도로는 차

들과 오토바이가 뒤섞여서 극심한 교통체증으

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시내 한 가운데를 가로

지르며 시민의 휴식처가 되어야할 캐널에서는

악취와 쓰레기가 넘쳐나고 있고, 시내 공원은

저녁이면 노숙자들의 쉼터가 되는 듯하였다. 시

내 중심가 곳곳에 공터 같은 곳에 버려진 오토

바이들과, 수십 명씩 할 일 없이 어슬렁거리는

사람들, 앵벌이들처럼 보이는 작은 꼬마 아이들

이 군데군데 모여 있다.

다큐멘터리 <The Act of Killing>(Joshua

부정성과 예술

237

Oppenhemer, 2012))을 본 사람이라면, “인도

네시아에서의 휴머니즘은 존재하지 않는가? 도

대체 생명에 대한 그들은 생각은 뭐란 말인가?”

등 별의별 생각이 다 들 것이다. 급기야 이 다큐

멘터리는 한 나라를 이토록 우스꽝스럽게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뭔가

맞아떨어지지 않는 이상한 것들이 한데 마구 얽

혀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버려진 듯한 시내 한

가운데의 공원을 지날 때면, 인도네시아의 청년

문화라는 것이 도대체 어떤 기반에서 형성된 것

일까 궁금해진다. 한편으로는 보헤미안적이고,

한편으로는 길거리 부랑아들처럼 보이는 젊은

사람들. 이들이 어떤 문화의 한 부분을 보여준

다. 갑자기 수하르토 정권 하에서 이뤄진 갱-코

파수스의 지금도 수를 셀 수 없는 수없는 학살

들과 잔인한 만행들, 반휴머니즘적이고, 악랄한

인도네시안들에 대한 탄압, 일반 시민들 사이에

서 일어난 폭력사태들과 연결된다. 1998년 수

하르토 정권에 대한 불만으로 일어난 대규모 학

생 시위와 시민들의 시위 또한 자카르타라는 도

시를 평범하게 볼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독재 정

권과 그 정권으로부터 자행된 온갖 폭력과 잇따

른 불평등한 행태의 잔인성 때문이었는지, 이

반 정권시위 또한 평화롭지 않았다.

예외 상태에 대한, 예외여야 하는 폭력들.

정말 이 곳은 근대가 만들어낸 도시이구나. 너

무도 우려했던 근대화의 참담함이 그대로 드러

나는 도시이구나 싶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어이없음에 뭔가 궁금증이 생긴다. 어쩌면 이렇

게 극심한 빈부차이가 극명하게 그것도 아주 적

나라하게 전시되고 있는 이 도시가 아무런 수치

스러움도 없이 버젓이, 그리고 너무도 생동감이

238

있어 보일 정도로 건재하고 있을까. 앵벌이처럼 보이는 아이들은, 어쩌면 그토록 땡글땡글 건강

하고 강해보일까. 자카르타 시내를 가로지르는 오토바이. 앞에는 아빠, 뒤에는 엄마가 타고, 아빠

앞에 한 녀석, 엄마 앞에 한 녀석은 이미 머리를 꾸벅거리며 졸고 있다. 이 가족은 이 매연 속에서

매일매일 위험해 보이는 주행을 한다.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저 작은 스쿠터를 타고, 학교도 가

고, 쇼핑도 가고, 친척집도 가고, 그러겠지. 그것이 이들의 강인한 일상이다.

누가 봐도 자카르타의 쓰레기와 아이들의 모습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인도네시아 아티스트

팀의 <Urban Play> 라는 작업은, 도시 곳곳에서 작가들이 어떻게, ‘play’를 시작하는지 보여준

다. 누군가 해당 도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무엇인가를 하나 짚어낸다. 아주 사소한 어떤 것에서 출

발하는데, 곧이어 시민들은 쉽게 동참한다. 이 중 한 작품, 한 사람이 자카르타의 한 공터에서 쓰

레기를 하나씩 둘씩 모아서, 테이프로 감싼다. 순간 쓰레기는 작은 공이 되고, 어디선가 갑자기

몰려든 거리의 아이들이 그 쓰레기 공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공놀이를 한다. 마치 한국에서 아이

들이 밤새 내린 함박눈으로 이른 아침부터, 눈을 굴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듯이, 순식간에 쓰레

기 볼은 불어난다. 아마도 미래에도 이들은 이미 쓰레기 덩어리인 지구라는 둥근 공을 굴리면서

놀고 있을 것이다.

미래는 언제나 현재 속에 잉태되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과거와 중첩되어있다. 자카르타,

그곳은 어쩌면 파리의 아케이드가 근대의 상징이었듯이, 현대의 지극한 증상인지도 모른다.

부정성과 예술

239

이병희

‘먹기’와 예술행위의 부적절한 만남

<굶기와 쳐먹기의 반복운동>

먹고 산다는게,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근대국가라는 관념이 생기기 전으로, 더 거슬러 올라

가 농경시대나 원시시대쯤을 상상해본다면, 그게 그리 복잡한게 아니었을 것 같다. 물론 먹고 살

기가 힘들기는 했으나, 오늘날처럼 실로, 구조적으로 복잡하게 이리저리 얽혀있고, 그리하여 참

으로 ‘피곤한’(구민자 인터뷰에서 인용)일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먹기’라, 얼핏 생각해도 이것은 생존의 기본 조건-전제이자 재생산을 위한 일차적인 행위이

다. 복잡할게 필요없다. 그런데 이제 ‘먹기’와 연관된 갖가지 소비, 향유 행위들은 실제로 생존과

직결된 문제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와 함께 ‘먹기’에 걸린 내기의 승자는 먹고 사는 자가

아니라, 언제나, 그 산업을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일례로 ‘먹기’는 가장 필수적인 관광상품이다.

그래서 (특히 아시아에서 추진하는) 전지구적 도시의 관광지화에서 ‘먹기’산업은 이제 주요한 국

가산업이 되었다. 또한 ‘먹기’는 그것의 종류와 요리 방법 등에 따라서 ‘웰빙’을 위한 필수 조건이

기도 하다. 날씬한 몸매와 건강한 삶을 위해서, 어떤 것을 어떻게 먹느냐는 매우 중요한 일상생활

의 과제가 되었다. 그에 따라 웰빙산업은 현대의 각광받는 사업으로 자리잡기에 이르렀다. 물론

이것은 어떤 독특한 취향의 반영이 될 수도 있다. 때로 어떤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위험한 음식

을 시식하는 용기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먹기는 때로 인간 욕망의 여타의 부분과 연결되

어, 욕망을 극대화시키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전지구화의 세계 시장에서 독특한 것, 이국적인 것

을 시식하거나, 체험하는 것은 전지구적 시민의 한 덕목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차차로 그

런 과정에서 ‘먹기’가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생명의 존속에 기여하

는 필요충분조건으로써의 그 기능이 사라져가고 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먹기위해서 살진

240

않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먹고 사는것은 쉽지 않다.

만일 누군가 ‘먹기’(굶기, 쳐먹기, 잘 먹기, 대충 먹기 등등)를 갖고 내기를 한다고 해보자. 그

것은 단지 누가 많이 먹느냐, 누가 이상한 것을 용기있게 먹느냐와 같은 내기차원이 아니다. 또한

맛이 있냐 없냐, 혹은 건강에 좋으냐 아니냐, 아니면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하느냐 아니냐, 나아

가 지구 온난화에 기여하는 일산화탄소를 생산하느냐 아니냐의 문제들만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는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에 걸린 ‘목숨을 건’ 내기이다. 즉 이것이 제대로 된 내기가 되려면, ‘먹

기’에 걸린 내기라는 것은 ‘목숨을 건’ 내기라는 것이다. 일례로, 광화문 앞에서 벌어지는 ‘굶기’

와 ‘쳐먹기’라는 대립 시위 또한 굶는 자이건, 쳐먹는 자이건 공평하게 각각의 ‘삶을 건 내기’라면

정말 진지하게 봐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관광’이라는 낭만적이면서 지극히 (욕망)소비적인 행위의 시대에, ‘웰빙’과 ‘취향’의 시

대에 ‘먹고 살기 급급한 차원’의 ‘먹기’를 이야기한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지금 우리는 한마

디로, 거품 속에서 어떻게 숨을 쉴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하는 때이기에 어쩔 수 없다. 아직 우리

는 사이보그로 대체되지 않은 불완전한 휴먼이다.

사실 오늘날의 우리의 삶 자체가, 실로 지나치게 정상적인 범주를 벗어났다. 즉 후기자본주의

의 시스템은 신자유주의적 교환과 더불어 우리 삶을 예외상태로 만들면서, 변태적으로 반복되는

이상한 오류상태로 만들고 말았다. 그래서 현대의 예술은 이것을 복제하는 것만으로도 기가막히

게, ‘예술적’이다. 현실자체가, 말 그대로, 예술적이기에, 고상하건, 비천하건, 승화의 메카니즘으

로서의 예술이라는 영역이 따로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의 주체는 아주 적나라하게 만신창이로 죽어버리거나(자살, 혹은 살해), 그 죽

고 살기의 문제를 직접적으로 몸으로 출현-현시하고 있는 차원에 이르렀다. 여기서의 굶거나 쳐

먹기의 문제는 실로 목숨을 건 행위여야하는 것이다. 생계자체가 삶의 목적이자 현실 자체인 자

의 굶기는 아주 치명적인 차원에서 온통 그/녀의 삶이 정지된 상태를 현시한다. 그것은 산-죽은

상태이다. 비단 ‘굶기’를 따라한다고 하여서 고유한 생명체의 치명적인 차원이 공유되는 것은 아

니다. 그/녀의 온 몸과 생애를 바쳐온 그 구체적 현실의 ‘정지’만이 ‘굶기’의 차원과 통할 것이다.

여기에서 입은 더이상 미/추를 말할 수 없다. 단지 그 입은, 이제 먹기의 거부와 폭식이라는 반복

적인 운동만 하게 된다.

<무능한 예술 행위, 그것의 반복>

역사속에서 아니 최소한 좀 진취적인 미학강의 속에서 예술이란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떠

올려보면, 그것은 삶을 실재적인 차원에서, 혹은 극단적인 차원에서 아름다우면서 ‘지극히 추한’

어떤 유비로 반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술행위가 가령, 우리 사회의 왜곡된 증상이고, 그 왜상

적 반영이 오히려 여타의 어떠한 것보다 치명적인 현대상의 실재적인 차원이 될 수 있다는 헛소

부정성과 예술

241

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그렇기 때문에

이 예술성이 매개된 커뮤니티라는 장의 필요성

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예술의 장은 지리멸렬한

반복적인 일상성을 매개로 하는 정치적 장이 갖

는 한계, 즉 직접적인 현실성 내부에 미래에 대

한 보다 상상적인 차원과 가능성의 차원을 잉태

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는 기대를 한다는 것이

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유효성 있는 기대인

가?

현대의 아티스트들을, 경계를 가로지르며

제 멋대로 아무거나 예술 행위라고 하는 자들이

라고 정의해보자. 좀 더 그럴듯하게 이야기하자

면, 현대의 작가들은 현대 사회의 상징 질서의

어긋난 지점, 심지어 그것의 비틀린 어떤 왜상

의 차원에서 괴상한 노동을 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의 ‘제 멋대로, 아무거

나’의 행위는, 때로 예술수행(퍼포먼스의 차원)

과 삶(실제 현실의 차원)이라는 경계에서 이뤄

진다. 뭐, 관념적으로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

다.

적어도 난 여기서, 음,미대를 나와서 활동하

는 모든 작가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

늘날의 예술시장은 예술가라는 생산자가 상품

으로서의 예술작품을 생산하고, 그것이 소유이

건 소통이건 어떤 식으로든 상징적인 기표로 기

능하기를 바라며, 예술가가 정당한 노동자로 인

정받아야하는 시장이다. 그러면, 이 시장에 대

한 투자자로서의 관람객을 생각해보자. 관람객

에게 나는 이렇게 조언하고싶다. 만약 당신이

예술에 투자하고자 한다면, 미래를 위한 투자를

하시오. 교육, 환경, 풍부한 인적자원의 생산,

그리고 투명한 예술시스템이 확보되는 그러한

242

기관 혹은 그러한 작가시스템에 투자를 하시오

라고. 마찬가지로 환경, 풍부한 인적자원의 재

생산, 그리고 투명한 예술시스템의 수립과 개선

등을 위해서 노동하는 예술가들이 정식 노동자

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쯤되

면, 예술은 이제 여타의 다른 사회시스템, 기업

들과 다르지 않은 차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게 전부란 말인가? 여타의

다른 사회시스템, 생산시스템과 기업들에게 요

구하는 윤리적인 차원을 똑같이 덕목화하여 예

술가에게 적용하고, 생계를 위한 노동조건을 마

련하고, 지속적으로 그 덕목에 맞게 예술노동을

하고 있는지 수치화하여 평가해나가면 되겠는

가? 누구나 쉽게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예술은

그렇게 정상적인 기능을 해오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시스템을 거부하고 부정해왔다. 거품이었

건, 환상이었건, 예술행위라는 것이 하는 비정

상적인 역할, 사회의 왜상으로서의 역할은 아직

은 유효할 수 있다. 물론 일단은, 먹고 사는 것

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이제 예술행위, 그것은

사건의 형태로, 현상의 형태로, 일시적으로 출

몰하는 어떤 단독적인 계기라고밖에 할 수 없겠

다.

현대의 예술 혹은 예술가가 행하는 여러가

지 부정적 형태의 행위들은 현실의 유비없는,

적나라한, 포르노적 복제이고, 반복이며, 무능

하고 쓸모없는 짓이다. 이 오류 행위들은 언제

나 어색하고, 아햏햏하고, 부적절하며, 불만족

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계속 반복되어야하는가?

문제는 이 반복이 선택 가능한게 아니라는 것이

다. 이 무능한 오류 행위의 반복이 삶의 조건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비단 이것은 예술이라는 영

부정성과 예술

243

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상 우리 사회는 이런 쓸모없는 예술행위의 형태와 유사한 무가치를

너무도 열심히 지속해서 만들어내는 행위가 너무도 많다. 지극히 무가치하지만 열성적으로 어떤

수행들을 하는 주체들은 상징적인 어떤 질서를 채 만들지 못한채 계속 미끌어지는 텅빈 기표들이

다. 그런데 그/녀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드는 요인이 있다. 즉 그/녀에게 주어

진 끝도 없이 영원히 ‘소비’할 수 있는 아주 지극한 권한이 그것이다. 이제 유사예술행위, 즉 무가

치를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우리 사회의 쓸모없는 수행을 어떻게 가치를 만드는 것으로 전환시킬

지, 아니면 쓸모없음이란 카테고리 자체를 진지하게 생각해볼지를 생각해보자. 즉 텅빈기표로서

의 오늘날의 주체상을 사이보그와 같은 실질적인 대체물로 대체할 것인가, 아니면 그 영원한 소

비의 권한을 실질적인 것으로 호명할 것인가. 사실상 후자가 더 쉬워보이지만, 전자가 현실적이

다. 불가능한 것은 텅빈기표로서의 소외된 주체를 실질적인 주인으로 되돌릴 수는 없다는 점이

다. 이미 우리의 몸뚱아리의 주인 없는 행위들, 자동기술적인 퍼포먼스는 실재적인 차원에 진입

했다. 더 이상, 착각과 환상과 욕망과 가상성은 비현실이 아니라, 현실이다. ‘먹기’에 걸린 ‘삶’이

란 내기는 휴먼의 차원에서 인간대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휴먼과 비-휴먼(혹은 보철-휴먼,

사이보그)사이의 내기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무가치를 열렬히 생산하는 예술 행위들이 가치

를 갖게 된다면, 그것은 도래할 어떤 비-휴먼의 미래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형

태는 더욱이, 지극히, 소비적인 과정을 거친 것이 될 것이다. 생산-소비-소외의 모더니즘적 메카

니즘(자본주의)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의 진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소비와 향유

만이 있는 이 시대에, 생산에 중점을 둔 시스템은 이제 누구나 그 문제를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부의 축적은 한계에 다달았고,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것에 욕망의 차원또한 무능-불능의 상

태에 처한지 오래되었다.

일단은 오늘날의 텅빈 욕망의 주체들에게 있어서, 소비를 지속하는 것만이, 극단적으로 실행

하는 것만이 유일한 돌파구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무가치한 쓸모없는 행위가 현대의 주체

에게 있어서는 지극히 실질적이고, 실재적이며, 현실적인 노동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 인구

의 절대 다수가, 소비-향유만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 절대 다수에게 있어서 소비-향유의 행

위는 이제 먹고 사는 절박한 삶의 문제를 제대로 대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모두 죽지 않는

한, 쓸모없는 행위에 걸린 내기의 승자는 결국 이 절대다수의 소비-향유자들이 될 것이다.

<오류행위 하나-전지구화된 도시에서의 먹기라는 신자유주의적 소비 행위>

“먹기에 관해서 생각해보면… 피곤함. 이것이, 최근 사회의 모든 부분들에 대해 몰려

들게 되는 회의감, 피로감과 더불어, 식품, 음식, 먹기 등에 대해서도 우선 떠오르는

단어입니다. 요즈음에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식품 산업과, 문화적 향유, 건강한 삶에

대한 관념, 그리고 그것들을 아우르는 각종 스타일과, 홍보, 넘쳐나는 정보, 식품의 리

244

스팅, 트렌트, 등과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있음을 알 수 있죠.

가령,

- 인터넷 및 미디어를 통해 가장 쉽게 접하는 것은 이미지를 내세운 tv 등을 통한 광

- ‘여름철 피부를 위해 필요한 10가지 채소’ 와 같은 식으로 소개하는 각종 기사들

- 식품의 상태, 제조 등을 고발하는 고발 프로그램, 먹거리 엑스파일, 뉴스, 기타 생활

정보 프로그램의 경고, 제안

- 식신로드, 와 같은 맛집 소개- 식탐을 조장하는 것, 경험을 부각시키는 것, 향유의

경험에 대한 자부심 - 블로그

- 잡지 등을 통해 소개되는 무슨무슨 스타일 등을 운운하며 분위기를 잡는 것들이 태

반이며, 그에 따라 그러한 특정 스타일들로 한껏 치장한 스타일리쉬한 까페며 식당

들이 즐비하게 들어선 가로수길이니 서촌이니 하는 곳들은 그 무언가를 향유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과 점점 늘어나는 가게들.

- 마트에서의 판촉행사, 가격 인하, 시식 코너 등의 이벤트

이 모든 것은 우리가 ‘돈으로 음식과 문화를 구입하고 섭취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되었

다는 점’ 에서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그 구입과 섭취와 향유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

든 과정, 모든 식재료와 음식과 도구와 장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 같

습니다.

그리고 그 무수한 제안들 중에 선택에 대한 피로. 무수한 정보들에 대한 피곤함이 있

습니다. 그 모든 것을 무시하며, 나름의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물론 있지만, 그

렇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빠지게 되는 딜레마를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

에서 오는 피로감이 있습니다.

- 먹기에 대한 구민자의 생각들

사실상 우리는 모두 관광객이다. 근데, 그게 실제 어떤 낯선-익숙한 곳으로 관광을 하거나,

여행을 한다는 의미에서만이 아니다. 내 삶의 터전에 거주하고 있으면서도 관광객처럼 살아진다

는 말이다. 낭만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상 그게 지금 현재 삶의 조건이고 그렇기 때문에 먹고 사

는 일이 지극히 ‘피곤’한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문화를 먹고,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 물론 ‘소비’

행위가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월급을 주게 되고, 생계에 도움을 주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문

화교류와 문화도시 만들기과 같은 사업이 현대 아시아 정부의 매우 비중있는 사업중의 하나가 되

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문화를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관광자원개발과 시장개발이

라는 측면에서만 볼게 아니다. 이 과정에서 실제로는 그 도시, 도시민, 그리고 우리 자신이 욕망

부정성과 예술

245

이 바로 그 소비의 대상이 된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욕망이 소비되면서 사람들은 텅

빈 욕망의 소지자가 되었다. 그 욕망은 점점 더 정보를 소비하고, 문화를 소비하는 와중에 그 소

비 자체의 노예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먹고 보고 살아가는 모든 것이 거래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거래라는 것은 노동과 기업의 교환만을 의미하는게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그 어떤 고유한 부분, 나아가 비밀스러운 부분까지도 상품시장(예를들어 페이스북이나 카카

오톡과 같은 SNS 들 조차도 잠재적인 시장터라는 점은 간과해서는 안된다)에 자발적으로 진열시

키게 만들었다. 실제로 문화관광도시의 설립과 경제 활성화의 정책 속에서 모든 도시가 문화관광

지화되고 관광객들로 붐비는 가운데, 실제 거주자들은 밀려나거나 아니면 스스로도 관광객화 되

고, 사실상 관광객들 자체도 이 반복되는 상품진열에 질려가는 데 말이다. 이 질리는 반복 속에서

물질적인 차원이건, 정신적인 차원이건, 욕망의 차원이건 우리는 이미 총체적인 소외의 상태를

겪고 있다고 해야겠다. 거주자에게도, 실제 거

주하는 고정된 삶의 터전이 있다기보다는 거주

하되 관광한다는 느낌일 것이다.

이제 우리가 세계 어떤 오지를 가더라도, 우

리는 그 지역에 대한 넘쳐나는 정보로부터 자유

롭지 않다. 어쩌면 이제 온 세상에는 ‘오지’라는

것 자체가 없는지도 모르겠다. 전지구화된 도시

는 인터넷 세상에서 모두 직,간접 경험, 관광지

화된다. 마치 이 세상이 구글과 위키피디아의

식민지가 된 것 같다. 모든 도시가 보편도시가

되고, 여러모로 편리한 세상이 된 듯 하다. 사실

상 이게 우리가 원했던 것이기도 하단 점에서,

참 아이러니 하다. 우리가 원하던 어떤 편리함

과 보편성 속에서 삶은 정작 풍요 혹은 복잡, 혹

은 산만 속의 고립이다.

요즘 굳이 어디를 가지 앟고도 무언가 타문화

를 경험했다거나, 알고 있다거나, 즐기고 있다

는 막연한 감정-만족감을 주는 것들이 있습니

다. 예를들어, 정통 멕시코식 타코가게라든가,

그 가게의 인테리어나 테이블 세팅 등이라든가,

노르웨이식 가구라든가, 북유럽스타일의 인터

리어, 부얶, 테이블 세팅 등등. 최근 킨포크라는

246

잡지를 보면 그런 분위기들만 물씬 풍기는 그런 것이 하나의 트렌드처럼 되고 있는

경우를 보게됩니다. 또한 지난번 족자카르타에서 실행했던, 쿠킹클래스에 대해서 이

야기했던 것처럼, ‘--- 다운 것’이라는 아주 막연한 관념들, 즉 어디서 어떻게 심어졌

는지 조차 모호한, 역시도 관광 혹은 관광 없는 관광같은 모습에서 늘상 부딪치게 되

는 것들입니다. 맛있는 것을 찾아다니는 것도 비슷한 맥락입니다. 어찌보면 그 역시

도 일상에서의 특별한 행위로 생각되면서 일종의 관광과도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

다. ‘거주하되 관광하다’라고 하셨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또한 자신이 살고 있는 동

네가 관광지화 되어가고 있을때 보여주는 주민들의 모습도 이러한 모습을 반영합니

다. 물론 건물 혹은 집의 소유자일 경우와 그렇지 못한 임시 거주자일 경우, 입장은 다

르겠지만 그 상황을 불편해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즐기거나, 싫어하는 듯 하면서도

그런곳에 살고 있다는 어떤 우월감 같은 것들을 보여주고 있죠. 마치 그 관광 ‘자원’들

이 자신의 것인듯.

- 구민자, 도시, 관광에 관한 인터뷰에서

소비-향유 주체의 전형적인 초상은 관광객의 초상이다. 그리고 오늘날의 작가들은 이 관광객

의 초상을 이상하게 복제하고 있다. 예술가들의 몸뚱아리가 위치하는 그 어느 장소에서도 어색함

이 출현한다. 관광객으로도, 거주자로도 환원되지 않는 예술가들의 몸뚱아리가 현시하는 존재감

은 실로 오늘날의 소비-향유문화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출현시킨다. 몇 년째 느슨하게 지속중이

프로젝트 <시의부적절한 만남>에서 몇몇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문

제적인 관광지를 방문하였다. 그들의 몸은 그곳에서 지극히 어색한 어떤 출현을 하게 되었고, 그

모습은 현대의 작가들 나아가 오늘날의 텅빈 주체가 처한 어떤 궁핍한 윤리적인 차원을 드러낸

다. 그 일부분으로 ‘구민자프로젝트’를 이야기하려 한다.

<오류행위 실례, ‘구민자 프로젝트’중 쿠킹클래스>

예술행위와 삶의 경계에서 지속적으로 무엇인가를 프로젝트화 하는, 구민자의 작업(여기서

나는 구민자의 작업 설명을 하지 않겠다. 그녀의 홈페이지와 작업들을 실제로 참고하라)또한 연

장선에서 읽힌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틀동안 완주한 마라토너-구민자 이야기(42.195, 2006),

대만에서 구직활동을 하고 한 할머니를 도와준 이야기(직업의 세계, 2008), 경기창작센터에서 거

주하는 동안 선감마을의 몇몇 집 일을 돕고 얻은 재료로 김장을 담궈서 나눠 먹은 이야기(겨우살

이, 2010), 그리고 최근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요리수업을 들을 구민자 이야기(2014 여름),

그리고 최근 실행중인 몇몇 구민자-요리 프로젝트 등이다.

그녀의 프로젝트에서 작가 자신 혹은 참여자들은 항상 어떤 어색한 출연을 한다. 거기에 실질

부정성과 예술

247

적인 차원이 있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그냥 퍼

포먼스를 한다고 해야할지 알 수 없으나, 어쨌

거나 사뭇 어색한 것은 사실이다. ‘연기’는 아닌

데, 그렇다고 실제 삶의 어떤 지리멸렬함이 있

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적절하지 않다고 할 수

도 없고, 딱히 무엇을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노

동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하여간에 쉽게 상징

화되지 않고 계속 미끌어지는 이 행위를 어쩌면

일종의 ‘오류 행위’라고 하는게 나을 것 같다.

최근 본의 아니게 연루된 ‘구민자 프로젝트’

에서, 구민자는 이젠 관광지가 된, 하지만 여전

히 개발 제한-저개발 지역인 족자카르타에서

관광-상품화된 ‘쿠킹클래스’를 ‘얼떨결에’ 들어

버렸다. 물론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현지에서

실제로 현지 시장 재료를 구해서 실력있는 요

리사와 함께 요리를 하고, 그럴듯하게 먹어치웠

다.

쿠킹 클래스의 시작은 근처 시장에 들러 재료를

구입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장의 모습은 어릴 적

봤던 재래시장의 모습과 굉장히 비슷했어요. 요

즘 우리나라 재래시장은 정비, 접근성 강화, 활

성화 정책, 혹은 시장과 미술의 만남, 혹은 관광

지화 등으로 예전에 비해서 많이 변한 것 같지

만요. 그곳에서 일단 인상깊었던 것은 아직도

추를 얹어 무게를 재는 저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실은 올 초에 크로아티아에 갔을

때 그 곳의 시장에서도 그렇게 무게를 재고 있

었거든요. 요즈음도 그런 기계가 새로 제작이

되고 계속 그렇게 쓰이는 것인지 그게 좀 궁금

했지만 잘 모르겠네요. 우리나라 재래시장에서

처럼 닭, 돼지 등 고기나 생선을 파는 방식 역시

도 닭들을 그대로 좌판에 늘어놓고 손질해서 무

248

게를 달아주고 그렇게 팔더라구요.

가장 스스로 당황스러운 것은 저 자신이에요. 이를테면 쿠킹 클래스의 메뉴를 고를

때, 가장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이라 할 수 있는, 가장 고유한 음식이 무엇인지를 물었

던 것이었어요. 우선 인도네시아는 참 큰 나라이고, 굉장히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섞여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면서도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는 점. 정말 ‘자바’ 만

의 고유한 것은 무엇?... 이런 질문이요. (물론 이 관습화된 질문은 누구다 한번쯤 던

져봤을만한, 인삿말같은 게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그런 질문을 하면 어색하기 그지없

다.)

이를테면 외국인들을 만났을 때, 그 사람을 좀 오래 알아서 개인적인 것들을 알아가

기 전에는 그 사람을 ‘개인’으로 대하기보다는 특정 나라나 문화권을 대변하는 사람

처럼 대하게 되거나, 그런 식의 질문들이 주된 대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 것처럼 말

이에요.

그래서 또 하나의 요리 수업을 들어보고자 했던 이유가 있는데요, 어쩌면, 스스로 당

황했던 이유와도 같은데, 그들만의 ‘고유한’ 무언가가 있지 않을까. 그런 것이 요리법,

재료의 사용 방식 등에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요리 수업을 들었던, <via via> 라는 공간과 그 곳의 음식또한 참… 사실 <via

via>가 음식점, 게스트하우스, 투어 가이딩, 등등을 망라한 장소는 거의 20년이 되었

다고 하는데, 그만큼 외국인들 및 여행 가이드북에도 잘 소개가 되어있는 곳이 아닐

까, 싶어요. 때문에 시각적으로도 혹은 맛에서도 뭔가 정돈된 곳일 것이라고 생각되

요. 식당에도 거의 외국인들뿐이었는데, 그 곳이 여행자들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거

나,

현지 식당들과 가격차이가 있거나, 일것 같아요. 또한 요리 수업의 선생님도 실은 호

텔조리학과(?) 라고 추정되는 것을 전공한 분이었구요.

구민자, 2014년 여름,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요리수업을 듣고 나서

이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적극적으로 요리를 해 낸 구민자 스스로도 느끼는 어떤

‘어색함’이 남는다. 이 당황스런, 거슬리는 느낌. 이것이 한층 더 이상하게 되는 것은, “아니, 그게

뭐가 이상한데요?” 라고 할때이다. 즉, 재료를 구하여 요리를 하고, 먹는 행위 자체가 뭐가 문제

란 말인가 하였을때 일어난다는 말이다. 뭔가 짜여진 각본에 의해서 연기를 한 것도 아니고, 어쩌

다가 우연하게 뭔가 실제로 먹고 사는 일을 ‘수행’ 한 것인데, 이상하게도 뭔가 어색하게 마무리

되었다. 그런데, 이런 연기도 아닌, 실제도 아닌 것 같은 어떤 수행들이 내가 보기엔 바로 현대인

이 처한 어떤 빠져나오기 힘든 지경을 보여주는게 아닌가 싶다. 여기서 살며시 언급이 누락된 것

부정성과 예술

249

은, 바로, 그 수행이 이루어진 시스템과 메카니

즘과 그것의 역사이다. 그 얼개 자체가 딱 들어

맞지 않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불합리하

고, 불평등하고, 심지어 착취에 기반한 것이기

도 하고, 나아가 수행만이 남은 텅빈 주체를 만

들어온 바로 그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족자카르타. 그곳은 인도네시아의 자바 지

역에 위치한 곳이다. 탈식민 이후 인도네시아의

수도가 자카르타로 이전되면서, 족자카르타는

일종의 문화도시가 되었다. 아직까지도 저개발

지역으로써, 족자카르타시 정부 자체가 도시개

발을 제한한 덕택에 지금도 초고층빌딩들이 별

로 없고, 관광객을 위한 호텔들과 몇개 안되는

쇼핑몰들이 그 도시의 신자유주의적 개방을 상

징하고 있다. 생활비가 적게 들고, 문화적으로

개방적이면서, 자바문화의 특징인 공동체의식

이 매우 강한 이 지역으로 모여든 전국 각지의

청년들과 문화인구들은 한편으로는 족자카르

타의 현재 특징인, 예술인들이 전업예술가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게다가

1950년대 당시 젊은 예술가들의 자생적인 힘으

로 생겨난 예술대학이 족자카르타의 시내에 자

리잡고 있어서, 앞으로도 이 도시로의 문화인구

의 유입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역성과 교

육, 그리고 자생성이 맞물려서 족자카르타의 현

재 특징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도시

전체적인 ‘가난’과 ‘질병’과 같은 저개발도시의

현실이 극복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도 시민들은 가난에 시달린다. 아마도 인도네시

아 국가 자체가 신자유주의적인 거래국가가 되

어가면서 이 도시의 가난의 조건은 글로벌 자본

에 의해서 착취, 심화될 수도 있다는 점때문에

250

조금은 위태롭게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예술활동가들에게 있어서는 ‘가난’그것을 극복

해야하는 대상으로 치부하기보다는 오히려 활

동의 기반이자 향유의 원천으로 본다는 점에서,

개발국가들의 근대성의 이데올로기를 전면으로

비판한다는 점에서, 이들이 갖는 강한 공동체

의식과 결부된 또 다른 가능성을 보게 된다. 현

재상태에서는 전지구적으로, 예외적인 상태의

어떤 공동체인지도 모른다. 사실 다소 위험한,

이런 낭만적인 해석은 다른 글로벌화된 대도시

들과 비교하여 이곳이 아직까지는 특징적으로

그 로컬리티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이다.

물론, 이 곳에서도 재건축을 안했을 뿐이지,

전세계적인 관광의 열풍과 신자유주의적 거래

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몇몇 관광상품화된 거리

와 상품들을 접하지 않을 수 없다. 음식문화 또

한 이것에 크게 일조한다. 족자카르타 또한 얼

떨결에 관광도시가 되었고, 쿠킹클래스도 비슷

한 맥락에서 관광상품화되어버렸다. 거기에서

구민자가 행한 수행은, 관광의 그것도, 실제적

인 참여도, 실제 삶도 아닌 그렇다고 그게 진짜

가 아니라고 할 수 없는(진짜 요리하고, 진짜 음

식을 해서 끼니를 때웠으니까) 어떤 서로 비껴

나가는 차원들이 한데 만나는 지점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프로젝트가 퍼포밍이 아니라는 것을 알리

지 않는 것. 이 것은 제가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

고, 고민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스스로도 불만

스러운 부분이 있어요. 알리지 않는거. 어쩌면

그것이 효과적일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에

더해, 미술이 아니었으면 하는 생각도 굉장히

부정성과 예술

251

많이 하고 있습니다.(구민자, 작가들의 프로젝트에서 그것이 퍼포먼스의 차원인지 아닌지의 여부

를 참여자들과 공유하느냐의 질문에 대한 대답 중)”

‘구민자 프로젝트’는 우리 현실의 오류-삶에 걸린 불합리한 내기와 절묘하게 만나는 프로젝

트이다. 그리고 그 오류가 직접적으로 지목하는 부분이, 궁극적으로는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미해

결지점이라는 점에서, 나아가 그것이 오류-수행으로서 공공의 장에서 논의될 수 있다는 점에서,

‘구민자 프로젝트’가 어색하게 지속된다면 오늘날의 예술행위가 여타의 유사예술수행들로부터

어떤 이상한 보편성을 획득하는 계기를 보여줄 것이다. 작가로서의 그녀는 항상 우리 사회 문제

의 막다른 지점, 해결되지 않는 지점, 해답이 없는 지점에서 뭔가를 시작한다. 그래서 오류행위는

사전에 이미 예견된 것이며, 그녀는 언제나처럼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단지, 지금으로서는 그녀의

몸, 존재 자체가 그것을 드러내는 매개가 되고 있다고 할 수밖에. 그런데, 한가지 수상한 것은 있

다. 그녀의 행위들은, 그것을 <구민자프로젝트>라고 불러볼 만큼, 좀 재밌다. 이 미궁속에서의 이

상한 유쾌함, 실로 부적절한 조합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예술가가 무능할지언정 무기력하다기보

다는 그 어떤때보다 바쁘고 활기찬 때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오류 행위 둘 - 엘리아의 ‘키친프로젝트’>

요즘 일부 작가들이 괴상한 요리사로 전업을 하려는지, 요리하기, 식당만들기 등을 한다. 이

들은 어떤 때는 공짜로 재료를 구하거나, 혹은 음식 재료로써는 적절하지 않은, ‘이상한’ 재료를

사용하기도 한다. 물론 요리라는 과정은 그리하여 정말 창의적일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별미는

영양성분은 커녕 안전성까지도 검증되지 않은 이 음식을 그럴듯하게 나눠먹는 데 있다. 소위 식

탁에서의 대화라는 것은 ‘먹을만 해요?’ 가 아니라 ‘이거 먹어도 죽진 않겠죠?’의 차원에서 이야

기를 나눠야 한다.

먹기에 걸린, 신뢰-불신의 문제, 복잡한 상품 경제 시스템의 문제, 먹기와 건강하게 살기에

걸린 이상한 이데올로기의 문제 등등은 어떤 ‘과도함’과 ‘궁핍함’ 사이를 오가면서, 적정한 어떤

수준을 계속 넘어버리고 있다. 그러고 보니 ‘먹고 살기’ 와 같이 가장 개인적인 부분이자, 산다는

것에 있어서 기본적인, 기초적인 부분이 가장 시스템적으로 취약한 부분임은 틀림없다.

족자카르타를 기반으로, 수년째 키친 프로젝트를 해오고 있는 엘리아는 최근 족자카르타 인

근의 매우 가난한 동네, Wonoasri보노스리라는 지역을 소재로 프로젝트를 하였다. 이 지역이 갖

는 사회-정치적 문제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어떤 음식 재료들을 구하고 그것을 갖고 같이 음식

만들기와 같이 먹기라는 예술행위를 통해서 공론의 장을 만들었다. 한편으로는 인도네시아의 사

회정치적 현실에서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는 지역 주민들이 어떻게 먹고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비

판적으로 다루고, 한편으로는 아주 훌륭해 보이는 식당을 차리고, 제대로 된 요리 책이나, 레서피

를 만들고자 하였다.

252

참여자들과 함께 그 음식을 시식하는 등의 과정에서 엘리아와 큐레이터 디나의 프로젝트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문제의식을 공유한 공동체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신

뢰의 문제와, 예술행위가 할 수 있는 어떤 다른 가능성 등이 될 것이다. 아래 이야기에서 참조할

수 있는데, 엘리아가 주로 중점을 두는 부분은 예술을 매개로 한 어떤 공동체의 형성이다. 일단은

예술은 공론의 장이 형성될 수 있도록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것이 중요하다는 의견이다. 큐레이터

디나와 엘리아는 예술 퍼포먼스가 단지 말하기 좋은 구실 차원을 넘어서야한다는 고민을 바탕으

로 보다 적극적인 프로젝트를 고민하였고, 실제, ‘이상한’ 재료로 만든 음식을 ‘같이, 먹는’일련의

과정에서 ‘문제적인 어떤 부분들, 어떤 상태들’을 합의-공유한 일종의 암묵적인 ‘공모’상태를 연

출하게 된다. (이 암묵적인 합의의 문제와 공동체의 문제는 아래 디나의 이야기를 보다 참조할 수

있겠다)

이 프로젝트에서 이들은 아주 그럴듯하고 정성들인 과정을 거쳐서 요리를 하고, 마치 아주 훌

륭한 식당인냥 실내장식도 하고, 서빙도 하였다. 생각해보면 이 전체 과정 또한 재미있는 부분이

다. 이것은 한마디로, 현대의 상품 경제 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한 격이다. 이 속에서, 우리는 ‘건강

한 삶’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누락되었다. 그보다는, 일종의 무엇인가를 ‘공모’하는 공범자가

되는 경험이 더 중요해보인다. 그런데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의, 이 공모라는 것은 자의건, 타의건

현란하게 치장된 상품 광고와 그럴듯한 스타일들 속에서 진짜같은 어떤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을

암묵적으로 시인하는 결론에 이르게 한다.

우리 사회의 먹기에 연루된 시스템을 보자. 우선 원산지에서 채취 혹은 착취한 재료들, 때

로 애초에는 하잘것 없는 재료들(과거에는 그저 아무 구분 없이 먹거리였을지도 모르는 재료들)

을 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 재료들은 어느덧 유기농, 국산, 로컬, 수입, 혹은 농민 직접 재배 등

등의 여러 문구를 갖고 마트에 놓여진다. 어떤 고급 식당에서는 비슷한 맥락에서 구해진 재료들

을 산지 직송 등의 문구로 치장한다. 때로 이것은 아주 신선하다는 인식 속에서 소비자를 현혹시

키기도 한다. 이쯤 되면 그 재료에 대한 ‘신뢰’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좀, 헷갈리게 되어있다.

게다가 어디어디에서 배운 요리사, 혹은 이태리 혹은 프랑스 출신이라고 하는 요리사를 직접 데

리고 와서 요리를 시연케한다. 가끔 그 요리사는 식당의 손님들에게 인사도 하며 아주 화기 애애

한 분위기의 식당을 만드는데 일조한다. 손님들은 쉽게 음식 맛을 이야기하며, 먹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확인하려 한다. 식당의 내부 인테리어는 손님과 주인과 관계자들의 다양

한 ‘예술적인’ 취향에 맞춰져서 키치에서 클래식까지 매우 다양하다.

엘리아와 디나의 프로젝트의 출발 또한 다르지 않다. 우선, 어떤 이상한 재료들을 구한다. 그

리고 나름 예술적인 과정으로 요리를 한다. 또한 예술적인 감성으로 데코레이션 한 식당에서 그

요리를 시식한다. 초대된 손님들은 이 시식과정에서 예술가-요리사들과 아주 진지한 대화를 나

눈다. 예술과, 음식과, 요리와, 나아가 이 재료를 구한 그 지역과 이 전체 과정을 거치면서, 아마

부정성과 예술

253

도 누군가는 어떤 질문을 할지도 모른다. “이게, 집에서 해 먹는거랑 뭐가 달라요? ”(엘리아의 키

친프로젝트에서 실제 나온 질문) 어떤 대답을 기대했을까. “다르지 않죠” 한마디로, 대답은 뻔하

다. 그렇지만 질문이건 대답이건 뭔가 어색하다. 정답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공들인 프로

젝트에서 약간은 의심쩍은 음식을 먹고 있는게 사실 이상하지 않다곤 할 수 없다. 물론 일반적으

로는 보다 복잡한 시스템 속에서 이래저래 돈이 더 들겠고, 이 프로젝트에는 작가들이 절반이상

준비한 것이기때문에, 전체 과정을 보면, 다르다. 하지만 음식 자체만 놓고 보자면, 다를게 없다.

아마도 이 전체의 과정이 자연스러워 질수록, 혹은 현대의 시스템을 더 닮아갈수록, 이러한 질문

자체도 나오지 않게 될 것이다. 뭔가 ‘같아지면’, 동일한-다른 차원이 갑자기 아무런 여백도 없이

만나버리면, 이상한 허무개그처럼 사물자체가 드러나버리는 적나라함과 만나게 된다.

엘리아의 키친 프로젝트에서의 디나와 엘리아의 예술수행이 현대사회의 거품경제시스템을

그대로 복제했다고 했을때, 이 복제는 또다른 거품이라기보다는 그 시스템의 보잘것없는 실체를

드러내는 ‘비천해지기’의 수행이된다. 그래서 이 프로젝트에서 보다 주목해서 볼 점은 족자카르

타라는 지역의 어떤 새로운 예술공동체의 형성과 현실 조건의 예술적 승화이다. 가난이란 조건과

저개발 나아가 전지구적 상황에서의 불평등이란 조건 속에서의 어떤 합의와 신뢰, 그것에 바탕

한 공동체의 실현말이다. 사실상 우리 사회에서는 외국 음식 재료에 대해서 불신하며, 심지어 불

매하기도 한다. 즉 이런 합의와 신뢰는 쉽게 무너져버리고 오히려 의심과 불안 속에서 가격경쟁

을 부추기는게 현실임에도, 이들의 프로젝트는 어떤 의의를 갖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거주자

로서, 비참여자로서 나는 한편으로는 어떤 향수를 갖고, 한편으로는 어떤 불가능성을 갖고 이들

의 프로젝트를 지켜보게 된다. 물론 어떤 유쾌한 불편함이 있다. 이 불편함은 앞서 말한 ‘구민자

프로젝트’의 예술가상을 떠올려보면 알 수있다. 실제로 족자카르타라는 저개발-예술공동체-새로

운 관광지에서 현대의 작가상들은 어떤 어색한 조우를 한다. 여기서 출현되는 것은 시,공간적으

로 전혀 다른 차원들이 공존하는 어떤 현상이다. 그런데 이 낯선 조우의 어색한 느낌, 이것은 너

무도 명백한 어떤 것이다.

<대화>

이병희 : 엘리아, 디나 모두 족자카르타를 기반으로 작업합니다. 잠깐만 소개해주세요.

엘리아 : 저는 족자카르타에서 태어났고, 현재 이곳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작업도 이곳을 기

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족자카르타가 전통적인 삶의 형태와 현대적인 삶이 잘 섞

여있고, 조화를 이루는 곳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인도네시아의 다른 도시들에 비교해서 보자

면, 맞는 말이지요. 제가 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때, 이 도시의 커뮤니티, 여러 상황이나 환경

자체가 제가 작가가 될 수 있기에 매우 좋은 환경이며, 제가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상황임을

느꼈습니다. 이 도시 자체가 제가 이웃과 주변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것에 많은 도움을 주었

254

습니다. 어떤 인내심 같은 것도 키울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저는 계

속해서 작가로서 살아가는 것이 이 사회에 어떤 도움을 주고, 필요한 활동이란 생각을 하게됩니

다. 심지어 매우 사소한 부분에서 조차도, 작가로서 저는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이지요. 이런 측

면들이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 곳의 다른 사람들, 타자들에 대해 이해할수 있게 해주었고,

지금도 이해를 도와주고 있으며, 계속해서 타자를 살펴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자극해주는 요인

이 되고 있습니다.

엘리아 : 이곳에서 프로젝트를 하며, 전시를 하면서 겪는 것들이 있습니다. 제가 관람객 혹은

지역 주민들이 참여하는 프로젝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지금껏, 이런 프로젝트는 단지 예

술계에서만 소통될 것이 아니라, 보다 광범위하게 보여질 수 있고,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

으로 확장되어야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갤러리보다는 다른 장소에서 프로젝트

가 행해질 수도 있겠고, 우리가 사람들을 초대하는 방식을 통해서 혹은 프로젝트를 갖고 소통하

는 방식을 통해서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전시형태 혹은 프로젝트가 우리 삶에 대해서

어떻게 말걸기를 할지, 소통의 창구를 열지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수차례에 걸쳐서 저는 음식을

이런 대화의 창구로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음식을 둘러싼 여러 시스템, 상황들, 여러

이슈들을 이야기하게 되지요.

이병희 : 이 대화에서, 제 포인트는 주로, 아트행위와 삶에 있어서의 애매한 경계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애매성 자체가 매우 급진적이고 정치적일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룹니다. 사실상 이 경

계는 예술과 삶 사이에, 담화와 일상 생활 상이에, 문화적으로 가능한 영역과 사회적으로 금기되

고 불가능한 영역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 생활 자체와 가부방제라든가 계급질서

화 된 사회 사이에도 놓여있겠지요. 이 사이에서 예술행위는 일종의 승화의 역할을 하는데요, 제

가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승화라는 것은 일종의 비천한, 혹은 남루한, 어떤 실재적인 차원이 드러

나는 계기라고 하는게 낫겠습니다. 흔히 상상하는 어떤 고급의 화려한 것으로의 승화가 아니라

요.

디나 : 구체적인 실제 세상과 상상적인 세상이 연결되는 메카니즘이 바로 승화의 메카니즘이

겠지요. 일단은 다른 세상이 있을 수 있다는, 어떤 가능성을 믿는다는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술행위 혹은 담화, 혹은 미학이란 차원을 생각해볼때, 일단은 수입된 (서구)미학에

복종하는 차원은 아니어야한다고 봅니다. 아마도, 미학이란 것 자체를 남용-잘못사용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아래로부터 비롯된 미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병희 : 우선, 이 삶과 예술, 혹은 일상과 예술적 행위 사이의 경계에 있어서, ‘먹는 행위’ 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시작하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먹는 행위를 여타의

다른 행위에 비유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섹스행위, 노동행위, 문화행위 등등. 이런 모든 행위들의

경계에는, 퍼포밍이냐 아니면 리얼이냐의 문제가 걸리기도 합니다. 거기서 가장 초점이 되는 것

부정성과 예술

255

은, 그러한 행위로부터 산출되는 그 무엇인가가 도대체 뭐냐인 것이겠지요. 퍼포밍이면, 판타지

나 담화의 차원에서, 리얼이면 직접적인 생산물의 차원에서 이야기가 되겠지요. 가령, 섹스행위

로부터 향유나 자식이, 노동행위로부터 가치나 생산물이, 문화행위로부터 담화나 새로운 창조물

이 생겨난다는 식이지요.

디나 : 사실, 먹기와 관련한 노동의 문제를 생각해볼 때, 우선 노동 자체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노동이 먹기와 관련되는가. 나아가 수행적인 노동과 실제 노동을 구분

할 수 있을까. 이러한 노동으로부터 무엇이 생산되는가, 등등. 아마도, ‘먹는 행위’라는게 이 퍼포

먼스의 차원으로서의 노동과 실제 노동의 경계에 놓여있는, 바로 그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생존

을 위해서, 먹는다는 행위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의 차원이지요. 우리는 살기위해서 먹죠. 그래서

먹기는 우리의 존재, 우리의 구체적인 현실의 일부분입니다. 다른 한 편, 먹기는 특정한 어떤 정

체성을 수행하는 방식 혹은 어떤 존재방식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다른 나라 음식을 먹

는다거나, 아니면 좀 낯선 음식을 음미하거나 하는 행위는 일종의 코스모폴리탄적인 삶의 일부이

지요. 다양한 맛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능력은 일종의 전지구화된 시민의 덕성이기도 하니까요.

최근에 행한, 아디보가 보노스리 프로젝트를 돌이켜 생각해볼대, 음식을 통한 코스모폴리탄적인

발상이,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프로젝트에 참여케 한 원동력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병희 : 물론, 사실상 이 퍼포밍의 차원과 리얼한 차원은 분리될 수 없는 차원입니다. 사실상

하나이지요. 마치 뫼비우스 띠나 영화 메트릭스에서처럼요.단지, 하나이되 여러 다른 양상이 동

시에 존재하고 있다고 해야겠군요. 그런데, 굳이 제가 여기서 이것을 이렇게 저렇게 나눠서 이야

기를 하는 이유는, 최근에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서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무엇인가’가 이

리얼한 차원과 퍼포밍의 차원을 분리하고 있습니다. 불가능한데 말이죠. 불가능한게 일어나고 있

는것인지… ‘무엇인가’가, 뭐냐구요? 어떤 사람은 무능한 정부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

은 가부장제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황금만능주의를 이야기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

은 종북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요. 저는 지금의 이 ‘무엇인가’를 우리 삶을 신자유주의 하에서

전지구화로 엮어내는 시스템이라고 하려합니다. 그리고 이 시스템에 의해서 변화되는 현대 아시

아 사회라고나 할까요. 좀 거창하지만, 지금은 이렇듯 시스템 자체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는 때

인지라 어쩔 수가 없네요.

디나 : 말씀하신,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담화나 환상과 실제적인 것

사이의 분리의 대목은 물질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구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 정신

적인 노동이 물질적인 노동을 대체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보게 되네요. 이 정신적인 노동은 바로

문화노동자들에 의해서 수행되어오고 있지요. 자본주의라는 것은 새롭게 아주 친근한 얼굴을 하

고 다가왔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신자유주의가 기능하는 곳이지요. 문화 노동자들과 관련자들이

산업화되는 것 말입니다. 예술노동자들도 마찬가지지요.

256

이병희 : 덧붙여서, 먹는 것을 갖고, 현재 일어나고 있는 아이러니한 사태를 이야기해보겠습니

다.

예를 들어, 이 이상한 시스템은 건강한 삶을 위한 아주 분명한 어떤 목표와 방법들을 설정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 어떤게 좋은 음식이고, 어떤게 건강에 좋은 음식인지 잘 알고 있죠.

어떻게 조리해야하고, 심지어 어떻게 소화되는지 전체 모든 과정이 아주 낱낱이 알려지고 있습니

다. 참으로 외설적일 정도로요, 가끔은 이게 너무 분명하고 명확해서 도대체 건강한게 아닌게 아

닌가 싶을 정도로요. 너무 외설적인 나머지, 꺼려지기도 하는게 있긴 있죠. 사실 근대기, 온갖 이

분법적인 질서 속에서 금기된 것들이 많을때에는 외설적인 차원이 매우 반가운 어떤 방식이었습

니다. 그런데 사회가 이토록 너무도, 그 어느때보다도 명백하고 외설적이고, 적나라하니, 예술행

위에서의 외설성이, 참 문제적으로 다가오네요.

디나 : 누디티 Nudity라는 개념으로, 예술 행위에서의 외설적인 행위들을 지칭해왔죠. 근데,

이제 ‘몸’이라는 것이 이미 다양한 다른 컨텍스트로 진입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누디티라는 것

을 단지 이 쥐의 경제속에서 매우 자극적인 것으로만 전락시켰지요. 엘리아와 저는 이런 논의들

을 보다 급진적인 차원으로 밀어부치려고 했습니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해프닝들, 나아가 퍼포

먼스 아트라든가, 설치예술, 쇼핑몰들에서 프로모션 이벤트를 하는 광고에 이르기까지, 퍼포먼스

의 차원이 어떻게 상품경제에서, 도구화되는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병희 : 최근에, 엘리아와 디나는 키친 프로젝트를 실시하였지요. 그리고 작년에 자카르타 비

엔날레에서 엘리아는 라이프 패치 팀과 함게 다이닝 프로젝트를 하였지요. 사실상 여기에서도 전

어떤 애매성이 나오고 있다고 보는데요, 가령 이들 프로젝트는 사실상 ‘건강함’이란 이데올로기

를 다루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런 질문들을 상상해본다면 말이죠. 어떤 사람들은, 실제 작가들의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이거 먹으면 건강에 해로운거 아냐? 뭐 그렇다 할지라도 최소한 맛이라

도 있겠지. 맛이 독특하기라도 하던가. 설마 죽진 않겠지..” 등등의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뭐, 프

로젝트가 좀 더 급진적이라면, “아마도 이거 꼭 먹어야하는거야? 먹는다는게 뭐지?” 등등의 궁극

적인 질문도 할 수 있겠지요.

엘리아 : 제가 행하는 일련의 프로젝트에서, 먹는다는 행위, 요리행위 혹은 이 프로젝트의 어

떤 부분이라도, 그것은 참여의 한 부분입니다. 참여라는 용어, 그 행위 자체에 많은 것이 포함됩

니다. 예를들면, 작가에 대한 믿음, 아트프로젝트에 참여한다는 어떤 신뢰를 포함합니다. 또한 관

람이라는 시선의 장 속으로 들어감 등이 그런 참여의 행위에 포함됩니다. 물론 우리가 참여의 수

준, 차원을 고려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기대하는 것은 프로젝트 자

체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하는 경험 자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엘리아 : Adiboga Wonoasri 프로젝트에 관하여

이 프로젝트는 디나와 공동작업으로 실행한 프로젝트 입니다. 이것은 두달동안 “experi-

부정성과 예술

257

mental kitchen” “pop up restaurant”이라는 형태로 실시되었습니다. (Adiboga는 고급?-훌

륭한 레스토랑을 의미하며, Wonoasri는 족자카르타 남쪽에 위치한 지역의 명칭입니다)

공공 프로젝트인, experimental kitchen은 보노사리 지역에서 나온 ‘이상한’ 재료들로써 아

주 훌륭한 식사를 요리해보고자 만들어졌습니다. 이 지역의 특징은, 우선 물이 부족한 것이 특징

입니다. 물 부족은 농업이나 음식물의 생산과 소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아마도 그 때문

인지, 그 지역 사람들은 주로 땅콩과 세사미 빈(프렌치 빈과 유사한 줄기 콩)의 기름 생산업으로

부터 나온 부산물들을 식재료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땅콩기름은 대부분 머리염색재료로

사용되었고, 콩기름은 식재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인터뷰와 조사 과정에서 느낌 바를 바탕으로,

저는 이 지역에서 얻을 수 있는 매우 희귀한, 혹은 이상한 재료들을 구입해보았습니다. 이 재료들

을 갖고 익스페리멘탈 키친을 만들었습니다. 이 키친에 일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개입하도록 초대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일반 참여자들과 함께 이 이상한 재료들

을 갖고 아주 훌륭한 음식을 만들고, 이 요리 레서피를 만들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이 프로젝트에

서 사람들이 직접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코멘트도 하고, 여러가지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

다. 또한 이 프로젝트에서 저는 장소-공간을 어떤 공론의 장으로 활성화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공

간 설치는 처음부터 계획해서 설치한 것이 아니었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계속 고쳐나

갔습니다. 사용한 그릇세트, 앞치마, 안내 디자인, 벽에 쓴 안내문구들, 장식요소들, 초대포스터

들을 모두 새로 디자인하여 만들었고 이것들은 보노사리 지역과 관련된 것들이었습니다.

프로젝트 후반부에서 우리는 새로운 레서피를 모아서, 매일, 일주일동안 팝업 레스토랑에서

제공하였습니다. 매 저녁식사때마다 10인용 테이블을 준비하였습니다. 이 사람들 중에는 보노사

리 지역에서 온 특별손님도 있었습니다. 보노사리 지역에서 온 이 특별손님들은 그곳에서 만들어

지는 음식들과 이 프로젝트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을 갖고 이야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가 ‘pop up restaurant’에서 ‘Adiboga훌륭한(혹은 고급)’ 음식점이란 형식을 취한

것은 일종의 요즘 현대 사회 음식 문화에 대한 패러디였습니다. 요즘에 사람들은 예술적인 요리

법 혹은 미식가와 같은 것에 매우 집착하기도 합니다. 또한 이것은 아무거나 다 먹는 잡식의 역설

이기도 합니다. 잡식에 대한 역설은 음식에 대한 네오포비아(신중함, 새로운 것을 탐구하기 싫어

함, 변화에 대한 저항)와 네오필리아(적극적으로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탐색하는 경향, 변화나 신

기한 것, 다양성 등을 추구하려는 욕망)라는 양극단 사이에 놓인, 긴장과 변주 속에 놓여있는 것

입니다.

디나 : Adiboga Wonoasri Experimental Kitchen 프로젝트에서, 우리는 한달동안 Kedai

Kebun Forum있는 갤러리에서 주방을 운영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우리랑 같이 요리도

하였고, 보노사리 지역에서 구해온 음식 재료들을 요리하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보노사리 지역

은 족자카르타 지역에서도 가장 빈곤한 지역중의 하나입니다. 이 지역은 석회암 언덕으로 둘러쌓

258

여있고, 매우 건조한 기후의 지역입니다. 이곳의 음식 재료들은 사람들의 가내수공업에서 남겨진

재료들로부터 구한 것인데요, 예를들면 참기름 생산과정에서 나온 블랙페이스트와 같은 것이지

요. 도시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음식 재료들에 익숙하지 않죠. 아디보가 보노사리 오픈 키친

은 비전문가 요리사들에 의해서 조리되는 이상하고 낯선 재료들과 관련되어있기 때문에, 일종의

신뢰를 구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방을 운영한 한달, 그리고 식당을 운영한 일

주일이라는 기간동안 건강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음식 맛에 더 관

심이 많았고, 이 재료들이 어디에서 구해진 것인지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작가 엘리아

와 저또한 참여자들이나 손님들이 시식한 동일한 음식을 같이 먹었기 때문에, 건강과 관련된 이

야기를 별로 하지 않은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마도 일종의 ‘공유된 위험 혹은 합의’의 상징 같은

게 아니었을까요?

이병희 : 물론, 이 프로젝트에서 뭔가를 먹은 사람들은 죽진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요?

엘리아 : 잘모르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제가 사람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프로젝트를 만든게 아

니길 바랄뿐입니다.

이병희 : 마찬가지로 저는 우리 삶의 시스템에 대해서 생각을 합니다. 우리 삶의 가두리인 이

시스템이 우리가 잘 살게 하려는거 맞나? 물리적인 차원에서 그게 눈에 당장 보이는게 아니라 할

지라도 최소한 우리의 향유를 위한 것이어야하지 않는가? 최소한 담화나 문화의 차원에서 가능

성은 있어보여야하는게 아닌가? 적어도 이게 우리를 죽이는 시스템은 아니어야하지 않겠는가?

제가, 먹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현대 사회에 대한 이야기로 너무 급하게 도약했나

요? 그렇다할지라도, 우리가 실제 우리 삶에서 이런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니 어쩔 수 없지요.

사실상, 이런 식으로 저는 먹기에 관한 아트 프로젝트가 시스템 자체를 매우 잔인한 방식으로, 그

리고 결정적인 방식으로 겨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작가분들과 큐레이터분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먹기에 관한, 어떤 다른 차원들을 이야기해

볼까요? 뭐가 드러나는지, 무엇과 연결되는지? 프로젝트를 하면서 갈래갈래 연결되는 부분들을

이야기해주세요.

엘리아 : 제가 작업에서 음식과 먹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이유는, 이 행위가 우리

사회에 대해서 폭로 혹은 밝혀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식사 혹은 먹는 행위의 배후에

는 아주 많은 요소들이 개입되어있습니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일상적인 것에서

부터 정치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요. 그리고 이런 요소들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나

누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누구나 각자의 삶에서 음식에 대한, 음식을 매개로 한 갖가지

경험을 하고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디나 : 저는 갤러리 스페이스에서 공유된 경험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일반적으

로 전시라는 장치에서 어떤 종류의 교환이 발생할까요? 관람객, 작품, 작가 그리고 공간 자체. 대

부정성과 예술

259

부분 ‘오브제들-예술작품이건 설치이건-’은 진열되어 있는 보다 공교한 전시형태에서 교환되는

것은 매우 섬세한 것 혹은 매혹적인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때 제가 궁금해하는 것은 어떤

참여에 대한 것입니다. 참여가 이루어지는 전시공간 혹은 전시 경험이라는 발상은 전시라는 장

치를 행위들이 실제로 교환되고 공유되면서 재활성화시키는 장소로 만들고자 합니다. Adiboga

Wonoasri 프로젝트의 경우 이 현장에서 교환될 수 있는 가치가 일종의 ‘신뢰’라는 것을 여러차

례 느꼈습니다. 가령 이 신뢰라는 것은 손님-관람객이 실제로 음식을 먹었다는 것에 대한 믿음,

그리고 이 개방된 부엌에서 같이 음식을 만드는 공유된 순간에 손님-관람객들이 무엇인가를 얻

었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이병희 : 그리고 프로젝트를 하면서, 작가나 큐레이터가 놓는 어떤 덫이 있을텐데요. 그 덫이

바로 일상적인 것들의 승화 혹은 비천하게 되기의 과정에 진입하는 경로인것 같습니다. 가령, 음

식재료, 음식, 요리, 접대하기 등등 먹기와 관련된 일련의 평범한 과정이 어떻게 해서, 예술적인

변화, 즉 승화 혹은 비천해지기를 하게 되나요? 각각의 개별적인 케이스를 잠시 이야기해주세요.

엘리아 : Adiboga Wonoasri 프로젝트를 했을때, 한 관객이 질문을 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요리(그의 의미는 매일 집안에서 부인들이 하고 있는 일상으로서의 요리)가 예술이 될 수 있나요?

이게 단지 갤러리에서 열리는 행사이기때문에 예술이란 말입니가?”라고요. 이 질문은 저로 하여

금 이 프로젝트에 대해서 아주 깊게 생각케 하는 어떤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우리가 설명

하기로는, 요리라는 것은 단지 우리의 매개이고 우리 작업은 사람들이 대화하고, 그들의 생각이

나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어떤 상황을 만드는 것이 예술작업입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어떤 것)

을 다룰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작업입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불완

전한, 깨지기 쉬운 관계로 실험한 이 형식속에서 어떤 사람들은 보다 적극적이길 원했고, 어떤 사

람들은 무엇인가 기여하기를 원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거나, 뭔가를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실패한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는 성공했다고 느끼기도 했

습니다.

이제, 아울러서, 각자의 최근 아트프로젝트를 설명해주셔야겠네요.

디나 : 지금 Made in Common이라는 제목으로 1년에 걸쳐 진행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인도네시아 특히 족자카르타라는 컨텍스트에서 출발합니다. 이 곳에서

우리가 뭔가를 함께 하는 방식, 혹은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어떤 카테고리로써의 일반이라는 개념

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리서치, 레지던시, 리딩그룹, 토론 등 다양한 형태로 수행

됩니다. 그리고 참여하는 여러 다양한 시민들이나 작가들, 리서쳐들은 공동으로 어떤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그 곳에서 또한 공동으로 어떤 것을 생산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 모든 활동들은 2015

년 3월에 전시 형태로 도큐멘트될 것이고 내년 9월에 책으로 나올 것입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제

역할은 전시를 준비하는 것인데요, 아마도 이 전시자체가 Adiboga onoasri 프로젝트를 하면서

260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내년에도 좀 색다른 형태의 전시를 준비하게 될 것

입니다.

엘리아 : 저의 최근의 프로젝트를 이야기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드링고라는 지역의 커뮤니티

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족자카르타 시내로부터 꾀 멀리 떨어져 있고 그곳의 사람들은

이동을 별로 안하는 편입니다. 다른 두명의 작가와 함계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요, 이것은 이 지

역의 음식재료에 대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예술이라는 것을 협업과 참여의 수단으로써

접근수단으로써 사용할 수 있는지를 함께 배워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색다른 연구 방법을 탐구하

고 있는데요, 예를들면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때, 이 지역에서의 옛날 음식들을 놓고 주부들이

벌이는 요리경영대회를 실시하였습니다. 지금 이프로젝트를 실행중에 있습니다.

이병희 : 혹시 프로젝트를 하면서, 이것이 프로젝트-퍼포밍의 차원이란 것을 알리지 않는 것

이 훨씬 효과적일까 하는 생각은 안해보셨나요?

디나 : 사실 효과적이다 라고 했을때는 일정정도 어떤 획득할 고정된 목표가 있는 프로젝트에

서 사용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 프로젝트에서 엘리아와 저는 사실 뭘 기대해야할 지 몰랐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기대한 것이라면, ‘실질적인 대화’라고 할까요. 사실 이런 불확실성을 바탕으로

프로젝트라는 실험을 하게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 프로젝트 스페이스를, 때로 performance

space, living art space, a kitchen등으로 불렀습니다. 아마도 이런 논의를 통해서 예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뭔지 보게 되겠지요.

엘리아 : 이 부분은 우리가 매우 신중하게 생각해야하는 부분입니다. 아직도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때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너무 많이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프로젝트를 하는데 더

효과적이고, 쉽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실제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 대

해서 분명하게 알려주지 않는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으며 윤리적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가 할수 있는 최선은 수행하는 작가들이나 참여자들 양쪽이 모두 이해 할 수 있는 새로운 언

어를 만드는게 아닐까요. 그리고 서로의 생각에 대해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를 더 개

방적으로 만드는게 좋겠죠.

이병희 : 건강한 삶이라는 것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가요?

엘리아 : 건강한 삶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권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많

은 긴장과 마찰이 발생하게 되어있지요. 예를들어서, 건강한 음식이라는 지식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 지식을 우리가 습득하기까지에는 어떤 정치적인 이슈들이 역할을 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건강과 우리 나라의 존엄성을 위해서 사람들이 쌀을

주식으로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쌀을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

곳의 사람들은 옥수수나 사고와 같은 다른 스타치를 먹습니다. 그들의 문화에 임베디드 된.. 건강

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쌀을 소비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쌀을 얻기 위해

부정성과 예술

261

서 싸워야만 하지요.

이병희 : 어떤 공동체, 혹은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구민자 : 커뮤니티에 대해서는 또 복잡한 딜레마에 빠지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말하다보니 결

국 많은 문제가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 속에서의 힘겨움, 피로감 같은 것들을 느끼는 것이 제가

요즘 느끼는 큰 감정인 것 같습니다. ‘국가’ 라는 개념을 완전하게 부정하고 싶지만, 사회 곳곳,

그리고 나 자신의 삶에서도 벗어날 수 없이 뿌리를 내린 관념이고, 때문에 어떤 방식이든 커뮤니

티, 라는 것이 형성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우선은 거부하고 싶지만 당연한 상황들을 거부하고 있

다는 생각입니다. 일단 소소한 커뮤니티들- 사회적으로 어떤 대안으로서 만들거나 이상적인 것

으로 여기는 것들이 어떤 면에서는 더 이상 변혁이나 근본적인 변화- 혹은 혁명이라는 것이 불가

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생각에 또 회의감이 들게 됩니다. 결국은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는 그것이 어떤 커뮤니티와의 연관성 등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도 꽤 큽니다. 실상은 그런 커뮤니

티가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도 있습니다. 결국은 완전한 변혁- 모든 근본적 가치들에 대해서- 을

꿈꾸거나 혹은 완전한 개개인, 어디에도 실제로는 환원되거나 연결될 수 없는 완벽 복합-복잡한

한 상태로서의 개인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 상상 자체가 작업으로 직접 연결되거나 하는지, 해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엘리아 : 아트커뮤니티에서 저는 우리가 예술을 통해서, 저 자신은 물로 이 사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나누게 됩니다. 이런 컨셉이 제 작업의 기본 구조가 되는 것 같습니

다. 이런 생각이 저로 하여금 세상은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볼 수 있게 하며,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그래서 제게 있어서, 이러한 아트커뮤니티는 우리 사회에서의 수많은 가능성의

토대가 된다고 봅니다. 물론 이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바꿔나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만, 적어도 프로젝트 혹은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그 어떠한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삶의 가

치를 재확인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이런 공동의 정신을 갖고 있으며, 이것을 수행할 능력

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지켜보고, 배우고, 계속해서 노력해나갈 것입니다. 아마도, 이

것이 제가 아트커뮤니티의 한 부분으로써의 제 삶을 일궈나갈 수 있는 최선이 아닌가 합니다.

262

이병희

휴먼_비휴먼 거래

망각되는 휴먼, 그리고 도착적 대상들의 벌거벗은 민낯

뭐 아직까지도, 골몰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전제 하에 이야기를 해보자. 우리가 인

본주의-휴머니즘이라고 했을때, 주체-인간이나 인간적인 활동(노동과 철학, 그리고 문화-예술행

위)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신자유주의-글로벌라이제이션 시대(컨템포러리)를 문제적으로 비판해

온 주된 내용은 이것이다. ; ‘모던이란 시기를 거치면서 네이션-스테이트(민족-국가, 혹은 국가)

의 경계(국경 혹은 통치권의 내외부)가 그어졌고, 그 사이에서 여러 폭력이 자행되었다. 그리하여

휴머니즘에 기반한 유엔 창립 등, 인터네셔널 조직을 만들면서 한 특정 민족이 다른 특정 민족을

노예화시키지 못하도록 금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 속에서 네이션-스테이트의 통치기관인 정부

는 국민과 글로벌 시민의 안전을 위해서 모두 다 같이 노력해야하는 윤리적인 단체로 지속적으로

교육되어 온 것이다. 그런데 현대에 이르러 적자생존의 원칙에 입각한 자본주의 글로벌 경쟁시스

템에서 살아남으려는 경쟁기관으로서 다시 거듭나고 있는 정부는 기존 민족개념, 즉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자본을 움직이고 금융을 관리하는 능력에 의해서 그 통치권이 제대로 발휘되는

지를 평가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다보니 부를 축적하는 능력을 가진 정부는 국민 혹은 글로벌 시

민의 안전을 희생하더라도,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여태껏 교육시켜온

휴머니즘적 가치들은 마치 서비스차원에서 계산되거나 아니면 쓸모 없어지고, 네이션-스테이트

들은 다시 다른 형태로 둔갑한 괴상한 정부시스템을 내세우며, 국민 혹은 글로벌 시민을 모조리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나아가 모두를 영원한 노예상태로 만들어놓기에 이른 것이다. 즉, 이 시스

템은 인간으로하여금 휴머니즘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나쁜 상태에 이르게 한 것이다.’

부정성과 예술

263

물론 이제는 누구나 신자유주의-글로벌라이제이션을 비판한다. 아무리 다윈식의 진화론을

제멋대로 적용한다 할지라도, 이 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 부를 축적한 세계 1%라고 하는 것은 우

스꽝스럽기 그지 없는 망상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수정 혹은 대안을 너도나도 내세우지만, 정작

자유거래 혹은 무한 경쟁, 그리고 자본의 유치를 위한 경쟁은 지속되고 있을 뿐이다. 특히 동북-

남 아시아에서의 이런 작태는 갖고 있는 자본이 부족하다는 구실에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계속

나쁜 쪽으로 향하는 거래들을 반복한다. 마찬가지로 휴머니즘 연구자들은 모두 입을 모아, 계속

똑같은 경고를 하게 된다. 우리 사회 전체가 반복한다. 불평등 자유무역의 과정에서, 금융자본을

살리고, 관광수입을 늘리고,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명목하에 글로벌 기업들은 여전히 대도시에 기

념비적인 마천루를 세우고, 부대 시설인 호텔, 쇼핑몰들을 우후죽순으로 병렬시킨다. 안전한 보

금자리보다는, 자본을 재생산하는게 필요하다는 논리다. 이 케케묵은 착취에 기반하는 개발 위

주 국가들의 주된 경제개발원칙 때문에, 아시아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도 당분

간, 어쩌면 영원히 안전한 삶을 희생하고, 점점 더 욕심이 많아질 수 밖에 없는 정부시스템에 봉

사해야하는 시녀로 살아가야할지도 모른다. 바야흐로 우리 현실은 이러한 도착적 대상들, 판타지

의 현실화를 이루어내고야 말겠다는 심산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세계인구의 극 소수가 절대적인

부-자본을 소유하고 있고, 그 부-자본-금융이 의존해왔던 노동력(생산잠재력)은 이제 점차로 기

계->사이보그나, 프로그램 즉, 로보트 형태로 대체되고 있다. 즉 로보틱스와 생명공학은 인간성

의 변화(나쁜 쪽으로의)를 더욱 부추기는 것 처럼 보인다.

물론 번영이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위한 논리가 좀 잘못되어있다.

264

기존 자본을 굴리는 금융관리가 가져올 수 있는 번영과, 인간 노동과 창의력이라는 휴먼리소스를

계발시켜서 새로운 자본을 창출해내서 미래를 개척하는 것에는 균형이 필요하다. 물론, 휴먼리소

스 혹은 새로운 노동력 계발과 개발이라는 노력조차도 과학이라는 도구를 도착적으로 사용하는

나머지, 오히려 인간이 갖는 독특한 차원을 잃어버리고 있는 듯 하다. 즉 인간이 점차로 상실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휴먼, 그것은 이제 진정 망각되는가. 모더니즘을 통틀어 우리가 인간-인간의 관계

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면, 이제는 휴먼-비휴먼의 관계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야한다. 섣부

르다고? 절대 그렇지 않다. 역사의 교훈이 이미 가르쳐주고 있다. 즉, 우리가 살면서, 교육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역사 속에서 한가지 배워낸 것은, 이것이다.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이행은 없다,

언제나 역사는 폭력적으로 이행하였고, 변화하였으며 그래서 근본적으로 지적된 문제들이 단 한

번도 풀린 적이 없이, 차곡차곡 쌓여서 현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지금도 마찬가

지이다. 이 지적된 문제들은 풀리지 않고, 고스란히 수장된채로 미래로 이어질 것이다. 항상 나쁜

것은 더 나쁜 것에 의해서 대체되거나, 망각되었다. 그리고 지금의 시스템은 바로 그 나쁜 것들이

자가증식하는 시스템이다. 나쁜 휴먼, 그것은 너 나쁜 어떤 것으로 대체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주체상의 변화

근대의 가장 탁월한 인간과학이었던, 정신분석이란 것이 주체에 관한 연구라고 했을때, 주체

상의 변화를 그에 따라 점쳐볼 수 있다. 가령 정

신분석에서 이야기하는 히스테리증자를 우울증

자가 될 소질이 있는 주체라고 하면서도, 그것

을 왜, 정상이라고 보냐면 그것은 외부와의 끊

임없는 소통을 갈망하는 사회적인 주체이기 때

문이다. 그래서 그 주체의 불만 혹은 욕망은 미

래 혹은 사회와의 새로운 소통을 만들어내는 가

능성이 전제된 주체상이다. 적어도 인간을 사회

적 동물이라고 했을때 말이다. 그런데, 최근에

는 우울증적 주체는 그 증상들이 채 발현되기도

전에, 자살로 마감하기 일쑤이다. 자살이 참, 쉽

게 선택되는 세상이다. 게다가 지금 실제 현실

에서는 소수라고는 하지만, 영화나 인터넷 소설

등 대중문화에서 인기있는 주체의 증상적인 양

상을 보자. 그것은 히키코모리나 사이코패스이

부정성과 예술

265

다. 이들은 실제로 정신분석의 용어로 보자면

외관상, 도착증이나 정신병으로 진단할 수도 있

다. 그러나동일한 반사회적, 비사회적인 증상

이 도착증이나 정신병의 발현이기도 하지만, 때

로는 히스테리_신경증의 발현일수도 있기 때문

에, 이것을 사실상은 발현되지 않은, 즉 자기비

하가 폭력적인 상태로 변질되버리고 만 우울증

의 극단적-변질된 형태라고 하는게 낫겠다. 현

대사회에서 가장 빈번하고 가장 전형적인 주체

의 증상인우울증이 사회적으로 무시-무관심-혹

은 방치된 채로 지금의 상태에 이르렀고, 그것

을 쉽게, 문화의 형태로 향유하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겠다. 무시된 주체상은 적절한 ‘알고 있

다고 가정된 주체-분석가’를 찾지 못하고, 증상

을 질병화 시켰다. 그래야만 그의 욕망의 대상

(보호자 혹은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정부 혹은

국가, 혹은 이웃이 그/녀를 (비정상적인 방식으로라도)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시로 일관

하면서 보호자 혹은 욕망의 대상이 찾아 낸 것은 인간의 형태가 아닌 다른 대체물이다. 이와 함께

우울증적 주체는 이미 주체 내부에서 다른 질환을 잉태시키고,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그 보호

자의 주목을 끌만한 어떤 병리적인 형태로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져온 폐단은, 주체가 더 이상

사회에 대해서 어떠한 불만도 갖지 않거나, 심지어 어떤 기대도 (그것이 왜곡된 기대라 할지라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주체는 거울상을 갖지 못한채로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반적인 규

준들을 아무런 비판이나 반성없이 그냥 체화시켜서 실천하는 이상한 상태가 되었다. 지속적으로

진화되는 좀비 영화와 좀비 드라마들이 우연은 아닌 것이다.. 게걸스럽게 인간을 먹어대는 좀비

는 마치 먹기 자체만을 반복하는 기계와 같다. 마찬가지로 배고픔을 모르는 오늘날의 주체는 먹

기를 거부하기보다는 끊임없이 소비만 하는 이상한 지경에 처해있다. 무시무시하게도 이제 주체

는 욕망하기를 멈추고, 만족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욕망 없는 만족에 머무는 이상, 주체

는 이미 산죽은 상태와 다를바 없다. 히키코모리와 사이코패스가 사실상 죽음충동의 고착이라는

사실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현대의 주체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비단 거래에만 몰두하는 사회-정부 시스템 뿐만이 아니

다. 우리가 그토록 웰빙과 새로운 생명을 외치며 연구하고 있는 생명공학이라든가 로보틱스, 사

이보그 개발 등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자. 우선, 이런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몸뚱아리를 미래의

266

비-휴먼형상을 위한 실험대로 쓰고 있다. 휴먼을 대체할 대체품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인

간의 몸뚱아리는 그것의 생식기가, 태어날때 여자의 그것이건, 남자의 그것이건간에 사회적인 어

떤 소명에 의해서, 체화시키는 방식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 그 몸뚱아리가 현현해내고, 향유해내

는 차원과 종류, 나아가 삶이 달라지게 되어있는, 불완전한 어떤 것이다. 그래서 이 몸은 젠더, 혹

은 젠더 호명 기제로부터의 실패를 통해서 사회의 호명 메카니즘을 낱낱이 비판하는 쟁투의 장

이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 주체의 몸뚱아리는, 이런 쟁투의 장으로서의 역할 즉 생식기

능과 성애기능 등이 교전하였던 그 차원 모두를 무관심한 차원으로 돌려 버리고 있다. 그 육질

성, 육체성 조차도 일종의 쉽게 핸들가능한 상태로 바꿔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토막살인, 신체 장

기 거래, 인공수정, 유전자 변이 실험, 뇌 신경 연구, 성형, 다이어트 등 온갖 몸뚱아리를 갖고 행

하는 일련의 생체-생명공학이라는 이름의 실험들은 그것이 법에 위반되느냐 아니냐를 넘어섰다.

휴먼을 대체할, 휴먼 이상의 어떤 것을 내다보는 행위들이며, 연구들이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

이 불완전한 이 몸뚱아리의 소유자인 휴먼은, 한낫 사물, 대상의 차원으로 혹은 도구, 발명품의

차원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재발명된 인간의 몸뚱아리는 이제, 성을 드러내고, 실현하고, 생

식을 하는 등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내는 쟁투의 장이 아니라, 비휴먼적 발명을 실험하는 실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휴머니즘, 인간에 대한 연구는 인간적 가치 혹은 향유 특

성과 타자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비휴먼의 개발의 전제 조건들, 휴먼-비휴먼의 대체를 어떻게

해낼 것인지를 연구하는 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몸뚱아리 차원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

몸뚱아리. 그것은 어떤 자국이다. 그것에 아직도 휴먼차원에서의 폭력들이 자행되고 있기 때

문에 쉽게 그, 인간차원이란 것이 폐기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무리 첨단 과학으로 이 몸뚱아리를

무엇인가로 대체하고 있더라도, 그것이 완전할 것이란 망상은 갖지 말아야한다. 먼, 미래를 극단

적으로 상상하더라도 비극적으로, 휴먼의 흔적, 자국, 증거로서의 몸뚱아리는 아마도, 어딘가에

꼭 들러붙어 있게 될 것이다. 마치 온갖 세련된 방식으로 거래되는 현대의 신자유주의적 노동시

장에서, 실질적인 노예가 아직도 존재하며, 몸뚱아리들은 아직도 성-거래, 매매되듯이 말이다.

이 몸뚱아리를 둘러싼, 극악무도한 폭력들에서부터 일상적인 폭력들에 이르기까지 여태 자행되

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마도, 이 폭력이 내재화된다면, 비휴먼의 개발에 있어서는 이런 폭력들

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하는 어떤 장치나 대책을 대체몸뚱아리에 이식시킬 필요가 있을지도 모

르겠다.

휴먼-비휴먼 차원을 통틀어서, 지극히 불안한 것은 이 폭력적 차원이 지속되기 때문이 아니

다. 오히려 이 폭력적인 차원이, 길들여지고, 상품이 되고, 메뉴얼화되고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아니 왜 폭력이 좋은 것도 아닌데, 뭔 소리냐고? 사실상 폭력이란것은 어쩔 수 없이 양산되는 어

부정성과 예술

267

떤 욕망의 다른 메카니즘이다. 어떤 욕망의 기제가 잘못분출되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폭

력이 길들여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분출기제를 무조건 억눌러서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욕망

자체를 없애버려서이기도 하다. 지금 불안한 것은 후자 때문이다.

예를들어, 동남아시아에서의 메이드문화와, 한국에서의 다문화가정(주로 베트남처녀들 데려

다가 강제 결혼시킨 예), 그리고 조선족 노동자에 대한 차별 등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처음에는 주

인입장의 사람들과 타인 입장의 사람들은 매우 폭력적으로 결합되었다. 때로 때리고 맞고, 마치

겁탈하듯 시작되는 결혼생활을 상상해보라. 그것은 폭력으로 시작하여, 폭력적으로 지속되고, 그

리고 사회는 이것을 묵과할 수 없어서 수많은 해결책을 내놓고, 메뉴얼을 내놓는다.

그런데, 갑-을의 관계, 혹은 주인-노예의 관계를 생각해볼때, 여기서의 갑은 절대 주인, 혹은

남자, 혹은 한국인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오히려 갑은, 이런 관계를 만들어낸 시스템이다.

이것이 합법적인 국가간 몸뚱아리 거래라는 점에서 볼때, 이제 정부 혹은 정부의 인가를 받은 에

이전시 시스템이 갑-주인이고, 실제로 몸뚱아리를 부딧끼며 사는 시민들은 단지 을에 불과하다.

을끼리의 전쟁에서 발생하는 분쟁들에 정부는 매우 강도높은 벌을 준다. 때로, 추방, 퇴출, 혹은

심지어 나아가 ‘같이 어울려 잘 살아요’라는 프로그램과 교육. 매일 신문에 나오는, 어떻게 하면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약자들을 돌볼 수 있는가 하는 폭력 예방 프로그램과 처방들 말이다.

이런 길들이기는 지속적으로 세련되어지고, 메뉴얼화되어가고 있다. 마치 그것은 온갖 블로그와

식료품 포장지에 쓰여있는 요리법을 보는 느낌이다. 어떻게 하면 더 맛있게, 웰빙 요리를 만들 수

268

있는지에 대해서 도착적으로 메뉴얼화시킨 그것 말이다. 이렇게 해서, 휴먼이 버려지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보취급당하다가, 바보가 되어버려서 버려진다는 것이다.

물론 이미 버려진, 즉 쉽게 불공정 거래되는 이런 몸뚱아리들의 역할은 곧 머지않아 로보트와

같은 어떤 대체물로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예를들어, 우선 제일 먼저 (합법이건 불법이건) 성매매

혹은 성교환이 섹스인형에 의해서 대체되게된다면 기능만 남기고 사라질 것들이 많이 있다. 결

혼, 가정, 출산 등등. 가장 기본적인 인류재생산 시스템은 유전자복제라든가 로보틱스 등의 도움

으로 많은 변화를 겪으면서 기존 휴먼차원의 문제들이 없어질 것이다. 과연 이 과정에서, 마치 정

부가 인류를 위한 정부였다가 인류를 착취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것과 마찬가지로 인류는 스스로

선택하여 개발시키고 있는 이들 장치들에 의해서 이상하게 대체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물

론 지금껏 수많은 오락기계들이 진화해왔고, 인류는 멸종되지 않았다. 단지 이것은 인류의 향유

를 조절하는 장치들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오락기들이 단순 보조장치가 될 지, 도착자들

을 위한 궁극적인 시스템이 될지, 그리하여 또 다시 이 오락기들의 노예가 될지는 두고볼 문제이

다. 이미 현재의 욕망은 경쟁시스템에 의해서 일정정도 조절당했다. 즉 리비도가 어느 한 쪽으로

과도하게 몰려있다는 것이다. 이 폐단때문에 우리는 지극히 괴상한 증상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증상들을 길들이기, 오락기들의 지속적인 출현과 또한 그것의 증식과 진화 이런 일련

의 양상들은 지금의 이 증상적인 주체상을 길들이는, 즉 도착과 정신병이 기존 우울증적 주체상

을 대체해버리는 과도기가 될 수 있다.

자본과 금융의 유치를 위한 글로벌 기업들과 정부의 결탁. 그것은 이제 부끄러움의 차원도 없

이 지속되고 있는 어떤 조건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우리 일상에서조차도 이러한 부끄러움의 차원

이 없는 멀쩡한 거래들은, 우리의 도착적인 환상이 만들어내는 온갖 사물들을 상품으로 내놓고

있다. 우리의 환상은 고유성을 상실한채, 거래의 대상이 되어 시장에 나오게 된 것이다. 디자인에

의해서 우리의 삶이 조직되기에 이르렀으니 우리의 일상은 이제 욕망에 의해서가 아니라, 디자인

과 상품들에 의해서,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사용법을 익혀가면서 보내는 시간에

의해서 조직되게 되어있다.

부정성과 예술

269

이 비휴먼의 차원은 물론 온갖, 기계, 동물, 인간, 사물들, 현상들 모두를 포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보다 이 현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생각해야될때가 진정 도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휴먼 상실 후의 대상들의 존재론의 인정. 이제 기존의 휴먼적 시각에서의 가치들이란 것이 이렇

게 서서히 나쁜 모습으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좀 더 적극적으로 폐기처분되어야하는 것은 아닌

가 모르겠다. 슬그머니, 오밤중에, 어디론가 파묻어버리지 말고, 제대로 폐기처를 마련하여 버려

야한다는 것이다. 휴먼의 차원에선 한번도 일어나지 않은 제대로된 망각과 애도. 그것을 한번 해

봤으면 좋겠다.

자신의 욕망을 거래의 대상으로 내놓는 위험한 행위

최근 아시아 국가들에서 유행하는 것 중에 하나가, 쓸모없는 향유들을 카테고리화시키는 것

이다. 일종의 생산 노동력으로 둔갑시킨다고도 할 수 있고, 음성화된 활동들을 양성화시키는 것

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잠재된 이상한 욕망들을 길들이는 시스템인데, 예를들면 과

거의 개발국가들에서는 깡패인력들이 군대나 경찰인력이 되어서 정부 호위대가 되기도 했었던

것을 기억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것은 사회에 장차 해가 될 지도 모르는 어떤 요소를 사전에

막아버리고, 쓸모있는 뭔가로 바꿔놓는, 아주 기가막힌 쓸모없는 것을 ‘승화’ 시키는 한 예이다.

가령 최근에도 이런 예들은 많이 있다. 맥도널드에서 청소하는 노인들, 마을 어귀를 장식하는 미

대나온 백수들, 오지에 가서 봉사활동하는 종교인들, 블로그에서 수다떨다가 파워블로거-광고선

동자 되기,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막말하다가 정치비평가 되기 등등.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양성

화되어서 사회에 쓸모있는 일꾼이 되기때문에 ‘건강한 우리 사회’, ‘발전하는 우리 사회’라고 생

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극히 유명인이 되거나 성공하지 않더라도, 취미활동을 양성화시켜서 재

밌게 살아가니 얼마나 좋냐 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이런 취미활동의 양성화에는 전제가 있다. 취

미밖에 할 수 없는 사회 시스템이 먼저 우스꽝스러운 전제이다. 그리고 치명적일 수도 있는 취미

들, 즉 분산된 리비도를 한 곳으로 모아서 성급하게 그 가능성을 차단하기. 이것은 아주 나쁜 편

에 속한다.

270

예를들어, 한 꼬마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놀기만 한다. 어른도 아닌데다가 어른이 되어서 뭘

할지도 아직 까마득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다. 그런데, 가만보니 그 아이가 동물을 좋아하

고 동물 돌보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그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수의사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지속

적으로 그와 관련된 것을 가져다주고,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주고, 공부도 시켰다. 아이가 수의사

가 되었을까? 어떤 아이는 기질 자체가 너무 폭력적이다. 그래서 남에게 피해를 줄까봐 그 폭력

을 다스리게 하려고 온갖 클리닉, 운동, 스포츠, 아름다운것(!) 경험하게 하기 등등 모두를 했다.

그 아이가 비폭력 평화주의자가 되었을까? 매번 무슨 일만 있으면 거리로 나가서 시위를 하는 시

위대가 있다. 그 시위대는 사실상 반대하는 것은 있지만, 원하는 것은 뚜렷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

분이다. 교통도 마비되고, 경제활동에도 저해가 되므로 정부는 어떤 제안을 한다. 그 제안때문에

가령 시위대는 원하는 것을 얻게 되었을까. 한 가난뱅이 예술가가 있다. 그는 예술을 하지만 너무

가난하여 자식을 낳을 수도 없을뿐더러 심지어 예술활동을 하기도 힘이 들다. 그리하여 예술가

후원단체가 생기고, 예술가 지원단체도 생기고, 예술가를 예술하는 노동자로 분류하여 어찌어찌

월급까지 주게 되었다. 이제 그 예술가는 자식도 낳아서 기를 수 있을만큼 나름대로 평범한 경제

수준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그 예술가가 예술활동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무엇이 되기도 하고, 되

었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서, 잠재된 가능성들, 즉 통제하고 싶어했고, 조절하고 싶어했던 그 모

든 잠재된 가능성들, 폭력적일수도 있고, 해를 끼칠 수도 있었던 모든 것들이, 그 ‘무엇’이라는 가

두리, 상징적인 지위 속에서 안전하게 자리를 지키고, 더 이상 욕망하기를 멈추고 순조롭게 기능

을 하게 될까?

성급하면서도 너무 분명한 어떤 동기부여들이 있다. 그것때문에, 리비도는 어디론가 가려다

가 말기도 한다. 이른 닫힘. 우리 사회는 너무도 분명하고, 자세하게, 지나치게 메뉴얼들을 만드

는데 골몰하고 있다. 그리고 너도나도 그것을 보란듯이 관광상품처럼 진열해대고 있다. 또한 쉽

게 불완전한 휴먼을 완전해보이는 기능적인 보철기계들로 대체하고 있다. 완전/불완전이 무엇인

지. 가능성이 무엇인지. 제대로 논의해야할 시점을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이른 닫힘

때문에 진정 욕망이 차단되고, 휴먼이 망각된다면 그건 더 나쁜 지경일 것이다. 쾌락원칙, 즉 만

족하면 그 다음의 만족꺼리만 찾아나서면 되고, 심지어 항상 빠르게 제공되는 그 만족꺼리들에

의해서 리비도는 결국 정체된다. 비록 시작은 경쟁에서 시작했지만, 결말은 승자가 없는 경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기대는 있다. 이렇게 더 나쁘게 진화하는 것 속에서, 모이

게 되는 어떤 다른 리비도는 분명어디선가 폭발하게 되어있다. 가스처럼 새어나오건, 폭탄처럼

터져나오건 간에, 그것은 순식간에 그리고 갑자기, 한 순간에 잠깐 말이다. 그 순간을 일단은 부

적절한 예술적인 순간이라고 불러보자. 그리고 지속-반복하지는 말자. 메뉴얼을 만들지 말자는

말이다.

게다가 이 리비도가, 어떤 매뉴얼에 자리를 잡았다고 하더라도, 그 리비도의 고유의 역할은

부정성과 예술

271

매뉴얼 이상의 그 무엇으로 만드는 데 진정한 역할이 있다. 꼬마녀석이 수의사가 되어서 한낫 동

네 동물병원의사로 연봉이 수억이 되는 잘나가는 아들놈으로 생을 마감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수의사보다 더한 그 어떤 수의사의 역할을 하고 어떤 경계를 넘어선, 괴상한 수의사로 살게 할 것

인가. 꼬박꼬박 수입이 생긴 예술가는 고객이 주문하는 작품들을 꼬박꼬박 상납해내는 노동꾼으

로 살게 되지 않는다. 그는 예술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수입과 상납의 시스템을 넘어서는 무

엇인가를 만들어내거나, 만들어지게 할 것이다. 그 어떤 시스템이 그 시스템 이상의 그 무엇을 상

상케 하고, 요청케 하는 행위들 그것이 이 리비도들의 역할이다. 섣불리 닫히게 하지 말고, 섣불

리 메뉴얼화시키지 말자. 안타깝게도 현대의 주체는 신자유주의의 이념으로부터 쉽게 타협하는

못된 기질을 배웠다. 거래와 타협이 무슨 신종목 윤리 덕목이라도 되는 줄 안다. 그러다보니 자신

의 욕망을 거래의 상품으로 내놓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래의 비휴먼적 대상들이 자신의 몸뚱

아리를 대체해버리도록 내버려두는 어떤 포기를 배우고 있다. 일련의 이, 가능성을 차단하는 행

위야말로, 지극히 비윤리적인 폭력이다.

이 글은, 문화광광부.예술경영지원센터의 프로젝트 비아의 지원을 받은, <시의부적절한 만남

> 프로젝트 성과물 중 하나입니다.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김영주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경계에 선 게임들과 새로운 커뮤니티

게임과 사회 시스템

274

김영주

미술관의 비디오게임 (독일)

비디오게임과 현대예술에 대한 글을 쓰면서 비디오게임은 예술인가 아닌가를 화두로 꺼내고

싶지는 않다. 그것을 말할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런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라는 대답

이상이 나올 수도 없는 질문인 것 같다. 하지만 게임을 미술관에서 아카이빙하거나 전시하는 것

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다. 게임디자이너로서 내가 만든 작은 게임들이 사람들과 접할 수 있는 플

랫폼이 하나 더 생긴다는 점에서 말이다. 소위

“아트게임”류로 불리는 비디오게임의 장르 중에

서는 미디어아트와 비슷한 방식으로 향유되는

게임들이 있고, 게임엔진이나 기존의 비디오게

임이 미디어아티스트에 의해 변용되어 다른 의

도를 지니게 된 작품들도 있다. 즉 어떤 것이 어

디서 어떻게 보여지고 소비되느냐의 맥락에 따

라 비디오게임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미술관에서의 비디오게임 아카이빙 및 전시

는 미술사 안에서 비디오게임을 어떻게 놓을 것

인가를 고민하면서 출발한다. 게임문화를 다룬

현대미술 작품이나 예술장르로서의 비디오게임

등 대상은 다양하다. 코라도 모르가나는 아트게

임(Artgame)과 게임 아트(Game Art)를 구분

하는데, 아트게임(Artgame)은 플레이 매커니즘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75

이나 서사 전략, 시각적 언어에서 예술성을 보

여주는 게임이며, 게임 아트(Game Art)는 게임

속성이나 언어를 사용/남용/오용한 예술작품이

다 (<Artists Re:thinking Games>, 2010). 하

지만 이 두 용어는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고 비

디오게임에 대한 전시라는 이름 아래 뒤섞여 있

는 경우가 많다.

2012년부터 시작된 뉴욕 MoMA의 게임 아

카이빙은 어떠한 게임을 어떤 형식으로 미술관

에 가져다 놓을 것인가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

폈다. 독일의 경우, ZKM에서 90년대 후반부터

비디오게임을 전시에 포함시켰고, 2013년에는

“비디오게임과 실험적 형태의 플레이”라는 주

제로 ZKM_Gameplay라는 상설전시를 만들었

다. 큐레이터인 슈테판 슈빈겔러는 게임이란 오

디오비주얼을 다루는 컴퓨터 프로그램이며 컨

트롤 가능한 이미지라고 정의했는데, 그 정의만

큼이나 전방위적으로 게임을 선정하는 듯하다.

팩맨이나 퐁과 같은 클래식 게임과 오래된 게임

기들이 한쪽 구석에 수줍게 자리하고 있고, 게

임을 변용한 Jodi의 플레이할 수 없는 게임 작

품들, 현대미술과 미술관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

을 가하는 Arsdoom(1995)과 같은 게임도 있

다. Fez(2012)나 Journey(2012)와 같이 잘 알

려진 인디게임도 다수 포함되어 있고, 물리적

인터페이스를 결합한 Susigames(2003-12)이

나 Room Racers(2010)같은 게임 앞에는 아이

들이 많이 모여있다.

여타의 비디오게임과는 다르다고 강조하

는 새로운 게임 장르는 게임 커뮤니티 안에서

도 활발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쾰른의 낫게임

즈(Notgames) 페스티벌, 베를린의 어메이즈

276

(A MAZE) 페스티벌이 대표적인 예이다. ZKM

은 어메이즈 페스티벌과 연계해서 수상작들을

전시 공간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전시 공간에

서 게임을 하는 재미만으로 볼 때야 미술관보다

는 인디게임 페스티벌의 경우가 훨씬 낫다. 백

여 개의 새로운 게임들 사이에서 맥주병을 들고

잔뜩 흥분한 게이머들과 부대끼며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에서 게임을 접할 때 새롭

게 경험할 수 있는 건 뭘까? 책은 도서관에서,

영화는 영상자료원에서 소장하는 것처럼 게임

은 게임박물관에서 소장해야 할까? 베를린의 게

임박물관(Computerspielemuseum)에서는 각

종 게임기들과 함께 게임의 역사에서 특기할만

한 게임들을 전시하고 있다. 오락적 미디어로서

의 게임에 중점을 두고, 독일의 오래된 인터랙

티브 텔레비전 프로그램(Telespiele 등)도 함께

소개한다. 게임의 역사를 다룬 책에서 그림으

로 봤던 게임들을 직접 해보는 재미도 있다. 기

존의 게임을 변용한 아트게임인 ROM Check

Fail(2008)이나 게임의 패자를 물리적으로 응징

하는데 악명 높은 Painstation(2001) 같은 작

품들은 유원지처럼 꾸며놓은 아케이드 룸 바로

옆에서 전시되고 있다. 규모나 전시 형식에 조

금 차이가 있을 뿐 미술관의 게임 아카이빙이나

상설전시가 다루고 있는 게임들이 게임박물관

과 상당 부분 겹친다.

다양한 게임을 경험해볼 수 있는 전시들도

있지만, 게임을 멈추고 게임에 대해 생각해보

게 하는 전시도 있다. 특히 미디어로서의 게임

에 대해 성찰하는 전시에 비디오게임이 없을 수

도 있다. 얼마 전 작고한 하룬 파로키(Harun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77

Farocki)의 시리어스 게임즈(Serious Games, 2009-2010)는 게임미디어에 대해 다룬 비디오

인스톨레이션 연작으로, 베를린의 함부르거 반호프 미술관에서 전시 중이다. Serious Games I:

Watson is Down은 전쟁 시뮬레이션을 하고 있는 군인들을 보여준다.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 환

경을 보면서 실제처럼 무전을 치고 작전을 수행하던 군인들 앞에 왓슨의 아바타가 죽어 넘어지

고 그들은 덤덤하게 왓슨이 죽었다고 교신한다. Serious Games II: Three Dead 는 게임 환경

을 실제 환경에 재매개한 듯이 세워진 야외 세트와 NPC 역할을 하고 있는 배우들로 구현된 훈

련 상황을 보여준다. 총격이 일어나고 테이블에서 밥을 먹던 사람들은 도망친다. 카메라는 사건

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떠나버린 빈 테이블을 한 동안 비춘다. 행위자가 모두 떠난 텅

빈 자리는 게임 안에서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Serious Games III: Immersion은 가상 환경으

로 전후 트라우마를 치료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 군인은 기억 속의 상황과 비슷하게 재현된 게

임 환경을 보고 ‘맞아요, 그 때의 풍경도 이렇게 초현실적이었어요’라고 말한다. Serious Games

IV: A Sun with No Shadow는 전쟁 시뮬레이션 게임과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시뮬레이션 화면

을 비교하며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치료를 위한 가상환경은 상대적으로 낮은 예산으로 만들어

졌기 때문에 정교한 인공 태양이 사용되지 않고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바타들은 유령처럼

3D 환경을 떠다닌다.

전쟁과 미디어 발전의 관계에 대한 키틀러식의 해석으로 파로키의 작품을 감상할 수도 있지

만, 나에게는 비디오게임에 대한 미디어 비평으로 읽혔다. 게임이 보여줄 수 있는 장면과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의 대비를 통해 게임이 어떤 경험을 전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져주기도 했다.

특히 Serious Games III: Immersion에서 헤드마운트 디스플레이를 쓴 군인의 시선을 보여주는

첫 번째 스크린은 실제처럼 구현된 가상 환경 안에서 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터, 하늘이나 땅

의 한 조각에 머물고 있었다. 구토할 것 같다며 그가 머리를 감싸 쥐었을 때 작가는 첫 번째 스크

린을 암전시킨다. 가상의 이미지는 이미 기억이 만들어낸 심적인 이미지에 의해 먹혀버렸기 때문

이다. 이 이미지들은 기억을 환기시키려는 용도로 사용될 뿐 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실재하지 않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실재하는 것에 대한 기억을 다룬 파로키의 작품은 그와 다

른 접근을 보여주는 인디게임 Continue?9876543210을 떠올리게 한다. 이 게임은 플레이어 캐

릭터가 게임 퀘스트에 실패한 후 게임이 종료된 지점에서 시작되는 게임이다. 플레이어 캐릭터는

곧 사라질 메모리 캐시에서 떠도는 전우들을 만난다. 하지만 그들은 무대 뒤의 광대처럼 지쳐있

다. 퀘스트를 실패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을 죽인 것을 자책하며 용서를 구하는 플레이어 캐릭터

에게 동료들은 게임에서의 기억을 모두 잊고 사라져가길 권한다. 그래서 다시 게임이 시작될 때

그들은 기억 없는 존재로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디 있지? 글쎄, 코드

의 라인 위에 있는 거겠지. 랜덤 액세스 메모리를 목적 없이 방황하면서,” 라는 캐릭터들의 대사

278

는 Continue?9876543210가 게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임임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기억은 하

룬 파로키의 작품이 이야기하는 기억과는 달리 실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이며, 그 기억 자체

도 실재하지 않는 것이다.

게임에 대한 전시라는 것은 회화에 대한 전시, 디지털아트에 대한 전시라는 말처럼 곧 무의미

해질 것이다. 매해 영리한 게임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다양한 비디오게임

을 미술관에서 맥락 없이 소비하는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게임 미디어에 대한 심도 깊은 비평을

담은 전시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그러한 전시를 경험하면서 게임 바깥에서 게임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새로운 게임으로 담아내는 것은 나의 개인적인 바람이기도 하다.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79

김영주

경계에 선 게임들과 새로운 커뮤니티

게임 디자이너 피핀 바(Pippin Barr)의 아티스트 이즈 프레즌트(The Artist Is Present,

2011)는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있었던 마리나 아브라모비치(Marina Abramovic)의 퍼포먼스를

디지털 공간에 재현한 것이다. 뉴욕 시간대의 미술관 관람시간에 맞춰 플레이어는 디지털 버전의

모마로 들어설 수 있다. 전시장 안에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앞쪽으로 걸어가보면 테이블

을 사이에 두고 예술가와 관객 한 명이 의자에 앉아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플레이어도 줄을 서

보지만 줄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게

임을 만든 피핀 바 자신도 5시간을 기다려서야

아브라모비치의 앞에 앉을 수 있었다.

미술관에 길고 긴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농

담으로 만들었던 이 게임을 보고 아브라모비

치가 협업을 제안해왔고 이후 피핀 바는 그녀

의 메소드를 담은 게임들을 공개하고 있다. 그

의 또 다른 게임인 아트 게임(Art Game, 2013)

에서는 예술 작업과 그것의 평가에 대한 과정이

유머러스하게 전개된다. 특히 조각이나 비디오

아트를 만드는 과정을 테트리스나 아스테로이

드와 같은 고전 게임의 매커니즘으로 치환시킨

것이 흥미롭다.

아트 게임(art game)이라고 분류되는 게임

280

들이 있다. 예술계와의 협업을 통해 만든 게임이 디자이너 본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그렇게 분

류되는 경우도 있고, 게임 디자이너가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인식하는 경우도 있다. 넷아트에서

출발한 두 명의 게임 디자이너로 구성된 테일오브테일즈(Tale of Tales)는 리얼타임 아트 메니페

스토(Realtime Art Manifesto, 2006)를 통해, 게임 테크놀로지를 새로운 예술적 표현을 위해 사

용하고 게임디자이너 스스로 작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게임 산업계에서 살아남으려

는 비즈니스 모델 같은 건 애초에 생각하지 못했다. 10여 년 간 꾸준히 자신들의 방식으로 게임

을 만들었고 이제는 다음 게임을 개발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을 만큼의 팬 층을 확보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인디 게임(Indie Game: The Movie, 2012)에나 나올법한 인디 개발자들의 드라마

틱한 성공은 여전히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야기다. 현재 개발 중인 선셋(Sunset, 2014)은 킥스타

터를 통해 펀딩을 받았다.

아트 게임이라는 명칭에 모두가 동의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그렇게 분류되는 게임을

만드는 디자이너들은 무엇보다도 게임을 개인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긴다. 그래서 퍼스널 게임

(personal game)이라는 용어가 함께 언급되곤 한다.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을 창작할 수 있는

오픈소스 툴인 트와인(Twine) 등 누구나 쉽게 자신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이렇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 퍼스널 게임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

람들 사이에서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고 있다.

뉴욕 모마에 소장되어있으며 아트 게임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게임 중 하나인

패시지(Passage, 2007)의 디자이너 제이슨 로러(Jason Rohrer)는 자신의 게임을 퍼스널 아트

(personal art)라고 표현하며 메인 캐릭터는 자신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그는 더 캐슬 독트린

(The Castle Doctrine, 2014)이라는 게임으로 논란의 한 복판에 선 적이 있다.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고 선 미국·백인·헤테로 가정의 남성·가장을 플레이하는 이 게임은 제이슨

로러가 총기소지를 옹호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논란이 더해졌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으

며 어떤 배경에서 이 게임이 나오게 되었는가를 밝혔고, 그것에 대한 온라인 토론은 게임 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뜨거웠다. 퍼스널 게임은 게임 디자이너가 게임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

엇인지가 게임의 경험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대규모 개발비가 투자되는 AAA게임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게임연구자 미아 콘살보와 나

단 듀튼은 그랜드 세프트 오토 (Grand Theft Auto 3, 2001)의 예를 들어서 게임 플레이의 윤

리적인 부분에 대해 게임 디자이너가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있는 구성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

다 (Game analysis: Developing a methodological toolkit for the qualitative study of

games, 2006).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 캐릭터는 매춘부와의 섹스로 생명력을 채우고, 그 후에 그

녀를 폭행함으로써 지불했던 돈을 되찾을 수 있다. 이것은 ‘매춘부를 통해 생명력을 채울 수 있

다’와 ‘다른 캐릭터를 두들겨 패서 돈을 얻을 수 있다’라는 독립적인 두 행위의 조합이며, 그러한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81

창발적 게임플레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플레이

어의 자유이다. 게임 디자이너는 시스템 안에서

가능한 상황들을 만들어놓고 그것에 대한 윤리

적 책임은 피해갈 수 있는 것이다.

퍼스널 게임이나 아트 게임은 게임을 만드

는 사람뿐만 아니라 게임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이끌어내고 있다. 기존의 게임문

화를 향유해온 사람들 중에서는 아트 게임이나

퍼스널 게임은 진정한 게임이 아니며 그것을 향

유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게이머”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게임이라는 미

디어를 협소하게 만드는 기존의 “게이머” 문화

에 반기를 드는 쪽에서는 “게이머(gamer)”라는

명칭에 대해서 회의를 표시한다. 게임스 포 체

인지 유럽(Games for Change Europe)의 디

렉터인 카타리나 틸먼은 나는 게임 하는 것을

좋아하고 게임을 만드는 사람이지만, 누군가 너

는 “게이머”이냐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불편하다

고 말한다. 게임 디벨로퍼 매거진의 편집장 브

랜든 셰필드(Brandon Sheffield) 역시 게이머

라는 호칭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며 더 이상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Let’s retire

the word ‘gamer’, 2013).

최근 트위터 해시태그인 게이머게이트

(#gamergate)를 통해 게임문화에서의 성차별

에 대해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이것은 어느

여성 인디게임 디자이너가 자신의 게임에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게임 매거진의 에디터와 성관

계를 가졌다는 거짓 폭로로 시작되었다. 그것

을 필두로 소위 게임 같지도 않은 게임들에 가

치를 부여하는 현재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게이머”들의 너저분한 비방이 이어졌다. 이에

282

가마수트라(Gamasutra)의 에디터 리 알렉산더(Leigh Alexander)는 전통적인 게이밍과 게이머

는 죽었고, 이제 우리는 게이머를 위해 게임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아티클을 썼다. 그녀는 “게이

머”들이 화가 난 이유는 그들의 시대가 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Gamers’ don’t have to

be your audience. ‘Gamers’ are over, 2014).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게임 문화가 시작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앞으로 더 다양한 게임

들과 더 다양한 플레이어들을 가지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기존의 게임 장르에 속하지 않고

경계에 선 게임들은 게임이라는 미디어를 다른 방향에서 사유하도록 하는 촉매제가 되고 있다.

아트 게임이나 퍼스널 게임은 “게이머”처럼 차차 없어질 용어가 될 것이지만, 당분간은 이 새로

운 움직임을 위해 여러 맥락에서 다양한 의도를 가지고 사용될 것이다.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83

김영주

게임과 사회 시스템

게임 플레이란 불필요한 장애물을 극복하려는 자발적 시도라고 버나드 슈츠(Bernard Suits)

는 정의한바 있다. 게임 플레이는 그 불필요한 장애물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극복하여 목표

를 이루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소셜게임에서 흔히 사용되는 매커니즘을 풍자한 카우 클리커(Cow

Clicker, 2010)가 보여주듯이, 플레이어는 결과를 얻기 위해 때로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노동도

불사하며 그 노동시간을 단축할 수 있는 길은 금전적 소비로 연결되곤 한다.

특정한 소비의 형태를 만들어내기 위해 게임의 특성을 도입하는 게이미피케이션이 주목을 받

은 것처럼 많은 장르에서 게임의 구조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닮았다. 킬스크린(Kill Screen)의 제

이민 워런은 이케아의 마케팅이 거둔 성공에서도 게임의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플에이어가 마치 경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 게임디자이너의 의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효율적인 레벨디자인은 조직화된 걷기(organized walking)를 통해 이케

아 매장에 적용된다. 또한 직접 상품을 조립해서 완성하는 과정을 적절한 난이도로 만들어 대랑

생산품이 줄 수 없는 가치를 소비자 스스로 부여하도록 하는 것은 노력의 정당화(effort justifi-

cation)로 이야기된다.

정치사회적 이슈를 게임으로 만들어 온 몰레인더스트리아(Molleindustria)의 파올로 페더치

니는 결과지향적 성격을 가진 비디오 게임이 자본주의의 산업생산 구조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플

레이어의 행위를 특징짓는 대부분의 동사들 - 해결하기, 치우기, 관리하기, 업그레이드하기, 모

으기 등 - 은 산업구조가 보여주는 합리화의 미학적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결과로 가는

과정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도구적으로 이용되곤 한다.

몰레인더스트리아는 스마트폰 제작과정에서 노동 착취 등의 문제를 다룬 폰 스토리(Phone

284

Story, 2011)가 앱스토어에서 삭제 당한 바

있다. 또 다른 게임, 더 나은 쥐덫 만들기(To

Build A Better Mousetrap, 2014)는 R&D,

생산라인, 실업자로 나뉘어진 세 개의 수직 구

조를 보여준다. 파산이나 집단반발을 막고 효율

적으로 시스템을 운영하기 위해서 플레이어들

은 마우스로 쥐들을 이리저리 옮겨놓아야 한다.

생산성이 떨어지고 치즈를 더 달라고 항의하는

쥐들은 재빨리 밑으로 던져버리고, 현재 일하

는 쥐들보다 더 적은 양의 치즈에도 일할 용의

가 있는 실업자 쥐나 자동화 생산으로 빈 자리

를 대체한다. 이 게임에서 목표를 성취하는 것

은 무슨 의미일까.

루카스 포프의 페이퍼스, 플리즈(Papers,

Please, 2013)에서도 플레이어는 출입국 관리

인으로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입국 신청

자들 앞에서 선택의 순간에 직면해야 한다. 하

지만 그 선택은 점점 까다로워지는 업무와 아슬

아슬하게 연장되는 생활에 치여 어느 순간 가장

나은 결과를 위한 합리적인 계산만을 남긴다.

그 결과로 실직이나 사형을 피해 성공적으로 현

상 유지를 했다면, 이것은 해피엔딩일까.

게임플레이에서의 저널리즘을 다룬 책, 뉴

스게임(Newsgames, 2010)에서 정의한 저널

리즘이란 시민들이 그들의 개인적 삶과 커뮤니

티를 위한 선택을 할 수 있게끔 돕는 생산물을

만드는 실천이다. 결과를 향해 반복적인 행위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반성과 성찰을 지속할 수 있

고, 현실과 관련된 이슈에 대해 플레이어 각자

가 더 깊은 생각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게임의 미

션을 고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매스미

디어가 던져주는 우리 삶의 문제에 대해 답변을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85

하는 것이 아니라, 틀을 벗어나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되는 것은 능동적이고 비판적이며 창조

적인 플레이어들로부터 성취된다.

스탠리 패러블(The Stanley Parable,

2013)에서는 익명의 나레이터가 등장한다. 그

는 거대 기업의 직원 427번 스탠리가 아니라 스

탠리를 플레이하는 플레이어에게 말을 건다. 두

개의 길 중에서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를 지시

하고 그것을 “선택”하는 플레이어를 비꼬고 농

락한다. 플레이어가 자신의 말을 계속해서 듣지

않으면 “어드벤쳐 라인”이라 불리는 노란 선을

바닥에 깔아놓고 그걸 따라오라며 조소하는 식

이다. 플레이어는 결말을 보기 위해 몇 시간 동

안 의미 없이 버튼을 눌러야 할 수도 있다. 이

게임에서 나레이터는 게임 세계를 지배하는 체

제(혹은 체제의 하수인)이고 스탠리는 빈 껍데

기이다. 플레이어는 이 체제를 넘어서서 스탠리

가 되지 않는 것이 가능한 것인가를 묻게 된다.

더 나잇 저니(The Night Journey, 2010)

라는 사색적인 비디오게임에 참여하기도 했던

미디어아티스트 빌 비올라는 비디오 아티스트

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촬영하지 않을 것인가

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즉 스크

린에서 숨겨진 부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이 전체의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게임에 적용해 본다면, 게임디

자이너는 어떤 정보를 숨겨두거나 어떤 행위를

가능하게 하지 않음으로써, 플레이어가 스스로

상황을 비판적으로 생각해보고 해결책을 찾아

보도록 여지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프 로 토 타 입 단 계 에 있 는 게 임 아 츄

(Achoo!, 2014)에서 플레이어는 레이저빔으로

286

도둑들을 막으며 중앙부를 사수하는 로봇을 조

종한다. 레이저는 일정한 순간에 발사된다. 플

레이어는 레이저의 위치와 방향을 조종할 수 있

지만, 발사되는 시기나 발사 자체를 막을 수는

없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든 일정 순간

이 되면 터지는 레이저빔을 가지고 때로는 눈

앞의 무고한 사람들을 터뜨릴 수 밖에 없다.

리틀 인페르노(Little inferno, 2012)에서는

어느 회사로부터 작은 벽난로와 불장난을 할 수

있는 아이템을 선물 받으며 게임이 시작된다.

보너스를 얻기 위한 조합을 만드는 퍼즐과 불이

만들어내는 예기치 않은 효과들은 이 단순한 놀

이를 중독적으로 만든다. 가끔 보이지 않는 바

깥 세상의 기상 악화 소식과 플레이어 캐릭터처

럼 고립된 채 벽난로 앞에 앉아있는 소녀로부터

편지가 날아든다. 이것은 단순한 불장난이 아

니라 찬바람이 밀려들어오는 굴뚝 밑에서 태울

수 있는 모든 것을 태워 온기를 잃지 말아야 하

는 생존임이 분명해진다. 세상의 소식을 태우며

지속되는 놀이를 끝내고 밖으로 나가 현실을 직

면하지 않는 한, 그 생존은 영원할 수 없을 것이

다.

사회 시스템을 시뮬레이션하거나 알레고리

화하는 게임을 만드는 것에서 나아가, 인디게

임디자이너들은 현실의 게임산업 시스템을 극

복할 수 있는 대안적인 게임 개발과정을 고민한

다. 라프 코스터는 혁신적인 게임개발을 위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먼저 모두가 코드를 새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코드와 라이브러리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는 FPS 장르의 게임들

에서 95%의 코드가 겹쳐짐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FPS의 개발에 거대한 프로그래밍팀이 존재한다

고 지적한다. 다음으로, 하나의 게임을 완성하여 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 단계에 플레이어를

포함하는 절차적인 과정을 통해 게임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 틀(게임의 핵심 매커니즘)을

공개해서 사람들과 함께 콘텐츠를 채우는 것이, 완결된 틀에 콘텐츠를 채워서 공개하는 것보다

비디오게임과 아트커뮤니티

287

쉬운 길은 아니다. 일단 그토록 매력적인 틀을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더블파인(Double Fine) 프로덕션에서는 내부 개발자들이 프로토타입을 제안하고 공개투표

를 통해 개발할 게임을 선정하는 암네시아 포트나이트(Amnesia Fortnight)를 정기적으로 열고

있다. 여기서 채택된 게임인 핵 앤 슬래쉬(Hack ‘n’ Slash, 2014)는 캐릭터가 손에 든 USB 칼

등의 아이템으로 게임의 소스코드를 해킹해서 설정을 변경할 수 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캐릭터

를 만들거나 적의 공격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고 장애물을 이동 가능하게 만들어서 맵을 바꿀 수

도 있다. 실제 게임의 소스코드가 변경되는 것이기 때문에 게임 세계가 플레이 불가능 상태로 망

가질 수도 있지만 이전 상태로 되돌려 복구가 가능하다. 플레이어들은 소스코드로의 접근을 통해

자신만의 버전을 만들 수 있고 그것은 다시 전체 게임 개발에도 영향을 준다.

게임의 소스코드나 개발과정을 공개하는 경우는 인디 게임계에서 점점 더 활발해지고 있

다. 노점상을 다룬 스토리로 호평 받은 카트 라이프(Cart Life, 2011)는 전체 소스코드를 공개하

며 스팀(Steam)에서의 판매를 중지했고, 뛰어난 퍼즐 디자인을 보여준 게임 잉글리시 컨트리 튠

(English Country Tune, 2011)의 게임디자이너는 퍼즐스크립트(PuzzleScript)라는 오픈소스

퍼즐게임 엔진을 공유했다. 카타클리즘(Cataclysm, 2013)의 개발자는 크라우드 펀딩을 추진하

면서 이 게임은 무료로 제공될 것이고 오픈소스로 커뮤니티를 통해 발전해나갈 것이라 명시했지

만, 킥스타터 모금에 성공했다.

독창적인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게임디자이너들에게 오픈소스는 게임개발 과정에 대한 생각

을 완전히 바꾸는 모험이기도 하다. 오픈된 소스가 표절한 것이냐 창조적으로 카피한 것이냐에

대한 논란도 끊이지 않는다. 올해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인디게임 중 하나인 Threes(2014)는 출

시된 지 얼마 되지 않아 1024나 2048과 같은 카피 게임들을 마주했다. 특히 2048은 소스코드를

공개했고 사람들은 각자의 버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코딩을 교육하는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이것

을 교육용 소스로 이용하면서 코딩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사람들의 참여를 도왔다. Flappy48같

이 기존의 게임을 유머러스하게 패러디한 것들부터 고차원적인 수식이 들어가는 것까지, 한 때

2048의 변종을 만들고 공유하고 즐기는 것은 하나의 문화적 현상을 이루었다. 이에 대해 Threes

의 개발자는 웹사이트에 1년 여의 지난했던 개발과정을 공개하면서 씁쓸함을 드러내기도 했다.

미디어로서의 비디오 게임은 아티스틱한 창작품일 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실천의 특성을 가

지고 있다. 비디오 게임으로 우리는 우리가 사회를 보는 시선을 표현할 수 있다. 누군가 던진 질

문에 능동적으로 답하는 것에서 나아가, 우리 모두가 각자의 질문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

어지고 있고, 나아가 비디오 게임이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찾는 진정한 미디

어의 역할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작은 게임들의 창작과 공유가 활발해질 수록 우

리의 문제들에 대해서 게임을 통해 이야기할 동료들을 쉽게 만나고 협력할 수 있게 될 것이기 때

문이다.

리 뷰

워킹메모리, 도시를 산책하며 연남/연희동을 듣다 / 김미정

제2회 예술로 가로지르기 섬머 아카데미 / 박초희

아시아를 맵핑하다 / 이지민

파리 국제 아트 페어 피악 / 오사라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4 / 남선우

황학동, 끝나지 않은 이야기 / 윤민화

괴산의 아주 매운 페스티벌: 괴산페스티벌 기획자 사이 인터뷰 / 無籍큐레이터

영토와 신체로부터 재생산되는 우생학적 정치 일지 / 임국화

최소 형태의 삶 / 윤형민

290

김미정

워킹메모리, 도시를 산책하며

연남/연희동을 듣다

도시의 급격한 변화와 이로 인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은 이제 전혀 낯선 사건이

아니다. 특히 홍대 일대 지역은 예술가들에 의해 독특한 분위기가 형성되고 상권이 발달하여 인

구가 밀집된 장소라는 특징이 있는데, 현재는 이러한 흐름을 주도했던 예술가들이 급격한 자본의

유입으로 인해 망원, 상수, 연남/연희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워킹메모리(Walkingmemory) 팀원들은 수업을 들으러 몇 년 간 학교 앞을 오가면서 인근

의 빠른 변화를 체감하게 되었다. 이들은 홍대에서 인연을 맺게 된 김미정, 김정현, 김혜경, 신지

원, 이보나, 이지연이 모여 구성된 프로젝트 팀이다. 홍대 근방에 거주하거나 작업하고 있는 작가

들을 만나겠다는 계획은 서울연구원의 공모사업 <좋은연구 작은서울 연구모임>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 2014년 5월부터 10월까지 6개월의 사업기간 동안 30여명을

인터뷰했으며 작가를 비롯한 평론가나 활동가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다. 인터뷰 대상은 고선경, 곤

도 유카코, 권정준, 김송희, 김수향, 김웅현, 김혜수, 마운트, 문재선, 박영희, 배성희, 비코, 성수

희, 심상용, 안데스, 양지연, 염지혜, 유디렉, 유병서, 윤성지, 윤여진, 이제, 이해민선, 임성연, 조

종성, 천재박, 한석경, 한석현이었다.

이어 지난 10월 31일, Yellow Hunting Dog(마포구 동교동 113-81)에서 《산책일지- 워킹

메모리 2014 프로젝트 보고전》을 통해 프로젝트 결과를 공개했다. 이는 워킹메모리가 진행한 프

로젝트 보고 전시로 30명의 작가들을 인터뷰하여 웹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출판하였음을 알리고

아카이브 오프닝 기념 전시를 진행한 것이다. 워킹메모리는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웹아카이브

(http://blog.naver.com/walkinmemory)를 구축하였으며, 본 아카이브에는 작가들의 최신 전

시 소식 및 향후 프로젝트 내용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할 예정이다.

리 뷰

291

이 글은 보고전 이후 모인 자리에서 활동을 돌아보는 ‘프로젝트 리뷰’ 로, 팀원들을 인터뷰하

고 스스로 그 과정들을 점검해보고자 작성되었다.

인터뷰 참여자: 김미정, 김정현, 김혜경, 이보나, 이지연

김미정: 약 6개월 동안의 활동을 이제 마무리하게 되었다. 오늘은 함께 모인 자리에서 그 동안

진행되었던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해보고 우리가 해왔던 일이 어떤 의의가 있는지 편하게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스스로 점검하고 반성하는 시간이라고 하면 맞을까? 그리고 앞으로 어떤 방향으

로 나아갈지 정리해보는 것도 좋겠다.

이보나: 먼저 왜 우리가 연남/연희동의 예술가 및 예술계 종사자들을 만났는지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홍대에서 이론을 공부하고 이제 막 현장 경험을 시작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다

양한 작가들을 만날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러던 중 늘 지나다니던 홍대 앞의 변화를 진지하게 고

민하게 되었다. 홍대는 많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곳으로 오래 전부터 유명해진 공간이다. 하지

만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 된 후 예술가들은 높은 임대료나 사용료를 감당할 수 없어 상수, 망원,

연남/연희동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것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까지 우리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 이후가 궁금해지기 시작했고 직접 만나 인터뷰를 하기에 이르렀다.

이지연: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서울연구원의 공모사업 <좋은연구 작은서

울 연구모임>의 지원 대상으로 선정되면서부터이다. 인터뷰이에게 다른 인터뷰이를 소개받는 형

태인 스노우볼링 인터뷰를 진행하였는데, 초창기에는 인터뷰이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아 <연남동

마을시장 따뜻한 남쪽>이라는 연남동 벼룩시장에 참가하기도 했다.

김정현: 연남동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곳이 동진시장 일대일 것이다.

프로젝트 초기에 이 곳 골목에 있는 ‘플레이스막’이라는 전시 공간에 주목하게 되었고, 운영자인

유디렉과 처음으로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몇 명의 작가를 소개받았다. 이를 계기로 스노우볼링 인

터뷰라는 형식을 취하게 되었다.

김미정: 일단 처음엔 홍대에서 작업하던 예술가들이 급격한 자본의 유입으로 상수/망원/연

남/연희동으로 ‘밀려’ 이동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떤 예술가들이 그 곳에 살고, 작업하고

있는지 잘 몰랐다. 그래서 처음에 연남/연희동의 작가들을 인터뷰한다고 했을 때 과연 인터뷰를

할 만큼 많은 작가들이 거주하고 있는지 의아했다.(물론 인터뷰이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런 생각은

진즉에 사라졌다.) 그리고 이동의 원인이 되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지역민에게 실제적으로 얼마나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나이/작업 장르에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이다.

김혜경: 우리가 홍대를 다니면서 주변 환경의 변화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관심이

가게 된 것 아닐까? 공간, 특정 지역에 대한 논의는 홍대 외곽으로 확장되어가는 작은 동네들, 특

292

히 연남/연희동을 비롯한 홍대 주변의 지역은

독특한 매력을 지닌 공간으로 핫 플레이스로 급

부상하고 있고, 그 중심에는 예술가들이 자리해

있다. 문화예술이 도시와 어떻게 상생하고 있는

지 알아보고 도시 안의 작가들을 기억해보자는

데서 프로젝트를 기획하기 시작했다. 지역을 통

한 미술의 사유지평을 확장하고자 했으며, 접근

성이 좋은 웹을 이용하여 인터뷰 내용을 아카이

빙하기로 했다.

연남/연희동에는 이색적인 공간이 즐비해

있다. 대표적으로 연남동의 동진시장 골목에는

예술문화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기존의 시장과

는 약간 다른 모습으로 예술문화를 기호로 소비

할 수 있다. 그런 모습이 독특한 특징으로 보이

기도 했다.

이보나: 홍대 주변으로 밀려난 동네들을 서

치하면서 연남동의 독특한 상황에 눈길이 갔다.

상수, 망원, 합정, 창천 등 이미 젠트리피케이션

으로 확장된 다수의 동네들이 있었지만 연남/

연희동은 매체에서 다루고 있는 것보다 좀 더

지역 밀착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

에 더해 앞서 지연언니가 이야기했듯, 조금 더

딘 속도로 개발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미 자본이 집어 삼키고 있지만 동네가 자체적으

로 한계를 지니고 있는 느낌이랄까. (한마디로

사이즈가 작다.) 인상적인 이야기는 거주지역과

밀접한 상가들에서는 거주민들을 위해 밤 8시

면 가게의 음악을 줄인다든지 보행로 확보를 위

해 야외 테이블 개수를 제한한다든지 그 공간에

서의 실제 삶과 함께 살고자 하는 노력들이 보

였다.

김미정: 그런데 왜 이 프로젝트에서 인터뷰

리 뷰

293

와 아카이빙이라는 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김혜경: 인터뷰를 통해 인터뷰이들의 실제 삶, 생각을 현장감 있게 전달하고 싶었다. 한 작가

가 자신의 녹취록을 보고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든다고 하기도 했다. 사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도 작가들을 많이 만나고, 진득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다. 이번 프로젝트가 좋았던

건 의견을 나누고,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연남/연희동을 열심히 ‘산책’하며 만들었다는 거다. 인터

뷰를 하면서 작가들은 우리 프로젝트에 피드백을 주기도 했다.

김미정: 어쩌면 SNS를 통한 아카이빙은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주목받는 한 지역의 예

술가들을 장르불문 소개하고 기록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인터뷰 내용 뿐 아니라

작가들에게 직접 받은 이미지, 그들의 CV도 같이 공개한다. 앞으로 이 아카이브를 활발하게 활용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 것이다.

이지연: 그렇다면 이 프로젝트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부분은 다들 무엇이었는지?

김미정: 인터뷰이들을 통해 연남동이라는 지역을 다시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단순하게 홍대

의 젠트리피케이션에 의해 소위 ‘핫플레이스’가 된 동네라고 생각했고 그 흐름을 마냥 부정적으

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지역주민과 자영업자, 활동가, 예술가들은 서로를 인정하고 연합하

여 살아가고 있었다. 한석현 작가 인터뷰를 통해 연남동에 화교타운이 조성된 배경도 알게 되었

고 홍대와 다르게 작은 매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지역주민들이 문화공간이나

매장을 여가공간처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동진 시장 내 안데스의 ‘덤스터’ 도

옷가게이면서도 안데스의 ‘작업’의 연속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게를 들러 옷을 사고,

그 과정에 즐거워하는 것을 보았다.

인터뷰를 위해 장르 구분 없이 다양한 이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청개구리 제작소,마스아키 디

자인, 비코, 임성연 은 활동가, 인테리어, 스페이스 운영 등으로 연희동의 문화를 구성하는 이들

이다. 특히 유디렉의 인터뷰는 오랫동안 연남동에서 ‘플레이스 막’을 운영하면서 겪은 에피소드

등을 진지하게 이야기해주어 인상 깊었다. 분량상 많이 압축되긴 했지만 내용은 블로그에서 확인

바란다.

마지막으로 인터뷰한 작가들 모두가 연남/연희동과 관련된 작업을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작

가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과 어떻게 호흡하며 작업하는지 알 수 있었다. 배성희 작가의 경우

원래 도시에 관한 작업을 하는데 오랫동안 이 지역에서 살아오면서 가로수를 드로잉하여 다른 지

역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비교해본다. 한석현 작가는 주민과 함께할 수 있는 텃밭을 계획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작지만 꾸준한 움직임들이 지역과의 소통임을 알게 되었고 거주지의 환경이 예술

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볼 수 있었다.

『반란의 도시』에서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도시를 만들어나갈 자유, 개조할 자유는

우리가 누려야할 인권 중에서 제일 귀중한 것이지만 지금까지는 무시되어왔으며 그 자유를 어떻

294

게 행사할 것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 ‘어떻게’에 대한 답을 예술가들이 찾는 중이라는 생각이 든

다. 작든 크든 그들은 도시에서 움직이고 있으며 도시개발이나 젠트리피케이션 등 에 의한 빈틈

을 채우려고 한다. 물론 예술가들이 개입하는 모든 커뮤니티 활동을 이상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

다. 다만 하비의 말을 일부 인용하면 도시 공간 자체의 특징에 주목해 새로운 시선으로 그 지역을

볼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예술가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보나: 이번 프로젝트의 의의를 일종의 동시대의 ‘표류지도’ 만들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다. 1960년대 상황주의는 인간이 거주하는 공간으로서의 도시에 사유의 중심을 두고, 거대한 괴

물로 상징하는 도시권력을 해체하는 혁명으로서 표류(Derive)의 개념을 제시했다. 이들에 의하

면 도시 공간을 살고 있는 개개인의 일상은 현대사회가 만들어낸 도시공간적 특징으로 그들의 일

상과 삶의 장소가 이어진 골목, 개인의 감정은 혁명의 힘을 지닌다. 또한 상황주의자들은 도시개

발, 산업발전에 의한 목적론적 관점이 아닌, 무의식적인 전유를 강조하였는데 즉, 목적없이 흘러

가는 표류를 통한 심리지리를 통한 도시에 대한 진정한 인식을 추구했다. 사회에 소속되기 위한

목적지향적인 공간점유를 지양했던 이러한 움직임은 동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부분이다.

워킹메모리의 산책은 삶의 공간으로서의 도시를 바라보는 방법론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한 몇

개월 간, 우리는 인터뷰를 위해 연남/연희동을 이루는 작은 길을 쏘다녔다. 그 지리에 익숙지 않

았던 우리는 처음엔 스마트폰 지도에 주소를 입력하고, 나름의 방위를 생각하며 골목골목에 위치

한 작가들을 찾아갔다. 5명쯤 만나다 보니 그제 만난 작가의 작업실이 위치한 옆 골목에 오늘의

작가가 자리하고 있었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골목의 풍경을 함께 나눴다. 홍대주변은 이

미 수많은 선행연구가 있어왔다. 프로젝트를 위한 사전 리서치 과정에서 상당히 디테일하게 연구

된 논문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워킹메모리가 주목한 ‘홍대 주변 상권’으로서의 ‘연남동’은 시

간을 들여 걷고 산책한 결과로 작가들을 만나 얼굴을 맞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눴다는 맥락에

의의를 두고 싶다. 자본주의는 이미 우리의 숨결까지 파고들어서 그로부터의 혁명적 전복을 주장

할 가능성을 논의할만큼 나는 순수하지 않다. 다만, 자본과 스펙터클이 개인(작가)의 삶을 위협하

는 속도에서 한 발 빗겨나 잘 닦인 도로 이외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다양한 경로를 기록하고자 시

도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뚜렷한 목적이나 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 예술이라는 무의식적 욕망의

자취를 기록함으로써 ‘새로운’ 도시가 아닌 도시 공간을 몸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함께 얽힌 공

간이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본 것이 아닐까.

김정현: 워킹메모리의 프로젝트는 ‘지역연구’와 ‘작가연구’를 결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연남동 주변의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변화를 분석하는 동시에, 그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작가들을

인터뷰하고자 한 것이다. 독특한 점은 기존에 유사한 주제를 연구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회과학

적 방법론을 택한 것과 달리, 워킹메모리가 예술이론을 바탕으로 삼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예외

적인 접근방식 때문에 프로젝트의 결론을 미리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오히려 다같이 모여서 계속

리 뷰

295

고민하는 과정에서 예술 현상을 대하는 새로운

관점과 방법론의 가능성을 깨닫게 된 것 같다.

워킹메모리는 단지 연남동의 예술가들을 찾아

가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것일 뿐만 아

니라, 작가들의 사고를 명확하게 만들기도 하고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며 작업 및 지역

에 개입했다고 생각한다. 《산책일지- 워킹메모

리 2014 프로젝트 보고전》의 소개글에도 적었

지만, 동시대의 산책은 더 이상 무관심한 관조

가 아니라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만남의 계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김미정: 워킹메모리의 산책이 도시를 바라보

는 방법론 혹은 만남의 계기가 된다는 것에 공

감한다. 어쨌든 이렇게 프로젝트 하나를 마무리

하게 되었다. 다음 행보가 참 어렵기도 하고 궁

금해지기도 한다. 앞으로 워킹메모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김정현: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만난 작가들과 함께 전시를 만들거나 책을 낼

수 있다면 즐거울 것 같다. 만남을 계속 이어가

면서 서로 다른 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이어주고

싶다. 또, 주로 ‘전시’라는 제한된 시공간에서

나타나는 작가들의 작업 및 그에 담긴 생각들을 기록하는 일을 좀 더 해보고 싶다.

296

박초희

제2회 예술로 가로지르기 섬머 아카데미(2014. 8. 1~5)

작년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 채 식지 않은 ‘예술로 가로지르기 섬머 아카데미(경기문화재단 기

획)’가 올해로 2회째를 맞았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4박 5일간의 워크숍은 경기창작센터에서 진행

됐다. 이번 섬머 아카데미를 위해 3번의 자문회의를 거쳐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였으며, 섬머 아

카데미의 정체성과 목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를 기획하면서 중점을

둔 것은 섬머 아카데미가 어떠한 주제나 틀로 한정하지 않고, 참여자 각자가 꾸려나갈 수 있는 플

랫폼이 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또한 강연자와 참여자 사이의 피드백을 강조하면서 참여자를 프로

그램의 일원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고자 했다. 물론 참여자들이 개인적으로 느낀 한계도

있었겠지만(특히 타이트한 일정으로 인해), 이를 통해 참여자와 강연자 모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얽힌 듯 관계를 구축하고 자유로이 소통할 수 있었다고 본다.

올해 섬머 아카데미는 총 10개의 강연과 2개의 대담 그리고 2개의 라운드테이블과 20개의

섹션 워크숍으로 구성됐다. 모든 강연을 소개하면 좋겠지만, 안은미 안무가의 여는강연과 박해천

교수의 강연, 채은영 전시기획자의 섹션워크숍, 이매망량과 아트스타 코리아를 주제로 한 라운드

테이블을 간략히 이야기 하고자 한다.

먼저 안은미 안무가의 ‘몸으로 말걸기’라는 주제로 첫 날 강연이 시작됐다. 본인의 인생을 먼

저 꺼냄으로써 참여자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갔고, 배움은 understanding이 아닌 shouting이

라고 이야기하며 춤(간단한 동작)과 소리 지름으로 강연장의 딱딱했던 분위기와 참여자의 닫혀있

던 마음을 열어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을 다 하나로 만들었다. ‘안은미 안무가의 춤은 이름 없는 이

들의 숨결을 살려 놓는 광대의 춤이 있다.’라고 평한 손진책 예술감독의 글이 눈앞의 광경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어졌던 시간이자 유쾌한 시작이었다.

리 뷰

297

박해천 교수의 강연은 ‘아파트, 한국 근대

이미지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주제로 둘째 날

다뤄졌다. 이 강연은 20세기 혼돈으로 가득 찬

모더니티 사회가 어떤 시선의 다름으로부터, 어

떻게 현대의 이미지를 갖게 되는지 대해 이야

기했다(앙리 르페브르의 ‘공간의 생산’ 투시도

법의 역사적 기원, 1911년 움베르토 보치오니

의 ‘동시적 시선’, 1920년 르 코르뷔제의 ‘브

와쟁 계획’, 1936년 이상의 ‘오감도’와 ‘이상’

, 1930년대 중반 발터 벤야민의 ‘광학적 무의

식’, 1930년대 에른스트 윙어의 ‘냉정한 이차

적 인식’, 1950년 용산대폭격_ 이범선의 ‘오발

탄’, 1962년 ‘마포아파트’_ 故장동운(전 중령),

1968년 광화문 ‘이순신동상’_ 故장동운을 통

해). 현대적인 시각을 장착하고 개발시키기는

방법에 대해, 박해천 교수는 일상의 경험 안에

서 스스로 성실하게 들여다본다면 남과 다른 시

선을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우

리가 몸담고 있는 21세기의 첫 20년이 어떤 사

회이고 이전과는 어떤 자극이 있고, 어떻게 대

응논리를 만들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

다.

셋째 날 ‘자본과 제도와 긴장감을 가진 인

터-로컬 큐레이팅을 위한 자기-조직화는 가능

한가’를 주제로 한 채은영 전시기획자의 섹션워

크숍이 진행되었다. 시작에 앞서 코미디에 빠

지다라는 TV 프로그램의 ‘두 이방인’이라는 코

너를 보여주었는데, 고급 지식을 가진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막일에도 그 지식을 접목하려 하는

노력이 이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하게 되는 과

정을 다룬 웃기지만 씁쓸한 코미디이다. 채은영

전시기획자는 이 프로가 우리의 현재의 모습을

298

보여주듯 예술가들도 근본적 사고의 가치부여

보다 동시대에 대한 정확한 정의와 일상(자본)

에서의 자기조직화와 제도에서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실용적 판단을 해야 한다고 했다.

설문조사 결과 호응이 제일 좋았던 셋째 날

‘이매망량:非+非-非×非÷=∝’을 주제로 한 주

재환 작가와 김남수 안무비평가의 라운드테이

블은, 한중일 트릭스터로 도깨비를 주목해 이를

둘러싼 이야기를 조명했다. 트릭스터는 상반되

는 양의적인 특징으로 인해 때로는 곤란하게 만

들기도 하지만, 문화의 건강한 교란을 가져오는

‘문화영웅’이라는 측면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예술이 트릭스터(문화영웅)의 역할을 해

줘야 한다고 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매망

량의 기원인 개혁가 정도전이 만난 도깨비(새로

운 시대를 여는 역할)와, 주재환 작가의 작품에

서 볼 수 있는 도깨비(한국인의 원형심리), 한반

도 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 보여 지는 각각의

독특한 도깨비를 만날 수 있었던 시간이자 예술

가에게 필요한 관점의 스케일을 키우는데 한걸

음 더 나아가게 한 강연이었다.

마지막 날 강연은 ‘아트스타 코리아! 이후를

말한다.’를 주제로 한 라운드테이블이었다. 모

더레이터로는 반이정 미술평론가가 참여했고

여섯 명의 초청패널(구혜영, 림수미, 신제현, 유

병서, 차지량, 홍성용)과 함께 허심탄회한 대화

를 나눴다. 참여자들의 질문과 패널들의 답변이

오고가면서 열띤 분위기가 조성되었는데, 프로

그램을 바라봤던 대중의 시각에서부터 작가 개

인이 가진 생각과 그의 입장,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이점과 문제점, 더 나아가 예술자본시장까

지 제기되어졌다.(기준이 명확치 않은 현대미술

리 뷰

299

을 누군가의 잣대로 평가한다는 것, 프로그램이 예능을 다루고자 한 것인지 예술을 다루고자 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것, 아스코의 꼬리표로 인한 작가와 작업에 미치는 영향, 예술자본시장을 향한

시각차 등) 서로 다른 생각들이 얽혀 누구의 것이 옳고 그름을 넘어, 외침이 있었던 이 시간을 통

해 강당에 있던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돌아봐야할 문제점과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되짚어

볼 수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예술가를 향한 많은 도움의 손길이 생겨나고, 예술을 바라보고 응원하는 시각이 훨씬 더 자유

로워지고 넓어졌다. 하지만 끝없이 변화하는 세상과 관료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얼룩진 세상은 아

직도 예술과 예술가에게 관대하지 못하다. 그래서 예술 뿐 아니라 우리의 청춘은 앞선 성공을 따

라가고자, 혹은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느라 정신없다. 이런저런 고민들로 가득한 참여자들이 이번

섬머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까. 함께 호흡하고 앞으로 나아가고자 말이다. 모둠별 나

눔 시간에 한 참여자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았다. “내가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으러 왔는

데, 확실한 답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 분야의 길을 갈 것이라는 마음의 힘을 얻

고 돌아가게 되었다.” 섬머 아카데미를 통해 특별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더 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민을 이어가는 것이 또 다른 희망의 단

서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본다. 앞으로 참여자들의 행보와 내년의 뜨거운 여름을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

300

이지민

아시아를 맵핑하다 <맵핑 아시아 : 출판, 전시 그리고 공개 프로그램을 펼치다 >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 라이브러리, 2014. 5. 12~8. 29

홍콩에도 한국의 삼청동과 같이 미술기관

과 갤러리가 즐비한 거리가 있다. 셩완(Sheung

Wan)역 근처의 퀸즈가(Queen’s Road)이다.

이 곳에는 페로탕 갤러리(Galerie Perrotin),

화이트 큐브(White Cube), 가고시안 갤러리

(Gagosian Gallery)등 이 모여 있다. 퀸즈가 상

단부의 헐리우드가(Hollywood Road)에는 다

소 허름한 헐리우드센터(Hollywood Centre)

라는 건물이 있는데, 이곳에 아주 흥미로운 기

관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Asia Art Archive, 이

하AAA)가 자리 잡고 있다. 디렉터 클레어 수

(Claire HSU)가 운영하는 AAA는 현대미술사

의 흐름을 기록한 책, 도록, 영상, 파일을 수집

하고 정리하는 일을 중점적으로로 하는 비영리

기관이다. 특히 현대미술을 둘러싼 다양한 담론

을 고찰하고 공유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하는 워

크샵, 전시를 기획한다.

<맵핑 아시아: 출판, 전시 그리고 공개 프로

그램을 펼치다(Mapping Asia: An unfolding

리 뷰

301

302

publication, exhibition, and public programmes)>(이하 맵핑 아시아)전은 AAA의 라이브러

리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아시아의 지리적 범위를 탐구하고 개념적 의미를 고찰하는 과정을 선

보이기 위해 기획됐다. 특히 지도라는 인위적 도구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역사와 삶 속에 녹아 있

는 아시아의 특징을 발견하고 동시대에서 일종의 디딤판으로 작용하는 유용한 정보를 구축하고

자 하는 것이 <맵핑 아시아>의 궁극적 목표다. 전시는 다양한 예술 관련 서적들이 구비되어 있는

라이브러리 공간 사이에 연출되었고, 아시아를 표하는 작품들은 물론 특별히 선정된 책들로 구성

된다. 아시아 미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말레이시아 작가 윙호이 청(Wong

Hoy Cheong) 외 2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고 한국의 현대미술 전문 기관 사무소에서 발행된 <

리얼 디엠지 프로젝트 2013> 외 20여 권의 책이 선정되어 전시됐다.

아시아에서 확대되고 있는 사회적 이슈를 직설적으로 상징화하는 작업을 주로 하는 맵 오피

스(MAP Office, 예술가와 건축가 듀오)의 그래픽 작업, 이주 노동자의 문제를 다룬 윙호이 청

(Wong Hoy Cheon)의 드로잉은 마치 아시아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드러내고 있는 듯하다. 또한 중국 한 왕조 시대부터 제작되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자기들

도 여러 점 전시되었는데, 이는 중국 특유의 문화와 취향을 반영하는 일차적 사물로 기능한다. 그

리고 지질학적으로 아시아를 다루고, 중국 상해의 역사를 나열하거나, 한국의 분단 상황을 예술

로 승화한 전시 도록 등이 선정된 책들에 포함되는데 이는 시각적으로 표현하기에 부족한 부분을

이론, 학문적 접근으로 보완할 수 있는 장치이다. 한편 타자의 시선이 가미되었다면 조금 더 풍부

한 전시가 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짐작이 간다. 제안과 채찍질이 될 수도 있는 타자의 시선이 아

시아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짚어내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맵핑 아시아>전

이 홍콩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페루(남아메리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위치한 국가), 레소토(아프

리카 남단의 왕국), 엘바(이탈리아의 섬)까지 진출할 예정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피드백이 더욱 중

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자료와 작품을 선보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시에 대한 반응을 기록

하고 보완해 가면서 더욱 탄탄한 아시아의 의미를 구축해 나가야 한다. 앞으로의 과정들이 일련

의 증거가 되어 아시아를 아우르는 핵심적 담론이 탄생하길 기대해 본다.

리 뷰

303

오사라

파리 국제 아트 페어 피악(2014.10.23.~26)

파리의 방돔(Vendôme) 광장에 세워졌던 폴 맥카씨(Paul McCarthy)의 작품 “나무” (Tree)가 한

바탕 소란을 피운 덕에 파리의 국제 아트 페어 피악(FIAC : Foire International d’Art Contempo-

raine)이 예외의 관심을 받으며 시작되었다. 올해로 41회째를 맞이하는 피악은 오랜 역사와 국제

적 인지도를 지닌 대표적인 국제 페어들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200 여 개에 달하는 전 세계

아트 페어들의 급 범람 속에서, 더욱이 근래 급부상한 런던의 프리즈 페어(Frieze Art Fair)에 비교

되며 피악은 낡고 진부한 재래시장으로 가라앉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따가운 혹평을 받아 오기도

했었다. 19세기 세계적인 선진 국가를 위시하는 만국 박람회장이었던 피악의 개최장소인 그랑

팔레(Grand Palais)가 그렇듯, 피악 역시 한 때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 파리를 상징하는 역사적인

기념행사로 남겨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위기의 그림자는 한동안 피악을 넘어 파리 동시대예술현

장의 불안의 요소로 작용했다. 하지만 지난 2010년부터 피악의 수장으로 선출된 뉴질랜드 출신

인 제니퍼 플래이(Janifer Flay) 관장이 총대를 메면서 부터 극히 프랑스적이라 여겨지는 오랜 관

행들을 과감하게 뒤엎는 개혁을 감행했고, 급기

야 피악의 위상이 다시금 제자리로 부상하고 있

다는 기대와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제니퍼 관

장은 작년 40회를 기념하며 피악의 새로운 방향

성을 제시했다.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트렌드에

휩쓸리기 보다는 신생 갤러리와 젊은 작가들에

게 초점을 맞추면서 동시대미술의 새로운 방향

성을 제시하는 페어로 자리매김 하겠다는 것이

304

었다. 그리고 그녀의 지난 5년간의 개혁적 전략

들은 피악의 더욱 단단해진 내실뿐만 아니라 미

국 LA에 새로운 피악을 확장 한 데에 이르기까

지 올해에 이르러 상당부분 결실을 맺고 있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올해는 그랑팔레에서의 본 페어 행사 외에

“벽들 너머에(Hors Les Murs)”라는 주제로 파리

시내의 주요 명소로 알려진 공원들(Jardin Des

Tuileries, Jardin Des Plantes)과 광장에 공공미술

작품들을 전시하고, 다양한 공간에서 퍼포먼스

와 세미나 등의 행사들을 개최함으로써 그랑 팔

레의 벽을 넘어 파리 도시 전체로 물리적 공간

의 범주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는 요즘 대규모

아트페어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점이기에 그다

지 새로울 바는 없지만, 주변적 성격을 지니는

소규모 위성 페어(Statellite Faire)를 끌어안은 점

은 상당히 눈에 띄는 면모이다. 피악은 위성 페

어를 통해 신생 갤러리들의 참여 폭을 더욱 확

장시킴과 동시에 그랑 팔레에서 열리는 본 페어

의 고급스러운 격식과는 다른 더욱 젊고 자유로

운 성격의 또 다른 페어를 동시에 선보이고자

했다. 더욱이 피악의 개최 시기와 맞물려 프랑

크 게리(Frank Gehry)가 디자인한 획기적인 건

축물로 주목받은 루이비통 재단이 개관하고 5

년 동안 재정비에 들어갔던 피카소 미술관과 함

께 폴 맥카시의 초콜렛 공장 전시로 파리 모네

(La Mommaie de Paris) 미술관이 3년 만에 재개

관하면서 파리 도시 전체가 피악을 중심으로 풍

요로운 동시대미술 행사들로 열기를 띠게 되었

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하기에는 다소 쌀쌀하고

흐린 날씨의 연속이었지만, 이와는 상반되게 뜨

거운 열기로 가득했던 피악 현장을 중심으로 10

리 뷰

305

월 파리의 예술현장 소식을 전해보고자 한다.

피악 : 안 - 그랑 팔레(Grand Pallais)

피악의 본 행사장 그랑 팔레 안에는 26개국의 191개 갤러리들로부터 총 3,451명 작가의 작

품들이 선보였다. 그동안은 파리를 비롯해 런던, 베를린 지역의 유럽 갤러리들이 주를 이루어 왔

지만, 올해는 뉴욕과 LA 등 미국 갤러리들의 참여가 파리 갤러리들의 수를 압도적으로 넘었다는

변화가 눈에 띄었다. 여느 아트 페어와 마찬가지로 접근이 용이한 1층은 주로 대규모 갤러리들이

넓직한 부스를 차지하며 위치해 있고, 2층은 작은 공간들로 나누어져 신생 갤러리들이 주를 이룬

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이 좋지 않은 신생 갤러리들에게 주어진 불리한 동선적 배치는 제니퍼 관

장의 주도면밀한 계획으로 허물어졌다. 그녀는 페어의 관건인 VIP 오프닝 공식 행사의 동선을 2

층 전시장부터 진행하는 것으로 정했다. VIP들은 줄을 지어 2층 전시장으로 먼저 안내 되었고,

이들이 신생 갤러리들을 돌아보는 두 시간 동안 1층의 거물급 갤러리들은 잠자코 대기해야 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은 신생 갤러리들이 주요 콜렉터들의 관심을 모으는 데 있어 상당부분 유리하

게 작용했다. 파리에서 가장 젊은 갤러리스트 두 명이 운영하는 파리 벨빌에 위치한 크레브코어

(Crévecoeur) 갤러리와 보르도와 파리에 위치한 코르텍스 아틀레티코(Cortex Athetico) 갤러리는

페어가 문을 연 이 첫 날 모든 작품을 판매하였고, 이 외에 2층에 위치한 다른 소규모 갤러리들이

상당 부분 높은 판매율을 보였다.

크레브코어 갤러리는 3명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그 중 플로리안 & 미카엘 키스트레베

르트(Florian & Michaël Quistrebert) 작가는 올 해 뒤샹 프라이즈에 후보로 올라 있고, 르노드 제

레즈(Renaud Jerez) 작가는 한창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로 팔레 드 도쿄의 현 전시에 참여 중이며,

또 다른 미국 작가 샤나 물통(Shana Moulton)의 작품은 작년 피악에 솔로 전시로 선보이면서 상

당한 호평을 받았었다. 따라서 이번 피악을 위한 크레브코어 갤러리의 작품 선정은 탁월한 전략

적 면모를 보였던 것이다. 코르텍스 아틀레티코 갤러리(Cortex Athetico)는 프랑스 작가 베누앗 매

르(Benoît Maire)의 솔로 전을 제시했는데, 이 작가 역시 상당히 주목을 받고 있는 젊은 작가로 콜

렉터들의 구매욕을 빗겨 나가지 않았다. 이 외에도 마르셀 알릭스(Marcelle Alix) 갤러리, 크로파-

투스카니 질더(Kraupa-Tuskany Zeilder) 갤러리 등 2층에 위치한 다수의 갤러리들이 콜렉터들의

진지한 관심을 받으며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파리의 신생 갤러리들의 활약이 이번 피악에

서 두드러졌던 것은 제니퍼 관장의 전략적 지원이 한몫 했겠지만, 무엇보다 거의 맨발로 매우 치

열하게 뛰어온 젊은 갤러리스트들의 활약이 서서히 결실을 맺어 나가는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세 평 남짓 되는 협소한 공간에 갤러리를 꾸린 젊은 갤러리스트들은 각자

가 지닌 예술적 가치관과 시각으로 젊은 작가들을 발굴해 내고 이들과 함께 성장해 나가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들은 선정되기에도 까다로운데다 경제적으로 상당히 부담이 될 법한 국

306

제 아트 페어들에 열심히 참여하며 콜렉터들에게 갤러리의 인지도를 확보해 나갔고, 갤러리 공간

은 자유롭고 실험적인 전시 공간으로 운영하며 때로는 큐레이터로 때로는 딜러로 활약하고 있다.

물론 유럽이라는 이로운 토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물적이나 인적으로 든든한 배경을

갖추지 못한 젊은이들이 예술시장에서 매우 제한적인 높은 벽을 뚫고 나가는 면모는 상당히 진취

적이지 않을 수 없다.

2층의 젊은 혈기를 지나 내려온 1층 공간은 거물급 갤러리들과 각 부스를 채운 거물급 작가

들의 작품들로 압도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이번 페어를 마지막으로 올해 문을 닫게 될 파리의 역

사적인 갤러리 이봉 람베르트(Yvon Lambert)는 양면으로 확 트인 공간에 로렌스 웨이너(Lawrence

Weiner), 더글라스 고든(Douglas Gordon), 낸 골딘(Nan Goldin), 솔 르윗(Sol Lewitt) 등 총 13명

작가의 작품들을 전시하며 화려한 작별 인사를 고하는 듯 했다. 또한 쭈리히, 런던, 뉴욕에 위치

한 하우저&워스(Hauser&Wirth) 갤러리는 미국 작가 로니 혼(Roni Horn)의 솔로전으로 단 세 개

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어느 부스보다도 가장 압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런던의 빅토리아

미로(Victoria Miro) 갤러리는 세계적으로 매우 트렌디한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 이드리

스 칸(Idris Khan), 그리고 세쿤디노 에르난데즈(Secundino Hernandez), 이 세 명의 작가의 작품을

선보였는데 VIP오프닝 첫 날 모든 작품이 매진되는 호사를 누렸다. 쿠사마의 작품이 $160,000-

400,000 사이의 가격대로, 에르난데즈의 작품이 £30,000로, 그리고 칸의 작품이£12,500-

115,000 가격대로 구매되었다고 한다. 또한 런던의 리손(Lisson) 갤러리는 이우환, 아이 웨이웨

이(Ai Weiwei), 애니쉬 카푸어(Anish Kappor), 카르멘 헤레라(Carmen Herrera) 등의 작품을 선보

였는데, 페어가 열리자마자 카르멘의 작품이 재빠르게 $200,000 정도의 가격에, 그리고 애니쉬

의 작품이 £800,000-900,000 사이의 가격대로 팔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대규모 갤러리들의

주거래 내용들이 다양한 예술 일간지들을 통해 전해지면서 증권 거래소를 방불케 했다. 더욱이

프랑스의 최고 거물급 콜렉터이자 자신의 재단을 운영하고 있는 프랑수와 피노(Françoi Pinault)가

VIP 오프닝 날 무려 37개의 작품을 구입했다는 소식은 절로 입을 벌어지게 했다. 하지만 이 번

피악에서 달라진 점은 영미 콜렉터들의 수가 상당히 증가했고 작품을 구매한 주 고객층 역시 프

랑스 콜렉터보다는 영미 콜렉터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바로 앞서 열렸던 런던의 프리즈 페어

에 참여했던 몇몇의 딜러들은 상당히 트렌드적인 프리즈 페어에 비해 피악은 좀 더 진지하고 지

적인 작품들이 주를 이루어 더욱 단단한 면모가 돋보였다는 평을 내놓기도 했다. 혹은 이러한 다

른 성격 때문에 프리즈와 피악이 서로 보충적인 역할을 한다는 견해도 있었다.

한국 갤러리로는 국제 갤러리가 뉴욕 첼시에 위치한 티나 킴 갤러리와 함께 공동으로 넓직한

한 부스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 둘 갤러리는 앞 서 열린 런던 프리즈 페어에서 주목할 만한 10대

갤러리 중 하나로 뽑히는 호평을 받고 파리로 건너 왔다. 피악에서는 이우환, 박서보, 김수자, 양

혜규, 함경아 등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er), 루이스

리 뷰

307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등 유명한 해외 작

가들의 작품들을 함께 선보였는데, 그나마 한국

작가들 작품을 이만큼이라도 볼 수 있다는 점이

반가우면서도 못내 씁쓸했다. 뉴욕의 레만 모

핀(Lehmann Maupin) 갤러리에서는 서도호의

작품들을 입구에 배치했는데 이 역시 지대한 관

심을 받으며 재빠르게 콜렉터에게 넘겨졌고, 이

외의 다른 작품들도 대부분 판매되었다는 소식

이 정보지마다 전해졌다. 가고지언(Gagosian),

화이트 큐브(White Cube), 매리언 굿맨(Maian

Goodman) 등 거물급 갤러리들의 부스는 그 명

성답게 페어 기간 내내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

었다. 비단 이러한 인기 갤러리들 외에도 그랑

팔레 안에는 연일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이는 피악이 다른 아트 페어들에 비해 단순히

작품을 구매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관람의 목

적으로 찾는 이들이 많다는 점을 시사하는 면모

라고 한다.

1층 행사장 뒤 쪽에는 프랑스의 가장 영광

스러운 미술상인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에 후보

로 선정 된 4명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

다. 2000년에 설립된 뒤샹 프라이즈는 매 년 국

제적으로 주목을 받는 프랑스 거주 작가 중 한

명을 선정하여 €35,000의 상금과 퐁피두센터

에서의 솔로전을 위한 전시비용 €30,000를

수여한다. 올해 뒤샹 프라이즈의 후보자는 테

오 메르시에르(Théo Mercier), 쥴리앙 프레비오

(Julien Prévieux), 플로리안 & 미카엘 키스트레

베르트(Florian & Michaël Quistrebert), 그리고

에바리스트 리쉐(Evariste Richer) 작가이다. 피

악 기간 동안 이 네 명 작가의 대표 작품을 전시

하고,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게 되는데, 이들의

308

작품을 관람하기 위해 전시장 안에 빼곡히 들

어서 있는 사람들을 보니 프랑스 내에서 이 상

의 명성을 가늠하게 된다. 피악 기간 내내 비밀

에 붙여졌던 수상자는 마지막 바로 전 날인 25

일 발표되었는데, 쥴리앙 프레비오 작가에게 그

영광이 안겨졌다. 뒤샹 프라이즈에서 주목한 쥴

리앙의 작품은 퍼포먼스와 비디오로 구성된 “다

음에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What Shall We Do

Next)”라는 프로젝트 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비

디오가 상영되는 동안 갑자기 등장한 네 명의

무용수들이 비디오를 중단시키고 세 편의 퍼포

먼스를 선보인다. 할리우드 공상과학 영화에 나

오는 제스처들, 미국의 안무가 매서 그람(Mar-

tha Graham)의 사망 후 벌어졌던 예술작품과 예

술가적 행보의 소유권에 관한 논쟁적 담화, 그

리고 뉴테크놀로지 영역에서 벌어지는 기업의

특허권과 관련된 제스처들로 구성된 퍼포먼스

인데, 이미 일상의 몸에 일반화된 몸의 언어들

로 추상적인 모든 것이 물화되어 상품화 되는

자본주의의 일반화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흥

미로운 것은 전시장 안에서의 퍼포먼스를 마친

후 무용수들이 전시장 밖으로 나가 피악의 복도

를 돌며 미술계에서 향 후 일반화될 새로운 제

스처들을 즉흥적으로 선보이는 것이었다. 판매

가 주 목적인 작품들로 가득한 페어 현장에 비

판적인 시각으로 개입한 이 퍼포먼스는 예술 본

연의 에너지를 상기시키며 약간의 숨통을 트이

게 하는 듯 했다.

정교한 철근 구조물과 유리로 지어져 당시

산업문명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그랑 팔레 안에

세계 각지의 온갖 진귀한 사치품들로 가득했던

19세기의 만국박람회가 있었다면, 두 세기 후

리 뷰

309

고혹적일 수밖에 없는 역사적인 기념 장소 안에 세계 각지의 예술 사치품들로 가득한 오늘날의

페어 현장은 그랑 팔레의 역사적인 장소성을 무엇보다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그

러한 시장 한 복판에 작은 균열을 내는 쥴리앙의 퍼포먼스는 시장성이 오늘날의 예술현장에서 이

미 일반화되었음을 확인사살 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일반화 된 일

상에 균열을 내는 예술은 오히려 더 많이 삐죽삐죽 솟아오를 것이라는 역 에너지를 긍정하며 북

적이는 박람회장을 빠져 나와 여전히 유유히 흐르고 있는 세느 강가 배 정박장으로 향했다.

FIAC : 밖 (위성 페어, 공공미술 프로젝트)

1) 위성 페어 (OFFICIELL)

이번 피악은 그랑 팔레에서의 본 페어 외에 오피시엘(OFFICIELL)이라는 위성 페어가 함께

진행되었다. 그랑 팔레 앞 세느 강에서 피악이 마련한 배를 타고 한 30분 정도 이동하게 되는데,

유유히 흐르는 배 위에서 파리의 가을 정취 속에 녹아든 주요 명소들을 감상하며 지나는 시간은

그랑 팔레에서의 다소 지친 방문객들에게 낭만적인 휴식을 선사한다. 또한 오피시엘의 도착지

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우 현대적인 건축 조형물은 그랑 팔레와는 또 다른 색다른 페어 현장을 기

대하게 한다. 오피시엘은 레 독(Les Docks) 이라고 하는 패션·디자인 빌딩(Cité de la Mode et du

Design)에서 진행되었는데, 빈 공장을 현대적 디자인으로 리모델링하여 다소 고혹적인 파리 도시

에서 이색적인 광경을 뿜어낸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선착장과 만나는 건물의 오픈된 1층의 건물

벽은 그래피티들로 채워져 있고, 카페나 노천 식당들이 즐비해 있어 한층 자유롭고 여유로운 분

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건물 안은 완연한 페어 현장답게 화이트 박스 칸칸이 14개 국가의 68개

갤러리들이 들어서 있다. 이 페어는 특히 신생 갤러리들과 젊은 작가들에 초점을 맞추어 추진된

것으로 그랑 팔레의 부스 보다 약간 저렴한 가격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하지만 위

성 페어라는 특성상 그랑 팔레에 비해 관심도나 방문객 수가 비교적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의심의

우려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피악 주최팀은 오피시엘을 그랑 팔레 본 페어보다 하루 먼저 오픈

함으로써 피악을 기다리는 이들의 관심을 가장 먼저 이곳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이 전의 우려

가 결국 기우였음을 확인시키듯 이 현장 역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랑 팔레보다 규모가 작아 갤러리들을 둘러보는 데 집중도가 훨씬 높았고, 전반적으로 상당

히 우수한 작품들과 함께 유명 작가들의 작품들이 간간히 눈에 띄어 이들이 모두 신생 갤러리들

이 맞나 싶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적중했다. 아쉽게도 오피시엘에는 신생 갤러리들

외에도 중견급 이상 되는, 때로는 꽤 이름이 알려진 큰 갤러리들이 섞여 있었다. 또한 그랑 팔레

와는 다른 자유롭고 젊은, 색다른 성격의 페어를 선보이겠다는 주최측의 계획은 건물의 외관만

해당될 뿐 정작 내부는 작은 규모 빼고는 그랑 팔레 현장과 그다지 다를 바가 없었다. 이에 대해

몇몇 방문객들은 오피시엘의 정체성이 전혀 보이지 않아 의아했다는 반응을 보였고, 혹자는 오피

310

시엘이 내년 봄 오픈 할 LA 피악의 사전 실험으

로 볼 수 있지 않겠냐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

지만 신생 갤러리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이를

전략적으로 지원하고자 하는 취지는 상당히 고

무적임에 틀림없고, 향후 점차적으로 그 정체성

을 찾아가리라는 기대를 해 본다.

2) 그 벽 너머에(Hors Les Murs)

이번 피악은 그랑 팔레의 벽 너머, 파리의

주요 명소들에 조각이나 설치작품들을 전시하

고, 다양한 공간에 퍼포먼스와 세미나, 영화제

를 마련함으로써 더욱 확장된 예술 행사로서의

면모를 가시화 했다. 루브르 박물관 뒤에 펼쳐

진 뛸레리 정원(Jadin des Tuileries)에는 크리스

티앙 볼탕스키(Christian Bontanski), 수 푸지모

토(Sou Fujimoto) 등 총 17명 작가의 공공미술

작품들이 공원 내부의 정원, 연못, 나무들과 어

우러져 곳곳에 전시 되었다. 그리고 자연사 박

물관과 플랑 정원(Jardin des Plantes)에는 장소성

과 관련하여 식물과 동물, 자연과 인간의 상호

관계성에 주목하는 총 25명 작가의 장소 특정적

(site-specific) 작품들을 선보였다. 방돔 광장에는

폴 매카씨(Paul McCathy)의 작품을 설치하였으

나 선정적인 작품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반감이

작품 훼손으로까지 이어져 바로 철수해야 했다.

이에 프랑스 대통령까지 나서서 작가의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며 다시 설치할 것을 권했으나

폴 매카씨가 이를 거부해 결국 작품 대신 작품

으로 인한 해프닝만이 남게 되었다.

폴 매카씨의 공공미술 작품은 철수되었지

만, 피악 기간에 그의 초콜릿 공장(Chocolate

Factory) 전시가 3년 만에 재개관하는 모네 미술

리 뷰

311

관에서 오픈했다. 폴 매카씨의 초콜릿 공장 전

시는 고풍스러운 모네 미술관 안을 다시 한 번

가격하는 듯, 합판으로 성글게 지은 초콜릿 생

산 박스로 전시장 안 첫 공간을 장악했다. 빨강

색 유니폼을 입은 금발의 미녀들이 산타 초콜릿

을 반복적으로 찍어대고, 관람객들은 합판 벽에

뚫어 놓은 창문으로 그 안을 엿보게 된다. 그리

고 갑자기 어두워진 다른 방들에는 산타 초콜릿

이 선반 가득 쌓여 있고 천장과 벽에는 작가가

웅얼거리며 낙서하는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무

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초컬릿 더미나 온 공간에

진동하는 초컬릿 냄새보다도 전 공간을 더 강하

게 에워싸고 있는 폴 매카씨의 분노 섞인 울림

들이다. “네가 예술가냐? 멍청한 미국인(Are you

artist? Fucking stupid american)”, “너는 더러운

미국인이야(You dirty American)”, “너는 여기 있

으면 안 되(You shouldn’t be here)”, “네 작품은

퇴폐적이야!(Your work is degenerate)!”라는 자

소적이고 신경질적인 작가의 목소리가 온 공간

을 장악하고 있다. 그리고 이 전시를 소개하는

미국의 예술지들은 저마다 폴 매카씨 이름 앞에

‘파리와 맞지 않는 예술가’라는 수식어를 붙이

고 있다. 피악이 ”벽들 너머에“ 라는 프로젝트로

파리의 대표적인 광장에 마치 기념비처럼 보이

는 폴 매카씨의 작품을 설치하려 했으나, ‘미국’

의 대표적인, 매우 도발적인 작가의 작품이 프

랑스인들의 고상한 문화적 인식의 벽을 넘을 수

없었음을 각인시키는 기념적 해프닝만을 벽 너

머에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파리 시민들이 더

욱 문화적으로 고양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폴

매카씨의 반격이 해프닝의 정점을 찍었다.

피악이 런던의 프리즈 페어와 큰 시간차를

312

두지 않고 개최해서 프리즈 페어의 비유럽인 방

문객들의 발길을 상당부분 피악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고, 무엇보다 영미 갤러리나 콜렉터들의

증가는 피악이 다시금 제 위상을 찾고 있다는

긍정적인 정황을 반영한다. 그리고 피악이 마련

한 행사들 외에도 이 기간을 중심으로 많은 미

술관이나 갤러리들이 새로운 전시들을 선보여

볼거리가 가장 풍요로운 시기이기도 했다. 파리

곳곳의 물리적 요소들뿐만 아니라 도시 분위기

자체가 상품화 되어 파리에는 여전히 수많은 관

광객들로 북적이고, 더욱이 피악과 함께 수많은

예술행사들이 더해졌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은 단순히 ‘볼’거리 외에 그 이상의 감흥은 느

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피악 기간에 개관한 루

이비통 재단의 건축물은 유명한 건축가 프랑크

게리(Frank Gehry)의 환영과 루이비통의 명품적

이미지가 더해져 그저 화려한 또 하나의 볼거리

를 생산해냈구나 라는 다소 지친 건조한 반응만

이 일었을 뿐이다. 이렇게 극히 개인 적인 감회

로 피악의 열띤 열기에 찬 물을 확 끼얹게 되었

지만, 다양한 가치 판단을 존중하며, 이상 10월

의 파리 예술 현장 소식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리 뷰

313

남선우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4 - 화씨 451도의 예술: 망각의 바다로의 항해

지난 8월 1일,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4가 <화씨 451도의 예술: 망각의 바다로의 항해> 라

는 제목으로 올해 하반기 미술 달력을 줄이어 장식할 대형 국제 미술행사들 중 첫 막을 올렸다.

바로 옆 우리나라에서는 ‘귀신, 할머니, 간첩’을 찾고(미디어시티서울), ‘터전을 불태우는’(광주

비엔날레) 가운데, 또는 우리 그냥 ‘세상 가운데 거주하자’(부산 비엔날레)고 유혹을 하는 가운데,

유독 낭만적으로 보이는 요코하마 트리엔날레의 제목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화씨 451도’는 레이 브래드버리Ray Bradbury의 1953년 소설 <화씨 451 Fahrenheit451>

에서 가져온 개념이다. 책의 배경은 소설이나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흔한 근미래 디스토피아다.

이 책에서 설정한 상황에는 역시나 디스토피아 소설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 같은 정부가 나온다. 정부가 TV를 통해 제공하는 쾌락적인 정보와 문화가 사

람들을 지배하는 미래에는 생각의 다양성이 가지는 전복적인 힘을 애초에 발생시키지 않도록 하

기 위해, 사람들이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끔 만드는 ‘책’을 모두 불살라버린다. 모든 위험이 미리

통제되어 더 이상 불이나지 않는 미래에서 방화수(fireman)의 역할은 불을 끄는 사람이 아니라

숨겨진 책들을 찾아내 그 책에 불을 붙이는 사람, 그야말로 ‘방화수(放火手)’이다. 방화수의 작업

복에 새겨진 451은 책이 불타기 시작하는 온도를 의미한다. 아무 죄책감이나 의식 없이 책과 책

을 지키던 사람들에게 불을 지르던 방화수 몬태그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책 속에서 진실을 보게

되고, 책을 지키는 사람이 된다. ‘전향’이 발각되어 집이 완전히 불타고 부상을 입은 몬태그는 통

째로 책 한권씩을 외워 스스로가 한 권의 책이 되어 버린 ‘책 사람’들과 함께, ‘안락하지는 않지만

진실을 아는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오늘날 보이는 많은 실망스런 사건들과 그것을 은폐하려는 조작들,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

314

려는 움직임들은 브래드버리가 1953년에 예고

한 모습과 많은 부분 겹친다. 화씨 451도가 책

이 불타는 발화점, 즉 더 이상 생각이나 담론이

생산되지 않고 사회에 대한 인식이 셧다운 되는

온도라면, 세상은 점점 뜨거워지고 있고 우리는

이미 그 화씨 451도 언저리에 다다라 있다. 세

상은 이미 화씨 451로 가열되고 있어, 조금만

더 뜨거워지면 누군가가 일부러 어떻게 하지 않

아도 저절로 불붙어 모든 사고가 소각될 것만

같다. 이렇게 보면 ‘화씨 451의 예술’은 낭만적

이기만 한 제목은 아니다. 오히려 사고와 표현

에 대한 감시와 검열이 일반화된 현재 상황(광

주 비엔날레 20주년 전을 둘러싼 사태 때문에

우리는 더 뚜렷이 인식하고 있는)에서 의식을

절대로 소각시키지 말자는 의지이며, 현실에 대

해 예술이 어떤 발언과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제목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의,

예술가의 역할은 의식이 소각되는 것을 막기 위

해 세상의 온도를 낮추는 물, 또 다른 ‘방화수

防火水’와 같은 것이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2014는 세상의 온도를 낮추기 위한 예술가들의

고민, 세상이 잊어버린 영역을 대면하게 하기

위해서 ‘망각의 바다로 여행을 떠나도록 제안하

는’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전시 테마의 아이디어를 책에서 가져왔듯이

전시의 구성도 책의 목차처럼 되어 있다. 서문

두 장, 본문 열한 장으로 되어 있는 전시를 책장

을 넘기듯 순서대로 관람하기 위해서는 동선에

계속 신경을 쓰면서 다녀야 한다.

우선 메인 전시장인 요코하마 미술관의 입

구에 위치한 서문 1장, 비기념비적 기념비들

(Unmonumental Monuments)에는 윔 델보

리 뷰

315

예(Wim Delvoye)와 김홍석의 ‘기념비적이지

않은 기념비’ 작업이 전시되어 있다. 고딕 건축

물을 연상시키는 화려한 델보예의 마차 <Flat-

bed Trailer>는 전시의 시작 지점에 위풍당당하

게, 김홍석의 쓰레기봉지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Bearlike Construction>과 풍선 캐스팅 <8

Breath>는 전시장 근처 지하철 역사 공간이나

잘 보이지 않는 전시장 구석에 툭 놓여있다. 델

보예의 작업은 가장 커다랗고 대표적인 자리에

자리했으나 외려 전시장을 찾는 사람들의 ‘포토

존’으로 전락하면서 그 웅장한 기념비성을 스스

로 잃어버리고, 김홍석의 작업은 전시장 안팎의

구석구석에 무심하고 우두커니 자리 잡음으로

서, 이것이 예술가의 작업인지 누군가의 장난인

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비기념비적 기념비’ 라는 아이디어는 대지

미술가로 알려져 있는 로버트 스미스슨에게서

시작했다. 에너지의 비가역성으로 인해 태양계

가 결국 식어버릴 것이라는 다소 종말론적인 엔

트로피 개념에 경도되어 있었던 스미스슨은 그

의 1967년작, <뉴저지 퍼세익 기념비로의 여행

> 에서 결국 쇠퇴할 만물을 대표하는 기념비, 즉

‘모든 기념비의 파괴를 위한 기념비’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

었는데, 이미 세상은 그런 것들로 가득했기 때

문이다. 스미스슨은 자신의 고향 뉴저지 퍼세익

에 방문하여, 마치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발굴

하듯이 아무럴 것도 없는 장소들을 카메라에 담

는다. 이 가짜 방문기에 나오는 장소 하나 하나

는 곧 쇠퇴할 기념비라는 점에서 뛰어난 역사적

기념비나 예술작품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

이다. 그렇지만 스미스슨이 내어 놓은 염세적

316

결과물은 델보예와 김홍석의 결과물과는 차이

가 있다.

스미스슨의 작업이 어떤 것을 영원히 기념

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며, 그 기념비들

또한 모두 소멸할 것이라는 관점에서 ‘반기념비

적 기념물’들을 제시했다면, 델보예와 김홍석의

‘비기념비적 기념물’들은 이미 거대한 기념물이

면서도 기념물이 아닌, ‘예술 작품으로서 스스

로의 위치’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김홍석은 그간 몇 번의 전시에서 ‘무엇

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해 왔

다. 그는 청소부의 걸레질에 의해 만들어진 작

업을 가지고 저자성에 대한 질문을 건네기도 하

고(2013년 플라토, <좋은 노동 나쁜 미술>), 도

슨트 퍼포머들의 각기 다른 전시설명을 통해 작

품의 의미를 공중에 붕 띄우기도 했다(2012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전>). 이번 전시

에서 그의 <8 Breath>는 본전시 1장 ‘침묵과 속

삭임에 귀를 기울이다’에서 카지미르 말레비치,

존 케이지, 마르셀 브로타에스 등의 작품과 함

께 진중한 브론즈 조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전시의 마지막 장소인 싱코피어 카페테리어의

야외 좌석들 사이에 무심하게 놓여있기도 하다.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스의 하늘 프린트 옆에 놓

인 1 전시장의 풍선과, 바다와 하늘이 부둣가

야외 좌석에서 소풍을 나온 가족들과 함께 보

는 풍선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지는 것일까, 이

번 트리엔날레에 전시된 델보예와 김홍석의 작

업은 스케일이나 전시 구성의 맥락, 작업이 전

시된 위치 등을 고려할 때 공공미술적인 성격이

강하다. ‘무엇이 예술을 예술이게 하는가’ 라는

작가의 질문을 이번 전시에서는 ‘무엇이 이것을

리 뷰

317

공공의 예술이게 하는가’로 바꾸어 볼 수도 있

겠다. 트리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요코하마는 삼

년 만에 열린 동시대 미술 담론의 각축장이자

도쿄 사람들의 당일치기 유원지이다. 그래서 요

코하마는 이미 기념비로도, 비기념비로도 넘치

는 도시다. 두 가지 특성을 가진 이 장소에서 작

가들이 던지는 질문은 전시의 시작부터 끝까지

유효하며, 전시를 보러 오는 지하철 역사와 전

시가 끝나는 지점의 까페에 김홍석의 작품이 전

시된 점에서도 그렇다.

기념비에 대한 아이디어를 계속 이어가고

있는 서문의 2장은 단 한 작업으로 구성되어 있

다. 바로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을 맞이하는 거

대한 쓰레기통, 마이클 랜디Michael Landy의

<Art Bin>이다. 전시가 진행되는 내내 관객들은

랜디가 설계한 높은 계단 꼭때기에 올라가서 거

대한 예술 쓰레기통Art Bin에 무언가를 던져버

릴 수 있다. 랜디는 이 작품을 ‘창조적인 실패를

위한 기념비’라고 정의했다. 성공적인 예술이

등장하기 위해 사그라지고 잊히는 수많은 실패

들을 위한 이 기념비는 이번 전시에서는 역설적

이게도 가장 목 좋은 곳에 가장 커다란 스케일

로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델보예의 작품 앞에서 기념사

진을 찍거나 즐겁고 호기심어린 마음으로 랜디

의 <Art Bin>에 예술 쓰레기를 던진 미술계의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기념비성에 대해 이

야기 하는 서문 장의 작업들은 모두 공공미술

또는 관객 참여형 작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비

엔날레나 트리엔날레 같은 국제 행사는 두 그룹

의 주요 관객이 있는데, 첫째는 전국과 해외에

서 전시를 보기위해 날아오는 미술계의 사람들

318

이고, 둘째는 비엔날레가 열리는 지역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두 관객층 모두를 만족시키는

전시의 사례는 드물다. 첫 번째 관객층에 너무 치중하게 되면 지역의 공감을 사지 못하기 쉽고,

참여적인 요소나 지역의 역사성을 무리해서 집어넣은 전시는 뭔가 머리가 둘 달린 사람 같이 되

기도 한다. 몇 번의 광주 비엔날레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성공했는지

는 알 수 없지만) 두 파트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한 기획의 흔적이 여실히 보이는 전시였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지역을 고려하는데 있어 역사성을 부각시키거나 참여적 성격의 전

시를 만드는 것보다 위험이 적으면서도 친근한 차선책을 택했는데, 바로 ‘지역 커뮤니티와의 연

결’이다. 요코하마에는 비영리 예술 기관들이 많이 있는데, 뱅크아트1929(BankArt 1929), 코가

네초 마을관리센터(Koganecho Area Management Center), 스티프 슬로프 스튜디오(Steep

Sloope Studio), 요코하마창조센터(YCC)등이 그것이다.

뱅크아트1929는 요코하마 항구의 낡은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비영리 미술기관으로, 요코하

마의 도시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을 목표로 한 다양한 전시와 프로젝트를 열고 있다. 관광지화, 유

원지화 되어가는 요코하마에서 유서 깊은 건물들이 파괴되어가고 지역색을 잃는 것을 막기 위해

뱅크아트1929는 역사적 도시건물을 활용한 도심 재생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스튜디오는

전시장과 공연장, 까페와 서점, 레지던스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트리엔날레 기간 동안 뱅크

리 뷰

319

아트1929에서는 <동아시아의 꿈> 전시가 진행된다. 한국의 광주, 중국의 취안저우, 일본의 요코

하마가 추진하는 ‘동아시아 문화도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열린 이번 전시에는 한국의 노리단,

최선, 재일작가 김수미, 일본작가 이시우치 미야코, 중국작가 양푸동 등이 참여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본전시장에서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코가네초 마을관리센터는

작가들의 스튜디오가 모여 있는 작은 예술인 마을이다. 요코하마 시는 제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사창가였던 코가네초 지역의 줄줄이 늘어선 박스형 성매매 공간을 매입하여 이 공간을 작가 스튜

디오로 만들었다. 일 년에 2-3번 오픈스튜디오나 작은 아트페어를 열고, 입주 미술인들이 마을에

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한다. 트리엔날레 기간 동안은 오픈스튜디오를 열고 있다. 트리엔날레

전시장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도착한 관객들은 구 사창가를 따라 늘어선 오픈스튜디오와 까페를

방문하여 작품을 보고, 패스포트에 도장을 찍는다. 시간에 맞추어 돌아가면 다시 셔틀버스를 타

고 뱅크아트나 싱코피어, 본전시장으로 이동할 수 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각각의 공간들을 큰 전시에 포함시키지 않고, 그 공간들이 원래 하던

프로그램을 그대로 진행하게 하면서 트리엔날레를 찾은 관객들이 쉽게 공간들을 찾을 수 있도록

지도(도록 뒷표지가 훌륭한 인포그래픽 지도로 쓰였다)와 셔틀버스, 간단한 정보만을 제공했다.

이는 아주 유효한 전략이었다. 본전시의 성향에 지역 커뮤니티의 성격을 억지로 맞추지 않음으로

써 양쪽 공간 모두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요코하마라는 작은 도시 전체에서 ‘예술 축제’가 열리

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근대 이후 난개발되었던 요코하마를 예술로

바꿔보려는 시도를 지속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택한 방법이 지역에 이미 있었던 예술 커뮤니티들

과의 연계와 지원이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는 요코하마의 역사적 건조물이나 창고 등을 이용해

예술 활동을 하고 있는 지역 커뮤니티들을 ‘창조 거점’으로 두고 상호 능동적으로 지원과 홍보를

지속하고 있다. 상호 능동적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트리엔날레라는 대형 프로젝트에 지역 커

뮤니티의 프로젝트 주제가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고, 이 점은 요코하마 전체의 예술 프

로젝트들을 지속시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국제 비엔날레의 특성상 대다수의

관객들은 먼 곳에서부터 ‘여행’을 오는 것과 같은 마인드로 전시장을 찾게 된다. 비엔날레처럼 주

기마다 다른 감독이 다른 주제로 여는 대형 기획전과 마을에서 지속적으로 열려온 소소한 예술의

움직임을 함께 볼 수 있어, 전시와 여행의 재미를 모두 충족할 수 있었다. 트리엔날레의 일시성

과 지역 커뮤니티의 지속성을 같이 보면서 생기는 비교지점 또한 생각해 볼 부분이었다. 이벤트

성 행사가 워낙 대형이기 때문에 자칫하면 삶과 연결된 커뮤니티의 지속적인 프로젝트가 이벤트

에 묻힐 수 있는데, 중언하다시피 트리엔날레는 그 부분을 숙고한 흔적이 보이는 전시였다. 광주

의 대인시장프로젝트, 부산의 바다미술제가 조금 더 지역커뮤니티의 자율성을 보장한 채로 지원

을 받았더라면 지금의 모습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면상 전시의 서문 장과 연계 프로그램 전시에만 주목하게 되어, 마치 책을 프롤로그와 에

320

필로그만 읽은 것 같이 되었다.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본전시가 준 가장 큰 인상은 일관된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 ‘동시대’와 ‘미술’에 대한 집착을 버렸다는 것이다. ‘침묵’의 예술을 보여주는데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전시한다거나(제1장, <침묵과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다>), 사상 통제를 비

판하기 위해 에릭 보들레르의 영화 <The Ugly One>상영하는 등의 선택(제3장, <화씨 451은 어

떻게 예술에 등장했는가>)은 개별 작업을 전시 주제의 맥락에 우겨넣지 않고, 개별 작업의 의미

와 전시 주제 모두가 빛날 수 있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큰 집착을 버리고 할 말을 하는 전시

라는 인상은 지역 커뮤니티의 프로그램에 전시주제를 강요하지 않은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읽힌다.

앞으로 개막을 앞두고 있는 여타 비엔날레들이 던지는 호전적 질문보다 큰 반향을 일으킬 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을 놓치지 않고 여행자의 마음으로 요코하마 전체를 관람

할 수 있는 전시였다.

리 뷰

321

윤민화

황학동, 끝나지 않은 이야기

2011년 여름,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 잘 알고 지내던 작가로부터, 황학동에 한번 와

달라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2010년부터 황학동 중고품시장의 어느 상가 건물에서 ‘솔

로몬 아티스트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레지던시와 전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었고, 내게 가

을에 진행 될 개인전에 부치는 글을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나의 귀에 걸리는 단어는 ‘황학

동’ 쪽이 아니라, ‘개인전’과 ‘글’이었다. 황학동이 생소했던 나에게 그 이름이 환기시키는 기억이

나 이미지는 전무했기 때문이다.

전시를 위하여 처음으로 황학동에 갔던 날을 회상해 본다. 신당역을 나와 성동공업고등학교

를 옆에 끼고 천변을 걷다보니 어느 새 가을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스름 깔린 동네는 스

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마저도 공사 중인 건물이 많아서 솔직히 말해서 동행이 없었다면 다리가

후덜거려 끝끝내 시장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내가 처음으로 보

았던 황학동은 청계천 복원 사업을 막 마치고 재개발 지역에 마지막 공사 작업이 진행되던 시기

인 것 같다. 인근에 새롭게 세워진 롯데캐슬 단지를 찾는 사람들이 반드시 지나치게 될 길목에 그

럴 듯한 건물들을 세워두는 작업. 그러니까 그 안쪽에 위치한 황학동 중고품시장의 민낯을 교묘

히 가리는 작업이 한창이었던 것이다.

병풍이 필요한 동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황학동 중고품시장 인근의 빈민가를 가리기 위해 병풍용 건물을

세우는 관행은 이것이 처음이 아니었다.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 지역의 병풍용 건물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삼일시민아파트가 등장한다. 박정희 정권은 근대화를 꾀하면서 청계천 복개

322

와 삼일고가도로의 건설, 그리고 삼일시민아파트를 건립했다. 삼일시민아파트는 이 지역의 무허

가 건물들을 정돈하고 거주자들을 입주시킴으로써 한마디로 지역 청소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

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삼일시민아파트를 짓게 된 진짜 이유는 당시 서울시 발전의 상징으로 여

겨졌던 삼일고가도로에서 바라다 보이는 왕십리와 황학동 일대의 노후 주거지를 시각적으로 가

리고 은폐하기 위한 병풍용이라고도 전해진다.

삼일시민아파트에 관한 이야기는 작년, 그러니까 2013년 10월에 솔로몬 레지던시 프로그램

2기 참여작가들의 결과보고전을 큐레이팅하면서 알게 되었다. 참여 작가였던 조민호는 삼일시민

아파트에 관한 작업을 보여줬는데, 그의 사진 속에서 삼일시민아파트는 그야말로 안쓰러운 참상

에 가까웠다.[1] 마치 나이테처럼, 삼일시민아파트에는 1960년대 이후 황학동 일대의 역사와 기

억을 드러내는 상흔이 새겨져 있다. 왜냐하면 근대화의 물결로 당당하게 지어졌던 이 아파트는,

이명박 정권에 의해 청계천 복원 공사가 진행되면서 잘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더 이상 병풍의 기

능이 필요 없어진 이 아파트의 최후는 이런 것이었다. 1층과 2층의 상점들만 남겨두고, 3층부터

약 8층까지의 주거용 공간은 그렇게 삭제되었다. 난장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전시를 계기로 황학동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시간을 갖게 되면서, 이 지역에

관한 연구들은 주로 문화인류학이나 도시공학 분야에서 이루어졌으며 그마저도 청계천 복원 사

업을 기점으로 논문의 발표 횟수가 급속히 줄어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청계천 복원 계획 이전에

리 뷰

323

발표된 대부분의 연구 자료들은 이 복원 사업으로 황학동의 모습은 변화하고 잊혀지며 결국 사

라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이 관심 갖고 연구하던 민속 골동품, 장물아비들, 중

고품들이 즐비하던 황학동 시장은 그렇게 ‘끝’을 맞이할 것으로 내다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가 만난 황학동은 그렇지 않았다. 청계천 복원 사업으로 천변의 노점상들이 사라진 것은 사실이

다. 하지만 천변 아래 쪽에 위치한 시장 골목들은 변함이 없었다. 상인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대부분 40년 넘게 자신이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해온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그들의 입

장에서는 청계천 복원사업이란, 청계천변에 위치했던 노점상들 한 줄이 사라진 것에 불과한 일인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들을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며 그들의 ‘마지막’을 기록하며 ‘애도’하는 것

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이다.

잊혀진 시장의 새로운 소비자들

처음 황학동과 인연을 맺게 해준 솔로몬 아티스트 스튜디오는 이제 ‘케이크갤러리’로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의 이름이 건물명인 솔로몬 빌딩에서 왔다면, 이번 이름은 이 건물의 독특한 구조

에서 왔다. 부채꼴 모양의 건물에는 마치 케이크를 잘라 놓은 듯이 켜켜이 작은 공간들이 들어서

있다. 이런 독특한 모양새를 한 것은 황학동 중고품시장이라는 특성상 작은 공간에 많은 상점들

이 들어서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과거 어느 호시절에는 건물에 빈 공간 하나 없이 상점과 작

324

업장이 입주해 있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더 이상 임대가 되지 않는 건물의 일부 빈 공간

에 미술인들이 찾아오면서 전시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케이크갤러리가 위치한 솔로몬빌딩을 중심으로 삼거리가 형성되는데 크게 세 종류의 상점들

이 눈에 들어온다. 첫 번째는 과거 황학동의 대표적인 판매 품목이었던 민속골동품 상점, 그리고

각종 장물들을 취급하는 중고품 상점, 마지막으로 중고 가전제품을 사고 되파는 전자제품 상점이

그것이다. 청계천이 복원되기 전, 많은 노점상들이 천변에 위치하여 자연스럽게 소비자들의 발걸

음이 황학동 중고품 시장으로 이어지던 시기에는 민속골동품과 각종 장물들이 가장 활발하게 거

래되었다면, 요즘 황학동에서는 중고 가전제품 상점들이 가장 바쁜 모습이다.

가전제품 상점들이 위치한 골목에는 매일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등을 실은 트럭과 리어카가

마치 흥정하듯이 어슬렁 어슬렁 들어온다. 어느 상점에선가 흥정이 잘 이루어져 중고 가전제품들

이 내려지면, 상점 주인들은 기기들을 분해하고 말갛게 씻긴다. 하루 종일 이 골목 바닥에는 물기

가 사라지지 않는다. 각종 세제들로 거품 목욕을 한 기기들은 새로운 부품들로 정비되어 진열대

에 다시 선다. 요즘 이러한 가전제품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주로 동남아 사람들이다. 나는 스리랑

카에서 온 어느 노동자와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있는데,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퍽 흥미로웠다. 한

달에 한번, 스리랑카로 가는 배에 컨테이너 가득 중고 전자제품들을 실어서 수출한다는 것이었

다. 나름 시스템이 분화되어 있다는 사실도 인상적이었다. 내가 만난 사람의 경우는 시장에 나가

서 직접 가전제품들을 사는 팀이고, 다른 팀은 그렇게 사들인 가전제품들을 동두천으로 싣고 가

서 한데 모은다. 거기에서 취합된 제품들은 부산으로 옮겨져 컨테이너에 실려 스리랑카로 떠나는

배에 태워진다. 그러고나면 스리랑카의 어느 부두에서 그 가전제품들을 받아서 현지에서 비싸게

판다는 것이다.

요즘 황학동에서 가장 생기가 있는 상점들은 바로 이렇게 수출용 가전제품을 판매하는 곳들

이다. 그러니까 황학동은 나름대로 일종의 살 방법을 찾은 것이다. 과거에 황학동의 대표 품목이

었던 민속골동품점이나 장물 상점들도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고 하루도 빠짐없이 가게를 오픈하

지만, 하루에 도대체 몇 개를 팔아서 임대비를 내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매출은 보잘 것 없다. 하

지만 막상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보면 상점을 운영하는 상인들도, 그곳을 방문하여 소소하게 대화

를 나누는 방문객들도, 나름 세상의 변화에 적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이 여전히 활

발할 수 있는 동력이 소위 가장 잘 나가던 시기였던 70-80년대에 대한 회상과 추억의 노스탤지

어일지라도 말이다. 이렇게 황학동에는 이렇게 현재와 과거가 공존한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가전제품 상인들과 흥정하는 현재와 과거엔 누구보다 활발히 골동

품들을 취급했을 오래된 상점의 노스탤지어가.

팀 황학동 - 증상적인 것의 미학

리 뷰

325

지난 5월부터 솔로몬 빌딩 1층의 한 켠을 거점으로 ‘팀 황학동’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1

차적으로 올 해 10월까지 진행될 이 프로젝트는 황학동 상인들을 대상으로하는 증명사진/영정사

진 서비스를 바탕으로 그들과 인터뷰를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의 삶과 문화를 기록해 나가고

있다. 이후 11월에는 그 결과보고전이 케이크갤러리에서 열릴 예정이다. 이 프로젝트에는 다섯

명의 작가들(손준호, 이호인, 오진욱, 최기창, 최우진)이 참여하고 있으며, 여기에 나를 포함하여

다섯 명의 예술학과 석사과정 학생들(노해나, 안성은, 이소라, 장한별)이 텍스트 기반의 리서치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있다.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라는

개념이다. 이것을 위하여 일방적인 개입이 아니라 상호적인 참여를 염두하며 프로젝트를 진행하

고 있다. ‘개입’과 ‘참여’는 언뜻 유사해보이지만, 개입은 절대 ‘우리’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명백

히 다르다.

물론 황학동에서 미술을 한다는 것이 반드시 ‘황학동’이라는 장소와의 연결지점을 요구하는

일은 아니다. 미술을 하면서 장소특정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제는 어쩌면 촌스러운 일일지도 모른

다. 하지만 모두다 이제는 잊혀진 곳이라고 여기는 이 황학동을 기록하고, 황학동에 여전히 사람

들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내가 이 곳에서 미술을 하는 한 필연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하며, 또 어떤 방법으로 기록해야 할까. 해법을 찾기 전

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지속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황학동 일대가 모두 다 재개발로 완전

히 없어지지 않는 한, 그러니까 적어도 이곳이 중고품시장의 명맥을 이어가는 한 지속적으로 기

록하는 것 말이다.

이러한 ‘기록’의 중요성은 나보다도 훨씬 앞서서 황학동에 관심을 갖고 연구 및 기록을 한

미술인들의 자취를 찾으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미술비평가 임근준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황학동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나는 그가 편집장으로 있었던 <월간 공예>의

지면과 2002년 광주비엔날레의 부대행사로 열렸던 <국제 워크숍 - 공동체와 미술> 자료집을 통

해 그가 쓴 글과 사진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있다. 아트스페이스 풀의 아카이브

에서 보관하고 있었던 <청계천 탐험>이라는 책은 2003년 플라잉시티와 문화연대, 도시건축네트

워크의 협업으로 청계천 일대를 면밀히 탐사하고 연구한 자료들을 기록하고 있었다. 청계천 복원

사업을 계기로 연구를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청계천과 천변 노점상들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황학동에 관한 이야기도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의 자료는 내가 황학동에 다가서는데에 큰 도

움이 되었다. 앞서 이 곳을 다녀가고, 연구하고, 기록한 방법들을 타산지석 삼아서 지금의 황학동

을 기록하는데 보탬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가지 또 반가운 소식은 ‘통의도시연구소’에서 올해에

는 황학동을 주제로 연구 중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언젠가 ‘역사’가 될 ‘현재’를 기록하는데 중점

을 두고,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체계적으로 황학동을 조사, 연구하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미술

인으로서의 나의 시선과는 다른 층위에서 황학동을 기록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326

앞서 나는 이 지역의 빈민가 혹은 슬럼화된 중고품 시장을 시각적으로 은폐하기 위한 병풍용

건물들을 이야기했다. 역사적으로 정부는 이 지역을 가리는데 급급했고, 서울의 근대화와 도시화

의 이름에서 의도적으로 황학동은 빠지고 없었다. 또 청계천이 복원되고 청계천의 역사와 문화를

찬양하는 와중에도 바로 인근에 위치한 황학동의 중고품시장은 그 우스꽝스러운 영광에서조차

삭제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학동에는 지금도 여전히 중고품 시장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수십년 이상 자리하고 있는 상인들이 있고, 끊임없이 발걸음을 하는 소비자들이 있다. 상

징화된 도시의 그늘 아래에서 도시 빈민들의 가장 실재적 삶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

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의 차이를 두고 반복적으로 황학동에 발걸음을 하는 나와 같은 미술인에

의해서, 혹은 도시 연구자들에 의해서 그들의 삶이 드러나고 있다. 그들은 황학동을 통하여 서울

이라는 도시의 숨겨진 증상을 들춰낸다. 그 증상은 때로는 삼일시민아파트로, 때로는 골동품상인

의 수집취향을 인터뷰하는 것으로, 때로는 곧 개발될 땅에 꽃을 심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으로 기

록되고 있는 것이다.

[1] 2013년 레지던시 프로그램 결과보고전과 조민호 작가의 <3.1아파트 프로젝트>는 cakegallery.kr에서 자세한 자료를 찾아

볼 수 있다.

리 뷰

327

이기언

괴산의 아주 매운 페스티벌가수 겸 기획자 사이 인터뷰

들어가는 글

괴산을 대표하는 유명한 두 개의 축제가 있다. 하나는 괴산의 명물 고추를 소재로 한 고추축

제이고, 다른 하나는 톡 쏘는 매운 느낌의 더 매운 청량고추 같은 축제, ‘괴산페스트벌’이 있다.

지난 4년 간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즐기는 유기농 페스티벌 ‘괴산페스티벌(이

하 괴페)’에서 가수 겸 기획자 ‘사이’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Qrator : 지난 4년간 단체도 아닌 개인이 지원도 받지 않고, 공연을 기획해 오셨습니다. 특별

한 입장료, 참가비도 없던 괴산페스티벌은 벌써 4회째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첫 번 째 페스티벌

을 비롯하여 지난 괴산 페스티벌의 발전과정을 설명해 주실 수 있는 지요. 또한 진행하시면서 어

려운 부분은 무엇이 있었는 지를 설명 부탁드립니다. 지난 1,2,3회 괴산페스티벌과 올해 4회를

맞이하는 괴산페스티벌의 차이는 무엇이라고 보시나요?

사이 : 첫 회는 이십대 초반의 여자 친구들이 모여 살던 ‘특집’이라는 곳에서 했어요. 오래된

일본식 주택이었는데, 거기 사는 대여섯 명 애들과 함께 그 집 앞 텃밭을 갈아엎어서 했지요. 무

대는 흙바닥에 천 하나를 깔아서 구분했고, 조명은 스텝 중의 한 친구의 남자친구 집이 철물점

을 하고 있어서, 그 친구가 아버지 몰래 들고 온 전봇대에 다는 커다란 등을 하나 달았던 게 전부

였어요. 아, 무대에도 집 안에서 쓰는 조그만 등 하나를 킨 것 같네요. 홍보를 거의 안했지만, 사

람들이 너무 많이 올까봐 외부지역 사람은 50명만 받았어요. 괴산에서 오신 분들까지 합치면 한

150명 정도는 된 것 같아요. 그래서 후원금 150만원을 모았죠. 이 때 우연히 들른 우리 집 주인

께서 이 공연에 반해, 지금까지 가장 큰 후원자이자 중요한 스텝으로 같이 하고 있습니다. 2회는

그 집주인분의 소개로 불정면에 있는 폐교된 한 초등학교에서 치루었습니다. 그 분이 음식을 준

328

비해 오셔서 팔고, 그 수익금 전체를, 재료비도 안 받고 다 괴페(괴산페스티벌)에 주셨죠. 덕분에

2회는 한 삼백만원 가까이 모였던 것 같아요. 운동장 풀도 깎아주셨고, 숙박시설 청소도 같이 하

셨고, 천막이며, 이것저것 정말 그 분 덕분에 2회를 할 수 있었어요. 이때부터 괴산에서 저랑 제

일 친한 목수형님네가 도와주셨죠. 원래 서울에서 연극과 풍물을 직업으로 했던 사람에다가 목수

라서 이 형님도 정말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기

보다는 그냥 제가 일을 저질렀고, 사람들이 하나씩 붙더니, 뭔가 대충 잘 해내게 되더라. 이런 느

낌입니다. 2회는 인원을 100명으로 제한했는데, 총 한 이삼백 명은 모인 것 같았어요. 우리는 몇

명이 오는가에 관심이 없으니, 잘 몰라요. 사진이나 영상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도 3회째가 되어

서야 하기 시작했죠.

3회는 제가 사는 칠성면에 있는 폐교된 초등학교에서 했고요. 처음으로 인원을 제한하지 않

아서 한 삼사백 명이 모였습니다. 후원금도 400만 원정도 모였구요.

올해도 역시 집주인의 도움으로 청소년수련관에서 괴페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해마다 장소

를 구하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인데 왜냐하면 일단 우리가 돈이 없고, 주변에 이 축제를 시끄러워하

는 사람들이 없어야 하며, 음악회를 할 만큼 충분한 전기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공간도 캠핑

을 할 수 있을 만큼 넓어야 하구요. 생각해보니 올해가 가장 안정적으로 진행됬던 것 같네요. 작

년부터 자원봉사자를 모집해서 스텝으로 참여시켰는데, 올해도 작년의 멤버그대로 참여해서 손

발이 잘 맞았고 우리 스텝들도 갈수록 노하우가 생기는 것 같아요. 올해는 후원금이 역대 최고액

이 모여서 뮤지션들에게 470만원을 공연료로 지급했습니다.

Qrator : 축제 중간 부분에 개량한복을 입은 주민들의 흥겨운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엇보다

이 축제에는 부모님들과 함께 와서 자연스럽게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 데요. 이

번 페스티벌을 위해 도와주시고, 힘써주신 분들이 있다면 어떤 식으로 결합했고, 무엇을 준비해

주셨는 지 이 지면을 통해 괴산지역 주민들, 공동체 등을 소개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이 : 아무래도 이 축제는 기존의 할매, 할배들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문화적 욕구가 있는 귀

농, 귀촌인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분들이 많이 오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우리 축제 라인업

을 짤 때는 나이 많은 어르신들을 잘 배려하지 않게 됩니다. 이 축제를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우

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하자고 생각했으니까요. 괴산에 모든 지역민들을 배려하면 더 좋겠지만 감

당할 수 없으면서 욕심을 내면 힘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재미도 없어질 거구요. 괴산에는 귀농

자들이 꽤 많은 지역입니다. 전국적으로도 제일 오래된 공동체에 속하는 ‘눈비산농장’이 있고 주

로 한 살림 생산자들이 모여 있는 청천 ‘솔뫼농장’도 있고 감물이나 불정면 등에도 많은 귀농자들

이 있습니다.

Qrator : 무대 디자인이 정말 독특했습니다. 오징어잡이 배를 연상케 하던데, 기획자로서 어

떤 의도를 가지고 제작하게 되었고, 누가 만드는 데 도와주었는 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리 뷰

329

사이 : 첫 질문의 답변으로 말씀드렸지만, 제일 친한 술 친구인 박배진형님이 만들어 주신 겁

니다. 그 형님은 집을 짓는 목수이고 서울에서는 연극과 풍물을 직업으로 했었습니다. 그리고

‘도깨비스톰’이라는 넘버벌 퍼포먼스를 기획한 사람이기도 하죠. 그래서 괴산 페스티벌의 무대디

자인은 무조건 이 분한테 맡깁니다. 오징어잡이 배 역시도 그 형님의 아이디어었죠.

Qrator : 축제 관람 안내 문구가 인상적입니다. 특히 ‘먹고 마시고 잘 것은 스스로 해결합시

다’라는 안내 문구가 그랬습니다. 이 역시도 유기농펑크와 관련이 있다고 봐지네요. 또한 럭셔리

한 캠핑 페스티벌에 대한 의식(?)이랄까요?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최근 ‘공동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유기농펑크라는 장르에 대한 설명과 더불어 4회를 관통해 온 괴산페스티

벌만이 느낄 수 있는 정취랄까요? 페스티벌의 취지를 설명 부탁드릴께요.

사이 : 유기농 펑크포크란, 형식은 포크이나 태도는 펑크를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유기농은

요즘 트랜드이기 때문에 갖다가 붙인 거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예상과 기대하는 바와는 달리 달

리, 사실 이 ‘유기농’에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추가 적으로 말씀드리면 괴산페스티발의 모토

는 세 가지입니다. 첫 째 목표는 돈이 아니라 사람이 위주인 축제이고요. 둘 째는 서울이 아니라

지역, 게다가 시골에서도 재밌게 공연을 하고 놀 수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는 돈을 벌기 위해 만

드는 가짜 친절함 대신 불편함을 상상력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실현해내기 위한 축제입니다.

처음에 이 축제를 기획했을 때 한국에 많이 생겨버린 자본으로 밀어붙여 진행되는 거대한 축제들

에 대한 어떤 불만에서 출발했거든요.

330

Qrator : 다소 민감한 질문일 수 있겠네요.

이번 후원금은 축제에 참여한 주민들이 함께 모

금을 하더군요. 흥겨워 보였습니다. 관객들도

즐겁게 후원금을 주는 문화를 접하니 축제 자체

가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티스트들

의 출연료로만 후원금이 사용된다고 하셨는데,

사실 참여한 아티스트들의 라인업을 보면서 많

이 놀랐습니다. (참고로 이번 괴페에는 하현진,

권나무, 위댄스, 스카웨이커스, 시와, 동물원의

김창기, 야마가타 트윅스터 등이 참여하였다)

이들의 캐스팅과정은 어떠했는지요. 기획자로

서의 캐스팅 노하우가 있다면, 대체 어떻게 오

징어잡이배의 전구 같은 마력을 뿜어내시는 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기획자로서 어려움은 없으

셨는 지도 궁금하네요.

사이 : 정말 다행인 것은 생각보다 라인업을

짜기가 쉽다는 겁니다. 왜냐면 음악가들은 두

가지 경우에 공연섭외를 받아들인다고 생각하

는데, 돈이 되거나 명분이 있으면 그렇습니다.

아마도 앞에서 말한 괴산 페스티벌의 취지에 많

은 음악가들이 공감을 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우리는 섭외할 때 여태까지 음악가들한

테 얼마를 줬으며, 우리 축제의 특성상 얼마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 금액은 적을 거라고 덧붙이죠. 하지

만 대부분의 음악가들이 흔쾌히 승낙을 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기획자로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야마가타 트윅스터나 스카웨이커스

는 그 날 서울에서 다른 공연이 있었음에도 불

구하고 자기들이 늦게라도 오고 싶다고 해서 마

지막 순서로 넣은 것입니다. 위댄스는 3년 동안

졸라서 올해 오게 된 거구요.

리 뷰

331

Qrator : 홍대 인디씬이나 전국의 음악페스티벌들 대부분은 기업의 후원 등으로 독립적 운영

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여건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페스티벌로 괴산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진행해 오셨는 데요. 본인은 지금까지의 과정을 어떻게 평가하시는 지 궁금

하네요. 성공적이라고, 기획된 바 그대로 잘 구현되었다고 보시나요?

사이 : 처음에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커져버려서 당황해 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제발 사람이

너무 많이 오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정도죠. 사람이 너무 많으면 우리가 감당해야할 몫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축제는 입장료가 없는 대신 관객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먹을 것과

잠잘 것을 알아서 준비하라던 지, 찾아오기 힘든 시골에서 열리고, 거대한 페스티발에서 제공하

는 편의시설을 마련하지 않는 것. 같은 거요. 바로 그것이 우리 축제의 입장료인 것이죠. 지금까

지는 재밌습니다. 하지만 이 축제가 재미없어지면 바로 그만둘 겁니다.

Qrator : 유유자적한듯 흐르는 유기농의 활동, 제 상상으로는 다소 게으를 수 있는 예술가의

활동 이라고 그려봤는데, 최근의 활동모습은 무척이나 부지런하고, 바쁘게 일정을 소화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때문일까요? 앞으로의 축제가 기대됩니다. 앞으로의 괴산페스티벌은 어떻게 진

행될까요? 기획자로서 이제 5년차로 접어들게 되는 괴산페스티벌을 미리 광고하자면 어떻게 소

개해 주실 것인지요.

사이 : 내년에도 올해랑 비슷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축제에 매우 만족하니까

요. 더 커지길 바라지도 않고 엄청난 돈이 생기기를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계속 재밌게 아름다

운 음악을 관객들과 함께 즐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일을 만들고 싶진 않거든요.

Qrator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다면, 유감없이 쏟아 내 주시길 바랍니다.

사이 : 곱창이 먹고 싶네요. 짜장면두요.

나오는 글

사이씨에게 평소 무대에서 ‘유기농펑크포크’의 창시자라고 자신을 소개를 한다. 혹여나 지역

과 공동체, 농촌, 유기농 등을 접목한 문화예술활동을 하고 계신 건 아닌지를 묻자 그 부분은 오

해라고 한다. 사이의 노래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으며 그가 보고 느낀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고 그 또한 어떻게 변할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는 점.

그 점에서 괴산페스티벌은 자유롭다. 이 때문일까. 괴산페스티벌은 이 지역 특산물인 고추 특유

의 향이 묻어난다. 톡 쏘는 향과 매운 맛은 인디밴드의 특징 아닌가. 지역의 축제지만 ‘자연스러

운 즐거움’을 지키고자 하는 지역민들과 사이의 동력이 살아 있는 한 이 지역을 찾는 외지사람들

역시도 지역 축제의 또다른 가능성을 경험케 되리라.

332

임국화

영토와 신체로부터 재생산되는

우생학적 정치 일지 <역병의 해 일지>전, 아르코미술관, 2014. 8. 31 - 11. 16

장소를 통한 정체성 모색 및 발현 과정 추적

사스(SARS)는 2000년 초반 세상에 갑자기 등장했다. 사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

히 알려지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항생제도 듣지 않는다는 슈퍼 바이러스의 공포에 떨었다.

마스크를 쓰고 거의 매일 체온을 측정하며 혹시라도 자신에게 병을 옮길지도 모르는 나 이외의

사람에게 엄격했다. 그런데 의외로 이 극도의 긴장감과 공포를 조성하는 전염병 예방법은 평소

손을 깨끗이 씻고 양치질을 잘하는 기본적인 생활습관에 있었다. 수 십 년 전처럼 위생에 대해 무

감각한 시대도 아닌데 손 씻고 양치질을 잘하는 사람만이 감염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

이었다. 젊고 건강한 신체를 가진 사람은 나이 들고 병든 사람보다 감염 후 회복에서도 빠르다는

뉴스 보도에 모두의 관심사는 면역력을 증진하는 건강식품부터 시작해 신체에 집중되었다. 뛰어

날 정도로 우월한 신체를 가진 사람만이 살아남는다는 우생학적 진화와 위생론에 대한 적응과 이

해는 추상적인 질병이 가져온 공포와 맞바꿔졌다.

아르코미술관의 국제교류전 <역병의 해 일지> 전시는 십 년 전 사스에 대한 기억을 불러왔

다. <역병의 해 일지>전은 홍콩을 대표하는 현대미술 기관이라 할 수 있는 파라사이트(para/site)

에서 기획한 전시이다. 2013년 5월, 홍콩 파라사이트의 전시 기획자 코스민 코스티나(Cosmin

costinas)와 코스타리카의 전시 기획자 인티 게레로(Inti guerrero)가 기획한 이 전시의 본래 이

름은 <역병의 해 일지. 공포, 유령, 반란, 사스, 장국영, 그리고 홍콩 이야기(A Journal of Plague

Year. Fear, Ghost, Rebels, SARS, Leslie and the Hong Kong Story)>이다.

전시는 2003년이라는 특정한 해에 대한 조사에서 출발한다. ‘공포, 유령, 반란, 사스, 장국영’

은 홍콩을 정의할 수 있는 결정적인 사건들로서 전시 주제의 세부 카테고리이자 동시에 홍콩이라

리 뷰

333

는 장소에 대한 구조적 이해를 돕는 키워드들이

다. 사스로 인해 2003년 홍콩은 그야말로 사회

적, 경제적 추락을 체감하고 있었다. 홍콩의 중

국에 반환된 이후 부동산가격 폭락, 실업률 상

승으로 경제적 곤란함을 수년째 겪던 중이었다.

그나마 기대할 수 있었던 관광산업 역시 사스로

인해 절망적인 수준으로 감소했고 홍콩 영화 산

업의 대표적 아이콘인 장국영의 거짓말 같은 자

살은 홍콩 사람들의 심리적 공황과 맞닿았다.

기획자들은 영국에서 중국 본토로 반환된 1997

년과 1894년 영국 식민지 시절 홍콩에서 흑사

병 근원균이 발견된 시점을 2003년 사스 사태

와 맞물려서 살펴본다. 이 세 가지 사건의 장소

적 배경이 되는 홍콩을 바탕으로 서로를 연결하

는 점이 바로 공포, 유령, 반란, 사스, 장국영인

셈이다.

확산되는 공포

전시는 흑사병, 세균전 등을 통해 질병과 배

제 그리고 차별에 대한 역사적 상황을 구성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1894년 흑사병의 원인이 되

는 세균이 홍콩에서 발발하게 되는 사건이 중심

이 된다. 아시아와 질병의 관계에 대해 다루는

문화사적 자료들과 역사적 자료들은 격리와 배

제, 혐오의 정서를 기반으로 이를 기록하고 이

미지로 재구성한다. 홍콩에 흑사병 근원균이 발

견되었을 때를 기록한 사진, 제임스 T. 홍의 <세

균전쟁으로 희생된 농부의 신발>과 같은 질병

출현과 전염의 현장이 되었던 과거 홍콩을 기

록하는 오브제들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다 해진

신발 위로 세균전 그리고 홍콩, 아시아, 한 개인

이 흔적처럼 엉겨 붙어 있다. 아크릴 박스 속에

334

전시된 이름 모를 누군가의 신발로부터 당시 한 시대를 함께 보냈을 사람들 제각각의 고통은 홍

콩의 고통과 동일시되어 증언한다.

웡의 <중국인 탐정>, 이소룡 주연의 영화 <정무문>은 유행병의 원인이 되는 아시아가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황화(황색주의, yellow peril)’ 즉, 아시아인에 갖고 있는 공포감으로 인해 만들어

진 편견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근대성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지만, 질병을 매개로 비정상을

분류하는 체계는 식민지배를 받던 우리의 과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우두법이라는 근대의학과 근

대문물의 상징을 식민지배하는 일본을 통해 받아들이고 체험했다. 위생의 문제를 다루는 위생사

업은 식민지배를 피지배자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위생사업은 전염병이 두려

운 상황 속에서 피지배자들이 문명의 위계에서 지배자들보다 열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전

략이었다. 질병은 정상과 비정상의 정면대결에서 나아가 무의식 차원에 있는 차별과 타자를 드러

내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

병든 신체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2003년 4월 1일. 거짓말처럼 만다린 호텔에서 한 시대를 그리고 한 국가의 화려한 문화, 경

제를 상징하는 장국영이 추락했다. 장국영으로부터 홍콩이 화려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부여받았

듯이, 사스 바이러스의 첫 감염자가 발표된 홍콩은 공적인 영역에서 질병으로서의 위치를 부여받

으며 수준 높은 아시아의 도시로서의 이미지를 실추했다. 홍콩에서 사스는 발병과 동시에 사적

질병이 아닌 공적인 질병으로 위치를 가졌다. 불결한 존재, 국가로 스스로 규정하고 스스로 격리

하고 감금하며 지내던 홍콩시민

들이 장국영의 자살 소식에 한

걸음에 밖으로 뛰쳐나왔다. 이

들은 외부의 시선에 매이지 않

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사

람들의 발걸음을 만들었다. 그

전까지 건강의 위험에 대한 경

고보다는 감염자의 숫자를 왜곡

하고 서구의 시선으로부터 자

유로워지고자 대응 없는 정보

만 전하는 뉴스 때문에 사람들

을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런데 은폐를 위한 경고의 메시

지를 무시하고 세상으로 모습을

리 뷰

335

드러내게 한 것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노란 색 장국영의 방 그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뛰쳐나온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영상은 그동안 중국 정부가 집계한 숫자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시

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신체적 감염과 문화적 오염에 대한 공포로서의 내적 편견을 마주하기로

한 이들에 대한 기념으로서의 노란 방이다.

공포는 차별과 혐오로 이어진다

한국에서 진행되는 만큼 <역병의 해 일지>전은 아시아 대륙의 특정 사회적 맥락에서 드러나

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에서 비롯한 타자화의 사례를 찾고자 했다. <역병의 해 일지. 공포, 유령,

반란, 사스, 장국영, 그리고 홍콩 이야기>전은 그런 면에서 고통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

과정의 국제교류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병든 신체보다 중요한 정신의 문제가 아시아 안에

서 어떻게 공유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는 과정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에

서 찾은 지점들로는 소록도의 나환자, 만보산 사건 등이 제시되었다. 기존의 전시가 홍콩이라는

장소를 바탕으로 그 위에 쓰인 수 백 년의 시간을 교차하며 입체적인 구조를 만들었다면 한국의

상황들은 민족주의적,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타자화의 사례 나열과 좀 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에서 발췌한 문장과 함께 전시된 이정록의 <소록도

> 사진은 램 쿠아의 종양 환자를 그린 초상화처럼 신체를 통해 드러나는 공포를 서늘하게 보여준

다. 소록도의 나환자는 국가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으로 비극적인 운명을 삶을 살았다. 나병이라는

진단은 마치 죄를 선고받는 것과 같이, 우생학적 관점에서 신체적으로 열등한 사람들로 낙인을

336

찍었다. 열등한 신체를 극복하고 우열한 소질을 가진 신체를 가진 사람을 유전학적으로 개량하기

위한 우생학적 관점에서 나환자들은 유전적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격리되어야만 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낡고 텅 빈 진료실,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써진 허여멀건 한 동상을 찍은 사진

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차별의 온도와 감성을 드러낸다. 질병이 낙인처럼 몸에 쓰인 나환자

들의 비극적인 삶은 열 감지 카메라로 사스 환자를 구분할 수 있는 것과 달리 어쩌면 애초부터 유

령처럼 온도조차 측정 불가능한 온도일지도 모른다.

질병에 잠재된 공포와 바꾼 우생학적 논리

전시에서 흥미로웠던 여러 작품 가운데 피오누알라 맥휴의 비디오 인터뷰는 인상 깊은 작품

이라 할 수 있다. 피오누알라 맥휴는 홍콩에서 기자로 20년 동안 거주하였으며 인터뷰는 전시 제

목부터 전시의 구성에 있어 친절한 스크립트가 되어 주었다.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이 전시의 제목

은 『로빈슨 크루소』의 저자로 잘 알려진 대니얼 디포의 1722년 소설 『역병의 해 일지』의 제목을

인용했다. 피오누알라는 영국에 흑사병이 창궐한 1655년을 배경으로 하는 디포의 소설 『역병의

해 일지』가 2003년 홍콩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었음에 놀라워했다. 식초에 적신 필터로 호흡기

로 세균이 들어오는 것을 막고자 했던 믿음부터 정부의 감염자 수를 정확히 밝히지 않으려는 태

도와 같은 것이 수 백 년 전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전시장 구석에 놓인 식초 한 통, 락스 한 통

은 이 진지한 전시 속 성실한 유머이다.) 실제로 중국의 장쩌민 전 주석은 2003년 사스가 발발했

을 당시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는 데 앞장선 바 있다. 이로 인해 공산당의 신뢰는 추락하여 위

기에 직면하기도 했다. 피오누알라의 인터뷰 내용에서처럼 “일상을 좌우할 문제에 대한 거짓만

을 되풀이하고 사실을 부정하는 정부의 태도”는 다른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

리 정부는 올 한 해만 하더라도 한 개인이 이해하는 것은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연쇄적

으로 발생한 것에 대해서 어떤 대책 또는 대응 없이 한 해를 넘기고 있다. 어떻게 보이는지에만

신경 쓰는 이미지 정치에만 총력을 다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을 직면하고 알리려고 하지 않는 정

부의 태도에 저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추상적인 공포는 괴이한 방식으로 재현, 재생산되고 있

다. 또 그는 홍콩에 거주하는 이방인이자 홍콩의 주권이 중국에 반환되는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묘한 긴장관계를 세밀하게 관찰한 관찰자였다. 영상 인터뷰를 마주 보고 있는 아이 웨이웨이의

<Baby formula> 설치작품과 영상은 홍콩의 분유파동을 보충 설명한다. 반환 이후 홍콩은 가난

하고 더러운 본토 중국인들로부터 스트레스를 겪었다. 본토의 임산부들이 증가해 병상 부족을 겪

기도 했으며 홍콩 남자들이 본토에서 낳은 자식 수만 명이 반환과 동시에 몰려와 거주권을 요구

하여 홍콩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깨끗하고 정돈된 홍콩을 가난하고 더러운 중국인들이 오

염시킬까 두려웠다.

최근 에볼라 유행과 함께 SNS를 뜨겁게 한 한 장의 사진이 떠오른다. 이태원의 한 식당 입구

리 뷰

337

에 ‘에볼라 감염을 우려해 흑인의 출입을 당분간 금지한다’는 내용의 메모가 부착된 사진이었다.

홍콩인의 중국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 그리고 한국인의 흑인 또는 중국, 일본 이외의 아시아 국가

사람에게 서슴지 않고 행하는 차별과 배제가 이 전시에서 은유로서의 질병을 빌려 이야기하고자

했던 주요 골자이다. 모든 차별에는 유래가 존재한다는 말이 있듯이, 홍콩의 중국에 대한 차별적

선 긋기로서 낙인 찍기가 홍콩 반환이 시점이 아닌 것처럼 한국의 만보산, 소록도와 같은 이슈 역

시 이미 오래전부터 사회문화적 요인이 작동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썩은 오해가

과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지속하고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되는 여정 속에서 어떤 괴물을 만나

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338

윤형민

최소 형태의 삶켄 럼: 샹그릴라에서 샹그릴라로

브루스 스튜어트: 달라톤 플레저 페어, 1972

리즈 메이고어: 무수한 싸움

샹그릴라에서 샹그릴라로 From Shangri-La to Shangri-La

메트로 밴쿠버 북쪽에 자리한 노쓰밴쿠버(North Vancouver) 자연보호구역 중 일부인 메이

플우드 갯벌 입구에는 지역 출신 작가 켄 럼의 <샹그릴라에서 샹그릴라로 >가 설치되어있다. 처

음 밴쿠버아트 갤러리의 오프-사이트 커미션으로 2010년 다운타운 샹그릴라 호텔 옆에 선보였

던 작품이다. 켄 럼이 지상낙원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70층 고층 호텔 건물 옆에 재연한 것은 20

세기 중반에 메이플우드 지역에 있었던 스콰터(squatter)들의 판잣촌을 모델로 해 실제의 1/3 크

기로 만든 세 채의 모형 집이다. 1970년 초반 강제퇴거 당하기 전까지 대안적인 삶의 방식으로

자신들의 지상낙원을 만들려던 공동체의 꿈과 고층빌딩이 들어선 도시개발이 대조를 이루었다.

작품이 제작된 2010년은 밴쿠버 겨울 올림픽이 열린 해로, 당시 축제적인 분위기에서 한걸음 물

러나 침착하게 근대사 중 도시에 대한 대안적인 시도를 기억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당시 워낙에도 부동산 가격이 높은 밴쿠버에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짓고 있던 올림픽 선수촌 콘

도 타운은 당연히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현재 올림픽 선수촌은 약속했던 공공지원주택이

축소되는 대신 비싼 콘도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그리고 켄 럼의 샹그릴라는 최근 노쓰밴쿠버 시

의 요청으로 메이플우드 갯벌에 다시 설치되었다.

스콰팅 squatting

스콰팅(squatting)은 허가 없이 주거하는 행위를 말한다. 엄밀히 말해 밴쿠버가 있는 브리티

시 콜롬비아주는 북미의 다른 주처럼 유럽인이 원주민의 땅에 허가없이 차지하며 시작되었으니

스콰터의 역사로 만들어진 곳이다. 노쓰밴쿠버에는 벌목 산업을 위해 정착한 산업 노동자들이 많

리 뷰

339

이 살았으며 1890년대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메트로 밴쿠버와 사이를 가르고 있는 버라드 만

(Burrard Inlet) 물가를 따라 불법점거가 일상

화된 곳이었다. 인류문명 발상지 중 하나인 갯

벌이라는 자연 형태는 물과 육지를 동시에 갖고

있는 독특한 환경으로 메이플우드의 스콰터들

은 이 조건을 일상생활 뿐 아니라 정부기관인들

을 따돌리는 데 적절히 이용해 이 판잣촌을 완

전히 몰아내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고도 한다.

1972년 달라톤 플레져 페어 (Dollarton

Pleasure Fair)

메이플우드 갯벌에는 잘 알려진 소설가 말

콤 라우리, 다다이스트 음악가 알 니일, 미술가

캐롤 이터를 비롯한 작가, 예술가, 히피들로 구

성된 스콰터들이 모여들어 살았다. 이들이 꿈꾸

던 방식의 삶은 규제없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

여하는 그런 곳이었다고 한다. 이 공동체는 20

세기 중반 밴쿠버를 ‘세계적인 수준의 도시’로

만들려는 정부의 계획에 따라 순차적으로 강제

철거 당했다. [1]

마지막 철거가 행해지기 직전이었던 1972

년 여름 스콰터들은 2주에 걸쳐 일종의 송별파

티 행사를 여는데 그것이 달라톤 플레져 페어였

다. 미국의 르네상스 페어의 반문화 격인 플레

저 페어는 사진가 브루스 스튜어트의 흑백 사진

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사진 속 알몸의 스콰터

들과 가건물처럼 지은 집들에서 그들의 자유로

운 이상향이 잘 드러난다.

무수한 싸움 (A Thousand Quarrels)

밴쿠버에서 활동하는 리즈 메이고어는 태

340

평양 연안지역(Westcoast)의 자연환경을 배경

으로 캠핑이나 쉼터와 같은 일시적 주거형태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이며 독창적인 작업을

해 왔다. <무수한 싸움>은 메이고어가 일종의

작품 리서치를 목적으로 기록한 임시변통 집들

을 보여주는 전시다. 작가가 모아놓은 동굴, 캠

핑 용 텐트, 판잣집들을 보고 있으면 인간이 최

소한의 보호를 받기 위해 주거환경에 필요한 필

요한 게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전시장 한가운데 자리한, 동굴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사진의 제목이자 전시 전체를 가리키

는 ‘무수한 싸움’은 장 자크 루소의 <인간 불평

등의 기원론>의 한구절에서 인용되었다. 이는

작가가 주거 형태를 루소가 지적하는 시민사회

에서 약탈적인 생존 방식에 물들여진 사람들과,

어떤 이유였던지 간에 그것을 자발적으로 포기

한 사람들 사이를 가르는 잣대로 삼았다는 것을

알수 있다.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던 루소는 불

평등의 기원을 소유에서 찾으며, “인간이 나무

아래나 동굴에서 잠을 자기를 그만 둔 이후, 대

신 나무를 자르고 땅을 파 판잣집을 짓기 시작

한 것이 부동산의 시작이 되었고, 이후 무수한

싸움의 원인이 되었다.” 고 쓴다. [2] 시민 사회

이전 원시인의 삶이 평등했다는 역사적 환원주

의는 가정이자 공상일 뿐이다. 그러나 그 로맨

틱한 믿음이 가용주택이 부족한 도시에 사는 우

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지 않다.

“어떤 땅에다 울타리를 치고 ‘이 땅이내 것

이다’ 라고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단순해서 그

렇게 믿어줄 것임을 알아차린 최초의 인간이 바

로 문명사회의 실질적인 창시자다. 그 때 누군

리 뷰

341

가 말뚝을 뽑아버리고 경계로 파 놓은 도랑을 메우면서 ‘저런 사기꾼 말을 듣지 마시오. 땅은 누

구의 소유도 아니고, 그것의 산물과 모든 사람들의 것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되오. 그것은 곧 파멸

이오’라고 외쳐댔더라면 인류가 그 많은 죄악과 싸움과 살인, 그리고 그토록 비참하고 가공할 일

들로부터 구원 받았을 것이다.” [3]

[1] 랜스 블롬그랜 <달라톤에 오신걸 환영합니다>, 전시 카탈록 <에덴의 서쪽> 2014 중

[2]-[3]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1754 중

전시 사진자료 제공: 프레젠테이션 하우스 갤러리

서 평

오경미

하드코어 로맨스로 살펴본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불안한가』

우리는 또 다른 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344

오경미

하드코어 로맨스로 살펴본

현대인의 사랑과 불안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불안한가』

성이 도처에 넘쳐나고 있다. 섹스[1] 경험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이나 섹스가 극 중

흐름의 핵심이 되는 드라마가 종종 방영되는 것은 이 현상을 반증한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섹스

를 결혼 후 아이를 낳기 위한 행위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섹스는 쾌락을 위한 수단이 된 지 오래

다. 또 주목할 점은 여성도 더 이상 성과 섹스에 대해 부끄러운 척, 모르는 척하지 않고 적극적으

로 동참한다는 사실이다. 변화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여성들은 더 이상 순결하거나 정숙한 척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즐거움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섹스를 인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일견 남

녀 모두를 만족시키는 듯 보인다. 그러나 과연?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는 오히려 이 현상이 현

대인에게 사랑의 어려움과 불안을 가중시켰다고 진단한다.

2012년 발표되자마자 최단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어마어마한 성공을 기록한 『그레이의 50가

지 그림자』[2]라는 3부작 ‘에로 연애소설’의 분석을 통해 에바 일루즈는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다.

‘BDSM’[3]이라는 자극적인 요소와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를 제외하면 흔한, 통속적인 연애소설

인 이 소설의 플롯은 간단하다. 성관계를 가진 적이 없는 아나스타샤 스틸(아나)이 사랑 없는 섹

스, 그것도 BDSM을 즐기는 섹시한 거부(巨富)인 크리스천 그레이(그레이)를 만나 섹스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고 종국에는 사랑을 믿지 않았던 그레이와 진정한 사랑으로 맺어진다는 것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간단한 줄거리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하고 자극적인 성행위 묘사를 제외하고는 흔하

게 읽을 수 있는 연애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출간 후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글로벌 베스

트셀러 자리에 이름을 올리며 두터운 여성 독자층을 형성했다.

일루즈는 ‘그레이 시리즈’가 익숙한 연애소설의 전통을 지키면서도, 금기시되던 ‘BDSM’을

통해 현대인들의 애정생활에 내재한 수많은 문제를 명확히 점, 또 이 독특한 사랑 방식이 현대인

서 평

345

이 직면한 그 난제의 해결책이자 극복방법이라는 점을 제시했다는 점, 나아가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자기 계발에 몰두하는 여성들의 욕구를 효과적으로 충족시켜 주었다는 점이 이

소설을 베스트셀러로 이끌었다고 본다.[4] 또 이 지점들 때문에 이 소설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 시리즈’가 이 조건들로 이 시대의 신경줄을 정확히 건드렸

다는 것이다.

가학적인 성행위의 노골적인 표현이 난무하는, 그것도 여성이 우위를 점하는 것이 아닌, 여성

이 피학적 성애의 대상이 되는 이 소설에 오히려 여성들이 열광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루즈는 이

소설이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을 해소해주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먼저 현대

인들이 직면한 사랑의 불안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이러한 불안이 가학적인 성 행위와 어떤 접

점을 이루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일루즈는 여성의 성해방에서 불안의 원인을 찾는다. 결혼과 가

정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은밀하게 감추어져 왔던 여성의 성은 페미니즘의 줄기찬 노력으로 자유

를 획득한다. 그 덕분에 여성들은 순결을 잃어도 자아나 정체성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는다는 것

을 알게 되었고, 당당히 오르가즘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소설에서 묘사되는 수위 높

은 가학적 성행위에 여성독자들이 열광하는 현상과 처음에는 가학적 성행위를 거부하다가 차츰

그것을 내면화해나가면서 그것을 즐기게 되는 여주인공 아나의 태도변화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여성의 성해방은 의도치 않은 결과를 야기했다. 성해방으로 여성들이 자유롭게 섹스

를 즐기게 된 것과 비례해 남성들 역시 더 많은 섹스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수

많은 여성들과 사랑 없는 가학적인 섹스를 스포츠나 게임 하듯 줄기차게 즐기는 남자주인공 그레

이는 이 같은 현대 남성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성해방은 이루었으나 여전히 대부분의 여성들은

결혼과 가정이라는 영역에 자신을 한정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감정과 가정적 태도를 버리지 못

하고 껴안아왔다. 반면, 남성들은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더 높은 경제력 확보와 사회적 권력을

쌓도록 강요받아왔다. 그 결과 남성들은 여성들과의 관계맺음과 결속력에 취약한 존재가 되어갔

다. 다시 말해 여성들은 섹스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긴 했지만 남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더

욱 힘들어진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 상황은 소설 속에서 극도의 쾌락을 얻기 위해 아나

가 먹고 입고 자는 문제에까지 관여하며 감정이 연루되지 않는 세세한 섹스 합의서를 요구하는

그레이와 줄기차게 사랑 없는 섹스를 거부하며 그레이의 사랑을 얻어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아나

와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소설이 불안과 가학적인 성행위만을 보여주었다면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

다. 일루즈는 ‘그레이 시리즈’가 불안의 원인을 비롯하여 그 불안의 해결책까지도 제시했기에 성

공을 거둘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먼저, 그녀는 불확실하고 불안해진 남성과의 관계를 낭만적 사

랑을 통해 행복한 결실로 이끄는 아나에게 여성들이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성공의 한

요인이라고 본다. 얼굴도 예쁘지 않은 아나는 BDSM과 낭만적 사랑을 통해 막강한 권력과 경제

346

적 능력에 외모와 육체적으로도 절대적인 그레이를 차지한다. 초반에는 그레이가 요구하는 섹스

를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그를 떠났던 아나는 소설이 진행되면서 차츰 피학적 성애의 역할에 빠

져들게 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나가 복종의 역할에 몰두하면 할수록 자율성을 잃게 되는

쪽은 아나가 아니라 그레이다. 아나의 자발적인 복종이 오히려 그레이의 욕구에 불을 지르고 종

국에 그레이는 아나의 자발적인 복종에 매달리게 된다. 결국 그레이는 표면상 지배하는 역할임에

도 불구하고 아나에게 굴복, 즉 자신이 부정하던(남성이 부정해왔던) 사랑의 감정을 느끼며 허물

어진다.

아나는 결혼 후에도 처녀 때 쓰던 성을 그대로 쓴다던지, 비록 그레이가 자신의 출판사를 사

들이지만 그로부터 이득을 바라지 않는다던가, 동등하게 데이트 비용을 감당하는 행동 등을 통해

자율성을 구축해나가는 모습을 보여 사랑에 굴복한 그레이와 대비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부유

하지 않은 집안 출신에, 미모도 뛰어나지 않은 아나가 가학적 성애를 내면화하는 동시에 이를 통

해 관계의 역전에 성공하는 플롯에서 일루즈는 여성들이 이 책을 일종의 자기계발서로 받아들였

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것을 불안의 또 다른 해결책이라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루즈는 이 소설이 페미니즘이 야기한 피로감을 말끔하게 해소해 주는 효과까

지도 내재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섣불리 이 소설이 반페미니즘적인

소설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나가 자아와 자율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사랑을 쟁취하

는지 명확히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으로 인해 올라간 여성의 지위는 여성과 남성의 평등

을 어느 정도 보장해주었는데, 정작 이 평등의 관계가 섹스에서는 그다지 섹시하지 않다는 사실

이 걸림돌로 남았다. 여성들이 느끼기에 세세한 부분까지 여성에게 의사를 묻는, 합의와 협상을

거친 후 이루어진 섹스보다 권력을 과시하는 전통적인 남성과의 섹스가 오히려 섹시하다는 것이

다. “뽀뽀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남성들이 피곤하다는 여성들의 말 역시 이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이것이 바로 페미니즘이 야기한 피로감이다. 일루즈는 이 소설에서 묘사되는 BDSM이

현대의 이성애자들이 느끼는 피곤함을 타파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해석한다. 소설은 남성과 여성이

합의를 통해 명확하게 전통적인 역할 분담을 이루는 것을 보여주었고, 이 합의 안에서 쾌락을 만

끽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에 독자들은 전통적인 성역할 모델에 의존하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정당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일루즈의 이 글을 이미 읽은 독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분명 ‘그레이 시리즈’에

대한 일루즈의 분석에 모든 사람들이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루즈가 사랑에 불안해하

고 전전긍긍하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지면이 짧아 책의 모든 내용을 다룰 수 없었던 점이 아쉽다. 책이 두

껍지 않으니 궁금하신 독자들은 읽어보기를 권하며 글을 마친다.

서 평

347

[1] 에바 일루즈의 책이나 이 글을 읽을 때 독자들은 섹스를 단지 사랑을 나누는 당사자들이 사적인 공간에서 은밀하게 벌이는

행위가 아닌 지극히 사회적인 행위라는 것을 유념해야한다. 일루즈를 비롯하여 이미 많은 사회학자들이 밝혔지만, 우리 역

시 조금만 깊이 생각해본다면 누구와 섹스를 나누어야 하는지, 섹스를 나눌 수 없는 대상은 누구인지, 섹스를 하기에 적합

한 장소는 어디여야 하는지, 어떤 수단과 목적을(출산? 쾌락?) 위해 섹스를 해야 하는지 등등의 질문들이 섹스라는 행위에

달라붙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우리는 섹스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기도 하고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이는 자신의 성적

취향이 동성애자임을 깨닫고 밝히는 경우에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다. 즉 섹스는 한 사회의 규범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의식과 정체성, 주체성과도 뗄 수 없는 것이다.

[2] 우리나라에도 이미 번역되어 출간된 이 소설은 전 세계적인 성공에 힘입어 영화로 제작되어 현재 개봉을 앞두고 있다. 궁금

한 독자들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트레일러를 감상할 수 있다.

[3] BDSM은 Bondage and Disipline, Domination and Submission, Sadism and Masochism의 이니셜로 구속과 순종,

지배와 굴복, 사디즘과 마조히즘이 뒤섞인 성생활을 뜻한다. 김희상 옮김, 에바 일루즈, 『사랑은 왜 불안한가: 하드 코어 로맨스

와 에로티즘의 사회학』, 돌배게, 2014, 12쪽.

[4] 위의 책, 42쪽. 필자는 이 책을 충실히 따라가며 이 글을 썼기 때문에 세세한 각주는 생략하고자 한다.

348

오경미

우리는 또 다른 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

2004년 9월 2일 MBC 100분 토론에서 경제학자이자 서울대학교 교수인 이영훈 교수는 정

신대는 조선총독부의 강제동원이 아니라 한국인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진 상업적 공창이며, 정신

대 관련 일본 자료를 보면 범죄행위는 권력만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참여하는 많은 민간인들이

있었고, 한국 여성들을 관리한 것은 한국 업소 주인들이고 그 명단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 이영훈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사고방식과 가치관 등이 없었다면 발생할

수 없었던 사건이었다고 주장하며 일본을 탓하고자 한다면 우리 자신부터 성찰해야 할 것이라 주

장하였다. 1그러나 이교수의 이 발언은 방송을 타자마자 큰 질타와 항의,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여론은 이영훈 교수가 위안부를 배려하지 못했으며, 개념 없는 지식인이라고 낙인찍었던 것이다.

여성주의자 정희진은 이영훈 교수를 몰아세우고 비난하는 여론의 공격성에서 섬뜩함과, 이

감정에 성판매 여성에 대한 완벽한 타자화와 혐오가 전제되어 있다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하였다. 정희진은 전시 성폭력(일본군 위안부 문제까지 포함한)을 포함한 성폭력과 성매매가 근

본적으로 누구를 위한 제도인지를 질문해야 한다며 결국 둘 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희생된, 남성을 위한 제도에 의해 희생된 존재라고 주장하였다.2 덧붙여 이런 함의를

띠고 있는 이영훈 교수의 논지가 일본에는 책임이 없다는 논리로 연결되는 것은 대단히 단순하고

위험한 발상이며, 일본 정부는 책임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사과, 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 역시 정희진의 이러한 주장에 깊이 공감했었다. 3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사건을 잊고 있었던 필자는 얼마 전 벌어진,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에서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이 책에 여론이 보였던/보이는 대

부분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10년 전의 사건과 비슷했다. 위안부 문제에는 가부장제, 남성 중심적

서 평

349

사고방식, 이것이 바탕이 된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얽혀 있으며, 우리 역시 위안부 문제에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박유하 교수의 논지는 이영훈 교수와 정희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

의 사건이 있은 지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동일한 논지를 펼친 박유하 교

수는 또 다시 위안부를 매춘부로 몰아간 매국노가 되어갔다. 여전히 변하지 않은/는 사람들의 인

식과 반응에 필자는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이 글은 그간 이 책에 쏟아졌던 반박과 비난들에 대한 재반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필자

역시 이 책의 모든 내용에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우리들에게 그간 우리들이 생각하

지 못했던, 그렇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았던/못했던, 그래서 인식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 혹은 관

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촉구하는 글이라는 점에서 분명 유의미하다. 또 이 문제는 저자가 책을 통

해 말하고자 했던 핵심적인 내용‘들’ 중 하나이다.4

먼저 박유하는 위안부를 단일의 범주로 포섭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라고 강하

게 주장한다. 이 주장을 통해 그녀는 우리들이 위안부라는 존재를 하나의, 단일한 모습으로 만들

어왔던 것은 아닌지, 그래서 오히려 그들을 타자화하거나 대상화하였고 나아가 진정한 화해를 이

끌어내기보다 일본을 향한 무조건적인 적대감만을 키운 것은 아닐지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을 묻는 칼은 반드시 우리 내부를 향하게 되어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그간 우리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것으로, 일본군에 보낼 위안부를 직

접 모집하고 그들을 관리했던 주제들이 바로 조선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적시해야만 한

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위안부라는 존재가 가부장제와 남성적 우월의식,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와

얽힌 문제라는 이영훈과 정희진의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주장

은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궁극적 문제인 ‘진정한 화해’를 위해 우리가 가져야만 하

는 위안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이다.

그렇다면 위안부를 하나의 범주, 단일한 인식과 행위성을 가진 주체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

는 무엇인가? 이 말은 그들을 다양한 기억과 인격을 가진 주체로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박유하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그들이지만 전쟁터에서 군인들과 만든 행복한 기억과 추억이

그들에게 있을 수 있고, 현재의 운동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고려하지 않고 위안부를 단일한 범주로 묶어버리는 것은 기억의 주체의 자

리에서 당사자들을 몰아내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지적한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터에서 절박하게 생존하고 있는 군인들을 위안하는 일은 당연히 끔

찍한 일이다. 그러나 그런 순간이지만 왜 기억하고 싶은 순간이 있을 수 없겠는가? 찰나의 순간

이었다고 해도 그 속에서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박유하는 전쟁

터에서 군인들과 행복한 순간을 나누었던 위안부들도 존재했었으나 피식민의 주체로서 일본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야만 한다는 우리들의 강박적인 정치적 상황은 당사자들에게 이런 순간들을

350

모두 잊고 오로지 끔찍한 피해자로서만 자신들을 인식하도록 강제하고 강요한다고 지적한다. 위

안부 문제를 이끌어왔던 운동의 주체들(정대협을 포함한 운동 단체들)과 우리들이 이 운동의 정

당성을 이들에게 강요하는 순간, 우리들은 이들을 기억의 주체의 자리에서 몰아내고 마는 것이

다. 그들이 기억하고 싶은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만들 권리가 우리들에게 있는가?

또 이 문제는 우리가 당사자를 우리의 정체성(끔찍한 식민의 피해자로서의 정체성)을 고양시

키는 도구로 대상화, 수단화하지는 않았는가라는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이 모습은

어쩌면 우리들이 과거 청산과 식민의 책임을 묻는다는 강박이 만들어낸 단일한 모습이기 때문에

진정한 위안부의 모습이 아니라 우리들이 만들어낸 위안부의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

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지우거나 부정하려고 하면서, 그녀들은 우리들이 기억하고 싶은 모

습으로만 고정시키려 한다면 그녀들은 우리들에게서 또 다시 버림받은 타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

다.

그녀들에게 온전한 기억을 가질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박유하의 주장은 일견 이상적이고 낭

만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녀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위안을 강요한 주체가 바로 우리 내부

의 존재라는 사실은 그녀들의 이러한 기억을 보존해 주어야 하는 또 다른 이유이다. 이는 이 책에

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우리 내부에 존재했던 동조자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녀들의 기억을 보존해 주어야 하는 이유인 동시에, 그간 우리들에게 부족했던 우리

내부를 향한 성찰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 내부의 동조자들은 위안부들에게 육체적인 한계를 넘

어서는 과도한 성노동을 강요하고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하고 낙태까지도 강요한 이들로, 그들은

그녀들의 부모이기도 했고, 동네의 이장, 면장이기도 했던, 그녀들 주위의 남성이었다. 이들이 일

본군을 대상으로만 하는 위안부를 운영했다면 그 책임을 일본이라 는 식민국가에 묻는 것은 정당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위안부들의 돈을 가로채기도 했으며, 군인들이 아닌 일반인들을 대상

으로 하는 업소를 운영하기도 했다는 위안부들의 증언은 우리 역시 그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

처를 남겼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우리들이 이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얼

마나 자기 비판적 성찰에 소홀했는가를 명백히 드러낸다.

여전히 남아 있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유하의 이 주장에 사람들이 민감하게 반

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은 무엇이 두려워 박유하의 주장에 이렇게도 강한 적대감을 드

러내는 것일까? 필자는 그 불안의 원인이 그간 우리들이 구축해왔던 굳건한 운동의 정당성이 흐

려지는 것에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분명 박유하는 위안부라는 존재가, 또 우리 내부의

동조자가 그녀들에게 가혹한 행위를 할 수 있었던 원인이 일본이라는 제국으로 인한 식민이라는

비판을 잊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는 동시에 식민이라는 구조적 요인이 존재한다고 해도 우리들에

게도 피할 수 없는 책임이 있다는 비판 역시 분명히 한다. 이 주장은 그간 우리들이 상정해왔던,

굳게 믿어왔던 싸움의 대상이 스스로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게 되며, 또 그

서 평

351

칼이 필연적으로 우리들에게로도 향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이런 측면들이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시각과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정당

한 지 우리들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들이 그 어떤 정치적인 운동을 한다면, 그 과정에서 우

리들이 당사자가 아닌, 당사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역할을 담당한다면 그 운동에 고려해야 할 만

한 새로운 시각이 제기되었다면 반드시 심사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이런 성찰적인 태도는 아직도 요원한 일인 것만 같다. 이제껏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

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분명 있다면, 우리들은 보다 넓은 시각에서 새로운 관점

과 목소리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이를 수용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진정한 화해로 나아가

는 첫 번째 시도가 될 것이다. 이 글에 담지 못한 말이 더 많다. 아직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이 있

다면 필독을 권하는 바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에게 우리들은 진정 또 다른 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번 역

대안공간의 대안적인 선택 / 윤형민 역

<내가 지난 여름에 한 것>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 이지민 역

354

글, 번역 윤형민

대안공간의 대안적인 선택

들어가는 글

한국에서는 1999년 부터 대안공간이라는 이름으로 미술인들이 실험적으로 운영하는 미술

공간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니 올해로 15년이 되었다. 대안공간은 그 성격상 잘 진행이 되고 있을

때에도 가만히 있으면 안되는 곳이라 늘 그 날을 잘 갈고 닦을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지난 해 1월

웹진 더아트로 1월 이슈로 ‘대안공간 10년 , 그리고 그 이후’ 라는 주제 아래 작가 듀오 김나영,

그레고리 마스가 갤러리 없이 프로젝트 단위로 진행하는 킴킴 갤러리, 더북소사이어티의 책을 매

개로 한 모임들, 큐레이터 김장언의 노말타입

등의 사례는 그러한 고민을 이어가는 과정이다.

[1]

캐나다의 대안공간, ‘아티스트-런 센터

(Artist-run centre)’는 70년대부터 시작되어

이미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은지 오래된 만큼 앞

으로 나아갈 방향도 미술인들 사이에서 종종 논

의의 대상이 된다. 그 중 얼마전 할리팩스시에

서 40년의 역사를 가진 공간인 아이레벨 갤러리

가 거주하던 건물의 월세가 오르는 것을 계기로

공간포기를 선언하고 나선 후 안팎으로 긍정적

인 반응을 받고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아래의 글은 월간지 캐나디안 아트 (Can-

번 역

355

daian Art) 에서 아이레벨 갤러리 디렉터 케이

티 벨처와 인터뷰 후 웹사이트에 실렸던 글을

잡지사의 허가하에 번역하고 재출판한 것이다.

[2]

공간없이 갤러리를 운영하는 방법에 대한 9가

지 생각

리아 샌달스

갤러리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그것도

공간 없이? 캐나다의 임대료 상승을 고려하며,

한 두 기관들이 이 문제를 고민해왔던 것은 아

닐것이다. 캐나다의 가장 오래된 대안공간 중

하나인 할리팩스의 아이레벨 갤러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2013년 후반 오랜 기간 동안의

고심 후, 아이레벨은 영구 전시 공간을 포기하

기로 결심, 대신 이 변화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만들기로 한다.

이후, 올해 4월과 5월, 갤러리는 격년으로

열던 리셸빙 이니시에이티브 (Reshelving Ini-

tiative, 선반을 재정리한다는 의미의 출판물 전

시, 역주) 를 차에다 꾸려 동부 여덟 개 지역을

순회했다.[3] 6월과 7월에 계획된 젊은 작가 발

굴 전은 시내 쇼핑몰에서 열렸고, 8월에서 10

월 사이에 벌어지는 작가와의 대화가 할리팩스

와 베를린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또, 올 가

을에는 시타델 힐(군대요새였던 유명한 국가유

적지, 역주)에서 퍼포먼스 시리즈가 계획되어

있다. 여기서 최근의 이러한 변화들과 무엇이

이 변화를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풀

기위해 아이레벨 갤러리 디렉터 케이티 벨처와

대화를 나누었다.

356

1. 많은 현대미술이 사실 갤러리 공간이 필요없

을 수도 있고, 오히려 질식시킬 수 있다.

벨처는 “이 시대 중요한 현대 미술은 갤러리

에 의존하지 않는다.” 고 지적한다. “대신 퍼포

먼스적인 요소나 설치, 장소 특정적인 작업 등

이 강조 되었다. 그리고 아이레벨은 바로 그 틈

새 공간에서 일해왔고, 또 그러한 작업들이 가

장 흥미로웠던 것으로 기억된다.”

아이레벨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을 때에도,

시내 포인트 플레젠트 공원에서 ‘세계 이동하는

갤러리 대회’ 프로젝트를 열기도 했다. [4]

2. 지역의 맥락이 관건이다.

할리팩스시에는 건실한 대학 부속 갤러리가

여럿 있기 때문에 지역 관객들을 위해 아이레벨

이 화이트 큐브를 지속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없

었다. 이들은 넓고 높은 천정, 깨끗한 벽과 조

명 등 물리적으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

라서 아이레벨이 굳이 그 역할을 할 필요가 없

다는 것이다.

아이레벨이 공간을 포기할 무렵 또 다른 대

안공간인 카이버도 다른 이유에서 이같은 처지

에 놓여졌다. (카이버 갤러리는90년대 중반부

터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공 건물에 세들어 있

었는데, 올해 초 오래된 건물에서 석면이 검출

되어 시가 이를 제거를 위해 건물을 비워줄것을

요청했다. 갤러리의 일시적인 휴면 상태가 장기

화 된 것은 건물 수리비가 시가 예상했던 것 보

다 높아서 시에서 건물을 수리하지 않고 상업화

해버리려는 논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 역주)

벨처는 이것이 임대 관리법과 할리팩스 시 예술

기금의 무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며 실망스러

번 역

357

워 하지만, 오는 9월 시의회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5]

3. 갤러리 역사와 취지에 맞는 일을 하라.

벨처는 공간을 포기하는 것이 갤러리 성격

에 적합했다고 말한다. 40년전 아이레벨은 전시

라는 것의 경계를 확장한다는 목표를 가지고 시

작되었다. “우리 경우에 미래 설계는 과거를 돌

아보는데서 이루어졌다. 지난 10, 15년 동안 대

안공간에 지원이 충분해 지거나 고품격화되는

것에 대한 압박이 있어왔다. 내 생각에 그것은

우리 대안의 역사에 반대된다. 물론 우리는 회

계나 비평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 프로정신을 유

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전시의 내용이나 그것을

보여주는 방식에 있어 비평성, 아이디어, 대안

적인 모델, 지역 주민 참여, 작가 정신 등은 초

기 가치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것들은 깨끗한 갤러리 공간에서 완성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들에게는 그렇다.

4. (전시 공간을 버리는 게) 본전이나 뽑자고 하

는 것이지 돈을 아낀다는 의미는 아니다.

공간을 포기했다고 돈이 모이는 건 아니다.

대신 프로그래밍에 좀 더 투자할 수 있을 뿐이

다. “가령 월세를 내야 할 경우, 일년에 겨우 두

세개의 주요 프로젝트를 할 수 있다. 이 경우 우

리는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하는 공간을 위해 월

세를 내는 셈이다. 따라서 이 결정은 더 나은 경

제 상황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는 프로젝트가

있을 때 프로그래밍, 또는 출판에 비용을 제대

로 쓸 수 있고, 공간에는 필요에 따라 단기로 쓰

358

는 만큼만 비용을 지불한다.

5. 공간을 포기하는 순간, 놀랄만큼 많은 공간

이 눈 앞에 펼쳐진다.

리셸빙 이니시에이티브의 투어는 이제 지

정된 공간에 갇혀있을 필요가 없으니 전 지역이

우리의 것일 수 있다는 것, 또 스카이프를 통해

가상공간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경험이었다.

이후 상가에서 열었던 전시의 경우, 스폰서

를 통해 전시를 여는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되

었다.

6. 진이 다 빠지도록 일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극받을 준비도.

벨처는 리셸빙 투어 기간 30일 중 단 이틀

만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며 “아직도 피곤한 것

같다” 며 웃는다. “하지만 이 행사는 공간을 포

기하고 새로 시작하는 것을 기념하는 파티같은

것이었다. 제 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또 그

렇게 만족스러웠던 적도 없었다.” 공간 없는 갤

러리 운영은 사실 자원봉사자와 이사회의 힘을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우리는 이러한 조건들을

가지고 어떻게 정말 활동적으로 참여하는 그룹

을 유지할 수 있는 가에 대해 실험하고 있다.”

7. 새로운 관객을 맞을 준비를 하라.

할리팩스의 파크래인 몰에서의 전시 기간 동안, 상가를 배회하는 십대 청소년들과 같은 예전

공간에서는 볼 수 없던 관객층이 생겼다. “가장 신났던 경험 중 하나가 우연히 전시를 마주친 청

소년들이 작품에 진지하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가 먼저 나서면 관객이 반드시

다가올 것이라는 점을 증명했고, 우리가 보통 접근하지 않던 곳에서 상당수의 관객을 만나는 것

이 나에게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만족감을 주었다.

번 역

359

8. 궁극적으로 공간을 포기하는 것이 어느 갤러리에나 맞는 결정일 수는 없다.

아이레벨의 경우그 결정 끝에 많은 위험과 기회가 달려있으므로 적어도 5년 이상의 기간동

안 고심한 후 결정했다. 준비과정에서 뉴 브론스위크에 있는 써드 스페이스 (The Third Space)

나 몬트레올의 대어-대어(Dare-Dare)와 같은 다른 대안공간의 사례를 찾아보았고, 보험료와 같

은 문제에 대한 경고도 들었다. 결국 “공간을 포기하는 것이 어느 대안 공간에나 적합할 수는 없

지만, 우리의 역사와 취지, 우리가 하고 있는 일에는 적합한 일이었다.” [6]

9. 그러나, 공간 포기가 특정 대안공간들에게는 이 시대에 받아들일 만한 제안일 수 있다.

벨처는 지난해 아이레벨이 공간을 포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디렉터 자리를 지원했으며, 앞으

로 3-5년은 공간 없이 운영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이 변화에 대해 캐나다와 지방 문예진흥

원으로부터 좋은 피드백을 받았다.”

또, 앞으로 있을 연회원들의 전시에 대한 대안형태를 찾는데 새로운 기대를 걸고 있기도 하

다. “지역 회사나 카페 공간을 통해 소규모 작가와의 대화나 상영회를 꾸미고, 언론 홍보를 도와

회원들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것이 회원참여를 권유하기 위한 여러가지 아이디어 중 일면이다.

이 모든 것은 현대미술이 벽 위에서만 이루어지는 게 다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아이레벨은

그 이상을 추구한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오는 글

아이레벨 갤러리와는 반대로 공간을 유지한 채 (오히려 소유한 채) 자신의 색깔을 고집해온

예를 소개한다면 밴쿠버의 그런트 갤러리가 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난 8월 28일 갤러리 30주년

기념 파티를 열기도 한 그런트는오랜 기간 동안 다양한 기금과 협상을 통해 공간을 임대에서 소

유로 돌리는데 성공해, 다른 공간들과 비교해 훨씬 안정적인 경제 상황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트 갤러리는1984년 밴쿠버 마운트 플레즌트에 있던, 현재 갤러리 디렉터 글렌 알틴의 아

파트 거실에서 처음 오픈했다.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공간들이 점차 미술가의 프로그램 운영권을

포기하는 대신 전문 큐레이터와 화이트 큐브를 갖춘 미술관으로 역할을 바꾼 반면, 그런트는 초

기 디렉터가 오랜기간 운영하며 젋은 작가를 지원하고 지역연대를 강조하는 특유의 성격을 여전

히 추구하는 곳이다. 프로그래밍에서는 매년 미술가로 이루어진 운영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소수

의 전시를 선정하고 퍼포먼스와 지역관련 행사는 연중 접수 받는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공간의

비공식적인 취지를 “다른 갤러리에서 보여주지 않는 것을 전시한다” 는 것이 퍼포먼스와 비주류

의 실험적인 프로젝트을 지원하려는 대안공간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7]

360

[1] 더아트로 ‘대안공간 10년 그 이후’ http://www.theartro.kr/issue/issue.asp?idx=27

[2] 웹사이트에 실린 본문http://www.canadianart.ca/features/2014/08/06/eyelevel-gallery/

[3] 리셸빙이니시에이티브http://www.eyelevelgallery.ca/exhibition/eyelevel-reshelving-initiative-6-labour-

leisure

[4] 세계 이동하는 갤러리 프로젝트 http://www.eyelevelgallery.ca/exhibition/world-portable-gallery-convention-

2012

[5] 카이버 건물에서 추방http://www.canadianart.ca/news/2014/03/06/khyber-ica-eviction/

[6] 써드 스페스http://thirdspacegallery.ca/

대어-대어 http://www.dare-dare.org/en/

[7] 그런트의 역사 http://arcpost.ca/articles/grunt-an-opening-in-the-scene

번 역

361

이지민 역

<내가 지난 여름에 한 것>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이 글은 세계적인 큐레이터이자 비평가인 얀스 호프만(Jens Hoffmann)이 편집장으로 있는

『디 익시비셔니스트(The Exhibitionist)』 9호(2014년 4월 발행)에 기고된 마시밀리아노 지오니

(Massimiliano Gioni)의 에세이를 번역한 것이다. 『디 익시비셔니스트』는 2010년부터 매 년 2

회, 큐레이터에 의해 큐레이터를 위해 생산되는 전시 기획 분야의 전문 잡지다. 주로 활발하게 활

동하는 세계적인 큐레이터의 전시 리뷰, 에세이, 역대 전시 연구 글 등이 게재된다. 지오니는 이

글에서 큐레이터가 지녀야 할 자질과 2013년 베니스비엔날레 <백과사전식 전당(The Encyclo-

pedic Palace)>를 감독하며 생각하고 느꼈던 바를 거침 없이 표현했다.

나에게 2013년 여름은 심리적으로 약간 불안정한 시기였다. 베니스비엔날레를 꾸리는 것

이 두려웠기 때문이 아니다. 센트럴 파빌리온과 아르세날레에 펼쳐진 <백과사전식 전당>을 방문

할 기회가 있었던 비평가들과 관람객 등 많은 목격자들에 의하면 내가 루돌프 슈타이너(Rudolf

Steiner)의 인지학 지지자, 칼 구스타브 융(Carl Jng)의 추종자, 심령론 신봉자, 알레스터 크로울

리(Aleister Crowley)의 사도로 변모했다고 한다. 이번 비엔날레가 슈타이너의 드로잉, 융의 레

드 북(Red Book), 20세기 초반의 강신론을 다루는 풍부한 참고자료와 함께 엠마 쿤즈(Emma

Kunz),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와 어거스틴 르사쥬(Augustin Lesage)의 회화들, 마법

사 알레스터 크로울리(Aleister Crowley)의 파스텔화 그리고 약간 이상한 출처의 또 다른 다수의

사물들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눈썹을 치켜 올리며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물론- 벤자민 부클로(H.

D. Buchloh)의 전설적인 눈썹은 다른 사람들보다 확실히 높았다- 본 전시에서 내가 제기한 믿음

과 컨텐츠 사이에서 추정된 인지의 매우 흥미로운 과정을 제시하였다. 해설자들은 흔히, 내가 특

정 작업과 사물을 선택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는데, 이는 그들이 표현했던 생각과 가치를 내

362

가 옹호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슈타이너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면 큐레이터는 슈타이너가 훌륭한 작가

이고 그의 철학적 이론이 합당할 뿐만 아니라 존경 받고 유명해질만 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같은 추정은 나에게 진심 어린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슈타이너의 열렬한 찬양자들, 혹은 크로울

리에게서 영감을 받은 잡지, 카탈로그ㅡ몇몇은 매우 흥미롭고,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들도 있

다.ㅡ등을 보낸 다양한 기관들 뿐만 아니라 다수의 미술계 사람들, 심지어 전문 비평가들로 인한

것이다. 이러한 반응이 우리의 기대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이며, 큐레이터나 전시 주최

자가 지녀야 할 업무의 역할은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우선 그들은 대체적으로 큐레이터가 전시 참여 작가 작품의 서포터, 옹호자, 추종

자가 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다. 나의 관점에서 이와 같은 생각들은 꽤 못마땅하다. 1990년대

중반 이래로 관계 미학과 다양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는-나는 과감하게 단순화 하지만-관련 작

가와 큐레이터들이 급부상하면서 우위를 점했다. 이 해석에 따르면, 큐레이터는 중개인으로 분류

되어 있다. 그들은 전시에 따라 매우 다채로운 배경을 가지고 다양한 세대와 멤버 수로 구성되어

큐레이터의 안정된 변화에 따라 변모하는 작가 그룹과 전시를 진행한다. 또한 작가들이 “최고”라

는 암묵적이거나 노골적인 확신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는데, 이 특정 작가들은 타인에 의해서 선

택되며 주로 현 시점의 선구자이자 창시자가 된다.

이는 20세기 초반 아방가르드 시대 혹은 전후 네오 아방가르드 시대 때부터 상속되어온 개념

일 지도 모른다. 이는 1980년대에 특정 큐레이터가 구체적인 움직임으로 압승을 거둘 때 급격하

게 퍼져나가게 된 모델이다. 1990년대에는 새로운 세대의 큐레이터가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을

내세우긴 했지만 작가와 큐레이터 사이의 공모와 같은 관계를 계승하였다. 그러니까 이 구상은

큐레이터와 그가 전시하는 작가의 작업 사이의 통합적인 정체성에 근거를 둔다. 나의 전시와 작

업 모두의 경쟁 모델은 바로 의도적이든 아니든 전시나 미술관에 계급, 모임, 배제의 매커니즘 그

리고 가치를 더한다는 이유로 중요한 작가들로 간주되는 이들의 최고의 작업을 보여주는 것을 목

표로 하는 구상이다.

이러한 프로모터로서의 큐레이터 모델은, 그들의 직업이 전시 구성 방식 자체와 작품-선보이

기 게임의 규칙을 다루는 듯한 창작자로서의 큐레이터 모델로 대체되거나 결합되었다. 하지만 여

기에서 암묵적인 합의에 의해 모두가 큐레이터는 전시되는 모든 작품을 보조하고 추종하며, 어떤

양질의 아이디어를 구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이 두 가지의 모델과는 대조적으로 큐레이터를 학자 또는 (그보다 더 나은) 전시된 작업

의 해석자로 보는 것을 선호한다. 소극적이거나 활동적이지 못한 책벌레, 작업을 중립적인 입장

에서 바라보는 성향을 가진 학자나 해석자가 아니라, 작업의 구현, 설치, 몽타주, 공간 배열 그리

고 텍스트, 캡션, 전시 환경 등의 해석공간에서 관람객을 위한 해석 도구로 기능하는 일련의 중요

번 역

363

한 장치를 선택하는 꽤 활동적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면 관람객들은 아름답거나 중요한 것으로

기억되는 사물들에 대해 심사숙고 할 뿐만 아니라, 작가와 작업이 왜 또 다른 것을 포함하는지 스

스로 자문하고, 문제를 제기하며 서로를 더 풍부하게 하는 조우, 병치, 관계, 서술 등의 행위로 뛰

어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라는 행위는 해석을 제공하는 배움의 과정 즉 스스로의 해석 행

위인 것이며 전시를 통해 큐레이터와 관람객은 서로 연관된 관계가 된다.

해석자로서의 큐레이터의 태도는 지원자로서의 큐레이터와는 달리 조사 대상으로부터의 건

전한 객관성을 필요로 한다. 비록 우리가 철저한 상대주의가 만연한 시대에 살고 객관적으로 작

용하는 어떠한 주장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해석자와 학자는

그들의 연구 주제로부터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든지, 필연적인 서포터가 되지 않으면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기대되고 있다. 대략적인 예를 들자면, 우리는 홀로코스트나 아돌프 히틀러 학자가 나

치당원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일종의 과학적 객관성을 기반으로 한 균형 같은 것

을 기대한다. 반면, 슈타이너를 다루는 큐레이터는 필연적으로 슈타이너리스트(Steinerist, 슈타

이너 전문가)인 것이다.

또한 큐레이터를 해석자와 학자로서 생각하는 것은 전시 중인 작품과 사물들 몇몇이 표현하

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 공간을 허용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작품과 사물을 설명이나

364

논쟁 등을 위해 작품의 최우위성을 고려하지 않거나 또는 그들에게 가정되어 있는 품질에 구애

받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물이나 작품이 규범이나 계급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식을

갖고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에 전시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해석자가 된다는 것은 편견이 없이 또는 심지어 누군가의 해석 지평을 형성하는 편견들을 인

지하면서,전시의 작업과 사물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작품과 감상자 스스로의

해석 모두를 향해 편파성과 주관성을 인식하면서 과한 방해 없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여 작품

이 속삭이는 바를 헤아릴 수 있도록 감상자가 귀 기울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더불어 작품의 관점을 공유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작품이 존재하기 위한 작업 공간을 부

여하는 것도 해석자의 의무 중 하나로, 이는 확인을 필연적으로 거치지 않고 작업 활동이 내포하

는 이야기들을 전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슈타이너나 융에 대해 내가 그들의 이데올로기의

대변자나 조력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누군가의 해

석이 실제로 편파적이며 완벽한 진실의제시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한, 작업을 완곡하게라도

잘못 해석하는 기회를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요즘 미술사 더 나아가 진실의 규범과

체계를 용인하는 체계적인 질문이 큐레이터, 비엔날레, 미술관 등과 같은 기관의 가장 중요한 책

임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마뉴엘 볼자-비렐(Manuel Borja-Villel)이 본지의 마지막 섹션에 기고

한 “예외와 단절의 표현을 통한 총체적인 견해에 대한 질문과 (그것을 통한)자체의 학습과정이 서

술의 부분이 된다.”라는 내용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는 전시에 등장시킨 작품과 사물 그리고 부당하게 열외로 취급했던 특정한 유형에 대

한 편파성ㅡ심지어는 나의 애착ㅡ을 숨기려고 한 적은 없다. 하지만 이것은 내가 공유한 그들의

생각이나 믿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해석자의 존재는 심지어 본질적인 소리를 듣기 위하여 작품

의 강렬함이 파문을 불러 일으키는 것을 부추기기도 하는, 연구 대상과의 공감적 관계로 개입되

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스스로를 작가 프로모터로 변모시키고자 하는 큐레이터에 의해

발생되는 위험으로, 그들은 도그마와 메시지 관리인 또는 해석자라기 보다는 전달자가 적합한 비

유일 것이며 이러한 직업이라면 작가들은 전시와 작품을 갤러리스트나 자산 관리인에게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백과 사전식 전당>에서, (글의 초반부터 언급해온 예시를 고수하자면) 슈타이너, 융, 쿤즈,

아프 클린트, 크로울리와 같은 인물들은, 이미지와 커뮤니케이션의 도구가 급속히 침투됨에 따

라, 나에게는 꽤 동시대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들(문자 그대로 그들의 매체가 되는 내용과 함께)

에 의한 소유의 증거를 제공했다. 강령술적인 회화를 구체적인 사례로 포함시켰던 선택은 소위

작품들 중에서도 특히 추상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반영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웃사이더,

이단자, 독학자 등으로 간주되는 많은 예술가들은 공통된 운명을 공유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은 대개 예술가로서의 존재로 인정 받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의 작업 활동이 실용적이거나 실질

번 역

365

적인 활용도가 높을지는 모르겠으나,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순수 예술의 경계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일 것이다.

2013년 여름에는 하랄트 제만(Harald Szeemann)의 획기적인 전시 기획 방식에 대해 새로

이 재개된 논의가 상당히 많이 있었다. 베니스 프라다재단에서 1969년의 그의 전시를 재해석 하

기 위해 열린 <태도가 형식이 될 때>전은 폰다지오네 프라다재단의 디렉터인 제르마노 첼란트

(Germano Celant), 토마스 디멘드(Thomas Demand), 렘 쿨하스(Rem Koolhaas)가 기획했

다. 이는 그 해 여름 가장 많이 회자된 전시였다는 사실보다도ㅡ반복하지만, 증명이 필요하다 할

지라도ㅡ제만의 재능은 쉽게 모방되거나 (더 나쁘게는) 메마르게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 역설적

으로 입증된 계기였다.

칼 마르크스(Karl Marx)가 말하길, 역사는 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스스로 반

복된다고 했다. 아마도 첼란트, 디멘드 그리고 쿨하스는 이 유명한 글귀를 기억했어야만 했다. 얼

마나 슬픈 일 인가, 그러기는커녕 1969년 큐레이터의 변화에 있어서 창조성이 폭발적으로 증가

해 이례적으로 우수했던 시기의 완벽한 건조함을 증명이라도 하듯 어울리지 않게 코르네르 궁전

의 과장된 프레스코 룸에 설치했다. 언어학 복원에서의 엄격한 훈련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이미 뻣뻣해진 송장과 같은 예술사로부터 삶의 흔적을 추적하는 법의학적 계산인 CSI 에피소드

와 같았다. <태도가 형식이 될 때>전의 재배치 버전의 문제는 정확한 재건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

라-그 전시를 다른 전시 방식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또한 그들은 본래의

제안을 회복시켜 발표함으로써 골화되고 미화되어 있는,소위 걸작을 향한 예술사의 객관적 시선

을 상정한 것이었다.

베니스의 모조품들이 전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하랄트 제만의 유산 중 비교적 덜 유명하

긴 하지만 그의 커리어에서 다소 복잡했던 시기의 중대하고 고무적인 양상을 띠는 메첼러 머신

366

(Bachelor Machines)(1975)에서부터 비저너리 스위스(Visionary Switzerland)(1991), 몬테

베리타(Monte Verita(The breasts of Truth))(1978), 더 펜션트 포 더 토탈 워크 오브 아트(The

penchant for the Total Work of Art)(1983)을 거쳐 오스트리아 인 어 넷 오브 로지즈(Austria

in a Net of Roses)(1996)까지 이르는 것들이다. 중대하고 고무적인 양상은 예술과 비예술, 질,

그리고 기호(취향)과 같은 분류를 받아들이는 데 대한 그의 총체적인 알레르기 반응이라 할 수 있

다. 제만의 백과사전적 전시는, 원작과 복제본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작품과 문서, 걸작

과 발견된 사물의 결합을 요구하는 전시된 사물의 상태에 대해 던지는 체계적인 질문에 모두 근

거하고 있다.

물론 제만의 시스템에서는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흠뻑 스며든 기이한 형상과 괴짜 같은 사물

들이 포함되었으며, 그는 그의 전시에 출품된 모든 작품들과 작가에게 완전히 미쳐있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끝내주는 그의 기여-적어도 나에게 영감을 주거나 해방의 기술을 가

져다 준 것은 전시의 컨셉트인데, 효과적인 단어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선과 악의 범주를 넘어

서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여 작가가 최고로 간주되거나 작품이 엄청나게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는

것은 더 이상 이야기할 거리가 아닌 형태의 전시인 것이다. 전시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접근은 더

이상 경쟁력이 없다. 대신 체계를 시행하는 데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의 사소한 역사를 다

시 씀으로써 예술사학적 범주를 확장하는 것에 의미를 둔다. 전시 만들기에 대한 접근은 수치로

환산이 가능하든, 심미적인 충족이 높든 가치나 미를 기준으로 선정된 간단한 사물들 보다는 세

계적인 비전, 실존주의적인 모험, 문화적 모델에 대한 기록, 가상의 문화 문서를 추적하는 비유적

인 증거의 역할을 수행한다.

가여운 하랄트 제만, 그의 이름이 오늘날의 다방면에서 언급되는 방식으로 인해 그는 무덤 속

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그는 새로운 형태의 전시 기획을 떠올린 유

일한 사람은 분명히 아니다. 같은 금년에, 또 다른 흥미로운 패러다임이 타당한 이유로 잠깐 떠올

랐는데 그것은 불행하게도 이미 유행으로 굳어버리는 위험의 지경에 도달했었다. 린 쿠크(Lynne

Cooke)가 능수능란하게 기획하여 뉴욕의 뉴뮤지엄(완전히 공개하자면 나는 부책임자이다)에서

다채로운 방법으로 전시 되었던 독일 예술가 로즈마리 트로켈(Rosemarie Trockel)의 2012년

개인전인 <코스모스(A Cosmos)>전은 범주와 장르에 대한 트로켈의 열망을 공유하는 유명한 또

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행 동반자들, 친구들, 예술가들, 애호가들이 많이 찾았다.

비슷한 방식으로 필립 파레노(Philippe Parreno)는 2013년에 파리의 팔레 드 도쿄에서 존

케이지(John Cage), 머스 커닝엄(Merce Cuningham), 도미니크 곤잘레스 포에스터(Domin-

ique Gonzales-Foerster), 리암 길릭(Liam Gillick),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 티노 세갈

(Tino Sehgal)의 작업을 위한 그의 회고전을 열었다. 작가를 환대하는 이 개념은 다양한 출처

의 작품과 사물을 포함하여 관람객에게 체계가 전혀 없는 다성음악(폴리포니)과 같은 전시 유형

번 역

367

을ㅡ개인전, 그룹전 상관없이ㅡ제시할 가능성이 있다. 당신의 집으로 손님을 초대했을 때, 당신

은 손님들의 관점을 읽어낼 필요 없이 그저 편안하게 그들 본래의 모습으로 의견을 표출할 수 있

는 따뜻하고 깨끗하며 채광이 좋은 장소를 제공하면 된다. 호스트와 게스트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지 몰라도 나는 그 상황을 저명한 작가의 말을 빌어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당신의 말

이 탐탁지 않을 지라도, 나는 당신이 그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

다.” 아마도, 과할지도 모르는 낭만적 사고방식을 취한다면, 큐레이터의 역할은 바로 이 말로 설

명될 수 있을 것 같다. 즉, 내가 슈타이너스트(Steinerist), 융이언(Jungian, 융 전문가), 크로울리

트(Crowleyite, 크로울리 전문가)라고 말하는 것은내가 그들의 생각과 작품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작업이 공유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디 익시비셔니스트 웹 사이트 : http://the-exhibitionist.com/

필자목록

370

김미정 학부에선 회화를, 대학원에서는 예술학을 전공했다. 만나고 부딪히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예술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하며 살아간다. 현재 고양창작스튜디오 코디네이터로 근무 중이다.

김시습국민대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미술이론 전문사 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김소영과 함께

<<옆-사람>>전을 공동기획하고, <<두고 온 것들>>전을 기획했다. 현재 동시대 미술 및 시각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글쟁이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김영주

독일 쾰른에 거주중인 인디 게임 디자이너

김진주미술작가. 전시기획자나 연구자로 활동하기도 한다. 레바논 베이루트 소재 비영리 미술기관인 아슈칼 알완(레바논 조

형 예술가 협의체)이 운영하는 <2013~2014 홈 워크스페이스 프로그램>에서 공부했고, 4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안양문화재단, 2013~2014)의 <프로젝트 아카이브>와 <리빙 애즈 폼(더 노마딕 버전)>을 만들었다.

김하나서울대 건축학과 졸업 후 경영위치건축사사무소를 거쳐 서울대 산업공학과 대학원에서 Human Interface System

을 연구했다. 성나연, 김민철과 함께 서울소셜스탠다드Seoul Social Standard를 운영하고 있다. 이곳은 빠르고 밀도

높은 성장 역사를 가진 서울Seoul을 배경으로, 사람/시간/공간이 만드는 다양한 관계Social 속에서 우리가 지지해야

할 표준Standard은 무엇인지 발굴하고 만들어가고자 한다. http://blog.naver.com/3liters

남선우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미학과에서 미술이론을 공부하는 중이다. 현재는 일민미술관의 교육 담당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필자목록

필자목록

371

류혜민 미술이론을 공부했고 현재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의 큐레이터로 재직했다.

리즈 박 캐나다 밴쿠버 출신의 큐레이터이자 비평가. 현재 필라델피아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ICA의 휘트니-라우더 큐레토리

얼 펠로우로 재직 중이다. UBC에서 큐레이터학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웨스턴 프론트와 같은 비영리 실험 공간

에서 일했으며, 뉴욕의 키친, 금천예술공장 등에서 전시를 기획했다. 또한 <애프터올> 온라인, <아트아시아퍼시픽>,

<퍼포마 매거진>, <필립>, <이슈> 등에 기고했다. 관심 주제는 폭력의 재현,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컨템포러리 아트 문

맥에서의 비서구권 미술 등이다.

박가희 주로 리서치를 기반으로 한 과정 중심의 작업에 관심이 많으며, 전시 또는 시각예술을 통한 (대안적) 지식생산의 가능

성을 실험하고자 한다. 이러한 관심사를 바탕으로 지속적으로 실천함으로 '앎의 장', '(지식)생산의 장'으로서 전시라는

매체의 가능성을 실현해 가고자 한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박초희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에서 배움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현재 경기문화재단에 재직 중이다.

박희정 고3때까지 예체능계였으나 예술적 재능이 없다고 판단, 인문계로 전환하여 대학에 갔다. 대학에서는 영문학을 전

공했고, 프랑스 살롱 중 하나인 <청년회화전(Salon de la Jeune Peinture)> 연구로 미술사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12년 2월부터 국립현대미술관 창동창작스튜디오 프로그램 코디네이터로 근무, 창작의 최전방이라 부를 수 있는

그곳에서 전 세계에서 온 다양한 억양을 가진 작가들과 부대끼며 일하고 있다.

송윤지 미술사, 미술비평. 주로 한국현대미술에 관심을 두고 있다. 최근에는 어쩌다보니 인디음악, 독립영화, 일러스트 등에

몰두하면서 관련 인맥을 형성하는 중. 먹을 것을 주면 잘 따릅니다.

신양희경성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문화기획, 행정, 이론학과 석사과정을 마쳤다. 대안공간

반디에서 큐레이터, 경향 아티클에서 기자로 일했다.

372

신현진예술경영학과에가면 큐레이터가 되는 줄 착각하고 예술경영학과를 가서는 게을러서 진로를 안바꾸고 그리고 운좋게

큐레이터로 그리고 매니저로 대안공간에서 10여년을 일하다가 한계에 부딛혀서 그리고 자신의 넘처나는 작가적 에

고에 시달리다가 공부의 한을 풀고자 들어간 학문의 길에서 빨갱이적인 사고에 물들어 한편으로는 권위를 뺀 비평의

내용을 담은 소설을 쓰겠다는 밀리언셀러 소설가 지망생이고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와 현대미술에 있어서의 제도적,

그리고 존재론적 관계를 고민하는 논문을 준비만 하는 만학도이다.

오경미여성문화이론연구소, 지식순환협동조합 생산자조합원. 본업은 미술비평이지만 페미니즘이 좋아 미술과 페미니즘에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 미술이던 페미니즘이던 인식의 전환을 야기할 수 있는 내용으로 꾸준히 글을 쓰는 것이 현재

의 최고 관심사다.

오사라문화인류학, 순수미술, 미학을 공부했다. 스톤앤워터 객원 큐레이터, 경기도미술관 경기창작센터 학예사를 역임했으

며 한국공예디자인문화재단에서 일하기도 했다. 브라질 상파울로 4개월 체류 후 프랑스 파리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윤민화학부에서 불문학과 미술사학을 공부했고, 현재 예술학 석사과정 중이다. 상상마당, 비주얼아트센터 보다, 두산갤러리

등에서 글을 쓰거나 전시를 기획했다. 독립큐레이터로서 황학동에 위치한 케이크갤러리에서 전시를 기획하고 있으

며, 공공미술 프로젝트 '팀 황학동'을 진행 중이다. 전시란, 세상과 나 사이에 위치하는 스크린-이미지 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언어로 구술되지 못하고 재현되지 못하는 지점들을 고민하고 있다.

윤율리 문화아카이브 봄 디렉터.

윤형민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을 졸업한 후 런던 첼시미술대학 대학원 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캐나다 밴쿠버에 체류하고

있는 작가다. 지난 몇년간 세 대륙을 넘나들며 이사를 다닌 후 글로벌 노마딕 시민으로 마주치게 되는 언어, 역사, 사

회적 관습과 문화 번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출처] [전시 리뷰] 최소 형태의 삶 / 윤형민 |작성자 똑똑

이나연뉴욕에 체류하는 제주도 사람이다. 뉴욕과 제주를 오가며 어떤 문화적인 역할을 해보고 싶은 막연한듯 구체적인 꿈이

있다.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현장을 뛰어다니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필자목록

373

이슬비월간미술 기자

이성희아트인컬처 기자로 활동한 후 홍콩 소재 아시아 아트 아카이브의 한국 리서처로 일했다. 현재는 한국 미술관련 글을

영어로 번역하는 일과, 리서치와 전시기획일도 진행하고 있다. 2013년 두산 큐레이터 워크숍에 참여하여 <본업: 생

활하는 예술가>전을 2014년에 공동 기획하였고, 전시 관련 단행본을 워크룸에서 발간할 예정이다. 홍콩을 자주 오가

면서 홍콩 지역미술계의 자생적 움직임에 관해 관심을 갖고 조사하게 되었다(홍콩의 비영리 공간을 다루는 기사는 예

술경영지원센터의 더아트로에 소개되었다. http://www.theartro.kr/issue/issue.asp?idx=63). 2014년 11월 6

일에 <저온화상: 홍콩과 서울을 잇는 낮은 목소리>(참여작가: C&G, Sushan Chan, 김동규)전을 오픈한다.

이영욱 역서울대학교 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80년대 말부터 미술평론가로 활동해왔으며, 미술비

평연구회 회장, ‘대안공간 풀’ 대표, 포럼 에이 발행인 등을 지냈다. 「아방가르드/이방가르드/타방가르드」, 「비평의

지형학」 등의 에세이를 썼으며, 저서로는 『미술과 진실?』, 역서로는 『실재의 귀환』(H. 포스터), 『장소특정적 미술』 (

권미원) 등이 있다. 현재 전주대학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정헌대학을 9년 만에 간신히 졸업했다. 이 긴 기간 동안 대학교육의 의미와 과의 정체성을 이해하고자 했으나 끝내 실패,

자퇴를 결심할 즈음 어영부영 졸업해버렸다. 그런 주제에 미술잡지사 두 곳에서 기자로 몇 년 일했고, 지금은 공공예

술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기획하는 일을 한다. 최근엔 고향인 제주로 귀향, 거의 매일 고주망태가 된 채 구도심 뒷골

목을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이지민2012 부산비엔날레, 사무소(스페이스 포 컨템포러리 아트)에서의 전시 현장을 거쳐, 현재는 KT&G 상상마당 시각예

술팀 큐레이터로 재직중이다.

이 헌 공동체를 좋아하면서 느슨한 연대를 꿈꾼다. 사람, 지역, 사회를 엿보고, 이를 다양한 활동으로 표출하고 싶어 한다.

경기문화재단에서 일을 배웠고, 현재 서울문화재단에서 일하고 있다.

임국화동덕여자대학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큐레이터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컨템포러리아트저널, 북노마드

에서 편집자로 일했고 현재 AK갤러리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고 있다.

374

장승연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후 미술사로 석사학위를 받고 현재 박사과정 중이다. 미술전문지 <아트인컬처> 기자를 역

임했다.

장혜진큐레이터. 최근까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서울>2014 “귀신간첩 할머니” 전시 팀장으로 근무 중이며, 곧 계약

이 종료된다. 아트선재센터, 사무소에서 일했으며 2012년부터는 “워크온워크”를 설림해 큐레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2013년에는현시원, 박재용 큐레이터와 함께 “큐레이팅 스쿨 서울”을 열어‘0학기’를 시작했으며 비정기

적인 프로그램을 준비중이다. 미술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근까지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2014 “귀신간첩 할머니” 전시 팀장으로근무 중이며, 곧계약이 종료된다. 아트선재센터, 사무소에서 일했으며

2012년부터는 “워크온워크”를 설림해 큐레이터이자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 2013년에는현시원, 박재용 큐레이터

와 함께 “큐레이팅 스쿨 서울”을 열어‘0학기’를 시작했으며 비정기적인 프로그램을 준비중이다. 미술현장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역할을 수행한다.

전효경동시대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호기심으로 미술을 탐구하고 관람자와 작가, 작품간의 보다 원활한 교통을 위해 일하

는 매개자이다. 2011년 초 목동의 한 빌라에 이븐더넥Even the Neck이라는 전시 조직을 만들고 서울 목동과 런던

에서 강성은, 이진주, 조익정의 개인전 열고, 아트선재센터 라운지 프로젝트 '반 미터위'를 기획했다. 최근에는 영국의

Afterall, 아트인컬처 등 온라인 미술 저널에 글을 기고하였고, 아르코미술관의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다.

조숙현영화주간지 Film 2.0과 미술월간지 퍼블릭아트에서 취재 기자를 거쳐 연세대학교 영상 커뮤니케이션 대학원을 졸업

했다. 왜 커뮤니티 아티스트는 매일 현장에서 갈등을 겪을까, 라는 문제에 착안해 석사 논문을 썼다. 현대예술을 포함

한 고급문화와 하위문화의 통섭과, 커뮤니티 아트에 항상 관심을 두고 있다. 현재 유럽에서 아트 레지던시 기행 중이

다.

최정윤 이화여대에서 영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아트선재센터, 부산비엔날레에서 미술 현장을 경험했으며, 월간 <아트인

컬처>에 기자로, 광주아시아문화개발원 공간기획팀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현재 전시를 기획하고 미술에 관

한 글을 쓴다.

황규관시를 쓰면서 이런저런 노동자 생활을 좀 오래 함. 시집으로는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등이 있음.

현재는 진보생활문예지 《삶이 보이는 창》 편집인도 하고 있음.

주최·주관 후원


Recomme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