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l Categories
Home > Documents >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Date post: 09-Sep-2021
Category:
Upload: others
View: 0 times
Download: 0 times
Share this document with a friend
16
Transcript
Page 1: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Page 2: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Page 3: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조용필

가수는 여건이고 상황이고 다 떠나서 ‘튼튼한 나 지신’이 있어야 한다. 지금은 고되더라도

10년 후에 어떤 위치에 있느냐를 항상 생각해야 한다. 주위 사람이나 팬들은 항상 떠나게

되어 있다. 그 팬들과 오래 가려면 ‘절대 강자’라야 가능하다.

1950_경기 화성, 경동고 1968_록그룹 ‘애트킨스’ 결성 1971_김트리오(김대환 조용필 이남이)

결성. 경음악 앨범 발표 1972_’조용필과 그림자’ 결성, 첫 앨범 <사랑의 자장가> 발표 1976_’

돌아와요 부산항에’ 발표 1980_공식 1집 앨범 (‘창 밖의 여자’ ’단발머리’) 발표 1982_4집

앨범(‘못 찾겠다 꾀꼬리’ ‘생명’) 발표 1985_ 8집 앨범 (‘허공’)발표 1991_13집 앨범

(‘꿈’) 발표 1998 갤럽 조사, 건국 이후 최고가수 선정 2003_데뷔 35주년 기념 콘서트, 18집

앨범 <Over The Rainbow> 발표

Page 4: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조용필 없이 우리의 현대 대중가요를 논할 수 없다. 그가 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혜성처럼

출현해 1980년대 가요계를 평정하면서 가요의 흐름, 양식, 녹음수준 그리고 산업규모 등 한국음

악의 모든 것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서구 음악계의 역사가 비틀스를 기점으로 앞뒤로 분리되듯이

우리 가요도 ‘조용필 이전’과 ‘조용필 이후’ 로 역사가 갈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는 실로

한국의 현대 대중가요 역사를 새로이 썼다.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그의 존재가 갖는 의미를 한두 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것 하나

는 분명하다. 오로지 조용필의 노래만이 ‘초등학교 교실과 노인정에서 함께 울려 퍼졌다’는 사실

이다. 그가 전성기의 화염을 내뿜던 1980년대 초반에 어린아이들은 너도나도 ‘단발머리’의 가성을

흉내냈고, 20대들은 ‘고추잠자리’의 록리듬에 넋을 잃었으며, 중장년들은 모임을 가질 때면 ‘돌아

와요 부산항에’를 열창했고, 할머니들은 ‘한오백년’에 어깨장단을 맞췄다. 가요계 인사들은 그래서

“행여 조용필처럼 노래잘하는 가수가 등장할수는있다. 그러나 앞으로 그처럼 전국민을 팬으로 하

는 가수가 나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자신의 노래가 모든 세대와 계층의 사

람들에게 불려지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음악가의 꿈이다.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저울추를 맞추려고 도

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채 2인자 군群에 머물러야했다. 그들뿐 아니라 한참 후배인 요즘 가수

들의 꿈 역시 ‘조용필처럼 되는 것’이다. 민중가수 출신인 안치환도 실은 ‘슈퍼스타 조용필’처럼

되고 싶어했으며 신해철은 심지어 그를 ‘조용필장군님’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서는 1990년대 가요

계의 별 서태지의 입장도 다르지 않다.

세대와 계층의 완전 장악외에 ‘장르에 대한 왕성한 식욕’도 조용필이 만들어놓은 경이 가운데 하

나일 것이다. 대체로 트로트 가수들은 트로트 부분을 주시하고, 록밴드는 주로 록의 흐름에 민감

하고, 댄스가수들은 댄스음악 쪽만을 바라보게 되어있다. 하지만 조용필의 경우는 전성기 시절 신

보를 내놓을 적마다 모든 장르의 음악인들이 ‘이번에는 그가 어떤 음악을 만들었을까?’ 하고 촉각

을 곤두세우곤 했다.

영원한 국민가수이자 독재자로 한국 가요계를 호령한 지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지금 그

는 전성기에 있지 않다. 앨범을 발표해 신세대 스타들과 순위와 판매량 경쟁을 하는 입장은 전혀

아니다. 하지만 공연부분에서만큼은 왕년의 가수임을 거부하며, 아직도 가요계의 제왕으로 군림하

고 있다. 그의 이름은 불변의 ‘현재진행형’이다.

조용필은 두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 번은 2002년 12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연말 정기공

연을 준비할 때였고 다른 한 번은 2003년 8월 잠실 올림픽 메인 스타디움에서 거행된 데뷔 35주

년 공연을 앞두고였다. 두 번 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공연에 쏠려있었다. 음반보다는 공연으로 음

악계의 중심이 이동하는 시점을 의식해, “이 참에 공연을 사회적 이슈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욕을

Page 5: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보였다. 그는 예상보다 달변이었고 어떤 질문에도 긴장하거나 곤란한 표정 없이 여유 있게 인터뷰

에 응했다. 대화를 풀어 가는 방식 또한 과연 1인자다운 풍모였다.

조용필은 대화할 때 남의 말을 진지하게 경청하면서도 말도 적지 않게 건네는 편이라서 겉보기에

는 ‘충분히 주고받는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렇다고 ‘내면생활’을 양껏 털어놓는 스타일은 아니다.

특히 예로부터 구체적인 숫자나 타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인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창때는 그래서 이런 말도 돌았다. “조용필은 입에 자물쇠를 채우고 그 열쇠는 가슴에 깊이 보관

한 사람이다!” 그런 면모가 최고 스타의 위치가 가져오는 부담감, 이를테면 자칫 조용필의 이름으

로 한 얘기가 본의 아니게 큰 파장을 일으킬 소지가 무궁무진 했기 때문임은 말할 것도 없다. 조

용필은 그런 것이 자신의 원래 성격에도 기인한다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 때문인지 내 얘기는 부풀려진 게 많아요. 다들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면 난 놔둬요. 특별히 나

쁜 게 아니라면. 그러나 나중 들어보면 어처구니없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Page 6: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조용필은 당대 최고 스타였기 때문에 언제나 무수한 소문과 억측들이 난무했다. 누구 말대로 조용

필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닌 ‘보통명사’가 된 현실에서 그에 관한 얘기들은 세인들이 입에 여

과없이 마구 올랐다. 그리하여 조용필 당사자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인물과 자취들이 보통명

사가 됐을 정도였다. 80년대 사람들은 ‘부산항’ ‘위대한탄생’ ‘창밖의여자’ ‘오빠부대’ ‘토요일 토요

일은 즐거워’ ‘가수왕’ ‘이주일’ 등을 상식처럼 끼고 살았다.그래서 전성기 시절에 조용필의 또 다

른 이름은 ‘화젯거리’ 였다.

<1집>(1980)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당시 사상 초유의 150

만장 판매를 기록하며 우리 대중가요사에 새 획을 긋게 된다.

Page 7: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80년대 조용필현상의 밑거름은 그의 증언대로 당시 70년대 중후반 트로트의 새물결인 이른바 ‘트

로트고고’였다. 그 개척자 또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정’의 조용필이었다. 1976년 이 곡들이 크

게 히트하면서 경기 파주 장파리와 용주골 그리고 이태원의 야간업소를 전전하며 밴드생활을 하

던 무명시절은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76년과 77년을 휘몰아치던 성공도 잠시, 곧바로 터진 대마초사건의 충격이 순탄 할것 같

던 그의 행보를 급정거시켜 버렸다. 공식적인 음반활동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그 공백기에 그는

국악의 판소리 창법을 사사받는 등 한층 보컬을 연마했고 마침내 80년 신년벽두에 그의 백업밴드

이름처럼 또 한 차례의 위대한 탄생을 이뤄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이제 역사가 됐다.

돌아온 조용필의 음악은 록, 발라드, 뉴웨이브, 소올,민요,동요 등 마치 장르의 백화점이라고 할

만큼 다채로웠다. 특히 ‘한오백년’ ‘황진이’ 같은 국악풍 노래는 당대의 절창切創이란 찬사를 받았

으며, 젊은 세대는 ‘고추잠자리’ ‘자존심’ 등의 전형적인 록에 전폭적인 갈채를 보냈다. 가요사상

최초의 오빠부대를 형성한 그의 최대 응원군인 10대들은 ‘못 찾겠다 꾀꼬리’ ‘비련’ ‘사랑을 몰라’

에 목이 터져라 ‘용필오빠’를 연호 했다.

그는 그 와중에도 ‘대전블루스’ ‘미워 미워 미워’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리고 ‘허공’으로 대표되는

트로트를 빼놓지 않았고, 그 노래들은 ‘조용필=국민가수’라는 등식이 연착륙하는 데 결정적 역할

을 했다. 조용필은 트로트의 경우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음반사를 비롯해 ‘외부의 간청’에 의

한 것이 많았다고 털어 놓았다.

최헌 챠밍 가이스로 출발하여 히식스와 검은 나비 등을 거친 70녀대 인기가수. 솔로 데뷔곡이자 최고의

히트곡인 ‘오동잎’을 비롯해 ‘가을비 우산속’ ‘앵두’ ‘당신은 몰라’ ‘구름 나그네’ 등의 히트곡을 남겼다.

윤수일 1977년 골든 그에일스에서 탈퇴하여 부른 솔로 데뷔곡 ‘사랑만은 않겠어요’가 크게 히트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윤슈알뱐두룰 굘송. ‘제2의 고향’ ‘아파트’ ‘토요일밤’ 등 록 넘버를 남겼다.

Page 8: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86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허공’의 경우는 10대를 겨냥한 스타일의 노래들이 한창이던 때에 발

표되었습니다. 그 곡을 취입한 것은 주변의 권유에 따른 것이었나요? ‘돌아와요 부산항에’와 비교

해서 그때의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그 곡을 취입할 때는 상황이 각별했어요. 상당히 전략적이었고 내가 (취입을)원했던 곡이었습니다.

그 무렵 아시다시피 제 팬은 청소년 팬들이 주류를 이뤘고 그러자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여

의도가 순전 애들 천지고 학부모들의 반발이 심하다’는 것이었죠. 노래가 너무 어린애들 쪽으로

치우친 것 아니냐는 지적이었습니다. 대중가수가 대중의 의견과 여론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잖아

요. 그래서 약간은 방향을 기성세대로 돌릴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허공’은 트로트로 분류되지만

사실 4분의 2 박자에 왈츠 리듬도 들어 가서 고전적 트로트라고는 할 수 없는 곡입니다. 특히 가

사가 깊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취입에 더 적극적이었죠.

<조용필/영사운드>(1976년)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수록된 앨

범. 뒷면은 당시 ‘달무리’ ‘등불’ 등으로 인기를 얻었던 그룹

영사운드의 앨범이다 (좌)

<님이여>(1976) 이 앨범이 발표된 직후인 1977년 2월. 조용

필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되어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우)

Page 9: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조용필은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1980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관련을 맺는다. 그의 전성기는 시

기적으로 전두환의 5공 정부 통치 시기와 정확히 맞물렸다. 실제로 80년 3월에 발표된 그의 1집

앨범에서 ‘창밖의 여자’ ‘단발머리’를 비롯해서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슬픈미소’ ‘대전블

루스’ 등 7-8곡이 동시다발로 히트했던 시점은 공교롭게도 ‘80년의봄’을 지나 5공 탄생의 정치적

디딤돌이었다는 5.17 계엄과 5.18광주항쟁 기간이었다.

당시 한 연예주간지는 “계엄 확대와 광주라는 상황이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필의 노래에 빠

지게 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조용필을 ‘전두환 대통령 시대의 가수’ 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물론 둘 사이에는 어떠한 끈도 없었지만, 세종로 1번지 청와대의 주인과 TV프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주인은 각기 분야에서 최고 권력자로 시대를 동행했다. 과연 이 관련성을 당

시 그가 의식했는지 여부를 물었다.

Page 10: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조용필은 80년 1집을 시작으로 81년을 휩쓴 ‘미워 미워 미워’ ‘고추잠자리’의 3집 82년 ‘못찾겠다

꾀꼬리’의 4집, 86년을 석권한 ‘허공’의 8집, 91년 ‘꿈’을 컨셉트로 한 13집, 이듬해 ‘슬픈 베아트

리체’가 수록된 14집을 거쳐 2003년에 내놓은 신보 <오버 더 레인보우>까지 정규앨범만 18장을

발표했다. 베스트 앨범만도 7장에 달한다.

그의 노래제목에도 있듯이 ‘고독한 러너’의 부단한 행진이다. 한국 가요에서 앨범이 그 자체로 의

미를 갖게 된 것도 조용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 평단의 일치된 시각이다. 80년대 전성기 시절

앨범에서는 보통 3-4곡이 히트를 쳤다. 인기곡 하나 때문에 음반을 사야 했던 음악팬들은 적어도

조용필 앨범에는 돈이 아깝지 않았다. 전국민들이 그의 음악에 안겼던 이유가 ‘건국 이후 최고’라

는 탁월한 가창력 때문임은 두말할 것도 없다.

조용필 씨는 리듬, 정확히 말해서 비트를 가장 잘 타는 가수라는 평판이 지배적입니다.

예를 들어 ‘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만 하더라도 비트를 타는 정도가 아니라 비트를 쪼개 나눠

부른다는 찬사를 보냅니다. 천부적이기도 하겠지만 훈련도 작용했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그런 역

량이 나온 것일까요?

노래에 목숨을 건다는 최선의 자세로부터 나온 것이겠죠. 전 가수이기 전에 연주자였어요. 그것도

리드기타를 첬습니다. 기타리스트로서 곡의 리듬이나 비트를 타는 것은 기본 이지요. 이 기본을 놓

치면 가수로서 감정 표현이고 뭐고 없지요.

<3집)(1981) ‘미워 미워미워’ ‘고추잠자리’ 등이 수록되어 있

다 (좌)

<8집>(1985) ‘허공’ ‘킬리만자로의 표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우)

Page 11: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스스로 가장 기억에 남

는 앨범으로 꼽는다. ‘못 찾겠다 꾀꼬

리’ ‘비련’ 등은 ‘오빠부대’ 열풍을 이

끌었다. (좌)

<13집>(1991) ‘꿈’ ‘꿈꾸던 사랑’ ‘어

젯밤 꿈속에서’ 등 꿈을 컨셉으로 엮

었다.

<14집>(1992) ‘슬픈 베아트리체’ ‘고독한 Runner’가 들어있다 (우)

Page 12: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사실 35주년 기념공연을 앞둔 두 번째 인터뷰 때는 내심 곤혹 스러웠다. 신문의 사회면 기사와 9

시 TV뉴스로 보도되면서 커다란 충격파를 몰았던 것이 말해주듯 1월에 아내 안진현 씨를 잃는

‘그의 인생 최대 슬픔’을 겪고 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이나 언론으로 접한 팬들이나

안타까워 차마 볼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얼굴은 상처喪妻의 비통으로 뒤덮였다. 몇 개월이 지났는

데도 여전히 고통의 기운이 가시지 않는 듯 안색이 좋지 않았다.

이 대목에서 그의 슈퍼스타로서 겪는 고독을 얘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은 뉴질랜드로이민 간

전 조선일보 기자 권혁종 씨의 경험담이다.

<…몇 해 전 특집기사를 취재하느라 조용필 형과 둘이 차를 몰고 부산에 다녀온 적이 있다. 돌아

오는 길에 내가 운전하며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니 점심때가 한참을 지났다. 별 생각 없이 ‘밥 먹

고 가죠’ 하고는 가까운 휴게소에 차를 대고 자율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지

만, 일부러 맨 구석 테이블을 골라 앉았다. 아무리 작은 자율식당이라고 슈퍼스타 조용필이 식판

을 들고 돌아다니게 하기는 민망한 노릇이 아닌가.

<Over The Rainbow>(2003) 17집 이후 5년간의 공백을 깨고 내놓은 앨범으로 ‘’태

양의 눈’ 등이 들어있다.

Page 13: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내가 식판 두 개를 들고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주위사람들은 벌써 알아채고 힐끔거리며 뭐라 수

군거리고 있었다. 그는 수저를 들며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했다. ‘나 이런데 처음이야!. 그가 누구

도 부럽지 않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으며 음악 외길을 걸어온 한국 대중 음악의 거

인임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과 어울려 휴게소 식당에서 마음 편히 밥 한

끼 먹는 즐거움조차 포기하고 살아온 ‘고독한 스타’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1950년 경기 화성에서 조경구 씨와 김남수 씨 사이의 3남 4녀중 여섯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난

조용필은 경동중을 거쳐 경동고에 진학한 뒤 바로 뮤지션을 꿈꾸었다. 고교 2학년때 도서관에서

만난 동네 친구들과 그룹 결성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아버지한테는 미안했지만 대학에 진학할

뜻은 애초에도 없었다”는 고백처럼 오로지 음악에 투신 전념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떠오른 초창기에나 쉰네 살 백전노장인 지금이나 그의 한결같은 소원이자

신조는 “무대에서 노래하다가 쓰러져 죽는다” 이다. 많은 주변인들은 그를 보고 ‘어쩌면 그 나이

에도 세상물정 모를까 싶게 순진하고 세파에 때묻지 않았을까’ 하고들 놀란다. 확실히 그에게는

음악 하는 사람으로서의 순수성이 있다.

그가 국민가수로 숭앙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 일일지도 모른다. 팬들은 “우리 가요사에서 진정한

국민가수는 조용필뿐이며 그만이 그 수식어를 영원히 달 자격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국민가수란 말에 왠지 전체주의 냄새가 풍겨 부담스럽다고 말했다. “내 이름 앞에 붙는 수식

들은 다 불필요한 것들이죠. ‘슈퍼스타’ 니 ‘작은거인’ 이니 ‘가왕’ 이니 다 싫어요. 딱 ‘가수 조용

필’ 다섯 글자면 되는 것 아닌가요?”

음악에 관한 한 조용필은 ‘영원한 오빠’ 이자 ‘불후의 청춘’이다. 그 나이에도 무대에 서면 젊은이

들 못지 않게 쩡쩡 울리는 소리를 내는 것은 물론, 어쩌다 사석이라도 갖게 되면 모든 화제가 음

악으로 귀결될 만큼 음악얘기를 즐긴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강한 시절인 20대 젊은이의 모습 그

대로다.

하지만 엄연히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으로서 너무도 모양이 달라진 가요계의 현재를 어떻게 볼

지 직접 듣고 싶은 마음 간절했다. 그의 답변에는 가히 범접불허의 거장이자 대가의 위용이 묻어

나왔다.

요즘 후배 가수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누가 노래를 잘하던가요?

후배들에 대한 평가는 무리예요. 후배들을 알려면 방송도 같이 해보고 함께 공연하면서 접해보고

알아야 되는데 그런 상황이 아니잖아요. 가요 풍토는 분명 많이 달라졌어요. 지금의 가수는 비주얼

한 측면, 외모,춤,노래실력이 모두 요구되지요. 저 때하고는 달라요. 그런 변화를 고려하면 후배가수

Page 14: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들이 오히려 잘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 음악에 기성세대들의 불만이 있는 줄 알지만 댄스

든 랩이든 그 시절에는 어떤 스타일의 음악이라도 거기에 그들만의 꿈이 담깁니다. 다 나름대로의

문화가 있다는 거지요.

그래도 대선배로서 후배가수들에게 당부하거나 충고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굳이 강조하자면 다 아는 얘기겠지만, 가수의 기본은 가창력이라는 사실이죠. 따라서 먼저 라이브공

연이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구요. TV에 대해 말하자면 TV가 가수를 이용했듯이 가수도 TV를

적절히 이용하는 긴 안목을 갖춰야 합니다. 자기 고집이 필요해요. 그리고 가수는 여건이고 상황이

고 다 떠나서 ‘튼튼한 나 자신’이 있어야 돼요. 자기가 갖고 있는 음악성에 대한 확신이랄까, 지금

은 고되더라도 10년 후에 어떤 위치에 올라 있느냐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주위 사람이나 팬들은

언젠가는 떠나게 되어 있어요. 그 팬들과 오래 함께 가려면 ‘절대강자’라야 된다는 말입니다.

아까 뮤지컬 얘기를 하다가 나왔지만, 조용필 하면 우선 히트곡이 무수히 많은 가수라는 사실이

떠 오릅니다. 어떤 노래가 히트하기 위해서 조건이 있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우선 음악이 좋아야지요. 리듬이 세련되고 멜로디가 좋아야 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가사가 기막히게

붙어야 히트할 수 있어요. 저도 초기에 작곡가 김순곤 씨 집에서 밤을 새며 이 부분을 쌓기 위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다음은 시기랄까, 음악이 좋아도 때가 맞지 않으면 묻힐 수밖에 없어요. 마

지막으로는 운도 어느 정도 작용해요. 저도 운이 좋았지요.

마지막으로 80년대 대중들에게 조용필 음악이 갖는 의미나 기여한 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가요에 질적 변화를 주었다’는 점과 ‘국내 대중음악의 무게중심을 팝에서 가요로 돌

리게 한 것’등을 들었다. 하지만 그가 악센트를 높이며 강조한 부분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나한테는 요즘 공연에도 몰려오지만 ‘같이 살아온 많은 팬들’이 있어요. 저는 그들에게 청소년

시절의 추억을 확실하게 만들어줬다고 봅니다. 그래서 오빠부대에서 아줌마부대가 돼도 저를 잊지

않고 지켜줍니다. 저한테는 강력한 힘이지요. 그 사람들이 없었다면 과연 내가 있었겠습니까? 등

뒤에서 밀어준 사람이 있었기에 내가 앞으로 갈 수 있었던 거죠.”

그는 공연무대를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결코 자기과시가 아니며 오로지 그 팬들에게 돌려주고 싶

은 마음, 멋진 공연으로 보답하고 싶은 마음일 뿐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5집>(1983) 이 앨범 속에 수록된 ‘친구여’ 는 한국 최초로

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린 대중가요로 기록되었다. (좌)

<7집>(1985) ‘미지의 세계’ ‘여행을 떠나요” 등이 수록된 이

앨범 속의 곡 ‘어제 오늘 그리고’ 는 2000년에 후배 가수 유

승준에 의해 리메이크 되어 다시 한번 주목을 받았다. (우)

Page 15: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공연으로 돈을 벌려는 생각은 하지 않아요. 물론 공연도 흥행이니까 이익이 발생되어야 하죠. 하

지만 결과적으로 그래야지, 애초 돈을 벌려고 공연을 기획해서는 되지가 않아요. 제 공연은 할 때

마다 많이 다를 겁니다. 레퍼토리도 상당히 바뀔 것이고 많이들 놀라겠지만 그래도 만족하는 공연

이 될 겁니다.”

대중에게 받은 것을 대중에게 돌리려고 골몰하는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최고스타이자 가객歌客이

었다. 80년대 오빠부대가 조용필이 있어서 행복했듯 우리 가요사도 그가 있어서 행복할 것이다.

<우리대중음악의 큰별들> (임진모 저) 中에서…

Page 16: 모든 것을 통합한 한국 음악의 영구결번 1인자 · 2004. 3. 15. · 전영록 구창모 윤수일 이용 이문세 등 당대 인기가수들 상당수가 조용필과

고독한 Runner

어느 하늘에 꿈이 있을까 어느 바다에 사랑 있을까

꿈을 찾아 사랑 찾아 뛰어 가네

어두운 밤에 숲속을 지나 비바람 부는 언덕을 넘어

낯설은 거리 낯선 시간을 뛰어가네

서로 사랑한 친구가 있었네

내가 사랑한 님도 있었네

이제는 모두 떠나버리고 홀로 남아

시작이라는 신호도 없고 마지막이란 표시도 없이

인생이란 고독한 길을 뛰어가네

사랑도 미움도 스쳐간 길

꿈속에 보이는 고독한 길

지쳐쓰러져도 달려가리라 푸른바다에 파도가 되어

우리 인생이란 머나먼 길에

나는 고독한 runner가 되어

지쳐쓰러져도 달려가리라 푸른바다에 파도가 되어

우리 인생이란 머나먼 길에

나는 고독한 runner가 되어

지쳐쓰러져도 달려가리라

나는 고독한 runner가 되어

아침 햇살에 솟아오르고 저녁 노을에 지는 날까지

어디까지나 언제까지나 뛰어가리


Recomme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