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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 삼겹살의 보급과 정착€¦ · 립,...

Date post: 19-Oct-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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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k Line_소비정보 2018. 7월호 348 Pork Line_소비정보 ■ 1970년대 수출 상황 문제의 1970년대 수출을 살펴보자. 1972년부터 1977년까지 제법 많은 양의 돈육이 수출 되었다. 69,209천불, 이걸 대충 물량으로 추정해 보면 46 천톤 정도로 6년간 수출되었다. 이때 수출된 돼지고기가 지육이었는지, 1980년대 이후처럼 등심과 안심, 일부 뒷 다리였는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추정해 보면 1975~1977년, 이 무렵부터 등심과 안심만 수출했을 지도 모르겠다. 등심과 안심만 수출하였다고 해도 이 당시 수출은 지 정업체들이 있었고, 수집상이 있었다. 즉 자체 작업장에 서 돼지를 가공처리해서 등심과 안심만 수출용으로 생산 하여 수출하고, 나머지를 수출 잔여육으로 국내 유통시 키는 것보다 일부 중소 육가공업체나 아니, 그 당시는 지 육처리를 정육점에서 주로 하는 지육유통 시대였으니 정 육점을 돌아다니면서 수출 부위를 수집해서 수출하는 업 체가 1990년대 초반까지 있었다. 김 태 경 박사 (주)정록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 삼겹살의 보급과 정착 ☞ 지난호 340쪽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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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rk Line_소비정보

    2018. 7월호348

    Pork Line_소비정보

    ■ 1970년대 수출 상황문제의 1970년대 수출을 살펴보자.1972년부터 1977년까지 제법 많은 양의 돈육이 수출

    되었다. 69,209천불, 이걸 대충 물량으로 추정해 보면 46천톤 정도로 6년간 수출되었다. 이때 수출된 돼지고기가 지육이었는지, 1980년대 이후처럼 등심과 안심, 일부 뒷다리였는지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긍정적으로 추정해 보면 1975~1977년, 이 무렵부터 등심과 안심만 수출했을지도 모르겠다.

    등심과 안심만 수출하였다고 해도 이 당시 수출은 지정업체들이 있었고, 수집상이 있었다. 즉 자체 작업장에서 돼지를 가공처리해서 등심과 안심만 수출용으로 생산하여 수출하고, 나머지를 수출 잔여육으로 국내 유통시키는 것보다 일부 중소 육가공업체나 아니, 그 당시는 지육처리를 정육점에서 주로 하는 지육유통 시대였으니 정육점을 돌아다니면서 수출 부위를 수집해서 수출하는 업체가 1990년대 초반까지 있었다.

    김 태 경 박사(주)정록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 삼겹살의 보급과 정착

    ☞ 지난호 340쪽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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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2018. 7월호 349

    1990년대 브랜드 삼겹살이 유통되기 이전까지 돼지고기는 지금처럼 부위별 유통이 이루어지지 않고 살코기와 비계, 족발 등 부산물로 인식되었다. 소비자들은 정육점에서 “구이용 주세요”, “찌개용 주세요”라고 주문을 하던 시대다. 정육점이 도매시장에서 돼지지육을 사 와서 직접 골발해서 정육을 판매하던 시절이라 삼겹살과 등심이 붙은 등삼겹은 구이용으로, 앞다리와 목심이 붙은 목전지는 찌개용으로 주로 팔렸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부위는 갈비였던 시절이다.

    1970년대에는 생산 측면에도 가구당 한 두 마리를 키우는 부업농이 거의 전부였고, 1979년 이전까지 500두 이상 키우는 농가도 거의 없었던 시절이다. 1979년 총 사육두수가 2,843천두, 사육농가는 758,745개, 농가 호당 3.76두로 1970년 1.27두보다 많이 늘었지만 1979년 500두 이상을 키우는 농가는 147호에서 331천두를 사육하고 있었다.

    대만처럼 일본 자본이 들어와서 형성된 돼지농장은 없었다. 1960년대, 1970년대는 돼지 가격이 폭등과 폭락은 거의 32개월 정도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미국에서는 옥수수 가격이 내려가면 돼지를 많이 키워 돼지 출하시기에 돼지 가격이 하락하는 현상을 ‘콘호그 사이클’이라고 한다. 우리는 옥수수 가격이 아니라 돈가 자체만으로 돈가가 올라가면 겁 없이 너나 없이 돼지를 키워서 다 같은 시기에 출하하게 되어 출하량이 늘어나 가격이 하락하는 호그 사이클이 존재하던 시기다.

    1970~1980년대 축산경영학의 주요 연구 주제가 이 롤러코스터 같은 축산물 가격의 안정화였다.

    1973년에 경기도 용인자연농원 양돈장이 생겨나서 국내 최초의 기업형 돼지농장에서 많은 품종 개량이 이어졌다. 이 당시 전국적으로 사육되던 돼지는 지금과는 다른 요크셔종이 주종이었다. 지금처럼 LYD 한 종으로 거의 통일되

    지 않고, 각자의 농장에서 각자의 사료와 사육 방식으로 여러 종의 다양한 돼지를 키웠다. 거세도 잘 되지 않았고, 사료도 잔반이 많아서 지금 우리가 먹는 돼지고기와는 전혀 다른 맛과 지독한 돼지

    1960년대, 1970년대는 돼지 가격이 폭등과 폭락은

    거의 32개월 정도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1970~1980년대 축산경영학의 주요 연구 주제가

    이 롤러코스터 같은 축산물 가격의 안정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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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rk Line_소비정보

    2018. 7월호350

    냄새가 많이 발생하는 돼지였다.이런 돼지고기는 구이용으로 소금만 쳐서 구워 먹는 것보다 마늘, 생강, 된

    장 등을 넣고 삶아서 먹는 것이 주된 방식이었다.

    ■ 1980년대 수출 상황1980년대 수출을 살펴보자.황교익이 1980년대 초 수출하고 남은 삼겹살을 먹었을 거라고 수요미식회

    에서 했던 말은 1978년부터 1986년까지 거의 수출이 없었으니 말이 안 되는 소리다.

    1978년에는 수출이 없었다. 1979년 324톤, 1980년 252톤. 1981년부터 1983년에는 수출 실적이 없다. 다시 수출이 시작된 1984년 296톤, 1985년 226톤, 1986년 892톤, 1987년 3,161톤. 이때부터 진짜 대일 돈육 수출이 시작된다.

    국제 경쟁력을 가진 유일한 축산물이 돼지고기였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지금도 이 시절 대일 수출을 주도하던 관계자들을 만나면 자신들의 애국적

    행동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난 이들에게서 고기를 배웠다.1980년대 수출단가가 kg당 3불이 넘었고, 냉동 등심과 안심이 수출되었다.그럼 1970년대 후반부터 삼겹살은 수출도 거의 없었는데, 우후죽순처럼 번

    져 나가는 삼겹살집에 누가 고기를 공급해 주었을까? 1979년 돼지 가격이 폭락하자 정부는 롯데, 삼성, 그리고 한냉에 육가공장

    건설을 하게 한다. 롯데는 롯데유업이, 제일제당은 경기도 용인양돈장이 있어서 쉽게 사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롯데는 롯데축산을 만들어 1980년 충북 청주공단 내에 약 130억원의 자금을 투입해 1일 생산량 3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공장을 1980년 8월부터 가동하였다. 제일제당은 75억원을 투자해 1980년 11월부터 제품을 출시하였다.

    제일제당과 롯데햄이 된 롯데축산, 그리고 한냉은 우리나라 돼지고기 부분육 시장의 선도기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1980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부분육 생산공장 시대가 시작된다. 햄·소시지 원료육을 자체 공장에서 지육을 가져다 직접 정형·정육화하기도 하였지만, 놀라운 속도로 햄·소시지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원료육을 가공·생산하는 부분육 공장을 외주화할 수밖에 없었다. 롯데햄과 제일제당의 외주원료육 작업 업체가 1980년대 후반 대일 수출의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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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2018. 7월호 351

    ■ 1990년대 수출 상황전통적으로 푸줏간이라는 정육점에서 지육을 도축장에서 가져다 골반 정형

    하여 고기를 상품화하던 전통적인 방식이 공장에서 정선된 부분육 박스 미트로 유통이 활성화된 건 1990년대 들어서다.

    우리나라 부분육 시장은 1970년대 부산 지역에서 시작된 양고기 보세가공 수출에서 시작된다. 일본의 프리마햄이 한냉 묵호공장에서 냉동 양고기를 보세가공해서 수입해 갔다. 공장식 가공 방법을 모르던 시절이고, 흔히 접해 보지 못한 양고기의 정선 방법에 대해서 일본 기술자들이 한국의 노동자들을 교육했다. 여기서 교육받은 인력들이 롯데햄과 제일제당 등 초기 육가공장 원료처리 부서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일본 기술자들이 동영상까지 상영하면서 교

    육했다는 증언이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부분육 시장이

    형성된 것은 수입 쇠고기 포장육이다. 1978년부터 시작된 수입 쇠고기 포장육 판매는 1981년 돼지고기로 확대되고 제일제당, 롯데햄, 진주햄 등 대기업이 포장육 재고 판매에 참여하게 된다.

    앞서 그 당시 돈가는 폭락과 폭등을 주기적으로 겪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1980년대 역시 그런 주기적인 가격 변화가 있었다. 이에 롯데햄과 제일제당의 경영진들은 원료육 비축 전략을 수립, 가격이 낮은 시점에 최대한 냉동으로 비축하여 싼 가격의 원료육으로 햄·소시지를 만들고자 노력했고, 이 과정에서 원료육 협력업체의 수와 규모가 커졌다.

    1980년대 롯데햄과 제일제당, 그리고 한냉은 일본의 대형 육가공사와 기술 제휴를 하고, 햄·소시지 가공 기술뿐 아니라 원료 처리기술을 도입하였는데, 이때 함께 도입된 것이 원료육 원가 계산 방식이었다.

    햄·소시지를 만드는 육가공장 입장에서는 살코기의 가치가 제일 크다. 소시지는 살코기에 적당량의 지방과 물을 혼합하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햄의 원가 계산식을 도입해서 원가를 계산하던 롯데햄이나 제일제당의 경우, 뒷다리의 가치가 100이면 지방이 많은 삼겹살의 가치가 60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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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rk Line_소비정보

    2018. 7월호352

    이는 지금 시중에서는 뒷다리가 소매가격으로 8,000원, 삼겹살이 20,000원이지만, 그 당시 롯데햄에서는 뒷다리가 10,000원일 때 삼겹살이 6,000원이라는 소리가 된다.

    이렇게 원가가 싸게 책정된 삼겹살로 포장육을 만들었으니 거의 A4, 아니 B5 수준으로 정선된 삼겹살이 포장육으로 값싸게 유통되었다.

    1980년대 초반 수출이 중단되어도 삼겹살을 시장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이 당시부터 서서히 롯데햄과 제일제당, 진주햄, 그리고 남부햄 등과 같은 돼지고기를 주 원료로 햄·소시지를 만드는 육가공장들이 늘었고, 그들 원료육 공급 협력업체에서도 부분육 작업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던 영향이 컸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민 소득이 향상되면서 육류 소비가 늘었으며, 기름기 많은 삼겹살이 맛이 좋아 우리의 입맛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왜 삼겹살에 환장했고, 환장하는가는 다른 측면에서도 더 깊이 생각해 봐야겠지만, 단순히 공급 측면에서 수출 잔여육이었다는 건 1970년대 삼겹살의 시작 시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급격히 활성화되었다는 1980년대 초반은 아니다.

    수출이 없었는데 수출 잔여육이 있었을까?

    ■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이후 상황1980년대 후반과 1990년 이후를 살펴보자.나 자신도 2003년 논문에서 1990년대, 2000년대 초반 생산되고 유통되는

    삼겹살을 수출 잔여육이라고 썼으나 이 표현은 확실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지난 호(6월호 336~340쪽)에서도 아르헨티나에서 쓰레기 갈비로 아사도를

    만들었고, 아사도를 만들던 갈비는 수출 잔여물이라고 했다. 우선 가격이 수출품보다 확실히 저렴해서 경제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또 소 한 마리에서 1997년 축산기술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황소 기준으로 정육이 224.9kg 생산되는데, 이중 갈비는 35.1kg으로 전체 정육 생산량의 15.6%를 차지한다. 따라서 수출된 정육이 갈비 이외의 전 부위라면 약 84.4%인 189.8kg이 수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수출된 물량이 남는 물량보다 많아야 잔여육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우리나라 수출을 살펴보자. 주로 등심, 안심이 주 수출 품목이었다면 역시 1997년 축산기술연구소의 부위별 고기량 자료를 참고하면 전체 거세 돼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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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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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리에서 정육이 47.29kg 생산되는데 수출용 안심 1.02kg, 등심 6.05kg 둘을 합쳐서 7.07kg이면 전체 15%만 수출되고 나머지 85%가 수출 잔여육이라는 개념은 도입할 수 없다. 만약 수출을 했던 15%의 안심과 등심의 이익이 나머지 85%의 고기 전체보다 많았다면 수출 잔여육이라

    는 개념 도입이 가능하겠지만 이 역시 불가능하다.따라서 복합유기 생산체인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

    하는 삼겹, 목심, 갈비는 비싸게 국내 유통을 시키고, 일본 사람들이 좋아하는 안심, 등심 등은 국내 유통시세 보다 조금 더 비싸게 일본에 수출하여 돼지 한 마리 가공 시 이익을 최대화하였다고 봐야 한다.

    물론 부분육 시장의 확대 측면에서 대일 돈육 수출이 기여한 바는 크다.현대적 축산물 종합 처리장인 LPC에 과감한 정부 투자가 가능했던 것과 기

    업의 참여는 수출을 통해 최대의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시장만을 상대로 부분육 시장이 발전했다면 지금과 같은 속도로 돼지고기 부분육 시장이 발전하거나 한돈산업이 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돌아보면 나 자신도 아무런 생각 없이 수출 잔여육이라는 표현을 논문에까지 사용했다. 이는 산업화의 잘못된 시각이라고 반성한다.

    박정희 정권에서 국민교육헌장을 외우고 100억불 수출이 되면 부자가 될 것 같은 환상 속에서 살던 낡은 생각이다.

    1990년대 이후 현대화된 부분육 생산공장의 운영과 대형마트의 등장, 그리고 브랜드 삼겹살의 출현이 삼겹살 소비를 더 부추겼다. 확실한 건 삼겹살이 가장 비싼 돼지고기 부위임에도 가장 좋아하는 부위가 되었다는 것에서 생산 측면이 아니라 소비 측면에서 삼겹살의 인기 비결을 찾아야 할 것 같다.

    맛칼럼니스트 황교익이 삼겹살을 많이 먹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한 적 있다. 2017년 6월 30일 오후에 방송된 tvN ‘알아 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5회에서 경주의 두 번째 이야기가 그려졌다.

    1990년대 이후 현대화된 부분육 생산공장의 운영과대형 마트의 등장, 그리고 브랜드 삼겹살의 출현이삼겹살 소비를 더 부추겼다. 확실한 건 삼겹살이 가장 비싼 돼지고기 부위임에도가장 좋아하는 부위가 되었다는 것에서생산 측면이 아니라 소비 측면에서삼겹살의 인기 비결을 찾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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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경주에서 아침으로 베이컨을 먹던 중 김영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삼겹살을 좋아하나”라고 물었다.

    이에 황교익은 “불행한 역사가 있다. 대규모 양돈산업은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 일본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고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돼지를 키워야 했다. 그런데 돼지를 키우는 것은 배변물 처리가 문제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키우게 한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자기들은 안심, 등심을 가져가고 우리한테는 삼겹살, 내장, 발, 껍데기 등을 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방송을 보면서 논리와 과학적 근거를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2000년대까지의 대일 수출과 우리 한돈산업의 부분육 시장 전개에 대해서 조사해 보았다. 일부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겠지만, 불행한 역사라고 하기에는 그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삼겹살을 좋아한 건 공급 측면에서 공급이 되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맛이 없었다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아니 아직까지 삼겹살을 좋아하고 있을까?

    일본이 고도성장을 하면서 3D 업종인 양돈산업에 인력난 등으로 대만에 자신들의 양돈기지를 만든 건 사실이다. 일본은 일제강점기에 대만과 한국을 자신들의 쌀 공급기지화했었던 것처럼 하려고 했다. 그러나 농업 발전보다 공업화에 전념했던 한국을 자신들의 돼지 공급 기지화할 수 없었던 여러 이유 때문에 일본 자본이 한국에 들어와 우리 한돈산업에 투입된 것은 재일교포 자본으로 만들어진 남부햄 한 곳밖에 없고, 이곳 역시 대만의 투자와 성격이 매우 다르다.

    ■ 삼겹살의 보급과 정착결론적으로 압축성장한 산업화 속에서 육류의 안정적 공급이 국가적인 문제였

    다. 쇠고기를 미치게 좋아하는 우리지만 해방 후 역우인 한우를 잡아 국민들이 원하는 만큼의 육류 공급은 불가능했다. 대안으로 찾은 것이 돼지고기와 닭고기였다. 닭고기는 치킨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육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돼지고기는 사실 우리 민족이 안 좋아하던 고기다. 사육 환경이 불량하여 냄새가 심하게 났으며, 지금의 돼지고기와는 많이 다른 고기다.

    1970년대 이전까지는 돼지는 채비 동물로 농가에서 한 두마리 키우고 서울 인근, 특히 지금의 일산 지역에서 서울시 음식점에서 나오는 잔반으로 키워져 독산동 도축장이나 마장동 도축장에서 도축되어 서울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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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삼겹살 유행의 단서를 찾아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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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잔반만으로 돼지를 키우기에는 경제가 너무 빨리 성장하고, 육류에 대한 욕구가 점점 커졌다. 사료 곡물을 수입해 돼지를 사료로 키우기 시작하면서 고기의 맛이 많이 개선되었다. 이때부터 돼지를 그냥 불판에 구워 소금에 찍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즈음 프로판 가스의 보급이 활발해져 로스구이집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로스구이 형태인 삼겹살집이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우리에게 사랑받기 시작한 것이다.

    IMF 이후 쇠고기 로스구이집들은 급격히 자취를 감추고, 값싼 수입 삼겹살을 구워서 파는 삼겹살집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봐야겠다.

    난 일본의 돈가스, 비프가스와 한국의 치킨과 삼겹살이 상당히 닮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1200년 동안 고기를 먹지 않았던 일본인들에게 고기란 낯선 식재료였을 것이다. 그걸 자신들의 식습관에 최적화시킨 음식이 기름에 튀긴 돈가스와 비프가스다.

    한국 역시 닭은 계란을 공급해 주는 귀한 가축으로 고기를 먹을 일이 없고, 오래 키워 질겨진 고기를 부드럽게 해 먹는 방법은 백숙처럼 오랜 시간 삶아 먹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양계가 급격히 확장되면서 어린 닭은 우리 입맛에 딱 맞지는 않았을 거다. 그걸 개선하기 위해서 우리는 닭을 기름에 튀겼다. 튀겨서 맛없는 것이 있을까?

    돼지는 잔반이나 변을 처리하는 청소 동물, 퇴비를 생산하는 채비 동물로 키웠고, 고기가 쉽게 상하니 마을 잔치 때 사람들이 모여 된장 풀고, 마늘, 생강 넣어서 삶아 먹거나 버크셔의 감칠맛 나는 국물의 국밥 한 그릇 먹는 것이 다였다. 조선시대 재래종은 30~40kg이니 작아서 집집마다 한 마리 정도 키울 수 있었다. 이게 버크셔랑 교배하여 일제강점기에는 70~80kg까지 크더니 일제강점기 말부터는 흰 요크셔를 새끼수가 많다고 키우라고 해서 키웠다.

    육수맛이 예전 같지 않아 고추장 듬뿍 넣고 생강, 마늘 양념 진하게 해서 두루치기로 먹었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전업농으로 키우는 농가들이 늘어나 수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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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료를 먹였더니, 살코기는 맛이 예전만 못해서 인기가 없는데, 그나마 지방이 많은 삼겹살은 구운 건지 튀긴 건지 몰라도 고소하니 먹을 만했다. 그래서 그냥 삼겹살 튀긴 건지, 구운 건지 모르게 아직 먹고 있는 거다. 양반들이 먹던 고급술이었던 소주가 싸게 나왔는데, 이게 막걸리보다 독했다. 막걸리는 김치랑 두부만으로도 좋은 안주인데 독한 소주는 기름기 진한 삼겹살이 딱이지 않았을까?

    ◇ … ◇ … ◇ … ◇

    요즘 세상이 좋아져 근대 100년의 신문을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돼지고기 일본 수출이 궁금해서 찾아보니 1960년대부터 돼지고기 이야기가

    많이 보이기 시작하는데, 좀 웃긴 것이 수출 상담만 해도 신문에 난다. 계획만 해도 신문에 난다. 역시 박정희 정부는 수출에 목숨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수출하려고 하면 돼지값이 뛴다. 그래서 수출은 하지도 못했다. 그건 신문에 잘 안 보인다.

    수출양돈단지도 계획만 수없이 발표했으며, 하나 만들고는 제대로 운영을 못했다. 뭐 다 국민들 보여 주기를 위한 기사들이다.

    이런 기사들은 통계자료와 하나하나 실행된 걸 확인해야 한다. 그 결과들을 가지고 이 글을 썼다.

    나 자신도 산업화 시대를 살았다. 그리고 그 산업화의 수출 신화를 아직도 믿고 있는지 모르겠다. 삼겹살에 대한 지나친 선호가 우리 한돈산업에는 방해가 된다. 그래서 다수의 육가공장이 어려워지고, 시장은 점점 몇몇 기업에 의해 과점화되고 있다.

    삼겹살의 인기를 생산 측면에서 강력히 이야기했던 수출 잔여육설은 영향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도 없다. 육가공업체 공급설도 일부다.

    프로판 가스 도입을 통한 편리성도 일부고, 대형마트의 마케팅 설도 일부다. 삼겹살의 인기를 소비 측면에서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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