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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 Culturebc.sbp.or.kr/past_magz_pdf/성서와문화 66호(2016... · 2018-01-18 · 2...

Date post: 15-Mar-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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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겨울 | 통권 제66호 (속간 제7호) | 2016년 12월 1일 발행 | 계간지 | 성서와 문화 (2000년 창간/ 2015년 속간) | 비매품 성서 문화 겨울 2016 Bible & Culture 평화(Peace / 1950) 이중섭(1916-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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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년 겨울 | 통권 제66호 (속간 제7호) | 2016년 12월 1일 발행 | 계간지 | 성서와 문화 (2000년 창간/ 2015년 속간) | 비매품

    성서와문화 겨울2016

    Bible & Culture

    평화(Peace / 1950) 이중섭(1916-1956)

  • 성·서·와·문·화2

    다시, 크리스마스- 눅 1:46-56 -

    김기석 ·청파교회 목사

    주님의 은총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부르는 기쁨의 노래가 지금도 세상

    구석구석에서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도 울려 퍼지기를 빕니다. 오늘만큼은

    서로 대립했던 모든 주체들이 날카로워진 마음을

    내려놓고 편히 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전쟁과

    테러로 찢긴 세상에, 살기 위해 사선을 넘나들어야

    하는 난민들에게, 정치 갈등 속에서 표류하고 있는

    이 조국의 현실을 바라보며 우리는 목 놓아

    대림절의 노래를 불렀습니다.‘곧 오소서 임마누엘’.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역사의 그늘 아래 살면서

    좋은 세상이 열리기를 학수고대했던 이들의

    심정과의 동일시가 일어났습니다.

    '마리아의 찬가'로 알려진 본문 말씀에는 공평함이

    없는 세상, 불의와 어둠이 지배하는 세상을

    극복하고 생명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세상을

    이루고픈 모든 이들의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자기 몸을 빌어 하실 일을

    내다보며 기쁨의 찬가를 불렀습니다. 오시는 분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띤 채 깊은 침묵에 잠겨 계신

    분이 아닙니다. 고통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고, 세상의 이치를 가르치려 하지도

    않습니다.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시는 분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제

    힘에 도취되었던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천대받던 이들을 높이는 분, 주린 사람은 먹이시고,

    남의 배고픈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던 이들은

    빈손으로 떠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맞이한 분의 참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시기를 ‘헤롯 왕

    때’(마2:1)라고 말하고, 누가복음은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눅2:1)라고 명토박아 말합니다. 이것은

    2016년 혹은 2020년처럼 연도를 특정하기 위한

    진술이 아닙니다. 예수님 탄생의 의미는 그런

    ‘때’와 연결시켜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왕권의 정통성을 의심받던 헤롯 대왕은 로마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황제의 이름으로 도시를

    건설하기도 하고 막대한 세금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자기 지위에 불안을 느낀 그는 수많은 토목공사를

    벌임으로써 입지를 다지려 했습니다. 물론 그 일에

    필요한 비용은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민중의 삶은 황폐하게 변했습니다.

    헤롯에 대한 민중들의 원망은 극에 달했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메시야가 태어났다는 말을 들은

    헤롯이 몹시 당황했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헤롯은 군인들을 보내 베들레헴 인근에서

  • 성·서·와·문·화 3

    태어난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정통성이 없는 권력자의 두려움이 그런 폭력을

    낳았습니다.

    이처럼 첫 번째 성탄절 이야기는 고요하고

    목가적이고 아름답지만은 않습니다. 문득 사람들이

    즐겨 부르는 성탄 찬송가마다 그런 현실이

    깨끗하게 소거되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성탄 찬송에 주로 등장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완전하고 흠이 없고 순결한 아기 예수, 고요한 밤,

    구유, 목자, 동방박사, 죄 사함, 기쁨, 마귀 권세

    이 김 , 천 사 들 의 노 래 … . 성 탄 절 이 갖 는

    사회적·정치적 의미는 사라지고 종교적인 의미와

    행복의 이미지만 남은 것이 아닌가요?

    주님은 세상에 오셔서 병든 자, 귀신 들린 자,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치유하고 온전케 하고 북돋워주셨습니다. 땅에

    붙들려 사는 이들에게 하늘을 가져오셨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 현실을

    하늘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속에

    하늘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탄절에 누군가로부터 받을 선물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성탄절의 유일한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이 우리 마음에 오시면

    우리는 새 사람이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모순을

    짊어진 채 거리에 나선 이들, 지하보도에서 잠을

    청하거나, 냉골에서 긴 밤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

    절망의 심연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

    자포자기적인 심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공포에

    질린 채 살아가는 사람들…. 주님은 우리의 몸을

    빌어 그런 이들 가운데 임하고 계십니다. 아멘.

    평화의 비둘기 연작 드로잉 1 피카소

  • 성·서·와·문·화4

    종교와 평화 - 평화, 폭력을 줄이는 과정

    이찬수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 종교평화학

    평화라는 말 속에 평화는 없다평화라는 말이 넘쳐난다. 하지만 정작 평화는 없다.

    평화는커녕 갈등이 더 커진다. 왜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평화를 바라기는 하지만, 실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평화에 대한 개념과 기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아가 평화를 이루는 방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평화를 선포하는

    종교인들이 그렇게 많아도 종교들 간에 갈등이 큰

    이유는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유리한 평화가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저마다 평화를 기대한다고 해서 평화가 구현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더라도 평화에 대한 이야기에 평화에 대한

    정의가 빠질 수는 없다. 논의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의 작업 정의는 필요하다. 평화학에서 말하는

    평화에 대한 정의부터 살펴보자.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평화학에서는 평화를 ‘소극적 평화’와 ‘적극적

    평화’로 나누곤 한다. 소극적 평화(Negative

    Peace)는 전쟁이 없는 상태, 좀 더 구체적으로

    전쟁과 같은 직접적 또는 물리적 폭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전쟁이 없다고 해서

    갈등이나 긴장도 없는 것은 아니다. 갈등을

    유발시키는 구조적이고 함축적인 폭력은 지속된다.

    그렇다면 좀 더 실질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적극적 평화(Positive Peace)다. 적극적 평화는

    간접적 또는 구조적 폭력은 물론 구조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문화적 폭력까지 없는 상태를 말한다.

    노르웨이의 평화학자 요한 갈퉁( J o h a n

    Galtung)으로 인해서 많이 알려지게 된 용어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하지만 적극적 평화의 상태는 얼핏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너무나 이상적이고 추상적이다.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마저도 없는 상태를 경험해본 적이

    없다는 점에서 그런 식의 정의는 현실감이

    떨어진다. 폭력이 일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상상

    속에서는 가능하지만 현실에서는 경험하기 힘들다.

    좀 더 현실감 있는 정의가 필요하다. “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평화는 어떤 정적인 상태가 아니고, 폭력과 그로

    인한 아픔을 줄이는 동적 과정이어야 한다. 이것이

    평화에 대한 인간의 책임의식도 반영한 정의라고

    할 수 있다.

    폭력은 피해를 수반하는 사나운 힘이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평화에 대한 해설이

    전부 폭력과 연결되어 있고, 평화에 대한 정의가

    주로 폭력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 성·서·와·문·화 5

    인류의 경험이 평화가 아니라 사실상 폭력이기

    때문이다. 인류가 평화보다는 폭력을 더 크게

    경험해왔다는 점에서 폭력이란 무엇인지도 묻지

    않을 수 없다.

    폭력은 한자로 하면 사나운[暴] 힘[力]이다. 영어

    violence는 라틴어의 vis(힘) · violo(위반)에서 온

    말이다. 이 둘을 합하면, 폭력은 정도가 지나쳐

    피해를 주거나 파괴를 수반하는 힘을 뜻한다.

    인류는 어떤 식으로든 사나운 힘 혹은 지나친 힘의

    피해를 입거나 파괴를 경험해왔다. 역으로 이러한

    피 해 나 파 괴 를 줄 일 때 평 화 가 그 만 큼

    현실화된다는 뜻이다. 평화를 이룬다는 말은 폭력을

    줄인다는 말로 바뀔 때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문제는 폭력을 어떻게 줄일까이다.

    종교의 폭력무엇보다 평화의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한다.

    평화라는 말은 많아도 평화롭지 못한 이유는

    평화조차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교계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가령

    성서에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요한일서

    4:16)’라고 선포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문장에

    동의하는 이들에게만 그 사랑을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에서는 ‘유대인이나 그리스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갈라디아서 3:28)’라며 혈연, 신분,

    성별과 관계없는 인류의 원천적 일치성에 대해

    선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부사적 수식어를 내세우면서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이들을 차별하곤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에페소서 2:14)일 뿐

    너희와는 무관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이것은 모두들

    평화를 자기중심적으로 상상하는 데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평화라는 것은 결국

    평화라는 이름의 배제를 낳을 뿐이다. 말이 평화지

    사실은 폭력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이다.

    아픔에 대한 타자지향적 공감평화는 폭력을 줄이는 과정이다. 폭력을 줄이려면

    무엇보다 자기중심성을 극복해야 한다. 동시에

    폭력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에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아픔이 그저 ‘남’의 것인 한, 폭력 역시

    남의 일이 되고, 그 폭력은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픔에 대한 공감이

    폭력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공감에도 자기중심적 공감(sympathy가

    여기에 가깝다)과 타자지향적 공감(empathy가

    여기에 가깝다)이 있다. 자신의 상황에 공감해주길

    바라는 것과 타자의 상황에 공감해가는 것은

    방향이 다르다. 저마다 자신의 상황에 공감해주길

    바라는 데서 그치면 그 공감의 요청 역시

    해결은커녕 도리어 갈등의 진원지가 된다. 타자의

    상황에 대한 공감이 폭력으로 인한 아픔을 줄이고

    그만큼 폭력을 줄인다. 거기서부터 그만큼 평화는

    이루어지기 시작한다. 예수의 사랑과 긍휼, 붓다의

    자비 혹은 맹자의 측은지심은 이러한 타자지향적

    공감의 원리를 잘 말해준다. 폭력의 축소는 종파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인이 갖춰야할 삶의 과정이

    아닐 수 없다.

    평화의 비둘기 연작 드로잉 2 피카소

  • 성·서·와·문·화6

    불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윤남진 ·신대승 네트워크 트렌드&리서치센터 소장, 불교학

    한국의 모든 사찰에서, 모든 법회(불교집회)와

    행사에서 불교인들이 빠뜨리지 않고 봉독하는 경전이

    있다. 경전명은 줄여서 , 완전한 명칭은

    이다.

    이 경전의 첫 구절이자 전체 경전의 핵심 구절이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이다. 뜻을 간략히 풀이하자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五蘊) 고정된 실체가

    없다(皆空)라는 것을 거울에 사물이 비추듯이

    왜곡이 없이 있는 그대로 보고(照見), 중생을 모든

    고통과 멍에(一切苦厄)의 언덕에서 자유의

    언덕으로 건네느니라(度)’라고 풀이 된다. 이

    문장의 핵심사상은 모든 존재와 현상들이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대목이다. 왜 그런가 하면, 모든

    존재와 현상들은 ‘관계 지어 짐’에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상호의존하여 일어나고

    사라지므로 항상 그러한 어떤 것이란 없다는

    것이다.

    불교의 평화론의 근간이 되는 교리적 바탕도 이런

    사상 위에 서있다. 상호의존하여, 어떤 조건에서

    어떻게 관계지어 지느냐에 따라 존재와 현상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항상된 적(의

    실체)가 있을 수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평화의

    가능성이 열린다. 항상되고 고정된 적이 있다면

    그것은 타도해야 할 실체적 대상이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즉 어떠어떠한 조건의 결합되어서 적이란

    관념이나 현상이 생겨한 것이라면 그것은 그런저런

    조건이 해소되면 이내 사라지고 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실상을 있는 그대로 살피는

    것(여실지견, 如實知見)을 통해 변화의 가능성을

    찾고, 그 계기를 만들어가는 지혜를 발휘할 때

    평화의 길은 열린다.

    근본교리로서의 평화론이 이러하다면 그 방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까. 붓다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사전에 전쟁과 다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 사회공동체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 다툼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한다는 점, 전쟁과 다툼을 피하기

    위해 상대의 요구를 들어주는 등 온갖 방법을 써야

    한다는 점 등을 가르치고 있다. 붓다는 강대국의

    폭력 앞에 약소국인 밧지국이 멸망하느냐

    번영하느냐 하는 것은 밧지국이 무력을 갖추고

    있느냐가 아니라 ‘밧지국 사람들이 자주모여서

    진리와 정의에 대해서 논의하는가, 전통적인 관례나

    연장자의 지혜를 존중하는가, 여성과 타종족 등의

    약자에 대한 보호정신이 있는가’ 등에 있다며

    7 가 지 기 준 을 예 시 하 였 는 데 , 이 를

    칠불퇴법(七不退法-일곱가지 쇠퇴하지 않는

    법)이라고 한다.

  • 성·서·와·문·화 7

    그렇다면 다툼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거나 일어났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에 따르면

    “다툼이 있는 곳에서는 너의 온갖 능력을 발휘하여

    두 편의 힘이 같아지도록 한 후 갈등을

    화해시키도록 하여라”라고 하고 있으며,

    에서는 “보살은 평형이 깨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다툼을 잘 화합시킨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평화에 대한 붓다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서 적용하자면 불교는 사회적

    약자의 편이 되어서 힘의 균형을 갖추게 하여

    갈등과 다툼을 일방이 타방을 강압하지 않을

    상태에서 최대한 평화롭게 해결되도록 해야 한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부득이하게 적군과 아군의 처지가 되어서

    전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찌할 것인가? 에는 적군과

    아군의 힘을 판단하여 적왕의 친한 벗이나

    선지식(스승, 조언자)에게 청해 분쟁을 해결하거나,

    적왕이 요구하는 물건을 주어 분쟁을 없도록

    하거나, 아군이 많은 것처럼 술책을 써서 ‘경외의

    마음을 일으켜’ 분쟁을 없앤다고 하였다.

    끝으로 이처럼 온갖 노력을 하였음에도 부득이

    전쟁을 하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찌해야 하는가?

    이럴 경우에는 되도록 사람을 죽이지 않아야 하며,

    어떤 방편을 쓰든지 적왕을 항복시켜 군대를

    싸우지 않게 하며, 방편을 써서 적군을 생포해서

    살해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쟁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불교의 이러한 평화론을 한반도와 그 주변 상황에

    대입하여 본다면, 먼저 현재와 같은 갈등과 대립이

    항상 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과

    관계에 따라 일어난 것이므로 이를 바르게 살펴서

    지혜를 발휘한다면 현실은 반드시 변화될 수

    있다는 것,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나 상대방에

    부족한 것을 주어서 갈등을 완화시키고 전쟁으로

    가는 극단의 선택을 막아야 한다는 것, 무엇보다

    우리사회 내부의 민주주의를 공고화하여 다른

    나라에게 위엄 있는 국가, 사회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이 한반도와 그 주변 지역의 평화를

    이루는데 필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평화로운 아침 이중섭

  • 성·서·와·문·화8

    유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전병술 ·건국대 연구교수, 동양철학

    인간은 늘 태평성대를 꿈꾸며 살아왔다.

    유교문화권에서는 요·순(堯·舜) 시대를

    태평성대로 여겼다. 이 시대는 만물이 대자연의

    법칙에 따라 공존하며 질서와 조화를 이루듯

    순리에 따라 정치를 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제왕의

    힘이 작용하는지조차 몰랐다고 한다. 유가에서는 이

    시대를 ‘대동 사회’가 실현된 시대였다고 믿었다.

    ‘대동 사회’는 집집마다 대문이 필요 없는, 사랑과

    믿음으로 충만한 시대였으며 복지가 실현된

    시 대 였 다 . 하 지 만 이 는 노 자 가 말 한

    ‘소국과민’에서나 가능한 이상향이라고 할 수 있다.

    실현 가능한 바람직한 사회는 예의와 규범을 통해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소강 사회’였다. 평화를

    위한 인간의 노력은 ‘소강’을 이루기 위한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고대 중국에서 ‘소강’을 이루는 길 가운데 묵가의

    ‘겸애(兼愛)’와 유가의 ‘인의(仁義)’의 길이

    도드라졌다. ‘겸애’는 인간은 그들이 세계 어디에

    살든 인류 공동체의 일원으로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전체 인류의 인간애에 의해

    수립된 도덕 공동체에 일차적으로 충성해야만

    한다는 세계 시민주의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

    하겠다. 반면 맹자는 ‘인의’를 강조하며 “내

    어르신을 섬기고 그 마음을 남의 어르신에게

    확장하며, 내 아이를 사랑하고 그 마음을 남의

    아이까지 확장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공자와

    맹자의 정신을 계승한 유가는 사랑의 마음이

    개인에서 출발하여 가족, 친척, 이웃을 거쳐 모든

    인류에 이르러야 함을, 다시 말해 자신의 도덕성을

    자각하고 타자의 가치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자를 관통해서 가장 바깥쪽 경계까지 도달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이 정리된 후 동아시아는 줄곧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에 따라 유가 사상을 토대로

    사회를 구성하고 운용하였다. 공자의 인간다움의

    총화로서의 ‘인(仁)’을 계승한 맹자는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는 상황을 목격하는 상황을 설정하고, 그

    때 즉각적으로 느끼는 안타깝고 두려운 마음과

    어린아이를 구하는 무조건적인 행동에서 인간의

    본성의 선함을 밝혔다. 공자와 맹자의 사랑의

    마음은 성리학 시대에 접어들면서 타자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공감으로 확대되고, 인간에서

    뭇 생명, 인류가 성취한 문화의 붕괴에 대한 아픔,

    나아가 생태계 전체와의 교감으로 확장되었다.

    조선건국과 함께 유가문화는 국가와 사회를

    지 탱 하 는 근 간 으 로 작 동 하 기

    시작하였다.‘내성외왕(內聖外王)’,‘수기치인(修己

  • 성·서·와·문·화 9

    治人)’등으로 개괄되는 유학이념은 개인의 도덕성

    자각을 바탕으로 한 사회적 실천을 표방하였으며,

    위로부터의 감화와 토론을 통한 설득을 중시하였다.

    하지만 자기중심적 정의관이 뚜렷했던 유가는

    설득에 실패할 경우 상대방을 이단으로 몰고

    가기도 하였다. 맹자는 무차별적 사랑을 주장하는

    묵가와 극단적 개인주의를 주장하는 양주(楊朱)를

    이단으로 배척하였고, 성리학 시대에는 이에 덧붙여

    불교와 도교를 이단사설로 배척하였다. 또한

    내부적으로 적서(嫡庶)의 구분, 출신 지역의 구분,

    치열한 학문적 논쟁과 이에 따른 당쟁의 심화,

    외세침략에 대한 대응으로서의 척화(斥和) 논쟁

    등이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국가적 논쟁으로

    치달아 모든 국민들을 아프게 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체제 하에

    이윤의 극대화가 선이라는 믿음 하에 탐욕과 교만,

    좌절과 불신이 교차하면서 계층 간, 지역 간, 노사

    간, 이념 간, 세대 간, 종교 간 갈등이 증폭되어

    폭력적인 양상을 띠고 표출한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고 평화와 공존의 길로 가기위해서는 유가

    본연의 ‘서(恕)’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서’는

    나의 입장이 아닌 타자의 입장에서 사태를

    바라보는 태도다. 나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타자의

    모습이 바로 내 자신의 모습임을 뼈저리게

    자 각 해 야 한 다 . 이 를 바 탕 으 로

    ‘동당벌이(同黨伐異)’식 패거리 문화를

    벗어던지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조화를

    이루는‘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통해 희생을

    줄이고 사람을 살리는 길로 가야한다.

    평화의 비둘기 연작 드로잉 3 피카소

  • 성·서·와·문·화10

    가톨릭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주원준 토마스·한님성서연구소 수석연구원, 구약학

    들어가며가톨릭 교회의 평신도 신학자에게 이런 귀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최근 가톨릭 교회의

    평화관에 대해서 개신교 형제들과 나누는 소중한

    기회라는 생각에 경어체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느껴집니다. 이 짧은 글에서 구체적인 각론까지

    세세하게 논하기는 힘들 것 같아서, 큰 흐름을 우선

    짚어드리며 이야기를 시작할까 합니다(개신교와

    가톨릭의 용어가 차이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적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새 시대21세기 초엽에 가톨릭 교회의 비전을 밝히고 계신

    교황 프란치스코는 여러모로 신선한 인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시대에 가톨릭 교회는 정통적

    믿 음 ( o r t h o d o x ) 의 시 대 에 서 정 통 적

    실천(or thoprax is )의 시대로 점차 이행하는

    듯합니다.

    지난 4-500년 동안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무엇이

    올바른 믿음인가에 대해서 치열하게 연구하고

    성찰했습니다. 신학은 이런 ‘정통적 믿음’에 대한

    언어로 가득 찼습니다. 가장 정통의 믿음을 가진

    사람만이 각급 단체를 대표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와 신학은

    발전했습니다만, 신학을 교파의 틀에 가두었고

    실천을 외면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톨릭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실천이 무엇일지가 큰 화두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포커스가 조금 이동한 느낌이랄까요.

    20세기까지, 올바른 믿음의 기준은 대개 성경과

    신조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올바른 실천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을

    제시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의 실천을가난이란 신학적 언어요 복음의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즐겨 어울리셨습니다.

    더구나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현실적이고도 중대한 문제입니다. 교황은 세상의

    가난 앞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를 21세기

    그리스도교의 표양으로 제시하십니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비유를 들어 볼까요?

    사목자(=목회자)는 ‘양의 냄새’가 나야 하고,

    교회는 ‘야전병원’과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가난한

    양떼의 냄새가 나지 않는 목자나, 지나치게

    화려하고 깔끔하여 가난한 사람이 친근해지기 힘든

    교회를 멀리 하라는 말씀입니다.

    가톨릭 교회에서 사제가 입는 검은 옷을

    수단이라고 합니다. 신부님이 입는 수단은 권위의

  • 성·서·와·문·화 11

    상징이기도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수단을

    입 었 느 냐 는 중 요 하 지 않 습 니 다 . 팔 을

    걷어붙였느냐가 더 중요합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의 개인적 영혼 구원에만 집착하면서

    사회적 가난과 가난한 사람의 외침을 모른 체하는

    사람은 ‘가짜 그리스도인’이라고도 하셨습니다.

    2014년 한국 방문에서는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 리본을 손수 달고 광화문 미사를

    집전하셨습니다. 교황님의 뜻을 받들어 수많은

    가톨릭 사제와 주교들이 노란 리본을 달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월호 희생자를 추모하는 미사가

    광화문에서 끊이지 않습니다.

    사회교리사실 최근 약 150년 동안 세계 가톨릭 교회는

    ‘사회적 가르침’(Social Teaching)이라는 주제를

    착실히 발전시켰습니다. 교회가 세상 문제에 개입할

    때 어떤 기준으로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성경과 전승에 기반한 성찰이 수많은

    문헌에 담겨 전해집니다. 이 사회적 가르침은

    사회교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신자들에게

    교육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사회교리

    학습을 세계 신자들에게 무척 적극적으로 권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사목정통적 실천은 정통적 사목(orthopastoral 정통적

    목회)이 무엇일까 하는 고민으로 이어집니다.

    사회교리를 기반으로 현재 가톨릭 교회는 세계의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교적 입장을

    제시하려고 노력합니다. 세계적인 분쟁이나

    자연재해는 물론이고, 여성, 진화론, 생태, 이주,

    무역, 금융, 인종, 종교간 대화, 각종 내전 등등의

    문제에 대해 세상과 열린 태도로 대화하고, 복음적

    식별과 실천의 기준을 제시하려고 합니다. 현재

    가톨릭 교회는 세계적 차원이나 국가적 차원이나

    지역적 차원을 불문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고

    가난과 차별이 발생하는 모든 문제에 대해서

    발언하고 개입하는 교회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사회교리는 21세기의 정통적 사목(정통적 목회)의

    기준입니다.

    한국 교회의 평화 사목(목회)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런 배경으로 한반도의

    다양한 일에 개입합니다. 국내 문제는 물론

    남북문제도 사회교리에 기반하여 식별하고

    그리스도교적으로 개입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하여 남북의 대화와 교류를

    더욱 확대하여 상호간에 신뢰와 친근함을 점차

    늘려가는 방법을 선호합니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영원한 적이 있을까요?

    복음적 형제애에 한계가 있을까요? 우리 남한

    교회는 가난한 북한 주민에게 야전병원이 될 수

    있을까요? 남한의 사제들에게서 가난한 북한

    동포의 냄새가 날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교는

    충분한 사목적(목회적) 지원을 남북한 주민에게

    제공할 수 있을까요? 사회교리의 정신으로

    끊임없이 기도하고 실천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응답하시리가 믿습니다. 아마도 21세기에 가톨릭

    교회의 기도와 사회적 실천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를 위한 작은 조각 강익중

  • 성·서·와·문·화12

    천도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김용휘 · 천도교한울연대 공동대표, 동학

    최근 한반도는 사드 배치 결정과 북한의 핵실험,

    미국의 선제타격론 등으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남북 간의 경색국면은 풀릴 줄을 모르고 있다. 현

    정부는 남북문제를 당사자 간의 대화로 풀려고

    하는 노력을 포기하고 있다. 대신 한미일 공조를

    강화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신냉전 체제로

    편입되는 길로 치달아 가고 있다. 우리는 122년 전

    청일 양국이 이권을 놓고 우리 땅을 유린했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또한 해방 후, 일본을 대신해

    우리가 분단된 어이없는 역사적 굴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지도자의 판단 착오와 권력에의

    집착은 종종 국민들을 몇십 년에 걸쳐 엄청난

    고통에 빠뜨리곤 했다. 그런데 지금 남북한

    지도자가 또다시 그 과오를 되풀이하려 하는 매우

    엄중한 시점이다.

    우리나라가 분단으로 인해 입은 피해와 손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도

    분단체제로 인해 비롯된 것이 적지 않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갈등은 물론, 세대갈등도 일정부분

    분단으로 야기된 측면이 있다. 정치도 종종

    정책대결보단 이념대결로 가버린다. 심지어 경제적

    평등의 주장, 양극화 해소 같은 의제들조차 종북적

    사고로 매도된다. 분단은 우리의 정신도 반쪽으로

    만들어 사고의 경직성을 초래해 왔다. 배제와

    이분법적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강요당함으로써

    다양한 상상력, 창의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차단해

    왔다 . 분단 전의 지식인들이 오히려 더

    국제적이었고 사고가 웅혼했다. 종종 공간의 차단은

    사고의 차단을 가져오기도 한다.

    때문에 우리 사회의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상식과 보편적 가치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것은 필요불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반도 분단은

    민족내부의 문제임과 동시에 국제문제이기도 하다.

    한반도 냉전구도의 해체를 통한 평화체제로의 전환,

    그리고 아시아평화공동체를 만들어 나가는 것은

    아시아 평화,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과정이다. 독일통일이 유럽통합과정의

    일 부 이 었 으 며 , 유 럽 역 사 발 전 과 정 의

    한부분이었듯이 한국통일은 아시아 역사발전

    과정의 한부분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은

    지금의 신냉전 체제를 종식시키고, 사람은 물론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공존공생하는 신문명을

    만드는 데 있어서도 매우 상징적인 세계사적

    사건일 수 있다.

    천도교는 분단으로 가장 큰 손실을 입은

    종단이기도 하다. 분단으로 90% 가까운 북쪽의

  • 성·서·와·문·화 13

    천도교인을 잃어버렸다. 해방공간에서 천도교는

    남북한 모두 청우당이라는 정당을 통해 통일국가

    수립을 위한 고투를 전개했다. 한때 북한 청우당은

    280만 명의 당원을 보유한 가장 큰 정당이었다.

    하지만 남쪽에선 이승만 정권의 탄압으로 1949년

    해체되고, 북한은 통일운동이 발각되면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한 뒤,

    존 속 은 시 켰 지 만

    사 실 상 노 동 당 의

    2 중 대 로 전 락 하 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북 한 은 청 우 당 이

    실체로서 존재한다.

    그 만 큼 북 한 에 서

    천 도 교 세 력 과 그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천도교는 북한과 직접

    팩스를 주고받을 수

    있는 공식채널을 가지고

    있다. 두 차례의 천도교 교령의 월북은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만큼 북한의

    천도교세력에 대한 기대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지금 천도교는 동학민족통일회를 중심으로

    청우당의 강령을 계승하여 나름의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동학·천도교의 통일방안은

    정신개벽과 인격의 함양에 바탕한 제도적 실천을

    중시함으로써 도덕문명의 민주국가를 이상으로

    삼 고 있 다 . 또 한 시 장 경 제 의 자 율 성 을

    인정하면서도 국가의 역할을 중시하고, 경쟁보다는

    조화와 협동의 원리를 강조하는 경제체제,

    토지공개념을 적용하여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의 한반도 현실에서 가장 시급한 일은

    종전선언과 함께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부가 지금과 같은 미국에만

    편승하는 정책에서 탈피하여 남북대화를 재개해야

    한다. 또한 개성공단을 다시 복원해서 남북경협을

    늘려나가야 한다. 그리고 한반도 안보 위기를

    오히려 가중시킬 사드

    배치는 즉각 철회해야

    한다.

    그 러 나 무 엇 보 다

    중 요 한 것 은

    통일한국의 비전과

    설계도를 준비하는

    일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완 전 히 새 로 운

    ‘ 사 회 경 제 모 델 ’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경제를 중심으로 새로운

    분권적 정치, 노동과 복지 문제, 생태와 여성,

    산업과 개발, 농업과 공동체, 에너지와 먹거리 문제

    등 모든 분야에서 생태적인 철학에 바탕한 구체적

    정책 안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새로운

    경제체제에 의해 점진적 통합이 될 때에만

    한반도의 통합과정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넘어서 모든 사람과 모든 생명이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는 ‘신문명운동’의 한 과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동학·천도교가 꿈꾸는

    개벽이기도 하다.

    이중섭 그림

  • 성·서·와·문·화14

    개신교의 평화론 - 한반도 평화의 맥락에서

    유경동 ·감신대 교수, 기독교윤리

    평화와 전쟁이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하다가 평화가 이겼다.

    왜냐하면 전쟁은 무장한 군사들만 거꾸러뜨렸지만, 평화는 비무장한 사람들마저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쟁은 공격당한 사람에게 가능한 한 반격의 기회를 주었지만, 평화는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저항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는 죽음을 수여했기 때문이다.

    위의 글은 어거스틴의 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이다. 평화와 전쟁 둘 중에 누가 더

    잔인하겠는가? 전쟁의 참상을 떠올려 볼 때 그

    답은 당연히 전쟁일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전쟁의 잔인함보다도 평화의 잔인함(?)에 대하여

    꼬집는다. 평화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잔혹함,

    평화라는 미사여구 뒤에 있는 보복, 평화라는

    제스처 뒤에 숨겨져 있는 칼, 그리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하나 되자”는 구호 뒤에 같은 편이 되지

    않으면 처절하게 복수하는 집단이기주의, 바로

    그것이 인간의 역사임을 어거스틴은 현실적으로

    간파한 것이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말하자면

    어거스틴의 관점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하여 본다.

    지금 한반도는 평화조약이 체결된 것이 아니라

    휴전의 상태이다. 다른 말로 하면, 평화와 휴전 중

    누가 더 잔인한가 경쟁하다가 휴전이 이겼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휴전은 말 그대로

    전쟁을 쉬고 있는 상태이다. 휴전의 이름으로

    우리는 끝도 모르는 군비경쟁에 시달리고 있으며,

    휴전의 이름으로 북한은 체제를 수호하는 일당

    독재국가를 정당화하며, 휴전의 이름으로 우리는

    평화를 유보하고 그냥 막연한 미래에 기대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여 볼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의 평화는 이중적인 과제를

    가진다. 하나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휴전’의 상태를

    직시하는 것과,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평화’를

    위하여 우리는 영적으로 최선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휴전’의 상태에서 이상주의에 치우쳐서 맹목적인

    평화를 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국가가 없이 종교의

  • 성·서·와·문·화 15

    자유는 허락될 수 없다. 국가의 안보와 국위가

    뒷받침 될 때, 개신교의 종교 활동은 보장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하여

    시민으로서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평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약속하여 주신 선물이다. 우리는 저 하나님의

    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천국백성이기에 이 땅에서

    그 평화의 선물을 세상에 선포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평화의 원천이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복음의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만일 현재 한반도의 휴전이 이 땅의 분단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중간과정이

    되려면 우리는 평화를 위하여 더 노력해야 할

    것이다. 폭력의 대안은 참된 평화가 맞다. 그러나 그

    전에 짚어야 할 것은 올바른 권력이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평화를 사랑하는 권력과 체계,

    평화를 수호하는 지도자와 정부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주신 시민의 권리를 올바르게

    수행하여야 한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건강한

    정치참여를 의미한다. 휴전과 평화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기

    위하여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사명임을 깨닫고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평화의 비둘기 1957년작 피카소

  • 성·서·와·문·화16

    조신권·연세대 명예교수, 영문학

    설렘과 떨림의 미학 -『행복한 청소부』를 읽고서 -

    모니카 페트(Monika Feth)라는 독일 작가가 쓴

    『행복한 청소부』(Der Schilderputzer)라는 얄팍한

    그림 동화책을 얼마 전에 읽었다. 동화라기보다

    소년들이 읽으면 좋을 교훈소설이라고 할 만한

    그런 책이다. 독일에 거리 표지판을 닦는 청소부

    부루퉁이라는 아저씨가 있었는데, 아침 7시가 되면

    항상 일하러 나갔고, 30분 후면 청소국에 도착해서

    파란색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파란색 고무장화를

    신고, 파란색 사다리, 파란색 물통, 파란색 솔과

    파란색 천을 받고 파란색 자전거를 타고 일하러

    출발한다. 파란색 청소부들이 자전거를 타고 떠나는

    모습은 파란 새들이 둥지를 떠나는 모습처럼

    보였다. 행복한 청소부 아저씨는 몇 년 동안 똑같은

    거리의 표지판을 청소하고 있었는데, 그 거리는

    작가와 음악가의 거리였다. 바흐 거리, 베토벤 거리,

    쇼팽 거리, 모차르트 거리, 헨델 거리, 글루크 거리,

    괴테 거리 등. 그는 이런 거리들에 있는 표지판을

    닦는 일을 했는데, 너무 반짝반짝 청소를 잘해서

    표지판이 늘 새것처럼 보여 다들 칭찬했고, 청소국

    국장도 “잘하십니다!”하고 칭찬을 해주었다.

    어느 날 한 소년과 어머니가 길을 가다가 소년이

    ‘글루크 거리’ 표지판을 보고는 글씨가 잘못

    되었다고 하는 말을 듣게 된다. 독일어로

    ‘글뤼크’가 ‘행복’이란 뜻의 단어인데, ‘글루크’의

    뜻을 모르는 아이는 표지판이 잘못되었다고 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글루크’가 음악가의 이름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청소부 아저씨는

    자기가 닦고 있는 표지판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는

    음악가와 작가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기로 마음먹고

    종이에다 음악가와 작가의 이름을 써놓고 벽에

    붙여 놓았다. 또한 레코드플레이어를 사서

    계속적으로 음악을 듣고 공연을 보고 하면서 늘

    설렘으로 음악가들을 공부하였고, 도서관에 가서

    작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알

    수 있을 때까지 읽었다. 이렇게 해서 표지판의

    주인공들과 친해진 아저씨는 표지판을 닦으며 그

    후부턴 음악가들의 노래를 부르거나, 작가들의 글을

    외우면서 청소를 했다.

    부루퉁 청소부아저씨는 유명한 음악가들의

    오페라에 나오는 시들을 읊조리고 아리아를

    흥얼거리는가 하면 자기 자신에게 음악과 문학에

    대해 강연을 하기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그의

    작업현장에는 늘 사람들이 몰려들어 노상 강연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급기야 여러 군데의

    대학에서 강연 요청까지 해오자 그는 이렇게

    거절했다. “나는 하루 종일 표지판을 닦는

    청소부입니다. 강연을 하는 건 오로지 내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서랍니다. 나는 교수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하고

  • 성·서·와·문·화 17

    싶습니다.” 책 말미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

    괴테 등 그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던 인물들의

    짤막한 이력까지가 곁들여져 있다. 나는 이

    동화책을 읽으면서 가슴이 설레고 감정 선이

    떨리는 걸 느꼈다.

    마찬가지로 황순원의 단편소설 “소나기” 같은

    작품들을 읽을 때도 내가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가슴이 설레고 떨렸다.

    “소나기”에 나오는 주인공 소년과 소녀는 어렵사리

    만나 무도 뽑아 먹고 허수아비를 흔들어 보기도

    하면서 논길을 달려 여러 가지 꽃들이 아우러진

    산에 닿자, 소년이 꽃묶음을 만들어 소녀에게

    건네준다. 마냥 즐거워하던 소녀가 비탈진 곳에 핀

    꽃을 꺾다가 무릎을 다친다. 소년은 부끄러움도

    잊은 채 생채기를 빨고 송진을 발라 주고 소녀가

    흉내 내지 못할 자기 혼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인 양

    소녀 앞에서 송아지를 타기도 하는데, 그때

    소나기가 내린다. 이렇게 시작된 그들의

    순애(純愛)는 얼마 동안 감동적으로 이어가다가

    소녀의 죽음으로 끝이 나고 만다. ‘소녀와 소년의

    만남’, ‘조약돌과 호두알로 은유되는 감정의 교류’,

    ‘소나기를 만나는 장면’, ‘소녀의 병세 악화’,

    그리고 ‘소녀의 죽음’ 등. 이러한 스토리 속에서

    우리는 소년이 소녀와의 만남과 이별을 통하여

    유년기를 벗어나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는 진통이 주는 순수와 순정을 느끼게

    되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여유와 전율까지 느끼게

    된다. 이것이 비극을 통해 얻는 예술적 쾌감, 곧

    카타르시스다.

    또한 나는 어느 비가 나리는 날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들으면서도 가슴이 설레고 떨리는 것을

    느꼈다. 쇼팽은 비오는 소리를 듣고 이 곡을

    작곡했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쇼팽이 6살 연상의

    여류소설가 조르주 상드와 동거하던 어느 겨울,

    건강 상 추운 파리의 겨울을 피해 따뜻한 지중해변,

    스페인의 남쪽 마요르카 섬으로 요양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원의 한쪽 방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조르주 상드는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을 했다.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점점 굵은 비로

    바뀌자 걱정되어 초조하게 기다리던 쇼팽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다. 그들이 돌아왔을 때

    쇼팽은 울면서 이 곡을 치고 있었다. 그것이 24개의

    전주곡 중 ‘빗방울 전주곡’이라는 이름이 붙은

    15번 전주곡이다. 이와 같이, 소설이나 시, 음악이나

    그림을 대할 때 아직도 가슴이 설레는 것은 내

    가슴의 피가 식지 않은 증좌인 듯하여 기쁘기

    한량없다. 설렘과 떨림은 중단되지 않고 끊임없이

    흐를 때 아름답다. 이렇게 감동의 파동이 계속

    유지되면 나뭇잎에 매달린 이슬방울 같은 것에도

    마음이 설레게 된다.

  • 성·서·와·문·화18

    기독교와 나라사랑 (4) 우남 이승만, 그는 독재자였을까? Ⅱ

    강근환 ·전 서울신대 총장, 한국교회사

    우남의 생애 제3기는 해방 후 조국에 귀국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싸우며 대한민국을 세우고

    대통령이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반공투쟁의

    시대이다. 우남은 1945년 10월 16일을 기하여

    꿈에도 그리던 조국에 귀환하였다. 조국은 해방과

    함께 뜻하지 않았던 38선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어 38선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하여 김일성을

    앞잡이로 공산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가 갈망하였던 신생 자유 독립국인 대한민국을

    세우기에는 그 앞에 벅찬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첫째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둘째는

    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장군이었다.

    12월에는 신탁통치 문제로 전국이 혼란에 휩쓸리자

    김구, 조소앙, 김성수 등과 협력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펼쳤고, 결국 반공,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의 남한 단독정부 국가수립을

    주장하였다(정읍선언). 1948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4 · 3 사 건 을 비 롯 하 여 이 를 방 해 하 려 는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이 여기저기에서 일어났으나

    유엔의 승인 하에 1948년 5월 10일 최초의

    국회의원 총선거가 유엔 감시단의 감시 하에

    남한에서 실시되었다. 이승만은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8월 25일을

    기하여 역사적인 대한민국 건국이 선포되었다. 임기

    중 이승만 대통령은 의무교육을 실시하여 국민의

    교육수준을 향상시켰고, 유상몰수 유상분배

    농지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농노적인 착취를

    당했던 농민들로 하여금 어엿한 지주의 신분으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 되게 하였다.

    또한 동해상에 평화선을 선포하여 국토를

    보호하였다.

    불행하게도 북한의 김일성이 소련의 스탈린과

    중공의 모택동의 동의와 지원을 받아 1950년

    6·25 남침을 감행하자 이에 맞서 미국을 위시한

    유엔군의 지원으로 잃었던 폐허의 땅을 되찾고

    북진하여 통일을 눈앞에 둔 찰나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였다.

    오랜 전투 끝에 이 대통령이 원하지 않았던 휴전이

    1953년 7월 27일 성립되자 이에 응하지 않고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북진을 계속 주장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와 같은 강력한 반공투쟁 정신을

    인정받아 끝내는 한미방위조약(1954.2.)을 미국과

    체결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안보를 담보하게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반공투쟁의 승리인가. 이로써

    오늘의 대한민국 안보와 번영의 기틀을 놓았던

    것이다.

  • 성·서·와·문·화 19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12년간이란 장기집권 끝에

    1960년 3·15정·부통령 부정선거로 인한

    4·19의거에 의하여 하야하게 되었다. 이

    3·15부정선거는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공분할

    일이다. 그런 이유로 이승만 대통령은 독재자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받아왔다고 본다. 하지만 첫째는

    이 대통령 본인에게 책임이 있다 하겠으나 그

    배후에는 연로한 대통령을 에워 싼 집권당

    자유당의 야욕이 대통령과 국민의 관계를 차단하고

    대신 권력행사를 자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대통령 이승만은

    결연히 최후의 선언을 하였다. “국민이 원한다면

    나는 대통령직을 사직하겠다.”(1960.4.26.)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빈손으로 경무대를

    떠났고, 4월 2 9일 미국 하와이로 부인

    프란체스카와 홀연히 떠났다. 5년 동안 호놀룰루에

    거처를 옮겨 다니며 가난한 생활 속에서 향수병에

    걸려 전전긍긍하다가 끝내는 요양원에서 1965년

    7월 1 9일 9 1세의 나이로 쓸쓸히 부인

    프란체스카만을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시신이 되어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조국 땅 한국에

    이송되어 7월 27일 정동감리교회에서 가족장으로

    영결식을 치르고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우남 이승만은 독재자였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그의 평생의 삶 전체를 뒤돌아 볼 때 그는

    반(反)독재자였다. 나는 그의 생애를 위에서 3기로

    나누어 보았지만, 1기를 더하여 4기로 본다. 그

    4기는 자유당과 이승만 대통령 자신의 독재정권에

    항거하고 싸운 반독재시대이다. 우남 이승만은

    자유당과 이승만 독재정권에 목숨을 내걸고

    용감하게 투쟁하였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외치는

    함성을 들었을 때 독재정권에 휩싸여 갇혀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이에 대하여 자신과 자신이

    거느리는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대결하는

    반독재적인 고독한 투쟁을 감행하였다. 그리하여

    종래는 주위의 장막에서 벗어나 자신의 참

    모습으로 돌아가 참 자아의 소리를 용감하게 소리

    높여 외쳤던 것이다. “국민이 원한다면 나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라고. 거기에는 아무런

    단서도 없고 조건도 없었다. 그는 그 후 곧바로

    경무대를 떠났다. 이런 예는 역사상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반독재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일까?

    우남 이승만의 삶은 전 생애를 통하여 줄기차게

    독재정권에 도전하여 싸운 삶이었다. 제1기는 이씨

    왕조의 무능한 왕권에 대하여, 제2기는 일제 강점기

    반일 독립항쟁으로 일제에 대하여, 제3기는 광복 후

    대한민국 시대에 반공투쟁으로 공산침략에 대하여,

    그리고 끝으로는 이승만 자유당 독재시대에 자신의

    자유당 독재정권에 대하여 분투하여 승리한 외로운

    승리자였다. 일찍이 한성감옥에서 예수를 믿고

    기독교로 개심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진정한

    ‘데모크레틱 휴머니스트’(Democratic Humanist)가

    아니었을까?

    평화의 비둘기 연작 시리즈 1961년작 피카소

  • 성·서·와·문·화20

    옛날에 한 스승이 있었는데 만나서 할 이야기도 따로

    없던 차에 불쑥 이런 말씀을 꺼내셨다. “선비 사(士) 위에

    놈 자(者)가 있고, 놈 자 위에 집 가(家)가 있다” 그러셨다.

    선비 ‘사’는 박사이고, 놈 ‘자’는 학자이고, 그 위에 집

    ‘가’가 있는데, 자기는 예술가인 고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런 뜻으로 들렸다. 그래서 내가 집 ‘가’

    위에는 사람 ‘인’(人)이 있다고 말을 받았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그 농담 속에는 진담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귀한 시간에 쓸데없는 장난을 할 이가 없기

    때문이다.

    학문의 어떤 분야에 대해서 깊이 잘 연구하면 박사라는

    학위를 받는다. 학위를 받고 더 깊이 더 넓게 연구를

    하면 학자라는 칭호를 얻게 되는 것 같다. 무슨 규칙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박사라 하면 전문가라는 느낌을

    받고, 학자라 하면 인격체라는 느낌을 받는데,

    예술가라는 말 속에는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사람 ‘인’자로 가면 존경의 대상으로 되어서

    도인(道人), 성인(聖人)이란 칭호를 쓰게 된다. 인도에

    테레사 수녀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로마 교황청에서

    성인으로 추대를 해서 흠숭의 대상으로 되었다. 그런데

    그는 박사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제일로

    높은 사람 ‘인’자를 얻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고 했지만

    그들에게 다 예술가라는 이름이 붙는 것이 아니다.

    자로는 잴 수 없지만 어떤 수준이 있어야 예술가라는

    칭호가 붙는 것 같다. 옛날 시(詩) 서(書) 화(畵)라 해서

    그림보다 글씨를 높이 봤고, 글씨 위에 시를 더 높은

    본향(本鄕)의 빛을 따라서

    최종태 ·서울대 명예교수, 조각

    데로 본 것이다. 그림(畵)은 복잡한 일을 하는 것이라서

    높은 뜻을 표현하기가 어렵고, 글씨(書)는 단순해서 깊은

    의미를 담을 수 있으며, 시(詩)는 상징적인 언어로 원대한

    진리를 표현할 수 있다 해서 그랬는지 모른다.

    최현배하면 한글학자이고, 이중섭하면 화가이고,

    김소월하면 시인이다. 김소월이 시인이라 해서 가장

    높으냐하면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학자

    화가 시인 등 그런 칭호가 붙어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것인데, 그 또한 무슨 때문일까. 그들의 삶이 훌륭했기에

    그럴까. 저 위에 높이 떠 있는 좋은 모델로 오래 오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나선 것도

    아니고 부지불식간에 그렇게 되었다. 세월이 가면 결국엔

    가치 있는 것은 걸러져서 가치로 남는다. 가치 있는 삶을

    살았기에 그것이 나중에 드러나는 것이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누가 꾸며서 될 일은 아닐 것이다. “선비

    ‘사’ 위에 놈 ‘자’, 놈 ‘자’ 위에 집 ‘가’다.” 하신

    스승의 농담이 가치에 대한 절절한 어떤 메아리 같이 내

    가슴에서 울리고 있다. 지나간 한 평생 내가 어디를

    헤매고 있었는지 묻는다. 돌이켜 봐도 다 부질없다.

    오늘이라는 참으로 귀한 시간이 눈앞을 지나가고 있을

    뿐이다. 허송세월 팔십 평생은 일장춘몽이었다.

    小年易老學難成

    소년은 쉽게 늙고 배워서 이룸은 어렵다

    一寸光陰不可輕

    잠깐의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

  • 성·서·와·문·화 21

    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에 봄풀이 단꿈을 깨기도 전에

    階前梧葉己秋聲

    뜰앞의 오동나무는 가을 소리를 내 누나

    주자(송나라)

    옛날에 또 한 스승이 있었다. 아무 볼일 없이 댁의

    초인종을 눌렀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해서

    방에 앉았는데, 불쑥 한 말씀을 하셨다. “신(神)과의

    대화가 아닌가.” 그러셨다. 나는 그만 혼비백산했다. 그

    뒤에 무슨 말이 됐는지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그 뒤

    삼십 년이 지나오도록 나는 그 말뜻을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그때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기에

    천만다행이지 무슨 말씀이냐고 묻기라도 했으면 낭패일

    뻔 했다. 내가 새들의 말도 못 알아듣는데 한 예술가의

    저 깊은 데서 나오는 외마디 소리를 어찌 알아듣는단

    말인가. 그림의 언어도 그렇다. 그 단어들은 도저히

    우리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아주 특별난 어법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런 그림의 말을 사람들이

    알아듣는데,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해 불가능한

    그림언어를 가지고서 화가들은 유창한 화면(畫面)을 만들어 내고 있으니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모든 학문과 예술은 연구의 정도에 따라서 그 높이를

    달리한다. 경우 경우에 따라서 그 깊이를 달리한다. 그

    연구의 정도에 따라서 층계가 생긴다는 것이다. 높은

    예술가가 있고 낮은 예술가가 있다. 훌륭한 예술가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미켈란젤로와 피카소처럼

    모차르트와 베토벤처럼 특출한 예술가가 있다. 무엇이

    다르기에 그렇게 긴 역사에서 그런 사람으로 인정받는

    것일까. 단테를 말하고 톨스토이와 괴테 이야기를 한다.

    중국에는 도연명이 있고 두보가 있다. 소동파와 같이

    학문과 예술을 겸비한 인물들도 있는데, 오백년 천년이

    지났는데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보는 것이다.

    스님 현각이 말했던가, 종교방송 텔레비전에서 본

    일이다. 우리의 두뇌에는 좌뇌와 우뇌가 있는데, 좌뇌가

    활동을 중단하면 이성으로 볼 수 없는 어떤 세계가

    보인다는 것이다. 우뇌로 보는 세계는 이 세상 언어를

    가지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보았는데 이 세상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름

    하여 지복직관(至福直觀)의 세계를 본다는 것이었다.

    빛이 있고 그 빛은 동시에 사랑이며 생명이며 기쁨이며

    시간으로부터 해방된 특별난 공간이라는 것이다. 그림은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일이다. 그림은 아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 일이다.

    좌뇌 활동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우뇌가 활동해야

    된다는 말이다.

    앞서 한 스승이 이른 말씀, 집 ‘가’자가 높다하신 그

    유머와 또 한 스승이 하신 말씀 “신과의 대화가 아닌가.”

    하는 그 독백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예술가는 알게

    모르게 모두 본향(本鄕)의 빛을 그리워한다. 예술가는 그

    빛의 파동에 이끌려 한없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존재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아 하느님!’ 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가 있다.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한다. 하루 한 발짝씩만

    올라간다면 일 년이면 삼 백 육십 발짝이고 몇 십 년을

    올라가면 까마득한 하늘 높은 곳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높은 데 끝까지 올라가서 거기서 진일보 할 수 있다면

    이성 활동의 경계를 넘어서 우뇌가 열어주는 찬란한

    광명의 공간을 볼 것이다.

    예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일까. 초월의 길인가, 치유의

    길인가. 예술을 통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 것일까.

    귀뚜라미 우는 저녁에 잠시 붓을 내려놓는다. 목이 말라

    내일은 또 저 산 속에 샘물을 얻으러 가야지. 맑은 물은

    대개 깊은 숲속에 있었다.

    작가: 장욱진 제목: 나무와 까치

    (Tree and a Magpie) 재료: 종이에 먹

    크기: 38.5x27.5년도: 미상

  • 성·서·와·문·화22

    17세기 중반, 식민지 보스턴의 교도소 앞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다. 문이 열리면서

    젊은 여인이 걸어 나온다.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헤스터 프린이라는 이 여인은 남편과 헤어져 있는

    사이 불의의 아이를 낳았기로 매사추세츠 주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질 것인데, 재판관들의 자비로 세

    시간 동안 처형대 위에 서 있게 된 것이란다. 일생을

    가슴에 간통의 머리글자 “A”를 붉게 새겨 붙이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도 했다. 지금 헤스터의 한 쪽

    가슴에는 선홍빛 천에 금실로 수놓은 “A”가 여름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다른 쪽 가슴에 안긴 아기는

    차라리 가여운 모습으로 비치는 것이었다.

    무리 중에 낯선 중늙은이가 인디언 추장과 함께 서

    있다. 그는 헤스터의 남편 로저 칠링워드. 오늘 막

    보스턴에 도착한 것이다. 헤스터도 군중들 틈에서

    남편의 모습을 본다. 나이 많은 목사 윌슨과 젊은

    목사 딤즈데일이 번갈아가며 죄지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자백하라고 다그치지만, 헤스터는

    거부한다. 그러나 감방으로 돌아온 헤스터는

    흥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지사의 명령으로

    의사의 치료를 받게 하는데, 나타난 의사는 남편

    로저 칠링워드였다.

    영국에서 나이 지긋한 한 학자가 보스턴으로

    이주할 양으로 젊은 아내 헤스터를 먼저 보냈지만,

    자신은 뜻하지 않은 사정으로 2년 후에야 보스턴에

    올 수 있었는데, 바로 그날 처형대에 서 있는 아내를

    보게 된 것이다. 분노와 증오에 불타오른 남편은

    집요하게 아이 아버지의 이름을 추궁하지만,

    소용없는 노릇이었다.

    7년의 세월이 흐른다. 그 사이 사생아 펄은 예쁘게

    자랐고, 이웃을 향한 헤스터의 선행은 그녀의

    가슴에 붙어있는 주홍 글씨 “A”가 어느덧

    “Adultery”가 아니라 “Angel”을 의미하게 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칠링워드는 노회한 웃음을 띠우며 말한다.

    “그 사나이는 어차피 내 손안에 들어오고 말 것.

    나의 복수는 죽이거나 사회로부터 매장하는 따위가

    아니라, 영혼의 보복이 될 것.”이라고.

    노인이 딤즈데일 목사와 알게 된다. 목사의 덕망은

    사람들의 존경을 모으고 있는 데도, 젊은 목사의

    몸이 야위어 가는 것이 안타까워 교인들이

    칠링워드를 주치의로 모셔온 것이다. 칠링워드는

    딤즈데일 목사야 말로 헤스터의 간통 상대라는

    것을 직감한다. 그리고 음험한 수단으로 괴롭히기

    시작했다.

    문학에 비친 복음 (5)

    이상범 ·칼럼니스트, 신학

  • 성·서·와·문·화 23

    어느 날 밤, 헤스터가 펄과 함께 지사의 집에서

    바느질 주문을 받아오는 길에 딤즈데일과 마주치게

    되어 셋이 손을 잡고 처형대 위에 올라서는데, 그

    장면을 칠링워드가 목격하게 된다. 의사인 그도

    마침 지사의 집에 왕진을 다녀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후 칠링워드는 더욱 집요하게 젊은

    목사를 괴롭히는 것이었다. 위험을 감지한 헤스터가

    전도사의 집에서 돌아오는 젊은 목사를 숲속에서

    기다렸다 만나서는 둘이 유럽으로 도망갈 것을

    의논한다. 그러나 낌새를 챈 칠링워드가 미리 그

    배의 표를 매수해버렸다.

    딤즈데일은 새 지사가 부임하는 날, 당선축하

    설교를 마친 후 공중 앞에서 일체의 죄를

    고백하고는 숨을 거둔다. 딤즈데일의 고뇌를 즐기며

    그 고뇌가 한없이 연장되기만을 바라던 노회한

    악마 칠링워드는 허탈해한다. 얼마 후 그도 세상을

    하직한다. 막대한 유산을 헤스터 모녀에게

    물려주고. 혼자 남은 헤스터는 봉사활동을

    이어간다.

    청교도 정신이 인간의 삶을 지배했던 미국

    식민지에서, 남녀의 삼각관계만큼 좋은 소설 소재는

    없었을 것이다. 목사의 신앙적 고투와 헤스터의

    인간적 성장을 조화시키면서, 반대편에 복수 일념에

    스스로를 갉아 먹어가는 노학자의 집념을 대비시킨

    수법은 놀라웠으리라. 퓨리턴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퓨리터니즘을 드높이려는 이중적 의도가 공감을

    얻어냈을 지도 모른다.

    청교도 사회의 성문화된 도덕률은 에서

    현실적이고 자연스러운 애정의 도전을 받는다. 죄를

    범한 남녀는 그들의 시련을 통해서 순화되지만, 다른

    한편 현실과 맞섰기로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문법과 사회분위기에 올라타고

    독사 같은 사디즘을 만족시키려 했던 칠링워드는

    비극으로도 가릴 수 없는 결말을 맞게 한다.

    호든(Nathaniel Hawthorne)은 매사추세츠 세일럼의

    청교도 가문에서 태어난다. 선조가 그 악명 높은

    세일럼 청교도들의 마녀재판에 깊이 개입했었기에,

    작가는 세일럼 청교도의 역사와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조상의 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 옛날 청교도에게 마녀들은

    용서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세월이 흐른 지금,

    작가에게 있어, 조상들이 마녀들에게 입힌 해악은

    떨쳐버릴 수 없는 심리적 강박관념으로 다가왔을

    지도 모른다.

  • 성·서·와·문·화24

    BC와 유대인

    김유동 ·전 문화일보 편집위원

    지난해, 즉 2015년 크리스마스 때,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전국민을 향해 ‘해피 할러데이!’ 라고 인사를 했다. 여느

    때 같았으면 ‘메리 크리스마스!’였을 텐데 말이다.

    미국에서 어쩌다 어린이용 잡지 National Geographic을

    본 일이 있는데, 여기에는 늘 보던 BC 대신에 BCE를

    사용하고 있었다. BC는 물론 Before Christ이고 BCE란

    Before the Common Era다. 대통령의 인사와 BCE의

    공통점은 Christ라는 말을 회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B C 를 처 음 으 로 창 시 한 것 은 , 예 수 회 수 사

    페타비우스이고, BC가 유럽에서 일반화한 것은

    18세기라고 한다. BC가 쓰인 역사는 300 년이라는

    이야기다.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이 나라에서 Christ라는

    말을 회피할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나는 Christ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으면서

    미국에서 대단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유대인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단정적으로 유대인이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입김이

    있었거나, 이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미국 정치자금에서 큰 몫을 차지하며

    그들의 힘을 여지없이 과시하고 있다. 민주당의 정치

    자금 전체의 약 60%, 유대감이 덜한 공화당에도 35%가

    넘는 액수가 유대인에게서 나온단다. 미국의 전체 인구

    중에서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2% 미만에 지나지

    않지만, 미국의 100대 거부 중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32%에 이른다는 것이다.

    1954년에 창설된 AIPAC(The American Israel Public

    Affairs Committee)는 유대인들의 ‘최강의 로비 단체’ 중

    하나인데, ‘연방 의원의 70~80%는 AIPAC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 준다’는 말도 있다. AIPAC 직원

    대다수는 전문 분야의 고도한 정보도 제공하고, 연설문

    원고 작성, 법안 작성과 의회 전술의 조언까지 해 주고

    있단다. 굵직굵직한 자리에도 유대인들이 많이 올랐으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도 유대인의 손아귀에 있다.

    이들의 막강한 힘의 위력을 보여 주는 실례를 보도록

    하나 소개한다. 일본 文藝春秋사에서 나오는 월간지

    에 “나치 가스실은 없었다”라는 기사가

    실린 일이 있다. 미국 LA에 있는 유대계 인권 단체

    SWC(Simon Wiesenthal Center)에서는 이에 항의, 이

    잡지를 폐간으로 몰아넣는 등 세계의 잘못된 기사들도

    감 시 한 다 . S W C 가 작 용 해 서 폴 크 스 바 겐 ,

    마이크로소프트, 필립 모리스 같은 굵직굵직한

    광고주들에게 광고 싣기를 거부시킬 수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이 대단하다. 이스라엘에 불리한 언동을 하는 미

    정치인을 선거 때 막대한 광고료를 들여가며

    낙선시키기도 한다.

    미국에서 색다른 느낌을 주는 차림새의 유대인들을 본

    일이 있다. 이들은 검고 긴 의상 밑에 탈리스(tallith)를

    입어 전체적으로 검은 느낌을 주며 젊은 나이에 수염도

    기르고 양쪽 귀 앞으로 기다랗고 꼬불꼬불한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유대인 초정통파

    사람이란다. 식사 때도 토라의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외국인과는 결혼하지 않으며, 예배 볼 때, 우리나라

    개 화 기 의 교 회 처 럼 남 녀 석 이 따 로 있 다 고

  • 성·서·와·문·화 25

    한다(정말일까?). 주일에 자동차를 타고 돌아다닌다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다. 뿐만 아니라 개신교의 한

    갈래인 미국의 Amish들처럼 이들은 문명의 이기를

    기피한다. 즉 자동차 대신에 말과 마차를 이용한다는

    식이다.

    초정통파가 아닌 ‘정통파’에 대해서는 우리도 잘 알고

    있으므로 설명이 필요 없겠는데, 이 정통파에서는

    초정통파와는 달리 수염에 대해 관대하단다. 그리고

    외국인과의 결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유대인 사회에는 그 반대로 파격적인 개혁파라는 것도

    있다. 라비 카우프만 콜러(Kaufmann Kohler)가 기초한

    피츠버그 강령은, ‘근대 문명의 사고와 습관에 어울리지

    않는’ 토라의 법을 모두 부인했는데, 그것은 1937년부터

    개혁파 유대교의 표준 교의가 된다. 즉, 식사, 청정,

    의복에 관한 낡은 규정을 거부, 유대인은 ‘이제 민족이

    아니라, 종교 공동체’라고 단언한 것이다. 그리고 부활과

    천국과 지옥을 부정하고, 시온으로의 귀환을 포기했으며,

    ‘메시아니즘은 근대 사회를 향한 진실과 정의, 공정을

    추구하는 노력’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이를 향해 다른

    종교와 선량한 사람들과 협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넓고도 넓은 미국에서 현실적으로 살아가면서

    신앙과 생활을 양립시키고 싶은 사람들은 토라와

    실생활을 현실적으로 절충하며 산다. 절충파라는 것이다.

    이들은 토라를 가능한 한 지키면서 삶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각 가정에서는 음식물의 계율을

    제대로 지키지만, 사회 활동을 하는 경우에는 이를

    어기는 일도 묵인한다든지, 율법에서 일하기를 금하는

    ‘안식일’에 자동차 운행하는 일도 인정한다는 식이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의 영향으로,

    ‘유대인’ 하면 으레 ‘돈만 밝히는 자린고비’를 떠올리게

    마련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예화를 소개한다. 미국의

    섬유 메이커 몰덴 밀즈사가 1995년 말 화재를 당했다.

    사주인 아론 페어스타인은, 대책도 없이 지낼 3000명의

    히스패닉계 종업원들에게 3개월 후의 조업 재개를

    약속하면서, 그 3개월 동안의 건강 보험, 급여, 보너스의

    부분 지급을 보장해 주었다. 이 일을 놓고 모든 미디어가

    ‘90년대의 성자’라고 칭송했다. 그는 정통파

    유대교도였는데, ‘도덕적 혼돈이 닥쳤을 때, 사람으로서

    어찌해야 할 것인지 최선을 다하라’는 옛 현자 ‘힐렐’의

    말을 떠올렸다고 한다. 이 말은 우리의 정치인, 경제인,

    법조인 등에게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미국의 옐로스톤 국립공원 옆에는 또 다른 명소인 Grand

    Teton이 있다. 널따란 벌판을 가로질러 가면, 기막힌 절경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눈앞 호수 건너에

    알프스처럼 흰 눈을 인 높은 산봉우리들이 고고하게

    늘어서 있는 광경을 직접 바라볼 수 있다. 이 절경은

    호수에 비치는 모습 때문에 좀 더 신비스럽게 강조된다.

    이 지역 일대는 유대인인 록펠러 집안의 것이었는데,

    ‘국립공원으로 삼아 준다면’이라는 조건 하나로 나라에

    헌납했고, 미 정부에서는 감사의 뜻으로 이 곳으로

    통하는 도로 이름을 ‘록펠러 2세 도로’로 붙였다.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지내고

    있지만, 화해를 위한 시도도 있다는 사례를 일본 잡지

    文藝春秋(04년 2월호)에 실린 秋島百合子의 글을

    간추려서 소개한다.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중간에

    이스라엘 국적의 유대인과 팔레스타인 사람이 공존하는

    마을 ‘네베 샬롬/와하트 아 살람’이 있다. 이사야서에서

    취한 ‘평화의 오아시스’라는 뜻인데 히브리어와

    아랍어를 병기해 놓은 것이다. 1972년 성 도미니코회

    수도승이 창설한 것으로, 현재 47가구, 약 200명이 살고

    있고, 140가구까지 확대할 계획이다. 이들은 평화 공존을

    갈망하는 리버럴한 사람들로서, 과반수가 마을 바깥에

    직장을 가지고 있으며, 의사 같은 전문직과 화이트

    컬러의 중산 계급이 많다. ‘유대인 + 아랍인’ 부부도 한

    쌍 있다.

    이 곳에서 힘을 쏟고 있는 것은 교육이다. 유대인과

    아랍인 어린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공부하는데,

    히브리어, 아랍어 등으로 수업을 한다. 300명 중 9할은

    근린 유대인 사회, 아랍인 사회에서 통학하고 있다. 대학,

    법률가 등과 협력, ‘평화 학교’도 열고 있다고 한다.

    평화를 위한 이 노력이 1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는지를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러한 시도가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큰 감동을 주지 않는가.

  • 성·서·와·문·화26

    영국의 음악은 프랑스나 독일과 같은 유럽대륙의

    음악적 주류 국가들에 비해 대체로 가볍고 밝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국은 섬나라이다. 유럽이면서

    해협을 사이에 두고 대륙과 떨어져있다. 이 같은

    지정학적 조건은 영국의 독특한 음악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대륙의 음악적 대세가 논리적

    짜임새의 다성 음악이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중세

    즉 14,15세기의 영국 음악은 모든 파트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화성적 성향을 일찌감치 보여준다.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지만 서양음악은 각

    성부가 독립성을 가지고 진행하는 대위법과 다수의

    성부가 연합하여 하나의 화음을 형성하는 화성법이

    날줄과 씨줄을 이루며 발전해 온 음악이다.

    이 중 화성적인 음악의 짜임새를 일찌감치 구사해

    왔던 고장이 영국이다. 역사 전반을 통해 정치,

    경제적으로 만만치 않은 힘을 구사해오던 이

    나라는 15세기 초반까지는 이렇다 할 대륙과의

    교류가 없이 독자적인 음악 전통을 이어갔었다. 각

    지역의 민요와 춤에 뿌리를 둔 음악재료들이 중세

    영국 음악의 내용을 만들었다. 그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장르가 캐롤(carol)이다. 캐롤은 오늘날 마치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노래처럼 이해되고 있지만

    원래 영국의 춤곡 혹은 춤과 함께 부르는 노래를

    지칭한다. 더불어 독창과 합창, 혹은 몇 개의 성부가

    함께 부르는 종교적 내용을 다룬 시에 붙은 노래의

    명칭이기도 하다. 연중 내내 불렸지만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가사를 담아 성탄 시즌에도 불렸고

    양적으로 풍성했던 성탄 캐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캐롤의 의미를 전적으로 대표하게 된 것이다.

    영국 중세 캐롤은 오늘날 우리의 귀에 매우 친숙한

    장조와 단조의 울림과 유사해서 유럽대륙의 복잡한

    다성 음악과는 사뭇 달랐다.

    존 던스터블(John Dunstable 1385~1453)은 이

    시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이다. 그는 15세기

    전반 영국과 유럽대륙이 상호 교류하며 영향을

    주 고 받 는 데 결 정 적 으 로 기 여 한 다 .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전쟁이었다. 14세기 전반부터 15세기에 걸쳐

    지속된 백년전쟁은 대륙과 영국의 음악적 교류를

    만들어냈다. 던스터블은 모시던 공작의 프랑스

    원정에 동반한다. 참전 영주와 그 휘하 군대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음악 참모였던 셈이다. 그는

    프랑스에 수년 간 주둔하는 동안 대륙의 정교한

    음악조직 방식을 배우고 또 자국의 조화롭고

    간결한 성격의 음악 어법을 소개하는 일도 했다.

    모테트와 같이 구조가 중시되던 다성 음악 이외의

    가능성에는 소홀했던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던스터블의 영국 음악에 크게 고무된다. 대륙인의

    영국과 대륙의 교감

    김순배 ·한세대 겸임교수, 음악

  • 성·서·와·문·화 27

    귀에 그것은 유쾌하고 기쁨에 가득 찬 음악이었다.

    던스터블 역시 보다 체계적인 음악 구성방식을 익혀

    영국음악의 즉각성에 대륙풍의 진지함을 덧입힌다.

    던스터블의 대표작이며 15세기 영국 음악을

    대표하는 노래는 성서의 아가서 7장의 내용을

    텍스트로 한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Quam Pulcra es)이다. 세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이

    곡의 유연한 흐름과 가사의 분위기에 맞춘 적절한

    선율 굴곡,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성부들은 중세

    영국 음악의 빼어난 성과로 전해져 온다.

    영국과 대륙 사이 상호 교류는 르네상스 시대를

    앞둔 음악사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일으킨다.

    15세기 중반이 되면 대륙의 음악적 주도권은

    지금의 프랑스 북부와 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을

    포함하는 브루고뉴 또는 버건디 지방의

    작곡가들에게 그 주도권이 넘어간다. 프랑스 국왕의

    통치하에 있었지만 브루고뉴 지방의 영주들은

    상당한 자율권과 독립성을 보유하여 독자적인 문화

    예술 정책을 구사할 수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역량과 수준에 따라 그 지역, 그 나라의

    예술적 기상도가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은 브루고뉴

    지역의 역사적 예를 보아도 알 수 있다. 당시 그

    지역은 ‘착한 필립’ (Philip the Good)이라는 음악에

    조예가 깊은 영주 치하에 있었다. 그의 배려와 후원

    덕으로 기라성 같은 유럽지역의 작곡가들이

    몰려들어 브루고뉴 악파의 파워를 형성한다. 영국의

    던스터블은 이 지역에까지 들어와 이 악파의

    대표자인 기욤 뒤파이(Dufay)와 긴밀한 음악적

    유대관계를 맺었고 향후 음악사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드는 르네상스 음악의 기반을 탄탄히 닦아

    주었다.

  • 성·서·와·문·화28

    몽골 땅에 살던 투르크/몽골계의 부족들이

    서진(西進)함에 따라 동방교회는 중앙아시아에서

    5세기 말쯤 이들과 처음 접촉하게 되었다. 그 뒤

    위구르족, 또 644년, 781년 투르크족 일부가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1007년 동방교회 선교사들이

    케레이트 부족(지금 울란바타르를 거점으로 몽골

    중부와 고비 사막까지를 차지하였던 당시 최대의

    몽골 부족)을 집단 개종시켰다. 몽골 땅의 부족들

    대부분은 텡그리(하늘의 신)와 자연현상을 섬기는

    샤머니즘에 빠져 있었고 무당(qam)의 역할을

    중시하는 현세적인 삶을 살았기에, 내세를 강렬히

    지향하는 기독교 같은 다른 종교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이었다. 몽골의 칸들은 신앙적이기보다는

    현세적이었으므로 어느 종교를 불문하고 통치에

    도움을 주는 종교라면 이를 수용하였다.

    1254년 대칸 앞에서 벌였던 무당, 불승, 무슬림

    지도자, 도사, 동방교회 지도자, 또 프란체스코회

    수사까지 참석한 종교토론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성격의 종교모임이었고, 몽골 통치자들의 종교관을

    보여주는 본보기이다. 동방교회 또한 오랜

    선교경험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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