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ll Categories
Home > Documents >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Date post: 18-Jul-2020
Category:
Upload: others
View: 0 times
Download: 0 times
Share this document with a friend
58
여성시대 2 MBC 라디오 매일 아침 09:05~11:00 04 2012 April 이달의 편지 부자의 조건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서울시 영등포구 ‘헤어스타일’ 박선자 씨
Transcript
Page 1: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2

MBC 라디오 매일 아침 09:05~11:00

042012 April

이달의 편지부자의 조건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서울시 영등포구 ‘헤어스타일’ 박선자 씨

Page 2: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04

08

68

75

81

98

102

106

110

114

112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이달의 편지

행복을 찾는 사람들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코너 속 편지

연애에서 결혼까지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그 사람의 도전 이야기

양희은의 스튜디오에서

강석우의 스튜디오에서

행복한 책 읽기

발행일 발행인 대표이사 등록번호진행 프로듀서 방송 인터넷 주소방송중 열린전화 문의 주소편집·제작 월간지

.

표지그림

2012 April

04 75 114

2 0 1 2 0 4

Page 3: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4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5

서울 영등포구 ‘헤어스타일’의 박선자 씨를 찾아서

마음까지 치유해주는 가발

글 | 성기애 (여성시대 작가)•사진 | 송인혁

이제는 들을 수 없는 사라진 소리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고장 난 시계 팔아요~ 머리카락 팔아요~”입니다. 햇살 가득 고인

골목길을 누비며 음률에 맞춰 구성지게 외치던 그 정겨운 음색은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도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머리카락을 사러 다니던 사람이 있었고, 그 머리카락을 쌀과 바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꿔 식구들의 배를 채우던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많은 머리카락

들은 가발로 만들어져 해외로 수출되었지요. 가발이 한국 수출의

주역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 <여성시대> 가족 박선자 씨도 당당한 수출역군이었습니

다. 청춘을 가발과 함께 보낸 30년 숙련공이지요. 망사 같은 천에 코

바늘처럼 생긴 특수한 바늘로 머리카락을 한 올 한 올 꽂아서 묶는

작업을 합니다. 손동작이 얼마나 빠른지 손이 안보일 지경입니다.

아침 9시면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여성시대>와 함께 시작한 일

은 저녁 9시나 돼야 끝이 납니다. 그 사이 손님들이 와서 두상을 재

고, 가발 색깔을 정하고, 원하는 바를 이야기 하는 동안에도 박선자

씨의 손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입니다. 마

치 자동으로 작동하는 기계 같습니다.

이 일을 배울 때는 찔끔 눈물이

날 정도로 힘들게 배웠지요. 하지

만 지금은 배우길 잘했다는 생각

이 든답니다. 나이 오십 넘어 기술

자로 대접받는 일이 어디 그리 흔하

겠습니까? 그 부지런한 손으로 아이들

키우고, 집안도 일으켜 세웠지요.

복잡해지는 세상에서 받는 스트

레스 때문인지 요즘 탈모 인구가

점점 늘고 있다는군요. 수출 위주

였던 가발이 이제는 내수 위주로

변하고 있습니다. 또한 머리카락이

줄어드는 여성들이 부분가발을 하고,

Page 4: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6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7

젊은 여성들은 멋내기 패션가발을 찾는 추세라 박선자 씨도 덩달

아 바빠졌습니다.

가발은 대략 두 종류로 나누어집니다. 인모가발과 인조가발로

요. 인조가발도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인모가발을 찾는

분이 더 많다고 합니다. 또 전체가발보다는 결점을 보완하는 부분

가발이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가발을 맞추는 분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내 머리 같은 가발’이라는군요.

가발이 한국 수출의 주역이었던 시절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

리카락으로 가발을 만들어 미국이나 유럽으로 수출을 했지요. 하

지만 요즘은 중국이나 인도에서 머리카락을 수입한다고 해요. 아직

은 서구식 식단에 물들지 않은 그곳 여성들의 머릿결 상태가 좋아

서 그렇답니다.

박선자 씨와 동료들이 만든 가발은 인기가 좋습니다. 일반 고객뿐

만 아니라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무대에서도 자주 볼 수 있습니

다. 배우들이 캐릭터에 맞는 분장을 할 때 머리 모양이 많은 걸 좌우

하니 가발이 꼭 필요하기 때문이지요. 또

놀이공원 퍼레이드 때 배우들

이 쓰고 나오는 알록달록

한 멋진 가발도 이곳

을 거쳐 갑니다.

선천적으로 머

리카락이 적은

아이들이나 항

암 치료로 인

해 머리가 빠

진 환자들 가발을 만들 땐 안쓰러운 마음에 더욱더 정성을 쏟아 만

든답니다. 머리 때문에 외출을 꺼리고, 사람 만나는 걸 두려워하던

분들이 가발을 쓰고 자신감을 회복했다며 환한 모습으로 다시 찾아

올 때 박선자 씨는 일에 대한 보람을 느끼곤 하지요.

하지만 젊은 사람들 중에 이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 가발 만

드는 일이 박선자 씨 세대로 끝나는 건 아닌가 안타깝기만 합니다.

잃어버린 자신감을 찾아주고, 가슴 깊이 맺힌 한을 풀어주는 가발

만드는 일이 대대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가발과 함께한

30년의 세월, 참 가슴 따뜻한 나날들이었습니다.

여성시대6

올해의 글제는 ‘그날’이었습니다.수상작과 수상자 인터뷰는 4월 16일부터 일주일 동안

여성시대 방송을 통해 소개됩니다.

<2012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 수상작 시리즈>

놓치지 마십시오.

2012 여성시대 신춘편지 쇼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1 7

Page 5: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8 이달의 편지 9

제가 이렇게 <여성시대>에 글을 쓰는 이유는 올해 중학교

졸업반인 딸이 생각하는 부자와 그 부자의 조건을 맞추

어주려고 애쓰는 남편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입니다.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친구 생일파티에 다녀온 딸

이 허겁지겁 뛰어오더니 제게 이러는 겁니다.

“엄마, 엄마. 친구네는 엄청 부자다.”

저는 부자란 말에 눈이 동그래지면서 딸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

했습니다.

“그래? 친구 아빠는 뭐 하신데? 집은 몇 평인데?”

그러자 딸이 “몰라” 이렇게 짧게 말하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물었습니다.

“몰라? 그럼 어떻게 부자인지 알았어?”

그러자 우리 딸은 옆에 있는 아빠를 한 번 쳐다보더니 이러는 겁니다.

※ 2012년 3월 1일부터 31일까지 방송된 사연들 중 가려 뽑아 실었습니다.

09 • 부자의 조건

13 • 제3의 직업

17 • 행복 그리고 슬픔

20 • 드디어 집으로

24 • 또 한 명의 엄마

29 • 삼부자는 용감했다

33 • 몰래 들어오시는 도둑 나으리께

36 • 입장 차이

39 • 형부, 고맙습니다

42 • 하늘나라 남편에게

45 • 해피엔딩

48 • 아기를 두고 오다

53 • 바람난 아내

57 •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어머니

60 • 이런 시아버지 이런 며느리

65 • 네 아이의 아빠

이달의Letter 1

이성미 | 대전시 중구 오류동

일러스트 | 김성신

Page 6: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0 이달의 편지 11

“친구 집에는 거실장에 양주가 엄청 많이 있어. 아빠가 그랬잖

아. 부자들은 양주 마시는데 아빠는 돈이 없어서 만날 소주만 마신

다고….”

그렇습니다. 소주 애호가인 울 남편이 언젠가 술 마시고 들어와 장

난삼아 딸에게 한 말인데 딸은 너무 깊이 새겨들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후 딸의 말에 충격을 받은 남편은 양손에 빈 양주병을 잔뜩

들고 오더니 딸이 잠든 사이 그 빈 병에 보리차물을 채워 거실장에

진열을 해놓으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그래, 아빠는 부자가 아니라 진짜 양주는 못 사고 이렇게라도

해서 우리 딸이 부자가 된다면 아빠는 우리 딸을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남편은 자고 있는 딸을 깨워 진열장을 열어

보여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 딸, 이제 우리 집도 부자 맞지? 아빠가 다음에 더 비싼 걸

로 많이 사놓을 테니까 친구들 놀러오라고 해. 알았지?”

그러자 딸은 뛸 듯이 기뻐하며 우리 집도 부자라며 엄청 좋아했

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4학년이 된 딸은 이번에도 친구 집에 다녀오

더니 또 다시,

“엄마, 엄마. 내 친구 집은 엄청 부자다.”

저는 ‘이번에는 또 친구 집에서 뭘 보고 온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왜?” 하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우리 딸 이렇게 말합니다.

“내 친구네 집은 화분이 엄청 많아.”

그렇습니다. 언젠가 딸이 자기 방에 화분 하나 놔달라고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돈 없어서 안돼”라고 했더니 이번에는 우리 딸에

게 부자의 조건은 화분이 많은 집이었던 거죠. 물론 그날 이후 우

리 부부는 10만 원 상당의 화분과 화초를 사와 딸 방, 아들 방, 거

실에 각각 놓아두었답니다.

또 6학년 때는 비행기 타는 사람들이 부자라고 해서 큰 맘 먹고

가족끼리 제주도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다시금 문제가 생겼습

니다. 글쎄 비행기 타는 기쁨에 젖어 있어야 마땅한 아이가 음료수

한 잔 마시고 난 후부터 자꾸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두리번

Page 7: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2 이달의 편지 13

거리는 겁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우리 딸 이러는 겁니다.

“엄마, 밥은 언제 줘? 왜 담요는 안 줘?”

그렇습니다. 비행기를 처음 타는 딸은 언젠가 해외여행을 다녀온

친구 말을 듣고 비행기만 타면 무조건 밥과 담요를 준다고 생각했

던 거죠. 하지만 남편도 그 조건만큼은 쉽게 들어주기 힘들 것 같

다며 딸을 위로하더군요. 그리고 몇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4명

의 가족이 함께 비행기에서 밥도 먹고 잠도 자는 그날을 위해 열심

히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 또 다시 딸 때문에 남편과 저는 옛날을 회상하며

한바탕 웃었답니다. 내용인 즉 지난 주말, 백화점에 옷 수선을 맡

기려고 치킨집에서 받은 쇼핑백에 주섬주섬 넣고 있었습니다. 그런

데 갑자기 딸이 자기 방에서 한눈에 딱 봐도 명품 쇼핑백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고급스러운 쇼핑백을 들고 나오더니 치킨 쇼핑백에 들

어있는 옷을 빼서 그 명품 쇼핑백에 넣어주면서 이러는 겁니다.

“엄마 나이에는 이 정도는 들어줘야 부자 같아 보이잖아.”

이런 딸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웃고 있으니 딸이 한마디 더 하

더군요.

“엄마, 이번에는 쇼핑백이지만 담에 돈 많이 벌면 진짜 명품백도

사주고, 엄마 아빠 밥 주는 비행기도 태워줄게. 기다려. 알았지?”

그러면서 저를 꼭 껴안아주는데 정말 행복해서 눈물이 나왔습니

다. 이런 우리 딸 귀엽고 멋지지 않나요! 그리고 부자가 되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비록 물질적으로 부자는 아니기에 아이

들이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을 다는 못해주지만, 사랑으로 이

루어진 가족이 있어 마음만은 세상에서 가장 부자랍니다.

내 나이 64세. 만으로 하면 63세로 작년 2011년 8월 31일,

41년간 정들었던 교직 생활을 마치고 정년퇴직을 했다.

더 자세히 이야기를 하자면 41년간 교직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첫

직업으로 12년간은 군 생활을 했고, 두 번째 29년간은 교직 생활을

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사람이 말하는 제3의 인생, 세 번째 직업

에 종사하고 있다. 정년퇴임을 한 후 틀에 박힌 생활에서 벗어나 그

동안 못 잔 늦잠도 자보고, 아내와 산에도 올랐다. 시간에 얽매어

있을 때와는 달리 너무나 느긋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

정년퇴직을 먼저 한 선배들의 이야기로는 퇴직 후 집에서 놀지

말고 어떤 일이라도 하라고, 하지 않으면 금방 늙어버린다고 했다.

한 달이 지나고 나니 놀러 다니는 것도, 등산을 하는 것도 뜸해지

고 아침에 일어나면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며 ‘오늘은 무엇을 하고

지내지’ 하며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는데, 퇴직을 한지 한 달하

Letter 2

김오동 | 경남 김해시 내동

Page 8: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4 이달의 편지 15

고도 보름이 지나 근무했던 학교 교감선생님으로부터 잠시 보자는

전화가 왔다.

교감선생님은 만나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다.

“선생님, 건강이 허락하신다면 학교 매점에 근무하시면 어떻겠습

니까? 급료가 너무 형편이 없지만 소일거리라고 생각하시고요. 근

무시간은 하루 4시간입니다. 오전 10시 30분에 출근해서 오후 2시

30분까지, 급료는 시간당 5~6천 원 정도예요. 학생들이 등교하는

날만 출근하시면 됩니다.”

‘아니 이게 웬 떡이냐. 그렇지 않아도 지금 어디 취직할 데가 없

는지 알아보는 중이었는데 말이야.’ 그런데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에

서는 ‘그래도 퇴직을 하기 전에는 한 달에 4~5백만 원씩 받았는데

고작 5~60만 원이라니 내 인생이 이렇게 추락할 수 있는 거야? 이

일을 안 해도 한 달에 연금이 기백만 원은 나오는데 이거 쪽팔려서

하겠나. 퇴직하기 전의 동료들이 나를 보고 어떻게 생각할까? 아니

야. 빨리 자존심을 버려야 내 건강에 도움이 돼’ 하며 고민하느라

머릿속이 어지러웠지만 입으로 나온 말은 “한번 해보지요”였다.

근무를 하기 하루 전 내가 근무할 매점을 둘러보니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상품을 진열할 진열대, 우유를 넣고 판매할 냉장고, 얼

음과자를 보관할 냉동고를 깨끗하게 청소를 한 후 내일 판매할 물건

을 주문하고 집에 돌아와 자리에 누웠는데 기뻐서 잠이 오질 않았다.

다음날 일찍 출근해서 빵과 우유, 얼음과자를 받아서 진열을 하

고 쉬는 시간을 기다리는데 가슴이 울렁거릴 정도로 설레었다. 드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판매는 나 혼자이므로 창구 속으로

손이 들어오고 여기저기서 “빵 주세요, 우유 주세요, 얼음과자 주

세요”라고 외치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바쁘다. 10분의 휴식시간

이 끝나는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교실로 들어간 후 매점 안은 조

용해졌다. 땀을 닦으며 앉아 쉬고 있는데 두 명의 학생이 뛰어와서

“아저씨, 빵 두 개만 주이소”라고 한다. 옆의 학생이 “야, 인마! 아

저씨가 뭐고? 쌤이지”라고 하자 그 학생이 “죄송합니더. 쌤요, 빵

두 개만 주이소.” 빵을 판매하면서도 웃음이 나왔다. 그래도 퇴직

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아저씨보다는 쌤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겨웠다. 쌤이라고 하는 녀석들, 아저씨라고 하는 녀석들.

어떨 때는 나 자신도 헷갈릴 때가 있다. 쌤이라고 부르는 녀석은

나에게 수업을 받은 학생이었고 수업을 받지 않은 녀석은 아저씨라

고 불렀다.

“쌤요, 쌤은 이제 수업은 안하고 빵만 파능교?”라고 묻는 학생들

과 “쌤은 빵 파는 게 좋은교? 아이믄 수업 하는 게 좋은교?”라고

묻는 학생도 있었다. 나를 이 학교에서 퇴직한 선생님으로 알든 모

Page 9: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6 이달의 편지 17

르든 모두가 씩씩하고 늠름한 나의 제자들이다.

한 번은 왜소해 보이는 1학년 학생이 진열대 앞에 서서 휴대폰에

대고 빵 종류를 열거한다. “초코빵, 마늘빵, 맥버거….” 상대방이

아무거나 사오라고 하는 모양이다. 빵을 무려 11개나 사간다.

참고로 내가 근무하는 김해건설공업고등학교 학생들은 매일 중장

비인 포크레인, 불도저, 지게차를 움직이고 선반 기계를 돌린다. 쇠

를 깎고 다듬고 벽돌을 쌓고 폴대를 잡고 측량을 하며 전봇대를 타

고 올라가서 전선줄을 잇는, 산업현장에서 꼭 필요로 하는 실습 위

주의 교육을 하다 보니 밥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파서 빵을 사먹고

도 조금 있다 또다시 빵을 먹는 학생들도 많았다. 어련히 반에서 여

러 명이 돈을 모아 사가는 가보다 하고 11개를 팔았다.

하루의 일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면서 “여보, 오늘 한 학생이 빵

의 종류를 전화로 말하더니 무려 11개나 사갔어” 하니 아내가 걱정

스럽게 한마디 한다.

“여보, 그 학생이 요즈음 말하는 빵 셔틀 아닐까요?”

“그래, 그래. 그럴지도 모르겠다.”

“또 그 학생이 그런 식으로 빵을 사면 학생 이름을 봐 두었다가

담임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라고 하면 어떨까요?”

그렇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그 학생은 오지 않았고, 또 그렇

게 많은 빵을 사가는 학생도 없었다.

매점 안이 넓어서 학생들이 빵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

을 스스럼없이 한다. 오늘도 빵을 팔면서 생각한다. 학생들의 이야

기에 귀를 기울이고, 또 시간이 난다면 학생들과 이야기하면서 고

민도 들어주는 그런 스승이 되고 싶다는. 단지 빵과 우유만 팔면서

시간만 때우고 시급을 받는 그런 스승이 아닌 진짜 스승이고 싶다.

저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는 예비신랑입니다. 30년 넘게 살

아오면서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군대 갔다

와서 힘든 일도 많이 해보고, 경험 삼아 전국 곳곳을 다니며 일도

해보았고요. 그러다 보니 제 또래의 친구들보다는 돈을 많이 못 모

아놓은 것 같습니다. 한 직장을 꾸준히 다녀야 하는데 젊었을 때의

경험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 같아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

다’는 생각으로 살다보니 제 수중에 돈이 조금밖에 없답니다.

그런 와중에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처음 만나면서

부터 결혼을 생각하게 만든 사람이었습니다. 제 나이도 있고, 예비

신부도 나이가 있어서 양가에서는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진행하셨

습니다. 설에는 양가에 인사도 갔다 오고요. 저희 부모님도 모두

예비신부를 너무나 예뻐해 주시고 장인장모님 되실 분도 저를 아

들같이 든든히 여겨주셔서 감사하답니다.

Letter 3

한성욱 | 서울시 마포구 동교동

Page 10: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8 이달의 편지 19

제 직장이 서울에 있어서 서울에서 집을 얻어야 하는데 지금은

회사 기숙사에 있어서 서울 집값이 ‘비싸다, 비싸다’ 해도 실질적

으로 가슴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집을 얻으러 다니다 보니

왜 사람들이 ‘집값, 집값’ 하는지 알 것 같더라고요. 작년 11월부터

시간이 날 때마다 부동산에 들러서 집을 알아보고 있는데요, 제가

가진 돈으로는 어림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예비신부한테 물었습니다.

“우리 결혼 준비하면서 다른 거 많이 줄이고 그 돈으로 집을 한

평이라도 더 넓은 곳으로 가면 안 될까?”

지방에 살고 있던 예비신부는 처음에는 서울의 집 시세를 잘 몰

라서 조금 섭섭해 하는 것 같았지만 저와 함께 부동산에도 다녀보

고 집값도 알아보고 하더니 결국은 예물이나 예단 같은 걸 조금 저

렴한 곳에서 하거나 아예 안하거나 줄여보자고 먼저 말을 꺼냈습니

다. 걱정을 하시던 부모님께도 말씀을 드렸더니 그저 예비신부한테

고맙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겨우 겨우 돈을 맞춰도 조금 모자라더군요. 결국 부모님

께서 당신들의 노후자금으로 모아두셨던 돈을 저에게 건네셨어요.

그 돈만은 절대 받을 수 없다고 했지만 무조건 받으라고 하셨습니

다. 나머지 돈을 대출하거나 월세로 전환하여 내면서 살겠다고 하

니 “서울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 하시며 있는 돈 먼저 쓰라고 하

셔서 결국은 그 돈까지 합쳐서 집을 구하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이름 있는 아파트에 신혼부부가 살기 적당한 평수가 아

니라 12평의 빌라를 구했습니다. 그것도 얼마나 감사하고 좋은지

집 계약을 하는데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요. 옆에서 예비신부가

저를 더 위로해줬어요. 앞으로 열심히 살아서 큰집으로 이사 가자

며 둘이서 살기에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행복하게 살자고 말하는

그 마음이 예뻤습니다.

결혼을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행복하게 살 생각을 하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너무나 힘이 드네요. 얼마

전 한 남자가 결혼을 앞두고 집을 못 구해서 세상을 등졌다는 뉴스

를 접했을 때에는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집을 구해놓고 나니 곧 있을 결혼식이 기다려집니다. 대

한민국의 국민으로서, 결혼 후 자녀도 갖고 남들 사는 것처럼 열심

히 행복하게 살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부모님의 노후자금도 제가

열심히 일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Page 11: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20 이달의 편지 21

배고프고 외로웠던 기나긴 2년간의 원룸생활을 마치고 부

모님이 계시는 따뜻한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직

미혼인 저는 부모님의 집에서 한동안 철없이 생활을 하다가 세상의

혹독함을 알아야 한다는 엄마의 지론에 의해서 쫓겨났었거든요.

그게 2년 전 이맘때였습니다.

엄마가 해주시는 따뜻한 밥을 먹으면서도 “엄마, 나 아침부터 이

렇게 거친 밥을 주면 어떻게 해? 나 국 없인 밥 못 먹는 거 몰라?”

하면서 엄마가 정성스레 차려주신 밥을 한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쌩하니 출근을 해버린 적이 숱하게 많았어요. 제 방 청소는

물론이거니와 집안일엔 손끝 하나 안 대고 내 몸뚱이만 씻고 가꾸

기 바빴습니다. 부모님께서 사시사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시고 여

름엔 에어컨으로 시원하게, 겨울엔 방바닥이 지글지글 끓도록 보일

러 온도를 높여주셨지요. 저는 그저 당연한 것인 줄로만 알고 누리

고 살았었죠.

그렇게 나이 30살이 넘도록 부모님한테 얹혀살면서도 집에 세금

한 번, 도시가스 요금 한 번, 수도요금 한 번 내지 않고 공짜로 먹

고 살았답니다. 그뿐인가요? 직장생활하면서 버는 돈은 십 원 한

푼도 저축하지 않고, 예쁜 옷, 좋은 구두, 가방을 사는데 다 써버렸

죠. 그때는 요즘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된장녀’처럼 정신을 못 차

리고 살았어요.

하루하루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지만 저는 그걸 전혀 몰랐어

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부모님한테 피해를 주는 건 아니

잖아?’ 이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혼자 잘난 척을 하며 콧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부모님께서 저를 조용히 부르셨습니다.

“네 나이가 서른이 넘었는데 늙은 부모가 밥하고 빨래해주고 청

소해주는 게 말이 되는 소리냐? 내가 네 덕보고 살고 싶다는 소리

가 아니다. 너도 세상살이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한번 나가서 살아

봐라.”

부모님의 청천벽력 같은 그 소리에도 철없던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기회라고까지 생각했지 뭐예요.

‘아싸! 나도 이제 해방이다. 혼자 살아보는 거야.’

이런 생각이 앞섰죠.

당장 집부터 구했습니다. 보증금 없이 월세를 내는 집을 구했어

요. 사실 보증금이 없었거든요.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님께서 집을

얻어 주시고 독립을 하라는 말씀인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정말 완

전한 독립이었어요. 저에게 모아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죠. 보증금

없이 월세만 20만 원 내는 작은 원룸을 구했습니다.

Letter 4

애청자

Page 12: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22 이달의 편지 23

집을 나가니까 시시콜콜 잔소리하시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휴일

에는 실컷 자고, 내가 밥 먹고 싶을 때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게 정말 홀가분했어요.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죠.

그해 여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쌀쌀한 날씨 때문에 난방비는

치솟고, 코딱지만 한 원룸의 관리비와 전기요금, 쉽게 생각했던 월

세 20만 원에 각종 공과금까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

럼 월급은 순식간에 사라졌어요. 물 한 병 사먹는 것도 다 돈이 들

었어요. 생활비가 만만치 않았죠.

그러던 와중에 설상가상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내가 누군데?’ 하는 자만심으로 아무 직장이나 갈 수 없다

고 공부를 시작했어요. 그렇게 어영부영 1년을 지내다보니 저에게

남은 건 빚, 그리고 병든 정신과 몸이었어요. 그렇게 잃어버린 게

많았던 저였지만 되찾고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었어요. 그건 바로

부모님의 소중함과 제 철없던 시절의 잘못된 점들이었지요.

건강에 안 좋다고 인스턴트식품은 절대로 안 해주시던 엄마가

생각이 났습니다. 끼니를 거르면 걱정하시던 엄마. 저는 라면 한

그릇으로 끼니를 때우고, 겨울에는 전기장판 하나로 잠을 청해야

했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운 곳에 살았지만 부모님 집에 갈 수 없

었던 이유는 바로 부모님 때문이었어요. 하늘을 찌르던 콧대도 풀

이 죽어서 ‘반찬이라도 챙겨갈까’ 하고 집에 찾아가면 이렇게 집에

와서 밥 먹고 반찬 가지고 가게 할 거면 독립시키지도 않았다면서

혹독하게 저를 내몰아치셨거든요. 그때는 얼마나 서럽고 억울한지

눈물까지 펑펑 흘리면서 다시는 안 오겠다고 소리도 지르고 했었답

니다.

그때는 너무 억울하고 분했는데, 다 부모님이 저 인간되라고 모

질게 하신 것을 이제는 알 것 같아요. 철들고 나니 가장 먼저 직장

생활을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년 추석 이

후로 계속 면접을 봤지만 매번 낙방이었어요. 나이 많고 철없는 저

를 써줄 직장이 없더라고요. 그러면서 점차 저도 의기소침해지고

자꾸 자신감이 없어져서 우울증까지 생겨 일상생활이 힘들었어요.

줄기차게 면접 보러 다닌 지 6개월이 넘어서야 드디어 오늘, 지난

주에 면접을 본 곳에서 합격 연락이 왔어요. 정말 기뻐서 고요한

도서관에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꺅 질렀답니다. 그리고 바로 엄마

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엄마, 엄마. 나 합격이야. 나 이제 일해. 나 이제 살았어!”

엄마는 축하한다며 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월 되면 집에 들어와라. 많이 힘들었지? 우리 딸, 밖에 나가서

고생도 많이 해보고 이제는 철도 들었으니 들어와서 살다가 결혼

도 해야지. 집 정리하고 들어와. 따뜻한 밥 해줄게.”

엄마가 다시 저보고 집으로 들어오래요. 따뜻한 집으로요. 저 다

시 집으로 들어가면요, 당연히 제 방 청소와 빨래는 기본으로 제가

하고요. 밥은 잘 못하겠지만 설거지와 집 안 청소까지 스스로 알아

서 도울 거예요. 세금을 내는 것도 전부 우리 가족의 돈이라는 걸

알았으니까 가스, 전기, 물, 모든 걸 아껴 쓰고요. 매달 부모님께

생활비도 드릴 겁니다. 2년 전의 제 모습으로 절대로 다시 돌아가

지 않을 거예요.

이제는 부모님께서 의지하실 수 있는 의젓한 딸이 되도록 할 거

랍니다. 오늘은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될 거예요. 새로운 직장생

활과 부모님과의 생활에 가슴이 두근거릴 만큼 기대된답니다.

Page 13: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24 이달의 편지 25

저는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의 댁을 방문하여 안전을 확인

하고 말벗도 해드리며 불편하신 일들을 해결해드리는

일, 전화로 안부를 묻는 일을 합니다.

3년 전,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입니다. 첫 대면부터 반갑게 맞아

주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누구길래 개인사정을 그렇게 자세히 묻는

건지 경계하며 대답해주시는 분도 있고, 무척 어색하기도 해서 어

떻게 이분들과 친해질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런대로 친절하게 대해주시는 분들이 많았는데 유독 한

분이 저를 당황케 하고 무섭게 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어르신 댁

벨을 누르니 별 인기척이 없어 기다리다 현관문을 만져보니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계십니까?” 하며 들어가 보니 어르신께선 누워 계시더군요.

“어르신, 앞으로 제가 어르신 댁을 방문하여 안전 확인도 하고

말벗도 해드릴게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이셨어요. 저는 속으로 안심하며 성함을

확인하고 인적사항을 여쭸습니다.

“어르신 고향은?”

“어르신 질병 있으신가요?”

“어르신 자녀분은?”

그러자 누워 계시던 어르신께선 벌떡 일어나시며

“아니 자식 없는 걸 왜 자꾸 물어? 이 사람이 와서 묻고 저 기관

에서 나와서 묻고. 나 참.”

하시는 눈동자를 보니 불안해하시는 표정이 역력했고 화를 내시

며 짜증스러워 하시는 거예요. 순간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하는

생각에 “죄송합니다” 하고 죄 지은 사람처럼 그냥 나올 수밖에 없

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그 어르신 댁을 방문하는 날만 되면 어르신 눈치를

보며 이것저것 여쭤보고 간신히 임무를 마치고 나오면서 긴 한숨을

쉬어야만 했습니다. 어르신은 파킨슨병을 앓으셔서 온몸이 점점 굳

어지고 약간의 떨림 증세가 있고, 우울증을 앓고 계셔서 말씀이 없

으셨습니다. 하루하루 조심스러운 방문이 이어지다 보니 1년이 넘

도록 대상자 중에서 유독 어렵고 어색한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 거

예요.

그러던 어느 여름날, 어르신 댁 문이 열려 있어 가만히 들여다보

니 어르신께선 천주교에서 하는 묵주 기도를 하고 계시더군요. 저

는 조용히 다가가 어르신 옆에 쭈그리고 앉아 같이 기도를 했습니

다. 기도가 끝나자 어르신께선 “기도 할 줄 알어?” 하시는 거예요.

“그냥 이렇게 하면 되잖아요” 하며 어르신 흉내를 내니 빙그레 웃

Letter 5

임병한 | 대전시 유성구 송강동

Page 14: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26 이달의 편지 27

으시는 겁니다.

그런데 그 미소가 어찌나 부드러운지요. 그후로 이런저런 이야기

를 나누었습니다. 어르신도 조금씩 마음을 여시며 지난 세월 살아

온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19세에 결혼을 했지만 자식을 낳지 못해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한 많은 세월을 보낸 이야기를 하시는데, 가장 힘든 것은 외로움이

었답니다. “혼자 살면서 안 해본 일이 없고, 고생도 많이 했는데 모

진 목숨 언제나 끝이 나려나. 빨리 죽기나 하지. 이렇게 오래 살고

있어”라고 하시며 긴 한숨을 쉬시더군요.

그리고 얼마후, 그날따라 저녁 늦게 어르신 댁을 방문했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어르신께서 효자손을 등에 대고 씨름을

하고 계신 거예요. 가까이 다가가 보니 등이 빨간빛이 돌며 피부가

오돌토돌했어요.

어르신께서 “대상포진이래” 하시며 혼자서는 등에 약을 바를 수

가 없어서 효자손에 약을 묻혀 바르고 계시더라고요. 효자손을 빼

앗아 내려놓고 제 손으로 약을 짜는 순간 어르신께서 더 깜짝 놀라

시며 “안 돼. 맨손으로 약을 바르다가 이 병 옮으면 안 돼. 저기 주

방에 일회용 장갑 끼고 발라줘” 하십니다.

“엄마, 맨손으로 약 바른다고 옮는 거 아니거든요. 괜찮아” 하며

벌겋게 퍼져 있는 등에 약을 바르는 순간 눈물이 났어요.

“이럴 땐 이웃을 부르던지 나를 부르시지. 혼자 등에 약을 바를

수도 없으면서….”

속이 상해서 마치 친정엄마에게 퍼부어대듯 마구 소리를 질렀습

니다. 어르신도 저도 말없이 그렇게 한참을 바라만 보았습니다. 그

날 이후로 매일 찾아가 등에 약을 발라 드리며 저는 저절로 엄마라

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더 많이 친해졌고 이젠 “엄마, 나 왔어” 하

며 열려 있는 현관문을 잡습니다.

“응. 우리 딸 점심 안 먹었지?” 하시며 일부러 식빵도 준비해 두

었다가 쨈도 발라 주시고, 당신 생일날 같이 밥 먹자 하시며 불러

주시고, 항상 “운전 조심해라”, “남편한테 잘해라”, “남편과 싸우면

각방 쓰지 마라”, “감기 조심해라”, “왜 요즈음은 얼굴빛이 안 좋

냐” 등 우리 친정엄마보다도 더 많이 걱정해주시고, 잔소리해주시

고, 어쩌다 며칠 방문을 못할라치면 전화로 “뭔 일 있는겨?” 하고

먼저 물어보십니다.

Page 15: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28 이달의 편지 29

어르신께선 혼자 살다 죽으면 내가 쓰던 짐 치우는데 여러 사람

애쓴다고 가끔 안 쓰는 물건도 정리해버리고 “나, 잘했지” 하십니

다. 주변 사람들이 주는 도움에 항상 감사해 하시며 어떻게 갚아야

하냐고 늘 걱정이십니다.

동사무소에서 청소할 사람을 보내준다고 하면 “내가 움직여야만

병이 낫는다”고 사양하시는 엄마입니다. 10평의 영세민 아파트지만

당신 마음에 대궐 못지않게 넓게 쓰신다는 엄마입니다. 매일 청소

를 하고 복도를 거닐며 운동을 하며 “내가 할 수 있을 때 해야지”

하시는 엄마입니다. 오래전부터 얼마 안 되는 정부보조금을 아끼고

아껴 “내가 죽거든 장례비용으로 쓰라”고 준비까지 해두시는 현명

하고 사려 깊고 배려 많은 우리 엄마입니다.

TV를 보다가 재미있는 뉴스를 보면 저에게 먼저 화제를 꺼내며

세상 이야기를 합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토론도 나누고, “예쁜

장갑도 사다 달라”, “로션 좀 사다 달라”며 삶에 대한 의욕도 많아

지신 걸 느낍니다. 예쁜 꽃을 보고 싶다고 화분에 물도 주고 떡잎

도 따주며 꽃을 기다리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파킨슨병은 더 이상

은 진행되는 것 같지 않고 우울증도 저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많이

호전되신 것 같아요. 표정도 많이 밝아지셨습니다.

명절 때는 제게 양말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그땐 엄마와 딸이 아

닌 “저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까지 하시며 고마운 마

음을 표현하십니다. 꼭 받아줘야 엄마 맘이 편하다고 하시며 빙그

레 웃으신답니다.

첫 대면에선 비록 어색하고 딱딱한 만남이었지만 3년이란 시간

속에서 생긴 정과 사랑 때문에 지금은 만나는 시간이 행복합니다.

1984년 5월 6일. 우리 부부는 결혼했습니다. 알고

보니 같은 고향, 같은 중학교 선후배이고, 양

쪽 부모님도 잘 알고 계시던 터라 서로 첫눈에 반해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 때문에 우리는 문간방을 얻어 신혼살림을 시

작했어요. 방이라고 해야 장롱 하나, 냉장고 조그만 거 놓고, 둘이

서 누우면 남는 공간이라곤 없었죠. 부엌도 연탄아궁이에 가스레

인지 하나 장만하고, 찬장을 놓을 데가 없어서 천장에 못을 박아

매달아 놓고서 썼어요.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때는 얼마나 행복하던지, 정말 하루하루

가 꿈만 같았답니다.

그때 남편은 중소기업에 다니고 있었고, 저도 조그만 직장을 다

니고 있었는데 남편이 첫 월급을 타온 날 이렇게 말하더군요.

Letter 6

김정숙 | 서울시 광진구 자양동

Page 16: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30 이달의 편지 31

“내가 우리 집 가계부는 책임질 테니까 당신도 돈 쓸 일 있으면

어디다 쓸 건지, 내용을 꼭 밝히고 나한테 타서 쓰라고, 알았지?”

그 말을 듣고 전 너무 놀랐습니다.

“아니, 어느 집이든 다 여자가 알아서 살림도 하고 가계부도 쓰

는 거지 무슨 남자가 쪼잔하게 가계부를 쓴다고 그래. 내가 아끼고

아껴 쓸게.”

“우리 열심히 일해서 집 장만부터 하자. 물론 이 서울서 집 장만

하기까지는 정말 어렵지만 우리 둘이 벌어서 저축하면 언젠가는 꼭

장만할 날이 올 거니까, 당신 나만 믿고 맡겨봐. 부탁할게.”

그땐 신혼 초라 남편 말을 거역할 수도 없고, 저는 그냥 믿고 따

르기로 했어요. 그런데 우리 남편은 제 예상보다도 심했습니다. 월

급을 받으면 90%는 저축하고, 나머지 10%만 제게 주는 게 아니겠

어요! 그 돈을 가지고 살려니 정말 눈물 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

죠. ‘내가 이렇게 살려고 결혼했나?’ 싶기도 하고요. 내 맘대로 시

장을 볼 수가 있나, 심지어 천 원짜리 한 장을 쓰려고 해도 어디에

쓸 건지 남편 허락을 받고, 남편한테 일일이 타서 써야 하니 정말

속이 터질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참을 수 있었던 건 나날이 불어

나는 통장 덕분이었어요.

둘이 살면서 외식이라곤 해본 적도 없고, 옷도 각자 처녀총각 때

입던 옷을 입고 회사에 다녔어요. 다행히 친정도, 시댁도 농사를

지어서 김치며 온갖 먹을거리는 양쪽 집에서 다 보내주셨어요. 사

먹는 반찬이라곤 두부, 콩나물, 고등어자반뿐이었습니다.

명절이 다가와 시댁과 친정에 내려갈 때도 남편은 아무것도 못

사게 하고, 무조건 돼지고기 두 근씩만 사서 들고 갔답니다. 그나

마 시댁엔 우리가 이렇게 아끼고 저축하느라 선물도 못 사왔다며

당당히 말씀드릴 수 있지만, 친정엔 차마 이야기도 못 하고 얼마나

속상했는지요. 무엇보다 어린 동생들 용돈 한 번 못 주는 게 제일

가슴 아팠어요.

그렇게 일 년을 보낸 후 사글셋방에서 전세로 이사했는데 방도

넓고, 부엌도 있고, 무엇보다 연탄아궁이가 아닌 연탄보일러가 있

다는 게 좋아서 잠도 안 왔어요.

그렇게 5년을 맞벌이해서 정말 돈도 많이 저축하고, 방 한 칸에

서 두 칸짜리 지상으로 이사도 하고, 결혼 5년 만에 아기를 가졌습

니다.

첫아기를 낳고 배냇저고리만 새것으로 입히고, 나머지 용품들은

우리 부부보다 먼저 아기를 낳은 시동생네와 시누네 아이들이 쓰

던 걸 가져다 쓰고, 책이며 장난감, 자전거도 죄다 가져와 우리 아

이들한테 물려주었답니다. 그럼에도 우리 아이들이 별 탈 없이 잘

자라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첫아이 대학 입학을 앞두고, 남편이 갑자기 두 녀석을 앉혀놓고

는 “지금까진 아빠가 너희 학비를 다 대주었지만, 대학에 가서는 너

희가 등록금을 벌어서 다녀라. 조금만 부지런하면 돈 벌어 충분히

다닐 수 있다. 비싼 사립대 가지 말고 국립대를 가도록 해라” 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큰 녀석, 둘째 녀석이 국립대에 들어갔어요. 지

방에 있는 교육대학인데 같은 학교로 가서 장학금도 받고, 나머지

학비는 직접 아르바이트를 해서 충당해, 정말 우리 부부가 등록금

한 번을 안 보태줬네요.

그런 큰 녀석이 얼마 전 임용고시를 봤어요. 최종까지 합격해서 3

월부터 초등학교 교사로 첫 출근을 했지요. 바라보기만 해도 대견

Page 17: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32 이달의 편지 33

하고, 고맙고, 미안하기도 합니다.

큰 녀석이 대학에 합격했을 때 시골에 계신 우리 시아버님이 큰

아이한테 양복을 사주셨어요. 그런데 둘째도 합격을 했는데 양복

을 안 사주시고 돈을 주시더군요. 그러니까 우리 남편은 “둘째는

양복 살 거 없다. 형하고 같이 입어라” 하는 겁니다.

정말 우리 두 녀석 몸무게가 비슷해서 옷도 같이 입고 자랐는데

양복도 할 수 없이 한 벌로 같이 입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인 것

은 두 녀석 교생 실습 시기가 달라서 키가 조금 큰, 첫째가 입을 때는

양복바지 밑단을 늘리고, 둘째가 입을 때는 다시 양복바지 밑단을 접

어서 넣고 그렇게 지금까지 4년 넘게 번갈아가며 입고 있네요.

‘부전자전’이라고 남편보다 두 녀석이 더 구두쇠라는 게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서글퍼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부모로서 다

해주지 못한 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정말 사글세부터 시작해서 결혼 13년 만에 누구의 도움도 없이

우리 집 장만도 하고, 비록 지금껏 살면서 주위 사람들한테 베풀지

못하고 살아서 미안하지만, 구두쇠 남편과 엄마 아빠를 이해해주

는 두 아들이 있어서 참 행복한 아줌마 같아요.

지금도 남편한테 일일이 돈을 타서 쓰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고

사니까 맘 편하고 좋아요. 또 우리 두 아들 생각만 하면 힘이 나고,

행복해진답니다.

우리 집 삼부자 정말 잘 생기고 멋있고 똑똑해요. 돈이 없어도

참 용감한 삼부자라 부르고 싶습니다.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집 삼부자. 앞으로도 죽도록 아끼고,

죽도록 사랑하며 삽시다.”

입주해 있는 건물에 내가 제일 마지막으로 퇴근하고 나가면

서 외부의 문을 잠그고 나갔는데, 우리 건물의 25개 사

무실 철문을 뜯어놓으신 그대 도둑 나으리! 그때는 네가 옆 사무실

에 숨어 내가 퇴근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몰랐지만, 지금 생

각해보니 너의 잔꾀를 알겠다.

너 기술 좋더라. 이곳의 철문은 안으로 열리는 문이라, 문을 뜯

을 때 바깥으로 열리는 문과는 달리 무척 정밀한 기술이 필요한데,

그 우수한 기능에 박수를 보내마. 그런데 너무 크게 뜯어서, 건물

주가 새 철문을 주문해서 달아주기 전까지는 난 문을 잠궈도 구멍

이 뚫려 있는 철문을 쓰고 있지.

도둑 나으리, 너! 내 사무실에서 훔쳐갈 것을 찾느라 고생했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식반이 사무실에서 너의 족적을 감식했다.

넌 내 귀중품 보관함에 손을 댔더군. 넌 그 안에 귀중품이 있을 줄

Letter 7

주성수 | 부산시 서구 서대신동

Page 18: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34 이달의 편지 35

알았겠지? 그 속에 있는 3년 묵은 영수증 더미가 돈인 줄 알고 한

장 한 장 열어보았더군. 눈 아팠지? 내가 영수증과 장부정리를 그

만큼 열심히 했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너, 회사 유니폼 박스도 뒤졌더라. 내가 가난해도 마음은

부자니 집에 몇 벌 가져가지 그랬냐? 그런데 너 도둑치고는 자존심

도 없냐? 어떻게 남의 샴푸, 비누통을 뒤졌냐?

아무튼 너로 인해 지저분한 나의 사무실은 더 지저분해졌고, 무

인경비 시스템과 CCTV가 설치될 것 같다. 너의 무지함 때문에 이

런 일이 생긴 거야. 난 감시당하기 싫단 말이야.

또 내가 사진 찍을 때 웃질 않으면 얼굴이 조금 매섭거든. 그래

서 어린 시절부터 사진은 잘 안 찍는데, 내가 지금껏 안 찍은 사진

을 마음껏 찍게 만들어 주는구나.

고생해서 남의 사무실 철문을 뜯고 뒤져서 겨우 몇 십만 원 훔쳐

갈 그 시간에, 너의 그 뛰어난 손기술을 정상적으로 활용해서 수백

만 원을 버는 쪽으로 머리를 쓰도록 해라.

나도 청소년 시절에 술, 담배에 찌들어 살면서 편하고 쉽게 돈 벌

고, 타인을 힘으로 제압하려고 해봤다. 21살 때에는 뒤에서 공격하

는 상대방이 휘두른 파이프에 왼쪽 눈을 다쳐서 실명상태까지 갔

단다. 지금까지 회복이 잘 안 되는 상황을 겪고 나니 무력으로 상

대를 굴복시키고 노력 없이 돈 벌려고 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

인지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키가 작고 날렵할 것으로 추정되는 도둑 나으

리. 내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6개월 동안 두 번이나 침입했고, 그

것도 별 소득이 없었을 테니, 이제 도둑생활 청산하자. 삼세 번이라

는 말도 있지 않니. 두 번 해도 아무런 실익이 없는데 거기에 더해

긴장과 초조함, 그리고 형사와의 만남 등 네가 벌어들인 수익에 비

하면 고생하며 도둑생활을 이어갈 이유나 명목도 없지 않은가.

난 너의 세 번째 침입에 대비해 사무실에 문구를 하나 걸어 놓았

다. 세 번째로 또 내 사무실에 침입한다면 어두워서 잘 안보일 걸

대비해, 네가 잘 뜯는 철문 안쪽에 붙여 놓았으니, 내가 쓴 글을

보고 제발 실천 좀 하고 가라.

뭔지 궁금하냐? 너에게만 미리 알려주마.

‘세 번째 찾아오신 좀도둑 나으리, 너를 위해 진공청소기와 물걸

레 청소기를 샀으니, 어지럽혀 놓은 게 조금이라도 미안하다면 사

무실 바닥만이라도 닦아주고 가거라.’

부디 찾아와 이 글을 볼 기회 없이 열심히 사는 모습을 기대한다.

난 어둡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나도 아직 어둡

고 어려운 상황이라 마음밖에 보여줄 게 없구나. 나도 이제 찌그러진

철문을 닫고 집으로 철수해야겠다. 우리 힘내서 열심히 살아보자. 남

자가 세상에 태어나면 이름 한 번 남기고 가야지, 그게 남자 아이가.

Page 19: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36 이달의 편지 37

딸그락딸그락. 설거지하는 소리. 그렇다. 결혼 2년 차인 내

가 설거지를 한다. 까르륵! 까르륵! 텔레비전을 보며 웃는

소리. 그렇다. 결혼 2년 차인 아내가 텔레비전을 본다. 결혼 2년 차

인 우리 둘의 지금 모습이다. 마음이 짠해지면서 미안해진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항상 이랬던 건 아니다. 얼마 전까지의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설거지를 하면 많이 도왔다고 할 정도였는데, 이번

한 주는 자진하여 저녁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도맡아했다. 물론 계

속하는 건 아니다. 한 2주 정도, 아니 길면 3주 정도. 그 시간이 지

나면 다시 아내가 저녁을 차리고 설거지를 할 것이고, 아내는 설거

지를 하면서 내 웃음소리를 들을 것이다.

그렇다. 아내는 지금 몸을 회복하는 중이다. 열흘 전에 아내는

갑작스런 복통으로 병원을 찾았고, 유산까지 하게 되었다. 결혼 2

년 만에 처음 가진 아기, 기다리다가 처음으로 임신 테스트기의 두

줄을 본 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더 건강한 아이를 주시려는지, 우리의

첫아이는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내가 심적으로 우울해하지 않아

조금 안심이 된다. 아니 어쩌면 괜찮은 척하려고 노력하는 지도 모

르겠다.

그 전에는 전혀 몰랐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 텔레비전을 보며 웃

는 소리가 저렇게 얄밉게 들릴 줄은. 그리고 밑반찬을 만들고 국을

끓이고, 고기나 생선을 굽고, 밥을 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반찬

냄새를 맡다보면, 밥맛이 사라진다는 것도 몰랐다. 아내는 그렇게

2년을 했던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는 40년을 그렇게 했

던 거구나.

Letter 8

김영수 | 부산시 연제구 연산동

Page 20: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38 이달의 편지 39

밥상을 차리고 나서 아내에게 밥 먹으라고 한다.

“이야! 다 차렸네. 언제 다 차렸어? 음! 아, 맛있겠다. 잘 먹을게.”

“그래. 맛있게 먹어. 지금 몸이 안 좋으니 꼭꼭 씹어 먹어. 50번

이상 씹어 먹어야 해.”

“에그, 알았어. 꼭꼭 씹어 먹을게. 얼른 와서 같이 먹자.”

그러고 보니 아내는 저녁을 먹기 전에 “에휴!”라는 작은 한숨을

쉰 뒤에 밥을 먹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아내는 저녁 먹기 전

에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국이나 찌개 냄새를 휙 먼저 맡은 뒤에

“아, 잘 먹을게”라는 말 한마디와 함께 밥을 먹고, 다 먹고 난 뒤에

는 “잘 먹었어!”라는 말을 한다. 전에 내가 그랬듯이.

그리고 지금은 내가 밥을 다 차리고 숟가락을 든 뒤 “에고” 하고

작은 한숨을 쉰 뒤 입맛이 달아난 상태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밥

을 먹는다.

처음에는 이렇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저녁을 차리면서 재미도 있

고, 내가 만든 음식을 내가 먹으니 맛도 더 있고, 어떤 때는 내가 아

내보다 요리를 더 잘하는 것 같다는 착각도 하면서 ‘음식점이라도 한

번 차려볼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열흘 정도 해보니, 요리를 하

다 보면 이미 음식 냄새로 배를 채워버릴 때가 많다는 걸 알았다.

‘아내는 이 일을 2년 했고, 우리 엄마는 40년 이상 했고, 앞으로

아내도 40년 넘게 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니 막막해진다. 그래

서 나 혼자 속으로 약속을 할까 한다. 아내 몸이 다 회복된다 해도

지금만큼은 아니겠지만 그 전보다는 더 많이 도와줄 것이며, 더 맛

있게 먹을 것이며, 더 감사하겠다. 본의 아니게 입장이라는 게 바뀌

었지만, 한 번쯤은 바꿔볼 만하다. 이참에 우리 아내에게도 내 일

을 시켜봐? 하하하.

하나뿐인 처제를 친동생처럼 키워주시고 지켜주신 형부가

계십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할 때 입학금

때문에 포기하려 했는데 형부는 적금을 깨서 대학에 보내주셨습니다.

너무 염치가 없어서, 너무 감사해서,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받아

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정말 가고 싶었던 대학이었고, 공

부해서 간호사의 꿈을 이루고 싶었지만 형부가 아니었으면 어려운

형편 때문에 학업의 꿈을 접고 직장에 취직해야 했었는데, 형부 덕

분에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공부했는데 힘들 때마다 용돈을 챙겨주셔서

힘들어도 견딜 수 있었고, 졸업하고 꿈을 이루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모두 ‘네 형부 같은 형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몰라요. 그럴 때마다 가

슴 뿌듯하게 행복했고요.

Letter 9

백영애 |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Page 21: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40 이달의 편지 41

형부 덕분에 공부를 잘 마치고 취직하고 결혼까지 해서 잘 살았

는데, 10년 만에 너무나 큰 시련이 와서 힘들고 아팠을 때도 형부

덕분에 그 시련 또한 잘 이겨냈습니다.

하나뿐인 우리 딸 채은이가 소아당뇨 진단을 받았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습니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 앞에서 매일

매일 눈물바람으로 지새울 때 형부는 서울에서 일산까지 매일 퇴

근길에 들리셨습니다.

“처제, 처제가 이렇게 울고 약한 모습 보이면 채은이가 더 힘들

거야. 처제가 씩씩하게 버텨줘야지. 하루아침에 낫는 병도 아니고

기나긴 싸움이 될 텐데, 이렇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되잖아?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지하 식당에 가서 처제 좋아하는 돌솥 비빔

밥 한 그릇 먹고 와.”

죽을 삼킬 힘도 없었지만, 형부 말씀대로 아픈 우리 딸을 지켜내

려면 내가 힘을 내야 했습니다. 안 넘어가는 밥을 꾸역꾸역 먹고 힘

을 냈고, 아이 옆을 꿋꿋하게 지켜냈습니다.

아이가 퇴원하고 학교에 들어가서 한 달이 지난 다음, 다시 일

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아이 상태가 다시 안 좋아졌습

니다. ‘다시 일을 그만둬야 하는 걸까?’ 하고 한숨을 쉬고 힘들어할

때 형부가 나서주셨습니다.

“처제, 지금 일을 그만둔다고 우리 조카 혈당이 좋아지거나 다 낫

는 게 아니잖아? 병원비도 많이 들고 평생 가지고 가야 할 병이니까,

한 푼이라도 벌어야 한다고 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일산으로 이사

해서 조카 챙겨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여기 집 정리하고 겨울방학

지나고 개학할 때쯤 그곳으로 가서 조카 챙겨줄게. 언니가 집에 있으

니까 우리 애들하고 같이 챙기면 돼. 힘들더라도 조금만 참아.”

형부의 그 말씀에 또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들 자식 공부

시키러 서울로 나가는 판에 서울에서 여기로 들어오다니, 그것도

나와 우리 딸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리다니, 생각지도 못한 형부의

말씀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울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언니와 형부네 식구는 이곳으로 이사를 왔고, 조

카들과 우리 딸이 같이 학교를 갔습니다. 운동을 해야 혈당을 유지

할 수 있다고 해서 오늘 처음으로 조카들하고 같이 수영도 배우고

요. 혼자라서 내성적이고 소심한 우리 채은이가 신이 나서 종일 싱

글벙글하는 거 보니까 그 모습에 또 너무 좋아서 눈물이 났습니다.

조카를 위해 이런 선택을 해주실 거라곤 상상도 못했거든요. 일

산에서 서울까지 출근하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교통비도 많이 들

고 여러 가지로 힘든데 처제와 조카를 위해서 이사까지 와주시고,

우리 딸 잘 챙겨주셔서 어떻게 감사의 마음을 전해야 할지, 이 은혜

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저 감사하고 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힘들 때마다, 눈물 날 때마다 베풀어주신 은혜를 지금껏 하나도

갚지 못했는데 이렇게 늘 받기만 해서 염치가 없습니다. 솔직히 언

니라도 이런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텐데, 형부가 먼저 이런 제

안을 해주시고 큰 결정 내려주셔서 우리 식구 모두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앞으로 살면서 형부가 베풀어주신 은혜 반도 못 갚겠지만, 온 마

음을 다해 갚으며 살게요. 또 열심히, 더는 울지 않고 씩씩하게 사

는 모습으로 보답하며 살고 싶습니다.

“형부! 너무 죄송하고, 정말 고맙고 가슴 뜨겁게 사랑하고 존경

합니다. 가슴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리고 또 감사드립니다.”

Page 22: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42 이달의 편지 43이달의 편지 43

유난히 하늘이 파랗던 어느 날, 삼십 대의 나와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재일이를 남겨두고 떠나면서 마음 아파했

던 20년 전의 당신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1991년, 항상 일에 쫓기며 바쁘게 살던 남편은 얼마 전부터 배가

아팠다며, 추석 연휴에 시간을 내어 친구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습

니다. 남편 친구는 저에게 빨리 정밀검사를 받게 하라고 했고, 며

칠 후 결과는 대장암 말기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였습니다.

그해 가을에 1차 수술을 하고, 이듬해 봄에 2차 수술과 항암 치

료를 했지만 남편은 떠나버렸고, 병원이 있던 윤중로의 흐드러진 벚

꽃만큼이나 많은 아픔과 상처가 아직도 제 마음에 박혀 있습니다.

대구가 고향인 남편에게는 고등학교 동창끼리 모임인 ‘락락회’라

는 부부 친목모임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떠난 후 락락회 친구들은

아들 재일이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학비를 장학금으로 지원

했습니다. 부인들끼리는 따로 모임을 만들어 저를 항상 챙겨주고

여행도 동행하며, 좋은 추억거리와 사랑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덕

분에 재일이는 성실하게 자라 주었고, 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으

로, 대학에서는 학부회장을 하며 책임감 있는 멋진 청년으로 자랐

습니다.

대학 3학년을 마치고 어학연수를 가겠다며 휴학을 했습니다. 그

리고는 일 년 동안 대리운전, 공사장, 식당 주차원 등을 하며 유학

자금을 마련하더군요. 하루는 대리운전을 새벽까지 하고 일산에서

인천까지 전철을 타고 오다가 너무 피곤해 조는 바람에 지갑에 있

던 그날의 수입을 소매치기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 허탈해 하던 모

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Letter 10

김유경 | 인천시 남구 용현동

Page 23: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44 이달의 편지 45

호주로 워킹홀리데이에 참여해 공부하러 가서 새벽에는 건물

세 동을 청소하고, 공부 마치면 식당 주방에 가서 접시를 닦으며

열심히 일 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201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 군산으로 내려갔습니다. 같이 근무하던 예쁜 군산 처자

를 작년 추석에 저에게 인사시켰고 예쁜 사랑을 하여 다음달에 결

혼식을 올립니다.

지난주에는 그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락락회’ 분들을 모시고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늠름한 아들을 보면서, 20년 동안 어깨를 누

르던 세월의 무게가 깃털처럼 가벼워지면서 남편에게 ‘재일이 엄마,

고맙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졌습니다.

“재일아, 니 아버지보다 인물 좋네! 아들한테 밥도 대접받고 참

좋다!” 하며 남편 친구분들도 즐거워했습니다.

그날 밤 꿈에 남편은 “이제 그만 간다. 고맙다”라는 말을 하고 사라

졌습니다. 그동안 우리 모자를 곁에서 지켜주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도 은혜 받은 만큼 베풀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성당봉사를 합

니다. 무료급식소에서 식사 배식, 독거노인 밑반찬 배달 등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아들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고 직장도 열심히 다니

며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많은 걱정과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났던 남편도 이제는 그곳에서

편히 쉬기를 바라며, 그동안 우리 모자를 지켜주었던 대구 경북고

등학교 48 동기회 ‘락락회’ 친구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더 많이 봉사

하며 성실히 살아가겠습니다.

‘아들 결혼식 날, 하늘나라에 있는 재일 아빠! 꼭 출장 와서 옆에

앉아 주세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당신의 핏줄이 부부의 연

을 맺는 날, 며느리의 절도 받아야 하지 않나요? 꼭 오실 거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 원래부터 없는 사람

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햇볕이 따스하다고 느낄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날 비추고 있을 뿐, 어떤 느낌도 주지 않는다. 무슨 맛

인지도 모르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우고는 멍하니 넋을 놓고 앞만

쳐다보고 있다. 앞을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지 무엇을 보고 있는

지, 무엇이 앞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설마 주변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31살. 아직 어린 나이인데 억울하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지만, 나보다 가족들이 걱정이다. 아버지, 어머니, 형, 동

생, 그리고 아내와 아들, 남겨질 것이 너무 많다. 삶을 정리하기 위

해 준비한 오늘 하루, 난 갈대가 무성한 강가에 차를 세워두고 마

음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일주일 전, 허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오면서

Letter 11

김광중 | 부산시 사하구 다대동

Page 24: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46 이달의 편지 47

아버지의 친구분께서 어느 날 갑자기 혈변을 보시고 병원에 가셨더

니, 대장암 말기이며, 이제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전이되었다는 이

야기를 들었다. 아버지 친구분은 진단을 받은 지 보름 만에 돌아가

셨다고 한다.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셔서 마음

이 아프다고 하셨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난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나 역시 얼

마 전부터 심하게 혈변을 보고, 몸이 좋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

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병원에 가지 않았다. 사실은 갑작스런

몸의 변화에 겁이 나서 병원에 갈 수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는 친구분의 증상이 나와 똑같았다.

며칠 동안 심장이 얼어붙는 듯한 초조함을 느꼈다.

이제 정리를 해야 할 시간이다. 나에게 단 하루의 시간이라도 마

음 편하게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지. 갈대는 바람이 없는 것

같은 공간에서도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따스함을 느낄 수 없

는 햇볕 아래서 무슨 맛인지도 모르는 담배를 손가락에 끼고 어색

한 잠을 청한다. 마음을 정리하기도 전에 밤이 먼저 찾아왔다.

집으로 차를 돌린다. 몸은 천근만근 물 먹은 솜 같고, 머릿속은

잠을 자는 듯 꿈속처럼 불분명하기만 하다.

집에 들어서니 얼마 전 출산한 아내는 반갑게 나를 맞이한다. 하

루 종일 왜 전화가 안 되냐며, 살짝 핀잔을 준다. 아내가 저녁을 하

는 사이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는 아들을 들여다봤다. 내가 없

으면 이 어린 녀석은 어떡해야 하나!

새근새근 자고 있는 녀석 옆에 누웠다. 손가락도 만져보고, 발가

락도 만져보고, 배냇저고리를 살짝 들어 올챙이 같은 배를 보고,

배꼽에 바람도 불어본다. 걱정이라곤 없는 생명이다. 정말 티 한 점

없는 그런 아름다운 생명이다.

이 녀석, 불쌍해서 어떡하나. 아빠 없이 크는 세상은 얼마나 힘들

까. 아빠의 눈물이 아들의 볼에 흐른다. 아빠의 눈물에 놀란 아들

은 아빠보다 크게 운다. 온몸에 힘을 주고 악을 쓰며 운다.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로 아들을 안고 운다.

‘아기야, 아빠가 미안해.’ 결국 울음은 대성통곡이 되었다.

꽤 오래 전 일이다. 아들이 올해로 초등 2년생이니, 대충 8년 전

이야기인 것 같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나

스스로 최종적으로 내린 결론 대장암. 하늘이 무너지는 그 느낌.

어여쁜 아내와 어린 아들을 두고 나 혼자 갈 것을 생각하니 얼마

나 비참하고 힘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검사 결과 나는 치질이었고, 그 후 우리 가족은 예쁜 딸

을 가지게 되었고, 난 더 열심히 살게 되었다. 해피엔딩이다.

Page 25: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48 이달의 편지 49

저는 37세의 직장을 다니는 엄마이자 <여성시대> 왕 애청

자입니다.

똘똘한 8살 딸, 4살 아들, 이렇게 두 보물과 8살 딸아이보다 조

금 수준이 떨어지는 남편까지 네 식구가 함께 지지고 볶고 잘 살고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8년 전 저는 첫아이를 임신했습니다. 당시 종합

병원 외과 간호사였던 저는 가끔 산부인과에 갈 기회가 있었는데,

산모들이 분만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에 겁이 났습니다. 제가 원래

겁이 많거든요.

그래서 운동하면 순산한다기에 임신 후반기부터 열심히 운동을

하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추운 날씨에 혼자 운동을 시작

하려니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신랑을 꼬드겨 보기로 했습

니다. 저는 콧소리를 섞어 신랑에게 아양을 떨었습니다.

“여봉, 있지이. 나 이제부터 운동 열심히 할 거야, 운동을 열심히

하면 순산할 수 있거든. 우리 자기가 도와주면 더 힘날 것 같아. 아

잉. 자기도 이번 기회에 그 뱃살 좀 빼자. 당신이 임신부 체험하는

것도 아닌데 이번 기회에 같이 운동하면서 살 빼면 좋잖아. 우리

함께 운동하면 춥지 않을 거야. 같이 운동 할 거지?”

“그래? 운동이 산모에게 그렇게 좋대? 그럼. 당연히 같이 해줘야지.”

남편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런데 순산을 위한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저와 달리 신랑은

말뿐이었나 봅니다. 딱 하루 운동장 걷기를 함께한 후, 핑계를 대

기 시작했습니다.

“운동하러 나가자!” 하면, 남편은 옆으로 누워 TV를 보며 낄낄거

리다가 “킥킥킥, 어? 운동? 아얏. 아야야. 어제 무리를 해서 그런지

오늘은 허리가 아파서 안 되겠네. 자기 혼자 해!” 합니다.

다음날 역시 TV를 보며 코를 파면서 “오늘은 등, 등짝이 아프

네”라고 하고, 또 다음날은 3일 동안 감지 않은 머리를 손으로 긁

으며 냄새를 맡으면서, “어? 오늘은 발, 그래. 발바닥이 아파서 안

돼!” 하면서 온갖 신체부위를 갖다 대며 함께 운동하는 것을 거부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같이 운동을 꿈꾼 내가 멍텅구리다. 안 되겠어. 애

는 내가 낳는 것이니 나 혼자라도 열심히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혼

자 운동을 나갔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운동하면 순산한다! 운동하면 순산한다!” 구호

를 외치며 아침에 한 시간 반, 저녁에 한 시간 반씩 배를 받치고

천천히 운동장을 걸었습니다. 드디어 예정일 즈음 새벽, 아랫배가

찌릿찌릿 아프며 진통이 왔고 저는 옆에서 자는 신랑을 흔들어 깨

Letter 12

애청자

Page 26: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50 이달의 편지 51

웠습니다.

“여보, 아얏~ 나 진통 오고 있어, 아기 낳으러 가야 될 것 같아!”

신랑은 벌떡 일어났습니다.

“뭐? 그, 그래. 주, 주, 준비할게.”

본인이 애 낳는 것도 아닌데, 무척이나 긴장한 신랑은 윗도리도

뒤집어 입는가 하면 심지어 바지를 입을 때는 본인 바짓단에 본인

다리가 걸려 뒤로 넘어져 한참을 버둥거리더라고요. 배가 많이 나

와 마치 풍뎅이가 뒤집혀 버둥거리는 모습과 흡사한 남편을 뒤로한

채, 진통을 느끼며 저는 비장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 차분하자. 침착해야 돼, 넌 잘할 수 있어. 운동을 그렇게

열심히 했으니 분명히 순산할거야. 음, 무엇부터 해야지? 그래. 며

칠 동안 머리를 못 감을 테니 머리부터 감자. 또, 아! 맞다, 아기 낳

을 때 체력이 많이 소모되니까 지금 배터지게 먹고, 진통이 규칙적

으로 오면, 그때 병원에 가도 늦지 않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후 저는 신랑에게 “여보, 나 머리 감는 동안, 삼겹

살 좀 구워줘” 했더니, 신랑은 무슨 아닌 밤중에 삼겹살이냐는 표

정으로 “뭐? 삼겹살? 허참, 자기야. 자기 먹는 거 좋아하는 건 아

는데 지금은 삼겹살 먹을 때가 아니에요. 어허! 빨리 병원부터 가

야지”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니야. 지금 실컷 먹고 가야 이따 더 힘줘서 애기

낳을 수 있어” 하고는 욕실로 갔습니다.

머리를 다 감은 후, 진통이 올 때는 잠깐 식탁에 엎드려 쉬고 진

통이 오지 않을 때는 마치 전쟁에 나가는 군인 같은 전투적인 자세

로 신랑이 구워 놓은 삼겹살을 꼭꼭 씹어 먹으며, 밥 한 그릇 다 비

벼 먹고, 병원으로 출발했습니다. 병원에 도착한 후 남편은 시댁과

친정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장모님. 진통이 와서 지금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어? 그래. 첫아이 낳으려면 진통을 10시간 넘게 할 테니 자네도

지치지 않게 밖에 나가 식사도 하고 그러게. 우리는 천천히 준비하

고 가겠네”라고 하셨대요.

그런데 잠시 후 신랑이 다시 친정어머니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장모님, 지금 아기 낳았습니다. 둘 다 건강합니다. 딸이에요.”

친정어머니는 “뭐? 벌써 애를 낳아? 좀 전에 도착했다며?”라고

하며 놀라셨다는군요.

저는 병원에 도착한 후 규칙적인 진통이 시작되었고, 정확히 37

분 만에 첫아이를 낳았습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병원이 생긴 이

래 가장 짧은 시간에 첫아기를 낳은 엄마라며 “체력이 무척 좋은

것 같네요. 소리 한번 안 지르고 별 힘도 안들이고 낳고, 무척 씩

씩하시네요” 하시더군요.

저도 나름대로는 아기 낳는 동안 아프고 힘들었지만 역시 ‘운동

이 효과가 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기는 건강하고 정말 예뻤

습니다. 아기와 처음 대면한 단 몇 초 만에 저는 언제까지나 이 아

이를 사랑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이틀이 지난 후, 퇴원을 했습니다. 신랑이 퇴원 수속을 하는 동

안 저는 멍하니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함께 자동차에 올랐습니다.

제가 “참, 힘든 하루였어” 하고 말했더니, 신랑은 “그래. 맞아” 하

며 자동차 시동을 걸더군요.

우리 부부 둘 다 정신을 놓은 듯 멍청해 보였고, 뭔가 잊은 것이

있는 것 같이 왠지 모를 께름칙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대로 차를 출

Page 27: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52 이달의 편지 53

발시켰습니다.

서서히 차가 가고 있는데, 신랑이 백미러를 보며, “어? 저 간호

사, 왜 우리를 뒤따라오지? 자기, 뭐 놓고 왔어? 어라? 저것 봐! 계

속 따라오네” 하더군요.

뒤를 돌아보니, 간호사 언니가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꼭 안고 달

려오는 게 보였습니다.

“어머, 여보! 어떡해! 아기, 우리 아기 병원에 두고 왔잖아.”

그제야 남편도 “아, 맞다. 우리 여기 아기 낳으러 왔었지” 하며

차를 세웠습니다. 차를 세우는 동안 간호사 언니는 아기를 꼭 안고

헉헉대며 우리 차 쪽으로 오셨습니다.

“헉, 헉, 애, 애기를. 헉, 헉, 애기를 데리고 가, 가. 헉, 헉, 가셔

야지요!” 하며 저희 부부를 쏘아보았습니다.

간호사 언니의 눈빛에는 ‘뭐야, 이것들이 혹시 일부러 아기를 버

리고 가는 거야, 뭐야?’ 하는 의심의 눈초리가 섞여 있었습니다. 저

는 얼른 “어머! 죄송해요. 제가 깜빡, 아니 아무튼 정말 죄송해요.”

깜빡하고 아기를 놓고 왔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제가 생각해도

깜빡할 게 따로 있지, 깜빡하고 아기를 놓고 왔다고 말하는 게 민

망하여 횡설수설한 겁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저는 분만하느라

힘들어서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갔다 치더라도, 같이 깜빡한 우리

신랑은 도대체 뭐란 말입니까?

아기를 받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기에게 미안하고 웃음도 나

고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그 아기는 초등학교 1학년이 되었지

만, 아직도 ‘사실 엄마가 너를 깜빡 잊고 안 데리고 올 뻔했다’는 고

백은 하지 못했습니다.

“나 휴가 좀 줘.”

“웬 휴가? 날도 추운데 어디가려고? 처갓집 갈 거면

주말에 데려다 줄게. 당신 수술 후 회복도 덜 된 상태야. 의사가

3개월 정도 지나야 일상생활 할 수 있다고 했어.”

“일주일만 혼자 여행할 수 있게 해줘.”

“글쎄, 어디 갈 건지 얘기하라니까.”

“이유 좀 안 물어보면 안 될까?”

정말 답답했습니다. 아내는 얼마 전 자궁근종 수술을 받았습니

다. 두세 시간이면 끝난다던 수술은 다른 곳까지 유착이 심해 네

시간이나 걸렸고, 수술 후에도 염증으로 인해 저로 하여금 밤을 새

우게 했습니다. 수술 후엔 우울증도 심해져 집으로 처제가 와서 언

니를 간호해주었지요. 그러던 아내가 점점 몸이 회복되자 휴가를

달라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Letter 13

임승혁 | 경기 시흥시 정왕1동

Page 28: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54 이달의 편지 55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아니.”

“언제 가려고?”

“내일.”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는데 아내는 말도 없이 여행 가방을 챙기고

서야 안심한 듯 잠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잠든 걸 확인한 후 아내

의 휴대폰을 검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아내

의 휴대폰 통화내역과 문자는 모두 비어 있었습니다. 제 머릿속은

그때부터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맞아, 이 사람이 나랑 결혼했을 때부터 이상했어.’

우리 결혼은 주위의 반대가 굉장히 심했거든요. 저는 고졸에 이

혼남이었고, 아내는 대학 졸업 후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아

내의 결심을 꺾지 못한 처가에서 결혼을 허락했고, 우린 나름대로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검사 결과가 나오고, 수술 후엔

점점 더 아내의 말수가 줄어들었습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괜

히 아내 기분을 살펴야 했고, 아내가 웃어야 제가 웃을 수 있었습

니다. 그런 아내가 뜬금없이 여행을 보내달라네요.

“라면은 전자레인지 밑 서랍에 있고, 간식은 요일 별로 냉장고에

챙겨뒀어. 강아지 간식 많이 주지 말고 빨래는 세탁실에 그냥 둬.

내가 와서 세탁할게.”

철저히 준비하고 통보했던 거구나 싶어 할 말이 없었습니다. 출

근해서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내의 전화를 받은 건 그날 오후였습니다.

“당신이 조퇴하고 서울 OO병원으로 좀 와줘야겠어.”

“왜? 무슨 일이야?”

“와서 수술동의서에 사인 해줘.”

어떻게 운전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병원에 도착해 전화를 거니

3층으로 올라오라네요.

“아버님이 위암이래. 당신이 전화를 안 받으니 나한테 전화가 왔

어. 의료보험이 우리 앞으로 되어 있어서 직계가족 동의서가 필요

하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휴가 간다고 하고 병 간호 하러 여기 온 거야? 당신 미

쳤어?”

“미워도 아버진 아버지야. 일단 수술 받게 해 드리자. 그리고 다

시 얘기해.”

얼떨결에 동의서를 작성했지만 제 흥분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란 분, 우리 삼남매를 두고 뒤도 안 돌아보고 집을 나가

신 지 36년. 36년 동안 그분을 얼핏 만난 건 누나 결혼식 때뿐이

었습니다. 그런 분이, 아프니까 우릴 찾았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

았습니다. 몇 시간 뒤 의사는 저희를 불렀고, 몸에서 분리되어 나

온 암 덩어리를 보여주며 자세히 설명해주었습니다. 담담했습니

다. 회복실로 돌아와서 신음하는 그분을 아내는 꼭 안고 말했습

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 지르세요. 참지 마시고요.”

전 아파하는 그분의 모습도 싫었습니다. 아플 권리조차 없는 분

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머니한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저기, 수술했어. 위암이래.”

Page 29: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56 이달의 편지 57

“누가?”

“누군 누구야, 서울에 계신 분.”

아버지라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

습니다.

“병원엔 누가 있냐?”

“집사람이 와 있어요.”

“걔 몸도 성치 않은데 간병인 불러드려라.”

병실로 돌아오자 그분은 하느님부터 찾았습니다. 36년 만에 만

난 아들을 애써 외면하듯 눈동자는 다른 곳을 향해 있더군요. 집

에 가자는 말에 아내는 고집을 부렸습니다.

“오늘만 여기 있을게. 미워도 당신 낳아 주신 분이야. 아빠가 일

찍 돌아가셔서 아버님이 우리 아빠 같아.”

“당신 미쳤어?”

혼자 집에 돌아와 멍하니 있었던 거 같습니다. 다음날 데리러 간

다는 제 말에 아내는 “아직 아파하셔. 오늘만 있을게”라며 그렇게 3

일을 병원에서 지냈습니다.

집에 돌아온 아내는 며칠을 앓아누웠고, 자리를 털고 일어난 후

“용서까지는 안 되더라도 가끔 안부는 묻고 지내. 늙고 아프시고 옆

엔 아무도 안계시더라.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르는데 나중에 후회하

지 말고 가끔 안부전화라도 드려.” 제게 당부를 하더군요.

저는 아직 전화도 못 드리고 있습니다. 용서를 해 드려야 하는데

아직 마음이 풀리질 않습니다. 아내의 바람인 줄만 알았는데, 아내

는 제게 숙제를 주었습니다. 그 숙제를 풀어야 하는데 실타래처럼

머릿속은 복잡하기만 하네요.

올해 28살이 된 울산에 거주하는 학생입니다. 23살 무렵,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기게 되었지만,

불행히 장애가 조금 남아 지금까지 재활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습

니다.

젊은 나이에 그런 일들을 겪고 난 후 얼이 빠져버린 저는, 몇 년

동안 제대로 사회활동을 하지 못했고 대인기피증까지 생겨 사람들

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밖에 자주 나가지 않았으며 우울

한 생활을 지속했죠.

하지만 어머니는 그런 저를 이해하고 다독거리며 응원해주셨습

니다. 때때로 제게 영화를 보자고 하시거나 산책 겸 운동을 하러가

도록 권유도 해주셨고, 재활치료 직후 회복에 별다른 진척이 없을

땐 작은 움직임에도 큰 반응을 보여주시며 항상 응원을 아끼지 않

으셨습니다.

Letter 14

애청자

Page 30: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58 이달의 편지 59

“그래! 우리 아들 그렇게 움직이면 돼!”

“조금만 더 걸으면 내일은 뛰어다닐 것 같은데?”

“우리 아들 정말 잘한다!”

어머니는 이런 식으로 항상 제게 큰 용기를 주셨어요. 이러한

어머니의 행동에 용기를 얻은 저는 운동을 더욱 열심히 하게 되었

고, 아픈 상태라는 것조차 잊게 되었죠. 그렇게 운동을 하고 조금

씩 회복한 저는, 어머니의 응원과 격려 덕분에 마치 다 나은 것 같

았습니다.

1년 후 다시 복학을 하게 되었는데, 현실에서의 저는, 다리를 저

는 장애인이었습니다. 원래 알고 있던 사람들까지도 예전에 알던

제가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학생으로 대하더군요. 저는 학교

의 어떤 행사에도 참여할 수 없었으며, 친구들이 제게 도움을 청하

기보다 다른 사람이 모든 것을 도와주어야만 할 수 있는 학생으로

만 대했습니다. 정말 미칠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이 네게 조금 더 배울 점이 있다고 생각해서 너를 가르치는

거다. 하늘의 뜻을 따라 조금 더 배워보자.”

저는 다시 마음을 잡고 휴학을 해 이곳저곳에 운동을 하러 다니

며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러다보니 저보다 훨씬 힘들게 사

는 사람들도 많이 보고, 아프신 분들도 많이 보게 되었죠. 그러는

동안 어머니는 제게 한번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신 적이 없었

습니다. 매일 저와 함께 운동을 하며 제게 세상의 모습을 보여주시

고,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야 한다고 알려주셨습니다. 직장에 다니

셔서 피곤하실 텐데도 한번도 지친 기색을 보이지 않았고, 제게 힘

이 되어 주시더군요.

5년이 지난 지금 저는 다행히 100% 완치는 아니지만 거의 회복

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머니! 용기, 지혜, 삶을 보는 눈까지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

다. 어머니는 제가 그 누구보다 가장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사랑합

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이제 직장에서 퇴직을 하십니다.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일해 오신 어머니가 누구보다 가족을 위해 땀 흘려 오신 것을 잘

압니다. 저를 위해 쏟아주신 정성,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퇴직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Page 31: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60 이달의 편지 61

오늘도 병원 문을 나서며 이게 미운 정인지 고운 정인지 모

를 감정을 안고 집으로 향한다. 언젠가는 잊을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이런 얄미운 시아버지가 다 있소!”라고 고자질하고 싶

었다.

결혼 10년 차에 나는 어느덧 마흔의 나이를 맞이한 두 아이의 엄

마가 되었다. 신랑과의 인연은 양가 부모님께서 친구인 관계로 아

주 어릴 때부터 시작되었고, 나는 아버지를 4살 때, 신랑은 9살 때

어머니를 먼저 하늘로 보냈다.

신랑과 나는 3살 차이. 둘 다 막내였고, 거리도 가까워 가족처럼

지내다가 어찌하여 결혼도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어릴 적 ‘배 씨

아저씨’는 시아버지가 되었다.

다들 결혼 후 ‘신랑이 변했어요’가 고민이라지만, 나는 ‘시아버지

가 변했어요’라고 해야 할 것이다. 평소 다정하게 느껴졌던 배 씨 아

저씨가 심통 맞은 시어머니로 변한 것 같았으니까.

결혼 준비를 하면서 며느리에게는 예단, 예물도 없으면서 정작

본인은 자식 결혼 때 입을 양복이며 평상복, 그리고 가지고 싶은

금장 시계까지 며느리인 나보고 다 해달라셨다. 하지만 이것은 시

작에 불과했다.

막내인 신랑에게 시집왔는데 시집오자마자 시어머니 제사를 막

내 며느리인 내가 모시게 됐다. 그것도 모자라 제사 나물 다섯 가

지를 해 놓은 내게 시아버지는 “질금 나물이 빠졌다”며 제사 지내

기 전에 준비하라고 해서 급히 만들고, 떡도 콩고물 떡을 주문해

놓았더니 “흰 고물 떡으로 바꾸라” 하시고, 수육을 놓으니 “문어를

놓지 않았다”고 투정이다. 평소에도 그냥 잡수고 싶으신 게 있다면

해 놓으련만, 미리 물어볼 땐 없다 하시고 꼭 다 하고 나면 주문이

생긴다.

다른 자식들 집에선 하룻밤도 못 자서 밤중에 집으로 돌아가시

면서 우리 집은 명절 전부터 오셔서 빨간 날은 물론이고 명절 끝난

뒤에 있는 종친회까지 참석하고 가시는 통에 나는 손님을 맞느라

시집와서 지금까지 명절날 친정 한 번 가지 못했다.

‘시아버지가 왜 이러실까?’ 말꼬리를 잡고 약을 살살 올리는 심통

맞은 모습이 어찌나 얄밉고 미운지, ‘나도 같이 심통을 부려볼까?’

하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그래서 시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가만

히 들여다보니 자식들에게는 웃는 모습도, 장난기도 없고, 대화도

많이 안 하신다. 자식들 말 한마디에 꼼짝 못하고 대꾸도 없이 뒤

돌아 앉은 등이 더 굽어 외롭고 불쌍해 보였다.

그런 생각과 함께 30년을 훌쩍 넘는 세월을 마누라도 없이 집안

Letter 15

김은미 | 경남 김해시 장유면

Page 32: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62 이달의 편지 63

일과 직장생활을 겸하면서 울 엄마처럼 고생했을 시아버지가 가엾

게 여겨졌다. 그리고 문득 돌아보니 그때까지 시아버지는 며느리인

나에게 ‘아가’라는 호칭보다 이름을 불렀고, 그러면 나는 “아버지,

왜?”라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계획을 바꾸었다. 내 속만 터지게 맘에 담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내뱉고 털어버리자고.

그러고 다시 명절이 왔고, 누워서 아이들과 놀고 있는 시아버지

께 한마디 했다.

“아버지, 며느리 한번 잘 봤어. 막내한테 시집와서 제사도 지내

고, 시아버지 때문에 명절에 친정도 못 가는 며느리가 어디 있노?”

“그럼 시집와서 제사도 안 지낼라 했나? 그리고 집에는 나 죽거

든 실컷 가라.”

“딸은 안 오면 언제 오노? 하면서 나는 우리 집 딸 아이가?”

“허허.”

웃음으로 받아넘기셨다.

때때로 시아버지는 나에게 전화를 하신다.

“나다. 별일 없나? 왜 전화가 없노?”

늘 똑같은 멘트로 시작을 하신다. 그럼 나도 똑같이 이렇게 받

아쳤다.

“그냥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 하지. 아버지는 왜 그래?”

그렇게 몇 년의 세월은 흘러갔고, 4~5년 전부터인가 시아버지의

몸과 정신에 조금씩 이상이 오는 것을 느꼈다. 병원 신세도 자주

지게 되었다.

늘 술과 담배를 친구처럼 달고 사시는 분이라 조금 줄이시라고

해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더니, 약주를 하시고 취한 상태에서 또 술

을 사러 가시다가 계단에서 굴러 갈비뼈가 부러졌다. 상처는 심했

고 장기 손상까지 입어 반년을 입원하셨다.

또 눈 오는 날은 위험하니 제발 밖에 나가지 마시라고 했는데 기

어코 나가시더니 미끄러져 척추가 쪼개졌다. 이 일로 병원에서는

4주 동안 움직이지 말고 누워 있어야 척추가 붙는다고 했는데 밖으

로 나가시는 바람에 결국 척추에 고정핀 6개를 박는 수술도 했다.

한 번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반찬이 맛없다고 해서 거의 매

일 반찬을 해 날랐는데, 하루는 “열무김치가 먹고 잡다”시기에 열

무김치를 해다 드렸다.

“이것 말고, 무 긴 것 있잖아.”

“혹시 알타리 말하나. 그럼 총각김치였나? 왜 나보고 열무라 했

노? 이제 안 해.”

“니는 시아버지 먹고 싶은 것 하나 못 해 주나!”

화를 벌컥 내셨다.

병원에서 술, 담배를 많이 해서 폐가 제 기능을 못하고, 간경화

까지 조금 있다고 금연에 금주하라고 하니, 시아버지는 병원 출입

구 흡연구역까지 가서 담배꽁초를 주워 숨겨 놓은 것을 내게 딱 걸

렸다. 너무 화가 나서 시아버지 등을 ‘딱’ 소리 나게 때렸다.

“어이구! 어이구! 이건 뭐고? 의사 샘이 하지 말라고 안 하데.”

“내 것 아이다. 이게 왜 여기 있노? 그리고 내 시아버지여. 시아

버지 때리는 며느리가 어디 있데?”

“그래, 여기 있네. 시아버지 때리는 며느리.”

또 이렇게 웃으면서 넘어간다. 그 뒤로도 우린 얼굴만 보면 “내가

시아버진데”, “난 며느린데” 하며 철없는 시아버지와 버릇없는 며느

Page 33: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64 이달의 편지 65

리가 되어 앙앙거리며 다투고 지냈다.

그러던 이번 생신에 곰국이 먹고 싶다며 곰거리를 사 달라 해서

사 드렸는데, 드시면서 곰국 기름을 잘못 처리해서 미끄러지셨다.

허리가 잘못되셨는지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전립선암

이 전이되어 골반과 임파선에 퍼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한다.

평소에도 병원에 입원하면 금단증상은 물론 노인성 치매와 비슷

한 섬망 증세도 심해져 아들, 손주 등 주변 사람과 있는 장소를 구

별 못 할 때가 잦았는데, 이번에는 심했다. 그런 와중에도 늘 본인

딸과 나만은 기억했다. 그리고 난 오늘도 병원에 갔다.

“아버지, 나 누구게?”

“김은미 아이가.”

“어이구! 며느리 이름은 안 까먹네.”

“허허, 니 나를 우찌 아노. 니 까먹으면 내 갖다 버릴라꼬?”

“알긴 아네. 그러니깐 내 이름 잊어버리지 마라.”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의 일들이 어찌나 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지, 절

대 울지 않기로 했는데 그냥 돌아서 버렸다. 시아버지는 시간이 갈

수록 움직임도 줄어들고, 예전의 왕성한 식욕도 없어 죽도 한 그릇

다 비우지 못하신다. 살도 많이 빠지고, 머릿속 기억도 흐려지는지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신다.

이제까지 며느리에게 밥 한 끼 사주지도 않고, 용돈 한 번 제대

로 주지도 않고, ‘수고한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겹게 해주지도

않았는데, 밉다. 시아버지가 정말 미워서 가엾다. 이토록 며느리 애

만 먹이는 시아버지가 있을까?

저는 9살 딸과 5살, 7살 아들, 백일된 아들을 가진 네 아

이의 아빠입니다. 저와 아내는 8년간의 연애 끝에 2003

년에 결혼해서 이듬해 12월에 첫째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많이 보

채지도 않고 잘 자서 키우기가 수월했습니다. 둘째도 마찬가지였

고요. 그래서인지 양가 부모님과 저희 내외, 키우는 재미를 느끼며

아이들을 많이 예뻐했습니다.

그러던 중 아내가 셋째를 가졌어요. 마음속으로 셋째까지 생각

하던 차였습니다. 주변에 셋째가 있는 집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

데, 아무래도 둘보다는 셋을 키우기가 훨씬 어려울 거라고 예상은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아이를 낳고 키우니, 우리 내외는 괜찮은데 양가 부

모님께서 “아이들 많으면 키우는 데 고생한다”, “나중에 교육비는

어떡할 거냐”고 잔소리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저희는 웬만해

Letter 16

양이수 | 대구시 북구 노원동

Page 34: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66 이달의 편지 67

서는 남의 손 빌리지 않고 열심히 키웠습니다.

그런데 작년 겨울, 계획에도 없던 넷째가 생겼습니다. 더럭 겁이

나더군요. 장모님은 딸이 고생한다고, 저한테 피임수술을 받지 않

았다고 꾸중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는

천주교 신자여서 낙태는 살인과 같다고 수도 없이 들어왔으니 낳

아야 한다”고 주장했죠.

아내의 배가 점점 불러 올 때 아이들을 줄줄이 데리고 시내에라

도 나가면, 지하철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쏠립니다.

‘저 집은 아이가 셋인데 또 임신했네.’

이런 시선이었습니다.

옆에 앉은 할머니, 아줌마들은 한마디씩 하십니다.

“모두 이 집 애기들이우?” 그리고 또 한마디 덧붙입니다.

“애국자네!”, “금실이 좋은갑다!”

주위 친지들과 이웃에게서도 넷째 가진 걸 축하한다는 말보다

“이 시절에 어떻게 키울 거냐?” 하십니다.

우여곡절 끝에 제왕절개로 넷째를 낳았습니다. 출생신고를 하고

오는 길에, 확인 차 발급받은 주민등록등본에 자식 넷이 나란히

있습니다. 뿌듯했지만 한편으론 심란했습니다. 주위에서 아기를 적

게 낳는 이유는 무서운 교육비 때문이라는데, 줄줄이 넷을 키우고

교육해야 하니 말입니다.

어느덧 막내가 세상에 나온 지 백일이 지났네요. 이제는 지하철

을 타도, 버스를 타도, 대형 마트나 병원엘 가도 사람들의 시선을

느낍니다. 막내는 등에 업고, 나머지 아이들은 주렁주렁 손을 잡고

갑니다. 네 명을 키우는 데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

전엔 집집마다 네댓 명씩 자식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기하거나, 입

에 오르내릴 일이 아니었을 텐데 요즘은 아니군요. 그래도 쌔근쌔

근 자는 막내를 보면 행복감에 마음이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생각

합니다. ‘처음 너의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감사하고 행복해하지

못하고 지울까 생각해서 미안해. 엄마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줘서

고마워.’

네 아이를 키우는 게 쉽진 않죠. 당연히 밥도 많이 먹고, 옷도

많이 필요하고, 열차를 타도 5인분, 서울에 고궁 구경이라도 가면

여섯 식구의 숙소를 구할 수도 없습니다. 제주도 여행을 가고 싶어

도 왕복 비행기 티켓만 100만 원이 넘죠. 그림의 떡입니다. 한 아이

가 감기로 입원해도 다른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기 어렵고, 유치원

비, 학원비는 더 말할 것도 없어요.

그런데 달리 생각하면, 네 아이 키우는 거 쉬워요. 밥할 때 조금

더 하고, 이불 하나 더 깔고, 첫째 옷을 둘째에게 입히면 됩니다.

요즘 많은 왕따, 학교 폭력문제도 걱정 없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놀

고 싸우면서 사회성이 저절로 길러집니다. 공부는요, 첫째가 둘째

한글을 가르칩니다. 엄마 아빠가 첫째한테 책을 읽어 주면, 동생들

도 같이 들어요.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습니

다. 많이 낳아라, 많이 낳아라, 매스컴에서만 떠들 뿐, 모든 국민이

아이를 많이 낳으면 힘들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

을 보면 힘들겠다는 동정의 눈으로 쳐다봅니다. 세 아이, 네 아이,

혹은 더 많은 아이를 가진 가족이 남의 시선을 받지 않고 편안히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Page 35: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행복을 찾는 사람들 69

농수산물 임가공 및 수출입업

에서 특히 강세를 보였던 해태상

사 출신 멤버들이 창립한 (주)프라

임씨푸드는 김수경 대표이사의 첫

직장이다, 또한 그곳은 그녀의 꿈

을 영글게 한 그루터기가 됐다. 당

시만 해도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팽배했던 시기였지만 관리

직을 제안받은 그녀는 “무역의 꽃

은 해외 영업이라고 생각합니다”라

며 당차게 출사표를 던지고, 책상

이 아닌 그라운드에서 뛰기 시작

했다. 뜨거운 열정과 추진력으로

그녀는 수산물 수출 담당 부서에

서 능력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어

느새 해외영업팀장 자리까지 오르

게 됐다. 그러나 회사가 위기를 겪

으면서, 그녀 역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둥지를 떠나 새 출발을 기약

해야 했다.

김 대표는 지난 경험들을 자양분

으로 삼아 2009년 SLS Company

Co., Ltd.를 창립했다. 그녀는 설

립 초기부터 ‘Fair Seafood, Real

Supply’, 이른바 ‘공정한 먹을거리,

진정한 공급’이라는 모토로 회사를

경영해나갔다. “먹는 것이 사람을

성장시키고, 생명을 유지시키는 동

력인 만큼 저희는 인간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소비자들을 우선순위에

두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어요.

고객뿐만 아니라, 생산·유통·판매

에 이르기까지 협력업체들에게 적

정 수준의 이익을 돌려주며 탄탄한

한국 드라마와 한국 가요 K팝이 각각 1차, 2차 한류의 서막을 열었다면, 이제는 한국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3차 한류 ‘K컬처’가 그 대단원의 막을 올리고 있다. 특히 한국음식은 감각적 소비에만 그치는 문화상품이 아니라, 수요자들의 생활 속에서 직접 경험으로 소비되는 경험재인 만큼 엄청난 파급효과를 창출해내고 있다.

글 | 김연정 (자유기고가) •사진 | 이동진

공정한 먹을거리에 대한 열정IBK기업은행 무교지점 거래고객

SLS Company Co., Ltd. 김수경 대표이사

| 행 복 을 찾 는 사 람 들 |

여성시대68

Page 36: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70 행복을 찾는 사람들 71

신뢰 관계를 이어왔고요. 지속가능

한 사업은 상호 이익이 담보된 상

태에서 이뤄지는 것이니까요.”

김 대표는 이러한 경영 철학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공장을 직접 둘

러보고, 철저하게 점검하며 늘 소비

자와의 약속을 되새겨왔다. 뿐만 아

니라, 함께 일하는 이들의 노고를

세심하게 헤아리며 힘든 시기마다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제가 이 길

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수출

계약 하나만 맺어도 정말 많은 부가

가치가 생긴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

에요. 계약이 단 한 건만 성사돼도

해외 수산물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

들이나 국내 공장에서 일하시는 할

머니, 상품을 운반하는 택배 기사

한 분까지 삶을 꾸려나가실 수 있으

니까요. 그런 마음가짐이 저로 하여

금 계속 일을 해나가게 하는 원동력

이 되는 것 같아요.”

김 대표는 이처럼 자신과의 약속

을 되새기며 해외 시장을 적극적으

로 공략하기 시작했다. 적은 자본

금으로 3년 만에 이토록 사업을 안

정 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

은 그녀가 미국, 콜롬비아, 베트남,

스페인, 프랑스 등 새로운 시장을

끊임없이 개척하며 사업 영역을 확

장해나갔기 때문이다. 고객과의 문

제해결과 중요한 계약 체결을 위해

8개월 된 만삭의 몸으로 유럽행 비

행기에 올랐을 정도로, 그녀는 끈

기와 열정을 다해 발로 뛰었다. 그

녀의 모습을 본 해외 바이어가 “당

신처럼 용감한 사람은 처음 봤다”

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김 대표

는 이처럼 진실성과 성실성으로 해

외 바이어들을 사로잡았고, 한류

열풍으로 인해 저변화된 한식의 인

기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며, 보다

정밀한 수출 전략으로 상승세를 이

끌어내고 있다.

“한류 열풍을 통해 한국 음식에

대한 위상도 달라졌고, 수요도 몰

라보게 증가했어요. 때문에 앞으로

는 사업 영역을 수산물에서 식품

쪽으로 좀 더 넓히고자 합니다. 또

한 중국에 있는 청도(靑島) 지사를

현지 법인화하고, 중국 내수 수출

을 늘리려는 포부도 갖고 있고요.”

김 대표가 이처럼 높은 수출 수

익을 올리고, 회사의 성장세를 견

인하게 된 데에는 기업은행의 특별

한 조력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신생

회사는 은행의 벽이 높게만 느껴

지기 마련인데 회사 설립 초기부터

지점장님께서 직접 회사를 방문하

셔서 창업 자금에 대한 정보도 주

시고,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굳은

믿음으로 저희를 도와주시는 만큼

정말 책임감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

이 듭니다.”

회사 설립 초기부터 성장 과정을

SLS Company Co., Ltd. 김수경 대표이사를 찾은 IBK기업은행 무교지점 안해성 지점장(오른쪽).

Page 37: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72 이달의 편지 73이달의 편지

73

행복을

찾는

사람들

광고함께 지켜봐 온 IBK기업은행 무교

지점 안해성 지점장도 “성장 가능

성이 있다는 생각에 과감히 지원하

기 시작했어요. 김 대표님께서 성

과를 내면서 더 열중하고, 그 성과

가 또 다른 동기부여로 이어져 더

욱 큰 성과를 내는 것 같습니다. 앞

으로도 한국을 선도하는 수산물

수출 전문 기업으로 건재하길 빕니

다. 또 기업은행과도 계속 가족 같

은 관계로 남길 바랍니다”며 힘찬

응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TIP< 김수경 대표의 성공 노하우

1. 정직성. 소비자에 대한 정직성과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지켜나갈 때 기업의 브랜

드 가치는 오래 존속될 수 있다.

2. 협력체와의 소통과 상생. 진정한 소통과 상생 정신을 기반으로 한 협력업체와

의 파트너십이 장기적으로는 기업의 이익을 상승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3. 국제적 감각. 전 세계 시장을 목표로 뛰어라! 세계적인 트렌드를 체계적으로 분

석하고, 한국만이 가지는 강점을 내세워 기업의 상승세를 불러온다.

대 표 김수경

소 재 지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1가 163번지 광화문오피시아 1019호

홈페이지 www.slsc2010.com

주요생산품 냉동 게살, 냉동 바지락, 냉동 굴 등 수산물 수출 전문 기업

Page 38: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75

(주)로만손은 끊임없는 변화와 도전정신으로 지난

24년간 시계 업계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져왔다. 꾸준

한 R&D 투자와 개발로 주목받아온 로만손은, 세계

최초로 유리표면을 다이아몬드 형상으로 세공한 커

팅 글라스 워치와 국내 최초 3.89mm의 초박형 슬림

워치, Rose Gold 건식 도금기술 개발에 성공했다.

아트락스는 로만손에서 내놓은 프리미엄 제품인 ‘프

리미어(PREMIER)’ 라인 중 하나다. 다른 모델과 달

리 100만 원에 가까운 고가의 제품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성능과 기술력, 다이나믹한 디자인으로 프리

미어 컬렉션 중에서도 특히 20~30대 남성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로만손의 아트락스는 세계 3대 독

거미 중 하나인 아트락스가 사냥하는 모습에서 영감

을 받은 디자인으로, 신비롭고 치명적인 매력이 돋보

인다. 또한 스위스 무브먼트에 크로노그래프, 상단의

데이 레트로 그레이드(요일 표시 기능), 스크류 락을

도입한 100m 방수로 기능면에서도 우수한 스위스

메이드 제품이며 2011 굿 디자인 어워드에서 우수상

을 수상하기도 했다.

2012년 세계적인 시계 박람회 바젤월드에서는 아트

락스의 새로운 모델인 오토매틱 버전을 새롭게 선보

였다. 고가의 명품시계에서만 볼 수 있었던 오토매

틱 무브먼트가 장착되어 시계 애호가들 사이에서도

이슈가 되고 있다. 새로운 아트락스 오토매틱 모델은

3-layerd 다이얼의 거미줄 모양을 연상케 하는 패

턴으로 케이스와 조화를 이루고, 12시 방향 오픈 밸

런스의 강력한 심장으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외관은

기존 아트락스에 비해 한층 부드러운 인상으로 깊이

감과 고급스러움이 배가 되었다는 평이다. 특히 케이

스의 측면은 우아한 곡선과 부드러운 면으로 이루어

져 전체적으로 유연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뒷면은

오토매틱 무브먼트의 섬세한 움직임을 볼 수 있는

시스루(See-through)백으로 되어있어 오토매틱 와

치만이 줄 수 있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한다. 신

모델은 올해 9월경 출시될 예정이다.

스위스가 인정한 정통 시계 브랜드,

매력적인 독거미 아트락스가 되다

아트락스 PL1219HM 아트락스 오토매틱 PM2608PM

중소기업 명품전

회사명 : (주)로만손대표 : 김기문주소 :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77-1 로만손 빌딩문의 : 080-998-0077홈페이지 : www.romanson.co.kr / www.romanson.com

IBK기업은행 잠실지점 거래고객

여자 휠체어 농구팀 김미정 씨

농구코트 위에서꿈을 쏘아 올리다

글 | 김보라 (여성시대 작가)•사진 | 박종훈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75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IBK기업은행에서 추천하는 우량 중소기업을 소개하는 코너로, 위축된 중소기업의 경기 활성화에 다소나마 일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Page 39: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76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77

타닥타닥 바닥을 때리는 봄비 소리가 유난히도 경쾌하게 들리던

날, 경기도 일산의 한 재활 스포츠센터 농구코트에선 연신 웃음소

리가 흘러나온다. 각자의 번호가 적힌 유니폼을 챙겨 입으며 서로

의 안부를 묻기도 하고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연습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웃음이 사라진 선수들의

얼굴엔 어느덧 진지함이 덧입혀진다.

그들이 함께 운동을 하게 된 것은 2008년 무렵, 20년간 남성 휠

체어 농구 대표팀 감독을 지낸 이석산 단장이 여성 휠체어 농구팀

을 꾸리기 위해 선수들을 모은 것이 시작이었다. 그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휠체어 농구팀인 ‘레드폭스 휠’이 탄생했다.

현재 여성 휠체어 농구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는 15명 남짓,

몸이 불편한 정도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고 나이도 제각각인 그

들이지만, 운동을 하면서 삶의 노곤함이 조금씩 걷히는 것을 느꼈

다. <여성시대> 가족인 김미정 씨(46)도 이 팀의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녀는 고관절과 무릎에 연골이 없는 선천적 장애를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장래희망을 묻는 선생님의 질문에 손을 번

쩍 들고 “저는 간호사가 되고 싶습니다!”라고 이야기하자, 등 뒤에

서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그 수군거림은 30여 년이 넘는 세월이 흐

르는 동안 그녀를 괴롭혔고 자신감마저 잃게 했다.

하지만 운동을 만나고부터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도 편해지고 성

격도 많이 밝아졌다. 탁구로 장애인 전국 체전에서 은메달을

땄을 만큼 운동에 열심이었던 그녀는 우연한 기회에 휠체어

농구팀을 알게 되었고 농구를 시작한 지는 이제 6개월 남짓

되었다. 처음 2개월은 휠체어에 적응하는 것이 힘들어 손이

다 까질 정도였지만 이젠 휠체어끼리 부딪힐 때 마찰력으로

나는 쇠 냄새까지 즐길 정도가 되었단다.

농구 예찬론을 펼치는 건, 여성 휠체어 농구팀의 왕언니인 김영

미 씨(51)도 마찬가지다. 특수학교 교사로 일을 하고 있는 그녀는

선천적 소아마비로 집에서도 넘어지는 게 일상이었다. 서서 걷는

게 늘 불안했고 타박상을 달고 살았다. 하지만 우연히 친구의 소개

로 농구코트에 놀러왔다가 공을 잡게 되면서 그녀의 마음에 시원

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고 코트를 누비는 동안, 달

리는 일의 행복함이 어떤 것인지 체감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몸

에 조금씩 힘이 붙는 것이 느껴지자 운동이 얼마나 자신에게 필요

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었다. 생전

농구공 한 번 만져 보지 않고 지낸 그녀 앞에 커다란 농구공이 던

Page 40: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78 여성시대 가족을 찾아서 2 79

져졌을 때, 무섭고 두렵기만 했다. 규칙에 대해서 아는 것

이 하나도 없었을 뿐더러 기초체력을 기르는 일 또한 막막

하기만 했다. 그건 여성 휠체어 농구팀 선수 모두가 같은 마음

이었다.

여성 휠체어 농구팀의 주장을 맡고 있는 윤은미 씨(45) 역시 농

구팀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두려움을 없애는 일이었다. 그

리고 농구를 시작한 지 2년, 이젠 벤치에 앉아 있어도 선수들과 함

께 뛰고 있는 느낌을 받을 만큼 프로 농구선수가 다 되었다.

그녀는 집이 있는 군포에서 일산까지, 1시간 30분이나 되는 거리

를 1주일에 두 번씩 오간다. 그리고 그 곁에는 항상 든든한 지원군

인 남편이 있다. 넉넉한 형편도 아닌데 매주 두 번씩 일산까지 오려

면 그 기름값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기름값을 걱정하는 아내에

게 ‘그래도 병원을 오가는 것보단 낫지 않냐’며 응원을 아끼지 않는

남편이 있기에 힘든 길도 웃으며 나설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평생

그녀를 괴롭히던 감기몸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느 팀이나 에이스가 있듯 ‘레드폭스 휠’에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

하는 선수가 있다. 팀의 막내 한인경 씨(31)다. 대학에서 체육을 전

공할 만큼 운동실력이 뛰어난 그녀는 20대 중반에 장애 판정을 받

았다. 하지만 탁월한 운동실력 덕에 여기저기서 스카우트 제의를 해

오는 곳도 많다. 집이 있는 서울에서 매주 대중교통을 이용해 일산

까지 오는 여정이 결코 녹록치 않지만, 정으로 똘똘 뭉친 언니들과

함께 운동을 하다보면 그 여정이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그녀.

자신에게 붙여진 에이스라는 수식어에 손사래를 치며 “나이로만 에

이스에요!”라고 말하는 모습에 주변이 다 환해지는 느낌이다. 그런

해피바이러스 덕분일까. 주변 남성들에게 인기도 좋단다.

그녀는 앞으로 제주도로 가서 남성 휠체어 농구팀과 함께 본격

적으로 운동을 해볼 생각이다. 더 좋은 선수가 되기 위해 팀을 떠

나는 것이긴 하지만, 막내라고 예뻐해주고 더 사랑을 쏟아주었던

언니들의 곁을 떠나는 것이 벌써부터 마음에 걸린다.

이렇게 서로의 마음에 덧정이 쌓이기까지는 대회 출전의 힘이 컸

다. 이들은 지난 2011년, 사상 처음으로 2012년 런던 장애인올림

픽 출전권이 주어지는 예선전에 출전했다. 20대 실력파 선수들로

구성된 중국, 일본, 호주팀에 대패하며 출전자격을 부여받진 못했

지만 함께 파이팅하며 땀 흘린 시간들이 있었기에, 서러움에 함께

눈물 흘린 시간들이 있었기에, 더욱 끈끈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김현숙 감독이 있었다. 실업팀에서 농구선수

로 활동했던 그녀는 홀트체육관에 운동을 하러 갔다가 우연한 기

회에 여성 휠체어 농구팀을 지도하게 되었다. 그 후, 4년 째 무보수

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하는데,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선수들도 있

다 보니 훈련 강도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다.

Page 41: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80

그런 그녀에게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젊은 선수들이 많이 보강

되어 팀원들에게 함께 운동하는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

래서 요즘도 지나가다가 혹은 마트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마주

치면 농구코트로 안내하고 싶은 마음부터 든다고 한다. 그녀의 열

정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로의 힘든 마음을 어루만지며 서서히 함께하는 것의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는 여성 휠체어 농구팀 ‘레드폭스 휠’! 코트를 달리다

넘어지면 함께 일으켜 세워주고 목청 높여 파이팅을 외쳐주는 그

들에게 이제 새로운 목표가 하나 생겼다. 그건 2014년에 열릴 아시

안게임에서 꼭 1승을 거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 또 많

은 시간 땀을 흘려야겠지만 서로를 믿고 끝까지 함께하는 한, 시원

한 슛을 쏘아 올릴 그날은 머지않았음을 안다.

마침 취재를 간 날이 김현숙 감독의 생일이라, <여성시대> ‘회식

한 번 합시다’ 참여로 받은 삼겹살로 거하게 회식을 할 생각이라는

그들! 그 뒷모습에서 이미 승리의 기운이 감도는 듯하다.

•여성 휠체어 농구팀 문의 다음 카페에서 <여성 휠체어 농구>를 검색해보세요!

코너 속

특집 - 엄마, 아빠 할 말 있어요아빠, 없던 걸로 해줘요01

파란만장 나의 성공기쓸쓸했던 내 삶이 따뜻해지기까지02

장용의 단결, 필승, 충성에로영화와 108번뇌03

추억 속의 그 사람다시 시작하는 사랑04

일러스트 | 조신애

Page 42: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82 코너 속 편지 83

저는 이제 막 10살이 됐어요. 이름은 이채원이라고 합니다. 저는

우리 아빠한테 할 말이 있어요. 우리 아빠는 이학준이에요. 그런데

우리 아빠가요, 자꾸 이다음에 결혼하면 아빠랑 꼭 같이 살아야

한다고 강요를 해요. 실은 이건 기억도 안 나는 오래전 이야기인데

제가요, 나중에 커서 아빠랑 결혼을 한다고 했대요.

아빠는 그렇게 말씀하시지만 제가 기억나는 게 있다면 7살 때,

결혼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친구랑 하고, 그 대신에 결혼할 때 아빠

도 꼭 데리고 가서 같이 살겠다고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을 했

거든요.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가끔 시골에 갔다 오면, 엄마

랑 아빠가 할머니 때문에 싸우는 모습을 보고, 아무래도 제가 나

중에 커서 결혼을 하면 우리 신랑이랑 아빠랑 한집에서 같이 살면

많이 불편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얼마 전에 아빠한테, “아빠, 내가 나중에 결혼해서 아빠

랑 아주 가까운 곳에 살면서 자주 놀러 가면 안 돼요?” 하고 물었

더니 아빠는 저보고 약속해놓고 지키지 않는다며 막 뭐라고 하는

거예요. 약속은 지키라고 있는 거라고 하시면서 꼭 지키라고요. 결

혼하면 무조건 저를 따라오겠다고요. 물론 아빠도 많이 섭섭하시

겠지만 저, 그거에 대해 아빠한테 할 말이 있어요.

우리 아빠에게,

아빠 안녕! 나 채원이야. 아빠는 약속은 했으면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했지? 그런데 아빠도 엄마한테 매일 술 조금만 먹겠다고 약

아빠,없던 걸로 해줘요

이채원 | 서울시 중랑구 면목2동

특집 - 엄마, 아빠 할 말 있어요

Page 43: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84 코너 속 편지 85

속하는 거 내가 봤어. 그렇게 말해놓고 매일 안 지키잖아. 아빠도

그러면서 나보고는 무조건 약속 지키라고 하면 안 되는 것 아냐?

그리고 7살 때는 내가 너무 어렸는데 어떻게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었겠어. 아무 생각 없이 한 약속이니까 그냥 없던 걸로 하면 안

될까? 그리고 아빠도 할머니, 할아버지, 고창할머니 다 안 모시고

살면서 나보고는 무조건 같이 살자고 강요하면 안 되잖아. 그치?

만약에 아빠도 지금부터 세 분 다 모시고 살면 채원이도 다시 생각

해 볼게요.

그래도 꼭 약속을 지켜야 한다면, 나는 기억도 안 나지만 아빠가

그랬잖아. 내가 아빠랑 결혼한다고 약속했다고. 나도 그 약속을 지

킬 테니까 아빠가 엄마랑 이혼하고 나랑 결혼할래? 그건 또 싫지?

그리고 또 엄마 입장도 있어. 엄마는 나중에 나랑은 절대 살기

싫다고 하는데 그럼 나 결혼하면 엄마랑 안 살고 아빠는 나 따라

올 거야? 그것도 안 되잖아. 또 내가 나중에 남자 친구 사귈 때마

다 “난 결혼하면 아빠랑 살아야 하는데, 좋아요?” 하고 물어보고

사귈 수도 없지 않겠어?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지금 아빠가 할머니, 할아버지 옆

에 살면서 자주 놀러 가는 것처럼, 나도 나중에 그렇게 살면 딱 좋

을 것 같아. 알았지? 자꾸 그 얘기할 때마다 아빠가 삐치고, 화내고

하니까 나도 기분이 좀 그래. 그러니까 아빠가 채원이를 위해서 다

시 생각해줘. 그리고 웬만하면 없었던 약속으로 하자. 응? 알았지?

참, 또 하나 할 말 있다. 아빠 술 좀 줄이면 안 돼? 엄마는 평소

에도 무서운데 아빠가 술 마시면 더욱 더 무서워져서 내가 살 수가

없어. 그러니까 아빠가 술 좀 팍팍 줄여줘. 안 그러면 나 나중에 결

혼해서 미국 가서 산다! 아빠, 정말 사랑해. 알라뷰! 뿌잉뿌잉.

저는 어린 시절이 참 불행했어요. 사춘기였던 저는 어머니, 아버

지의 이혼으로 마음 둘 곳이 없었고 싸늘한 바람이 가슴을 파고들

어 참 춥고 쓸쓸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제 맘을 위로해 주던 것은

곱디고운 한복이었습니다. 연초가 되면 마루에 걸리는 달력 안에는

톱 영화배우들이 우아한 한복을 입고 예쁜 자태를 뽐내고 있었는

데, 그걸 보면서 배우는 못 돼도 그들이 입는 한복을 짓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을 했지요.

그리고는 나이 열다섯에 무작정 서울로 왔습니다. 서울역에 도착

하니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기차역에서 온종일 굶으며 시

간을 보내다 보니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아 집으로 돌아갈

까도 생각했지만, 얼른 성공해서 어릴 때 헤어진 엄마를 만나고 싶

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걷고 걸으니, 종로 OO주단이라는 간판이 보였어

파란만장 나의 성공기

쓸쓸했던 내 삶이따뜻해지기까지

배숙주 | 서울시 구로구 구로5동

Page 44: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86 코너 속 편지 87

요. 매우 반가워 유리창에 얼굴을 대고 울었습니다. 저는 화려한

옷감들이 반기는 것이 매우 기쁜 나머지 제 처지도 잊은 채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예쁜 한복을 입은 분이 눈을 흘기며

동전 한 개를 던져주고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소리치더군요.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저는 일만 가르쳐 주시면 뭐든 하

겠다고 엎드려 빌었습니다.

그날부터 그곳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머무르게 되었습니다. 뭐든 눈

치 빠르게 행동하고, 청소와 각종 심부름을 도맡아 하며 귀여움을 받

은 지 일 년, 드디어 한복 짓는 일을 어깨 너머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재봉틀 바늘에 실 꿰는 것도 어려웠죠. 실을 잘못 끼

워 번번이 혼나기 일쑤였고, 다림질 온도를 잘못 맞춰 욕도 먹고,

섶코를 잘못 빼 옷에 구멍이나 얻어맞기도 했습니다. 집을 나온 것

이 몇 번이나 후회되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종이에 한복 본을 떠서 박아보기도 하고, 못 쓰는 천이 너덜너덜

해질 때까지 뜯고 바느질하고 또 뜯기를 10년. 어느덧 스물여섯이 되

었고, 종로에서 깃 섶 예쁘게 빼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다른 주단에

서 저를 데려가려고 많이 유혹하기도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

다. 오갈 데 없는 열다섯 소녀를 받아준 곳을 배신할 수 없었어요.

제 주단을 가지기 전까지는 앞만 보고 달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바느질 예쁘게 한다는 소문이 나서, 연예인들 화보 촬영에도 인기

를 얻게 되자,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

해 몇 날 며칠 밤을 새우는 일은 다반사였죠. 잠이 오지 않는다는

약도 먹고, 커피를 대접으로 타 마시기도 했습니다. 졸면서 일하다

가 재봉틀에 손을 박기도 했고, 다리는 바퀴를 돌리는 만큼 병들

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일하는 주단에 드나들던 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

게 되었고, 더 좋은 자리를 소개해주겠다는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

고 우리는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쓸쓸함과 외로움에서 이제는

행복한 날만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도 잠시, 고난은 또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모아둔 돈으로 시작했던 남편의 사업은 3년 만에 기울기 시

작했고, 사기까지 당해 남편이 감옥살이를 하게 된 것입니다. 애써

잡게 된 행복한 가정을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었습니다. 지푸라기

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사죄하고, 어떻게 해서

든 조금씩이라도 빚은 꼭 갚겠다며 선처를 빌었습니다.

처음에는 본 체도 않던 사람들도 제가 매일 찾아가 눈물로 호소

하자 마음이 움직였는지 조금씩 돌아서기 시작했고 다행히 남편은

1년 정도 감옥에서 지낸 뒤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숨을 돌릴 새가 없었습니다. 또 10년, 죽을 듯이 일을 했습

Page 45: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88 코너 속 편지 89

니다. 남편도 다시금 마음을 붙잡고 한복집에 납품하는 일을 시작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제 다리는 골반염으로 대수술을 받았고 계

속 밀려드는 일 때문에 재수술하기를 3번, 그래도 그 사이 사랑스

러운 아이들도 태어났고, 비록 여유롭지는 않았으나 저는 다시 제

주단을 가지겠다는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복 입는 사람도 점점 줄고, 한복의 인기도 사라지더군

요. 그래서 사람들 입맛에 따라 이렇게도 만들어 보고 저렇게도 바

꾸어 보았지만, 문득 처음 한복을 만들기 시작할 때 생각을 놓쳐서

는 안 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반했던 한복의 아름다움은

잊고,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만 남은 것 같았어요.

그래서 다시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비록 돈을 많이 벌 수 없어

도, 저의 젊음이 한 땀 한 땀 박혔던 그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었던

거지요. 그렇게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다 보니 아이들도 장성해 저

마다 따뜻한 가정을 꾸리게 되었고, 저는 꿈에 그리던 한복 디자인

가게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한복을 배우던 무렵의 나이를 가진 아가씨들에게

선생님 소리도 들으며 이것저것 가르치고 있네요. 이 좋은 시대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저를 주먹구구식 낡은 사람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손끝 하나만큼은 자신이 있습니다. 깃 섶

빼내는 눈썰미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고 깊은 멋을 낼 수 있

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한복점도 거의 다 없어지고 있지만, 저에게 이 가게는 단순

히 빛바랜 한복집이 아닙니다. 제가 젊은 날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이

자 자부심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제게 배우고 있는 이 젊은이들에게

또 하나의 자부심이 되어 한복의 멋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군대 있을 때 제 별명은 ‘제자리’였습니다. ‘사용 후 제자리’라는

뜻입니다. 저는 1996년 입대해서 운전병 보직을 받아 30사단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군 생활을 시작한 부대는 바로 사단의무대였습니

다. 제가 근무할 당시만 해도 사단의무대에는 수송부가 없어서 정

비대 수송부 고참들과 같이 정비대에서 생활을 해야만 했죠.

어느 날 고참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야, 제자리 너는 완전 운 좋은 놈이다. 우리 사단 최고의 보직을

잡아서 좋겠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사단 최고의 보직이라

고?’ 궁금했습니다. 얼마 후 수송관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홍길동! 너 밖에서 1톤 차 운전해봤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그럼 내일부터 이OO 병장 따라다니면서 방역차 업무파악 해!”

장용의 단결, 필승, 충성

에로영화와108번뇌

애청자

Page 46: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90 코너 속 편지 91

그렇게 다음날부터 저는 방역차 운전병으로 보직이 정해졌습니

다. 처음에는 이 차가 왜 최고의 보직인지 잘 몰랐지만, 시간이 흐

를수록 입가에는 웃음이 번졌습니다.

방역차는 1년 365일 중 거의 쉬는 날 없이 운행을 나갑니다. 방

역차의 주 임무는 병사들 모기 뜯기지 말라고 허연 연기를 내뿜으

며 사단 사령부를 비롯한 예하 부대를 돌며 방역을 하는 것입니다.

부수적인 임무로는 각 부대의 수질을 채취해 수질검사를 의뢰하는

임무도 있었습니다. 아무튼, 매일 운행을 나가니 중대 작업도, 차량

정비도 안 하고 고참들한테 시달리지도 않고, 게다가 나가면 먹고

싶은 거 맘대로 사 먹죠. 완전 닐리리 맘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운행이 있으니 의무대로 넘어오라는 지시가 있

어서 차량을 가지고 의무대로 갔습니다.

방역반으로 갔더니 반장님이

“오늘 벽제로 약품수령 갔다 오자” 하셨습니다. 제가 방역차 운

전할 때까지만 해도 방역반 업무가 없는 날은 방역차로 의무대 약

품수령을 종종 다녀오곤 했습니다. 약품수령을 마치고 부대로 오

는 길이었습니다. 반장님이 저에게

“야, 제자리! 배 안 고프냐? 우리 자장면이나 먹고 가자” 하시더군요.

그래서 중화요리집 앞에 차를 주차시키고 반장님과 저는 자장면을

아주 맛있게 먹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반장님이 또 하시는 말씀이,

“야, 홍길동! 시간도 많이 남고 배도 부른데 우리 영화나 한 편

때리고 가자.”

‘이건 뭔 소리다냐? 영화라니? 이 근처에는 극장이 없는데?’

잠시 후 반장님은 저를 근처에 있는 비디오방으로 데리고 가셨

습니다. 군대 와서 비디오방에서 영화를 보다니, ‘참, 군 생활 좋네’

속으로 생각하고 따라 들어갔습니다. 화장실을 갔다 오니 반장님

이 이미 영화를 선택하셨더라고요. 홍콩영화였습니다. 저는 당연히

‘홍콩영화하면 액션 영화지’라고 생각하고 관람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제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을 알았습

니다. 그 영화는 바로 초특급 블록버스터 에로영화 <옥xx>이었습니다.

점점 영화 속으로 빠져들며 제 눈은 번쩍! 귀는 쫑긋! 말초신경은 아!!!

그에 반해 반장님은 피곤하셨는지 아니면 이미 본 영화였는지 잠

이 들어버렸습니다. 저는 반장님이 주무시든지 말든지 영화에 몰두

했습니다. ‘아! 세상에 이런 영화도 있었구나. 부대가면 꼭 얘기해줘

야지’ 하고 이를 악물면서 영화 관람을 마쳤습니다.

반장님과 부대로 돌아오는 차 안, 이미 저는 눈이 풀릴 대로 풀

려 있었습니다. 운전하고 오다 신호에 걸려 대기를 하고 있는데 옆

에 다른 승용차가 서기에 무심결에 그 차 조수석에 탄 사람을 봤

는데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냥 여자냐? 아니었습니다. 제 눈에는

Page 47: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92 코너 속 편지 93

그 에로영화에 나오는 여배우가 저를 보고 웃고 있는 것 같았습니

다. “뜨악!” 정신 차리자며 고개를 옆으로 마구 흔들어대고 겨우 부

대로 돌아왔습니다.

부대로 돌아온 후에도 며칠간 영화의 환상 속에서 헤어나지를

못했습니다. 밥을 먹을 때도 야간근무를 나가도, 영화의 환상 속에

빠져 지내던 중 일요일 저녁이 되었습니다.

일요일 저녁에는 종교가 있는 사병들이 각자의 종교에 맞춰서 종

교 활동을 하고 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종교가 없었던 저는 일요

일 종교행사를 다녀오면 저녁 점호청소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

에 꾀를 냈습니다. 다녀오면 청소가 다 끝나있을 테니까요.

‘오호! 좋았어!’

저는 그날 종교행사에 참석하기로 맘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문제

가 생겼습니다. 종교가 없는데 어느 곳에 참석 하느냐가 문제였습

니다. 고민에 빠져있는데 동기 한 명이 저한테

“길동아, 우리 절에 가자!”

“절?”

“그래, 절! 절이 제일 가깝잖아. 가까운데 가서 놀다 오자.”

그 말에 혹해서 절에 가는 행렬에 합류했죠. 아시다시피 절은 방

석을 깔고 앉아 불경을 올립니다. 그런데 앉아서 스님 말씀을 듣는

중에도 에로영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 거였습니다. 구구

단도 외워보고 스님 말씀에 집중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때 갑자기 법당 안에 있던 사병들이 다 일어났습니다. 얼떨결에

일어나 옆에 있는 동기에게 물었습니다.

“야! 왜 갑자기 일어나?”

“길동아, 미안하다.”

“왜? 뭐가 미안하다고?”

순간 앞에 계신 스님의 말씀이 제 귀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귀

를 의심했습니다. 스님께서 하신 말씀은 바로 108배였습니다. 절을

108번을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어메! 어메! 이게 뭔소리다냐? 야! 니가 가까운데 오자고 해서

왔는데 이게 뭐여?!”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108배는 이미 시작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

번, 두 번, 삼십 번, 오십 번, 갈수록 제 다리는 코미디언 김정렬 씨의

‘숭구리당당 숭당당’을 하고 있었습니다. 땀은 줄줄 흐르고 다리, 허리

아프지 않은 데가 없었습니다. 절을 한 번 할 때마다 동기를 쳐다보고,

“넌 동기가 아니고 사탄이여! 우찌 나를 이리 힘들게 허냐? 으미!”

간신히 108배를 마치고 덜덜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막사로 돌아

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날은 저녁 근무가 없어서 아침까지 푹

잘 수가 있었습니다.

다음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운행을 나갔다가 무사히 복귀하

고 막사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운행을

하면서 온종일 그 에로영화 생각이 하나도 안 난 것입니다. 어제 절

에서 한 108배의 힘일까요? 어렸을 때 본 ‘머털도사와 108 요괴’란

만화가 생각났습니다. 108 요괴, 108 번뇌. 아, 이래서 사람들이 종

교를 믿는 건가 봅니다.

그 뒤로 아무 사고 없이 방역차를 후임에게 물려주고 저는 다른

차량으로 보직을 바꾸어 생활하다 전역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군인 중에 운전을 보직으로 하고 계신 사병분들, 전역

하는 그날까지 안전 운전하셔서 아무 사고 없이 건강하게 전역하시

기를 바랍니다. 필승!”

Page 48: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94 코너 속 편지 95

1980년 봄, 단발머리 여고생이던 나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습

니다. 학교 대표로 도내 사생대회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어찌나

행복하던지 잠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림 도구를 챙기고 교복도 구

김 없이 다려 놓고 대회날을 기다렸어요.

다음날, 핀컬 파마를 한 미술 선생님과 학교 대표로 뽑힌 학생

다섯 명이 새벽 고속버스에 올랐습니다.

드디어 대회장에 도착했습니다. 학생들은 각기 흩어져 이젤을 세

우고 캔버스에 밑그림을 구상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그림을 그리

다가 목이 말라 물통을 꺼내 물을 마시고 남은 물을 근처 나무를

향해 휙 쏟아버렸습니다. 햇빛에 진주알처럼 흩어지는 물방울이 참

곱다는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구야 물을 뿌리는 사람, 남의 그림 다 망치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까만 안경을 쓴 남학생이었습니다. 반쯤 완

성된 유화 그림에 물이 뿌려져 있고, 나를 쏘아보며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어머, 어머머! 미안해요.”

얼른 손수건을 꺼내 두 손으로 내밀며 미안하다고 했지만 남학

생은 찡그린 얼굴로 내가 준 손수건을 손가락에 감아 물기를 찍어

내며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습니다. 나는 그림도 제대로 완성하지 못

하고 무언가에 홀린 듯 그 남학생을 바라보았습니다. 종료 시간이

됐고 모두들 그림을 제출했어요.

결국 남학생이 대상을 거머쥐었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대각

선 옆으로 앉은 그와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그때 남학생이 벌떡 일

어나 다가오더니 조금 전에 받은 부상 하나를 내미는 겁니다.

“아까 준 손수건 덕분에 내 그림이 대상을 받은 거니까 선물로

이걸 주고 싶어요.”

얼떨결에 떨리는 손으로 선물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버스 안에

박수가 터지고,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냐는 부러움과 야유의 소리가

흘러 나왔습니다. 명문고 미술부 회장이라는 그와 가끔 편지도 주

고받고, 야외로 나가 그림도 그리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그는 미대에 입학하여 2학년 때 입대했습니다. 제대를 한 달 앞

두고 그의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함께 집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깜

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두 분 모두 앞을 못 보는 장애를 가진 분들

이었습니다. 나는 한동안 그와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미리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충격이 컸겠지.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해.’

그는 편지 한 장을 보낸 뒤 어디론가 이사를 가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열병이 시작되었습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의 얼굴,

웃는 모습, 미소년 같은 표정,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를 찾아

다시 시작하는사랑

이선녀 | 서울시 도봉구 도봉2동

추억 속의 그 사람

Page 49: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96 코너 속 편지 97

다녔습니다. 잊으려고 피나는 노력을 했지만 헛수고였습니다. 먹을

수도 없고, 일을 할 수도 없고, 며칠 동안 입원까지 했습니다.

엄마는 안타까운 얼굴로 “왜 그러냐? 무엇이든 말을 해보라” 하

셨지요.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엄마 말을 믿고 사실을 털어 놓

았더니 엄마는 갑자기 말을 바꾸었습니다.

“홍역 앓았다 생각하고 잊어라. 마음 정리하렴.”

너무 단호했습니다. 그리고 중매로 만난 사람과 결혼을 했습니다.

아이가 다섯 살이 될 무렵, 남편은 새로 생긴 여자를 놓칠 수 없

다며 떠나 버렸습니다. 아이와 둘만 남겨졌고 눈앞이 캄캄했습니

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며 건물 청소, 목욕탕 매점일, 식당일까지,

닥치는 대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지난가을, 새로운 일자리를 찾던

중, 장애인복지관을 통해 교육을 받고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복지관의 주선으로 장애인 집을 방문했습니다. 팀장을 따라 들

어간 집에는 검은 안경을 낀 남자가 있었습니다. 책상 위에는 조각

중인 나무가 있고, 손에는 조각칼이 들려 있었습니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비

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어린 시절 만나 같이 그림을 그리던 그 남

자, 그 사람이었습니다.

“오시느라 고생했죠? 좀 쉬셨다가 천천히 하세요.”

중저음의 목소리가, 기억 저편 해묵은 추억의 마른 나뭇가지에 불

을 지폈습니다. 팀장이 돌아가고, 놀란 마음에 쩔쩔매고 있는 내게

“냉장고 가운데 칸에 생강차 있어요. 몸 녹이고 일하세요.” 그는 전

혀 보이지 않는 듯, 한곳만 응시하며 말했습니다.

주룩 눈물이 흘렀습니다. 방 여기저기 그의 미술 작품이 추억열

차가 되어 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오래 전에 대상을 받은 작품

도 있고, 그 옆에는 유화 물감이 묻은 손수건도 있었습니다. 시력

을 점점 잃어가는 가운데도 그림만은 계속 그린 듯 갈수록 색채가

혼란스럽게 변해가는 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책상 위에는 익숙한 얼굴의 여고생이 수줍게 웃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내 가슴에 살아있던 사람, 언젠

가 한번은 꼭 만나고 싶었던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에 수십 년

세월이 실렸습니다. 갓 스물을 넘긴 소녀처럼 설렙니다.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아직도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머릿속에 무수한

물음표가 그려지고, 어느새 그를 위한 반찬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할지 오랫동안 망설이고 있습니다.

Page 50: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감히 나를 기다리게 해?빠져가지고!

어머,쭉 들이키네~

맥주 한 모금도못 하던 게...

좀 남자다워졌는데?

잘 마신다더니 그대로네...

너 멋있어졌다!이제 술 좀잘 마시니?

하하!전보다 조금.

짠!원 샷!

뼈다귀 밖에없는 게 전역했다고눈에 뵈는 게 없구만!

저...선배님? 너..너무늦었죠??

죄송해요.차가 막혀서

어..?!

어머!

어머!

어머머머머머!

선배님.

.......

※ <여성시대> 가족 이지현 씨의 사연을 각색한 만화입니다.

그림 | 권석빈

연애에서 결혼까지

여성시대98 연애에서 결혼까지 99

Page 51: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00 여성시대100

죄.죄송.. 죄송해요선배님..

벌써 퇴근시간..얘는 집에 잘들어갔나?

무슨 애가전화하라고

메모도 남겼는데연락이 없어~?!

너~어?!너 여기서뭐하는 거야!

선배근데 갑자기왜 울어요...

아, 아무튼죄송해요~.

히잉.괜히 결혼했어..괜히 결혼했어~!

어, 얼굴만보고 가려고했어요.

자..자꾸..보, 보고싶어서..시끄러-!

흐엉~

제가..너무추한 꼴을 보인것 같아서근데 왜

그러고 있어?너 맞을래! 앗!! 죄..

죄송...

아까 아까나갔지~!머리가 띵 한지빌빌거리더만...

에휴...완전 늦었다.

얼른 집에들어...

호, 혹시누워서 토하다기도가 막혀서..그럼 큰일인데?어쩌지??

으이구..

아~그 총각

누, 누구세요!우리집에서 뭐 ...도, 도둑이야!!

엉엉-

꺄악-!사람 살려!

엄마~

서..선배!저예요!

몇 년 후...

끝.

빠져가지고!잘 들어갔으면

연락이라도 할 것이지!

여성시대100

Page 52: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103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요즘 부모들의 으뜸가는 고민은 단연 아이들의 학습 문제이다.

초등학교 저학년부터 장시간 학습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누구

나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떠오르는 생각은

‘그렇다고 나만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지’ 하며 아이를 다그치는 것

이 부모 마음이다. 대한민국 교육의 미래가 아무리 중요하다 하더

라도 당장 내 아이의 다음 시험 성적만큼 중요할 수는 없다.

저학년에 도움 되는 보약 두 첩

부모는 이렇게 고심하고 노력하건만 아이들은 그런 부모 마음을

통 모른다. 오늘도 아이는 부모가 시키는 공부를 얼른 마친 후 게

임을 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숙제도 공부도 빨리 하고 놀 궁리뿐이

다. 이런 모습에 화가 나서 잔소리를 하지만 달라지는 것도 그때뿐

이고 다음엔 다시 도루묵이다.

<여성시대>에도 아이들의 학습 태도에 대한 고민이 많이 올라온

다. 사실 속 시원한 해답은 없다. 만약 그런 방법이 있다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답은 아이들에 따라 다르고, 상황에

따라 다르다. 경우에 따라서는 답이 없는 경우도 있고 부모가 마음

을 비워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보편적으로 통하는 방법은 있다.

특히 학습의 기초를 형성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실천하면 장기적

으로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첫째, 아이에게 교과서를 갖고 다니게 하자. 요즘은 예전에 비해

교과서가 무거워졌다. 과목별로 여러 권이고 종이도 좋아졌다. 활

동지가 뒤쪽에 붙어 있다 보니 무게도 더 나간다. 책이 무거워 들고

다니기 힘들 것을 고려해 학교에서는 사물함을 비치했다.

그러나 교과서를 학교에 두고 오면 부모로선 아이의 학교에서의

학습에 대해 아무런 정보를 얻을 수 없다. 수업 태도는 교과서에

그대로 드러난다. 요즘은 교과서에 직접 필기를 하기 때문에 교과

서를 보면 아이가 수업에 얼마나 참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아이

의 교과서를 훑어보고 부모가 한마디 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좀 더 긴장해서 수업에 임하곤 한다.

그뿐 아니다. 교과서 내용을 부모가 알면 아이와의 대화에서 자

연스레 교과서 내용을 말할 수 있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예습, 복

글 | 서천석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 트위터 아이디 @suhcs)

일러스트 | 조신애

여성시대102

Page 53: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아이와 함께 자라는 부모 105

습 효과가 있고 책상에 앉아서 하게 되는 지루한 학습시간이 줄어

든다. 또 복습을 할 때도 자습서나 전과로 공부를 하면 생소한 반

면, 교과서로 하면 학교에서 들었던 수업 내용을 자연스레 떠올려

좀 더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의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그날 배운 내용을 확인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불과 5~10분. 거기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아

이와 짧게 대화를 나누면 아이는 학교 수업에 좀 더 집중하게 되

고 부모가 자신의 학습에 관심이 있음을 느껴 학습 동기도 올라간

다. 아이가 고학년이 되면 교과서가 더 무거워져 들고 다니기 어렵

다. 3학년까지라도 교과서를 들고 다니게 하고 부모가 하루 5분 들

여다보는 것. 아이의 학습에는 보약이다.

둘째, 독서와 어휘에 집중한다. 많은 부모가 독서가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독서보다는 학습지나 문제집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부모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아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화류에만 편중한 독서를 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독서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 비로소 시작된다.

독서는 산에 뿌려놓는 인삼 씨와 같다. 당장 수확할 수는 없지만

나중에 값어치가 높은 장뇌삼이 된다. 독서가 충분하지 않은 아이

들은 새로운 개념을 학교에서 배우면 그저 이해하고 외워야 하는

반면 독서를 많이 한 아이들은 새로운 개념을 자기가 이미 알고 있

는 다양한 개념과 연결한다. 그리고 연결망 속에 들어온 지식은 잘

잊지 않는다.

언어능력의 발달도 중요하다. 독서를 꾸준히 한 아이들은 어휘력

이나 문장 독해속도가 현저히 빠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배워야

할 새로운 어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다. 어휘를 확장하는 것은 눈

덩이를 굴리는 것과 같다. 일찍 뭉쳐져 덩어리가 빨리 커져 있을수

록 더 잘 커지고, 덩어리가 작으면 열심히 굴려보아도 커지는데 더

많은 시간이 든다.

독서를 시킬 때 주의할 점이 있다. 저학년 아이들의 경우는 다짜

고짜 읽으라고만 해선 곤란하다. 책을 잘 읽고 좋아하는 아이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부모가 읽어주어 문장을 끊어 읽는 호흡을

느끼게 해주는 편이 좋다. 또 모르는 어휘를 짚어서 말해 주고 아

이가 직접 찾아보도록 해주자. 이런 부모의 활동이 아이의 책 읽는

기술을 놀랍도록 발전시킨다.

어찌 보면 작은 실천이다. ‘교과서 들고 다니게 하기, 부모가 책을

읽어주기.’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작지 않다. 아이에게 학습의 기

초를 튼튼히 만들어줄 두 개의 큰 기둥이 될 것이다.

여성시대104

Page 54: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그 사람의 도전 이야기 107

중학생들의 시합이 한창인 축구장.

벤치에 앉아 운동장만 바라보는 소년의 얼굴이 침울합니다. 몇

달째 이렇게 벤치만 지키고 있자니 어린 마음에도 울컥 서러움이

솟구쳐요. 감독님들은 언제나 ‘공을 제법 잘 찬다’고 칭찬하면서도

막상 시합이 벌어지면 그에게 출전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물론

높고 거친 파도 앞에서작지만 거대한 함선, 홍명보

글 | 이정아 (방송작가)·일러스트 | 박근용글 |이정아 (방송작가) 일러스트 |박근용

이유는 소년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작은 키가 문제였어요. 그는 축

구부원 중에 가장 작았고, 교실에서도 늘 맨 앞자리에 앉을 정도였

죠. 몸집이 작아 몸싸움에선 늘 밀리는데다, 그렇다고 발이 빠른

것도 아니어서 선생님들은 소년을 믿지 못했습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연습 경기 도중에 상대 선수에게

밀려 넘어지면서 오른쪽 쇄골이 부러져버린 겁니다. 그리 크게 부

딪힌 것도 아니고 슬쩍 밀려 넘어졌을 뿐인데, 그 지경이 됐으니 약

한 몸을 탓할 뿐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어요. 급기야

담임선생님까지 집에 찾아와 축구를 그만두게 하라고 부모님을 설

득했을 정도였죠.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는 축구보다 공부하길 더

바라셨어요. 그런 아버지를 끈질기게 설득해 겨우 축구부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는데, 벤치를 지키는 것도 모자라 몸까지 다쳤으니

소년은 아버지를 볼 면목이 없었습니다. 자기보다 머리 하나씩은

큰 친구들 틈에서 그는 점점 움츠러들기만 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포기할 순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축구라는 멋진

세상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으니까요. 불쑥, 체력이 문제라면

연습으로 극복하면 된다는 오기도 발동을 합니다. 그때부터 아침저

녁으로 혼자만의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해요. 푸르스름하게 해가 떠

오르는 새벽길을 달려 학교에 가고, 수업 전 한두 시간은 무조건 개

인기 훈련에 매달렸죠. 당시엔 학교마다 축구공이 부족한 형편이라

조금만 늦어도, 바람 빠진 공조차 만지기 힘들었기 때문에 실밥이

덜 풀린 탱탱한 공을 차지하려면 무조건 친구들보다 일찍 학교에 도

착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혼자 리프

팅 연습을 했습니다. 리프팅은 발등, 무릎, 어깨, 이마 등을 이용해

서 공을 바닥에 떨어뜨리지 않고 공중에 계속 띄우는 기술로 축구

그 사람의 도전 이야기{

여성시대106

Page 55: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그 사람의 도전 이야기 109

그는 더 이상 최단신 약골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속에선 저절로, 누구와 맞서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차올랐죠. 물론 갑자기 크는 바람에 균형

감각이 흔들리고 스피드가 떨어지는 어려움도 겪었지만,

그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의 기본 중에 기본. 매일같이 연습을 하다 보니, 나중엔 실력이 늘

어서 한 번에 리프팅을 3천 개까지 할 수 있게 됐어요. 뿐만 아니라

그는 패스 연습에도 공을 들였습니다. 빠르고 정확하게 패스하게 되

면 발이 조금 느려도 밀리지 않을 거란 생각에, 해가 지고 친구들이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혼자 남아서 공을 차고 또 찼던 겁니다.

그 외에도 그가 체력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몰두한 것은 또

있었습니다. 바로 분석하는 축구를 했다는 겁니다. 유명한 선수들

의 경기 장면을 비디오로 보면서 공격수들이 움직임을 예측하고 공

격 패턴을 분석하는 데 정성을 쏟았죠. 상대보다 먼저 좋은 자리에

가 있으면 제 아무리 덩치 큰 공격수들과 맞붙어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겁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도 키는 여전

히 168센티미터에 불과했지만, 그는 무려 6년을, 그렇게 묵묵히 자

신만의 훈련을 이어갔습니다.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았는지, 그즈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버

스 손잡이에 드디어 머리가 닿기 시작한 겁니다. 당시 버스 손잡이

는 그가 정해놓은 기준점이었어요. 버스에 타면 머리 위에서 대롱

거리는 손잡이가 원망스러워서 늘 “저기에 닿을 때까지만이라도 키

가 자라주면 좋겠다” 중얼거리곤 했었죠. 그런데 언제부턴가 손잡

이가 정수리를 톡톡 때리더니, 눈 밑으로 내려오고 귀 옆에 닿기

시작한 겁니다. 자고 일어나면 쑥쑥 커져 있는 키는 불과 몇 달 만

에 15센티미터나 자라 183센티미터가 됐습니다.

그는 더 이상 최단신 약골이 아니었습니다. 가슴속에선 저절로,

누구와 맞서도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차올랐죠. 물론 갑

자기 크는 바람에 균형 감각이 흔들리고 스피드가 떨어지는 어려움

도 겪었지만, 그건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세상 무엇보다 자

신 있는 것이 연습하는 일이니까 이번에도 연습으로 극복하면 될

일. 그는 그렇게 점점 더 강한 선수로 성장해갔습니다.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겠다며 시작한 분석하는 습관 역시, 그 즈

음엔 그만의 단단한 무기가 됐습니다. 상대 선수의 플레이를 예리

하게 분석하고, 한발 앞서 예측하는 훈련을 해온 덕분에 ‘뛰어난

두뇌 플레이어’라는 칭찬까지 들을 수 있었던 겁니다.

스무 살에 국가 대표로 선발된 이후, 서른다섯 나이로 은퇴할 때

까지, 그가 언제나 최고의 선수일 수 있었던 건, 늘 한결 같았던 이

런 열정의 결과였습니다.

이제 지도자로 변신한 그는 청소년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아

2009 U-20 월드컵의 8강 신화를 이뤄내는 등 지도자로서의 능력

도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런던올림픽 축구 대표팀의 수장을

맡은 지금은 아시아 지역 예선을 무패 행진으로 이끌며 또 한 번의

기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

의 우직한 외침이 열정으로 가득 찬 그의 삶을 그대로 말해주는

듯합니다 .

여성시대108

Page 56: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10 스튜디오에서 111

요즘 <시골밥상>에 안 보여서 섭섭하기 짝이 없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다. 그럴 때마다 왜 내가 그만두었는지를 순서대로 친절히 설

명해 드려야 한다. 지난겨울 뮤지컬 준비 중에 무대에서 낙상한 일,

공연은 겨우 끝냈지만 후유증이 제법 갈 것 같다는 치료진의 뒷얘

기들, TV에서는 30분짜리 <시골밥상>이지만 실제 녹화는 3~4시

간 걸리며, 기차나 비행기로도 갈 수 없는 곳엔 차로 갈 수 밖에 없

는데 가마솥과 부뚜막 등 옛날 집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는 곳까

지 찾아가는 길이 멀고도 험했다.

시골 어머니들께선 기름을 아끼려고 한겨울에도 냉골에서 작은

전기장판 하나만 깔고 주무신다. 집안이 냉골이니 촬영하는 3~4

시간 동안 추위에 덜덜 떨 수밖에 없다. 그러고 나면 뜨거운 목

욕탕에 들어가 냉기를 빼내야 몸이 좀 괜찮아지고 그렇지 않으면

2~3일 몸이 안 좋다. 허리, 무릎 통증에다 손가락에 퇴행성관절염

이 와서 얼음처럼 차가운 물로 야채를 다듬고 씻을 때 더 붓고 아

프다. 화면에 그런 손가락이 비쳐지는 것도 싫다.

이런 얘기들을 짧게 순서대로 말씀드려야만 섭섭한 마음도 대충

접어주신다.

<시골밥상>을 햇수로 5년 했다. 내가 제일 오랫동안 진행한 TV 프

로그램이다. 워낙 카메라 공포가 심한 나는, 70년대부터 TV 진행자 제

안을 많이 받았지만 고사해 왔다. 라디오에서 하듯 TV에서 그대로 하

면 아주 좋은 진행 흐름일 거라며 많은 PD들이 부추겼으나 그 말들이

공포를 극복하게끔 돕진 못했다. 그러다가 50대 중반, 내가 이것 하나

극복 못하면 무엇 하나 제대로 하겠나 싶어서 카메라 앞에서의 경험을

많이 늘리기로 했다. 자기가 생각한다고 기회가 주어지는 만만한 세상

은 아니지만 TV를 거절만 하던 터라, 수락 쪽으로 태도를 바꾼 것이다.

2005년, 송은이, 박미선, 나 셋이서 대본 없이 수다 떨며 여행을

다닌 <MBC-TV 행복한 수다>는 마니아층이 많은 좋은 프로그램이

었는데, 8개월 하고 잘렸다. 그 후, 곧 다시하자고 했지만 우리 셋이

다 거절했다. (자존심이 있지 잘린 프로그램 받아들이기란, 이 계통

엔 없는 얘기다.) 2007년, 양희은의 <일상탈출>은 문화관광부 후원

으로 여행 친구 한 사람씩을 뽑아 매 주말 우리나라 곳곳을 10개월

간 재미나게 다녔다. 역시 대본은 없었다. 2008년, 양희은의 <시골밥

상>은 대본 없이 5년. 이 세 프로그램 덕분에 카메라 앞에서의 공포

는 거의 사라졌다. 경험만한 스승 없다고, 자꾸 하면 두려움도 사라

진다는 것을 배웠다. 역시 나는 가두어 두기보다는 밖에 풀어 놓고

알아서 하게끔 해야 좀 더 나답게 프로그램에 나온다는 것도 알았

다. 다행이다! 굳어지기 전에 카메라 앞의 공포를 이겨낼 수 있어서!

40주년 기념 앨범 준비의 첫 번째 일은 내 안에 자고 있는 풍부한 감

수성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마치 펌프에 마중물 주듯이. 여러 가지를 재

미나게 하는 중이다. 나이에 맞는 좋은 노래로 인사하겠다. 기대하시라.

양희은의 스튜디오에서

여성시대 진행자 | 양희은

경험만한 스승은 없다

Page 57: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12 스튜디오에서 113

고깃덩어리를 입에 문 강아지가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다가 웬

강아지가 고깃덩어리를 물고 있는 모습에 그것마저 먹고 싶어서 내

놓으라고 컹! 컹! 짖는 바람에 입에 물고 있던 먹이까지 물에 빠트

려 못 먹게 되었다는 이솝우화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고 있다.

“욕심을 내지 말자”, “욕심은 참으로 끝이 없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겠지. 삐딱하게 들여다보는 게 특기인 나는, ‘입에 물고 있던

고깃덩어리를 놓지 않으면 새로운 먹이를 먹을 수 없다’는 이솝우화

의 교훈과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봤다.

동물은 본능과 먹이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 때문에 컹! 하고 짖지

만 우리 인간은 ‘먹이도 떨어뜨리지 않고 다른 먹이까지 먹을 수는 없

을까?’ 별의별 연구를 거듭한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더 갖고 싶

고, 더 먹고 싶고, 끊임없이 소유하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굴리는가.

물론 둘 다 먹을 수도 있겠지만, 둘 다 갖는 데에는 무리가 따른

다. <일과 사랑>이라는 드라마도 있었던가.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일과 치열한 사랑, 그것은 가능했다. 사랑에 빠졌던 때에는 일에

조금 지장은 있었으나 두 가지가 공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일’과 ‘건강’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 나이가 들수

록 더욱 관심이 가는 두 가지이지만 둘 다 갖기는 어려울 것 같다.

요즈음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

2012년 현재 대한민국에는 일이 없어서 애태우는 많은 분들께

죄송하지만 요즘 내 모습은 먹이를 물고 물에 비친 제 모습을 보며

그 고기마저 먹을 수 없을까 고뇌하고 연구하는 형국이다.

작년, 드라마 <웃어라 동해야> 막바지 촬영 즈음에 체력의 한계

가 왔는지 응급실에 실려 가다시피 병원에 갔다. 진찰 결과 입원하

라는 의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드라마를 마무리 지었다. 우리 일이

라는 것이 그렇다. 건강이 무너지든 말든 그것은 단지 개인의 사정

일 뿐, 동정을 받을 수 없다. 아프고 보니 일과 건강을 바꾸는 ‘우’

를 범했다는 걸 알았다. 하기야 내가 하는 일의 성격은 예정된 일

을 모두 끝내야만 귀가(?)가 가능하다. 피곤한 것, 기분이 울적한

것도 일을 멈추는 이유가 될 수 없고 심지어는 가족이 세상을 떠나

는 경우에도 일을 끝내야 가 볼 수밖에 없는 처지이다. 배우의 배

(俳)는 한자 모양대로 ‘인간이 아니다’라는 뜻이라던가.

역설적으로 이솝우화가 떠올랐다. 죽어도 놓을 수 없는 고깃덩

어리이지만 내려놓지 않으면 새로운 먹이를 먹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려놓지 못할 것 같은 그 먹이도 내려놓고자 하면 못 내

려놓을 게 없다. 사는 게 불안해 지금 당장은 입에 문 먹이를 놓기

어렵겠지만, 과감하게 던져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작은 도

전이자 자신에 대한 신뢰의 표현이다. 주변을 돌아보시라. 일과 건

강의 균형을 갖는 것. 그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지금도 많은

분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다.

여성시대 진행자 | 강석우

일과 건강

강석우의 스튜디오에서

Page 58: B ø Ño ä M ¥ ë ~ 04swf.imbc.com/broad/radio/fm/womenera/images4/wom1204.pdf · 디어 쉬는 시간 종이 울리고 학생들이 몰려왔다. 빵을 사려는 학생은 많은데

여성시대114 행복한 책읽기 115

글 | 한창완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MBC ‘라디오북클럽’ 출연)

행복한 책 읽기

조선의 마지막 황녀《덕혜옹주》

해외여행을 가면 문득 스쳐 지나가는 국산 자동차의 상표만 봐도 반갑다. 외국

공항과 광고판에서 국내 대기업의 상표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2002년 월드컵

4강의 기적 앞에서 태극기만 흔들면 박수가 나왔고, 국가대표팀만 보면 고맙고 장

했다. 이것은 소속감으로부터 오는 동료애, 즉 국가라는 존재가 우리의 감성을 하

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우리는 그 국가가 어떤 존재이

며,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산다. 특히, 갑자기

고액의 세금이 부과된 정부의 고지서를 받거나 예비군훈련 통지서를 받을 때마다

“국가가 나한테 해준 게 뭔데, 자꾸 바쁜 사람을 못살게 구나”라는 짜증이 난다. 국

가의 존재가 너무나 당연해 자신을 우선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의 소속감은 중요하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 경

기에서 금메달을 따고서도 일장기를 가슴에 달 수 밖에 없었다. 그가 고개를 제대

로 들지 못하고 1등 시상대에 서 있는 장면은 지금 봐도 가슴이 미어진다.

국가를 잃어버린 역사적 회한이 가슴속에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소설이 있

는데, 바로 권비영의 《덕혜옹주》다. 이 소설은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가 일본제국주의

의 간교한 조선황실 말살정책으로 현대식 황실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일본으로 잡혀

가 보내야 했던 37년간의 비참한 생활, 그 아픈 과거의 시간을 그렸다.

중전의 딸은 공주이지만, 후궁의 딸은 옹주라고 불린다. 고종황제의 마지막 후

궁의 딸, 고종이 가장 사랑해서 일본총독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적에 가까스로

이름을 올렸던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일본 귀족들의 의도적인 따돌림과

비하 속에서도 조선 황녀로서의 귀품과 위엄을 지키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그녀의 죄는 세 가지였다고 한다. 지나치게 영민한 것, 품어서는 안 될 그리움을

품은 것, 조선 마지막 황제의 딸로 태어났던 것. 일본인 혼마 야스코가 남긴 《덕혜

희-이씨 조선 최후의 왕녀》라는 기록 1편 이외에는 전혀 어떠한 기록도 남겨져 있

지 않던 덕혜옹주의 아픈 이야기를 국내 최초로 그려낸 장편 실화소설이 《덕혜옹

주》다. 해방이후 자유당 정권은 왕정복고를 두려워해 왕실 재산을 국유화하고, 왕

족들을 천대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무관심 속에 비참한 일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내야 했던 덕혜옹주는 한 국내 기자의 노력으로 귀국길에 오르게 된다. 이후 국

내에서 마지막 삶을 보내던 덕혜옹주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처럼 죽음에 이르게 되

는 순간, 이렇게 말한다.

“내가 조선의 옹주로서 부족함이 있었더냐? 옹주

의 위엄을 잃은 적이 있었더냐? 나의 마지막 소망은

오로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었느니라.” “나는 낙선재

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

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덕혜옹주의 상실된 자존감과 그로부터 오는 나라

잃은 설움, 그리고 사랑하는 조국땅을 밟고 싶었

던 애절했던 그리움, 하지만 수 십 년 만에 다시

돌아온 궁에서 의연하게 옹주로서의 예의범절을

기억해냈던 영민함은 이 소설을 넘어서는 우리 모

두의 아픔이다. 덕혜옹주의 존재 그 자체, 그 역사

가 우리에게는 국가라는 의미를 잔잔하게 새겨준다.


Recommend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