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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post: 31-Oct-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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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 on Colossians in the Bible 규모 있는 교회 *송영과 신앙고백 /*십계명 / *찬송(045) / 기도 / *찬송(046) / 설교와 헌상 / *찬송(047) / *주기도문과 축도 골로새서 21-5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 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 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 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 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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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主言敎會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Sermon on Colossians in the Bible

    규모

    있는

    교회

    *송영과 신앙고백 /*십계명 / *찬송(045편) / 기도 / *찬송(046편) / 설교와 헌상 / *찬송(047편) / *주기도문과 축도

    골로새서 2장 1-5절

    “1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2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

    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3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

    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4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5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

    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 主言敎會 禮拜說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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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규모 있는 교회 (골 2:1-5)

    바울의 수고하는 마음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者(자)들과 무릇 내 肉身(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者(자)들을 爲(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願(원)하노라”(1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희란, 골로새 교회 성도들,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 그리고 말 그대로 바울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 등의 세 계층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바울은 이들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아니, 좀 더 실감 있게 보자면 거의 몸부림치고 있기까지 합니다. 여기 ‘어떻게 힘쓰는 것’이라는 말은 ‘아주 몸부림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King James Version은 이 아곤(avgw,n)이라는 단어를 사람의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갈등이 마치 큰 싸움과도 같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그레이트 컨플릭트(great conflict)로 번역했습니다. 반면, New Inter-national Version는 ‘스트라글(struggle)’의 진행형(struggling)으로 처리함으로써 바울이 내적으로 ‘안달복달하는 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을 잘 살려냈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을 통틀어 딱 두 번 나타나는데, 둘 다 바울이 사용했습니다. 한 번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안달복달 하는 상태를 가리켰고, 다른 곳에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외부로부터 받는 고난에 맞서 힘겹게 싸우고

    있는 모습을 가리켰습니다. 가령,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빌 1:30)고 한 말이 그렇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 때문에 원수들이 가해오는 핍박 앞에서 믿음을 수호하기 위한 싸움을 힘겹게 이겨내고 있었습니다(빌 1:29). 성도가 신앙적으로 위협이나 박해를 받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내외적으로 격렬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박해나 고난에 직면했을 때 신앙의 당사자로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영적 싸움을 해 본 사람이라면, 지금 이 장면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 골로새서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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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지금 바울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그처럼 안달복달 하고 있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목자적 심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골로새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그리고 심지어 자신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한 보물이신가를 잘 아는 사도의 입장에서 더더욱 그러한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바울의 편지의 수신자들의 신앙은 어느 정도 긍정적인 모습이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이는 마치 부모의 입장에서, 그리 썩 잘 살지 못하는 자녀를 대할 때에 갖는 안타까움도 그러하겠지만, 행복하게 잘 살고 있는 자녀의 소식 앞에서 그러한 상태를 더욱 견고히 해주고 싶어하는 마음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사실은 본문 끝 부분에서 “이는 내가 肉身(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心靈(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規模(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5절)고 한 데서 잘 나타납니다. 여기 ‘너희의 規模(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일단 긍정적인 모습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분명히 ‘기쁘게 봄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차 잠깐 방심하는 순간 이내 뒤로 미끄러지기 쉬운 것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패한 본성의 존재이기 때문이고, 구원 받았다고 해서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 살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고, 게다가 복음의 영역에는 항상 어두움의 권세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 마련인 때문

    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工巧(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4절)고 한 것입니다. 좀 더 뒤로 가면, 이는 다음에 보겠지만, “누가 哲學(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擄略(노략)할까 注意(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遺傳(유전)과 世上(세상)의 初等(초등) 學問(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2:8)고 덧붙입니다. 어두움의 권세는 항상 성도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때문에 성도는 항상 경계에 경계를 다하면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행여라도 계속 전진하지 아니하고 일상성에 빠져 안주하게 되면, 그야말로 쥐도 새도 모르게 타협과 나태의 밥이 되어, 뒤로 미끄러져 침륜에 빠질 정도까지 될 수 있습니다(히 10:39).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성도들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러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성도 자신을 유익하게 해주는 ‘선한 의무’요, ‘유익한 의무’입니다. 교우들은 서로 이 사실을 일깨워주는 의무 수행에 만전을 다해야 합니다. 본래 배움의 길을 걷는 것은 인간의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국가까지도 이 일에 팔 걷어 부치고 나서는 것입니다. 가령, 어느 나라에서나 의무 교육이라는

  • 主言敎會 禮拜說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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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도를 두고 운영합니다.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야 말로 기본적인 인간성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형편에 따라, 국가가 부담을 안고서까지 강제력을 동원하여 자국의 아이들을 교육시키는 것입

    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은 의무 교육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력이 신장하면서 상대적으로 쾌락산업이 발달하는 까닭에 온 사방이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어린아이 적에는 대부분이 ‘깨달음의 미학’의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복음의 영역에서는 더더욱 배움의 미학이 필요한 것이고, 이것을 의무라는 말을 붙여 표현해야 할 정도로 성경 학습의 당위성이 대두됩니다. 성도라면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학교에서 깨달음의 미학을 맛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혁파 교회는 교회를 ‘예배 공동체’라는 관점과 더불어 평생 다녀야 하는 학교 차원, 곧 ‘교육 공동체’ 차원에서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 목회’라는 말이 회자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높은 수준으로 교육시키고 싶어하시고, 이를 위해서 교회에 교직을 제정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라면 모름지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학습을 의무로만 여겨 늘 수동적 입장에서 힘겨운 씨름을 하기 보다는, 능동적이고도 적극적인 자세로 임하여 성경에서 진리를 학습화는 데서 얻는 ‘깨달음의 미학’을 마치 권리 쟁취하듯이 쟁취하고 또 하기를 평생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음 지금 바울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보았듯이 그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는 일’(1:28)에 대해 언급한 바 있습니다. 지금 정확히 그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고, 여기서도 같은 취지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쭉 보아왔듯이 이미 믿는 그리스도인들, 제법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열매가 잘 맺어 자라는 그런 성숙한 성도들을 대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 더 ‘완전한 자로 세워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할수록 그리스도를 더 잘 깨닫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慰安(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聯合(연합)하여 圓滿(원만)한 理解(이해)의 모든 富饒(부요)에 이르러 (아버지와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秘密(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智慧(지혜)와 知識(지식)의 모든 寶貨(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2-3절). 어떤 사본에는 ‘이르러’와 ‘하나님의 비밀’ 사이에 ‘아버지와 그리스도의’라는 말이 있는데, 문맥이 좀 이상하고, 따라서 이렇게 바꾸어도 의미가 거의 달라지지 않으므로 지금처럼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흠정역(KJV)은 이 부분을 다 번역해 놓았습니다(… of the mystery of God, and of the Fa-

  • 골로새서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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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r, and of Christ).

    바울은 자신이 지금 편지를 쓰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깨달으라’는 것이고, 그를 위해서 필요한 수단을 취하라, 곧 ‘어떤 상태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깨닫는 것은 단순히 지식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그것에 근거한 실천 또는 적용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도 핵심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지난 번에는 ‘하나님의 비밀’을 ‘하나님의 경륜’과도 연결시켰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은, 그 동안에는 제외되어 있었던 이방인들에게도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구원이 베풀어짐으로써 하나님의 유니버샬리즘적

    인 구원 방식을 보여주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비밀이시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안에는 智慧(지혜)와 知識(지식)의 모든 寶貨(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는 말로 받았습니다. 이것은 서두에서 ‘아버지께서는 모든 充滿(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셨다’(1:19)라고 한 바를 상기시킵니다. 여기 ‘모든 充滿(충만)’에는 말 그대로 우주만물과 같이 눈에 보이는 물질 세계는 물론이고, 그러한 것들을 움직이는 동력인 정신 세계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한 정신 세계가 이번에는 ‘智慧(지혜)와 知識(지식)의 모든 寶貨(보화)가 감취어 있다’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시야말로 ‘진리의 원천’을 베푸시는 ‘유일한 교사’이시다 하는 말임에 다름이 아닙니다.

    바울의 의미를 좀 더 실감나게 해주는 장면을 마태복음 17장 1-8절에서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면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그때 모든 광경을 보고 있던 베드로가 나서서 “… 主(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主(주)께서 萬一(만일) 願(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草幕(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主(주)를 爲(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爲(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爲(위)하여 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다고 했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말할 때에 忽然(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者(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5절). 여기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한 부분이 핵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되는 분이시로되, 특별히 하나님의 생각 (understanding, 지성)과 뜻(will, 의지)를 다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분이십니다. 구약 계시사 속에서 면면히 예언되어 나온 중요한 사상들 중의 하나로, ‘그 선지자의 도래’ 사상이란 것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대변하는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러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는 많이 있

  • 主言敎會 禮拜說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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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왔지만, 궁극적으로 ‘유일한 선지자’, 또는 ‘그 선지자’가 도래한다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이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요 4:19)라고 했던 것이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훗날 베드로 역시 동일한 차원에서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바로 그 선지자시다’라고 설파했습니다(행 3:22-26). 종교 개혁기에 존 칼빈 목사님이 성경의 이와 같은 사상에 근거하여 앞의 마태복음 17장 5절 말씀을 들어 ‘예수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논한 것에 대해서는 과거에 우리가 배운 바대로입니다.

    지금 바울의 말이 정확하게 이런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구속사의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는 유일무이한 교사이시다 하는 말입니

    다. 그래서 만사의 해답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있다 하는 말입니다. 지금 편의상 ‘만사’라고 했지만, 정확하게 말해서 ‘생명의 길’이요, ‘생명의 도리’입니다. 그러면 그처럼 유일무이한 교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핵심, 또는 그러한 핵심에 이르게 해주는 열쇠가 무엇입니까? 교회의 착근과 계승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기 위하여 지상의 시간 세계

    속으로 들어온 분이시지 않습니까?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磐石(반석) 위에 내 敎會(교회)를 세우리니 陰府(음부)의 權勢(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天國(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

    리라 하시고 이에 弟子(제자)들을 警戒(경계)하사 自己(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18-10). 여기서 교회란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의 신약적 연속체라는 데 대해서는 이전에 언급한 바대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천국(하나님 나라) 열쇠’라는 표현을 사용하신 것이고,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 나라’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거두절미하고 ‘교회야 말로 천국이다’ 하는 결론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건대, 교회를 바르게 아는 ‘지식 문제’와 그렇게 교회를 실제로 이루는 ‘적용 문제’란, 가히 구원론적 사활이 걸린 문제라고 아니랄 수 없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바 되고, 그리하여 함께 연합된 지체들과 함께 그분의 가르침을 일상 영혼의 양식처럼 섭

    취해 나가는 것으로서의 교회 생활의 실제성입니다.

    공교한 말에 속지 말라 지금 바울은 이러한 교회를 세우고 싶어서 그처럼 안달복달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앞에서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爲(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苦難(고난)을 그의 몸된 敎會(교회)를 爲(위)하여 내 肉體(육체)에 채우노라 내가 敎會(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爲(위)하여 내게 주신 經綸(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

  • 골로새서 1: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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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1:24-25). 이 말씀 이상으로 바울의 사명을 교회의 착근과 계승 사상으로 집약시켜 주는 부분이 달리 없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원천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착근), 교회의 역사 속에서의 연속적 출현의 원천으로도 제시합니다(계승). 교회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토대 위에 세워지고, 다음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름으로 시간 세계 속을 달리면서 만물을 채워나가는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상황 속에서는 교회의 착근과 계승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느 한 지역에 교회가 서는 데에는 ‘확실한 신앙고백자들의 모임’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향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자체 양육’에 결코 게을러서는 안 되기 때문인데, 지금은 이 두 가지 문제에 다 의심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입심만 앞세워 교회라고 주장하는 ‘자칭 교회들’이 많은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도 불확실하고, 교회의 훈련에도 불성실한 사람들이 모인 것이라면, 천 명이 모여 있다 한들, 만 명이 모여 있다 한들, “교회가 아니다!” 하는 불행한 진단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단연코, 교회는 숫자의 크기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사도 바울 시대 때부터도 있었던 일입니다. 지금 바울도 교회의 일꾼 노릇을 수행함에 있어서 긍정적인 동시에 부정적인 걱정을

    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걱정이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이 이미 든든히 잘 서 가고 있기는 하나, 그래서 “…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5절)고 할 수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리고 좀 더 ‘완전한 자’로 세워져 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계속 받듦으로써 교회다움, 성도다움을 보다 더 선명하게 부각시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도 개인의 신앙심 향상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지체들과 연락하고 상합함으로써, 그러한 생명 활동이 궁극적으로 몸된 교회 공동체가 보다 더 예수 그리스도화 되는

    데 기여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걱정이란, 교회의 착근과 계승에는 항상 내적인 저항과 외적인 어두움의 권세가 따라 붙는 문제로 말미암습니다. 이것이 “내가 이

    “주님을 따르지 않으려면, 주님을 빙자하지 말고, 내게서 배우지 않으려면, 나를 들먹이지 말라!”

  • 主言敎會 禮拜說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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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것을 말함은 아무도 工巧(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4절)고 한 데서 명백합니다. 바울은 지금 ‘속이는 자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공교한 말’ 때문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닙니다. 성도는 타락한 본성 상태에서 이제 막, 곧 갓 구원 받았기 때문에 ‘새 생명의 생활’에 잘 훈련되어 있지 않습니다. 설혹 잘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속에는 여전히 옛 사람의 소욕이 왕성한 활동을 합니다. 이 왕성한 활동이 어떤 기회를 만나면 여지 없이 불타오르는데 다름 아닌 공교한 말의 속임수가 귓전을 때릴 때입니다.

    여기 헬라어 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공교한 말(piqanologi,a, 피싸노로기아)’에 대해 어떤 성경은 ‘파인 사운딩 아규먼트(fine-sounding arguments; NIV)라고 번역했습니다. ‘파인 사운딩’이란 말 그대로 ‘듣기에 좋은’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아규먼트가 붙어서 ‘듣기에 좋은 말솜씨’ 또는 ‘듣기 좋은 설득력’ 정도의 의미가 되어 다소 약합니다. 다른 성경이 ‘말의 설득력으로(with persuasive-ness of speech; ASV)’라고 한 것도 여전히 불만스럽습니다. 그래서 King James Version에서 ‘유혹적인 사상’ 또는 ‘마음을 꾀는 말’이라는 뜻의 ‘인타이싱 워드(enticing words)로 번역한 것이 나름 의미를 잘 살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외부에서 어두움의 권세가 ‘마음을 꾀는 말’을 늘어놓으면서 유혹하기 시작하면, 사람의 내면에서 부패성, 곧 기본적으로 진리를 맞서고자 하는 저항력이 즉각 반응합니다. 마음이 끌려 귀가 솔깃해진다 말입니다. 인간이란 근본적으로 이런 존재입니다. 특히나 진리 문제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해서, 진리는 배척하고 거짓은 끌어 안고자 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여기서 진리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르침을 의미하고, 거짓이란 인간이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 두 가지 가르침 중에서, 인간은 본능적으로 후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후서 4장 3-4절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敎訓(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自己(자기)의 私慾(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眞理(진리)에서 돌이켜 虛誕(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딤전 4:3-4).

    교회의 행로에는 항상 이러한 성향이 문제로 부상하여, 마치 우후죽순(雨後竹筍)처럼 사방에 솟아 있습니다. 진리의 수납 여부나 진리에의 순종 여부만이 벽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거짓 진리에 미혹되어 넘어가는 문제도 큰 장애가 되어 버티고 섰는 것입니다. 게다가, 수동적으로 그냥 단순히 저쪽으로 넘어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을 도입하고 퍼뜨리는 능동적인 사탄의 일꾼 노릇까지도 자행한다 하는 말입니다. 물론, 자기 자신도 스스로 속아 넘어간 상태에서 그렇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는 옳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을 냅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을 내면 낼수록 결국 복음을 변질시키거나 대적하는 결과밖에 달리 맺을 수 있는 열매가 없습니다. 현대 교회 안에 기복주의와 같은 ‘변질된 복음’이 버젓이 성행하는 이유가 이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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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니다. 기복주의가 변질된 복음이라는 데 대해서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 구현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 추구를 본질로 삼거나, 그러한 성향이 지배적인 한, 어떠한 형태의 신앙도 실상은 기독교라고 하는 옷을 입은 미신과 우상에 불과할 뿐이라고 성경이 확실하게 선포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과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겉으로는 얼마든지 꾸밈으로 ‘하나님께 영광!’, ‘하나님께 영광!’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지를 수 있겠지만, 하나님이 그런 유치한 거짓에 속으시겠습니까?

    규모 있는 신앙 모습 하지만, 이런 전도(顚倒) 현상이 사방에서 횡행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대의 제도권 교회가 집단적으로 배도했다는 데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

    가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어떠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남은 자들’을 보존해 주시겠지만, 전체적인 모습에 있어서는 교회가 집단적으로 배도한 모습들을 사방에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먼저, 이렇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상에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원천으로 내어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로부터 받으신 모든 충만으로부터 흘러 넘치는 지혜와 지

    식의 모든 보화로써 교회를 보양하십니다. 몸인 교회가 머리로부터 이와 같은 보양을 받게 되면 내부에 일종의 질서 체제를 형성해내게 됩니다. 이 질서 체제를 붙들고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이 지금 가르치는 것이 이 원리라는 것이 다음과 같이 이어지는 말에

    서 확실하게 드러납니다. “이는 내가 肉身(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心靈(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規模(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5절하). 여기서 ‘이는’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내가 육신에 있어 ….” 이렇게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편지를 받는 교회들이 풍겨내고 있는 일종의 교회적 기풍을 보고 있

    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풍을 보는 까닭에, ‘공교한 말로써 속이려 드는 자들’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을 경계시킬 수 있는 것이요’ 하는 취지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이라는 데 강조점이 있습니다. ‘초등학생한테는 방정식을 가르칠 수 없겠지만, 여러분은 충분히 배울만한 실력이 있소이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보고 있는 교회적 기풍이란 어떤 것입니까? 먼저, ‘너희의 규모’라고 했고, 이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론적으로는 둘 다 같은 의미입니다. 물론, ‘믿음의 굳은 것’이란, 그 앞에 ‘그리스도를 믿는’이라는 말이 붙은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런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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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런 고난과 박해와 유혹 앞에서도 그리스도 굳게 붙잡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

    니다. 가령, 베드로전서 5장 9절에서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對敵(대적)하라 …”라고 한 바와 같습니다. 박해 앞에서도 꿋꿋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는 까닭에, 그러한 사실 때문에, 그들에게서 특이한 교회적 기풍이 발산되고 있는데, 그것을 ‘너희의 규모’라고 한 것입니다. 넓게는 너희의 ‘신앙 형태’라는 말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굳이 의도가 있어서 규모(ta,xij, 타시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박해나 고난 앞에서도 신앙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하는 정도가 아

    니라, 그러한 상태에서도 어떤 짜임새랄까, 혹은 흐트러지지 않은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실을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규모라는 단어는 신약성경 도처에 나타나는 흔한 표현입니다. 대표적으로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의 “모든 것을 適當(적당)하게 하고 秩序(질서; ta,xij, 타시스)대로 하라”(고전 14:40)고 한 말씀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 ‘질서(in order; KJV)’라고 한 말과 같습니다. 개혁파 교회는 이 고린도전서 14장 40절 말씀에서 ‘교회의 입법권’의 근거를 찾습니다. 특별히 존 칼빈은 이 말씀에 근거하여 ‘예식과 의식에 속한 법률들’과 ‘권징과 평화에 속한 법률’ 등의 ‘두 종류로 구분될 수 있는 교회 법률 제정의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Inst. IV.10.27-32).

    칼빈의 말은 대충 이렇습니다. 교회도 이 세상의 사회처럼 하나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공통적인 평화와 화합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름 어떤 형태의 조직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필요한 질서를 잘 운영하는 법 체제 아래 있을 경우 잘 유지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화합이란 있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교회의 중요한 특징이자 생명력인 일치성, 또는 통일성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고 한 것인데, 하지만 이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연합의 끈을 형성하는 규정들을 첨가하여 질서와 예절을 확립해야만 합니다. 본디, 신자들의 거룩한 모임에서는 모든 일이 품위 있고 위엄에 어울리게끔 행해져

    야 하며, 실제로 인간의 공동체는 인간성과 절제가 일정한 유대를 유지함으로써 질서 있게 유지됩니다. 이 두 가지를 잘 유지할 수 있을 때, 그러한 교회가 합법적인 법령들을 제정할 때에, 참된 신앙을 흐리게 하고 양심을 타락시키는 법령들을 만들 위험을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공동체의 조직이 충분히 강해

    “설교자가 말씀의 학생이 되려 애쓰지 않는다면,

    강단에 올라갈 때에 목이 부러지는 것이 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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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려면, 사람들의 관습이 다양하고 마음도 그러하고 사람들의 판단과 성향도 서로 충돌되기 일쑤이므로, 분명한 법률로써 체계를 잡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절차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이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러한 법률들을 구원에 필요한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고, 여러 가지 가책을 느끼게 하여 양심을 얽어 매서도 안 되고, 특별히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러한 규정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연결시켜서도 안 된

    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할 경우 마치 신앙이 그러한 규정들에 종속되어 있는 양 왜곡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교회가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위하여 새벽 기도회 같은 규정을 시행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로 인해 양심에 속박을 가할 정도로 조치를 취한다거나, 그러한 투의 표현으로 억압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른 교회로 서기 위한 갈망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해서, 다 해도 된다

    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자기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고 더불어 사는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능력 발휘나 행동이 사회 정서적으로, 또는 일반 윤리나 상식에 비추어 옳은 것인가를 먼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는 구호가 자기네 교회가 추진하는 종교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허망한 선동’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실제로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정확하고도 명확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기준은 항상 성경입니다. 다른 교회가 그렇게 하는 것이 좋아 보이니까 우리 교회도 하자 하는 식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가치 판단이 그런 식이 되게 되면, 결국 크고, 많고, 편리하고, 즐거운 등등의 인본주의가 하나님의 자리를 대체하게 되고, 그리하여 시대마다 유행 신앙이란 것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교회는 지극히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먼저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에 맞는 것인가를 생각해 본 후 행동해야 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첫 걸음에서부터 어긋나는 교회들이 많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성경을 모른다는 공통점이 있겠지만, 그러한 무지에 휩싸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역사의 발자취를 주목하지 않기 때

    문이고, 역사를 해석하는 능력이 없기 때문인데, 상대적으로 현재의 현상과 상황에만 눈을 고정하면서 자기의 취항에 맞는 것만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훌륭한 선생입니다. 아니, 역사 이상으로 훌륭한 선생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신구약 교회의 역사는 단순히 사건의 흐름만 이어받아 온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역사가 창출된 원인을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바른 교

  • 主言敎會 禮拜說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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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들마다 교회의 역사적 발자취를 주목하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그 동안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다양한 경험을 겪어 나왔습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항상 성경이 기준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세상을 비판하였고, 성경에 근거하여 참된 교회의 상이 정립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가는 내적 성숙을 멀리하게 됨에 따라, 바깥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고, 서서히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스스로 올무에 빠져 온갖 부와 명성과 권력을 소유함으로 타락하여 마침내 로마

    카톨릭 교회라고 하는 종교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역사 속에서 교회만큼 부패한 국가나 단체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아니, 교회야 말로 하나님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교회만큼은 어떠한 이유로도 버릴 수 있는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에서 개혁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의 모습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이 여기 저기서 희미한 불꽃이 되어 비취기 시작한 것입

    니다. 그와 같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아주 격렬한 투쟁과 싸움을 펼쳐냈던 시기가 ‘종교 개혁기’입니다. 교회의 부패가 곪을 대로 곪은 시기가 장기간 계속되자, 결국에는 내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날 수밖에 없을 지경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교회를 바로잡는 기준은 성경이었습니다. 따라서 교회 내의 투쟁 시기에 성경의 진리들은 보다 밝히, 보다 널리, 보다 높이 드러나고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와 같은 진리 논쟁과 투쟁을 통하여 성경의 진리는 보다 더 객관화되었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일련의 사상 체계 또는 교리를 형성하게 되었고, 그와 같은 진리를 생명처럼 여기는 고백신앙 운동이 일어나, 다음 시기의 교회의 정체성을 위한 길을 예비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아닌 편에 서 있는 교회라고 한다면 일단 이

    러한 역사성, 곧 정통성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개혁파 교회’라고 하지 아니하고, ‘역사적 개혁파 교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단 역사적 개혁파 교회라고 할 경우, 반드시 그 어려운 시기에 생명을 아끼지 않고 성경적 교회를 회복시켰던 개혁자들의 계통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로마 카톨릭 교회와 결별해 있다 할지라도, 그처럼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는 개혁파 교회라고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개혁된 이후로, 그처럼 개혁된 교회가 다시금 사분오열되는 비통한 과정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정통이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나뉘어진 이유들이 한결 같이 비성경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개혁자들의 계통을 생각할 때에는 단연 존 칼빈을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존 칼빈에 의해서 향후 개혁파 교회의 신앙고백의 골격이 거의 전반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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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과 같은 집단적인 배도의 시대에, 혹 바른 교회를 세워나려 한다면 반드시, 단연코, 절대적으로 이와 같은 역사적 통찰력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하도 변명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타락해버린 상태이고 보니, 나름 사방에서 개혁, 개혁 하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방안도 없고 대안도 없기 때문입니다. 기껏해야 좀 더 상식적이 되자거나 또는 좀 더 도덕적이 되자는 정도입니다. 종교 개혁기를 해석하는 통찰력이 없습니다. 가끔, 루터나 칼빈이나 혹은 에드워즈 같은 사람들을 들먹이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역사 속의 실존 인물들에 대한 이름 정도나 아는 수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개혁을 주도할 수 있기는 고사하고, 여전히 개혁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우습잖은 모순 속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맙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확인하는 말씀이지만, 성경을 해석하게 되면 결국 교회가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이때 과연 교회란 무엇인가, 또는 교회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사활이 걸린 질문 앞에 봉착되게 됩니다. 하지만 개혁파 교회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이미 갖고 있다 하는 말입니다. 더욱이 이 대답은 마치 이런 저런 항목들을 모아놓은 법전과도 같은 서책 형태로서 주어

    진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넘칠 만큼의 충분한 점검과 검증을 통해 얻어진 생생한 활력 그 자체입니다. 이와 같은 정답이 지금의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까지, 참으로 얼마나 많은 순교자들의 생명과 얼마나 많은 개혁자들의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이 값으로 지불되었습니까?

    그러면, 개혁파 교회 안에서 값진 유산이 되어 후대의 시간 세계 속으로 도도히 전달되고 있는 신앙고백들과 제반 교회 정치 원리들은, (게다가 그러한 것들이 규모 있는 신앙 형태가 되어 지금 우리 눈 앞에 생생하게 비춰지는 형식으로

    펼쳐지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은) 과연 우리에게 무슨 도전을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지금이라고 하는 이 시대에 우리의 생명을 내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게 하시되, 지금 이와 같은 ‘성경적 개혁의 역사’를 통하여 ‘성경적 교회관’을 직시케 하시는 것입니까?

    성경의 교회를 이루라는 것입니다. 교회 개혁의 선봉에 서라는 것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경계에 경계를 더하면서 ‘공교한 말로 속이는 자들’의 ‘속임’에 빠져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참된 기풍, 곧 교회와 신앙의 규모

    교회란,

    “하늘에 좌정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적 임재방식’이므로, 구원 받음은 ‘올바른 교회 이루기’와 분리되지 않는다.”

  • 를 유지하고, 그러한 믿음을 더욱 굳혀 나가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피차 간에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라는 것입니다. 그러할 경우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더더욱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진정으로 믿음으로 굳게 설 경우,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에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이는 신앙의 기력과 용기가 북돋는다는 뜻으로, 마음이 영적 생명력으로 촉진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하여 ‘지체들 간의 사랑의 결속’이 더욱 굳어집니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께 대한 완전한 이해의 충만한 부요함’에 이를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관련한 일체의 영역에서 도통해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내는 일, 곧 교회를 교회답게 이루고 누림에 있어서 절대적 확신으로서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께 대한 깨달음입니다.

    정리와 결론 간단히 정리하고 맺겠습니다. 지금은 규모 있는 교회의 출현이 절실한 시

    대입니다. 사탄의 세력이 공교한 말로써 숱한 교회들을 넘어뜨리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 굳은 믿음을 행사함으로써 규모 있는 교회 생활에 더더욱 힘써야

    겠습니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의 3개 1조 4쌍의 신앙고백 시작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정착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 21개조

    (Geneva Church Confession, 1536) 제네바 교회 신앙교육서 33개조

    (Geneva Church First Catechism, 1537) 제네바 교회 신앙고백문답 373문답

    (Geneva Church Catechism, 1542, 1545)

    벨기에 신앙고백 37개조 (Belgic Confession, 1561)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문답 129문답 (Heidelberg Catechism, 1563) 도르트 신조 5개 교리 (Canons of Dort, 1618-19)

    형성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종결기: 3개 1조의 신앙고백 프랑스 (갈리아) 신앙고백 40개조

    (France [Gallican] Confession, 1559) 스코틀랜드 신앙고백 25개조

    (Scots Confession, 1560) 스위스(헬베틱) 신앙고백 30개장

    (Swiss [Helvetic] Confession, 1536, 1566)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3개장 (Westminster Confession, 1643-49) 웨스트민스터 대신앙고백문답 196문답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3-49) 웨스트민스터 소신앙고백문답 107문답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 1643-49)

    역사 속에서 개혁된 교회를 계승하는 主言敎會

    교회의 ‘설교문’은 목사의 생활을 지지해주는 교회의 위임 아래 수행된 것이므로, 설교자 개인이 아닌 교회에 모든 권리가 있습니다. 주언교회는 “거룩한 공회와 ... 믿사옵나이다!”라고 고백하는 바에 따라, 보편의 참된 교회를 섬기는 일환으로 본 설교문을 경제와 결부된 책으로 판매치 아니하고 공개리에 배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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