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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go-history of a 'Western historian': 역사가되기의 어려움

Date post: 17-Nov-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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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정체성을 묻는 방법 한국 연구 재단 홈페이지의 ‘한국연구자정보’를 보면 나는 ‘서양사’에 배치되 어 있다. ‘서양사’ 안에서의 내 세부 전공은 다시 ‘동유럽사’, ‘서양현대사’, ‘서양사 학사’, ‘서양사상사’에 걸쳐 있다. 1)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하는 ‘상상의 지리’에서 동 유럽이 ‘서양’인지는 대단히 의심스럽지만, 그런 의문은 일단 접어두자. ‘동유럽 사’가 ‘서양사’의 하위 범주이자 세부 전공으로 편성된 작금의 학술 편제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몇 편 안되기는 하지만, 최근의 내 관심사인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에 대한 글들을 연구재단에 등록할 때는 더 당혹스러웠다. 어디로 분류하 나 한참을 고민하다 ‘기타 역사학’을 클릭했다. 물론 ‘역사일반’의 하위 범주에 ‘비 교사(역사학)’ 항목이 있지 않느냐는 반문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비교사의 관행 *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연구소 소장 1) http://www.kri.go.kr/kri2/ 2015년 8월 3일 방문 ‘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서양사학’을 넘어 ‘역사학’으로 나아가기- 현* 0 0 Ⅰ. 정체성을 묻는 방법 Ⅱ. 헤게모니적 거울로서의 ‘서양사’ Ⅲ. ‘상상의 지리’와 흔들리는 ‘서양’ Ⅳ. 국경을 넘는 역사 Ⅴ. ‘역사가’와 ‘기억 활동가’의 사이에서
Transcript

I. 정체성을 묻는 방법

한국 연구 재단 홈페이지의 ‘한국연구자정보’를 보면 나는 ‘서양사’에 배치되

어 있다. ‘서양사’ 안에서의 내 세부 전공은 다시 ‘동유럽사’, ‘서양현대사’, ‘서양사

학사’, ‘서양사상사’에 걸쳐 있다.1) 오리엔탈리즘이 작동하는 ‘상상의 지리’에서 동

유럽이 ‘서양’인지는 대단히 의심스럽지만, 그런 의문은 일단 접어두자. ‘동유럽

사’가 ‘서양사’의 하위 범주이자 세부 전공으로 편성된 작금의 학술 편제에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몇 편 안되기는 하지만, 최근의 내 관심사인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에 대한 글들을 연구재단에 등록할 때는 더 당혹스러웠다. 어디로 분류하

나 한참을 고민하다 ‘기타 역사학’을 클릭했다. 물론 ‘역사일반’의 하위 범주에 ‘비

교사(역사학)’ 항목이 있지 않느냐는 반문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비교사의 관행

* 서강대학교 사학과 교수/트랜스내셔널 인문학 연구소 소장

1) http://www.kri.go.kr/kri2/ 2015년 8월 3일 방문

‘역사가’ 되기의 어려움-‘서양사학’을 넘어 ‘역사학’으로 나아가기-

임 지 현*

0 0

Ⅰ. 정체성을 묻는 방법

Ⅱ. 헤게모니적 거울로서의 ‘서양사’

Ⅲ. ‘상상의 지리’와 흔들리는 ‘서양’

Ⅳ. 국경을 넘는 역사

Ⅴ. ‘역사가’와 ‘기억 활동가’의 사이에서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2 3‘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정체성의 상호작용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정체성’(identity)에 대한 본질주

의적 파악보다는 ‘정체성이 만들어지는 과정’(identification)에 대한 계보학적 분석

이 역사가의 정체성을 묻는 데 더 적절한 방법이라는 판단이 드는 것도 이 때문

이다. ‘identity’가 국사-동양사-서양사의 삼분법적 정체성을 본질적이고 고정된 속

성이라 믿게끔 유도한다면, ‘identification’은 왜 어떻게 역사가들이 스스로 이 삼분

법적 정체성을 받아들이고 본질화시키는가를 묻게 해주는 것이다.2)

이는 물론 간단한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 학제로서의 역사학의 출

현, 국민국가와 역사학의 이념적 공모관계, 세계사와 국사의 ‘쌍 형상화’(co-

figuration), 근대적 역사 서사의 수용과 변형,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 ‘동양

사’의 성립, 식민주의 역사학과 민족주의 역사학의 대립과 상호침투, 식민주의,

민족주의, 맑스주의가 혼종된 탈식민주의 역사학 등등의 복합적인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삼분법이 역사가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과정’의

정치 역학을 캐묻는 복잡한 과제를 요구한다. 그 위에서 다시 연구자 개개인의

주체적 결단과 학제의 구조적 힘이 서로 조응하고 결합하고 갈등하고 대립하는

‘관계’의 정치성을 분석하는 작업이 더해져야 한다.3) 제도로서의 ‘학제’라는 구조

2) 역사적 분석의 초점을 identity에서 identification으로 옮길 것을 촉구한 Frederick

Cooper의 빼어난 논점에서 착상을 얻었다. Frederick Cooper, Colonialism in

Question: Theory, Knowledge, History (Berkeley: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5), pp. 59-90.

3) 근대 역사학을 둘러싼 정체성의 정치 역학에 대해서는, 도면회/윤해동 엮음, 『역사학의 세

기』 (서울: 휴머니스트, 2009); 임지현/이성시,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 (서울: 휴머니스트,

2004); 스테판 타나카, 『일본 동양학의 구조』 박영재/함동주 옮김, (서울: 민음사, 2004); 폴

A. 코헨, 『학문의 제국주의-오리엔탈리즘과 중국사』 이남희 옮김 (서울: 산해, 2003); 프라

센지트 두아라, 『민족으로부터 역사를 구출하기』 문명기/손승희 옮김 (서울: 삼인, 2004)

등을 보라. 유럽의 역사학과 정체성의 정치에 대해서는 백 여 명 이상의 유럽 역사가들이

참여해 Palgrave/Macmillan에서 나온 총 9권의 ‘Writing National Histories’ 시리즈가

좋다.

h t tp ://www.palgrave.com/page/deta i l /the-pas t -as -h i s tory-s te fan-

berger/?K=9780230500099

http://www.palgrave.com/page/detail/atlas-of-european-historiography-ilaria-

처럼 굳어진 ‘보편과 특수’의 이분법에 대한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의 비판을 생각

하다 보면, 아무래도 ‘비교사’로 분류하기는 부담스럽다. 훗날 트랜스내셔널 역사

학의 입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기타 역사학’이 낫겠다는 생각도 있다. 트랜스내

셔널 역사학처럼 ‘서양사학’을 넘어 ‘역사학’으로 가려는 노력이 ‘기타’ 역사학으로

귀결되기 십상인 이 학제적 현실은 실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돌이켜보면 역사학도로서의 내 꾸불꾸불한 행보는 점차 ‘서양사’라는 학문적

정체성을 의심하고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걸음이었다. 보편적 모델인 ‘서양사’와

파행적 일탈의 ‘한국사’ - 그 사이의 역사적 갭을 어떻게 좁힐 것인가 하는 고민에

서 ‘서양사’를 전공으로 택했으니, 그 출발은 분명 유럽중심주의였다. 그나마 다

행인 것은, 알게 모르게 ‘서양사’의 정체성을 흔들고 학제의 경계를 뛰어넘어 ‘역

사학’으로 나아가려는 고투의 흔적이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지금의 내 모호한

학문적 정체성은 ‘역사학’으로 가기 위한 개인적 안간힘이 ‘서양사’의 경계를 강제

하는 학제의 벽에 부딪쳐 생긴 잠정적인 타협점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는 잠

시 숨을 고르며 앞길을 모색하고 있던 시점에서, ‘한국에서 역사학자로 산다는 것

의 의미’와 역사가로서의 정체성을 묻는 역사학회의 질문은 그만큼 반갑고 또 절

절했다. 깊이 감사드린다.

그런데 실례가 안 된다면, 나는 주최 측의 이 질문을 살짝 바꾸고자 한다. 당

신의 역사가적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는 대신, 역사가의 정체성이 ‘왜’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내 자신을 비롯해 한국의 역사가들에게 직업

적 정체성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국사’-‘동양사’-‘서양사’의 삼분법에 따라 답한다.

학제로서의 국사-동양사-서양사의 삼분법적 코드가 이미 학문과 진리의 이름으

로 거부할 수 없는 권위가 되어 역사가들 스스로 그 코드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

을 규정하는 것이다. ‘나’ 자신을 예로 든다면, ‘서양사’라는 학제적 정체성이 일단

밖에서 부과되었지만 나 자신도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여 ‘서양사’라는 울타리 안

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기도 했다. 일반화시켜 말한다면, 역사가의 정체성은 밖에

서 부과하는 학제적 정체성과 그에 대응하여 역사가들이 스스로 규정하는 자기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4 5‘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인가? 있다면, 그것은 단수인가, 복수인가? 고정된 것인가, 유동적인 것인가? 나

는 도대체 역사가라 할 수 있는가? 그럼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II. 헤게모니적 거울로서의 ‘서양사’

나는 유신 체제가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에 접어든 197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1977년 ‘실험’대학의 편제로 ‘문과대학’에 입학해서, 2학년에 올라가면서

‘사학과’로 ‘진입’했다. 1970년대에는 국사학과-동양사학과-서양사학과로 편제

된 국립 서울대학교와 국사학과-외국 사학과로 편제된 영남대학교를 제외하면,

다른 대학들은 ‘사학과’ 체제를 유지했다. 1969년 서울대학교 사학과가 분과된

배경에 대해서는 정치권력의 의지가 강력히 작용했다는 게 대체로 일치된 증언

이다. ‘국민교육헌장’의 반포, ‘10월 유신’의 준비단계로서의 3선 개헌, 국기에 대

한 경례 도입 등 ‘국민의례’의 강화, ‘민족 주체성’과 ‘국적있는 교육’의 강화, 국정

국사교과서의 등장 등 일련의 유신 이데올로기가 고조되던 당대의 시대상황을

놓고 볼 때, ‘분과’의 기본 의도가 ‘국사학과’의 독립에 있었다는 원로학자들의 증

언은 신빙성이 높다. 당대의 최고 권력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영남대학교가 사립

대학으로는 유일하게 국사학과-외국사학과라는 권력의 원안대로 사학과를 재편

한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4) ‘민족사의 주체성’을 앙양하기 위해서는 학과 조직이

나 학제로서 ‘국사’의 독립이 시급했을 것이다.

한편 학부에서 통합 ‘사학과’ 편제를 유지하는 대부분의 대학들도 큰 차이는

없었다. 대학원에서는 국사-동양사-서양사 중에서 먼저 전공을 택해야만 했다.

4) 서울대학교 사학과의 분과에 대한 증언은 1985년 민석홍 선생님의 대학원 수업에서 우연

히 들을 수 있었다. 양병우 선생님도 비슷한 증언을 제자들께 남기셨다는 전언을 들은 바도

있다. 선생님들의 증언에 따르면 권력의 원안은 국사학과 대 외국사학과의 이분과 체제였

는데, ‘기타’ 역사학자들의 반발로 지금의 3분과 체제가 되었다. 해방 이후 역사학의 ‘학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절실히 요청되는 대목이다.

적 힘과 그 구조를 전유하는 행위자로서의 역사가의 주체적 행위가 서로 만나 갈

등하고 조합되는 다양한 방식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은 제도적으로 ‘서양

사학자’라는 정체성을 강제해 온 한국 역사학의 ‘학제’에 대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비판을 날줄로 하고 그 학제에 혹은 안주하고 혹은 투쟁해 온 한 나의 모순투성

이 ‘자아사(自我史)’(ego-history)를 씨줄로 엮어 구성된다. 근대적 학제로서의 서

구 역사학, 제국 일본 그리고 포스트식민주의 한국의 역사학계가 규정한 ‘서양사’

라는 정체성이 폭력적일 수도 있겠다는 뒤늦은 깨달음이 이 글의 출발점이 된다.

학사에서 박사까지 한국의 ‘학제’가 만든 긴 터널을 거쳐 온 한 ‘서양사’ 연구

자의 ‘자아사’인 이 글은 서양 지성사인가? 아니면 근대 역사학이라는 서양의 학

제가 동아시아에서 수용되고 변용되는 과정을 다룬 동아시아사인가? 혹은 국

사-동양사-서양사라는 제국 일본의 학제를 계승한 한국의 ‘후기 식민적 학제사’

(postcolonial history of discipline)인가? 이 발표야말로 이도 저도 아니면서 여기도

저기도 다 걸치는 ‘기타 역사학’에 가장 잘 들어맞는 것은 아닌가? 연구재단이나

사학과에서 나는 ‘서양사’로 배치되어 있으니, 잔말 말고 ‘서양사’로 분류하면 되

는 것인가? 역사가로서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그런 정체성이 있기라도 한 것

porciani/?k=9780230500044&loc=us

http://www.palgrave.com/page/detail/transnational-challenges-to-national-

history-writing-matthias-middell/?K=9780230500075

http://www.palgrave.com/page/detail/disputed-territories-and-shared-

pasts/?k=9780230500082&loc=uk

ht tp://www.palgrave.com/page/detai l/set t ing-the-standards-i lar ia-

porciani/?K=9780230500051

http://www.palgrave.com/page/detail/?sf1=id_product&st1=335500

http://www.palgrave.com/page/detail/nationalizing-the-past-stefan-

berger/?K=9780230237926

h t tp ://www.pa lgrave.com/page/de ta i l /wr i t ing-the-na t ion-s te fan-

berger/?K=9780230008021

http://www.palgrave.com/page/detai l/the-contested-nat ion-stefan-

berger/?K=9780230500068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6 7‘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의 반동이 기세등등한 1982년 봄이었다. 당시에는 삼분과로 구성된 역사학의 학

제적 역사를 알 길이 없었다. 학제 상 나는 3분과 전공 중 하나를 택해야만 했고,

그 분과체제가 문제라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장고 끝에 서양사를 택했지만, 쉽

지 않은 결정이었다. 학부에서 역사 전공을 택한 이래 내 관심은 줄곧 한국의 ‘자

본주의 이행’ 문제였으며, 대학원에 간다면 근현대 한국 경제사를 전공하겠다고

결심한지는 오래였다. 내 눈에 비친 1960년대 이후 남한의 개발독재는 국가권력

이 위에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을 강제하고 고도성장과 압축적 근대화를 통해 서

구를 따라잡는다는 단일 목표에 올 인하는 체제였다. 한국 노동자들의 척박하고

신산한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조세희의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19세기 영국의 맨체스터 노동자들에 대한 엥겔스의 사회학적 보고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대규모 이농과 광주대단지사태, 전태일의 분신과 동일방

직, 원진레이온과 형제복지원사건에 이르기까지, 당시 한국 사회는 맑스가 『자

본』에서 묘사한 자본의 본원적 축적 과정을 그대로 재현하는 듯 했다.

자연스레 맑스주의는 당대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설득력 있는 틀로 다가

왔다. 맑스주의에 대한 내 관심은 사회적 소수자인 노동자들에 대한 나로드니

끼적 공감에서 출발했지만, 역사학도로서의 ‘실사구시’적 태도에서 비롯된 바도

컸다. 내 눈에 비친 남한 자본주의의 개발 독재적 발전 양상은 서구 자본주의의

고전적 경로와는 분명 달랐다. 식민주의와 봉건제의 완강한 잔재들, 부르주아지

의 정치적 허약성과 반봉건화, 개발독재의 폭력적 정치 양식, 기본적인 노동권과

사회권을 박탈당하고 ‘즉자적 계급’에 머물러있는 노동자계급, 허약한 의회민주

주의, 강력한 후견인적 국가의 존재, 근대적 개인 주체의 미성숙 등 이른바 자본

주의 발전의 ‘프로이쎈적 길’이야말로 남한 자본주의의 특수성을 잘 설명해준다

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거의 믿음 수준이었다.7)

7) 이 믿음은 오늘날의 일부 좌파들에게 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데, 2012년 대선을 그람씨의

‘수동혁명’의 틀로 설명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오늘날의 정치 지형을 읽는 분석 틀로 여전

히 사용되고 있다. 요컨대 프랑스의 혁명적 부르주아지와 달리 보수 세력과 손잡고 수동적

변혁에만 안주하려 했던 19세기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처럼 보수화된 남한 부르주아지의 취

국사-동양사-서양사라는 지역사 중심의 일률 편제가 우선이었다. 고·중세사나

현대사 등의 시대사 혹은 사회경제사, 지성사, 여성사 등의 분야사는 그 뒤에 따

라 올 것이었다. 식민지 시대 경성제국대학의 역사전공 교과과정에서부터 변형

적용된 이 편제는 일본 제국 역사학의 3분과 체제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일본 제

국의 역사학 3분과 체제에서, ‘동양사’가 조선과 중국을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면 ‘국사’는 정체된 동양사회와는 달리 서구적 근대화에 성공

할 수 있었던 일본의 역사적 예외주의를 ‘탈아입구론’의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이

데올로기였다. ‘서양사’는 이들 모두를 비추는 헤게모니적 거울이었다.5) 물론 (포

스트)식민적 상황의 한국에서 역사학의 3분과 학제가 갖는 정치성은 일본 제국

의 그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경성제국대학의 사학 전공은 ‘국사’(일본사)-‘동양사’-‘조선사’라는 변형된 3분

과 체제를 기본으로 하고, ‘서양사’는 ‘교양’으로 배치했다. 이는 타이페이제국대학

의 역사 전공이 ‘국사’-‘동양사’-‘남양사’(南洋史)로 편제된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한다.6) ‘조선사’와 ‘남양사’ 전공이 ‘서양사’를 대체한 이 학제는 오리엔탈리즘의 주

체이기보다는 대상일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의 담론적 위치를 반영한다. 해방 이

후 한국의 역사 전공 편제는 제국 일본의 오리지널 3분과 체제로 복귀했지만, 그

작동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콜로니얼 한국에서 역사학이 작동하는

현실은 오리엔탈리즘, 옥시덴탈리즘, 민족주의, 반공주의, 사회주의 등이 얽혀 훨

씬 더 복잡했지만, 3분과 체제가 독립된 조직과 학제로 성립한 것은 유신 이데올

로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국사’가 개발독재의 민족주의적 동원 체제를 정

당화하는 주요 학제로 등장하는 대신, ‘동양사’나 ‘서양사’는 ‘국사’를 보조하는 장

치라는 정도의 인식이 학제 개편의 밑바닥에 있지 않았나 한다.

간신히 학부를 마치고 대학원에 진학한 것은 ‘민주화의 봄’을 짓밟은 5공화국

5) 스테판 타나카, 『일본 동양학의 구조』 참조.

6) 신주백, “한국 역사학의 3분과제도 형성과 역사인식·역사연구방법,” 『동방학지』 149집

(2010, 3월), pp. 137-39.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8 9‘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는 헤게모니적 거울로서의 서양사를 인식론적으로 미리 전제하지 않았나 싶다.

문제는 비서구가 서구라는 헤게모니적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보는 순간, 역

사의 ‘단일성’(singularity)이 ‘특수성’(particularity)으로 슬그머니 치환된다는 점

이다.9) 그 결과 우열이 없는 역사적 차이가 서구를 정점으로 하는 역사발전의 위

계적 질서 속에 편입되고, 비서구의 특수한 역사는 서구적 보편으로부터의 일탈

정도와 거리에 따라 차등이 매겨진다. ‘아메리카적 길’과 ‘프로이쎈적 길’로 자본

주의 발전 경로를 나눈 주류 맑스주의의 해석도 실은 ‘보편과 특수’의 이분법을

내장한 것이었다. 이 이분법은 다시 서구와 비서구의 이분법과 겹쳐지면서, 서

구-보편-아메리카적 길 대 비서구-특수-프로이쎈적 길이라는 대립 항으로 정식

화된다. ‘산업의 선진국들은 저발전국들에게 그들의 미래상을 보여줄 뿐’이라는

『자본』 1권의 서문은 맑스의 ‘역사주의’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사가 단일

한 역사적 발전 경로를 따른다는 ‘역사주의’의 단선론적 구도는 지구 위 모든 지

역의 역사를 하나의 시계열 안에 배치함으로써, 공간을 시간화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세계사를 단일한 진화론적 시계열 안에 배치하는 역사주의의 구도 속에서,

이제 서구와 비서구, 서양과 동양, 북반구와 남반구 같은 공간의 차이는 선진과

후진 사이의 진화론적 시간의 차이로 전화되는 것이다.10)

역사주의에 빠진 비서구의 역사가들은 자신의 역사 속에서 서구적 발전의

특징인 합리주의, 과학, 자유와 평등, 중산층, 도시의 발전, 인권과 참정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찾아내려고 애쓰기 마련이다. 식민주의 역

9) Gavin Walker, “Postcoloniality and the National Question in Marxist

Historiography: Elements of the Debate on Japanese Capitalism”, Interventions,

13, No. 1 (2011), 131-132.

10) 일본이 미국에 비해 오십년이 뒤졌다거나 20년 후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는다는 식의 일

반에 널리 퍼진 생각은 바로 이러한 역사주의의 반영이다. 역사주의에 대한 정치한 인식

론적 분석을 위해서는 Dipesh Chakrabarthy, Provincializing Europe: postcolonial

thought and historical difference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00)을

보라. 역사적 사유를 중시하는 전통적인 historism과 발전론의 시각에서 공간을 시간화하

는 historicism을 구분하는 버거(Stefan Berger)의 주장도 이 점에서 흥미롭다.

한국에서의 자본주의 이행 과정에 대한 역사적 관심은 기본적으로 서구 자

본주의의 고전적 발전 경로와 다른 한국사적 특수성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되었다. 저개발과 독재, 분단 등 1970-80년대 한국 사회가 안고 있던 문제들

은 자본주의 발전의 한국사적 특수성에 그 기원이 있으리라는 생각이 그 밑에는

깔려 있었다. 돕(Maurice Dobb)의 『자본주의 발전연구』, 일명 돕-스위지(Paul M.

Sweezy) 논쟁으로 알려진 자본주의 이행논쟁, 일본의 강좌파 맑스주의자들과 타

카하시 고하치로(高橋幸八郞)로 대변되는 전후 맑스주의 경제사학, 전후 독일

역사학의 ‘특수한 길’ 테제 등에서 이론적 자양분을 얻으며 그러한 확신은 더 굳

어졌다. 얼핏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논의를 한데 묶어주는 공통점은 잉

글랜드의 자본주의 발전사를 보편적 모델로 설정하고 거기에 비추어 일본, 독일,

한국, 중국, 인도, 중동, 남미, 아프리카 혹은 ‘기타’ 비서구 지역에서 나타나는 자

본주의 발전의 후진성 혹은 특수성을 분석하는 비교사적 설정이었다.

독일사의 특수한 길 논쟁에서 “독일은 왜 잉글랜드가 아니었는가?”라는 다렌

도르프(Ralph Dahrendorf)의 질문은 보편-특수의 비교사적 설정을 단적으로 드러

낸다. 모범적 민주국가로 발전한 잉글랜드의 역사에 비추어 비정상적이고 파시

스트적 일탈을 겪은 독일사의 특수성을 설명하겠다는 잠재의식이 이 질문 밑에

는 숨어 있다. 잉글랜드의 자본주의 발달사가 독일사를 비추어 보는 헤게모니적

거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이다. 서구의 기본적인 발전 경로에서 얼마나 가

깝고 먼가를 기준으로 자신의 특수성(후진성)을 가늠하는 동유럽사의 서술경향

이나 서구라는 거울에 비추어 동아시아의 특수성 담론을 구성해 온 일본 근대사

상사도 실은 다렌도르프의 질문을 공유한다.8) 이는 비단 동유럽이나 일본의 역사

서술에만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한국사의 특수성 논의 또한 자신을 비추어보

약성이 새누리 당의 승리를 낳았다는 식이다.

8) Monika Baár, Historians and Nationalism: East-Central Europe in the Nineteenth

Century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 277; Naoki Sakai, Translation

and Subjectivity: On “Japan” and Cultural Nationalism (Minneapolis: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1997), p. 50.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10 11‘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모델로 삼는 ‘붉은 오리엔탈리즘’의 관점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서양’과 ‘한국’ 사이의 역사적 갭을 어떻게 좁힐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안고 자기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서양사’ 전공을 택했지만, 이미 그 고민의 틀

자체가 ‘맑스주의적 역사주의’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서양사’ 전공을 택한

것은 결국 서양의 보편적 혹은 모범적 근대에 비추어 자생적이면서도 일탈된 한

국의 근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맑스주의적

역사주의의 관점이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발전의 모델로 영국사를 그리고 있는

‘휘그’(Whig)적 역사해석과 놀랄 정도로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훗날 독일사의

‘특수한 길’ 테제를 비판하면서, 제프 엘리(Geoff Eley)가 제기한 부르주아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와 휘그파의 해석학적 공범성은 바로 이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12)

해방과 진보의 논리로 포장된 이 어설픈 서구중심주의는 1988년 박사학위

논문을 완성할 때까지도 지속되었다. 1980년대 운동권의 NL-PD 논쟁을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서는 맑스-엥겔스의 민족 문제론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논

문의 출발부터 우선 그러했다. 비단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논문의 구성이나 텍스

트 해석도 그러했다. 도저히 부정하기 힘든 맑스/엥겔스의 ‘서구중심주의’는 ‘자

본중심주의’(Capitalo-centrism)라는 신조어로 치환하여 변호했다. 사회주의가 성

숙한 자본주의의 물적 토대를 필요로 하는 한 맑스의 ‘자본중심주의’는 불가피

한 것이었으며, ‘서구중심주의’는 ‘자본중심주의’의 불청객이라는 식이었다. ‘문

명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의 식민주의를 승인했던 맑스-

엥겔스의 식민지 근대화론은 당혹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1867년 이후 아일랜드

민족해방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변화된 맑스-엥겔스의 태도를 강조함으로써 상

쇄하고자 했다. 넓게는 서양사 좁게는 맑스주의에 대한 나의 초기 입장은 결국

‘맑스주의적 역사주의’, ‘결과론적 서구중심주의’, ‘붉은 오리엔탈리즘’ 등을 맴 돌

면서 반식민주의의 자장권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13) 돕-스위지 논쟁이 벌어졌

12) Geoff Eley, “Forum”, German History vol. 22, no. 2 (2004), p. 234.

13) 임지현, 『마르크스 엥겔스와 민족문제』 (서울: 탐구당, 1990).

사학이 규정한 ‘비역사 민족’이 아니라 서구와 같은 ‘역사 민족’임을 입증하고 인

정받기 위한 ‘인정투쟁’이 비서구역사학의 핵심 과제가 되는 것이다. 한국의 역

사서술로 눈을 돌리면, 실학의 ‘근대성’론이나 자본주의 맹아론과 자생적 발전,

일본 식민주의와 자본주의의 파행 등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착 등이 좋은 예

이다.11) 그러나 서구와 비서구, 혹은 서양과 동양의 간격이 좁혀질 수는 있지만

결코 메꾸어질 수 없다는 데서 이 역사학적 ‘인정투쟁’은 비극의 서사가 된다. 자

신의 고유한 역사 속에서 서구의 역사와 유사한 점들을 샅샅이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은 유사한 것일 뿐 완전히 똑 같을 수는 없는 것이다. 서구의 보편사와 유사

한 점들을 찾아내서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정품과 짝퉁의 차이는 더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서구가 보편의 깃발 아래 헤게모니적 거울의 위치를 차지하는 한, 선

진화된 서구와 후진적 비서구의 갭은 영속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다.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의 헤게모니적 거울에 비추어 우리

도 자생적 근대가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정받으려는 비서구 역사학의 ‘인

정투쟁’은 애초부터 ‘결과론적 서구중심주의’를 껴안고 출발한 것이다. 민족주의

적일수록 더 서구중심주의적으로 되는 비서구 민족주의의 모순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돌이켜보면 대학원에서 서양사를 전공으로 택할 당시 내가 서있던 인

식론적 지점은 ‘헤게모니적 거울’인 서양을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비추어 한국

사회를 이해하자는 수준의 순진한 서구중심주의가 아니었나 싶다. 한국의 자본

주의 맹아론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자본주의 이행을 역사적으로 먼저 이

해해야 한다거나 실학의 근대성을 찾으려면 서구의 계몽사상을 더 깊이 분석해

야 한다는 정도였다.

이론적 추상의 차원에서 이야기한다면, ‘맑스주의적 역사주의’의 단선론적

구도 속에 내장된 서구중심주의와 ‘보편적 해방’의 기치 아래 서구중심적 근대를

11) Jie-Hyun Lim, “The Configuration of Orient and Occident in the Global

Chain of National Histories,” Stefan Berger et. al. eds., Narrating the Nation:

Representations in History, Media and the Arts (New York: Berghan Books, 2008),

pp. 290-308.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12 13‘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희곡 『계약』(Kontrakt)에서 한 등장인물이 던진 대사의 일부이다. 극중 등장인물

의 고향인 ‘베레지니차 비즈나’(Bereźnica Wyżna)는 폴란드-슬로바키아-우크라이

나 접경 지역인 카르파티아 산맥 기슭의 인구 30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시골 마

을이다. 폴란드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 폴란드인들조차 잘 모르는 이 마을은

전형적인 ‘변경’(kresy)의 특성을 안고 있다. 이들 폴란드 ‘변경’ 지역의 역사적 특

징 중의 하나는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1931년 실시된 폴란드 제 2 공화국의 인

구조사만큼 흥미로운 증거도 없다. 당신은 어느 민족인가를 묻는 조사자의 질문

에 많은 ‘변경’ 사람들이 자신은 폴란드인도 우크라이나인도 벨로루스인도 아닌

‘이곳 사람’(tutejszy)라고 답했던 것이다. 가상의 극중 등장인물을 통해 내 고향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 혹은 동양이면서 서양이라고 답하게 만든 므로젝의

촌철살인은 상식의 허를 찌르는 데 명수인 그답다. 더 넓게는 지성사의 텍스트로

서의 이 희곡은 동양도 아니고 서양도 아닌 혹은 동양이자 서양인 폴란드의 담론

적 위치(discursive location)를 잘 드러낸 것이 아닌가 한다.

1990년대 거의 전부를 폴란드 역사와 씨름하며 보낸 것은 우연이었지만, 지

금 와서 보면 그 우연은 큰 행운이었다. 폴란드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90년 겨울

이었는데 당시에는 그 첫 여행이 4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이어질지 몰랐다. 그

해 겨울 폴란드는 민주화 이후 처음 치르는 대선의 열기로 뜨거웠다. 그 와중에

‘연대노조’의 전설이자 강력한 대통령 후보였던 레흐 바웬사((Lech Wałęsa)는 ‘폴

란드를 제 2의 일본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으로 눈길을 끌었다. 폴란드=서양 대

일본=동양이라는 지리적 통념에 따르면, 바웬사의 공약은 ‘서양을 동양으로 만

들겠다’는 선언이 아닌가 하며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훗날 사

카이 나오키와(酒井直樹)의 대담에서 역사주의를 논할 때 이 이야기를 들려주

자, 사카이 나오키의 해석은 절로 무릎을 칠 만큼 명쾌했다. 역사주의가 서양=선

진, 동양=후진의 구도를 갖고 하나의 시계열 안에서 세계사를 배치하는 것이라

면, 바웬사의 공약에서는 결국 폴란드가 ‘동양’이고 일본이 ‘서양’이라는 것이다.15)

15) 사카이 나오키/임지현, 『오만과 편견』 (휴머니스트, 2003).

던 Science & Society에 박사논문의 일부 “Marx’s Theory of Imperialism and the Irish

National Question”(1992)을 기고함으로써 서양사에 대한 나의 초기 문제의식은

한 시대를 마감했다.

당시 나는 역사학도 과학이 될 수 있다고 굳게 믿었고, 유물론적 실재론에 갇

혀 구성주의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한국 사회에서 ‘근대’의 폐해를

보고 죽을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고, ‘금강’의 시인 신동엽의

문제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지 않은 데 있다는 김수영의 시평에 공감하는 편이

었다. 맑스주의의 관점에서 민족주의를 비판적으로 역사화하는 데 그칠 뿐, 맑스

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근대 이데올로기를 ‘권력’의 문제로 생각하지는 못했다. 포

스트식민주의나 포스트맑시즘,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직 내 역사학 레서피에는

없었던 것이다. 이 복잡한 포스트주의들이 내게 온 것은 폴란드를 통해서였다.

체제 변혁의 진통을 겪고 있던 폴란드에서 부딪친 현실 사회주의의 부조리한 잔

재와 그 밑에 숨어 있는 음험한 권력의 실상 앞에서 나는 끝없이 절망했고 사상

사 공부를 때려치우겠노라고 수없이 다짐했다. 그때까지의 내 작업은 이념의 ‘당

위’에 맞추어 역사 ‘현실’을 재단해 온 것이었으니, 역사가로서 나는 빵점이었다.

나를 폴란드로 부른 것은 ‘맑스 이래 최고의 두뇌’라는 찬사를 받던 폴란드 출신

유대계 맑시스트 로자 룩셈부르크였지만, 그 덕분에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이 가

능했으니 역설도 그런 역설이 없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14)

III. ‘상상의 지리’와 흔들리는 ‘서양’

이 글의 모두에 제시한 인용문은 폴란드의 희곡작가 스와보미르 므로젝의

14) 이에 대해서는 임지현, 『바르샤바에서 보낸 편지: 동유럽 역사에세이』 (서울: 도서출판 강,

1998)을 보라.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14 15‘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양사’의 경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양분도 이때부터 마련된 것이 아닌가 한다.

폴란드어가 늘고 현지 사정에도 밝게 되고 학문적 네트웤이 공고해지면서,

폴란드 역사에 대한 관심은 원래의 연구주제보다 훨씬 넓어졌다. 대우재단의 학

술총서 지원을 받아 『그대들의 자유, 우리들의 자유-폴란드 민족해방운동사』

(1999)를 집필하게 되었는데, 이를 위해 폴란드 근현대사 연구들을 폭넓게 섭렵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자주 폴란드 역사의 프리즘을 통해 한국의 민족 운동사

를 바라보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서구의 민족 운동사를 보편적 기준으로 삼고

그것에 비추어 한국의 민족 운동사를 이해하던 종래의 비교사적 방식과는 다른

경험이었다. 서구적 보편에 기대어 한국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방식이 아니라, 폴

란드와 한국이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단일성’들이 동등한 비교의 지평 위에서 부

딪치면서 생긴 파열, 그 파열이 남긴 인식의 틈새를 통해 한국과 폴란드의 민족

주의적 서사를 비판적으로 되돌아 볼 수 있었다. 폴란드 민족운동사의 비판적 이

해가 한국의 민족주의 서사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더해주고, 또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비교사적 고민을 통해 폴란드의 민족주의적 역사서술을 뒤집어 볼 수 있었

던 이 경험은 확실히 색다른 경험이었다. 2000년 오슬로의 세계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한 폴란드의 당 역사학과 북한의 당 역사학이 어떻게 사회주의의 탈을 쓴 민

족서사였는가를 밝힌 논문도 그런 비판적 상호작용의 결과였다.17)

폴란드 역사를 한창 공부하던 1990년대에 7년여 가까이 『역사비평』의 편집

위원을 한 것도 큰 행운이었다. 1997-98년에는 역사학회의 편집 이사를 맡아 그

행운은 배가되었다. 덕분에 한국사 연구자들의 생생한 고민과 최근 연구들을 귀

동냥하는 호사를 누렸다. 1994년 『역사비평』 여름 호에 발표한 “한국사학계의

역사 이해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이러한 행운의 자식이었다. 서구중심주의나 붉

17) “The Nationalist Message in Socialist Code: On Court Historiography in People’

s Poland and North Korea,” in S. Sogner ed., Making Sense of Global History: The

19th International Congress of Historical Sciences Commemorative Volume (Oslo:

Universitetsforlaget, 2001); “폴란드에서의 역사 재평가 작업-민족주의에서 다시 민족주

의로-,” 『한국사 시민강좌』 21집 (1997, 8).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만들겠다는 공약이야 많지만, 선진국을 후진국으로 만들

겠다는 공약은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과 서양에 대한 에

드워드 사이드의 개념이 가진 급진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하게 다가왔다.

폴란드에 첫 발을 딛게 된 계기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박사논문의 후속 작업

으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와 민족문제’에 대한 글을 구상하는 과정

에서 나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걸쳐 폴란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민족

문제 논쟁이 매우 첨예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폴란드 독립을 강령적 목표로

한 ‘폴란드 사회당’(PPS)과 러시아혁명이 폴란드의 민족문제를 해결해 줄 거라 믿

었던 ‘폴란드 왕국 및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SDKPiL)의 논쟁은 여러 모로 민족

모순과 계급모순, 민족통일과 사회혁명의 이분법적 구도로 전개된 NL-PD 논쟁

을 연상케 했다. 마침 이 주제에 대한 연구 지원을 받아 1990년 겨울 폴란드를 첫

방문하게 된 것이다.16) 솔직히 토로하자면, 연구도 연구지만 현실사회주의의 현

장을 직접 목격하고 싶다는 속셈이 더 컸다. 1990년대의 10년 내내 나는 첫 안식

년을 포함해서 틈만 나면 폴란드로 날아갔고, 현실사회주의 잔재로 가득한 폴란

드의 한 모퉁이에서 이념적 당위를 배반한 역사적 현실의 부조리를 씹고 또 씹으

며 ‘왜’ ‘어떻게’라고 수도 없이 자문했다. 정치권력의 음산한 힘 앞에서 불앞의 얼

음처럼 녹아버린 이념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면서 서구중심적 맑스주

의, 붉은 오리엔탈리즘, 맑스주의적 역사주의에 대한 비판적 시선이 가능했다. 이

렇게 해서 ‘서양사’라는 학제적 정체성을 의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서

16) 다음과 같은 연구가 그 산물이다: “‘폴란드 사회당’(PPS)과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SDKP)의 민족문제논쟁 -창당시기(1892-1894)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34·135집

(1992,9);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사 연구의 반성과 전망,” 『역사비평』 32집 (1996, 봄);

; “Rosa Luxemburg on the Dialectics of Proletarian Internationalism and Social

Patriotism,” Science & Society, vol. 59 no.4 (winter, 1995/96); “The ‘Good Old

Cause’ in the New Polish Left Historiography,” Science & Society, vol. 61 No.4

(Winter, 1997); “Labour and the National Question in Poland,” in Stefan Berger

and Angel Smith eds., Nationalism, Labour and Ethnicity 1870-1939 (Manchester:

Manchester Univ. Press, 1999).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16 17‘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스페인 내전을 전공하는 영국의 한 역사가에게서 폴란드 노동운동사에 대한

내 해석이 독일사의 ‘특수한 길’ 테제를 반복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그 야

릇한 충격은 형언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특수한 길’ 테제에 대한 스

미스의 예민한 감수성은 그가 유럽의 또 다른 ‘동양’인 스페인 사를 전공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니었나 싶다. 스페인과 폴란드, 한국의 구체적인 경험들을 역사의

실험실 안에서 충돌시켰을 때 생긴 그 이론의 균열된 지층이야말로 서구중심주

의에서 벗어나는 탈주로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놀라웠던 점은 그의 이론적 날

카로움이 아니라 스페인 내전이라는 자신의 전공을 뛰어 넘어 독일사의 특수한

길 논쟁을 지렛대로 폴란드 학계의 지배적 역사 서사의 문제점을 정곡으로 찌를

수 있는 그의 폭넓은 안목이었다. 당시에는 영어가 모국어라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역사 교육과 연구의 편제 문

제가 아니었다 싶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일본의 ‘동유럽사학회’ 초청 강연에서 섭얼턴 연구를 폴란

드 민족운동사에 접목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역사적

사유의 광범위한 횡단 가능성을 일깨워준 스미스의 커멘트가 내 잠재의식 속에

서 작동한 덕분이다. 그러나 당시 폴란드 노동운동사에 대한 내 글에서는 스미스

의 커멘트를 반영하기 어려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폴란드 역사학계

의 주류 해석을 뒤엎을만한 내공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포

스트콜로니얼한 시각에서 중동부 유럽의 근현대사를 접근해야겠다는 의지뿐이

었다. 훗날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에서 “독일사의 ‘특수한 길’ 테제에 대

한 포스트식민주의적 독해”(2010)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조직함으로써,

나는 스미스가 던져 준 오랜 숙제를 풀고자 했다.18)

폴란드라는 역사의 실험실에서 얻은 또 다른 소중한 성과는 ‘서양과 동양’, ‘유

18) 이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은 훗날 “A Postcolonial Reading of the Sonderweg:

Marxist Historicism Revisited”라는 제목으로 Journal of Modern European History

(2014), No. 2에 게재하여 스미스에 대한 오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은 오리엔탈리즘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글은 아니었지만, 폴란드를 중심으

로 한 동유럽의 민족주의 역사학과 한국의 민족주의적 역사 서술을 충돌시켜 양

쪽 모두의 민족주의 서사에 균열을 내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에서 서구의 헤게모

니적 거울에 한국 민족운동의 특수성을 비추어보는 기존의 비교사와는 조금 다

르지 않았나 싶다. 또 동유럽의 구체적 역사 사실들에 빗대어 민족을 본질화하는

한국의 국사 서술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추상적 이론에 기대어 민족 서사를 재단

하는 포스트식민주의 이론이나 문화연구의 비판과도 달랐다. 그러나 글에 별로

설득력이 없었는지 한국사 연구자들의 반응은 냉담했고, 서양사 연구자들은 조

금 의아해했다. 발표 직후 김진균 선생께서 당신이 담당한 서울대 사회학과의 민

족주의 강의 자료집에 그 글을 수록해서 학생들이 읽도록 해주신 게 큰 위안이었

지만, 한국사와 서양사 사이의 높은 벽을 다시금 실감하는 계기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의 민족문제 논쟁에 대한 연구도 조금

씩 진전시켜갔다. 오스트리아 린츠(Linz)에서 매년 열리는 ‘국제노동사학회’에 폴

란드 대표단의 일원으로 처음 참석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다. 노동사와 사회주

의 운동사를 전공한 베테랑 폴란드 역사가들과의 유쾌한 여행길과 그들의 뜨거

운 우정은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런 와중에 내 속 깊이 내재화된 서구

중심주의를 다시금 확인하는 충격적인 경험을 겪었다. 발단은 이랬다. Science &

Society(1995)에 실린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에 대한 논문이 계기가 되어,

스테판 버거(Stefan Berger)와 앤젤 스미스(Angel Smith)가 함께 기획한 Nationalism,

labour and ethnicity 1870-1939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 Press, 1999)에

폴란드 편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초고를 제출하고 편집자들의 피드백을 받

았는데, 그 중 스미스의 커멘트 하나가 송곳처럼 나를 찔렀다. “너는 아직도 독일

사의 ‘특수한 길’(Sonderweg) 테제를 믿느냐”는 것이었다. 19세기 후반 폴란드 노

동운동이 처했던 역사적 조건을 자본주의 발전의 ‘프로이쎈적 길’로 설명한 대목

에 대한 커멘트였다. 나는 그 제서야 내가 참고한 폴란드 역사학계의 주류 해석

이 독일사의 ‘특수한 길’ 테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18 19‘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간에 끼인 폴란드 사회주의는 레닌의 ‘타타르 맑시즘’에 대해서는 우월적 자존감

을 감추지 않으면서 독일 사회민주당의 개혁노선에 대해서는 비현실적인 괴리

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 사회주의의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폴란드 학

계의 탁월한 연구 성과가 ‘동양과 서양 사이’(Między wschodem a zachodem)라는

제목으로 나온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니다.20)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서 보니 강고한

것처럼 보이기만 하던 동양과 서양의 경계도 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조정되고

다시 만들어지는 상상의 경계였을 뿐이다.

동유럽 여행을 다녀와서는 ‘백인들이 저렇게 못사는 것을 보니 느낌이 묘

하다’고 내게 실토한 한국의 한 좌파 지식인에게 폴란드는 동양이었을까 서양이

었을까? 그의 인식은 우크라이나인을 ‘하얀 검둥이’라고 불렀던 한 나치 이데올

로그의 인식지평에서 얼마나 먼 것일까? 러일전쟁부터 시베리아 출병에 이르기

까지 일본 병사들이 러시아에 대해 느꼈던 감회는 어떤 것이었을까? ‘동유럽’이

아니라 ‘중앙유럽’ 또는 ‘중동부유럽’이라고 호명해달라는 폴란드 지식인들의 호

소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강고한 지리적 실재인 것처럼 보였던 ‘서양’과 ‘동양’

의 경계가 내 안에서 무너지면서, ‘글로벌 히스토리’(global history), ‘트랜스내셔

널 히스토리’(transnational history), ‘얽혀있는 역사’(histoire croisée), ‘변경사’(border

history)’ 등으로의 관점 이동이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는

아직 어렴풋한 느낌에 머물렀다

IV. 국경을 넘는 역사

폴란드 역사와 씨름하며 지낸 1990년대의 경험은 여러 모로 소중했다.

20) Paweł Samuś and Andrzej Grabski eds., Między wschodem a zachodem:

Studia z Dziejów Polskiego Ruchu i Myśli Socjalistycznej (Łódź: Wydawnictwo

Uniwersytetu Łódzkiego, 1995). 이 책의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역사학보』 149집

(1996. 3)에 실린 내 서평을 보라.

럽과 아시아’를 실증적 역사-지리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구성물인 ‘상상의 지리’로

보게 되었다는 점이다. 사이드로부터 시작되는 포스트식민주의의 정치한 이론

보다는 폴란드 역사의 실험실에서 얻은 성과이기에 좀 더 구체적이고 생생한 이

해가 가능하지 않았나 한다. 독일에서는 폴란드 연구가 ‘동양 연구’(Ostforschung)

로 불리우고 폴란드에서는 독일 연구가 ‘서양 연구’(Studia Zachodnie)로 호명되는

이 연구의 지리적 범주화가 이미 많은 것을 말해준다. 내셔널 히스토리의 분절된

이해방식을 떠나 프랑스-독일-폴란드-러시아를 잇는 역사의 연쇄 고리 속에 내

셔널 히스토리를 위치시킬 때, 유동하는 상상의 지리로서의 동양과 서양은 더 분

명히 드러난다. 프랑스 ‘문명’의 대당 개념으로 ‘문화’ 개념을 내세운 독일의 역사

의식에서 프랑스는 ‘서구’로 가정되었지만, 폴란드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인 독일

의 ‘동양 연구’에서 서양의 위치를 차지한 것은 독일이었다. 반면 ‘아시아적인 러

시아’에 대해 폴란드는 자신을 ‘서양’으로 간주했으며, 서구와의 관계에서는 ‘타타

르인’으로 비하되던 러시아인들도 아시아 이웃들에 대해서는 유럽인으로 자처할

수 있었다. 심지어 러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자신을 서양으로 자리매김하는 대

신 러시아를 오리엔트화하는 경향까지 나타났다.19) ‘서양’과 ‘동양’은 이처럼 그 담

론이 놓여있는 위치에 따라 유동하는 개념이었던 것이다.

담론적 위치에 따라 움직이는 유동적 개념으로서의 ‘동양’과 ‘서양’은 결과적

으로 ‘한국’과 ‘폴란드’의 교차점에서 서유럽과 동유럽, 동아시아를 함께 바라볼

수 있었던 독특한 포지션 덕분에 가능한 깨달음이 아니었나 한다. 독일 사회민주

당의 실용적 개혁노선과 볼셰비키의 혁명적 주의주의의 가교 역할을 했던 폴란

드 사회주의 운동의 독특한 위치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러시아와 독일의 중

19) 2006년 12월 폴란드의 포모제(pomorze/Pomerania) 지역에 속한 쿨리체(Kulice/Külz)

의 비스마르크 장원에서 열린 국제학술대회 “Deutsche Ostforschung und polnische

Westforschung 2: Institutionen-Personen-Vergleiche”의 종합토론 발제. Jie-Hyun

Lim, “Displacing East and West: Towards a postcolonial reading of ‘Ostforschung’

and ‘Myśl Zachodnia’,” in http://www.transeuropeennes.eu/en/articles/354/

Displacing_East_and_West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20 21‘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소개한 연구자들은 ‘신문화사’를 탈정치화시키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크다. 신

문화사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근대 혁명에 대한 신문화사적 해석이 함축하는 급

진주의적 잠재력이 찬반 양측 모두의 몰이해에 의해 무효화된 것은 두고두고 아

쉬운 대목이다.

‘대중독재’론은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의식을 20세기의 독재 연구에 적용하

려는 시도였다.22) 학문적으로는 먼저 현실사회주의의 역사적 해석을 둘러싸고

폴란드 현대사가들이 제기한 도발적 문제 제기에 힘입은 바 컸다. “희생자인가

공범자인가”라는 제목으로 1997년 바르샤바에서 나온 한 연구논문집에서 이들

은 민중의 숭고한 희생과 영웅적 투쟁으로 채색된 순교자적 역사관을 비판하고

열렬한 지지에서 정치적 저항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사회사적 스펙트럼을 제시

했다.23) 민중이 독재의 희생자가 아니라 공범자일 수도 있다는 이 책의 주장은 여

전히 가설적인 측면이 컸지만, 그 발상만으로도 큰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 채 가

시기도 전, 박정희 시대에 대한 한국사회의 집단적 기억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999년 촉발된 김대중 정권의 박정희 기념관 건립 프로젝트에 대한

논란은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한국 사회의 향수가 상당히 뿌리 깊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냈다.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압도적으로 찬성하는 여론과 서울 시

내 유수대학의 학생 설문조사에서 박정희가 복제하고 싶은 역사적 인물 1위로

뽑혔다는 기사 등을 접하면서는, 소수의 권력자가 강제와 폭력을 사용해서 다수

의 무고한 민중을 지배하는 체제라는 기존의 독재 이해방식을 다시 생각하지 않

을 수 없었다.

흥미롭게도 같은 해에 포츠담의 현대사 연구소에서 동독의 현실사회주의와

22) 대중독재 시리즈는 국내에서 나온 3권 외에 영국의 팔그레이브 맥밀란에서 ‘20세기의 대

중독재’라는 제목 아래 총 5권의 시리즈로 기획되어 ‘젠더정치’, ‘근대성’, ‘문화적 상상’, ‘기

억의 정치’ 4권이 이미 간행되었으며, 5권 ‘일상생활’ 편과 ‘대중독재 핸드북’이 편집을 마치

고 현재 출판 준비 중에 있다. http://www.palgrave.com/series/mass-dictatorship-in-

the-twentieth-century/MASSD/

23) Krystina Kersten ed., Ofiary czy współwinni (Warszawa: Volumen, 1997).

1970~80년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꿈꾸었던 한국의 경험과 사

회주의로부터 자본주의로의 ‘역이행’을 착잡하게 지켜보았던 1990년대 폴란드

에서의 경험만으로도 나는 운이 좋은 역사가였다. 짧은 인터벌을 갖고 두 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의 체제 이행을 현장에서 지켜보는 행운을 가진 역사가는 그

리 많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많은 위로가 되었다. 특히 일상에서 작동하고 있

는 현실사회주의의 음산한 현실과 부조리를 만날 때마다 과연 세상은 어떻게 변

화하는가라는 화두를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볼셰비키 혁명처럼 좋은 헤게모니

가 나쁜 헤게모니 대신 권력을 장악해서 물적 토대로부터 상부구조에 이르기까

지 총체적인 변혁을 주도하면 세상이 바뀔 거라는 생각은 너무 순진했다. 현실

은 훨씬 녹녹치 않았으며, 법과 제도, 구조를 바꾼다고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아니

었다. 혁명에 대한 맑스주의의 인식 지평 자체가 생산관계와 제도의 영역에 고정

됨으로써,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권력의 지배와 착취가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문

제의식을 결여했고 그 최악의 결과는 당과 국가기관 노멘클라투라의 권력을 정

당화해버렸다는 점이다.

『당대비평』의 특집 “우리 안의 파시즘”을 기획하고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

기’는 역사-정치 에세이를 쓴 것은 이러한 반성의 자식이었다. 법과 제도 차원의

정치적 민주화를 넘어서 역사적 행위자들의 매일매일의 사유와 실천이 민주화

되지 않는다면, 현실 사회주의가 그랬던 것처럼 한국 사회의 민주화도 ‘자유’와

‘해방’의 이름으로 억압을 내재화하는 일상적 파시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논

지였다.21) ‘민주주의의 민주화’라는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일상적 파시즘에 대한

문제제기는 방법론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린 헌트(Lynn Hunt) 등의 ‘신문

화사’ 연구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다. 피상적인 수준이었지만, 프랑스 혁명에 대

한 ‘신문화사’의 연구를 읽는 순간 바로 볼셰비키 혁명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존의 사회사 연구자들이 ‘신문화사’가 사회구조를 그대로 두고 무

늬만 바꾸려는 보수적 역사해석이라 곡해했다면, 정작 ‘신문화사’를 한국 학계에

21) 임지현 외 지음, 『우리 안의 파시즘』 (삼인, 2000).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22 23‘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의 식민주의 경험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것이다. 서구의 자유민주주의와 비서구

의 대중독재는 역사적 대립물이라기보다는 세계사적 근대라는 한 동전의 양면

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거의 같은 시기에 ‘비판과 연대를 위한 동아시아 역사포럼’

이라는 한·일 지식인 모임을 결성하여 동아시아의 지역 차원에서 ‘정치적 기획’

으로서의 ‘국사’ 패러다임에 대한 동시다발적 비판을 시도했다. 일본 열도에서

역사수정주의와 민족주의적 반동이 점차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민족주의

를 무장해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삼국의 ‘국사’에 대한 동시다발적 비판을 강조한 것은 동아시아 민족주

의의 ‘적대적 공범관계’를 드러내서 해체한다는 문제의식에서였다. 한국 민족주

의에 대한 비판이야말로 ‘적대적 공범관계’의 고리를 끊음으로써 일본의 역사수

정주의와 우경화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라는 판단은 확고했다. 그 밑에는 일본

의 민족주의를 비판하는 데 공동전선을 결성해온 일본의 좌파 지식인과 한국의

민족주의 지식인들 간의 신성동맹이 한반도의 민족주의를 정당화하고 결과적으

로 다시 일본 열도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정당화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

심도 있었다. 일본의 민족주의는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조선반도의 민족주의

에 대해서는 한없이 관대한 ‘양심적 지식인’이 아니라, 조선의 민족주의에 대해서

도 조심스럽게 비판의 각을 세우는 포스트모던 좌파 지식인들이 ‘역사포럼’의 일

본 측 파트너였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한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의 서술은 역사적 진리라 주장

하고 ‘새 역사교과서’는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식의 한국 역사학 주류의 비판

논리도 문제였다. 역사적 구성주의를 배제하는 나이브한 실증주의적 인식론도

그렇지만, 한·일 양국의 국사가 공유하고 있는 민족주의적 인식론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새 역사교과서’를 만든 수정주의 역사가들

에게 한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를 본받으라고 촉구한 『산케이 신문』의 도발적 해

설 기사 앞에서 실증적 비판은 무력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아무 거리

나치즘을 각각 ‘복지독재’(Fürsorgediktatur)와 ‘동의독재’(Konzensdiktatur)로 해석

하는 연구들이 간행되었다.24) 이탈리아의 파시즘 체제에 대해서도 밑으로부터

의 ‘동의’를 강조하는 연구들이 비슷한 시기에 간행되어 20세기의 독재를 재고해

야겠다는 생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일상적 파시즘’의 문제를 제기한 다음해인

2000년 『당대비평』에 ‘파시즘의 진지전과 합의독재’라는 역사-정치적 에세이를

기고해 20세기 독재 권력의 지배와 저항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 글은 좌우 양쪽

에서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 좌파들이 나치즘이나 박정희 체제에 대한 대중의 지

지를 인정할 수 없었다면, 우파들은 스탈린주의나 김일성 체제가 대중의 지지 덕

분에 작동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민중적 도덕주의에 안주하기보다는

풀뿌리 차원에서 독재체제를 가능케 했던 ‘밑으로부터의 독재’를 정면으로 응시

하는 것이 독재의 과거에 대한 비판적 기억을 만드는 첫 걸음이라는 생각에 어렵

게 논쟁을 이어갔다.

흥미로운 것은 “희생자인가 공범자인가”라는 책에 대한 폴란드 우파들의 반

응과 박정희의 ‘대중독재’에 대한 한국 좌파들의 반응이 놀라울 정도로 닮은꼴이

었다는 점이다. 폴란드 민중이든 한국의 민중이든 현실사회주의나 박정희 체제

같은 나쁜 권력을 지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경험 덕분에 좌파

독재와 우파 독재든 세계사적 근대에 대한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으

며, 이들이 서로 경합하면서도 서로에게 배우는 ‘트랜스내셔널한 사회 구성체’로

서 ‘대중독재’를 보겠다는 생각으로까지 발전했다. 특히 연구가 진행되면서 식민

주의적 폭력과 홀로코스트의 연속성에 주목하게 되자, 민주주의와 독재를 서구

와 비서구, 근대와 전근대, 혹은 정상과 일탈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범주화하

는 세계사의 ‘상식’에 대한 비판이 가능했다. 서구 식민주의의 원주민 제노사이드

와 강제수용소는 나치에게 생생한 역사적 선례였으며,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인

종주의는 그것을 주도한 사람, 제도, 사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빌헬름 독일제국

24) Konrad H. Jarausch ed., Dictatorship as Experience (New York: Berghan Books,

1999).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24 25‘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히 많다. 그단스크-단치히, 슐레지엔-실롱스크를 둘러 싼 독일-폴란드 논쟁이나

빌니우스, 르부프를 둘러 싼 폴란드-리투아니아, 폴란드-우크라이나 간의 논쟁도

그러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압권은 국경이 맞닿기는커녕 수천 킬로 떨어져 있는

노르웨이와 스페인 역사가들 사이에 벌어진 ‘서고트’ 역사 논쟁이다. 스칸디나비

아 남부에서 출발해 도나우강 유역과 이탈리아 반도를 거쳐 이베리아반도에 정

착한 서고트 족은 스페인의 국사에 포함되는가 아니면 노르웨이의 국사에 포함

되는가 하는 문제로 양측 역사가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던 것이다. 유럽의 후발

국가들에서 ‘국사’ 체제가 정비되던 20세기 초엽의 일로 기억된다. 아직도 코페

르니쿠스가 독일 사람이냐 폴란드 사람이냐 하는 문제를 놓고 독일과 폴란드의

언론 및 시민사회가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보면, 고구려사 논쟁은 동아시

아의 특수성을 반영한다기보다는 ‘국사’의 사유방식에 프로그램화된 논쟁인 것

이다. 고구려사 논쟁이나, 서고트족 논쟁이나, 코페르니쿠스 논쟁이나 비루하긴

마찬가지다.

RICH의 창립 기념 ‘변경사’ 국제학술대회는, ‘국사’ 비판도 좋지만 대안을 내

놓으라는 주변의 재촉에 대한 개인적 응답의 성격이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대안이 없다는 게 유일한 대안”이라는 식으로 ‘국사’에 대한 대안적 패러다임 문

제를 오랜 동안 피해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서양사’

나 ‘동양사’가 대안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했고, ‘비교사’나 ‘문명사’, ‘세계사’ 등은

‘국사’의 대안이 되기에는 약했다. ‘유럽학술재단’(European Science Foundation)

의 대규모 프로젝트인 “과거의 재현: 유럽의 국사 쓰기”(Representation of Past:

Writing National Histories in Europe)에 외부 전문가 자격으로 참여해 ‘국사’의 패

러다임을 넘기 위한 유럽 역사가들의 고투를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경

험이 대안을 고민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스테판 버거(Stefan Berger)에게 감

사하는 대목이다. 전통적인 ‘국제관계사’부터 ‘변경사’(border history), ‘얽혀있는

역사’(entangled history), ‘겹쳐진 역사’(overlapping history), ‘트랜스내셔널 역사’

(transnational history), ‘전지구사’(global history) 등 ‘국사’의 경계를 넘기 위한 유럽

낌 없이 강조하고 수미일관 ‘민족’을 집단적 역사 주체로 설정한 한국의 교과서는

옳고 그보다 훨씬 온건하게 민족사관을 피력한 ‘새역사교과서’는 틀렸다는 비판

은 어불성설이었다. 일부는 식민주의와 식민지라는 역사적 경험의 비대칭성을

지적하기도 했지만, 논리가 궁색하다는 감을 지우기 어려웠다. ‘새 역사교과서’의

구체적인 역사서술 부분에 대한 실증적 비판을 넘어 그것이 기대고 있는 인식론

적 논리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은 그 인식론을 공유하고 있는 한국의 ‘국정’ 교과

서에 대한 비판이 따라줄 때에야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다.

한·중 간의 역사논쟁도 상황은 유사했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영토를 중

국사의 공간적 범주로 규정하는 중국의 역사 교과서와 한민족의 역사적 활동공

간을 한국사의 공간적 범주로 간주하는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곧 충돌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동북공정으로 촉발된 한국과 중국의 고구려사 논쟁은 오히려 더

일찍 일어나지 않은 것이 이상했다. 고구려사의 국가적 귀속에 대한 주장만 다를

뿐, 근대 국민국가의 ‘국경’ 개념을 고구려라는 먼 과거에 적용하여 전유하려는

‘국사’의 인식론은 논쟁 당사자들이 모두 공유하는 인식의 틀이었다.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Research Institute of Comparative History and Culture, RICH)

의 창립기념 국제학술대회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 (2004, 04. 23-24)은 이

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고구려사를 고구려인에게!’라는 모토로 ‘변경사’의 시

각에서 고구려사 논쟁을 되짚어봄으로써, ‘국사’ 패러다임에 대한 학문적·정치

적 대안으로 ‘변경사’를 제시하고자 했다.25)

리투아니아 출신의 역사학자 리나스 에릭소나스(Linas Eriksonas)에게 학술

대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동유럽의 국경과 변경에 대한 발표를 부탁했을 때, 그가

보낸 답장이 아직도 생생하다. 동유럽에서도 이제는 그런 유치한 논쟁은 없는데,

동아시아는 아직도 그런 문제로 싸우는 게 놀랍다는 그의 답장에 부끄러웠던 기

억이 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유럽에서도 고구려사 논쟁과 유사한 논쟁은 무수

25) 임지현 엮음/비교역사문화연구소 기획, 『근대의 국경, 역사의 변경-변경에 서서 역사를 바

라보다』 (서울: 휴머니스트, 2004).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26 27‘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V. ‘역사가’와 ‘기억 활동가’의 사이에서

라울 힐버그(Raul Hilberg)는 말년의 한 에세이에서 “아우슈비츠 이후에 각주

를 다는 것 또한 야만적인 것은 아닌가?”라고 물은 바 있다. “나는 거기에 없었다”

는 에세이의 제목도 예사롭지 않다.27) 시와 아우슈비츠에 대한 아도르노의 질문

을 패러디한 게 분명해 보이는 이 질문이 놀라운 것은 힐버그 자신이 홀로코스트

에 대해 누구보다 엄격하고 단단한 실증적 연구를 해온 선구자적 역사가라는 데

있다. 그런 그가 역사적 사실을 추구하는 역사가의 소명을 부정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많은 경우 생존자들의 증언과 기억에 의존

할 수밖에 없는 홀로코스트의 진실 규명은 가시적 증거와 문자화된 자료에 의거

해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는 일반적인 프로세스와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 것처

럼 보인다. 기억의 퇴적물인 증언은 문헌 기록에 비해 부정확할 수밖에 없기 때

문에 사실을 재현하는 역사적 진실 게임에서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해

자/지배자들이 내러티브와 역사를 독점하고, 피해자/희생자들은 경험과 증언밖

에 없는 상황은 역사를 재현하는 데 심각한 윤리적 문제를 제기한다. ‘부정확한’

증언이 ‘정확한’ 증거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지 않으냐고 반문하듯 던진 힐버그의

이 질문은 결국 역사 인식론과 도덕성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힐버그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일단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에서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아우슈비츠의 경험이 역사가들에게 던져주는 인식론적 과제는 사

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역사가가 취해야 하는 포지션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한 생존자 여성이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수감자들의 무장

폭동을 회고하면서 ‘4개의 굴뚝이 폭파되었다’라고 증언했을 때, 역사가들은 당

시 그녀가 살았던 캠프의 소각장에는 1개의 굴뚝만이 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그

27) Raul Hilberg, ‘I was not there,’ in Berel Lang ed., Writing and the Holocaust (New

York: Holmes & Meier, 1988), pp. 17, 20, 25.

역사가들의 노력은 비단 방법론 등의 연구 내용에서뿐만 아니라 조직과 재정의

규모 면에서도 인상적이었다. ‘유럽연합’이라는 정치적 버팀목도 중요했지만 초

국가적 연구재단인 유럽학술재단의 존재는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의 발전에 결

정적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또 다른 한편에서는 하버드 대학의 스벤 베커트(Sven Beckert)와 듀크 대학의

도미닠 작센마이어(Dominic Sachsenmaier)가 주도하는 ‘Global History, Globally’

프로젝트 팀의 연구자로 참여하여 ‘국사’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지구사’ 혹은 ‘트

랜스내셔널 역사’에 대해 생각하고 토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었다. ‘지구사’

는 자본주도의 지구화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기보다는 밑으로부터의 지구화를

지향하는 정치적 과제를 안고 간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 가장 큰 성과였다. 이 모

임에서는 ‘지구사’가 북반구에 대한 남반구의, 중심에 대한 주변부의 문제제기임

을 분명히 했다. 종속이론이나 섭얼턴 연구, 맑스주의 세계체제론이나 페미니

즘의 이론과 문제의식을 자양분으로 삼아, 국민국가를 주역으로 삼는 서구중심

주의적 역사상에 대한 비서구의 대안적 역사상으로서의 ‘지구사’의 의미를 강조

했다. 지구적 관점에서 19세기 이후 근대 역사서술의 역사를 보면, ‘국사’는 유럽

의 근대 국민국가에서 시작되어 식민주의의 이동경로를 따라 주변부에도 전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주변부의 저항 민족주의가 실은 식민주의의 거울 효과라는

탈식민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주변부의 ‘국사’는 민족주의의 형태로 식민주의 혹

은 유럽중심주의적 담론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이다.26)

RICH에서 수행한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프로젝트는 그러한 문제의식의 연

장선상에서였다. 그러나 ‘트랜스내셔널 역사학’이 ‘국사’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바

람직한 대안으로 한국의 역사학계에서 자리 잡을지 혹은 ‘기타 역사학’으로 남아

있을지는 지켜보아야 할 일이다.

26) 이 대회에 대해서는, 임지현, “지구사 연구의 오늘과 내일: 지구적 차원에서 지구사를,” 『역

사비평』 83호 (2008, 여름).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28 29‘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귀소 본능을 자극하기도 하지만, 기억의 장으로서의 동아시아를 생각하면 ‘기억

활동가’로서의 입장을 더 분명히 해야 하지 않은가 하는 모순된 고민에 빠질 때가

많다. ‘서양사’ 연구자로 출발하여 동·서양의 경계를 넘는 ‘역사가’를 꿈꾸다, 이

제는 지구적 기억 공간에서의 ‘기억 활동가’로 이동하고 있는 내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학과 기억 연구의 건강한 긴장관계는 어떻게 가능한가? 역사학이

변하기 시작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그냥 역사학을 떠나는 것인가? 누가 같이

가고 누가 남는가? 이 이동은 학문적·정치적·도덕적으로 바람직한가? ‘역사가’

의 정체성과 ‘기억 활동가’의 정체성은 양립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

가? 단순한 봉합이 아니라 두 가지 정체성이 건강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며 서로

를 견인해내는 조건은 무엇인가?

질문만 있고 대답이 없는 상황은 답답하지만, 질문의 절실함에 비례하여 대

답이 어려운 면도 많다. 훗날 이러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을 때, 역사가로서의 내

정체성이 어떻게 변해 왔으며 그 복수의 다양한 정체성들을 유도하고 만든 그때

마다의 상황적 규정성과 정치적 함의는 무엇이었는지를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

까 한다.

(투고일자: 2015. 11. 14 심사일자: 2015. 11. 27 게재확정일자: 2015. 12. 10)

로서의 내 입장이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난다: “Second World War in Global Memory

Space,” in Michael Geyer and Adam Tooze eds., Cambridge History of Second

World War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 “Victimhood

Nationalism in Contested Memories-Mourning Nations and Global Accountability”

in Aleida Assmann and Sebastian Conrad eds, Memory in a Global Age:

Discourses, Practices and Trajectories (Palgrave Macmillan, 2010); -----, “Narody-

ofiary i ich megalomania,” Więź No.616-7. (2010).

녀의 증언이 거짓이라 선고했다. 그러나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계 심리학자 도

리 라웁(Dori Laub)은 자기 눈앞에서 일어난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건을 기억하

는 증인의 기억은 과장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지식으로 얻어진

기억’(intellectual memory)은 사실과 부합하지만, 트라우마처럼 ‘깊이 새겨진 기

억’(deep memory)은 과장된 감정 속에서 사실과 어긋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

이다. ‘지식의 기억’과 ‘깊은 기억’ 중에서 기억의 진정성이 후자에 있다는 것은 부

인하기 힘들다. 동아시아로 눈을 돌리면, 사실을 입증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군

위안부’의 증언을 거짓으로 몰아가는 천박한 실증주의가 ‘아우슈비츠의 아포리

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렇게 볼 때, “섭얼턴은 말할 수 있는가?”라는 스피박(Gayatri Spivak)의 질문

은 “역사가는 들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 보고 싶다. 홀로코스트 생존

자나 일본군 성노예 희생자들의 증언을 보면, 섭얼턴이 말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듣지 못한 것이다. 제노사이드나 일본군 성노예 같은 트라우마를 겪

은 증인들과 만나는 장은 문헌 증거를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며 증인들을 취조

하는 역사의 취조실이 아니라, 사실과 어긋남에도 불구하고 아니 사실과 어긋나

기 때문에 증인들이 드러내는 ‘깊은 기억’에 귀를 기울이고 그 진정성을 복원하는

‘기억 활동가’(memory activist)적인 태도가 아닌가 한다. ‘역사가’의 위치에서 ‘기억

활동가’로의 위치 이동은 일차적으로 기억의 인식론이 요청하는 바이기도 하지

만, 점차 비루해지는 동아시아의 역사전쟁에서 역사가들의 역할에 대한 고민 끝

에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역사가들의 작업은 곧 과거에 대한 사회적 기억을 만

드는 작업이며, 이 점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역사가’는 ‘기억 활동가’인 것이다.

나는 최근 몇몇 국제 모임에서 스스로를 ‘기억 활동가’라고 소개한 바 있다.

‘서양사가’로부터 ‘역사가’로의 자리 이동에 이어, 최근 ‘트랜스내셔널 메모리’ 프

로젝트를 진행하면서부터는 다시 ‘역사가’에서 ‘기억 활동가’로의 위치 변화를 꾀

하고 있는 셈이다.28) 가끔은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역사학으로의

28) ‘트랜스내셔널 메모리’에 대한 아래의 몇몇 글들은 국경을 넘어 사유하는 ‘기억 활동가’

주제어 : �‘자아사ego-history’,�‘서양사’의�역사,�상상의�지리,�‘특수한�길’�테제,�헤게모니적�거

울,�글로벌�히스토리,�국경을�넘는�역사,�트랜스내셔널�메모리

Keywords : 00

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30 31‘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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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 史 學 報 第 2 2 8 輯 ( 2 0 1 5 . 1 2 )32 33‘역사가’ 되기의 어려움

[Abstract]

Ego-history of a ‘Western Historian’ in the Postcolonial Korea-Shifting from ‘Western history’ to history per se-

Lim, Jie-Hyun

(Sogang Univ.)

This paper problematizes the ‘Western history’ as a disciplinary field by scruti-

nizing the tri-partite structure of history research and education in the postcolonial

Korea. Western history as a discipline carries the multi-layered transnationality of

the modern historiography on a global scale. The global trajectory of the modern

historiography shows that ‘Western history’ is a conspicuous co-product of Euro-

centrism, Self-Orientalism, Japanese Orientalism, the bifurcation of the Universal

and the Particular, discursive struggle for the national recognition and Marxist

historicism. ‘Western history’ in East Asia represents the hegemonic mirror onto

which national histories in Japan and Korea reflect their own historical peculiari-

ties. That explains why ‘Western history’ has worked as a nationalist rationale. In

this paper the disciplinary history of ‘Western history’ will be interwoven with the

ego-history of myself who had started one’s academic career as a ‘Western his-

torian’ and grew to a transnational/global historian. Once put in the intellectual

interaction on a global scale, the ego-history of a Western historian leaving traces

in the postcolonial Korea, post-communist Poland and transnational problem

space would contribute to unlearning ‘Western history’ per se.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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